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의 선정비(善政碑)

기사입력 2006.09.10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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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편집인  신상구

 


훌륭한 수령은 떠난 후에도 사랑이 남는다(遺愛)

돌 등의 금석물에 글을 새겨 덕을 칭송하여 오래도록 보여주자는 것이 이른바 선정비(善政碑)이다. 善政하면 먼저 목민심서란 책이 떠오른다.

저자 스스로 ‘목민(牧民)하지 못하고 심서(心書)’라고 자서(自序)한 한계성의 답답함을 가졌던 책이지만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 저술한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저자 자신의 뼈저린 고뇌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더욱 감명 깊은 책이다. 『역주 목민심서』의 「개역판서(改譯版序)」에서 “우리 전근대 사회의 참모습들을 가장 역사적으로, 사실적으로 제시해놓은 책이 아마도 목민심서가 아닌가 한다”고 했다. 선정비를 다루면서 목민심서에 나오는 선정과 그렇지 못한 예를 몇 개 들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한다.

【김희(金熙)가 남원부사가 되어 백성을 자식같이 여기고 송사(訟事)의 판결을 물 흐르듯이 하여 재직 몇 년 만에 온 고을이 편안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병에 걸려 관아에서 죽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기일에 항상 제사지내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김계희(金係熙)가 나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고 학교 교육을 크게 진흥시켰다. 그가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더니, 그가 죽자 어버이처럼 장사지내고, 기금을 만들어 매년 기일에 고을 사람 모두가 모여 명륜당에서 제사 지냈다.

송선(宋瑄)이 포천현감이 되었는데, 그곳은 전정(田政)이 잘 다스려지지 않아서 토호들의 토지 겸병(兼倂)이 성하여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그가 한결같이 법으로 다스리자 토호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3개월 만에 물러나게 되었는데, 백성들이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정언황(丁彦璜)이 안동부사로 있다가 병 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자 그곳의 유생과 아전, 백성들이 유임하기를 청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자 비를 세우고 추모하였다. 그에게 문안하기를 수십년이나 그치지 않았는데, 그의 죽음을 듣고 부의하고 또 제수 보내기를 3년 동안이나 하였다.

유정원(柳正源)이 통천군수로 있을 적에 은혜로운 정사가 많았다. 부교리(副敎理)를 제수받아 그가 단지 말 한 필의 행장으로 임금의 부름에 응해가니, 백성들이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말머리를 둘러싸고 소리내어 울며 더러는 길바닥에 누워 일어나지 않으니, 그가 위로하며 타이르고 떠나갔다. 후에 고을 사람들이 동비(銅碑)를 만들어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

이정도면 참으로 선정을 했다 할 수 있다. 뭇사람의 칭송함이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면 그 정사의 실제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선정을 하고 돌아가는 길에는 어찌 맑은 바람이 가득하지 않으리오.

이와는 반대로 선정비의 허를 드러내는 대목도 나온다.
【백거이(白居易)가 청석시(靑石詩)에서 “관가의 길 옆에 선 덕정비(德政碑)가 되고 싶지 않네. 실제의 덕이 아니라 거짓말만 새기는구나”라고 하였으니, 선정비를 믿기 어렵게 된 지 오래이다. 요즘 사람들은 해임되면 수백 냥을 간사한 향청의 직원과 교활한 아전에게 주어서 유애비를 세우게 한다. 이 돈을 비채(碑債)라 하니, 이것 역시 제 손으로 자기 비를 세우는 따위이다.

이상황(李相?)이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새벽에 괴산군에 닿았는데, 고을에서 5리쯤 미치지 못하여 하늘이 아직도 어둑어둑한데 저멀리 미나리밭에서 한 농부가 소매에서 나뭇조각을 꺼내서 진흙속에 거꾸로 꽂았다가 다시 길가에 바로 세우고, 또 수십보 앞으로 나아가 소매에서 나뭇조각을 꺼내어 진흙 칠을 해서 세우는데, 이렇게 하기를 다섯 번이나 하는 것이었다.

어사가 “저것이 무엇이요?”하고 물으니, “이것은 바로 선정비요, 나그네는 모르오. 이것이 바로 선정비요”라고 대답하였다. 어사가 “왜 진흙 칠을 하는 거요?”라고 묻자, “암행어사의 종적이 두루 미치고 있으니, 이방이 나를 불러 이 비 열 개를 주면서 다섯 개는 동쪽 길에 세우고 다섯 개는 서쪽 길에 심으라 하였소. 눈 먼 어사가 이것을 진짜로 알까 걱정되어 진흙 칠을 해서 세우는 거요”라고 대답하였다. 어사가 일을 조사하여 먼저 진흙비의 일을 따지고 봉고 파직시켰다.】

선정비를 10개나 세우던 백성이 어사까지 못 믿는 지경을 개탄하는 이야기다. 선정비란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벼슬아치를 표창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라고 하는데 이쯤 되면 선정이 아니라 폭정에 해당된다. 흔히들 말하는 가정맹호(苛政猛虎: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당시에 살지 않은 사람으로 정확한 고증 없이 무조건 선정비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 또한 위험하다고 본다. 실제로 선정을 베풀어 주민이 마음으로 우러나 세운 것도 많기 때문이다.

여러 조각으로 깨어진 선정비(외선미 비석거리)



처서(處暑)인데도 한낮은 푹푹찌는 날이다. 제일 먼저 기록에 나와있는 자료를 따라 온정면 외선미리 원마동 속칭 ‘비석거리’에 있는 선정비 3기를 보러 갔다. 구비 구비 산길을 돌아 사방이 산으로만 내려앉아 있는 농촌마을. 시간이 정지된 듯한 외딴 동네. 마을을 돌아나가는 시내가 더없이 맑은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처져 어느쪽 방향으로 흐르는지 모를 지경이다.

그 마을에서 주막집이 자리했을 것 같은 분위기의 폐가 돌담 곁에 세 개의 비들이 여러 조각으로 잡초더미 속에 있었다. 깨어진 비의 잔해들을 어렵사리 서로 이어 명문들을 읽어보았다. 군수 겸 울도첨사 심공 선완 영세불망비(郡守 兼 鬱島僉使 沈公善琬 永世不忘碑), 군수 심공 능무 영세불망비(郡守 沈公 能武 永世不忘碑), 군수 이공종규 영세불망비(郡守 李公鍾圭 永世不忘碑)의 세 개의 비가 뒤섞여 있었다. 여기서 군수란 울진군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평해군수를 말한다.

이 당시 울진은 현이었으며 군수가 아니라 현령이 부임을 하고, 평해는 군으로 군수가 부임했다. 평해군수와 울도(울릉도)첨사를 겸한 심선완을 군지 관안에 찾아보니 1885년(고종 20년) 3월 22일 부임하여 1886년 1월 14일 조정에서 강화판관으로 이동발령, 모친상을 당하여 가다라고 되어있다.

군수 이종규는 1831년(순조 31년) 1월 22일 부임하여 1834년 12월28일 도정에서 진주병 우후(晉州兵 虞侯)로 승진발령. 군수 심능무는 무과로서 1865년(고종 2년) 4월 15일 부임하여 1867년 2월 8일 부친상을 당하여 갔다고 되어있다. 비가 여러조각으로 파손된 연유에 대해 구전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비석들은 옆 집 할머니가 神을 대하듯 모셔왔는데, 이 비석에서 놀던 어떤 아이의 불미스런 사고로 인해 누가 고의로 파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할머니도 돌아가고 폐가가 되어 있어 정확한 진위를 단정하기도 어렵다. 이제는 비석거리란 옛 이름만 있을 뿐 비석은 보이지 않았다.

후포 인근에 있는 두 개의 선정비

<군수 이용익 영세불망비>

 


     <군수 장영환 영세불망비>

후포면 금음 4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후포면사무소 마당에 있다고 신진철 후포역사연구회 부회장님이 알려줬다. 면사무소 주차장 담장 한 쪽 구석에 방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서 있었다.

군수 이용익 영세불망비(郡守 李容益 永世不忘碑)라 되어있는데, 연표가 동치 9년(1870년)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는 군지 관안에 무과로서 1868(고종 5년) 8월 13일 부임하여 1871년 6월 1일 정치를 잘했다하여 영전해갔다고 되어있다.

또 하나는 평해 ‘다티고개’ 성황당 바로 옆, 무성한 풀숲에 있었다. 군수 장영환 영세불망비(郡守 張永煥 永世不忘碑)로 1903년에 만든 것이다. 그는 1901년(광무 5년) 부임하였다고 되어 있다.

햇살에 古色으로 빛나는 평해향교 태화루 밑의 선정비들



평해읍의 평해향교 태화루(太和樓) 아래 13개의 선정비가 나란히 서있다. 이번에 답사한 선정비들 중에서는 제일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웅장한 태화루의 건물과 시간의 색을 입은 돌들이 잘 어울려 보는 이로 하여금 미감을 절로 돋운다. 다른 곳의 열악한 환경에 비하면 참으로 양호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석에 새겨진 사람들은 이러하다. 비석을 세운 연도는 판독이 가능한 것만 한자 뒤에 기재하고, 성씨 뒤에 붙는 ‘公’자는 생략하여 현대인이 읽기 쉽게 하고자 한다. 

1.군수 우태영 애민선정비(郡守 禹台榮 愛民善政碑-1837년) : 무과로서 1835년(헌종 1년) 1월 22일 부임, 1837년 12월 24일 도정에서 울산우후로 발령. 

2.군수 권준 청덕 영세불망비(郡守 權晙 淸德 永世不忘碑) : 문과로서 1798년(정조 22년) 12월 14일 부임, 1800년 8월 23일 장령으로 발령받았고 사건보고를 지체하였다 하여 잡아감. 특히 이 비의 이수부분의 문양은 이곳에 있는 비들 중에서는 압권이다. 나무에 달린 꽃 송이를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어린아이의 천진함이 그대로 드러나, 보는 사람이 마음에 흐뭇한 꽃을 받는 심정이다.

3.군수 박후호 선정비(郡守 朴侯虎 善政碑) : 이 비는 최근에 세운 듯이 타 비와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4.군수 신치응 영세불망비(郡守 申致應 永世不忘碑) : 무과로서 1842년(헌종 8년) 7월 21일 부임, 1846년 12월 강진우후(康津虞侯)로 이임. 신치응은 평해향교 선정비 군에서 유일하게 동일인에게 세 번이나 비를 세우고 있다.

5.순찰사 김성규 영세불망비(巡察使 金星圭 永世不忘碑-1905년)

6.군수 박제범 청덕선정비(郡守 朴齊範 淸德善政碑-1909년)

7.군수 심능무 영세불망비(郡守 沈能武 永世不忘碑-1868년) : 무과로서 1865년(고종 2년) 4월 15일 부임하여 1867년 2월 8일 부친상을 당하여 감.

8.향교직원 손영복 영세불망비(鄕校直員 孫永復 永世不忘碑-1909) : 군수 등의 관리가 아니라 향교의 직원을 특별히 잊지말자고 비를 세운 점이 특이하다.

9.군수 이윤흡 영세불망비(郡守 李玧翕 永世不忘碑-1868년)

10.군수 신치응 영세불망비(郡守 申致應 永世不忘碑) : 무과로서 1842년(헌종 8년) 7월 21일 부임, 1846년 12월 강진우후(康津虞侯)로 이임.

11.군수 신치응 휼해영세불망비(郡守 申致應 恤海永世不忘碑) : 무과로서 1842년(헌종 8년) 7월 21일 부임, 1846년 12월 강진우후(康津虞侯)로 이임.

12.군수 이승원 영세불망비(郡守 李承遠 永世不忘碑-1890) : 1890년(고종 27년) 9월 22일 부임, 1894년 7월 7일 조정에서 내금장(內禁將)으로 발령.

13.군수 이희대 영세불망비(郡守 李熙大 永世不忘碑) : 무과로서 1864년(고종 1년) 2월 20일 부임, 1864년 10월 11일 사망.

타이어가 보호하고 있는 월송 초등학교 앞의 선정비 群
 


월송초등학교 앞에도 6개의 선정비가 나란히 서 있다. 그런데 몇 개는 타이어와 철사로 단단히 묶여있었다. 이런 곳에 선정비가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문화재란 원래 제자리에 있는 것이 제일 좋다고 한다. 뒤에서 밝히겠지만, 보호와 의미를 위해서는 과감하게 옮기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1.어사또 이계선 선정비(御使道 李啓善 善政碑-1851년) : 이계선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 철종 2년의 왕조실록에 “강원도 암행어사 이계선을 불러 보았는데, 전전(前前) 평해 군수 서경보, 전전 울진 현감 성영귀, 회양 부사 박효묵, 철원 부사 김기조, 상운 찰방 이장부, 전 원주 판관 김근희, 전 양양 부사 유기풍, 전 낭천 현감 권병덕, 전 횡성 현감 이유룡, 전 보안 찰방 남대유 등에게 죄줄 것과 금성 현령 김재헌, 안협 현감 강진은 아울러 포장하여 승서할 것을 서계하였다.” 라고 암행어사 이계선이 강원지역 관리들의 비행을 보고하고 있다. 말하자면 암행어사가 다녀가고 선정비를 세운 것으로 알 수 있다. 관찰사라든가 어사 선정비는 잠시 다녀간 후 지역에서 세워준 것이라 보면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주민이 세웠다기 보다는 후한이 두려운 관리나 잘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고을의 수령이 직접 세워주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고급 관료가 왔다 가면서 삽 두어번 흙을 던져 남긴 기념식수 같은 냄새가 난다.

2.관찰사 한익상 휼민선정비(觀察使 韓益相 恤民善政碑-1837년) : 조선 후기(後期)의 문신으로, 휘(諱)는 익상(益相), 호(號)는 자오(自娛) 또는 백졸(百拙)이다. 헌종(憲宗) 2년(1836)에 전국에 기근(饑饉)이 심하고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이 횡행(橫行)할 때 강원도 관찰사(江原道 觀察使)로 임명되어 탐관을 적발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었다고 한다.

3.찰방 이치원 영세불망비(察訪 李致元 永世不忘碑-1830년)

4.군수 김리빈 휼해영세불망비(郡守 金履彬 恤海永世不忘碑-1788년) :  1787년(정조 11년) 1월 부임, 1788년 6월 울산우후(蔚山虞侯)로 이임.

5.군수 정은성 애민선정비(郡守 鄭殷誠 愛民善政碑-1787년) : 무과로서 1786년(정조 10년) 1월 부임, 1787년 1월 강진우후(康津虞侯)로 이임.

6.군수 이옥 영세불망비(郡守 李鈺 永世不忘碑-1842년) : 문과로서 1840년(헌종 6년) 1월 22일 부임, 1842년 6월 울산병우후(蔚山兵虞侯)로 이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기성면 정명리 선정비군
















구산에서 기성 휴게소 조금 못미쳐 좌측에 세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차만 휑하니 달리는 도로변이라 삭막하기 그지 없는데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서 있는 선정비. 울진에서 조사한 선정비로는 가장 오래된 것들이다. 타 선정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다.

지역 대부분의 선정비들이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것들인데, 이곳은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300여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돌의 느낌은 긴 세월의 맛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수와 비신 좌대를 갖추고 있다. 18세기 이후는 이수가 있는 것도 있지만 아예 없는 것도 많고, 선정비를 세우는데 관직의 고하에도 일정한 규칙이 없다. 예를 들어 찰방과 같은 관속의 하급관리에도 이수가 있으며 관찰사나 군수에는 없는 것도 있다.

특히 이수의 문양은 아주 힘차고 거침없다. 이들 문양에 관해 전 세중옛돌 박물관 학예실장이었던 장원섭 박사는 “연화문과 당초문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와 이후 지방에서 만든 이수 문양은 어떤 특별한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분히 변형적 문양이 많다.

이 비석군에서 보이는 문양은 불교적 색채가 많이 가미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선정자체도 중요했지만, 선정으로 인한 좋은 세상을 바라는 마음, 즉 미륵적 사상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자문을 해주었다.

관찰사 정시성 청덕선정 영세불망비(觀察使 鄭始成 淸德善政 永世不忘碑-1682년)어사 오명준 선진활민 영세불망비(御使 吳命俊 善?活民 永世不忘碑-1707년)
관찰사 강선 청덕선정 영세불망비(觀察使 姜銑 淸德善政 永世不忘碑-1707년)

이수문양의 백미(白眉)가 있는 부구초등학교 옆의 선정비군



북면 부구초등학교 정문 옆에 역시 나란히 6개의 선정비가 서있다. 조사한 비들 중에서 제일 좌대가 폼나게 최근에 만들어져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다른 곳에는 그냥 땅에 있거나 시멘트로 글자까지 덮은 것들이 많다. 이 곳에는 하급관리인 육방관속(六房官屬) 찰방의 선정비가 3개나 있고, 이름도 생소한 참서봉 총세관이나 응도라는 직함도 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특히 찰방 이광원의 청백 선정비 이수 문양은 선정비 이수 문양들 중의 백미라 칭할만하다. 그 기하학적인 선의 모양은 볼수록 감탄이 절로 난다.
1.찰방 이치원 애민선정비(1829년)
2.찰방 이광원 청백선정비(1722년) 
3.관찰사 신재식 영세불망비(1822년)
4.찰방 오응선 청덕영세불망비(갑신년,1824?)
5.참서봉총세관 김학제 영세불망비(1906년) 6.응도 백공 선정불망비(1730년)

울진읍내의 월송대 입구에서 박락되고 있는 선정비들



군지에 ‘향인(鄕人) 임경필(林敬弼)이 1922년 9월 2일에 자비(自費)로 새마실(新村)도로 변에 25좌(座)를 정열(整列)하여 놓았다. 그 후 1981년 6월1일에 울진군에서 월송대(月松臺) 입구(충혼탑 올라가는 곳)에 이설(移設)하였고, 이설하면서 5좌(座)를 추가하여 모두 30좌(座)며 29기(基)이다. 이들 중에는 철비(鐵碑) 2기(基)가 있다’고 되어있다.

소나무 숲의 향이 그윽한 읍내 월송대. 산책로도 일품인 이곳에 헤아려 보니 모두 29개의 비가 서 있었다. 울진의 선정비군 중에서는 제일 많다. 얼핏 보면 그럴싸한 곳에 진열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소나무 아래에 있다 보니 그늘이 지는 시간이 많아 자연히 습하게 되어있다. 나무로 인해 떨어지는 눈녹은 물과, 빗방울로 수마 현상도 많이 되고 있다.

해가 다르게 돌의 표피가 일어나고 있어, 하루 속히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줄로 안다. 처음에 여기에 옮기고자 했던 발상에 문제가 있었다. 월송대 선정비군에 거명된 사람들은 관안에 나오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다. 자세한 것은 울진군지 하권의 389쪽-425쪽을 참조하길 권하고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입비 년도는 판독 가능한 것을 밝히지만, 박락(剝落)이 심해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많고 기재되지 않은 것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19세기에서 20세기초에 제작된 것이다.

1. 도순찰사(都巡察使) 신응조(申應朝)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2. 어사(御使) 오명준(吳命俊)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3. 관찰사(觀察使) 김치용(金致龍) 선정영세불망비(善政永世不忘碑)
4. 관찰사(觀察使) 민치서(閔致序)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5. 순찰사(巡察使) 민영위(閔永緯)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6. 관찰사(觀察使) 임한수(林翰洙)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7. 관찰사(觀察使) 정원용(鄭元容)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8. 관찰사(觀察使) 홍우순(洪佑順)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1852년
9. 관찰사(觀察使) 남정익(南廷益)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10. 관찰사(觀察使) 김정근(金禎根)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1902
11. 현령(縣令) 김태희(金泰熙)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12. 현령(縣令) 이상성(李相成)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13. 현령(縣令) 김태희(金泰熙)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1881
14. 현령(縣令) 남정환(南廷煥)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15. 현령(縣令) 왕근호(王謹鎬)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16. 현령(縣令) 김봉년(金鳳秊)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1871
17. 현령(縣令) 심규택(沈奎澤)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18. 현령(縣令) 심해유(沈?遺)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1872
19. 현령(縣令) 남예원(南禮元)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20. 현령(縣令) 김태희(金泰熙)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1827
21. 현령(縣令) 홍은(洪?)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22. 현령(縣令) 이광전(李光?) 청덕휼민비(淸德恤民碑)
23. 군수(郡守) 이규목(李圭穆) 거사비(去思碑)
24. 군수(郡守) 윤우영(尹宇榮) 인명선정비(仁明善政碑)
25. 평해군겸임 장영환(平海郡兼任張永煥) 선정비(善政碑)-1902
26. 관찰사(觀察使) 김승집(金升集) 청덕영세불망비(淸德永世不忘碑)-1905
27. 관찰사(觀察使) 강상국(姜相國) 선(銑)?임상국(任相國) 순기(舜?) 선정비(善政碑)
28. 현령(縣令) 성영구(成永龜) 후세불망비(後世不忘碑)-1836
29. 현령(縣令) 황익(黃益) 청덕애민선정비(淸德愛民善政碑)

이 외에도 북면 두천의 현령 김태희 선정비와 북면 나곡리 고포동 언덕에 있는 관찰사 이보혁 휼민도애비(觀察使 李普赫 恤民道愛碑-1734)와 최근에 발견된 2개의 비를 포함 60여개가 넘고 있다. 이상에서 현재 울진군에 산재해 있는 선정비를 대략 살펴보았다. 선정비는 다른 비와 달리 그 내용이 매우 빈약하다. 아이러니 하게도 선정을 베풀어서 세워주는데 왜 그 선정한 내용을 적지 않는지 모르겠다.

기껏해야 누구 누구 영세불망이라고 가운데 적으면서 양쪽에 조그만하게 4자로 된 상징성 단구를 몇 줄 적을 뿐이다. 물론 이런 것을 적지 않은 선정비도 많다. 예를 들어 평해향교에 있는 우태영 선정비에 古來善政 大小雖同 其甦其恤 孰如我公(예부터 선정을 베품에 대등소이하나 공의 그 가득함이며, 그 휼민이 어찌 나와 같을 수 있을까?), 또 박제범 선정비에 居官淸愼 虛稅告減 闔境安閑 流民見還(관아에 계실 때는 깨끗하며 삼가고 잘못된 세금을 감면하고, 다스리는 구역에는 평안하여 유민이 돌아오더라), 또는 월송대에 있는 이상성 선정비에는 半年爲政 百年不忘 (6개월의 정치로 백년 동안 잊지 못하리라).

맺으며-군(郡) 청사 안으로 선정비를 옮기자

하도 비석을 많이 세우자 중국의 한나라 때는 개인이 함부로 비석을 세우지 못하게 금비령을 내린 적도 있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선정비를 세우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지는 않지만 선정으로 주민이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신분이 분명하게 있던 조선시대에야 선정비를 세우고 주민에게 홍보도 했지만, 이제는 백성이 주인인 시대가 아닌가. 선정비는 누가 봐야 하는가. 당연히 위정자가 봐야 한다. 지금 봉평신라비 공원을 만들고, 그곳에다 흩어진 비들을 옮길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평해 향교에 있는 선정비를 순순히 옮기게 할지는 의문이다. 옮기는데 문제가 없는 비들을 봉평비 공원에 옮겨 보관을 잘 하는 것도 좋지만 그곳을 누가 오는가. 대다수 주민이나 관광객이 온다. 선정비를 그 사람들이 봐서 도움도 되겠지만 진정 누가 자주 보아야 하는가.

봉평비 공원에는 모형을 갖다놔도 된다. 물론 유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보관이나, 다른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옮기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보관과 효용 면에서도 군 청사 안이 적절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오랜 역사의 흔적이 묻은 그것 자체로도 무한한 상징적 의미를 나타낸다. 위정자들에게 선정의 마음을 돋우기도 하지만, 관공서 안의 빈약한 예술작품 감상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사실 위에서 소개한 선정비들 모두 수공예품으로 조각 작품의 질에서도 매우 뛰어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거금을 들여 작가들의 조각품을 구입하기도 하지만, 상징성과 작품성까지 함께 갖춘 선정비를 군 청사(의원회관 포함) 안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다 보관한다면, 보관의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되면서 일석 삼조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선정비를 따라가며 제일 많이 본 문구. 비문 끝마다 상투적으로 붙는 영세불망(永世不忘 : 영원히 잊지 말자)이란 4자. 오죽하면 영세불망이라고 했을까? 그 공덕을 영세불망하자는 것인지, 그 폭정을 영세불망하자고 했던 것인지는 묘한 여운이 남는다. 작금의 목민관들도 선정으로, 아니면 실정으로 영세불망 될 지는 그들이 하기에 달렸다는 것을 역사와 민중은 알고도 남으리라.  


* 선정비의 아름다운 이수 문양들 *

하나같이 천진스럽고, 해학적 맛이 좋아서 보고 있노라면 절로 흐뭇해진다.

양식의 특별한 규칙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화문과 당초문 운문(雲文) 등의 기존 정형화된 틀을 과감히 벗어나 기하학적 문양에까지 이르고 있다.

형식의 틀이 없어, 오히려 인간미와 무한한 상상의 즐거움까지 주고 있다.

작금의 석 구조물들은 저런 아름다움과 힘을 잃어버리고 말아 늘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그것도 한 시대의 양식으로 이해해주기는 내 관용의 폭이 크질 않다. 그냥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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