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집온 지 14년, 이젠 저도 한국 아줌마에요...

안녕하세요~ 주차권을 뽑아 주세요! 라며 군청 주차장을 이용하려면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있다.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마이라 도밍고(47세)씨이다.
유창한 한국말과 친절함이 몸에 배어있는 도밍고 씨는 군청을 찾아온 민원인들을 하루에 몇 번을 만나도 늘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주차장 매표소는 1평도 채 안 되는 작은 공간이지만 그녀는 그 어떤 사무실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꼬박 9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쉴 새 없이 들어오던 자동차도 때론 적당히 한가한 시간을 허락하는 등 그녀 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고 무엇보다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어 제일 편하다며 환하게 웃는다. 하지만 이내 농담이라고 손사래를 친다.

도밍고, 필리핀 루손 섬 누에바에시하 출신
도밍고씨는 필리핀 루손 섬에 있는 중부 루손 지방에 속한 누에바에시하 주(Nueva Ecija)에서 태어났다. 오빠 두 명, 언니 하나에 여동생 하나, 2남 3녀 중 넷째이다. 한국으로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몇 년 뒤에 어머니마저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실 때는 필리핀에 가서 곁을 지켜드렸지만,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가보지 못한 것이 지금도 제일 가슴 아프다”고 도밍고 씨는 말했다. 누에바에시하 시내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친정집은 오빠들이 농사를 짓고 살며,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다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도밍고씨는 모국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도시에서 직장을 구해 일했지만 집값을 주고 나면, 손에 들어오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저임금에 열악한 근무 조건은 그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고향 집에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고 살았다.

통일교 주선으로 여동생 결혼
1994년도 통일교에서 주선해줘 2살 어린 여동생이 먼저 한국 남자랑 결혼을 했다. 그러나 도밍고 씨는 결혼에 대한 조급함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을까? 더더욱 작은 동네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그녀는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시간도 없었다고 했다.
필리핀 여성들은 20~23세가 결혼 적령기이다. 서른 살을 훌쩍 넘긴 노처녀가 시집도 가지 않고 집안 살림에만 매달려 있는 것을 도밍고씨의 부모님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여동생이 한국으로 시집간 이후 통일교 관계자가 자주 친정집을 드나들었다. 동생 안부도 전해주는 등 꾸준한 관계를 유지하며 결혼 의사를 타진해 왔다.
도밍고씨는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그 사람으로부터 풍겨져 나오는 느낌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다. 그리고 그 느낌은 그 사람의 눈빛에 의해 크게 좌우한다고 믿었다. 100%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은 눈빛에서 그 사람의 인성이 보인다고 생각하기에 맞선을 통해 한두 번 만난 사람을 배후자로 선택하는 것이 그녀는 너무 싫었다고 했다.
부모님의 간곡한 설득과 한국에 있는 여동생에 대한 그리움이 어느 날 밀려왔다. 나이도 나이지만 부모님 밑에서 생활하는 것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으며, 통일교 관계자와 오랜 교감이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33세 노처녀, 한국 남자와 결혼
2000년도 3월 합동결혼식을 통해 지금의 남편 박종기(53세, 북면 부구3리)씨와 결혼했다. “착하고 선하게 생긴 종기씨는 맞선 자리의 그 많은 사람 중에서도 내 마음을 설레게 했어요,” “이 사람이 내 남자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종기 씨도 나중에 제가 물어보니 내 마음과 똑같았다고 말해놓고 얼굴이 빨개지던 그 모습은 지금도 가슴이 찡하다.”고 했다.
처음 한국에 와서 북면 부구리 일명 ‘가는골’이란 동네에 주변 이웃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는 독가촌이 시댁이었다. 가족들 이외에는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으며, 더욱 힘든 것은 가족들과의 의사소통이었다. 간단한 한국말 몇 마디 밖에 할 줄 모르는 도밍고 씨는 남편은 물론 시부모님과도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다문화센터 등 기관에서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곳이 많이 있지만, 그때는 배울 곳이 없었다.”며, “결혼한 지 7년이 지나서 겨우 자연스런 의사소통이 가능했으니 그 시절 답답함은 어찌 말로 다 표현 하겠냐”며 웃는다.
실지로 남편과 말이 통하지 않아 생긴 크고 작은 에피소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만한 일들은 가족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는 사소한 문제라 생각하고 이해하며 살면 되잖아요.”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피부색과 생김새가 다르다고 이방인으로 취급하고, 때로는 무시하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이
었어요.”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고, 이해득실을 따지는 일에는 늘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는 피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점점 외톨이가 되었다고 했다.
“외로운 감정을 표현하고 마음껏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주변에 친구가 없었어요.” 필리핀에서는 사랑받는 딸로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고 지역에서 인정받는 사람으로 살았지만, 한국 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다정한 남편이 있어 힘든 시절 이겨내...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랑으로 품어주고 따뜻하게 안아준 남편이 있었기에 그 어려운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고 했다. 김치, 된장, 회 등 음식이 필리핀이랑 너무나 달라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생할 때 먼 길을 걸어서 빵과 우유를 시부모님 모르게 사다줄 때는 눈물이 나서 입으로 먹었는지 코로 먹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고 했다.
아들 현철(초등학교 6학년)이 어느덧 어린이집을 보내야 할 나이가 되었을 때 도밍고씨는 자기가 받은 고통이 아이에게도 이어지지 않을까 고민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순수한 아이들은 친구를 사귈 때 조건을 따지지 않고 같은 반 친구로 잘 대해주었다.
가족 이외에는 친구가 없었던 현철이는 어린이집 가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고 했다. 또래 친구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공부하고 노는 것이 얼마나 재미가 있었을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이에게 한국 엄마들처럼 마음껏 해주지 못한 것이 가슴 아팠다고 했다.
현철이가 학교에서 가정통신문, 숙제 등을 가지고 왔을 때 한글이 익숙하지 못한 엄마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에겐 미안했지만 한글 공부를 같이 했어요.” “엄마의 능력이 부족하니 뾰족한 방법이 없었지만 그 덕에 한글 공부를 나름 열심히 했지요.”

안정된 직장에서 일하고 싶어...
도밍고씨는 한국말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사라지니 직장 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주여성들에게는 직장 문턱이 높았으며, 그나마 단순한 노동력을 요하는 일들밖에 없었다. 다행히 지인의 소개로 초등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고 한글도 배울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구하게 되었다.
“입소문을 타고 초등학교에서 영어 강사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의가 들어왔어요.” “내 아이를 가르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가르쳤고 울진군청소년아카데미에서도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죠.” “집안 사정으로 지속적으로 하지 못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지금도 일반 기업체에서 영어 번역과 통역에 관한 일들이 가끔 들어오면 아르바이트 식으로 해주고 있다. 지금 하는 주차장 관리 일도 9월이면 그만두어야 한다. “비정규직과 관련해 한국법이 그렇다고 하네요.”라며 말을 끝내고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현철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가 사는 동네에 눈이 엄청 많이 내려 2~3일을 꼼짝하지 못하고 집안에 갇혀 있었어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눈이 너무 신기하고 좋았는데 그때 이후로는 눈이 내리면 걱정이 앞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깝고도 먼 필리핀
필리핀에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는데 한국은 내일을 준비하지 않으면 살아가는 삶이 너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도밍고씨는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컴퓨터, 음식 만들기, 한글 등 다문화센터에서 교육이 있는 날이면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 한다.
다문화가족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져 사회생활하는 것도 큰 불편함이 없다고 했다. 한국음식도 이젠 못 먹는 것이 없을 정도로 한국 사람이 다 되었다. 그러나 가끔 언론을 통해 필리핀에 관한 뉴스를 접하게 되면 시선을 떼지 못한다.
작년 10월경 도밍고씨의 고향동네에 몰아친 태풍으로 최소 9명이 숨지고 7명이 실종되고 대규모 정전으로 현지 가족들과 연락이 되지 않아 마음고생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행히 가족들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늘 건강한 모습으로 잘 지내고 있기를 기도한다.
비행기를 타면 5~6시간 정도 걸리는 가깝고도 먼 필리핀 땅이지만 지금껏 4번밖에 가보지 못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사무침이 깊어지면 바닷가를 찾는다. 고향 바다와 비슷하기도 하지만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했다.

14년 차 한국 아줌마!
이제 14년 차 한국 아줌마로 농사도 제법 잘 짓는다. 고추, 감자는 기본적이고 벼농사도 제법 잘한다. 한국에 와서 운전면허증도 획득했으니, 조만간 트랙터 운전에도 도전해 볼 작정이라고 했다. 자신의 역량을 계발하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 한국은 좋은 나라인 것 같다고 했다.
한국에 시집와 행복한 가정을 이뤄 사는 것을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충남 당진에 살고 있는 여동생도 지난달에 만나고 오는 등 가끔 볼 수 있고 편하게 통화할 수 있어 너무 좋다고 말하는 도밍고 씨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그동안 술 많이 먹는다고 남편에게 잔소리를 많이 했어요.” 오늘은 퇴근해 남편이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맛있게 끓여드리면서 반주로 딱 한 잔만 드시라고 말해야겠다는 도밍고씨는 세상에서 종기씨가 제일 멋진 남자라고 말한다.
말수가 적지만 가끔 툭툭 던지는 말 한마디에 정이 있고 멀리서 시집온 아내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종기씨를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도밍고 씨는 말한다.
행복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사는 도밍고 씨의 가정에 늘 축복이 가득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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