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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듣는 소리

  • 입력 2014.09.0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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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인 ‘페인트 최’는 고향이 서울로 울진에서 15년간 생활했다.

한국미협·도무스·예형회 회원 등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 Lomo / 이명동기자]


조금이라도 더 자라고 일부러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전화를 안했다. 하루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 오늘이라는 말을, 어제 전화기 너머로 늦게까지 업무 때문에 뛰어다니는 중이라며 조금은 지친 딸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거의 2년 만에 딸이 혼자 자취하는 집 앞에 왔다. 시간은 오전 10시, 충분히 잠으로 피로를 풀었을 시간이라 생각하고 집 앞에 내가 왔노라 전화를 했다. 자다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딸, 반갑기는커녕 출발할 때 전화를 안 하고 왔다고 짜증이 섞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빨리 문이나 열라니까, 문을 못 연단다. 왜?

‘가시나야, 니 옆에 혹시 남자 재우나?’ 했더니, ‘참 빈약한 우리엄마의 상상력이라니...쯧’ 한다.

 ‘그라믄 도대체 이유가 뭐여?’ ‘엄마, 요즘 내가 좀 바쁘다고 청소를 못하고 다녀서 엄마라도 창피하다. 청소 다하고, 문 열 테니까 좀만 기다려요’ 한다. ‘야가 뭔 소리 하노, 나의 기쁨을 뺏지 말고 빨랑 문 열어라. 안 그래도 엉망진창 정리가 하나도 안 되어 있을 네 방을 상상하면서, 요렇게 저렇게 정리하고 청소 빡빡 해줘야지 하면서 야심차게 상경했으니까 걱정 말고 문 열어라’ 소리를 꽥 질렀다. ‘엄마, 진짜 요즘은 생활이 아니라 잠만 자는 방이다. 치워야지 하면서도 쓰러졌다가 눈뜨면 아침이라 또 그냥 나가고... 평소의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한 그녀가 아니라, 엄마한테 야단이라도 맞을까봐 걱정하는 아이처럼 변명이 늘었고 주눅이 들었다.

그래, 몇 년 전의 네 엄마는 그저 소리부터 지르고 폭풍 잔소리를 퍼부었겠지. 그 엄마를 상상하면 어떤 감정부터 드는지 미리 긴장하고 있는 딸에게 미안했다. 
  
편안한 맘으로 문을 열라는 설득은 생각보다 길었다. 현관 입구에 쌓인 먼지와 신발들, 계절 구분 없이 한데 엉겨 있는 옷들을 이불 삼아 덮고 있는 침대, 한 뼘의 깨끗한 공간도 없이 책과 화장품 등등으로 어질러진 책상, 밥을 못 챙겨먹는지 휑한 냉장고. 
  
‘아가야, 방을 보니 나가서 밥부터 챙겨먹어야겠다. 든든하게 먹고 와서 우리 청소를 시작해 볼까? 괜찮아 딸아, 청소 좀 못한 게 뭐 그리 중요해. 나는 네가 언제나 당당하고 활발하게 열정을 가지고 사는 게 좋아. 언제부턴가 나는 정리 안 되고 머리카락 투성이고, 책들이 널브러져 있는 너의 방을 청소하는 상상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사랑해’ 했더니, ‘왜 그래 엄마! 갑자기 황혼 이혼을 앞둔 노부부의 마지막 고백같이 뜬금없이. 그런데 엄마! 아, 그 사랑해 라는 말 가슴으로 전해진다. 나도 엄마 사랑해’ 
  
우리는 여름 한 낮 뜨겁게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다녔다. 누군가의 말을 귀가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다는 게 참 좋다. 누군가의 말이 가슴으로 스민다는 게 행복하다.

‘그럼 그렇지, 어김없이 비가 오는구나! 미역국 끓여 먹어라’ 딸 바보 우리 엄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전화에 그냥 한바가지 웃음을 흘린다. 날 낳던 그해 산후 조리도 제대로 못하고 홍수를 피해 이불을 둘둘 말고 리어카에 실려 앞산으로 피난 가셨다더니, 해마다 정말로 한 번도 비가 안 온 적이 없다는 말을 빼먹지 않으면서 딸 생일을 챙기신다. 건강에 유의하시라고 말할 때마다, 염려 말고 너나 아프지 말라고 머리가 반백이 다된 나이의 딸을 어린아이처럼 대한다. 
  
요즘은 언뜻 우리와의 시간이 영원하지는 않을 거라는 아릿한 기분이 점점 자주 든다. ‘사랑해’라는 살가운 말은 없지만, 무한 사랑의 엄마 사랑을 가슴으로 매일 매일 듣는다. 비가 와서 불어나는 강물처럼 쉼 없이 흐르는 강이 되어 가슴에 차오른다.

엄마가 내게 그러하듯, 내가 딸에게 아들에게 마음으로 전하는 말, 내가 그러하듯 어느 날 그들이 가슴으로 들어주는 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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