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가끔은 어느 생각의 한 쪽을 잡아낼 수 있다면’

기사입력 2016.08.31 12:20  |  조회수 7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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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상구 울진문화원 사무국장
①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2016년 8월 중순의 햇살은 환하다. 환하고 따갑다. 바람 한 점 없지만 입추가 지나서일까, 여름의 더위와는 다른 느낌이다. 맑은 따스함의 극이라고나 할까. 이런 날 오후에 불현듯 시간을 더듬어 본다. 벌써 10년이 지났다. [울진뉴스]에 연재하던 글 때문에 외선미 비석거리를 들렀던 그 때, 벼가 익고 있었다. 따가운 햇살이었지만 가을 속을 걷는 시간의 느낌에 놀랐다. 아마 지금쯤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지 10년 만에 다시 마음만 앞선 무모한 짓거리를 한 것 같다. 아마 그런 마음마저 없다면 죽은 목숨이기에 뭐라도 꼬무작거려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이문재의 ‘노독’이란 시처럼 함부로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길 너머도 그리워했다. 어쩌겠는가. 길 너머를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곳에다 몇 편의 글도 썼다. 지금 보니 아쉬움이 많다. 그러나 시작이었고 마음에 품었던 생각이 정리되어 가는 도중이었기에 보람도 있었다. 덕분에 틈틈이 책을 보는 호사도 누렸다. 가끔은 책이 어제와 다른 나를 느끼게 해준다. 어떤 책에서는 내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을 듣기도 했다. 잠시 지나가는 카타르시스도 행복이지만, 읽기 전과 다른 낯선 생각이 머물 때는 이보다 더한 희열이 있을까 싶었다. 묵직한 만남이 나를 깨운다.
  
그러나 평소 알고 배운 것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서 인간은 얼마나, 어디까지 더 어리석을 수 있을까 안타까이 자문자답해보곤 한다.

지금 사드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마치 이념 논쟁으로 대립하는 양상도 보인다. 우리나라가 좌우익 갈등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여전히 화해나 이해의 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념 대결의 양상으로 비치곤 할 때마다 안타까움을 넘어 측은한 생각마저 든다. 왜, 이제는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게 시간이 흘렀건만, 무엇이 민족과 이 나라에 이로움이 있는지 알 때도 되었건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나라 밖에서는 어떠한가. 최근 급부상한 이른바 IS라는 극단 이슬람주의에 의한 테러로 귀한 목숨이 허망하고도 무참하게 죽거나 살상당하는 것을 수시로 듣고 본다. 세계는 이제 어디서든 안전한 곳이 없게 됐다. 소위 월드 대통령이라 부르는 미국 대선 과정에서 보여주는 막말은 또 어떠한가. 소수자나 약자와 타문화에 대한 혐오성 발언과 이를 환호하는 장면을 대하면서 아연했다. 21세기에 우리가 바람직하고 선하다고 알고 있는 상식이나 관용과 화해가 쉽게 헌신짝처럼 버려지는지 목도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언제 약자를 배려하고 타자를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받아들이고 서로 화해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갈수록 요원한 생각이 든다. 영국 태생으로 사회비평가로 널리 알려진 부커상 수상자 존 버거는 “극단적 형태의 자살 순교자와 테러리스트는 절망 때문에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의 세상을 보면서 16세기에 살았던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1515~1563)를 떠올린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오류를 범하면서 서로를 미워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오스트리아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가 쓴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안인희 옮김, 바오 펴냄)는 양심적 지식인이자 관용을 실천한 카스텔리오의 위대한 투쟁을 소개하고 있다. 츠바이크의 생각에 완전히 흡입되어 공감한 책이었다. 카스텔리오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강력한 신정국가를 건설한 종교개혁가 칼뱅의 독재와 폭력에 맞서 싸운 인문학자다. 그는 칼뱅이 성서 해석에서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로 에스파냐 국적의 신학자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하자 이의 부당함을 만천하에 알린 용기 있는 양심가요 성서학자였다. 우리가 금욕적 종교개혁가요 지도자 정도로만 알고 있던 칼뱅의 초상을 자세히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분노와 울분마저 솟는다. 츠바이크의 작품인『에라스무스 평전』과『어제의 세계』에서 주장하는 중심된 생각 ‘맹목적 광신과 독재 권력의 추종에 대한 반대와 그리고 폭력의 부당함’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츠바이크는 마지막 망명지 브라질에서 2차 대전이 확대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정신적 고향인 유럽의 자멸로 우울증을 겪던 그는 1942년 ‘자유 의지와 맑은 정신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유서를 남기고 부인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몇 해 전에 영화 ‘타인의 삶’을 보고 감동받아 여러 번 보았다. 인간의 감성과 자유의지는 제도와 강압보다 원초적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아름다운 인간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도 제기해주는 영화였다. 영화에서 나오는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를 보면서 츠바이크가 책에서 밝힌 칼뱅시대 제네바 시민을 옥죄던 고발과 구속, 추방, 화형을 보면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말한다. “테러는 독재의 영원한 법칙이다. 칼뱅의 비밀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모든 독재의 영원한 법칙 즉 테러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세계 3대 전기 작가로 불렸던 츠바이크는 방대한 수집광이었다. 그의 저작 또한 그런 수집의 결과물로 가능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화형 시키면서도 정작 본인은 숨어서 보지 않았다는 칼뱅의 행동은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칼뱅의 신권 정치는 처음 반발에 부딪쳐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두 번째 제네바로 입성하여 강력한 성서 정치를 펼쳤다. 강철 같은 기율이 이렇게 위협적인 무질서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여 제네바는 그를 다시 불렀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상황과 비슷하게 맞닥뜨리면 참 당황스럽다. 가끔 지방 자치제의 문제를 말하며 다시 관선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는 “전두환이가 다시 와서 삼청 교육대 같은 것을 부활해야 한다”고 막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참 한심한 얘기다. 자기 자식이 삼청 교육대 가서 병신이 되든지, 죽든지 했으면 그런 말이 나올까? 아직도 그 피해자들이 수없이 있거늘. 참으로 생각 없는 말에 할 말을 잃는다. 통제된 사회를 좋아하는, 그 향수에 젖은 사람들이 있다. 본인이 피해 당사자라면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을까. 시대는 돌이킬 수 없다. 민선시대도 마찬가지다. 절차가 복잡하고 과정이 늦을 수 있지만 기다려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라도 낼 수 있기에 좋은 것이다. 몇 사람이 결정하고 불합리하고 문제가 있어도 다수는 따라와야 한다는 식이라면 인너서클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언제나 춥고 배고플 수밖에 없다. 그나마 여러 견제 기능이 작동하는 민선이란 제도가 있어 우리가 겨우 숨 쉬고 사는 것이다. 왜, 가장 빽없고 힘없는 사람이 단체장을 만날 수 있지 않는가. 그리고 목소리를 내면 귀 기울여 줄 사람이 관선보다는 많기 때문이다. 혹, 자기들이 그들보다 높은 권위에 서서 군림하던 그것이 무너진데 대한 싫음이 아닐는지 경계할 일이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생각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다. 로마에 새로이 나타난 예수가 그랬을 것이요. 가톨릭에 도전한 개신교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사하고자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사랑은 어디 갔는가? 오직 예수를 받들며 숭모하던 이들이 예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너무도 잘 알면서 함부로 다른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처단하고 박해했다. 왜 위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그들 성직자들에게 전해지지 않았을까? 그들은 배우고 익혔지만 오히려 착취하고 타락하고 흉악무도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자신의 지혜로 인해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프랑스 위그노(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싸움으로 수많은 위그노파들이 학살당했다. 모두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니 구구절절한 사랑과 용서의 성경말씀은 어디에 묶어두었단 말인가. 예수님의 말씀 중에 어디에 가톨릭이 있고, 개신교가 있고, 위그노가 있고, 재세례파가 있던가? 성경 어디에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심판하여 죽이란 구절이 있던가. 없다. 정녕코 없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교리에 인간이 신을 빙자해 심판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란 한 구절만 실천해도 그런 어리석은 짓들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종교 간의 분쟁이나 전쟁이 단순한 문제로만 일어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복잡한 문제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루터와 교황도, 세르베투스와 칼뱅도, 세바스티안도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이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말씀은 어디다 두고 죽이고 미워하는 짓을 했을까. 모두 신의 이름으로! 왜 전지전능하신 신은 그들에게 자비와 용서의 마음을 뿌려주지 않으셨는지 의아스럽다.
  
카스텔리오는 단호하게 말한다. “한 인간을 불태워 죽인 일은 이념을 지킨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살해한 것이다!”라고. 그는 “하나의 교리가 국가 기관과 그 억압 수단을 장악하는데 성공하면 그것은 무자비하게 테러를 자행한다고 했다. 또 “권력은 총체적 권력을 지향하고, 승리는 승리의 남용을 지향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러나 “독립적인 정신들은 언제나 인간의 자유를 유린하는 세력에 맞서서 항거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양심에 따른 반대자들(conscientious objectors), 즉 양심을 강압하는 일에 확고히 맞서는 자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또 “몇 명의 개인이 이러한 대중 유린에서 벗어나 유일한 진리와 폭력적인 편집광에 맞서 개인적 신념의 권리를 옹호하지 못할 만큼, 한 시대가 완전히 야만적으로 되고 하나의 폭력 정치가 완벽하게 체계화된 적은 역사상 없었다.”고 하여, 어느 시대에나 진리에 대한 희망이 있음도 역설했다.
  
카스텔리오는 칼뱅의 권력에 비하면 그가 말한 대로 ‘코끼리 앞의 모기’였다. 이름 없는 사람, 공적인 영향력 없는 존재, 가진 것도 없어 거지와 다름없는 학자였다. 그러나 어떤 당파나 광신주의에도 빠져들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다 갔다. 평화로운 삶을 버리고 칼뱅을 고발했다. 시대의 광증에 온몸으로 항거한 위대한 영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츠바이크는 볼테르나 에밀졸라의 용기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1563년 12월, 48세의 나이로 그는 운명했다. 그의 집에는 단 한 닢의 은화도 없었다. 그렇지만 대학 전체가 장례 행렬을 따라 나섰다. 관은 학생들의 어깨에 들려서 수도원 안마당에 묻혔다. 그의 제자 세 사람은 자비로 비석에 헌사를 새겼다 “고귀하신 스승께, 위대한 학문과 깨끗한 생애를 감사드리며” 언제나 그렇듯이 미움이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비웃음도 죽은 자를 건드릴 수는 없으며,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이념은, 참된 인간적 사상들이 그렇듯이 모든 유한한 지상의 폭력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 흄이나 로크 같은 사람은 알아도 카스텔리오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일찍이 인문 정신을 가지고 몸소 실천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새로이 알았다.

츠바이크는 말한다. “16세기 최고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고귀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고 찬양한 인물이다. 이 잊힌 사람에게 우리는 얼마만한 감사의 빚을 지고 있으며, 또 얼마나 끔찍한 부당함을 저지르고 있는가!”
  
500여 년 전의 인문주의자가 부르짖었던 주장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도 우리는 반목과 질시하고 있지 않은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피부가 다르다는 이유로 또 무엇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리고 정의는 행동하는 양심 속에 있다는 그의 외침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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