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 김진문(시인,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하얼빈역광장(민족문제연구소 답사 단원. 2025. 10. 26
지난 호에서 우리는 하얼빈 의거의 긴박한 순간을 되짚어 보았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만주의 찬 공기를 가르며 울린 총성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개인 원한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짓밟은 제국주의 상징 이토 히로부미를 향한 역사적 단죄였다.
안중근의 방아쇠에서 발사된 탄환은 한 사람을 쓰러뜨렸지만, 그 울림은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퍼져 나갔다. 서양 열강은 이 사건에 주목했고, 중국 언론은 그의 이름을 크게 다루며 서로 다른 평가를 내놓았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조선은 아직 살아 있었다는 점이다.
같은 시각, 조선 내부에서는 또 다른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왕실과 일부 친일 세력은 일본 통감부에 조의를 표하고, 이토에게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올리며 부의와 위로금을 바쳤다. 한쪽에서는 나라의 존엄을 되찾고자 한 총성이 울렸고, 다른 한쪽에서는 굴종의 예가 이어졌다. 이 극명한 대비는 우리에게 묻게 한다. 그날 총성은 과연 누구를 향해 울린 것이었는가.
그렇다면 의거 이후 전개는 어떠했는가. 체포된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대에서 일본 측에 인계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게 된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의 행동이 대한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며, 자신을 범죄자가 아닌 전쟁에 참여한 군인으로 규정하였다. 특히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을 내세워 이토의 침략 행위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자신의 거사가 정당한 전쟁 행위임을 당당히 주장하였다.
대한의군은 을사늑약과 군대 해산 이후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의병 세력이 스스로 국가의 군대로 인식하며 조직한 항일 무장 부대였다. 안중근은 이 조직의 참모중장으로서 행동하였으며, 그의 거사는 개인 의거를 넘어 국권 침탈에 맞선 전쟁으로 인식되었다. 결국,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그 정신과 행동은 의병 투쟁을 한 단계 끌어올려 이후 독립군 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그의 외침은 대한제국의 주권 의식과 항일 의지를 국내외에 널리 알린 역사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이제 남는 물음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의 거사에 함께했던 동지들은 어떤 길을 걸었는지, 가족들은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그를 바라본 당시 교회의 반응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물음들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하얼빈역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의사 동상에 헌화하는 답사 단원들(2025. 10. 26)
이토저격 장면을 연출하는 어느 관람객(하얼빈 안중근기념관)
안중근이 법정에서 주장한 이토의 죄목
1909년 10월 26일, 만주의 바람이 스치는 하얼빈 의거 현장. 안중근은 단 한 자루 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은 곧 제국의 심장을 흔들었다. 그러나 체포된 그의 운명은 뜻밖에도 다른 길로 흘렀다. 사건이 벌어진 곳은, 러시아가 관리하던 철도 구역이었지만, 엄밀한 자국 영토는 아니었다. 더구나 러일 전쟁 패배 이후, 러시아 제국은 일본과 충돌을 피해야 했다. 피살된 인물이 일본의 상징 지도자였기에 외교적 부담은 더욱 컸다. 결국, 러시아는 책임을 떠안기보다 넘기는 길을 택했고, 안중근은 일본 법정으로 이송된다. 한 발 총성이 역사를 울렸지만, 그를 둘러싼 제국들의 계산은 더 차갑게 작동하고 있었다.
안의사를 재판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공판정에 선 안의사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앞줄 오른쪽부터) (안응칠 역사, 안중근기념관)
그는 체포된 뒤 러시아 헌병대를 거쳐 일본 영사관에 인계되었고, 결국 뤼순 감옥 법정에 서게 된다. 재판정 공기는 냉엄했으나, 안중근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범인이 아니라 전쟁포로로 보아야 한다고 밝히며, 이토 히로부미의 죄를 또렷이 열거했다.
“1. 대한제국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고종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4. 무고한 대한인을 학살한 죄요. 5. 국권을 강탈한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천택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요. 8. 대한제국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 대한인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버린 죄요. 12. 대한인이 스스로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의 분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대한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 폐하를 속인 죄요.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 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요.)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이토 관한 설명게시판
검찰관이 다 듣고 난 뒤에 놀라면서 하는 말이
『진술하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동양의 열사라 하겠소. 당신은 열사니까 사형받을 일은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하였다.』
(안응칠 역사 인용, 안중근의사기념관, 2017)
이 말은 겉으로는 찬사요 위로처럼 들린다. “동양의 열사”라는 호칭은 한 인간의 뜻을 높이는 말이지만, 그 말끝에 이어지는 안심의 권유는 오히려 마음을 풀게 하려는 미묘한 덫과도 같았다. 칭찬으로 경계를 누그러뜨리고, 안도의 말로 진술의 문을 넓히려는 것 - 그것이 제국 법정이 쓰던 말의 결이었다. 진심이 아닌 언어는 가면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되, 그 속은 차갑게 계산되어 있었다. 말은 부드러웠으나, 그 말이 향한 곳은 끝내 한 사람의 결의를 시험하는 자리였다.
결국 그 법정은 그를 살려두지 않았다.
재판은 일본 관동도독부의 법정에서 열렸고, 검사와 판사는 모두 제국의 관리들이었다. 그러나 그 앞에서도 안중근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서 적장을 처단했을 뿐이다.”
안중근의 말은 변명이 아니라 선언이었고, 방어가 아니라 신념이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안중근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재판정에서 동양 평화를 또박또박 밝히며, 총성이 아닌 사상의 길을 말하였다. 낮고 고요한 음성이었으나, 그 울림은 법정의 벽을 넘어 시대를 향해 퍼져 나갔다.
1910년 3월 10일, 동생 안공근과 빌렘 신부는 사형을 앞둔 안중근을 만나 마지막 정을 나누었다. 짧은 면회였지만, 형은 동생에게 나라를 위한 길을 당부하며 눈물 대신 굳은 웃음을 남겼다.
안공근은 안중근의 둘째 동생으로 나이가 열 살 아래다. 안공근은 당시 상해에서 구미 공사관의 통역과 정보원으로 활동하면서 안중근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는 한편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안공근은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안공근은 김구가 기획한 이봉창, 윤봉길 의거에서 핵심 역할을 했고, 대외로는 김구의 대리역할을 했다. 안공근은 1939년 5월 중경에서 실종되었다.)
뤼순 옥중에서 마지막 면회. 빌렘 신부와 정근, 공근 두 동생에게 유언을 하고 있는 안의사(안응칠 역사, 안중근기념관)
동생들에게 남긴 말
1910년 3월 10일, 중국 뤼순감옥의 차가운 면회실에서 안중근은 두 동생 안정근·안공근을 마주하였다. 순국을 약 보름 앞둔 이 만남은 혈육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는 먼저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사죄해 달라 당부하며, 집안을 지켜야 할 장남의 도리를 일깨웠다. 이어 장남을 사제로 키워 신앙의 길을 잇게 하고, 남은 가족을 서로 의지하여 돌보라 하였다. 안중근은 동생 안공근의 손을 붙잡고 조용히 말을 남겼다.
『오늘 네가 잘 왔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하얼빈에 묻어라. 하얼빈은 내가 이토를 죽인 자리이므로 거기는 우선 내가 묻힐 자리다. 한국이 독립된 후에 내 벼를 한국으로 옮겨라. 그전까지 나는 하얼빈에 묻혀 있겠다. 이건 나의 유언이다. 내 뜻에 따라다오.』)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고 더 큰 뜻을 보라고, 나라의 앞날을 위해 마음을 굳게 지키라고 했다. 늙은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는 일 또한 나라를 위한 길이라 일러주었다. 그가 남긴 말은 단순한 유언이 아니라, 한 시대를 건너는 책임의 언어였다. 그는 또 동포들에게도 유언을 남겼다.
죽음을 넘어 민족을 깨우는 마지막 당부
같은 자리에서 그는 동생들을 통해 온 겨레에게 전할 말을 남겼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그리고 다시, 죽음 너머를 바라보듯 이렇게 덧붙였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 말은 단순한 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남은 민족에게 건네는 명령이자, 미래를 향한 약속이었다. 나라를 잃은 백성에게 그는 슬픔을 말하지 않고 책임을 일깨웠으며, 흩어진 마음을 모아 함께 나아가라 하였다.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동포 모두에게 넘겨진 시작이자, 죽음 위에 남은 깃발이었다.
그의 말은 감옥 벽을 넘지 못했으되, 시간을 넘어 오늘까지 살아 있다. 한 사람의 마지막 숨결은 한 민족의 첫걸음이 되었고, 마지막 남긴 당부는 깃발처럼 바람 속에 펄럭인다.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그 뜻, 그것이 곧 나라를 다시 일으킨 힘이었다.
끝까지 외면하지 않은 한 사람, 빌렘 신부(1860-1938)
안중근은 세례명이 도마로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하얼빈에서 총성 이후, 교회는 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당시 서울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그의 행동을 교리에 어긋난 것으로 보았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때문이었다. 한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는 어떤 까닭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엄격한 원칙 때문이었다.
신앙과 의거, 교리가 먼저냐? 역사 정의가 앞서는가? 이 점에서 갈림길은 때로는 어긋나기 마련이다. 오늘날에도 이는 좀처럼 쉽게 해결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안중근을 끝까지 옹호한 인물로서 빌렘 신부가 있다. 빌렘은 프랑스 출신으로 당시 조선에 파견된 황해도 신천 천주교의 신부였다. 안중근은 그에게서 황해도 신천교회에서 영세를 받았다. 그와는 아주 가까운 관계였다.
하지만 빌렘은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 문제로 서울 대교구의 뮈텔신부주교와 의견 대립이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뮈텔 주교의 안중근 면회 금지에도 처형 직전 여순으로 와 안중근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베풀었다. 뮈텔은 안중근의 정치적, 민족적 대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하얼빈 거사를 교리상의 죄악으로 단정했다. 그는 안중근의 거사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공공연히 표출했고 안중근에게 성사를 베푼 빌렘 신부를 중징계했다.)
그러나 여순 감옥의 차가운 벽 안에서도 신앙은 꺼지지 않았다. 그 곁에는 빌렘 신부가 있었다. 그는 안중근의 고해를 들으며 삶의 무게를 하느님께 맡기게 하였고, 성체를 나누며 마지막까지 신앙 안에 머물게 했다. 죽음을 앞둔 이를 위한 기도는 조용히, 그러나 깊게 그의 영혼을 감싸안았다.
빌렘 신부는 “그는 죽음을 앞둔 죄인이 아니라 신념을 지닌 의인이었다”고 기록했다.
당시 교회의 분위기 속에서 안중근은 외로운 신자였다. 그러나 빌렘 신부는 끝까지 그를 버리지 않았다. 뮈텔 주교의 판단과는 달리, 그는 한 인간의 신앙을 끝까지 지켜낸 증인이었다. 그 침묵의 동행은 총성보다 더 오래 남는 울림으로 오늘에 전해온다.
안응칠 역사, 안중근기념관
총성과 신앙 사이에서
그 시대 교회는 정치와 무장투쟁에 거리를 두고 있었다. 식민지 현실 속에서도 교회 공동체를 지키는 일이 우선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안중근의 의거는 신앙의 울타리를 벗어난 행동으로 비쳤다. 신앙과 현실, 이상과 생존 사이의 간극이 그를 갈라놓았다.
그러나 안중근에게 신앙은 침묵이 아니었다. 그는 불의에 맞서는 것이야말로 더 큰 정의라 믿었다. 그의 선택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신앙과 양심이 부딪히며 이루어진 결단이었다. 그 갈림길 위에서 그는 스스로 길을 택했다.
안중근의 총성은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을 집어삼키던 제국주의의 심장을 겨눈 것이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침략의 상징으로 보았다.
마침내 1910년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안중근의 말과 침묵은 한결같았다. 차가운 감옥 벽 사이에서도 그의 뜻은 꺼지지 않았고, 그날 총성은 여전히 역사의 깊은 곳에서 울리고 있다.
역사가 다시 묻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행동은 새롭게 해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저항이었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정의는 때로 고요한 기도가 아니라, 결단과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총성은 짧았지만, 그 물음은 길게 남았다. 무엇이 정의이며, 어디까지가 정당한 저항인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지금도 우리에게 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얼빈 안중근기념관의 안중근과 여순 감옥 사진
늦게 돌아온 이름, 신앙의 품으로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의 행위는 침략에 맞선 정당한 행동이며, 역사 속 의거로 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 판단으로 안중근은 마침내 교회 안에서 신앙인으로 복권되었다.
이 재평가는 단순한 명예 회복이 아니었다. 신앙은 현실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정의를 향한 실천 속에서 드러난다는 선언이었다. 안중근의 삶은 그 사실을 증명하는 한 사례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교회는 안중근을 ‘신앙의 증인’으로 바라보며 시복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순수한 신앙의 순교인지, 역사적 투쟁의 결과인지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래서 그 길은 더디지만, 그의 이름은 곧 시성으로 명예를 역사의 장에 기록될 것으로 생각한다.
안중근은 신앙과 역사 사이에 서 있었던 사람이다. 한때는 교리 벽 앞에서 배척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더 깊은 이해 속에서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의 삶에 대해 우리는 묻는다. 신앙은 어디까지 인간의 현실에 응답해야 하는가, 정의는 어떤 모습으로 실현되는가. 그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의 총성과 기도 사이에서 답을 찾고 있다.
하얼빈 의거 직후 안중근은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사형을 면하려는 호소 대신 자신의 행동이 조국 독립을 위한 정당한 것임을 천명하며 저항 사상을 밝히고, 일본 법정 체계 아래서 정당한 심판을 요구했다. 그러나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뤼순 감옥으로 옮겨져 1910년 3월 26일 일본 당국에 의해 뤼순(旅順)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안중근의 동의단지회와 하얼빈 의거는 단순한 의열 행위가 아니라 국권 침탈과 황폐해진 조국 현실 앞에서 조선인의 저항 의지를 표출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동지들과 함께 맹세한 단지동맹은 이후에도 독립운동 진영에서 한민족의 결속과 희생을 상징하는 역사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안중근의 총(KBS미스터리추적 화면 캡처)
안중근의 동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얼빈 거사의 동지들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흔히 하얼빈 의거를 떠올릴 때, 안중근 의사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만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날의 결단은 한 사람의 의지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름 없이 가려진 자리에서 뜻을 함께한 이들이 있었다. 우덕순, 조도선, 그리고 유동하 등이다. 교과서의 여백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지만, 역사의 그날을 함께 떠받친 또 다른 주역들이었다.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의 총성이 울리기 전, 이미 그들의 운명은 하나로 묶여 있었다. 그렇다면 그날 이후, 역사의 그늘 속으로 스러져 간 이들의 삶은 어떻게 이어졌을까. 이제 그 조용한 이름들을 다시 불러보고자 한다.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1. 우덕순 (禹德淳 1884~1950)
우덕순은 1879년 현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황석리(당시 충청도 청풍)에서 태어났다. 1900년대 초 연해주로 건너가 상업에 종사하며 한인 사회와 교류하였고, 국권 회복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안중근과 뜻을 같이하여 대한의군에서 활동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에 참여하였다. 당시 이토가 내릴 기차역이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거사를 맡고 우덕순은 채가구역에 대기하기로 하는 등 분산 배치가 이루어졌다.
거사 직후 우덕순은 채가구역에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직접 사격에 가담한 증거가 확인되지 않아 석방되었다. 이후에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에 관여하였다.
우덕순은 하얼빈 의거에서 직접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았으나, 사전에 역할을 분담하고 실행에 참여한 동지로서 의거가 조직적으로 준비되었음을 보여 주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1950년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 조도선(趙道善 1879-1911)
조도선(趙道善, 1879~1911 이후)은 함경도 홍원에서 태어났다. 연해주로 건너가 세탁업과 통역으로 삶을 이어가며 항일독립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만주와 연해주를 오가며 독립운동 연락과 지원에 힘쓰다가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을 만나 뜻을 함께하였다.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위해 치밀한 분담 계획을 세웠고, 조도선은 우덕순과 함께 채가구역에 배치되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실행 주체로 대기하였다. 그러나 이토의 열차가 그곳을 지나치면서 계획은 어긋났고, 거사는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의 결단으로 이루어졌다.
거사 직후 그는 동지들과 함께 러시아 헌병에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의 행적은 뚜렷이 남아 있지 않으나,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것으로 전해진다.
조도선의 삶은 빛나는 주역의 뒤편에서 역사를 떠받친 또 하나의 기둥이었다. 그는 성공한 의거 속에서 오히려 드러나지 않는 길을 택한 인물로, 공동의 뜻을 위해 자신을 낮춘 ‘숨은 결의’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정부는 이러한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 유동하(柳東夏 1892-1918)
189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유동하는 어린 시절 러시아 국경 지대로 이주해 러시아어를 익히고 철도학교를 마쳤다. 부친 유경집의 영향으로 독립운동가들과 인연을 맺은 그는, 안중근 의거에 필요한 통역과 연락 임무를 맡아 하얼빈으로 향했다. 1909년 가을, 우덕순·조도선 등과 함께 보이지 않는 다리가 되어 이동과 준비를 도왔고, 그들의 헌신은 마침내 하얼빈역의 총성으로 이어졌다. 의거 후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살고 1911년 출옥했으나, 다시 러시아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도우며 싸움을 이어갔다. 그러나 1918년 일본군의 총탄 앞에 스물여섯 젊은 생을 바치고 순국하였다.
유동하의 삶은 길지 않았으나, 그는 앞에 나서기보다 사람과 뜻을 잇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의거를 떠받친 인물이었다. 한순간 거사를 가능케 한 헌신의 상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8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하얼빈 항일투쟁의 역사 의미
하얼빈의 총성은 한순간의 결단이었으나, 그 결단에 이르기까지 시간은 길고도 치열했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자신의 행동을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한 의거로 규정하였고, 끝내 1910년 3월 26일 순국으로 그 신념을 증명하였다. 그의 죽음은 한 사람의 생애를 넘어, 식민 지배에 맞선 조선인의 도덕적 항거를 세계에 드러낸 사건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 의거는 결코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우덕순은 현장에서 실행을 분담하며 마지막까지 행동의 가능성을 지탱한 실천의 인물이었고, 조도선은 계획 연속성과 후속 실행을 준비한 또 다른 축이었다. 이들 존재는 의거가 우연한 성공이 아니라 치밀한 준비와 역할 분담 속에서 이루어진 공동 결단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유동하는 젊은 나이에 연락과 준비를 맡아 의거의 기반을 떠받친 인물이었다.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으나,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전체를 연결한 힘이었으며, 이후 독립운동 과정에서 생을 바친 청년의 전형으로 기억된다.
이렇게 볼 때, 안중근은 결단의 상징이고, 우덕순은 실행의 의지이며, 조도선은 계획의 지속성이었고, 유동하는 연결과 헌신의 표상이었다. 네 사람은 각기 다른 자리에서 하나의 뜻을 이루었고, 그 뜻은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는 시대적 절박함 위에 세워져 있었다.
하얼빈 의거의 역사 의미는 분명하다. 그것은 단순한 저격 사건이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조직적이고 의식적인 항일 독립투쟁이었다. 또한, 이는 대한의군을 중심으로 한 무장 독립운동이 국제무대에서 스스로 정당성을 선언한 사건이기도 했다. 나아가 한 개인 영웅담을 넘어, 공동체가 함께 책임지고 행동한 집단 결단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역사는 종종 한 이름을 남기지만, 그 이름 뒤에는 언제나 함께한 이들이 있다. 하얼빈 총성 역시 한 사람 손에서 울렸으되, 그 울림은 여러 사람의 뜻이 모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중근을 기억할 때, 동시에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의 이름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하얼빈 거사는 한 영웅 전기가 아니라, 한 시대 청년들 결의와 책임이 만들어낸 역사로 온전히 되살아난다. 그것이 역사 교훈이자 정의의 힘이다. (계속)
기사댓글 0
BEST 뉴스
-
울진 출신 남상민 전 UNESCAP 환경개발국장, 미국 호놀룰루 총영사 임명
울진 출신 남상민(58세) 전 유엔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UNESCAP) 환경개발국장이 대한민국 정부의 미국 하와이 주호놀룰루 총영사로 임명돼 오는 6월 23일 부임할 예정이다. 남 총영사는 국제기구와 학계, 시민사회 분야를 두루 거친 환경·국제협력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녹색연합 연대사업... -
[풍경이 있는 산문 64] 황홀한 색채의 블랙홀에 빠지다
/ 2026 한국 근대 거장전 /2026. 5.19~10.25 : 서울시립미술관(관람 무료) /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글·사진 / 김진문(시인) 서울시립미술관 1층에 마련된 유영국미술전 홍보물 “와, 색채 바다에 풍덩 빠진 것 같아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전시장. 한 관람객... -
울진군 방주명가영농조합법인, 슈페리어 테이스트 어워즈 2스타 수상 영예
울진군 금강송면 쌍전리에 소재한 방주명가영농조합법인(대표 강형국)이 세계적인 식음료 품평기관인 국제식음료품평원(ITI, International Taste Institute)이 주관하는 ‘2026 슈페리어 테이스트 어워즈(Superior Taste Award)’에서 방주품 된장과 방주품 고추장으로 국제 우수 미각상(2스타)을 수상... -
제6화 11회(마지막회) 경징이풀
논산 명재고택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다니!” 이시매는 장탄식하며 울고 있는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당에서 시립해 있는 장정들에게 저잣거리 시장통에 가서 소녀의 주인이 되는 자를 불러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장정들이 중년인을 데리고 들어왔... -
[이달의 문향] 동쪽 끝 넓은 바다 산은 내 안에 있다
울진이 낳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선생 탄생 110주년을 맞아 그의 예술 세계를 다시 만나는 뜻깊은 기회를 가졌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2026 한국근대거장전 《유영국(1916~2002): 산은 내 안에 있다》가 열리고 있었다. 유영국은 생전에 “산에는 뭐든지 있다.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 -
[풍경이 있는 산문 63] 선열들의 항일투쟁, 그 길을 걷다(6)
하얼빈역 이도백하행 열차 이제 신흥무관학교로 가는 여정도 중반에 접어들고 있다. 제2일(10월 26일)은 하얼빈역에서 고속열차로 오후 3시 37분 출발, 4시간 걸리는 열차 여행으로 이도백하에 ...
추천뉴스
정치/행정/의회
more +-
울진군, ‘왕피천공원 써머레스트 2026’ 7월 18일 첫 개막
울진군는 오는 7월 18일부터 8월 17일까지 한 달간 왕피천공원 물결광장 일원... -
울진군, 생성형 AI 활용한 구직자 취업역량강화 교육 운영
울진군(군수 황이주)은 취업을 준비하는 군민들의 실질적인 취업역량을 높이고 변화하는 채용환... -
울진군, 저소득층 기저귀·조제분유 지원 대상 확대
울진군(군수 황이주)은 지난 7월 1일부터 저소득층 기저귀·조제분유 지원사업의 대상을 확대 시행하... -
전국 격투기 강자들, 울진에서 맞붙는다
울진군(군수 황이주)은 오는 7월 17일부터 18일까지 이틀간 울진군민체육관에서 ‘제5회 울진파이팅 ...
사회/경제/교육
more +-
울진고, “제44회 경상북도청소년과학탐구대회(융합과학ㆍ과학토론) 입상”
울진고등학교(교장 김진구)는 2026년 6월 20일(토), 구미코에서 열린 「제44회 경상북도청소년과학탐... -
울진초등학교병설유치원 꿈담 이음 독서 골든벨
울진초등학교병설유치원(원장 박찬억)은 7월 14일(화) 유․초 이음 교육의 일환으로 울진초등학교 1학... -
죽변초, 마술로 배우는 독도 이야기, 「독도를 품은 매직 콘서트」 운영
죽변초등학교(교장 김현주)는 7월 13일, 울진교육지원청이 주관하는 찾아가는 독도 사랑 교육의 일환... -
죽변초, WISH 마일리지 마켓 행사 운영
죽변초등학교(교장 김현주)는 7월 14일(화), 전교생이 함께하는 ‘WISH 마일리지 마켓’ 행사를 성황리...
원자력소식
more +-
한울본부, 7월 「한울다누림무비데이」 시행
한울원자력본부는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7월 21일, 22일 양일간 한울에너지팜 대강당(300석)과 ... -
한울본부, 제2회 ‘반드시 빛날 당신과 함께하는 희망 페스티벌’ 개최
한국수력원자력(주) 한울원자력본부(본부장 이세용, 이하 한울본부)는 8월 12일 14시 한울에너지팜 ... -
한울본부, 제3회 한울 열광 문화제 및 전국 청소년 댄스 페스티벌 개최
한국수력원자력(주) 한울원자력본부(본부장 이세용, 이하 한울본부)는 7월 17일(금), 18일(토) 양일... -
한울본부, 건설현장 용접사 양성교육 수료식 개최
한울원자력본부는 지난 6월 30일 오전 신한울 3·4호기 건설 현장에서 ‘2026년도 상반기 용접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