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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우영 대표, 아사한 저염 김치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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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6.0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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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생초와 함께 새로운 인생 열어


내가 야생초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내 속의 만(慢)을 다스리고자 하는 뜻도 숨어 있다.

인간의 손때가 묻은 관상용 화초에서 느껴지는 화려함이나 교만이 야생초에는 없기 때문이지 아무리 화사한 꽃을 피우는 야생초라 할지라도 가만히 십 분만 들여다보면 그렇게 소박해 보일 수가 없다.

자연 속에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있을지언정 남을 우습게 보는 교만은 없거든 우리 인간만이 생존경쟁을 넘어서서 남을 무시하고 제 잘난 맛에 빠져 자연의 향기를 잃고 있다.

남과 나를 비교하여 나만이 옳고 잘 낫다며 뻐기는 인간들은 크건 작건 못생겼건 잘생겼건 타고난 제 모습의 꽃만 피워내는 야생초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많다.
                                      황대권 작가가 쓴 야생초 편지中에서

세계최초로 김치 나트륨 저감화에 성공해 NHK WORLD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소개된 울진군 마을기업인 ‘유한회사 야생초’ 남우영(42세) 대표를 찾았다. 마침 전날이 아버지 기일이라 3형제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늦은 밤까지 회포를 풀었다며 조금은 피곤한 몸이지만 환한 표정을 지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개성이 강한 형제들

남우영 대표의 남자 형제들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남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내력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할아버지(故 남일만)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당신도 어렵고 가난한 시절을 보내면서도 봄철 보릿고개가 되면 죽변 바닷가 모래사장에 큰 솥을 걸고 죽을 끓여 이웃과 나누어 먹곤 했다던 할아버지의 성품에 대해 동네 분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남 대표의 아버지(故 남정)도 남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기에 그가 췌장암으로 작고하였을 때, 전국 각지에서 천여 명의 조문객이 찾아오기도 했었다. 이런 집안 내력 때문인지 그도 자연스레 어릴 적부터 사회적 문제에 대한 고민이나 자연의 무한 가치와 소중함을 배워서 그런지 저염 김치를 만드는 작업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3남 2녀 중에 막내인 남 대표는 제일 큰형인 남상민(49. 유엔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 동북아사무소 부소장) 박사를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믿고 대화할 수 있는 멘토가 되어 주는 친구같은 고마운 형이라 했다.



대학에서 회계학과를 졸업한 큰형은 어려운 여러 가지 여건들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깊은 관심을 가졌던 환경학 공부를 위해 호주로 유학해 3년이란 짧은 기간에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버거운 책임감을 느꼈지만, 어느 겨울밤 동생들과 눈 속 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을 토로하며 전공을 바꾼 형은 환경과 관련한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등 그 행보가 남달랐다고 했다.

둘째 형인 남우준(45. IT 특급기술사)는 한국과학기술대학(KAIST)에서 화학과를 전공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소프트웨어 개발을 매우 좋아해 87년도엔 독학으로 전국 컴퓨터 경진 대회에서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었다.

컴퓨터 관련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둘째 형은 대학 졸업 후 화학이 아닌 IT분야에 뛰어들어 철도청, 한화증권, 한국중부발전, 기아자동차, LG전자, 삼성전자, SK, KT, 통일연구원 등 다양한 기관의 시스템 개발에 매진했다.



“손재주가 많은 우준 형은 어린 시절부터 막내인 제가 실수를 하면 조용히 문제를 해결해주던 다정다감한 형이다.”며, “중학생 시절 저를 컴퓨터 세계로 이끌어 주었으며, 지금은 IT분야에서 프리랜서 특급 기술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막내인 남우영 대표는 대학 전공과 상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형들을 통해 꿈을 꾸고 꿈을 실현해 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대학교수로 사회에 첫 발을...

남 대표는 92학번이지만 아직 대학 재학 중이다. 그는 금오공대 컴퓨터공학과 4학년 재학 중 한국폴리텍대학 교수채용 시험에 합격하면서 대학을 채 졸업하기도 전에 강단에 서게 됐다. 강의 능력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시험방식 덕분이었다.

1999년부터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가르치게 된 남 대표는 동료 교수들보다 학력이나 경력 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열정과 강의 능력은 뒤지지 않았다. 잠자는 시간과 휴식 시간을 줄여가며 강의 준비에 매달렸다.

그의 강의가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주말이면 여러 기업체의에서의 특강도 줄을 이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그는 지역 가출 청소년의 상담과 멘토링 지도 활동과 생활지원에도 최선을 다하며 생활했다.

그렇게 3년이 흐르며 대학에서 유능한 교수로 인정을 받기 시작할 때쯤, 남 대표는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다. 퇴근 중 쓰러진 남 대표는 3일 만에야 깨어났고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진을 받았지만, 몸에 특별한 문제를 찾을 순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고, 얼마 후에는 강단에 오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그 당시 그는 앞만 보고 달리는 사회생활에 회의감이 들었고, 자신이 가진 모든 짐을 내려놓고 무조건 쉬고 싶었다. 대학에 사직서를 내고 여행을 다니면서 그는 건강과 밀접한 친환경 식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삶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 조금씩 건강이 회복되었고, 이후 노동부 산하의 실직자 대상 전문교육 기관에 초빙교수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실직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컴퓨터 관련 직무 ‘사회화 과정’ 수업을 담당했다.

수업을 통해 만난 사람들 중에는 무모한 창업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경험 미숙에 따른 실패로 힘들어하는 것을 마음 아파했던 남 대표는 교수 생활을 통해 모은 1억 원을 기부해 실직자들이 창업 관련해 실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녹색가게 신시’ 회생에 총력

2003년, 실직자 교육이 끝나고 창업 실습을 하던 이들도 성공적으로 사회에 복귀시킨 뒤, 남 대표는 텅 빈 실습장을 개조해 컴퓨터 사업을 시작했다. 교수 생활을 하다가 사업을 하려니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창업 3년 만에 사업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렇게 사업을 안정화시키고 잠시 고향 울진에서 휴양을 하던 남 대표에게 큰형과 함께 환경운동을 주도했고 배달녹색연합 대표였던 인사로부터 친환경관련 상품을 유통시키는 ‘유기농 신시’가 프랜차이즈 영업 실패로 회사가 부도위기에 직면했다며 도움을 요청받았다.

그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남 대표의 인생은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사업체를 직원들에게 맡기고 ‘유기농 녹색가게 신시’ 회생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잠시 회생 작업을 도울 생각으로 별다른 준비 없이 서울로 올라갔지만 회사가 처한 문제는 예상외로 심각했다.

그는 주 120시간이 넘도록 회사 창고에서 먹고 자며 경영 위기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그 일에 투입했다. 그 작업이 길어지면서 결국 자신의 사업체는 정리해야 했지만, 그는 자기 한 사람 희생으로 친환경 사업을 하던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기에 후회는 없었다.

그러한 노력 덕분인지 회사는 1년 6개월 만에 125개 매장에서 450억원 매출에 순이익 15%를 올리는 업체가 되었고, 3명에 불과하던 직원 수도 60명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기업이 회생하고 커지자 회사의 대표는 섣부르게 외부에서 고위 간부들을 영입하기 시작했고, 남 대표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유기농과 친환경에 눈을 떠

성장과 안정에 집중하던 회사의 분위기는 점점 퇴색했고, 영입된 사람들은 자신의 밥그릇을 챙기는데 급급했다. ‘신시 영농법인’이란 급조된 회사로 발령받으면서 애사심이 사라진 남 대표는 프랑스로 장기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그곳에 머물며 유기농 식품에 관한 조사와 실태를 파악하면서 좀 더 다양한 분야까지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한 경험이 친환경과 농민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이해하데 도움이 되었다.

남 대표가 멘토로 모시는 정농회 정경식 선생과 우리나라에 친환경 제도를 처음 도입한 前 농림부장관 출신인 김성훈 총장을 통해 이 땅을 살리는 방법으로 유기농법과 친환경 생활에 대해 받은 가르침은 그의 삶에 또 다른 주요 지표가 되었다고 한다.

친환경을 바탕으로 그는 ‘못난이 과일’ 사먹기 운동을 기획해 태풍 등으로 낙과된 과수판매를 돕는 소비자 운동을 전개해 어려움에 처한 농가들을 돕기도 했고, 그린산악회를 조직해 모델 및 연예인들과 친환경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SAVE OURS 캠페인’을 통해 탈레반에 억류된 한국인들의 구조 호소활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시한부 생명 선고 받은 어머니

기업 활동보다 사회 참여 활동을 넓혀 가던 중 2009년 연말 휴가차 찾아온 고향집에서 홀로 계신 어머니가 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종합병원으로 후송해 정밀진단을 받아보니 이미 당뇨, 고혈압, 심장비대증, 척추측만증, 동맥경화 등이 너무 악화되어 치료시기를 놓쳤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담당 의사는 약 3개월 정도 밖에 살 수 없을 것이라며, 진통제 이외엔 병원에서는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환자를 집으로 모시고 가라고 했다. 마침 연말이라 타지에서 다 내려온 가족들은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듣고 모두들 깊은 시름에 빠졌다.

불과 2년 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처럼 또다시 어머니를 보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특히 막내인 남 대표는 병원에서 치료가 안 된다면 식이요법으로 어머니를 치료하겠다며, ‘유기농 신시’에서 부사장으로 승진 발령이 결정된 상태였지만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귀향을 결정했다.

처음엔 약물에 의한 통증치료와 별도로 족욕과 마사지, 차요법을 통한 몸 살리기, 샐러드 등을 통한 식이요법 등 단계별로 지인들의 조언과 책을 보며 공부하여 어머니를 보살폈다. “때론 어머니가 음식을 거부하였지만 꾸준한 설득과 노력으로 보살핀 결과, 병세가 조금씩 좋아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저염김치 연구에 몰입
  
남 대표는 어머니가 음식을 드시면서 “시골 노인이 김치에 밥만 있으면 되지”라고 말씀을 자주 하셨다. 김치를 먹고 싶어하는 어머니를 위해 소금(나트륨)이 들어가지 않은 김치를 만들 수 없을까 고민에 빠졌다. 그는 곧바로 거미줄이 켜켜이 처져있던 농가창고를 개조하고 현미경 등 실험 장비를 구입해 연구에 들어갔다고 했다.

어머니를 돌보는 일 이외엔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면서 밤새 연구 활동을 하며 부스스한 모습으로 주변 산천을 누비며 야생초를 채취하고 맛보고 화학반응 실험을 하다 보니 이웃 주민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눈만 뜨면 산에 오르고 풀이랑 흙을 듬뿍 담아오는 제 모습을 동네 분들이 보기엔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어쩜 당연하다”며, “그만큼 간절하게 연구에 몰입했기에 저염 김치를 만들 수 있었다”고 남 대표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웃는다.

각고의 노력으로 8개월 만에 저염김치를 개발했지만, 너무 싱거워 정작 어머니는 먹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후배인 포항공대 손규용 박사(과정)에게 도움을 청해 해외 논문을 비교 연구하며 맛 기술을 개발하여, 연구 2년 차에 소금 없이도 맛있는 저염김치 개발에 성공했다.

이렇게 개발된 김치에다 어머니 건강에 필요한 각종 버섯과 야생초를 첨가시켜 김치를 만들어 드렸고, 그 김치를 맛있게 드시면서 어머니의 건강은 눈에 띄게 좋아져 병원에서 3개월을 넘길 수 없다고 했던 말들이 거짓말처럼 변했고 지금은 매우 건강한 모습을 되찾으셨다.  
  


저염김치 특허 등록과 공장 설립
  
어머니 밥상에 올려보겠다고 시작한 ‘착한 저염 김치’는 2012년 매우 이례적으로 출원 3개월 만에 특허가 등록되었고, 그가 만든 맛-향-질감에 따른 미각 매커니즘과 추가 연구도 손규용 박사(과정)과 함께 논문과 추가 특허들로 진행되고 있고, 식약처를 비롯하여 경북대와 세계김치연구소도 이 연구 활동을 매우 주목하고 있다. 

염도가 낮은 김치에 대한 평가는 삼성, 포스코와 같은 대기업과 백화점, 국내외 주요 방송사에서의 취재 활동과 한국, 일본, 미국, 프랑스, 터키 등에서 만난 4000여명의 소비자 반응을 통해 검증받았다. 아사한 착한 저염김치를 맛본 사람들은 모두 환호했지만, ‘저염김치’ 생산공장을 세우려니 자금이 부족해 마음고생도 매우 심했다고 한다.

남 대표는 “노력하는 자에게는 문이 열려 있더라고요, 다양한 방법을 간구하다가 마을기업 사업비 공모에 응모해 8천만원을 지원받았다”며, 또한 “벤처기업으로 등록되면서 또 1억 원을 추가 지원받아 2012년 ‘유한회사 야생초’라는 이름으로 법인과 공장을 설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그리고도 부족한 자금은 신용보증기금 1억원과 담보대출 1억원을 받았고, 자신과 이사들이  강의 활동 등을 하며 3억 원을 모아 투자해 추가 설비와 부족한 부지 등을 매입해 ‘아사한 0.7 저염김치’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2013년 8월 8명으로 생산을 시작한 ‘아사한 저염김치’는 처음엔 기존 김치와 다른 제조 공정으로 문제도 많았지만, 점차 품질이 안정화되면서 대한민국 지방자치박람회와 대만민국 지역 희망박람회에서 안전행정부와 경상북도 대표 상품으로 전시되면서 많은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국민의 입맛을 넘어 세계인의 입맛 잡자

소금 대신 야생초의 유산균으로 발효시켜 저나트륨과 저염소, 고칼슘 김치를 제조하는 방법으로 2013년 5월 국내외 특허 등록 및 출원된 저염 기능성 김치인 ‘아사한 0.7 저염김치’는 삼성전자와 2천만원대의 납품계약을 맺었고 현대·롯데·신세계·갤러리아 백화점과 GS샵 등 인터넷 식자재 전문쇼핑몰에 각각 납품하는 등 대박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울진에서 생산되는 무와 배추 등 원재료와 고추, 마늘, 매실, 허브식물, 버섯 등 기타 부재료와 꽁치를 이용해 식품업계에서는 최초로 유일하게 저염도 김치 제조에 성공했다며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유한회사 야생초는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공장 증설 작업에 여념이 없다.

남 대표는 “김치 재료 농산물을 계약 재배해 지역농가에 안정적인 소득을 제공하고 지역의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 것”이며, “내 고향 울진에서 생산된 김치가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명성을 올리는데 더욱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남 대표의 제품은 ‘아사한’이란 브랜드로 팔리고 있다. 남 대표가 만든 아사한 브랜드는 순우리말로 새로운 한식을 뜻한다고 한다. 이제 브랜드 이름처럼 더욱 건강하고 완전한 저염 유산균 발효 식품으로 세계 시장에서 한식을 빛내는 기업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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