챈스 일병과 화랑 관창
기사입력 2016.10.3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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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화면만 보인다. 총성과 폭음 속에서 “펠프스가 당했다”는 외침이 들린다. 화면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두 해병이 챈스 펠프스 일병의 고향 집 앞에 서있다. 그의 전사를 통보하러 온 것이다. 2004년 4월 9일 이라크 무자헤딘 반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19세의 미 해병 챈스(PFC Chance Phelps, 1984. 7.14~2004. 4. 9) 일병의 유해 운구과정을 그린 영화 ‘Taking Chance(챈스 일병의 귀환)’는 그렇게 시작된다. 영화에는 대사가 거의 없지만 영화가 끝나고도 오랫동안 가슴 뭉클한 긴 여운을 남긴다.
장원섭(경민대학교 교수)
이라크 전쟁 전사자들의 유해가 얼음주머니에 담겨 군 수송기에서 내려지고, 영안실로 옮겨진 유해는 전문가들에 의해 정성스럽게 수습된다. 그들은 만신창이가 된 챈스의 주검을 지극정성으로 수습하고 준비된 해병대 정복을 입힌다. 그의 유해는 경건한 의식과 함께 운구 책임자 중령에게 인계되고 중령의 인솔로 민간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공항 관계자 모두가 그의 헌신과 고귀한 죽음에 경의를 표한다. 항공사도 운구 책임자에게 일등석을 배정해준다.
비행기가 몬타나 공항에 착륙할 무렵, 기장은 기내 방송을 한다.
“우리는 해병 전사자 유해와 함께 비행하는 영광을 누렸다. 운구를 위해 잠시 자리에 머물러 달라.” 운구 책임자들이 챈스 일병의 유해를 내릴 때까지 승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지 않고 저마다 옷깃을 여미며 지켜본다. 이윽고 승객들은 내리면서 그의 유해 앞에서 경의를 표한다.
몬타나 공항에서 챈스 일병의 고향 와이오밍까지는 육로로 이송된다. 항공기에서 자동차로 또 시골길 마차로 유해가 옮겨질 때마다 군인들이 절도 있게 사열한다. 어린아이들과 시민들도 차분히 경의를 표한다. 사막의 도로를 달릴 때, 성조기가 덮인 챈스 일병의 유해가 장의차에 실린 것을 알게 된 차량들이 라이트를 켜고 예의를 표한다. 트레일러 운전사는 앞에서 길을 열고, 다른 민간 차량들은 예의를 표시하는 라이트를 켠 채 묵묵히 꼬리를 물며 뒤를 따른다. 텅 빈 도로에는 추월하는 차량이 없다. 마침내 고향에 도착한 그의 유해를 마을 주민 모두가 나서 따스하게 맞아준다. 유가족을 만난 운구 책임자 중령은 챈스 일병의 유품을 정중히 전달하면서, 고향까지 오는 모든 여정이 존엄하고 경건했고 또한 명예로웠음을 고한다.
전우가 전하는 챈스 일병의 마지막 순간과 한국전 참전 노인의 감사 인사, 소년 보이스카우트의 사열 속에 장지로 향하는 유해, 가족에게 전달된 전사 당시 이라크의 시간을 가리키는 챈스 일병의 손목시계…. 예포와 함께 장례가 시작되고 의장대가 관위에 덮인 성조기를 삼각으로 접어 챈스 일병의 어머니에게 전한다. “미합중국 대통령과 해병대사령관은 미합중국을 대신하여 아드님의 조국에 대한 충성심의 증표로 이 성조기를 바칩니다.”라는 말과 함께.
영화는 감정을 자극하지도, 과장스럽지도 않아 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대사도 없이 담담히 진행되는 다큐멘터리 같은 장면 모두에는 미국인들이 느끼는 전사자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관통하고 있다. 이 영화는 미국이 왜 오늘의 미국이 되었는가를 그대로 보여준다.
2012년 10월 29일, 사상 최악의 허리케인인 ‘샌디’가 미국 버지니아주를 덮친 그날, 언론에 보도된 사진 한 장이 혼란과 혼돈에 빠진 미국을 가라앉혔다. 사진 속에는 살인적 폭풍우 속에서도 워싱턴의 알링턴 묘지에서 무명용사의 묘를 지키는 병사들이 꿈쩍도 하지 않고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장면이 들어 있었다. 이 부대는 그 밑에 ‘우리는 1948년 4월 1일부터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비와 바람과 눈과 태풍에도 이 묘지를 지키고 있다’고 썼다.
어디 미국뿐이랴. 영국의 웨스터민스터 사원에는 역대 왕을 비롯한 영국 역사상 영웅 3,000여 명이 잠들어 있다. 하지만 영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곳은 제1차 세계대전 전사자를 안치한 정문 바닥에 있는 ‘무명용사 묘’다. 이 무덤은 방문객들이 유일하게 밟을 수 없는 성역이자 가장 소중한 꽃을 바치는 성지다.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무명용사 묘지는 결혼식을 마친 러시아 신혼부부들이 가장 먼저 찾는 장소로 유명하다. 광장의 횃불은 단 한 번도 꺼진 적 없이 지금 이 시간에도 불을 밝히고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도 이런 소재는 많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풀어내는 방식은 미국인들의 그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지난 9월 26일, 동해 북방한계선(NLL) 근처에서 한미연합 해상훈련에서 대북한 잠수함 작전을 벌이던 링스헬기가 추락하여 탑승자 3명이 안타깝게도 순직했다. 영결식에는 유족과 해군과 해병대 장병 등 600여명이 참석했다. 영결식장엔 비통함이 가득했지만 세상은 너무나 무심했다. 국가의 명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다 희생한 분들에 대한 미국식 존경과 예의는 우리 사회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영결식에 참석했던 김혁수 전 제독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세 사람에게 우리 사회는 관심이 없었지만, 유족들은 어느 누구도 해군이나 나라를 원망하지 않았다. 유가족 누구도 소리 내 울거나 해군에 떼를 쓰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바닷속 1,030m에서 아들 시신을 찾아준 해군에 고마워했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 소개했다. 그날도 여전히 조국을 위해 순직한 군인들의 죽음보다는 시위하다 사망한 농민에 관한 보도가 더 많았다.
급기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는 야권이 그 농민 백남기에 대해 추모 묵념을 하자고 제안하면서 시작부터 파행을 겪는 데까지 이르렀다. 국가를 위해 희생된 장병과 의인들은 외면하고, ‘불법 폭력시위’ 민중총궐기에 참가하여 법을 어긴 백남기에 대해서만 묵념을 하자는 야당을 두고, 도대체 어느 나라 국회의원인지 모르겠다는 국민의 비판이 거세다. 이렇듯 국가를 가볍게 여기고 국민을 이렇게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이 나라의 국회의원들인 것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인 세상인데 일러 무삼하리오.
미국은 향군성(보훈처)이 정부 부처 가운데 두 번째로 크다. 전사자 유가족도 ‘골드 스타 패밀리스(Gold Star families)’로 대우받는다. 이에 비해 우리는 지금 어떤가? ‘군대에 가서 몇 년씩 썩지 말자’면서 군 복무를 단축했던 전직 대통령은 박수를 받았다. 오늘날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조롱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나라를 지키는 군인은 여전히 ‘군바리’로 취급받고 ‘군대에서 죽으면 개 값’이라 수군거린다. 나라를 지키다 순직한 분들보다 세월호 희생자와 불법시위를 하다 희생된 사람들이 더 관심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DMZ에서 북한의 지뢰만행으로 다리를 잃고 민간병원으로 이송된 부사관이 자비로 치료비를 부담해야 한다는 보도가 나오자, 그제서야 대통령과 국방부가 부랴부랴 나서서 문제를 풀어준 나라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다. 국가를 위해 희생된 전사자를 영웅으로 받들며 팔관회를 열고 국가적인 추모 분위기를 조성하여 그 유가족을 국가에서 위로하고 책임지는 사회. 백성 모두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을 자랑과 긍지로 여기는 국가적 분위기 속에서 관창(官昌)과 반굴(盤屈) 같은 화랑이 태어날 수 있었다. 한반도의 동남쪽 귀퉁이 작은 경주 들판에서 일어난 신라가 온갖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로, 김춘추의 탁월한 외교 전략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애국가 제창과 국기에 예의를 표하는 의식이 논란이 되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는 먼 나라의 이야기로 느껴진다.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 이번 태풍에도 발목이 부러졌지만 구조 밧줄을 놓지 않은 해경, 긴급출동해서 인명을 구조하다가 급류에 희생된 안타까운 젊은 소방대원도 있었다. 끝까지 제자리를 지키는 제복 차림의 군인, 경찰, 소방관들…. 이들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결코 바로 설 수 없다.
신라사회가 그러했듯이 “전사자를 포함해 단 한 사람의 동료도 전장에 버려두지 않는다.”는 미군의 철칙과 참전 군인들에 대한 지극한 예우는 군인들로 하여금 전장에 나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용기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챈스 일병을 영웅으로 받드는 미국사회를 보면서, 관창과 반굴 같은 훌륭한 화랑을 배출하여 삼국통일을 달성했던 우리 민족의 저력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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