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도 개펄에 펼쳐진 피맺힌 저주의 풀
논산 명재고택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다니!”
이시매는 장탄식하며 울고 있는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당에서 시립해 있는 장정들에게 저잣거리 시장통에 가서 소녀의 주인이 되는 자를 불러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장정들이 중년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자로 체구는 제법 있었다. 그의 얼굴은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그는 영문을 모르고 잡혀 왔다가 대청마루 위에 자기 집에서 일하는 어린 여노비가 어사또 앞에 앉아있는 것을 보자 여노비가 무슨 큰 죄를 지은 바람에 주인이 자기가 불려 온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곧장 어사또 앞에 무조건 무릎을 꿇었다.
“자네가 이 아이의 주인이 되는가?”
이시매가 근엄한 목소리로 묻자, 중년인은 고개를 조아렸다.
“아… 예예. 제가 주인입니다요. 소인,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인이 잘못했사옵니다. 제가 사죄드리겠습니다. 제가 다…”
“이 아이의 몸값이 얼만가? 얼마를 내면 되는가?”
중년인은 고개를 들어 어사또를 바라보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좌우로 두리번거렸다. 이시매는 말을 길게 하지 않고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현장에서 몸값을 흥정했다. 중년인은 그제야 내용을 알고 다소 안심이 되는 듯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었다.
그는 어린 소녀의 신분을 중년인에게 알려주었다. 중년인은 깜짝 놀라 또다시 허리를 굽히고 용서를 빌었다.
이번에는 이시매에게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라 마루 위에 앉아있는 어린 소녀를 향해 허리를 낮춘 것이다. 혹시라도 훗날 있게 될지도 모를 후환이 두려웠다.
이시매는 극구 사양하는 중년인에게 약간의 몸값을 내고 친구 윤선거의 딸을 노비의 신분에서 구했다. 자유의 몸이 된 소녀는 훗날 소론의 영수가 되는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누이였다.
이 극적인 이야기는 윤증의 일생을 연도별로 정리한『명재연보(明齋年譜)』에 실려 있다.
강화부성이 함락되고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 강화도에서 일어난 부친 윤선거의 이해할 수 없는 처신과 어머니의 자결, 누이의 실종으로 점철된 명재 윤증의 어린 시절을 담담하게 기록한『명재연보』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의 비극적인 사회상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그의 문인들이 정리한 초본(草本)을 후손이 가다듬고 보완해서 1732년(영조 8)에 6권 3책으로 펴냈다.
그 후, 이 연보를 포함해서 윤증의 시문(詩文)을 모아 전집으로 간행한『명재유고(明齋遺稿)』는 한국고전번역원이 2008년에 번역하여 『국역 명재유고』12권을 간행했다. 이 전집의 제12권에 연보(年譜)가 실려 있다.
‘명재연보(明齋年譜)’(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군이 물러가자, 조정에서는 강화부(江華府) 전투의 책임을 묻기 시작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패배의 원흉으로 강도검찰사로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김경징(金慶徵)과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 장신(張紳)을 지목했다. 대신들은 두 사람에게 강화도를 제대로 지키지 않아 왕자들과 왕족들을 붙잡히게 한 죄를 물어 군율에 따라 그를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김경징은 강도검찰사로서 강화도의 방어 태세에 빈틈이 없이 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또한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가를 호위하는 임무까지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임무들을 모조리 소홀히 했다. 적을 경계하기는커녕 이민구와 함께 막사 안에 틀어박힌 채로 소일하면서 임무를 소홀히 했다. 싸우는 장수도 아니면서 대장 행세를 하며 주사대장 장신(張紳)과 병권(兵權)을 다투었다.
강화도로 건너갈 때는 왕족 일가보다 가족을 먼저 태워 보내고, 청군이 상륙했을 때는 왕족 일가는 물론이고 가족조차 내버려두고 달아났다. 가장 기본적인 임무였던 왕족 일가를 지키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조정의 대소 신료들이 김경징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록에서 김경징을 아무런 근거 없이 ‘미친놈(狂童)’이라고 칭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런 모욕적인 멸칭(蔑稱)이 합당할 정도의 중죄를 지은 인물이었다. 오히려 병자호란 당시의 행적만이 주목받는 바람에, 그 이전의 만행들은 묻혀버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은 잘못에 비해 후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인조는 조야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음에도 김경징이 인조반정 당시 반정공신의 한 사람이고 반정공신 김류의 아들인 점을 고려하여 처형을 주저하면서 미루고 있었다.
인조는 오히려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가 원래 적었으며 장신(張紳)은 조수(潮水) 때문에 배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라며 이들을 사형시키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고 역정을 냈다. 그러다가 인조는 마지못해 그를 평안도(오늘날 북한의 자강도) 강계(江界)로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 등 삼사(三司)까지 탄핵에 나서며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자, 왕으로서도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졌다. 인조는 할 수 없이 김경징을 귀양지에서 다시 소환하여 사약을 내렸다.
사실은 김경징의 부친인 김류도 자식을 살리고 싶었지만, 워낙 엄청난 반대에 부닥친 데다가 강화도에서 왕족마저 버린 행위로 대역죄라는 주장까지 나와, 자칫하다가는 자신과 손자 김진표까지 3대가 죄다 목이 날아가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뜻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실록에서는 단지 김경징이 사사 당했다고만 나와 있지만,『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는 그에 대해서 매우 안 좋은 일화들이 많이 싣고 있다.
김경징은 사약을 받게 되자, 부친 김류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끝까지 비굴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당시 양반들은 가죽으로 만든 갓신을 신고 다녔는데, 김류는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짚신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김경징은 부친의 다리를 부여잡고 짚신에 얼굴을 비벼대며 목숨 구걸을 했는데, 어찌나 몸부림치며 비벼댔던지 짚신 앞이 다 헤졌다고 한다.
이렇게 한심한 모습에 김류조차도 참지 못하고 아들의 뺨을 갈기면서 “강도에서 죽은 네 어미와 처를 생각해서라도 네놈 역시 알아서 일찍 죽었어야 했다.”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사실 김류도 아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평소 악행을 하도 많이 저질러서 저잣거리에서 비난을 많이 받던 인물이었다. 그나마 눈치껏 처신을 잘해서 영의정까지 오르며 78세로 천수를 누렸다.
김경징은 부친의 권세만 믿고 경거망동하다가 죄를 얻었고, 끝까지 살려달라고 발버둥을 치면서 최후의 발악을 하며 버티다가 집행관들이 강제로 사약을 먹여 죽임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치욕적인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항복 의례(1637년 2월 24일(음력 1월 30일) 한 지, 22일이 지난 1637년 3월 18일(음력 2월 22일)의 일이다.
인조는 강화부유수 장신에게 자결하도록 하고, 충청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에게는 전투 패배의 책임을 물어 참형한 뒤 그의 머리를 저잣거리에 내걸어 효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강진흔은 김경징이나 장신과 달리 끝까지 도망가지 않고 청군과 싸운 인물이었다.
조정에서 그를 참형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충청도 수영(水營)의 군관과 병졸들이 대궐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목 놓아 울면서 강진흔의 원통한 정상을 비변사에 호소했다.
그렇게 충청 수군들과 장수들이 애통하게 강진흔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음에도 인조는 ‘잘 싸우지 못하여 적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게 했다.’라는 죄목을 들었다.
억울한 죽음을 앞에 두고도 강진흔은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함께 의금부에 갇혀 있던 김경징이 사형 결정 소식을 듣고 목 놓아 대성통곡한 모습과는 달리, 그는 오히려 의연했다고 한다.
그는 처형 소식을 전하는 옥졸을 불러 자신이 차고 있던 칼을 주며 ‘이것은 매우 예리한 칼이다. 이 칼로 내 목을 빨리 벤 뒤 네가 가지고 가서 보고하여 공을 세우라.’고 했다고 전한다. 지휘부가 도망가기 바쁜 상황에서도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싸우려고 했던 그의 죽음은 너무 억울한 죽음이었다.
강화도 마니산
김경징의 죽음을 기록한 『인조실록(仁祖實錄)』 사관(史官)의 평가는 냉혹했다.
사관은 김경징을 가리켜 한낱 ‘광동(狂童)’이라고 평가했다. ‘아는 것이 없고 탐욕과 교만을 일삼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받는 자식을 김류(金瑬)가 잘못 천거하여 나라도 망치고 집안도 망쳤다.’라고 적었다.
실록에서 사관이 기록한 평을 보자.
“사신(史臣)은 논한다. 아아, 강도(江都)는 천연으로 이루어진 요새이다. 정묘년 이후로 시설하여 보장(保障)으로 삼았다.
그 성곽을 수리하고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저축하여 사변이 있을 때 임금이 머무를 곳으로 삼았으니, 묘당이 참으로 마땅한 사람을 가려서 맡겨 방어할 방도를 다해야 할 것인데, 김경징은 한낱 광동(狂童)일 뿐이었다.
글을 배우지 않아 아는 것이 없고 탐욕과 교만을 일삼으므로 길에 나가면 거리의 사람들이 비웃고 손가락질하는데, 김류(金瑬)는 사랑에 가려 그 나쁜 점을 몰랐으나 사람들은 집안 망칠 자식이라 하였다.
이때 청나라 군사가 대거 우리나라로 들어와 신보를 들은 지 며칠 만에 이미 경기 고을에 이르렀으므로, 김류가 검찰사(檢察使) 두 사람을 내어 먼저 강도에 보내어 주사(舟師)를 정리하게 할 것을 의논하고 그 아들 김경징을 우의정 이홍주에게 힘써 천거하여 입계하게 하였는데, 이홍주의 마음은 그가 반드시 패하리라는 것을 알았으나 권세에 겁이 나 애써 따랐다. (下略)
이렇게 전쟁 피해의 책임을 지휘관에게 엄중하게 물으면서도 정작 인조와 조정 대신들 가운데 누구 하나 자기 잘못을 되돌아보고 참회하는 자가 없었다.
비록 직책을 맡은 자들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면 응당 먼저 왕이 된 자가 하늘과 백성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빌었어야 했다. 하지만 사서에서조차도 삼전도에서의 치욕만 강조될 뿐, 백성을 사지에 몰아넣은 왕과 조정 대신들의 반성과 참회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부끄럽고 참담한 역사는 지나갔지만, 강화도에는 부끄러운 자들의 이름이 대(代)를 이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강화도로 피난하는 조정 행렬을 따라 강화해협 바닷가로 몰려든 백성들은 저들을 버리고 자기 식솔들을 먼저 배에 태워 강화도로 들어가는 강도검찰사 김경징의 파렴치한 행동을 보며 가슴을 쥐어뜯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미처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다가 청군의 무자비한 말발굽 아래 짓밟혀 죽어가던 사람들은 ‘경징아, 이 나쁜 놈 경징아. 우리는 어찌 살라더냐?’라고 목 놓아 울부짖으며 배를 타고 멀리 사라져가는 그를 한없이 원망했다고 전한다.
청군은 강화해협을 개펄을 오르내리며 거침없이 노략질과 살육을 일삼았다. 청군을 피해 산으로 숨고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그 어디에도 피할 곳은 없었다. 달아날 곳이 없던 사람들은 칼로 자기 목을 찌르고, 절벽에서 뛰어내렸으며 차디찬 바다에 몸을 내던졌다.
청군은 사로잡은 노약자들을 굴비처럼 엮어 개펄에서 목을 잘랐으며, 강간을 피하려고 시퍼런 바닷물로 뛰어든 여인네들이 둘렀던 머릿수건이 파도 속에 흰 꽃처럼 피었다고 했다.
어미를 잃은 갓난아기들이 벌거숭이로 눈 위를 울며 기어다니다가, 청군의 발길에 밟혀 죽어 그 피가 개펄에 흘러내렸다.
수많은 사람이 맨몸으로 포승에 묶여 청으로 끌려가는 행렬이 끝이 없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현장에서 죽어가는 백성이나 청군에게 끌려가는 사람들은 강도검찰사 김경징을 하염없이 원망하고 저주했다.
당시 남한산성과 삼전도가 치욕의 공간이었다면, 강화도는 말 그대로 참혹한 죽음의 아수라장이었다.
경징이풀. 강화도 해변에 펼쳐진 나문재 밭. 해변을 붉게 수놓은 나문재는 병자호란 때 백성을 죽음으로 처넣은 한성판윤 김경징 이름을 따 ‘경징이풀’이라고도 불린다.
강화해협 곳곳의 갯벌에는 모래땅에서 자라는 한해살이풀이 있다. 바닷가 모래땅에서 자라는 풀로 줄기가 많이 나오는 풀이다. 이 풀의 이름은 ‘나문재(鹽蓬)’라 한다.
회녹색을 띠는 잎은 늦여름부터 가을 사이 무렵 잎겨드랑이 또는 줄기 끝에 녹색을 띠는 꽃이 피며 뒤이어 별 모양의 열매가 달린다.
나문재는 순조 때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나오는 중궁전(中宮殿) 제사나 잔치에 올리는 진설(陳設) 물목에 포함될 정도로 아삭아삭한 식감이 훌륭한 미식 재료로도 꼽힌다고 적혀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온통 해안 개펄이 빨간색으로 뒤덮여 있어서 마치 선홍색 물감을 뿌려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가난한 어촌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개펄에서 이 풀을 뜯어다 먹으면서 허기를 달랬다.
아무리 뽑아 먹어도 해안 개펄에 계속 남아있는 나문재를 보면서, 어느샌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원망이 담긴 이야기가 넋두리처럼 이어져 왔다. 사람들의 눈에는 흐드러지게 핀 선홍색 나문재밭을 보면서, 병자호란 때 강화개펄에서 청군의 창칼에 피를 흘리며 죽어간 백성들의 피가 환영으로 다가온 것이리라.
그 후로 강화도에서는 이 풀을 일러 ‘경징이풀’이라고 불렀다.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으면 강화개펄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나문재를 보며, 당시 백성들의 피맺힌 한(恨)이 서려 있는 것 같다고 하여 ‘경징이풀’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자신과 자기 가족의 안위만을 살폈던 김경징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백성을 도외시한 당시 지배층의 인식과 행동을 엿볼 수 있다.
강화개펄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나문재는 백성의 고난을 품고 있는 역사의 증인인 셈이다.
김경징이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소식이 강화도에 전해지자, 저잣거리의 백성들은 다투어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어떤 이는 통곡하며, 또 어떤 이는 손뼉 치고 기뻐하며 개펄로 나갔다고 한다.
사람들은 개펄에 흐드러지게 돋아난 나문재밭을 가로지르면서 ‘경징아, 경징아. 이 원수 놈의 경징아.’라고 소리 지르고 발로 짓이기며 온종일 돌아다녔다고 한다. 백성들의 피맺힌 원한이 새겨진 그 아픔이 선홍색 핏빛으로 변해가는 나문재 풀에 투영된 것이다.
병자호란은 1637년 1월 3일(음력 1636년 12월 8일)부터 2월 24일(음력 1월 30일)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약 1개월 23일(약 54일) 동안 진행되었다.
이 전쟁은 청나라의 침공이 시작된 시점과 조선의 항복이 끝난 시점은 각각 양력으로 1637년 1월 3일과 2월 24일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병자호란’은 ‘병자년(丙子年)’에 일어난 전쟁이라는 뜻이다. 이는 음력을 기준으로 1636년 12월에 시작한 전쟁이므로 태양력이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았던 시기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명칭은 문제가 없다.
병자호란은 조선이 청나라에 굴욕적으로 항복하고 군신 관계를 맺는 등, 그 이전까지 명나라에 사대(事大)해 오던 관계를 청산하고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으면서 동아시아 외교 질서를 크게 바꾼 사건으로서, 이후 조선의 정치와 사회, 외교에 큰 영향을 남긴 사건이다.
특히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이 이루어지면서 전쟁 후에는 북벌론이 대두되고, 전쟁으로 인한 포로 송환과 처리 문제, 국력의 피폐가 사회경제적 문제로 이어져 조선 중기 사회질서 변화에 큰 영향을 가지고 온 사건이었다.
인구 면에서도 조선은 큰 상처를 입었다. 전쟁 전 조선의 인구는 대략 380만여 명이었으나 전쟁 후에는 약 330만 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54일에 불과한 짧은 기간의 전쟁이었음에도 전체 인구의 13.2%에 달하는 약 50만 명 정도의 인구가 줄어든 것은 전후 복구 노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인구 감소 층의 대부분은 청장년층으로서 이들은 전쟁 과정에서 희생되었거나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 이 때문에 생산활동과 전후 복구 사업에 나서야 할 인구의 주력이 줄어들어 조선 사회의 경제력 회복에 큰 지장을 초래하고 말았다.
1925년(을축년) 한강 대홍수로 땅속에 묻혀있다가 지면으로 드러난 삼전도비
병자호란 이후 명나라가 망하기 이전까지 조선은 명·청 관계에서 양면책을 취하였다.
명·청 교체라는 거대한 국제질서의 변화 속에서 조선은 명나라 대신 청나라에 ‘사대(事大)’를 취함으로써 살아남아야 했고, 그 중심에 있던 인조는 구시대의 인물인 임경업(林慶業)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임경업은 그때까지 지속되어 왔던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질서 속에서 자신이 믿고 있던 대의를 지키고자 노력했던 신념의 인물이었으나, 새로운 시대 변화 속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처럼 병자호란이 끝나고 불과 7년이 지난 1644년 명나라의 멸망 이후 임경업의 죽음에서 상징되듯이 조선 조정은 현실적으로 ‘대청사대(對淸事大)’라는 새로운 국제질서 속으로 완전히 편입하였다.
그러나 뿌리 깊은 숭명반청(崇明反淸) 여론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인조가 죽고 효종의 즉위하면서 숭명반청 여론은 현실적으로는 청나라에 대한 ‘복수(復讐)’와 명나라에 대한 ‘의리(義理)’를 양축으로 하는 ‘북벌론(北伐論)’으로 바뀌어 효종 재위 10여 년간 조선의 가장 중요한 국가 시책이 되었다.
숙종이 즉위하면서 북벌론이 폐기되고 현실적으로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와 이념적으로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고수하는 양면성이 조선 후기를 이끌어가는 핵심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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