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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있는 산문 65] 선열들의 항일투쟁, 그 길을 걷다

  • 윤은미 기자
  • 입력 2026.07.24 11: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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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영 선생 탄생 170주년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신흥무관+하얼빈+심양(4박5일) 일정>


제1일(10월 25일, 토) 인천공항(12:15) 출발→ 하얼빈 태평국제공항 도착(13:30)→ 하얼빈 정율성기념관, 조린공원(안중근의사 유묵비)→ 하얼빈 금곡호텔


제2일(10월 26일, 일, 7:30 출발) 하얼빈 731부대 유적→ 하얼빈역 안중근기념관→ 하얼빈역(15:37) 고속열차출발→ 이도백하역(19:40) 도착→ 이도왕조 온천호텔


제3일(10월 27일, 월) 백두산 천지, 월, 08:00)→ 대체 프로그램으로 보트 유람, 백두산 천지 일대 3D 영상물 감상함→ 통화이동(버스 4시간)→ 통화 라툰모건호텔


제4일(10월 28일, 화, 08:00) 버스로 길림성 출발, 신흥무관학교 합니하→ 추가가→ 고산자→ 양세봉장군 동상→ 심양으로 버스 이동(4시간 30분)→ 심양 화부호텔


제5일 (10월 29일, 토, 08:00) 심양고궁(청나라 누루하치고궁)→ 9·18 기념관(만주사변을 기념하는 역사박물관)→ 심양공항(16:35 출발)→ 인천공항 도착(19:40)

                                                                                                                                                                                     

 

4박 5일 동안 만주를 돌며 선열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던 여정도 이제 마지막에 이르렀다. 하얼빈과 통화, 심양의 역사 현장을 찾아 독립운동의 흔적을 직접 마주하며, 그 숭고한 뜻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 편에서는『신흥무관학교』와『양세봉 장군』의 항일 전적지,『심양 고궁』,『9·18역사박물관』을 둘러본 것을 서술하고자 한다. 부족한 글을 끝까지 함께해 주신 울진뉴스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만주에서 항일투쟁 선열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던 마지막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3일째(10월 27일/저녁)

신흥무관학교로 가는 길목, 통화에서

이도백하에서 점심을 마친 뒤 버스로 약 네 시간을 달려 통화에 닿았다. 신흥무관학교의 흔적을 찾아 만주 땅을 밟은 여정이었다. 백두산 남쪽 기슭을 지나 압록강 상류를 따라 이어진 길 끝에서 마침내 통화가 우리를 맞이했다.

통화는 중국 지린성 남부, 압록강 상류의 북한 접경에 자리한 도시이다. 오늘날에는 제약 산업과 포도주 생산으로 이름난 현대적인 도시지만, 이곳에는 고구려의 발자취와 독립운동의 역사가 깊이 스며 있다.

처음 마주한 통화는 넓은 도로와 현대식 건물이 어우러진 활기찬 도시였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통화 관할의 집안에 남아 있는 국내성과 광개토대왕릉, 장군총 등 고구려 유적이 이 땅이 한때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었음을 말없이 전해 준다.

산과 계곡이 이어진 험준한 지형을 바라보니 나라를 잃고 만주를 누비던 독립운동가들의 발걸음이 떠올랐다. 20세기 초 수많은 동포들은 이곳에 삶의 터전을 일구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길러냈으며, 그들은 훗날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를 이끌며 조국 독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지금의 통화는 평온한 도시이지만, 불과 1세기 전만 해도 이 산야에는 조국 독립을 향한 함성과 총성이 메아리쳤던 곳이다. 이제는 거리 곳곳에 걸린 한글 간판과 조선족 마을이 그 치열했던 역사가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말없이 전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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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백하→통화로 이동 중 농 심라면을 생산하는 공장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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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백하에서 점심 식당까지 따라온 끈질긴 조선족 인삼장수, 답사자 중 누군가 사주어서 다행이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는 길에서 만난 통화는 내게 단순한 경유지가 아니었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역사의 길목이자, 고구려의 숨결과 독립운동가들의 꿈이 함께 살아 숨 쉬는 기억의 땅이었다.

이곳에 뿌리내려 살아가는 조선족 동포들의 강인한 삶의 모습은 길에서 만난 한 인삼 장수에게서도 엿볼 수 있었다. 오토바이에 산양삼으로 보이는 인삼을 가득 싣고 다니던 그는 좀처럼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 일행이 탄 버스를 따라오며 끝내 인삼을 권하는 끈질긴 모습에서는, 낯선 땅에서도 삶을 일구어 온 사람들의 억센 생활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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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시 라툰모건호텔 <준5성급 호텔> 

 

밤이 깊어 숙소 창문을 열어 보았다. 어둠 속 산자락 너머 어딘가에 신흥무관학교가 있었고, 그곳에서 젊은 독립군들이 조국의 내일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 이곳까지 왔지만, 결국 내가 만난 것은 건물이나 유적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를 잃고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선열들의 독립정신이었다.


제4일(10월 28일/화)

독립군 전사 양성소, 신흥무관학교 옛터를 찾아가다

여기는 겨울로 가는 길목이라 겨울 옷차림을 하고 호텔을 나섰다. 우리는 버스로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옛터인 합니하(신흥무관학교 2차 이전지)→ 추가가(경학사, 신흥강습소 1차 개척지) →고산자(3차 이전지) 순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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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만주 길림성 통화현 합니하 마을 입구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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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화현 합니하(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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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유허지, 지금은 옥수수밭이 되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백두산 호랑이로 불리웠던 독립운동가 김동삼 선생 후손 김원일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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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유허지인 합니하에서 만주독립운동 선열들을 기리며 술을 흩뿌리고 있는 김동삼 후손 김원일씨

 

합니하는 신흥무관학교가 두 번째로 이전한 곳이다. 1912년 봄부터 망명지사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유하현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1912년 7월 20일(음 6월 7일) 100여 명이 모여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가지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학교 둘레를 해자처럼 감아 흐르는 하천(합니하) 있어 이름 그대로 천연요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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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고산: 사진에서 보이는 산봉우리가 대고산이다. 추가가 뒤편의 대고산에서 아래 밭에서 이상룡, 여준, 이시영, 김대락 등이 회의를 열고 경학사 조직을 결의했다고 한다.

 

합니하 유허지에서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낮은 산등성이에 일군 너른 옥수수밭이었다. 버스를 세워두고 우리는 유허지를 찾았다. 표지판이나 안내판 하나 없는 막막한 유허지다. 우리는 각자 유허지를 둘러보았다. ‘백두산 호랑이’로 불리던 김동삼 선생의 후손 김원일씨는 소주를 옥수수밭에 조용히 흩뿌리며 선열들의 넋을 기렸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늦가을 햇살은 눈부시게 내려앉았고 스며든 술방울은 금빛으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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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 위스키 제조회사 「기린」 이상준 과장이 이석영선생 사진을 넣은 기념주(위스키)를 대고산 추가가 신흥무관학교 유허지에서 들고 있다. 뒤에 대고산이 보인다.(2025.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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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가 유허지를 둘러보는 답사단원들

 

1911년 망명 지도자들은 만주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세우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옥수수 창고에서 열었다. 이것이 신흥무관학교의 시작이었다. 이어 1912년 군사 활동에 더 적합한 합니하로 옮겨 교사를 새로 마련하고 교육을 확대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 입교생이 크게 늘어나자, 고산자로 이전하여 병영과 연병장을 갖춘 본격적인 독립군 전사 양성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민족정신과 군사훈련을 함께 가르치며 수많은 독립군 지휘관을 길러냈다. 졸업생들은 훗날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항일 무장투쟁의 주역으로 활약하여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의 요람’이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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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과 신흥무관학교 주역, 사진 시계방향으로 이회영 형제, 이상룡(1858-1932), 김동삼(1878-1937), 이동녕(1869-1940), 이상설(1870-1917), 양기탁(187-1938)

출처: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서중석, 역사비평사, 2025)

 

그러나 학교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일제의 탄압도 거세졌다. 1920년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뒤 독립군의 근거지를 뿌리 뽑고 보복하기 위해 만주 일대에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였다. 이것이 경신참변(庚申慘變, 일명 간도참변, 1920년 10월부터 1921년 봄까지)이다. 이때 한인 마을 수백 곳이 불타고, 독립군과 애국지사, 

민간인 등 3천여 명이 학살되었으며, 2천여 명이 체포되고 수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등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은 두고두고 천인공노할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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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수수를 갈무리하는 농촌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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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촌 인민위원회(마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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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교회인듯한 건물의 십자가와 인공기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흥무관학교도 더 이상 학교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같은 해 지청천·김동삼이 이끄는 교도대와 졸업생들은 독립군 부대에 합류하여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면서 학교는 역사 속으로 막을 내렸다.

비록 신흥무관학교는 10년 남짓한 기간 운영되었지만, 3,500여 명의 독립군 간부를 길러내며 우리나라 항일 무장독립운동의 든든한 뿌리가 되었다. 해방 뒤에는 신흥무관학교의 교육 이념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이어져 신흥대학을 거쳐 오늘날 경희대학교로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남북 모두에서 인정하는 양세봉 장군 동상을 찾아서

만주의 깊은 산골 고산자 들녘에는 옥수수밭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산등성이를 10여 분 오르자 옥수수밭 들녘을 내려다보고 있는 양세봉 장군 동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장군의 동상 둘레에는 풀이 무성하고 돌계단은 깨어지고 낡아 있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풀을 뽑고 둘레를 정리하며 묵념으로 예를 올리며 장군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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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에 있는 양서봉장군 동상 앞에서(2025.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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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봉 장군 동상 둘레를 청소하는 답사단원들

 

마침 이곳 조선족 출신 현직 당서기가 우리를 맞아 장군의 삶을 들려주었다. 그는 양세봉 장군이 남만주 항일무장투쟁을 이끈 영웅이지만 세월이 흐르며 잊혀 가자, 조선족 동포들이 뜻을 모아 이곳에 동상을 세웠다고 말했다. 


양세봉(1896~1934) 장군의 본명은 양서봉(梁瑞鳳)이다. 동상에는 抗日名將梁瑞鳳으로 새겨져 있다. 그는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3·1운동 뒤 만주로 망명하여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중국 항일세력과 힘을 모아 한중 연합전선을 이끌었으며, 영릉가 전투와 흥경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침체한 독립군에 새로운 희망을 안겨 주었다. 군율을 엄격히 지키고 주민을 보호하여 현지 주민들의 신뢰를 얻었으나, 1934년 일본 밀정의 총탄에 서른아홉 나이로 순국하였다.

 

양세봉 장군은 대한민국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유공자이며, 북한에서도 대표 항일무장투쟁 영웅이라고 평가받는다고 한다. 

역사 해석에는 차이가 있지만, 일제에 맞서 끝까지 싸운 독립군 총사령관이라는 사실만큼은 남북이 함께 인정하는 드문 인물이다. 그만큼 그는 이념보다 민족 독립의 가치를 상징하는 항일투쟁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서울 현충원에는 그의 가묘와 묘비가 있다. 북한에서는 혁명 열사릉에 그를 안장하고 묘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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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봉장군 동상이 있는 산길에서 옥수수 밭을 태우는 연기가 매캐했다.


고산자의 평화로운 들녘을 바라보니 백여 년 전 이 땅을 울렸던 총성과 함성이 울려 퍼지는듯하다. 오늘의 대한민국 발전의 노둣돌은 국권 상실 후 수많은 독립군의 투쟁과 희생 위에 세워졌다. 하지만 남북의 이념에 따라 다수의 독립영웅이 아직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는 양세봉 장군 동상을 뒤로한 채 서산으로 기우는 해를 바라보며 산간의 옥수수밭 들녘을 천천히 내려왔다. 가을걷이를 마친 들판에서는 옥수수 줄기를 태우는 매캐한 연기가 바람을 타고 우리보다 먼저 들녘을 가로질러 퍼져 나갔다. 붉게 물든 노을과 연기 사이로 스쳐 가는 바람은 마치 한 세기 전 이 땅을 누비며 조국 독립을 꿈꾸었던 선열들의 숨결을 전해 주는 듯했다. 그렇게 서간도 고산자 들녘은 조용히 저물어 갔다. 


다섯째 날(10. 29. 수. 맑음) 

9·18기념관에서 역사의 상처를 마주하다

통화 고산자를 떠난 버스는 4시간 30분을 달려 10월 28일 저녁 9시쯤 심양 화부호텔에 도착했다. 우리는 저녁 식사 뒤 만주 답사의 마지막 밤이라 끼리끼리 호텔 근처에서 맥주집에서 긴 여정의 피로를 풀었다. 우리네 도시 거리와 별반 다름이 없었다. 길거리를 지니다 하이마트라는 한글 간판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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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의 밤거리에서 만난 한글 간판 하이마트

 

다음 날 아침, 호텔에서 식사를 마친 뒤 버스로 9·18기념관을 찾았다. 오전 8시였지만 입구에는 이미 많은 관람객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9·18 역사박물관은 중국 심양에 있는 기념관으로, 1931년 9·18사변을 기억하고 일본의 만주 침략과 중국인의 항일투쟁을 알리며 평화와 역사 교훈을 전하기 위해 세워졌다.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 관동군은 심양 북쪽 류탸오후 부근 남만주철도 선로 일부를 스스로 폭파한 뒤 이를 중국군의 소행으로 조작하였다. 이 사건을 구실로 일본군은 선양을 비롯한 만주 전역을 순식간에 점령하였고, 이듬해에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앞세워 괴뢰국 만주국을 세웠다. 이 침략으로 동북지방은 14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수많은 중국인이 학살과 강제노역, 자원 수탈과 문화 말살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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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서 중국의 항일역사를 설명하는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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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를 침략한 일제의 만행과 잔학상을 고발한 사진들

 

9·18사변은 단순한 국지 충돌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이 본격으로 시작된 역사의 분수령이었으며, 뒷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져 동아시아 전체를 전쟁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기념관에는 침략 준비 과정과 사변의 전개, 만주 점령, 항일투쟁의 역사가 수많은 사진과 문서, 유물로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작은 철도 폭파 사건 하나가 치밀한 거짓과 폭력으로 거대한 침략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전쟁이 얼마나 허망한 명분에서 시작될 수 있는지를 일깨워 주었다.


이곳은 사건 현장 가까이에 중국 정부가 1991년 9·18사변 60주년을 맞아 세운 기념관으로, 이후 전시 공간을 크게 확장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침략의 역사를 잊지 않고 희생자를 추모하며, 전쟁의 참상을 후세에 전하여 다시는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은 역사 교육의 장이다. 승리의 기쁨보다 침략의 상처를 오래 기억하려는 한 나라의 의지가 이곳 곳곳에 배어 있었다. 더구나 기념관 출입구에 중국지도자 강택민의『9·18 잊지말자』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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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기념관에 견학온 중국 초등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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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망 9·18을 잊지말자!』는 중국 지도자 강택민의 말이 적혀 있다.

 

관람을 마치고 광장으로 나오니 수백 명의 중국 여자 군인과 경찰 교육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차례로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국은 이곳을 단순한 박물관이 아니라 나라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평화를 지켜나갈 책임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살아 있는 배움터로 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심양고궁(澱陽故宮)에서 제국의 흥망을 보다

9·18 역사 기념관을 둘러본 뒤 우리는 곧바로 심양 고궁을 직행했다. 출국에 앞서 중국 랴오닝성 심양 고궁을 찾았다. 회색 기와와 짙은 붉은빛이 어우러진 궁궐은 화려하기보다 묵직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다. 오랜 세월을 견뎌 온 건물은 한 제국의 흥망을 말없이 품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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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고궁 3층 누각

 

심양 고궁은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가 건립을 시작한 궁궐이다. 그러나 그는 완성을 보지 못한 채 1626년 세상을 떠났고, 뒤를 이은 아들 홍타이지(1592~1643)가 궁궐을 완성하였다. 홍타이지는 1636년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이곳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청 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이후 심양 고궁은 1644년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기 전까지 청나라 최초 황궁이자 정치 중심지였으며, 오늘날에는 중국 3대 궁전 가운데 하나로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랐다.


홍타이지는 우리 역사에도 깊은 상처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1636년 병자호란(인조 14년) 일으켜 조선을 굴복시켰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는 치욕을 겪었다. 

그 결과 조선은 청을 상국으로 인정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보내야 했다. 우리 역사에서 이 사건은 명분만 앞세운 외교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를 수 있는지를 보여 준 것으로 역사 교훈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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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거리의 가스 불로 돼지족발을 거슬리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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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거리 현풍할매곰탕집 앞을 지나는 답사단원들

 

필자는 웅장한 궁궐을 이곳, 저곳을 보면서 한때 만주를 발판으로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청나라의 기세를 떠올렸다. 그러나 불과 300여 년 뒤 같은 만주 땅에서는 나라를 빼앗긴 조선의 청년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길러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다. 

제국을 일으킨 황궁과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군의 터전이 같은 땅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묘한 역사의 모순을 느끼게 했다.

심양 고궁은 단순한 문화유산이 아니었다. 한 시대에는 승리와 영광의 상징이었지만, 다른 민족에게는 치욕과 아픔의 기억을 간직한 공간이었다. 결국, 한 나라의 운명은 시대를 읽는 지혜와 굳건한 힘, 그리고 이를 지켜내려는 국민 의지의 총합이라는 역사 교훈 새기며 고궁을 뒤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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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 굴욕비(정식명칭: 대청황제공덕비(국가유산 사적제 101호, 서울 송파구 잠실동 소재),

이 비석에는 몽골글자, 만주글자, 한자로 되어있어 문자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를 마치며

추가가와 합니하, 고산자의 신흥무관학교 옛터에는 화려한 건물도, 웅장한 기념비도 없었다. 가을걷이를 마친 들판에는 마른 옥수수 대궁이를 묶은 단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고, 검불을 태우는 연기는 바람을 따라 느리게 흘러갔다. 

겉보기에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농촌이었지만, 바로 이 땅에서 수천의 청년들이 조국 독립을 꿈꾸며 군사훈련을 받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굳은 뜻을 품었다고 생각하니 쉽사리 발걸음을 떼기 어려웠다.

우리는 옥수수밭 한가운데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경기도 남양주 석주 이석영기념사업회 관계자가 준비한 술 한 병을 땅에 올려놓고 선열들을 향해 묵념했다. 이어 독립운동가 김동삼 선생의 후손 김원일 씨는 술을 들판에 천천히 뿌리며 선조들의 넋을 기렸다. 같은 의성김씨라는 작은 인연도 그 순간만큼은 독립운동의 큰 뜻으로 이어지는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신흥무관학교는 단순히 군인을 길러낸 무관학교가 아니었다. 나라를 잃은 절망 속에서도 조국을 되찾을 사람을 키워 낸 배움터였다. 이곳에서 길러진 독립군들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성장했고, 그 정신은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져 마침내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답사를 함께한 어느 분은 “오늘의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해외 여러 전적지는 찾으면서도 정작 우리 독립군을 길러낸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유적지는 찾아오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 광복군이야말로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임을 강조했다.

앞으로 사관생도들이 이곳을 찾아 선열들의 삶과 독립정신을 몸소 되새기는 배움의 기회가 마련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제안에 모두가 깊이 공감했다.


4박 5일 동안 전국 각지에서 모인 답사단과 함께 만주를 걸었다. 멕시코에서 찾아온 동포도 있었고, 부모와 함께 참여한 중학생도 있었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 국민의 높은 역사의식과 깊은 역사 이해에 여러 차례 감탄했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 답사에서 추가가 합니하, 고산자 등에는 이곳이 독립운동 유허지임을 알리는 안내 표지 하나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은 현실은 끝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관계 당국은 신흥무관학교 유허지에 안내 시설과 기념 표지 등을 갖추는 일에 적극 나서야할 것이다.

그러한 작은 실천이야말로 머나먼 만주 벌판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선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마땅히 다해야 할 책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정율성기념관, 731부대유적, 신흥무관학교 유허지, 9·18기념관 등지를 돌아보며 4박 5일간 시간을 보냈다. 한편으로는 후손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그 여정을 마무리하였다.                                  (끝)


<참고문헌>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서중석, 역사비평사/2025)/이석영선생 탄생 170주년 기념, 신흥무관학교 옛터답사 안내서(민족문제연구소, 2025)/울진의 독립운동사(울진문화원, 2011, 김희곤 외, 도서출판 성심)/ 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회고록(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방학진, 민연주식회사/2023), 신흥무관과 독립군/신흥무관학교 103주년 기념학술회의논문자료,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2014)/국가보훈부보훈 전자사료관/ 인터넷 위키백과사전/ 관련 기념관 자료 등

 

<답사기에 도움을 주신 분)

이번 답사를 위해 애쓰신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과 김재운 사무총장과 관계자 여러분, 민족문제연구소 해외지부 멕시코시티 지부장님, 김동삼 선생 후손 김원일씨, 경기 남양주 이석영선생기념사업회,(주)기원(위스키주조회사 이상준 과장) 등 전국에서 모인 답사단원들과 재미있게 안내와 해설을 해준 현지 조선족 안내원 등 모두에게 고마운 인사를 지면으로 전합니다.  

그리고 졸필 답사기를 여러 달에 걸쳐 연재를 해주신 김흥탁 울진뉴스 사장님께도 고마운 말씀을 전합니다.(김진문)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울진 출신은 누구인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후 신민회를 중심으로 뜻있는 애국인사들이『계몽운동 등의 온건한 투쟁으로는 조국 광복이 어렵다. 무장투쟁이 국권 회복을 위한 최선책』이라는 판단 아래 만주 등지로 망명을 감행했다. 

1911년, 서울 이회영 가문(6형제)을 시작으로 안동 일대의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일가 등 혁신 유림이 집단 망명에 나섰다. 

이들은 만주 서간도(추가가)에 독립군 전사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10여 년간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독립운동에 큰 공헌을 하였다.

당시 울진에서도 기성 사동의 황호, 황병일, 황만영 등 일가와 직산의 이희영, 온정 녹정동의 원세형(원병상 선생의 부친), 죽변의 주진수 일가가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필자가 지금까지 문헌으로 확인한 바로는 만주로 이주한 분 가운데 원병상, 이규동, 최해, 최경호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으로 알려져 있다. 간략히 그들에 대해 기록하고자 한다.


이규동 李圭東

(1889~1950, 평해읍 직산리, 건국훈장 애국장)

이규동 선생은 경북 울진군 평해읍 직산리 출신으로 1911년 아버지 이희영과 함께 만주 유하현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 간부로 성장하여 항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1917년에는 만주 해룡현 부민단 지부에서 활동하며 한인 사회의 자치와 독립운동 기반을 다졌고, 1918년에는 대한혁명군 중대장으로 복무하며 항일 무장투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하였다.

1924년 이후에는 군정·자치기관인 정의부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만주 항일 세력의 ‘3부 통합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어 민족유일당운동에도 힘을 보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위해 헌신하였다. 또한, 혁신농우단을 조직하여 만주 한인 교민들의 경제 자립과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등 독립운동의 사회·경제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도 앞장섰다. 만주에 신창학교를 설립하여 한인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을 하였으며, 1938년에는 영신 농장의 영신농업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청년들에게 농업기술과 함께 민족의식, 독립정신을 심어 주는 교육에 힘썼다.

광복 이후에도 동북한국교민회연합회장과 중국귀환동포호조동맹이사장 등을 맡아 귀환 동포들의 생활 안정에 헌신했다. 196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최해 崔海

(1895~1948, 매화면 덕신리, 건국훈장 독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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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해는 매화면 덕신리 출신으로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독립군 장교로 성장한 인물이다.

그는 1915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일, 김좌진 등과 軍政府를 조직하고 백두산 서남쪽 무송현에서 대종교 간부들과 흥업단을 조직, 군자금 모집 활동 등을 하였다.


이후 그는 군정부에서 개칭된 북로군정서 계열 독립군에서 여단장에 임명되어 김좌진과 홍범도 등이 이끈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여 일본 정규군을 크게 격파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 전투에는 다수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활약하였다. 1931년 길림성 등지에서 대종교를 통한 재만 한인들에게 민족의식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는 울진 출신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가운데 실제 독립전쟁에 참가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경호 崔京浩

(1898~1985, 죽변면 봉평리, 건국훈장 애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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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호는 죽변면 봉평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경술국치 뒤 국권을 되찾고자 고향을 떠나 서간도로 망명, 1918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독립군 간부로 성장하여 만주 지역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에 섰다. 

1929년 12월 조선혁명군에 참여한 그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조선혁명군은 양세봉 장군을 중심으로 조직된 남만주의 대표 항일 무장부대였다. 

1936년에는 조선혁명군 제2소대장을 맡아 항일 무장투쟁의 선봉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조선혁명군이 영릉가, 흥경성 전투 등 남만주 일대에서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였던 시기에 핵심 간부로 활동했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원병상 元炳相

(1895∼1973, 온정면 금천리, 충무무공훈장, 독립운동 관련 미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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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을 잃은 뒤 1911년 아버지 원세형(가족 13명)과 고모댁(5명) 등 18명이 망명길에 올라 만주 통화현에 이주하였다. 1913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 1916년 졸업하였다. 이후 루허헌 대사탄소학교에서 교사로 복무했다. 당시 졸업생들은 항일무장 투쟁 전사로 나가든가 아니면 보통학교 교사로 주로 복무했다고 한다.

1919년 한족회 학무부장 김규식 선생의 부름을 받고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일본군 현역 장교 출신으로 망명해온 이청천(지청천)과 함께 교관으로 근무했다. 

1920년 경신참변으로 산간벽지로 피신하는 등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된 후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1946년 5월 가족들과 평양, 해주 피난민수용소를 거쳐 38선을 넘은 후 개성을 경유,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후 그는 이시영이 주도하는 신흥무관학교 후신 신흥대학 설립에 참가, 학도감을 맡아 교무에 종사하였다.

 

 

그는 1948년 12월, 54세의 나이로 현 육군사관학교 제8기 특별반에 편입, 군사 간부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되었다. 6·25 한국전쟁 당시 포항 기계, 안강 전투 등에 참가해 격전을 치렀다. 이러한 전투공헌으로 그는 충무무공훈장, 은성충무무공훈장, 무성충무무공훈장, 다수의 표창 등을 받았다. 1956년(62세) 계급정년이 되어 대령으로 전역했다. 

그는 생전에 회고록을 남겼다. 최근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민연주식회사, 방학진, 2013)에서『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 회고록』을 펴냈다. 


원병상 회고록은 서간도로 이주한 망명길부터 늦깎이 군인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경험까지 파란만장했던 원병상의 삶이 총망라돼 있다. 그의 가족이 서간도로 망명해 힘겹게 정착해 나가는 과정은 만주의 독립운동가와 동포들이 겪었던 고난사를 온전히 알게 해주는 생활사 자료로서 가치는 물론 해방 후 남한 사회의 혼란상, 50대에 뒤늦은 군입대와 직접 체험한 동족상잔의 비극 등은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소중한 역사자료이다.


다만 필자로서는 원병상 선생에 대하여 안타까운 것 하나는, 그가 아직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원병상은 나라를 잃은 청년 시절에는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교관으로서 광복 후에는 국군 장교로 국가를 위해 헌신한 보기 드문 인물이다. 앞으로 새로운 사료가 발굴된다면 그의 독립운동 공적 역시 더욱 분명하게 밝혀질 가능성이 있으며, 이에 대한 좀 더 면밀한 연구와 재평가가 필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사진 출처 / 국가보훈부홈피 보훈전자사료관 / 원병상회고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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