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규 용사의 월남 참전기

기사입력 2020.09.03 14:53  |  조회수 4,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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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에 참전한 것이 벌써 반세기를 지났다. 어린 학생들에게는 역사책에나 나오는 이야기겠지만 전쟁에 직접 참여한 우리들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중요한 일이다. 이제 참전 용사들이 모두 팔순 노인들이 되었고 고인이 된 분들도 많아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들도 별로 없을 것이다. 두서없는 글이지만  자라는 후세들에게 내가 겪은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없게 하기 위하여 기억나는 대로 정리해  보았다.
(편집자 주 : 임우규씨의 생생한 월남 참전기는 제보 내용을 가감없이 정리·편집하였습니다.
자료 제공 :  임우규 /  편집·정리 :  김성준)


1. 머리말
 
월남전쟁은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무려 8년 8개월간 지속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자유 월남을 공산화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UN 연합군은 자유 월남을 지키기 위해 전쟁 전 기간 동안 월남전쟁에 참가하였다.

전쟁에 참가한 우리나라의 병력은 연인원 32만 5천명이나 되며 전사자 5천명, 부상자도 1만 1천명으로 집계되었다.

우리나라도 6.25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초토화된 적이 있었다. 1950년 6.25일. 그날은 일요일이라 모든 공무원과 군인들이 쉬는 날. 새벽을 틈타 북한군들은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선전포고도 없는 아주 야비한 침략이었다. 3년간 이어진 이 전쟁은 정부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한국군인 사망자 13만 8천명, 실종 60만 9천명 등 84만 7천명이 희생되었다. 민간인들도 엄청난 피해를 입어 사망자 24만 5천명, 부상자 23만명 행방불명자 30만 3천명, 납치된 자 8만 5천명, 학살된 자 13만 명 등 총 100만 여명이 희생되었다.

공산군들의 기습 남침으로 국토는 초토화되고 모든 국민들은 가족과 재산을 잃고 울부짖고 있을 때 UN군이 우리나라를 도와 현재의 대한민국을 지켜내었다.

그때 우리나라에 병력을 보내 도와준 나라들이 무려 16개국이나 되었고 의료지원국  5개국, 물자지원국이 39개 나라였다. 당시 월남도 우리나라에 물자를 지원해준 나라였다.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준 국가라면 우리도 도와주어야 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권리라면 아마 자유를 누리는 것일 것이다. 자유가 없다면 그건 바로 동물들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 월남도 자유 민주국가를 공산주의자들이 걸어온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 자유를 지키려는 많은 우방국에서  파병이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약 32만명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2. 군입대 후 파월을 결정하기까지

내가 군에 입대한 것은 1965년 5월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계절이었지만 훈련 생활은 매우 더웠다. 대구 00사단 훈련소에서 8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영천 부관학교에서 다시 8주간 교육을 받았다. 교육과정에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부분은 한글을 잘 쓰는 연습이었다. 당시에는 차트나 상장 같은 것들을 모두 손으로 써야 했기 때문에 글씨를 예쁘게 잘 쓰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였다. 나는 글자 하나하나를 바르게 쓰는 연습을 오래 하여 속필까지도 잘 쓸 수 있게 되었다.

글씨를 잘 쓴 덕분으로 부관학교 시절은 행정업무를 맡아 고생을 모르고 지냈다. 나는 영천 부관 학교를 졸업하고 육국본부 부관감실로 배속받았다. 명령을 받고 부임해 보니 한 내무반에 약 30여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신참인지라 전입신고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선임자가 성냥개비 1개를 주면서 ‘우로 어깨총’하라고 해서 따라 하게 되었다, 처음 하는 신고식이라 내가 봐도 어설픈 행동이 나와서 나도 모르게 ‘픽’ 하고 웃었다. 선임자의 지시에 웃었다는 이유로 그날 저녁 엎드려 뻗쳐 자세로 기합을 받은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에는 모든 군부대가 배식이 원만치 못해 풍족한 식사량이 부족했다. 내가 새로 부임한 부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양식이나 부식이 풍족하지 못했다. 보리쌀이 6~70%나 되고 부식도 콩나물국에 김치 정도가 고작이었다.

나는 육군 본부의 부관감실 사병 인사 기록반에 보직을 받았기 때문에 모든 부식이 풍족했다. 행운아인 셈이다.
이곳에서 얼마간을 근무하다가 육군 본부에 인원이 오버되어 전출을 원하는 자는 희망대로 보내줄 테니 신청하라고 했다.

나는 고향이 좀 가까운 데가 좋겠다는 생각으로 대구 육군의 학교에 지원을 했다.

서울에 있으니 주말마다 외출을 나가야 하는데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늘 마음에 부담이 되었고 대구는 울진과 가까워 휴가를 가기도 쉽기 때문이었다. 나는 희망대로 대구로 전출하여 고향에 다니기는 다소 수월했지만 비포장도로에 신작로 수준이라 대구에서 울진까지 6~7시간이나 소요되어 쉽지만은 않았다. 

대구에서 복무 중 월남으로 파병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대구 군의학교에 배속되어 서무계에 근무를 했기 때문에 다른 병사들보다 모든 정보를 빨리 알 수 있었다.

당시 월남전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나빴다. 월남에 가면 모두 죽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모든 병사가 월남파병을 기피했다

월남 사람들은 같은 가족끼리도 서로 이념 대립이 되어 낮에는 함께 생활하다가 밤만 되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죽고 죽이는 살벌한 현장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소문이 났으니 파병 대상자로 차출된 병사들은 어떻게 하든지 파병을 면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몸이 아프다느니,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느니, 결혼해서 가족을 돌봐야 한다느니 별별 핑계를 대가며 파병에서 제외되려고 애썼다. 
어떤 병사들은 고향에서 가족들이 찾아와 강하게 반발하기도 하였다.

나는 가난한 농촌 출신이라 가장 가슴에 맺히는 것이 가난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월남전에 참전하면 봉급이 많아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남들이 다 기피하는 전쟁터지만 어쩌면 나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파병 문제를 놓고 여러 각도로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나 혼자 죽는 것은 별것 아니지만 가장 마음을 붙잡는 것이 가족이었다. 여러 날을 혼자 고심하면서 만약 살아 돌아온다면 경제적인 자립기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나는 월남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파병지원서를 제출했다.

고향의 어머님께 협의해봐야 반대는 뻔한 것이었기에 나는 어머님께 알리지 않고 혼자 결정을 했다. 고민하던 기간에는 온갖 상념으로 머리가 복잡했는데 막상 결정하고 나니 담대해지면서 마음이 편하다.

나는 일주일간 특별 휴가를 얻어 고향의 어머님을 찾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면이기에 어머님께도 최대
한 각별히 대했고 내가 다니던 학교와 골목길까지도 하나하나 눈여겨 보면서 고향을 마음에 새겼다.

인근 야산에 있는 할머니 묘소를 찾아 “할머니 저 이제 월남 갑니다. 다시는 못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1년 후 다시 찾아와 할머니께 절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십시오” 간절하게 기원하며 정중히 술잔을  올리기도 했다. 

휴가 기간이 남았음에도 빨리 귀대하라는 전보를 받고 서둘러 귀대하게 되었는데 어머님 앞이라 웃는 표정을 지었지만 떠나는 내 마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파병될 당시 대한민국의 외환보유고는 1억 1천만불. 국가 총수출 9,700만불 GNP 100불 정도의 후진국이었다. 오히려 북한이 153불로 우리보다 더 잘살고 있었다. 월남전에 파병된 우리 군부대는 비둘기부대, 맹호부대, 십자성부대, 청룡부대 등이었는데 나는 ‘귀신도 잡는다’는 맹호부대였다.

파월 대상 장병들은 수차례의 교육을 통해 월남 현지의 정보를 많이 배웠다. 

열대기후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해충들도 많고 베트콩들의 게릴라 전법은 상당히 무섭다는 것 등 공포스러운 내용이 많았다. 
모든 정보들이 위험하다는 내용들이 많다 보니 ‘월남전쟁에 가면 살아 돌아오기 힘들다’는 인식이 장병들을 위축시켰다. 파병 대상으로 차출된 장병들은 어떻게 하든 파병을 피하려고 갖은 애를 썼고 심지어 훈련을 마치고 파병되는 순간까지 탈영하는 병사들이 있었다.

훈련 과정에서 어느 교관은 이런 말을 하며 우리에게 용기를 주었다.
“군홧발로 개미 떼를 밟아도 사는 놈은 산다.”

하긴 그렇다 동서고금을 통해 전쟁 없던 시대가 있었던가. 그때마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나라와 민족이 지탱된 게 아닌가.

인간이 태어나 한번 죽는 것은 만고불변의 이치인데 병들어 죽는 것보다는 자유를 위해 싸우다 죽는다면 훨씬 의미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닌가.

다행히 우리가 파병되는 지역은 직접적인 전투 지역이 아니라 월맹군(베트콩)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을 평정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위험 요소가 훨씬 경미하다고 하였다.

3. 훈련과 파월

대구의 부대로 귀대한 나는 파월 예정자들과 합류하여 군용열차 편으로 춘천을 향해 달렸다. 춘천에 도착한 우리들은 군용 트럭으로 갈아타고 헌병들의 칸보이(convoy)를 받으며 화천의 모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사격, 매복, 담력 키우기, 고공낙하, 포복 등 월남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든 훈련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도 중대 서무계 일을 보았기 때문에 새벽 점호에 제외되는 등 다소 편한 훈련 생활을 했다.

우리는 한 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약 1개 대대 병력이 맹호부대 교체 3진으로 편성되어 월남으로 출발할 절차를 밟았다, 내가 속한 부대는 중령 인솔하에 여러 명의 장교와 간호장교, 하사관, 사병들로 편성되어 출발을 위한 이동을 시작했다. 우리들은 군용 트럭에 몸을 싣고 오음 훈련장을 떠나 소양강 물길을 따라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비포장도로는 자동차가 지나가니 흙먼지로 뒤덮여 앞차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헌병차 1대가 우리가 탄 트럭을 안내하였다.

새하얗게 먼지를 덮어쓰고 얼마를 달려 춘천 경계에 당도해 보니 여기서부터 경찰 오토바이 5대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우리 트럭을 칸보이 했다. 이제 정말 전쟁터로 가는 분위기였다. ‘이제 가면 살아 돌아오기 힘드니 모두가 이렇게 요란하게 환영하는 모양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어떤 장병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가운데 우리는 맹호부대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며 불안한 심사를 달랬다.

자유 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천지가 떠나갈 듯 외치는 맹호부대 노래는 춘천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낮 12시경 춘천 시내에 도착하니 강원도지사를 비롯해 많은 사회 단체장들이 나와서 여러 가지 음식들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환송 잔치를 해 주었다. 최고의 대접과 서비스를 받으며 우리는 다시 서울 청량리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초저녁 땅거미가 질 무렵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그곳에서도 거창한 환송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성은 국방부 장관 등 정부의 요인들과 수많은 사람이 환송식에 참가하였다.

나는 내 동생인 ‘만중’이를 나오라고 사전 연락을 했는데도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탄 군용 열차는 청량리를 출발하여 다음 날 새벽 5시경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새벽바람이 아직은 찬데 거기서도 거대한 환송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중대의 사병 대표로 참여하였는데 동대구역 플랫홈에는 도지사를 비롯해 2군 사령관, 그리고 여러 명의 장군들, 기타 사회단체장들이 나와서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더러는 꽃다발을 준비해 목에 걸어주면서 무사 귀환을 축원하였다.

우리 일행은 다시 열차로 부산을 향해 달렸다. 여기저기서 받은 꽃다발은 모두 열차 창가에 걸어놓았는데 꽃도 우리들의 착잡한 심정을 아는지 시간이 갈수록 시들고 있었다.

부산에 도착하니 15헌병대에 근무하는 집안 조카인 ‘임계호’가 환송을 나와 주었다. 우리는 너무나 반가워 서로 부둥켜안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잘 갔다 올께. 우리 가족들을 잘 부탁한다”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배에 올라가는 발걸음이 이렇게 무거운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돌아보고 또 돌아다보면서 2만톤급 수송선에 올랐다. 드디어 전쟁터로 가는 것이다. 

수송선에 승선하니 배 안에도 여러 가지 환송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탄 수송선은 2차 세계대전 때 건조한 노후 수송선인데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청나게 큰 배였다. 항구의 수심이 얕아 자체적으로는 움직이지 못해 작은 인도선 두 척이 밀어내어 항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탄 배는 한국의 항구를 떠나 월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배를 타고 가는 기간은 1주일이 걸렸다. 운항 도중 제주도를 지나다 보니 햇살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햇살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도가 올라간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바닷물이 항상 파란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먼바다에 나오니 검은색으로 변했다. 검푸른 바다 위로는 갈매기나 날치 떼가 날아다니는 것을 수시로 볼 수 있다. 2~3일을 항해하다 보니 멀미를 하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아마 절반 이상은 뱃멀미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출항한 지 6~7일이 지나자 외부 기온이 높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월남은 더운 나라라는 것을 미리 알고 훈련도 받았지만, 막상 대해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일주일 후 우리가 탄 수송선은 월남의 ‘퀴논항’에 접안했다. 항구의 접안 시설은 임시 전시용으로 만든 것인데 철빔을 박고 그 위에 철판을 깔아 병력이나 화물들을 직접 선적이나 하역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인데 보기보다 훨씬 견고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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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 퀴논항에 상륙하는 장병들

4. 13개월 간 월남전에 참여하다   
 
일주일간의 항해는 참으로 길었다, 앞으로 내가 겪어야 할, 아니 내게 다가올 미래는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고 정신이 혼란스럽다. 뱃멀미로 많은 고생을 한데다 마음마저 불안하여 상당히 기분이 불쾌하다. 월남에 도착한 우리는 이내 훈련장으로 이동하여 일주일간 다시 현지 적응 훈련에 돌입했다.

나는 한국에서 사격 솜씨가 좋지 않아 늘 불합격 점수로 기합을 독차지하고 받았는데 월남에 와서는 이상하게 사격 명중률이 높았다. 기합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동료 사병들을 지도하기까지 했다.

훈련을 종료하는 날 사단 군수처에서 부관 병과(兵科) 인원 요청이 있었다. 나는 인솔자의 안내에 따라 사단 군수처에 근무하게 되었다.

내무반은 약 30여명이 합숙을 하는데 나무 침대가 하나씩 배치되어 있었고 모기장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숙소는 지하 1m 정도 땅을 파고 사방을 60센티 정도 둑을 쌓아 위에는 군용 천막으로 지붕을 덮었는데 야간에도 총알이 날아들어 올 수 없는 구조였다.

월남에 도착하니 정부에서 위문품을 많이 보내 주었는데 그 중 트랜지스터라디오, 배구공, 플라스틱 머리빗, 가루 치약 등이었다. 플라스틱 제품은 지금이야 값이 싸고 흔하지만 당시에는 처음 개발된 제품이라 귀했다. 라디오는 당시 우리나라 기술로는 처음으로 만든 금성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음향기기로서는 유일한 것이어서 매우 인기가 높았다.

사단의 군수 참모는 중령이고 참모 아래로는 병참 소령, 수송 소령이 있고 그 아래에 대위급 장교가 5명, 사병이 7명 근무했다, 나는 참모의 당번병으로 김교덕 군수 참모의 군복을 손수 세탁하여 다림질까지 깨끗하게 준비해 주는 것이 임무 중 하나였다. 군복은 옷의 주름이 칼날같이 나도록 풀도 먹이고 다림질도 철저하게 해야 되는데 비가 잦은 우기(雨期)에는 옷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쉰 냄새가 났기 때문에 다시 빨고 발전실에 가서 말려 오는 등 애를 먹기도 했다.

사단 사령부는 인사, 정보, 작전, 군수, 민사처 등 5개 처와 후송 수송지원대, 포병대, 헌병대, 의무 참모부 등이 있어 야간 보초는 순번대로 서게 되어 있었다. 전쟁터인지라 밤낮없이 긴장의 연속이었는데 특히 야간 보초는 잠시도 게을리할 수 없다. 초병들은 졸음을 쫓기 위해 수통에 커피를 진하게 타서 하룻밤에 한 통을 거의 마시기도 했다. 물론 아침이 되면 속이 쓰려 고통스러울 줄 알지만…

몇 개월이 지난 후 수송 하사가 보던 업무인 사단 차량을 배차하는 업무를 보게 되었다. 사단 군수처의 차량 배차는 매
우 엄중하여 중령이라도 마음대로 못하고 사단장 명의로 헌병 참모에게 캄보이를  지시하게 하였다. 연예인이 오면  군용버스도 칸보이를 하도록 헌병대에 지시하고 PX 물품 수송 차량의 칸보이 지시, 작전시 병력 이동 차량의 칸보이 지시, 한진 탄약수송 차량의 칸보이 지시 등이 나의 주 업무였다, 파월 장병중 어떤 이들은 귀국하지 않고 한진 그룹이나 건설회사에 그대로 취업하는 사례들도 많았다.

나를 포함한 우리 장병들은 예상치 못한 장애로 고생하는 예가 많았다. 전쟁이란 다 그런 것이겠지만 대포 소리가 어찌나 큰지 고막을 쓰지 못하는 장병들이 많았다. 우리가 쓰는 무기 중에 155mm 포는 명중률이 우수하여 오차 범위가 5m 이내였다. VC(베트콩)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무기인데 연속적으로 대포를 발사하면 엄청난 포음에 포를 쏘는 사람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지만, 윤경태라는 친구는 포병 부대에 근무하면서 대포 소리의 충격으로 50년이 지난 지금도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전쟁은 참으로 무자비하고 비참하였다. 매일 저녁때가 되면 사단에 전투 상황 보고가 올라오는데 전사 0명, 부상 0명, 행불 0명 등 인명 피해 상황이 집계되어 각급 참모부에 전달된다. 매일 생사고락을 함께하던 친구가 갑자기 시체로 변한 모습들을 보면 정말 몸서리가 쳐지고 인간이 왜 이 같은 갈등을 겪어야 하는가? 누가 이들의 생명을 앗아가는가? 하는 생각들을 해보면서 나에게도 언젠가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감에 젖는다.

당시는 아직도 현대식 무기가 양산되지 못한 가운데 M16 소총이 처음으로 지급되었다. 유병현 사단장이 처음 지급된 M16 소총으로 시범 사격을 한 것이 이 무렵이었다.

양력 4~5월은 한창 더울 때이다. 자동차 보닛에 계란을 깨 놓으면 금방 프라이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밤낮의 기온 차가 심해 밤에는 상당히 추웠다. 비가 한번씩 쏟아질 때는 갑작스러운 폭우로 변해 한국의 한여름 소나기처럼 굵은 빗방울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쏟아진다. 월남에서는 이런 집중 호우를 ‘스콜’이라 하는데 이럴 때는 빨리 비를 피해야 한다.
월남전에서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은 베트콩 지역(공산)과 월남 지역(민주)의 중간 지점에 시장이 있다는 것이다. 주변에 사는 농민들이 여기에서 각종 농수산물을 매매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주민들의 생업을 돕기 위해서 맹호부대에서 산 중턱에 20여 평 정도 크기의 가설 건물을 만들고 비를 맞지 않도록 함석으로 지붕을 덮어 준 정도의 허술한 시설이었다.

결국은 아군과 적군이 함께 시장을 이용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군사 작전으로 맹호부대와 백마부대의 ‘오작교 1단계’ 작전이 있었다. 이 작전은 일명 ‘견우 직녀 작전’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맹호 26연대 작전 지원병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26연대 본부는 해안가 모래사장 인근에 본부가 있었으며 야간 본부에서 약 5~700m 주위의 각 산 중턱에 야간 근무를 서게 되었다. 한밤중쯤일까 박격포탄이 연대 막사 쪽으로 몇 발이나 날아가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쇠 불덩어리 그 자체였다. 나중에 보니 다행히 거리 조정이 잘못되었는지 바다로 낙하한 것을 보았다. 이때 연대 본부에서는 적의 표적이 될 것을 직감하고 발전실에서 전기 공급을 중단하여 캄캄한 암흑천지 상태였다.

한번은 초병들이 3~4명이 모여 약간 높은 지형에서 주위에 ‘클레모아’라는 무기를 적들을 향해 설치해 놓고 서로 이야기를 하는 사이 지형지물에 밝은 VC(베트콩)들이 클레모아 방향을 아군 쪽으로 돌려놓고 갑자기 소리를 치니 아군이 급하여 그대로 스위치를 누르는 바람에 아군진지가 파괴되고 큰 피해를 입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클레모아는 약 150개의 구슬 같은 탄알이 일시에 발사되는 무기로 위력이 대단하였다. 나는 당시 인근에서 잠복근무 중이었는데 즉시 헬기가 출동하여 네이팜탄을 발사하였다.

네이팜탄은 그 소리가 천둥 치는 것 같이 크고 웅장한데 헬기 양쪽에 각 1대씩 달고 다니며 발사했는데 그 위력 또한 대단했다.

주변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다음 환자 수송용 헬기가 오는데 전투에 갓 투입된 이등병과 일등병이 팔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어 신음하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나는 그 와중에 헬기 안착을 위해 랜튼을 켜고 흔들며 헬기가 착륙할 자리를 수신호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큰 실수였다. 스스로 공격 목표물을 만든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헬기 착륙을 도와주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찔한 생각인데 따지고 보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기에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베트콩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마을인지라 지형지물에 밝기 때문에 살금살금 숨어들어와  클레모아를 아군 진지로 돌려놓는 수법을 여러 차례 썼다

오작교 작전은 그 지역이 평정되면 그다음 단계인 ‘민사심리전대 G5 작전’으로 바뀌어 개시된다. 

‘민사심리전대 G5 작전’이란 마을 주민들을 위해 학교도 지어주고 태권도도 가르치며 학용품 같은 것도 나누어 준다. 또한 농사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탈곡기 공급, 교량 건설 등 민간인의 심리를 회복시키는 전술이다.

당시 월남은 탈곡기가 개발되지 못해 농민들은 탈곡하는 작업을 가장 힘들어했다. 우리 한국군이 들어가면서 속칭 ‘와랑가랑’이라고 하는 족답식 회전 탈곡기를 지원해 주었는데 월남 농민들은 ‘세상에 이보다 좋은 기계는 없다’고 할 정도로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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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의 기후는 우기와 건기로 나눌 수 있는데 건기에는 먼지가 많아 부대 내에도 먼지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따라서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의 먼지는 기름을 뿌려 방지하기도 했다.

경유보다 품질이 낮은 경질유라는 기름을 살포하는데 먼지는 방지가 되지만 우기에는 미끄러워 차량 운행이 매우 위험하기도 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위험한 전쟁터에서 사병들의 사기 양양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부대에서 사병들의 사기를 돋워주기 위하여 부대별로 몇 명씩 인원을 배정하고 바닷가 휴양지에 1일 관광을 시켜 주었다. 나는 운 좋게 참여할 기회를 얻어 관광하게 되었다.

우리가 간 곳은 나병 환자들의 수용시설이 있는 휴양지인데 자연경관이 매우 아름답고 수영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성모 마리아상이 크게 세워져 있고 야자수 나무도 많이 심어져 있어 휴양지로서는 최고의 경관이었다. 이곳은 100년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나병 환자들의 집단 주거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휴양지 관광 정책은 사병들을 위한 좋은 프로그램이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중단되는 바람에 먼저 선발되지 못한 장병들은 구경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어느 날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장교와 사병들을 배웅하기 위하여 퀴논 항구에 갔을 때다. 귀국 장병들이 탄 배 위에서 누군가 “우규야!” 하면서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얼핏 쳐다보니 고향의 동창생인 ‘장덕화’였다. 그 친구가 귀국한다는 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너무 반가웠다. 그러나 높은 배 위에 있어서 여러 말을 할 수도 없어 “울진 가면 우리 집에 들려서 내가 잘 있더라고 전해주라”고 소리쳤다. 건강한 모습으로 귀국하고 있는 친구가 너무나 부러웠다.
“나도 빨리 저런 모습으로 귀국해야 할 텐데” 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동창생들 몇 명이 이곳 월남에 와있다는 사실이 새삼 생각이 났다. 그동안 모두 급박한 전쟁터에 살다 보니 서로 연락도 못 하고 지내온 것이 후회도 되었다. 1연대 제9대대에 근무하던 친구 김부웅, 의무 참모부에 근무하던 홍순일. 이 친구들은 같은 울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며 공부한 친구들인데 언젠가 한 번 만나 부둥켜안고 어찌할 바를 몰라 서로 눈시울을 적시던 일이 생각났다. 이 친구들이 잘 있는지 다친 데는 없는지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귀국하던 병사가 귀국선 갑판에서 더불빽을 바다에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유인즉 ‘수 없는 전투 속에서 살아 돌아가는 것 이상 더 바랄 게 무엇이냐’라는 것. 이 사건은 많은 장병에게 충격이 되었으며 한동안 귀국 장병들의 휴대품을 단속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전쟁의 현장은 참으로 비참하다. 모든 것은 폐허가 되어버리고 오직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뿐이다. 인권이니 인성이니 하는 말들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말장난이다. 그런 주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도망갈 위인들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전쟁이 나게 된 원인을 깊이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지도자 한두 사람의 과욕 때문이다. 이념이 다른 것도 한두 명의 지도자가 정권을 잡기 위해 다른 사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애꿎은 국민들은 결국 그들의 희생물이 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하늘보다 귀한 목숨을 바친다는 말인가? 희생에 대한 대가는 무엇이며 어떤 보상이 목숨에 상응할 수 있는가? 전쟁은 인간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일순간에 폐허로 만드는 악 중의 악이다.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공산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천하보다 귀한 남의 목숨을 헌신짝 같이 생각하는 공산주의자들이 한없이 미웠다.

월남의 전쟁은 한 가족들 간에도 이념이 달라 아버지는 월남군, 아들은 베트콩으로 싸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평정된 구역이라 하더라도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민간인 중에서도 갑자기 베트콩으로 돌변해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전투는 사단, 연대, 대대 등 대규모의 전투도 있었지만, 보통은 9~12명의 분대 단위 전투가 주를 이루었다. 분대원들은 일정 간격을 유지하면서 초병이 맨 앞에 서고 다음이 자동화기, 무전병, 소총부대 순으로 행군을 한다. 베트콩들은 야자나무 꼭대기나 숲속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아군을 급습한다. 함께 행군하던 아군들은 동료 1명이라도 전사하면 젊은 병사들은 눈에 살기가 서린다. 금방 같이 걸어가던 전우가 금세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곤 베트콩과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어 많은 희생자가 나게 된다.

한번은 월맹 정규군 1개 연대 병력이 야밤을 기해 기습을 해온 적이 있었다. 아군은 겨우 1개 중대병력 정도로 맞서 싸워야 하는 데 중요 요충지를 서로 뺏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이나 월맹군이나 서로 많은 희생자를 냈다. 평소 전쟁에 대비해 방공호를 구축했거나 포대의 지원능력을 배양했더라면 수월하게 이길 수 있었던 전투였다, 이런 것을 볼 때 평소의 준비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했다.   

월남 참전군의 총사령관은 채명신 중장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 같은 애국자도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처음 월남에 갔을 때 장교복은 일제였다. 채 사령관은 강경하게 국산 옷으로 대체하라고 명령하여 국산 제복을 입은 기억이 난다. 가난한 나라에서 우리의 옷을 만들어 입어야 공장도 살고 외화도 절약된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채 사령관은 민간인 보호에 최선을 다하셨던 분이다.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일이 없어야 된다고 명령을 하였다. 한국 군인들은 이유 없는 민간인 공격은 절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월남 학생들에게 학용품을 지원해 주거나 태권도 교육, 농사일 돕기 등 월남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전쟁이 끝난 오늘날까지 한국과 베트남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5. 사령관의 표창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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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에서는 어김없이 아침 점호를 실시한다. 6시에 기상하면 국기에 대한 경례를 시작으로 국민 의례를 하는데 애국가를 부를 때는 눈물을 글썽이지 않는 병사가 없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부모님의 얼굴이 눈물방울 속에 어려 있다.
우리는 고국이 있기에 다른 나라가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다.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나라는 고향 집과 같고 부모님의 품과 같다는 것을 국내에 있을 때는 잘 몰랐다. 먼 이국땅, 더구나 목숨이 위태한 전쟁터에 나와 보니 나라의 중요성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맹호부대 사단 본부에 시찰을 오셨다가 인근 6후송병원으로 가시기 위해 이동하셨다. 대통령은 먼 거리에서 그냥 지나가시지만 우리는 이국땅에서 자국의 대통령을 뵙게 된다는 자체가 큰 감동이었다. 우리는 누구의 지시도 없었음에도 모두 일어서서 경례를 올렸다. 바로 이런 것이 애국이 아닐까 느꼈다.

1967년 6월 20일 월남의 날 행사가 열렸다. 퀴논 시내에서 진행된 이 날 행사에는 수많은 군인과 관계자들이 참가하여 엄중히 진행되었고 시가행진도 실시하였다. 이날 행사에서 모범 사병에게 주는 표창도 있었는데 나는 운이 좋았던지 이 행사에서 최고의 상(賞)인 채명신 사령관의 표창을 받았다,
행정 사병은 훈장이 없고 주월 한국군 사령관 표창이 가장 큰 상이었다.

이 표창은 당시 군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상이었다. 진급 소요 총점이 10점인데 중장의 표창은 3점이 가산되기 때문에 진급에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나는 표창을 수상한 덕으로 하사로 진급하여 제대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표창은 TV 1대를 구입할 수 있는 특전이 부여되었다. 그때는 칼라도 아닌 흑백 TV였지만 이것도 구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당시 16인치 제니스 TV 한 대 값은 한화로 3만원 정도였는데 서울 가서 팔면 6만원을 호가했기 때문에 모든 장병이 부러워했다. 나는 TV 1대를 사기 위해 3만원을 모으느라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 일이 있었다.

당시 한국 시골의 논 한 마지기(150평) 값이 보통 2만5천원 정도였으니 16인치 TV 1대면 논 두 마지기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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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월남전의 교훈

월남은 오랜 기간 중국, 불란스 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다. 약소국가이다 보니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았지만, 자유를 누리면서 평화스럽게 살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좌파세력들이 득세하면서 공산화가 진행되어 자유를 지키려는 정부군과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월남이 이토록 악화일로를 걷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큰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공직자들의 부패는 국민이 정부를 불신하게 되고 민심 이반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국민들의 불평불만이 쌓이니 그 틈을 이용해 좌익분자들이 파고들었는데 특히 교육 현장에 좌경 교사들이 파고들어 철없는 어린 학생들을 세뇌시켰다. 거기다 정치, 경제, 기업, 노동 등 각계각층에 좌익분자들이 침투되어 공산주의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지도층이 부패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현실을 우리는 눈으로 직접 보았다. 특히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세뇌시킨 것은 민족의 미래를 뿌리째 말살시키는 민족적 죄악이며 어떠한 명분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큰 범죄이다. 

대한민국도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휴전 상태이기 때문에 전쟁 중이라고 보아야 한다. 총칼을 앞세운 전쟁은 피해자가 적지만 의식이 병들면 막을 길이 없다. 우리도 월남의 패망을 거울삼아 좌경 세력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온 국민들이 투철한 안보 의식으로 무장화되어야 함을 수없이 절감했다. 

7. 귀국 후 군대 생활

나는 1967년 10월 임기를 마치고 월남에서 무사히 귀국했다. 손가락 하나 다친 데 없이 무사히 귀국하는 것을 신께 감사했다. 월남 참전 후 귀국은 하였으나 아직도 제대 예정일이 1년이 조금 넘게 남았다. 나는 그때부터 제대 후에 사회에서 내가 살아가야 할 방도를 생각했다. 1968년 11월 드디어 기다리던 제대 특명이 내려왔다. 이제 얼마 후면 사회인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들떠 일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룻밤에도 수십 채의 기와집을 지으면서 잠을 설쳤다.

그런데 갑자기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1969년 1월 21일 북한의 무장간첩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남침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비상이 걸렸고 정부에서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제대를 앞둔 장병들에게는 복무기간이 연장되는 조치가 내려졌다.  

제대를 앞두고 들떠있던 나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몇 개월을 더 복무한 후 제대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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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무리 글

당시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으로 산업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총 428km의 경부 고속도로를 개설하였다.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김영삼은 민생의 중요성을 명분으로 삼아 고속도로 개설을 극력 반대했다. 야당 지도자들은 연일 건설 현장에 드러누워 공사를 방해한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정부에서는 끈질긴 방해 공작에도 굴하지 않고 공사를 진행해 드디어 1970년 7월 7일 역사적인 개통식을 하게 되었다. 공사 기간도 세계 유례없이 짧은 공기라고 신문에 보도되었다.

당시 공사비는 파월 장병들의 목숨을 걸고 벌어들인 외화로 충당되었다고도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하다. 당시 야당 지도자들의 근시안적 시각에 눌려 고속도로를 개설하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처럼 발전된 한국이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람이 나이가 들면 모든 것이 보인다고 하는데 나도 이제 팔순이 가까우니 당시 야당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야심을 채우기 위해 얼마나 국민 앞에 큰 죄를 지었는가가 보인다.

민생이니 뭐니 별별 이유를 다 동원해가면서 국민의 귀를 막고 정신을 흐려놓았던 그들의 작태, 이것은 오늘날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결코 용병이 아니었다.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고 조국의 번영과 명예를 위해 싸운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창출하고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부상케 한 원동력을 우리 파월 용사들이 제공했다고 자부한다. 우리 파병 용사들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전역하여 각 건설회사에 직접 취업, 달러를 벌어들인 노동자들. 또한 독일 광부나 파독 간호사 등은 모두 나라의 번영에 일조한 분들이다. 물론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크게 보면 나라를 위한 헌신이었다. 이들의 피맺힌 고생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이다, 파월 장병, 단순한 한시대의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이름 없는 애국자라고 나는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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