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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치(熊峙)싸움에서 공을 세운 정담(鄭湛)

  • 울진뉴스 기자
  • 입력 2026.06.25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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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규.jpg

    울진정담장군숭모회 회장 임우규

 

임진왜란이 일자 온 강토는 적의 더러운 발에 유린당했으나 오직 일루의 명맥은 호남이었으니 때에 조정에서는 호남을 국가의 근본(根本)으로 보고 있었다.

 

당시 이치(梨峙 : 대둔산 옆의 금산으로 빠지는 고개) 전쟁에서는 적의 대부대를 섬멸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웅치(熊峙 : 속칭 곰치 완주군 소양면에서 진안으로 넘어가는 재)에서는 완강한 적의 선봉을 꺾게 되었으므로 전주성(全州城)이 보전되었기에 정유재란(丁酉再亂)까지 5년 동안 호남이 곡창(穀倉)다운 제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군량 보급과 병력 보충에 공헌하게 되어 임진왜란의 지루한 7년 전쟁을 배겨 낸 것이다.

 

또한 전라도 장병들은 이치와 웅치에서 적의 대부대를 이겨낸 경험과 승전의 여세를 몰아 독성(禿城) 전쟁을 이겨냈고 행주(幸州) 전쟁의 주축이 되어 대첩(大捷)을 가져왔으므로 수도 한양(漢陽)에 집결한 적들을 물러나게 한 것이니 임진왜란을 이겨낸 분수령으로 볼 수 있다.

 

당시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전라도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였던 권율은 이제 승전으로 전라관찰이 되었는데 이치와 웅치 전쟁을 행주대첩보다도 더 높이 평가하여 전공 제 일위라 지칭하였음은 바로 이렇게 중요한 전쟁의 성격과 전과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정담은 김제군수(金堤郡守)로 부임하기 전에 용인(龍仁) 전쟁에 출전했고 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全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란 직함을 띠고 웅치전쟁에 주장(主將)으로 활약하여 적의 선봉을 꺾어버린 것이다. 그의 관향(貫鄕)은 야성(野城)으로 1548년(明宗 3년) 경북 울진(蔚珍)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모친을 여의고 누이 집에서 자라났으며 성품이 활달하고 글재주가 있었다. 경서(經書)를 읽고 나서 향시(鄕試)를 치렀으나 뜻한 바 있어 무예를 익히어 24세 되던 해 군졸을 이끌고 제주(濟州)로 건너가서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사흘 동안이나 표류하다가 무사히 돌아와서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의 비장(裨將)으로 배속되었다.

 

매양 병서(兵書)를 탐독하고 무술을 연마하여 북병사(北兵使) 신립(申砬)의 막하(幕下)에 있을 때 경원(慶源)과 종성(鍾城)을 자주 침입해 온 호적(胡賊)들을 치기 위하여 돌격장(突擊將)으로 뽑히어 크게 공을 펼쳤다.

37세 때 알성시(謁聖試) 무과(武科)에 등제(登第)하여 신립의 아장(牙將)으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한 해가 채 못되어 회령(會寧) 판관(判官)과 경원(慶源) 판관을 역임했을 때는 너그럽고 청백한 정사로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로 승진했으나 부민들은 떠나는 길을 막는 등 유임운동이 벌어져 할 수 없이 샛길로 빠져나와서 부임했다.

 

임진왜란이 일자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물망에 올랐으나 급박한 호남 정세로 조정의 긴급한 명령을 받아 단기(單騎)를 몰고 김제군수로 부임했다.

 

바로 전라관찰(全羅觀察) 이광(李洸)을 따라 중장(中將)으로 용인(龍仁)전쟁에 출전했으나 이광의 전의상실(戰意喪失)로 후퇴하게 되자, 부득이 전주로 돌아왔다.

 

때에 이순신의 철통같은 방어로 해로가 차단되자 적들은 육로로 남원을 거쳐 호남의 수도인 전주성을 공격하려는 속셈이었으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로부터 진로가 방해되자 어쩔 수 없이 험한 산길을 더듬어 천혜의 요새인 웅치와 이치를 아니 넘을 수 없는 사정이었다.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전라도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인 권율은 부하를 지휘하여 이치를 방어하고 김제군수로 전주진관병마동첨절사인 정담에게 웅치를 막게 했다. 

 

정담은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더불어 미리 웅치와 이치를 돌며 지세와 적정(賊情)을 살피는 한편 간첩을 색출하여 처형하고 목책(木柵)을 세워 진지를 구축하는 등 전쟁의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의병장 황박(黃璞)에게는 최전방 제일선을 막게 하고 나주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에게는 제 이선인 고개 중턱을 지키게 하였으며 정담 자신은 정상 고지에서 전투를 지휘하면서 적의 진격을 막기로 했다. 

 

이때 왜장 고바야카와타가카게(小早川隆景)의 별장(別將)인 안코오쿠지에케이(安國寺惠瓊)는 창원(昌原)에 있었는데 분지지계(分地之計)를 좇아 전라도를 공략할 계획으로 스스로 전라감사라 호풍지고 격문을 뿌리는 등 여러 가지 흉책을 써가며 남원을 경유하여 전주에 침입하려 하였으나 곽재우 부대의 공격을 받아 성주(星州)로 밀리게 되었다.

 

한양(漢陽)에서 이 정보를 들은 고바여카와 카가카게는 화가 치밀어 청주(淸州)로 남하하여 일대는 지례(知禮)와 거창(居昌)을 점거하고 일대는 황간(黃澗)과 순양(順陽)을 거쳐 무주(茂朱)에 침입한 다음 금산(錦山)을 검거했다.

 

이때 금산군수 권종(權悰 : 권율의 종형)이 순절했다. 그리하여 금산에는 안코오쿠지에케이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곽재우에게 몰린 분을 참지 못하여 용담(龍潭)과 진안(鎭安)을 분탕치고 웅치를 넘어서 전주를 공략하려 했다.

 

선조(宣祖) 25년(1592) 7월 7일에 적의 수 천명 선봉부대는 조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제 일선과 제 이선에 육박하니 황박과 이복남 부대는 많은 적을 사살한 끝에 이를 물리치고 진지를 더욱 강화했다. 

 

이튿날인 7월 8일 새벽부터 적은 전 병력을 동원하여 전면 공세를 시작하여 골짝을 메웠으니 총성은 우레 같고 칼날은 번개 같았다. 적은 고개를 향하여 기어 올라오면서 한편 싸우고 한편 교대하여 그 세력을 보강하니 제 일선이 황박 부대는 제 이선인 이복남 진지에 밀리고 말았다. 

 

적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정상으로 기어오르니 정담은 제 삼선인 고지에 있다가 붉은 깃대 밑에서 백마를 타고 오는 적의 장수를 활을 당겨 쏘아 눕혔다.

 

정담의 부장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서 한때 후퇴할 것을 권했으나 정담은 이를 단호히 뿌리치고「차라리 적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한발도 후퇴할 수 없다.」하고 계속 활을 당겼다. 그리하여 해가 저물 무렵까지 전투는 계속되어서 적은 지친 끝에 후퇴하려 하였으나, 진중에서 화살이 다 떨어졌다고 외치며 도망가는 자가 있어 적은 다시 겹겹으로 포위하여 정담과 전라도 여러 고을의 장병들은 최후까지 활을 쏜 후 백병전(白兵戰)으로 적을 무찔러 골짝을 피로 물들였다. 

정담은 종사관(從事官) 이봉(李峯), 강운(姜運), 박형길(朴亨吉) 등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장식했고 또한 많은 우리 측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을 가져왔다.


웅치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순절(殉節)

해남현감(海南縣監) 변응정(邊應井)은 중상을 입어 후송되고 이복남은 미리 빠져나와 안덕원(安德院)으로 진을 옮겼다. 때에 정담의 나이 45세로 슬기찬 훈공으로 찬란한 일생을 마쳤다.

 

뒷날에 김제 군민들이 웅치에 와서 정담의 유해를 찾아냈는데 갑옷에는 그의 성명이 적혀 있었으니 그가 평소에 이미 나라에 순절할 각오로서의 임전태세였음을 살필 수 있었다.

 

우리 측 용맹에 감동된 적은 유해를 모아 길가에 묻고 큰 무덤을 만든 후「조선국의 충신과 의사의 넋을 위로한다.」로 푯말을 세웠으니, 임진왜란을 통하여 이러한 푯말을 세운 데는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의 전사(戰死)와 아울러 두 군데뿐이었다.

 

경북 영양군(英陽郡) 일월면(日月面) 가곡리(佳谷里)에 거주하는 정담의 14세 증손인 정영발(鄭榮發)은 정담이 진중에서 그의 아들 서(緖)에게 보낸 간찰(簡札)을 보관하고 있다. 

 

간찰은 오랜 세월에 보관 소홀로 많이 낡았고 화재를 입어 발송 날짜를 판독(判讀)할 수 없으나 충렬이 넘쳐흐르는 글 내용에서 눈코 뜰 새 없는 전쟁 준비와 분망한 가운데서도 사후처리(死後處理)에 대한 간곡한 부탁 등 질서정연한 인사범절에서 반석 같은 무인의 기개를 살필 수 있다. 또한 당시의 정황을 밝힐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기도 하다.

「방금 적의 세력이 다가쳐서 임금은 가마를 타고 파천(播遷)하시니 집안일은 물을 겨를이 없기로 편지 한번 낼 수 없었다. 아비는 용인(龍仁)에서 돌아왔는데 다행한 일은 장병들이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몸 또한 병이 없는 것이다.

네가 염려할 것은 없고 너의 모친을 잘 보살피려무나. 선영 묘소 수호하여 임자 없다는 유감스러운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큰댁을 위시하여 여러 친척들도 각각 보중(保重)하시냐? 나는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을지니라….

성(箕城) 소식은 요새 와서 들었느냐. 죽은 뒤는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영천(永川)과 경주(慶州) 이남은 적의 소굴로 빠졌다는데 영덕(盈德)과 영해(寧海)는 어떠하냐? 적이 그득히 밀려오지나 않겠는가. 산의 숲 사이로 잠깐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당의 신주는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도 어제 적이 수도 없이 금산(錦山)에 다가왔다기에 방금 목책(木柵)을 치고 있노라. 

 

웅치와 이치가 대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곳이다. 이러한 기밀은 네가 알 바 아니다. 신하된 사람은 적과 싸워 죽는 것이 그 본무일진데 내 옷과 투구 갑옷에는 성명을 쓰고 새겨 놨으니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임금을 위하여 죽는다는 심정으로 너는 너의 아비 시체를 찾으려무나, 군무가 총총하여 이만 적어 보내기는 하나 이에 종이 적의 소굴을 뚫고 가서 전하게 될 것인가! 

다른 여러 댁에는 바빠서 각각 편지를 못 내니 이 간찰로 고루고루 알리도록 하라.」

- 전주시청 발행「우리고장 전주」 에서

 

울진 정담 장군


장군께서는 울진군 기성면 사동마을 해월 고택에서 1548년 9월 23일 출생하시어 1592년 7월 8일 웅치고개에서 순절하셨습니다. 

 

장군께서는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0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그 후 매형 황응진께서 보살펴 키우시고 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18세에 장가들어 19세 때 아들 승서를 낳았고 20세에 군에 입대하시고 그 후 부인은 아들을 데리고 친정인 영덕 창수면 인량리로 이사 45세 때 김제군수로 임진왜란 때 웅치고개에서 김제 의병 400여 명과 군졸 등 모두 1,000여 명으로 약 10배가 되는 왜군에 맞서 싸우시다 화살이 떨어지고 칼이 부러지니 모두 순절하신 것입니다. 

 

1592년 음력 7월 7일과 8일 후원군도 없이 싸우시다 모두 순절하시니 그 후 아들 승서는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현재 영덕군 창수면 일량리에 묘가 보전되어 있고 그 후손들은 영양군 일월면에 사당을 지어 현재 제사 올리고 있습니다.

종손 정재홍씨는 이 모든 사실을 말씀하시었습니다.

 

정담 장군이 계셨기에 전라도가 보전되었고 이순신 장군 거북선이 움직일 수 있었으며 위대한 거북선이 수백년이 지나 정주영 회장은 500환 지폐 한 장을 들고 26만톤 배 2척 1973년경(길이 320m) 시작으로 2025년 선박 5,000척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즉 정담장군이 있어 이순신 장군 거북선이 움직였던 것입니다.

 

아울러 웅치전투가 끝나고 200여년간 그 전적지는 아무도 찾는 이 없이 잡목이 무성한 상태였고 산 아래에 민가들이 한집 두집 생기면서 산 위에 화전을 일구어 농사지으려 개간하는데 꿈에 전쟁하는 형상이 심하여 어른들께 들으니 옛적에 그 산 위에서 큰 전쟁터라 하였습니다.

 

이에 동민들이 동제를 해마다 올려 드렸다고 하며 면장님께서 술잔을 정성으로 올리면서 다음 군수님이 참여하시고 1982년 당시 전주시에서 주관 대학교수 등 집필위원이 구성되어 정담 장군의 일대기를 정리하였고 선양사업이 추진되어 2022년 웅치전적지 일대가 국가사적지로 승격된 것입니다.

 

2022년 웅치고개 전적지는 국가사적지로 승격되어 전라북도에서 약 7만 평 규모로 사적지 조성계획을 세우고 현재 부지 매입 중으로 알고 있으며 2025년 8월 29일 울진군에서는 구자희 부군수를 비롯 약 30여 명이 향을 피우고 사동 정담 장군이 자라던 집에서 흙을 가져와 전적지 탑 주위에 모두 한 줌씩 뿌려 드렸습니다.

 

여기까지 찾아오는데 433년이 걸렸습니다. 앞으로 울진군에서 많은 분이 참여 정담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행사에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울진정담장군 숭모회 회원모집 *


· 회      장  임 우 규 (010-9365-6800)

· 수석부회장  김 연 국 (010-3189-2824)

· 부  회  장  윤 두 환 (010-3345-1358)

· 사무총장  장 헌 원 (010-2560-7539)

  ※ 가입비 : 30,000원 / 농협 351-1377-6734-23(예금주 : 울진정담장군숭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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