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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은 만큼 값하기

  • 입력 2013.09.2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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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인 ‘페인트 최’는 고향이 서울로 울진에서 15년간 생활했다. 현재 서울에 거주하며 한국미협·도무스·예형회 회원 등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 lomo / 이명동기자]
  
불과 며칠 전까지도 불구덩이 같던 한 여름의 여열이 감돌았는데, 어느 새 가을이 큰 걸음으로 뛰어와 옆에 서 있다. 한껏 높아진 하늘엔 바람이 불때마다 나부껴 흩날릴 것 같은 새털구름이 가득 떠 있다.
  
가을은 지난 여름의 수고로움이 영글어 충만함을 주는 계절이고, 채워지면 비어야 하는 계절이다.
  
얼마나 잘 비우냐는 얼마나 잘 채우고 있는지가 중요하겠지. 버스 차창 밖의 들과 밭을 보노라니, 저 땅 덩어리조차 많이 비울수록 많이 가지는 거니까. 
  
사람들은 마음 밭을 잘 갈아 끊임없이 비우면 끊임없이 거둘게 많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한 번이라도 더 그런 생각을 키우게 되는 계절이 가을이 아닌가 한다.
  
거두고 채우기만 하는 계절이 아니라,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알맞게 멈추고 아낌없이 놓기를 잘 해야 하는 계절이다. 설익은 뭔가를 잘 익게 하지만, 잘 익은 뭔가를 편안하게 떨어뜨리는 계절이다. 가을은.
  
친구와 약속한 장소에 내리려고 좌석에서 일어서면서 더 생각하고 싶은 가을이 끊겼다.
  
나 보고 시간을 비어놓으라고 한 날. 맛있는 것도 사주고, 가보고 싶은 곳을 데려다 주고, 온전히 하루를 할애한 친구. 얼마나 바쁘고 귀한 시간을 쪼개어 함께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수 가지의 농작물을 키우느라 밭에 물주고 풀 뽑고, 초보 농사꾼의 시간 관리는 혀를 내두를 정도라 할까. 철저하고 부지런함 그것이다. 
  
그 와중의 하루는 내겐 너무 큰 선물이다. 농사지은 감자 상자와 모시 떡에 개똥쑥 말린 거도 너무 고맙고 행복하지만, 못난 친구 생일이라고 말이다.
  
오랜만에 만나 물꼬가 트듯 입이 트여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어 대는 나를 보는 친구의 안색이 점점 불편해지는 걸 느낀다.
  
너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내가 못마땅하다고 지적한다. 누군가의 단점과 약점과 실수, 흉을 봐서가 아니라 왜 제3자의 이야기를 병아리마냥 삐악거리고 있냐고 침을 놓는다. 사뭇 싫다는 것이다. 
  
설익은 것을 잘 익게 하는 가을을 수 십 번이나 지나 왔으면서도 잘 익어 본적이 한 번도 없는 것처럼 한 알의 사과만도 못한 거시기. 그런 기분이 드는 나의 실수였다. 적어도 남의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싫어하는 내 친구 앞에서는 말이다. 
  
너와 나의 이야기가 사라지는 게 싫다는 친구 앞에서도, 어떤 이유도 갖다 붙이지 못한 채 내 자신에게도 바로 용서를 구했다.
  
과거에 있었던 두 가지 좋은 일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세 가지 좋은 일보다, 지금 한 가지 일이 낫다는 말이 있다.
  
항상 지금에 충실하고 싶고, 이 귀한 시간에 남의 이야기로 쫑알거리기엔 시간이 아깝다고 했다. 그것은 잘 익은 과실을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짓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걸 몰라서가 아니라 마음공부 따로, 머리 따로, 주둥아리 따로, 조금만 방심하면 그렇게 따로 뛰어노는 내가 문제가 많다.
  
다음에 만나면 우리들의 이야기를 많이 하자 꾸나. 또 한 번의 가을 먹는 값을 할게. 익은 과실을 편안하게 떨어뜨리고, 다음 계절을 생각 할게. 실수를 용서한 경험을 잊지 않을게. 시간을 먹은 만큼 많이 먹은 값을 하는 사람이 꼭 될게.
  
친구야 너는 영혼이 부자다. 그 때 하지 못한 말이란다.
가을은... 가을은... 먹을 게 많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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