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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농수산물로 행복한 밥상 차리자 '황소농원 대표 이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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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0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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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펼쳐진 소나무와 각종 과실수뿐 아니라 닭장 속에 있는 어린 닭들과 곤충 배양관에서 ‘동애등애’라는 유충들이 자라고 있다.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만든 것도 불과 몇 해 전 일이지만, 오지 농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곡식은 농민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며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이종은(52)씨는 하루해가 짧기만 하다. 그동안 미루어 왔던 고구마 밭을 가꾸어야 한다며 마트에 들러 간식과 삽겹살을 구입해 차에 오르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넓은 고구마 밭에 거름도 주고 새순도 잘라 주어야 하는 등 해야 할 일이 태산이라 일손이 부족했는데, 그런 사정을 알고 지인들이 오늘 도움을 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이처럼 인정이 넘치고 사람들을 좋아하는 종은씨 주변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할머니 손에서 자라

종은씨는 온정면 조금1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 얼굴도 모른 체 할머니 손에 의해 자랐다. 어머니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젖먹이 두 형제를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가난한 살림에 할머니는 애기 젖이 없어 이웃에서 젖 동냥에다, 잡곡을 갈아 먹여가며 어린 두 형제를 키웠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할머니는 남의 집 허드렛일까지 마다하지 않고 손주 둘을 키웠다. 어머니가 떠나고 몇 년이 채 안되어 아버지마저 재혼하면서 포항으로 가셨다. 초등학교도 할머니 손에 이끌리어 입학을 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아버지도 밉고 어머니도 너무 미웠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쯤 아버지가 살고 있는 포항으로 전학을 가서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새엄마 밑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으며, 무엇보다 마음이 불편했다. 새어머니에게는 형이 한명 있었다.

연년생 형과 할머니 밑에서 살던 때와 너무 달랐다. 추운 겨울 3개월을 아버지 밑에서 살았지만 어린 마음에 도저히 계속 살수가 없었다. 도망치듯 삼촌이 살고 있는 강릉으로 갔다. 학업도 중단하고 친구들이 한참 학교를 다니던 그때 종은씨는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교복대신 작업복을 입어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14살 어린 꼬마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소나 말 등을 긁어주는 도구를 제작하고 호미, 낫, 톱, 괭이 등 대장간과 비슷한 곳에서 일을 했다. 쇠를 녹이고 쇳물을 조형 틀에 붓는 일은 주로 기능공들이 했지만, 다듬고 마무리 하는 작업은 종은씨 차지였다.

하루 종일 어두침침한 공장에서 일하면서 제일 힘든 것이 배고픔이었다. 한창 나이에 먹는 것이 늘 부족했다. 우연히 친구가 자장면 집에서 일하면 먹는 것은 해결되지 않겠냐고 말하기에 공장생활 1년 만에 중국집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종은씨는 배달을 시작하면서 또래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등하교 하는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다. 학생들이 책가방을 들고 학교를 다닐 때 그는 흔히 말하는 철가방을 들고 주문진 이곳저곳을 누볐다. 그렇다고 마냥 학생들을 부러워할 수만 없었다. 누구 하나 종은씨가 처한 어려운 현실을 해결해 줄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로 상경...

자장면은 질리도록 먹었지만 1년이 지나도 주인은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때 마침 배달처 단골집 사장님께서 동생이 서울에서 양식집을 크게 하고 있다며, 그곳으로 추천을 해주었다. 성실하게 일하는 종은씨를 눈여겨 본 그 사장님의 권유로 상경하게 되었다. 동대문 전농동 근처 양식집이었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큰 가게였다. 

그릇 닦기, 홀 청소 등 식당의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했다. 처음엔 주방장과 주인이 신임을 하지 않았지만 성실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조금씩 주방 일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쪽 계통에서 최연소 주방장이 되었다. 다른 양식집에서 보조 주방장으로 스카웃되는 등 나름 잘 나갔지만 보수가 적었다.

꾸준히 한 우물만 파면 성공한다는 생각을 당시에는 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근성이 부족했던 것 같았다. 또 귀가 얇아서 주변 사람들이 어디가면 돈을 좀 더 준다는 말을 하면 금방 마음이 흔들렸다.
80년대 초 연탄과 관련된 사업이 장사가 잘되었다. 그 시절 그 쪽 분야에 일하는 사람들이 보수도 괜찮은 편이었다. 오래되어 어떤 이유로 주방장 일을 그만 두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경기도 부천에 있던 연탄보일러 제작 공장으로 자리를 옮겨 트럭을 타고 연탄 배달하는 조수로 일을 하게 됐다.

하루 18,000장에 달하는 연탄을 배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산동네에는 트럭이 들어가지 않아 지게에 지고 옮겨야 했으며,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두 배나 힘이 들었다. 지금도 마른기침을 가끔 하는 것이 그 때 얻은 직업병이라고 웃으며 종은씨가 말했다.

연탄공장에서 일하면서 몸이 많이 망가진 것 같다고 한다. 건강이 좋지 않아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대구로 내려와 레스토랑 주방장으로 예전에 하던 일을 다시하게 되었다. 마음 편하게 일을 하도록 사장님이 배려해주었고 아팠던 몸도 완쾌되어 여러모로 궁합이 맞는 직장이었다. 

군 입대를 위해 고향으로...

대구에서 열심히 일하던 어느 날 영장이 날아왔다. 중학교를 다니지 않아 교복을 입어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픈 일로 기억하고 살아서 그런지 군복만큼은 꼭 입고 싶었다. 학력 때문에 혹시 군 면제가 되지 않을까 고민할 정도였다고 한다. 종은씨는 온정면사무소 병무담당자를 찾아가 군복을 입고 싶으니 군대를 꼭 보내 달라고 부탁까지 했었다.

그때 담당자가 다른 사람들은 군에 안 가려고 애를 쓰는데 보내달라고 조르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웃던 일이 기억난다고 했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입영 통지서가 나왔으며, 그날 너무 기분이 좋아 이발소에 달려가서 머리를 밀고는 입영 날짜만 손꼽아 기다렸다.

“남들은 학창시절을 보내야 할 시기에 타향에 떠돌다 병역 문제로 고향에 내려와서 보충역이지만 군복을 입고 출퇴근을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남들에게는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일이지만 종은씨에겐 군복을 입는 것이 너무나 뿌듯했으며, 훈련받는 것도 신바람이 나서 해병대 극기 훈련도 2번이나 자원해서 받을 정도로 독특했다.

어머니가 생존해 계시는지 돌아가셨는지 모르고 살았는데 군복무 중에 어머니란 분이 찾아왔었다. 이름을 부르며 얼싸안고 우시는데 정작 종은씨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착찹한 마음뿐이었다고 한다. 초소 근무시간이 다 되었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참았다고 했다.

21년 만에 처음 본 어머니, 어릴 때 그리도 보고 싶고 불러보고 싶은 어머니었지만, 막상 뵙고 보니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원망의 눈물도, 그리움의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짧은 만남의 시간이 어머님에 대한 기억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제대 후 더 이상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울진에서 ‘울진용달’이란 회사에 운전기사로 취직했다. 울진읍 신림리 지역에서 생산된 송이 양이 많아 서울이나 대구, 부산 등 대도시로 배송해야 하는데 그 시절은 화물만 취급했지 급한 물량은 용달차로 운송을 했었다.

한창 송이철에는 하루 종일 운전대를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바빴으며, 송이철 이외에는 소, 돼지 등 가축들을 실어 날랐다. 수산물을 포함해 이삿짐도 취급하는 등 닥치는 대로 물량을 취급해 운전기사 대우가 좋았다.


식육점 사장이 되다!
먹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용달 기사 1년 만에 제법 돈을 모았다. 지인이 중고로 육절기, 골절기, 냉장고, 저울 등을 저렴하게 준다고 하기에 그동안 모은 돈으로 식육점을 차렸다. “처음으로 내 가게가 생겼으며, 작은 구멍가게지만 사장님이란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했다.

장사 초기에는 축산기업조합에 가입비를 내지 못할 정도로 어려움이 많았다. 총각이 장사를 하면 얼마 못가 곧 문을 닫을 것이라는 주위의 우려도 있었지만 그런 말을 들을수록 오기가 생겼고 더 열심히 장사에 집중했다.

혼자서 밥해먹고 장사를 하고 도축 작업까지 하다 보니 몸이 몇 개라도 부족했으며,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지금도 그때 일을 기억에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힘들었지만 근면 성실한 자세로 장사를 꾸준히 해나가 시간이 지나니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장사가 점점 잘되니, 매사가 즐겁고 힘이 절로 생겼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문을 열고 장사를 해도 피곤한줄 몰랐다. 저녁시간에는 줄을 서서 고기를 팔았으며, 명절에는 예약을 받아놓고 새벽이나 저녁 늦은 시간에 집으로 배달을 해줄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다.



총각, 장가를 간다네...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성실하게 장사를 하다 보니, 총각이 열심히 산다고 주변에서 칭찬과 격려도 많이 해주고 장사도 잘 될 때 손님으로 가게에 고기를 사러온 온 아가씨가 있었다.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 그 아가씨가 마음에 꼭 들었지만 표현을 하지 못했다.

그때 그 아가씨가 지금의 집사람인 박애순(50)씨다. “처음 보았을 때 너무 예뻐 한눈에 반해버렸어요.”라며, 종은씨는 얼굴이 붉어졌다. 쑥스러워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애순씨가 가끔 고기를 구입하러 올 때 요령껏 연락처를 확보하고는 적극적인 구애와 애정 공세를 펼쳤다. 물론 학력은 고졸이라고 속이고는 처갓집 일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일손을 도왔다. 그리고 처가 식구들을 한명씩 포섭해 종은씨 편으로 만들었다.

연애 시작한지 몇 개월 만에 결혼까지 골인했다. 혼자하던 일을 부부가 같이 맡아 일하니 힘도 덜 들고 장사는 더 잘되었다. 89년도 첫째 동우(26. 취업 준비생)가 태어났다. 방도 비좁고 장사가 잘된 편이라 가게도 좁았다.

울진읍 성당 인근의 조금 넓은 곳으로 가게를 확장 이전 ‘황소식육점’이란 간판도 걸었다.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새벽 일찍 야채와 고기를 준비했으며, 가게를 찾은 손님들께 친절하고 살갑게 장사를 했다. 낮에 장사를 마치면 밤엔 택시와 봉고차를 몰았다.

6년을 미친 듯이 돈 모으는 데만 집중했다. 가난이 얼마나 힘들고 서러운지 어린나이에 경험한 터라 남들에게 돈이 없다고 무시당하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다고 한다. 주위에서 독종이란 소리까지 들으며 열심히 일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자는 곧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종은씨는 말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 되겠다는 단순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달리고 달리다 넘어지면 오뚝이처럼 또 일어나 달렸다고 한다.



생에 처음 마련한 내 땅과 건물

종은씨는 부구에 고기 배달을 갔다가 우연히 부구정류소 인근에 땅이 매물로 나왔는데 구입하지 않겠냐고 지인이 말을 전해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탁 막히고 가슴이 쿵덕거려 며칠을 잠을 못 이루었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모아 무작정 땅을 구입했다. 난생처음 ‘이종은’이란 이름으로 등기를 마친 땅이라 그날 저녁 부인 애순씨와 밤새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남편하나 믿고 열심히 살아준 집사람과 아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종은씨는 말했다.

아들 동우는 남자고 장남이라 부모가 힘들게 살아온 시절을 이해하겠지만, 은혜(23. 대학생)와 막내 은진(18.고2)이는 딸들이라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을까? 풍족하게 살지 못하고 부족하게 생활한 것에 아이들이 기가 죽지 않을까? 늘 맘에 걸렸다고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했으며, 은행 대출과 이것저것 정리해서 구입한 땅에 건물까지 지었다. 그때가 95년도 종은씨 나이가 33살이었다. 남들은 일찍 성공했다고 말하겠지만 14살에 사회에 첫발을 들여 놓은지 20여년 만에 북면 부구리에 222평짜리 건물을 지은 것이다.

건물 이름을 황소처럼 부지런히 일한다는 뜻으로 ‘황소상가’라고 지었다. 부부가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참아가며 피땀 흘려 이룬 성과였다. “불평 한마디 없이 나의 손발이 되어준 집사람이 고마울 뿐이에요.” 애순씨 자랑에 팔불출이란 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종은씨는 아내가 벌써 50이 넘었는데 이때까지 그 흔한 단풍 구경조차 단둘이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늘 미안하다고 말로만 했지만, 이젠 꼭 집사람과의 시간을 만들어 볼 생각이에요.” 부부가 얼마 전에 여권도 만들었으며, 부부동반으로 외국여행을 다녀올 계획을 세우고 있다.

만학의 기쁨

건물에서 월세도 나오고 지하에 황소단란주점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매달 고정적인 수입이 생기니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도 생기기 시작했다. 너무 앞만 바라보고 달려 주변에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지인이 경북전문대학에 같이 입학하자고 해서 학교를 1주일 도강으로 다녔다고 한다. 학교에서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라고 종용했지만 초졸인 종은씨는 입학 자격이 안 되었다. 입학절차 없이 학교만 다니고 싶었던 것이 종은씨의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처음으로 학업에 대한 강한 미련과 배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그날이후 검정고시를 준비하는데, 집사람이 고졸인줄로 알고 있기에 공부를 시작하면서도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아내 몰래 북면 상가 옥상에서 공부를 하고 서울에 시험 치르러 가는 날도 모르게 갔다 왔다. “1년 만에 중·고등 검정고시 합격증을 받아들고 그제서야 집사람에게 사실대로 말했어요.”

경북전문대에도 당당히 입학해서 총학생회 회장까지 역임했다. 남들보다 늦게 공부를 시작했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늦게 배움의 길로 들어섰지만 젊은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욕심을 내어 물리치료학과 편입 시험에 도전해 합격을 했지만, 아이 두 명이 대학생인데다가 나까지 대학생이 되면 학비 등 경제적인 고민을 안 할 수 없었어요.” 결국 시간적 여유도 많고, 학비도 저렴한 방송통신대학교 환경보건학과에 편입해서 논문과 학점을 다 확보했다. 이제 졸업장만 받으면 대학교 과정도 졸업하게 된다.

평생 공부해야 하는데 시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종은씨는 지금도 농촌지도소에서 개최하는 각종 강좌를 빠짐없이 신청해 공부하고 있다. 농민사관학교, 녹색대학, 농어촌어메니티대학, 농어촌체험 지도사 양성과정 등 배움에 대한 욕심은 여전히 많다.

왕성한 사회활동

종은씨는 최근 결성한 로컬푸드 사업단의 회장을 맡았다. 우리 지역에서 생산된 농수산물을 지역민이 먹고 또 나아가 도시민들도 먹을 수 있도록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아직은 준비하는 단계라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쳐 힘은 들지만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야심찬 포부를 밝히고 있다.

또한 한국제이씨경북지구 지구부회장, 울진청년회의소특우회 직전회장, 울진군육상경기연맹 회장,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울진지부장, 사단법인 울진숲길 이사, 울진자원봉사센터 법인감사, 새누리당 자연환경정책자문위원, 농림식품부식용곤충법인 기획이사, 자연사랑연합 초대회장 등을 역임하거나 아직도 직분을 가지고 있다.

각종 단체에서 받은 상패와 군수상, 도지사상, 환경부장관상까지 많은 상을 수상했다. 바쁜 시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회활동에 대한 공로이다. 지금껏 봉사하는 마음으로 활동했으며, 앞으로도 더욱 자세를 낮추어 봉사하겠다고 한다.

종은씨는 어려운 이웃이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분들을 위한 재능기부를 펼치고 싶어 한다. 먹고 살기 위해 어릴 때 경험한 다양한 직업에서 전수받은 기술과 중장비 등 취득한 국가공인자격증도 여러 개나 되며, 지금도 새로운 국가자격증 취득을 위해 공부 중에 있다.


행복한 밥상 전도사
가난한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 왔던 대농의 꿈을 이루기 위해 8년 전에 울진 읍내에서 제일 높다는 아구산 자락에 위치한 첩첩산중 올미골에 만여평의 땅을 구입했다. 석축을 쌓아 밭을 일구고 과실나무를 심었으며, 폐가를 뜯어내고 황토집도 지었다.

종은씨는 농원 이름을 ‘황소농원’이라 지었다. 아직 투자한 금액에 비해 소득은 없지만 마음은 벌써 부자이다. 수확된 농산물은 소량이라 주변 지인들과 그냥 나누어 먹는다. 처음부터 돈을 벌자고 벌인 사업이 아니라 생산된 수확물 물량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안심하고 건강한 밥상을 차릴 수 있으면 된다. 그것이 바로 행복한 밥상이고 황소농원이 지향하는 길이기에 농원으로 출근하는 그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울진시내, 죽변시내, 북면 한수원 아파트 등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아구산(약 700m)은 농원에서 왕복 3시간 걸려 등산코스로 제격이다.  

황소농원은 아직 완벽하게 꾸며 놓치는 못했지만 찾아오는 손님을 가리지는 않는다. 누구나 찾아와 자연과 함께 쉼터로 이용한다면 아직은 시설물을 무료로 제공해 주고 있다. 텃밭에서 상추나 돌미나리를 채취해서 행복한 밥상을 차려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더불어 행복한 사회가 되는 길이라 믿고 있다.

황소농원은 행복한 밥상에 함께 숟가락을 놓고 싶은 분에게는 언제나 대문을 열어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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