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가끔은 어느 생각의 한 쪽을 잡아낼 수 있다면
기사입력 2017.01.2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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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그냥 그럴싸한 어느 한 구절에 공감하는 바보에게
신상구 울진문화원 사무국장이제 세상을 살아 온지도 반백년이 넘어서일까? 특별히 혹(惑)할 일도 점점 줄어든다.
아주 맛있는 것이나 매력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무슨 의욕이 없어서가 아니다. 주변을 보며 지나온 날을 돌아보니 허무한 일이 참으로 많다.
우리의 행복이란 것이 “들꽃 하나에 감동하는 삶,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고 했는데 맞는 것 같다.
무슨 특별할 것도 없고 대단할 것도 없는데 무엇인가를 막연히 기대하면서 살아간다고나 할까.
뭔지도 모르고 그냥 그냥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아마 그래서 또 살아지거나 살아 갈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가끔 ‘부질없이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어찌 보면 이보다 진부하고 통속적인 질문이 또 있을까만 그러나 어쩌랴! 이런 질문에 불쑥불쑥 놀라는 요즈음이다. 그 핑계가 조금씩 나를 새롭게 하여 낯설거나 이미 잊었거나 어딘지도 모른 곳에 서있게도 한다.
결국 혼자라는 고독만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 때는 쓸쓸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곁가지들을 모두 치고 정녕 고독한 마음으로 홀로 남아 내면의 소리를 듣거나 대화할 수 있도록 견디어 내야만 한다.
우리는 어차피 고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독을 피하려고 여러 짓거리를 하지만 결국에는 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조금씩 그 고독의 바다에 있어야 함을 알아갈 때, 무엇으로 고독과 맞설 수 있단 말인가. 나로서는 고독할 때 그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것은 독서 외에는 별 대책이 없다.
무슨 대단한 독서광이라서가 아니다. 그냥 이끌림으로 다시 찾고 또 찾을 뿐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래도 또 다시 찾게 되는 즐거움으로 아직은 나를 붙잡고 있으니 어쩌겠는가.“삶의 깊이는 감동의 깊이”라는 말도 있다.
나는 가끔 어떤 음악이나 어떤 말을 들을 때 마음 저 밑에 울리는 감동 때문에 슬픔으로 개운해지기도 한다.
또는 책을 읽다가 어떤 구절이 마음이 닿거나, 모르거나, 궁금하거나, 감동을 받을 때 밑줄을 치기도 한다.
가끔 붓으로 옮겨보기도 하고, 괜찮게 나오면 붙여놓고 음미하기도 한다. 소박하지만 아마 내가 책을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 일지도 모르겠다.
그 구절을 보며 책속에 거닐었던 순간이 떠오르거나, 그 의미에 다시 한 번 기대어 보면 늘 새롭다. 그러나 그뿐이다.
이런 기분은 책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그 시간과 공간은 오직 한 사람, 바로 읽는 그만이 오롯이 만날 수 있다. 그만이 자격이 있고 오직 그의 것이다.
그가 만난 진실한 기억만 남을 것이다. 아무도 그 사실을 알 수는 없다.
이렇게 만난 몇 조각의 흔적을 누군가 불쑥! 또 다른 사람이 우연히 만나 그럴싸한 구절이라고 마음이 동하여 좋아라 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 정확한 의미에 닿았을까. 그도 나처럼 같은 느낌일까?
물론 본인이 느끼는 것도 소중하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불안하고 엉뚱한 만남이 될 수 있다. 아니, 위험할 수도 있다. 그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다. 그는 결코 증인이 될 수는 없다.
문장 속을 천천히 작가와 함께 걸어 다닌 그 순간을 그가 아니면 어찌 그 느낌을 알 수 있겠는가. 더구나, 같이 있었지만 함께 걸었다고 말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작가와 반대 방향으로 또는 엉뚱한 데로 갈수도 있다. 같은 책이지만 섭취하고 이해하는 차이는 천차만별이다.
그 진리의 바다에서 길어 올린 것들이 인류 문명의 발전으로 점증되어 왔음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하물며 그러할 진데, 함께 걸은 사람이 골라 놓은 표제어 몇 단어, 몇 줄에 공감이라니! 가당키나 하던가.나무를 문질러 불을 붙일 때, 어느 쯤에서 불이 붙을 것인지는 누가 알겠는가.
나무를 비비고 있는, 그런 식으로 자주 불을 만들던 사람만이 육감적으로 지금쯤 아니면 아직 조금 더 있어야 불이 붙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이 붙는 그 기묘한 타이밍을.
또는 물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에게 물의 촉감을 말했다 한들 이해할 수 있을까. 살갗에 닿는 물의 그 느낌을 어찌 꿈에서나 생각했을까.
문장에 묻어나는 바람소리, 감미로운 향기, 어느 추운 들판에 거니는 외로움, 뙤약볕 아래의 뜨거움, 간다고 했지만 결국 가지 않을, 웃고 있지만 울고 있는, 그를 말하고 있지만 나인, 분노하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슬픈지, 그 수많은 감정의 갈래들을 누가 감히 만날 수 있으랴.
오직, 그 행간을 거닐면서 저자의 음성을 듣는 사람일 뿐이다.
“호밀밭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다면” “호밀밭을 걸어가는 누군가와 만난다면” J. D. 샐린저가 나를 경탄케 하던 그 밤이 생각난다.
잠 못 들게 하던 그의 문장들. 내 몸에 ‘슬픔으로 개운해진’ 감흥이 퍼지기도 했다.
그래서 자기가 읽은 책을 자기 평가와 해제를 가한 책은 자제되어야 한다. 다시 새로이 만나는 뒷사람의 고귀한 설렘과 그가 받을 소중한 감흥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행복의 중심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행위다. 굳이 얘기하려면 ‘좋았다’ 정도. ‘강력히 추천한다’ 정도면 족하다.
그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배려다. 조심스럽게 소개만 하면 충분하다.
무엇을 더 구구하게 늘어놓을 것인가. 남의 고귀한, 그만의 생각의 탄생을 막지 마라. 그리하여 한 구절에 공감하여 혹 어리석음을 범하는 우를 막을 수 있으리라.
다음과 같은 책 소개라면 어떨까 싶다. 너무나 아름다워 읽고 있는 글이 바스라질 것 같아 조심스럽다.「알제리에서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이 책은 끊임없이 나의 내부에 살아 있었고, 이십년이 넘도록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다.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얻은 위대한 계시란 매우 드문 것이어서 기껏해야 한두 번 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시는 행운처럼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 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알베르 까뮈가 쓴 장 그르니에의 『섬』의 서문 중에서 발췌(김화영 역-민음사)>내가 읽은 책을 다른 사람이 읽게 될 것을 부러워하는 경계가 부럽다.
그런 것이리라.
새롭게 잉태할 텅 빈 공간을 위하여! 나는 그곳에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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