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 잔으로 천하를 안정시키다

기사입력 2019.03.28 11:17  |  조회수 3,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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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섭(경민대 교수)

술잔이 몇 순배를 돌면서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다. 거나하게 취할 무렵, 황제가 입을 열었다.
“경들과 나는 전장터에서 형제처럼 지냈던 사이였소. 경들이 없었더라면 어찌 지금 짐이 이 자리에 있었겠소? 진심으로 고맙소.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일매일 불안하기 짝이 없소.”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자신을 황제로 추대한 5명의 공신을 불러 가진 술자리였다. 황제가 된 지 겨우 몇 달이 지난 때였다.

“폐하. 도대체 뭐가 그리 불안하시옵니까?”
“경들의 부하들이 어느 날 술 취한 주군에게 황제의 옷을 입힐지 알 수 없지 않소? 나처럼 말이오. 짐은 경들을 전적으로 믿지만…”

다섯 공신은 혼비백산하며 그 자리에 엎드렸다. 황제는 그들에게 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인생이란 무엇이오? 절벽 틈을 달리는 말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거라 하지 않소? 모두들 하나같이 부귀를 원하지만, 얼마 안 되는 삶을 편안히 살다가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오직 그것뿐인데, 그나마 그조차도 지키기 힘드니 말이오. 그러니 경들은 각자의 병권과 지위를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가면 어떻겠소? 그러면 여생은 아무 염려 없이 평안할 수 있을 것이오.”

공신들은 황제의 뜻에 따라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각자 지방으로 내려갔다. 훗날 사람들은 이 일화를 두고 “술잔을 들면서 공신들의 병권을 없앴다.”고 하여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라 하였다. 오대십국(五代十國) 내내 정권을 불안하게 했던 절도사들의 병권을 술 몇 잔으로 해결했다는 고사이다, 그야말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나라의 근심을 없애버린 것이다.

907년, 당나라 절도사 주전충은 부패한 당 왕조를 무너뜨리고 후량(後梁)을 세웠다. 그러나 겨우 17년 만에 후당(後唐)으로 교체되었고, 다시 후당은 14년 만에 후진(後晋)으로, 후진은 11년 만에 후한(後漢)으로, 후한은 불과 4년 만에 후주(後周)로 바뀌었다. 모두가 지방행정권과 군권을 가진 절도사가 제위를 찬탈하는 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강력한 왕조 요나라를 세우고, 만리장성 남쪽의 ‘연운 16주’를 빼앗는 등 중원을 위협하고 있었다. 실로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3백여 년 만에 찾아온 중국의 분열기요, 혼란기였다.

조광윤은 927년, 가난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21세 때 집을 나와 천하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절도사 곽위(郭威)의 부하가 되었는데, 곽위가 950년에 후한을 무너뜨리고 후주를 세워 태조가 되면서 출세길이 열렸다. 그리고 태자 시영(柴榮)의 눈에 들어 그의 친구이자 오른팔이 되었고 시영이 954년에 황제(세종)로 즉위하면서 가장 유력한 장군으로 떠오른다.

조광윤은 전장터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세종을 구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명성을 날렸으며, 그 뒤에도 다섯 번 전쟁에 나가 모두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오대십국 혼란기 최고의 명군으로 존경받던 세종이 그만, 959년 거란 원정길에 병사하고 만다. 황제의 자리는 졸지에 일곱 살에 불과했던 어린 공제에게 돌아갔다.
960년, 거란군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해 출정했던 조광윤은 개봉 북쪽의 진교역에 주둔했다. 혼란기에 어린 황제가 즉위하자,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던 부하 장수들이 술에 취해 잠든 그에게 황제의 옷을 입히고는 억지로 황제에 추대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졸지에 황제가 된 것이다. 조광윤은 군대를 몰고 회군하여 황궁을 점령했다. 그리고 공제의 양위를 받아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송(宋)으로 바꾸었다. 스무 살 때만 해도 당장 어떻게 하루를 살아갈지 기약이 없던 그가 3백 년 송 왕조의 태조가 된 것이다.

뜻밖에 황제가 죽고 어린 황제가 즉위하는 행운을 맞이한 것도, 또 그 기회를 이용해 역성혁명을 벌인 것도 수문제(隋文帝)와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전 왕조의 황족을 모조리 죽였던 수문제와 달리, 조광윤은 즉위 후 자신에게 제위를 넘겨준 어린 황제와 그의 친인척들을 정중하게 대접했다. 그는 태묘 안에 ‘맹서비’를 세워 두 가지 유훈을 후손에게 남겼다. 이른바 ‘석각유훈(石刻遺訓)’이다. 하나는 “전 왕조의 시씨 자손들을 죽이지 말고 우대하라.”였고, 다른 하나는 “사대부와 상소를 올린 자를 죽이지 마라. 아무리 불쾌한 말을 하더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였다. “이를 어긴 자는 천벌을 받으리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조광윤은 황제가 되기까지 전쟁터에서 말을 달린 군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전장터를 누비면서도 늘 책을 가득 실은 수레를 대동하고 다녔다. 그는 나라를 얻는 것은 무력으로 할 수 있지만, 얻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사대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빼앗을 때는 싸움을 잘하는 자들이 선봉에 서야 하지만, 빼앗은 것을 지키는 것은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사의 교훈에서 배운 것이다. 전쟁을 하는 것과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떤가? 정권을 만들어내기까지 치열하게 싸운 투사들은 정권을 손에 넣자, 요직을 모조리 차지하고 논공행상에 열중하면서 권력의 맛에 취해 있다. 전 정권에 가담했던 자들의 비리를 샅샅이 뒤져 모조리 도륙시키려고 작심이나 한 듯하다. 백성을 다스리는 지혜로운 선전들은 포장만 화려하고 요란할 뿐이다. 저잣거리는 가소롭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현대판 절도사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정조실록(2권, 정조 즉위년 8월 8일 정미)에는 정조도 신하들과 경연하는 자리에서 송 태조가 어지럽던 나라를 술 몇 잔으로 안정을 가져오게 했던 지혜를 배우고 싶어 했다고 전한다.

복수는 또다른 보복을 가져올 뿐이다. 해답은 역사 속에 들어 있다. 잊지 말라. 현명한 자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훗날을 경계함이 마땅할 것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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