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북한 땅

기사입력 2020.11.24 09:27  |  조회수 2,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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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11월 26일 평생 처음 북한 땅을 관광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가 어릴 때 북한 주민들은 항상 공산당의 감시 속에서 자유가 없고 식량은 배급을 타며 너무 가난하게 살고 있다고 배웠다.
더구나 아버지도, 선생님도 모두 ‘동무’라고 부른다고 하여 늘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이런 것들을 확인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출발
 
2008년 11월 25일 매우 푸근한 날씨 속에 울진군 행정 동우회 정일영 회장을 인솔자로 하여 회원 85명은 개성에 있는 ‘박연폭포’를 관광하기 위하여 북한에 들어갔다. 6.25 전쟁 이후 반세기를 넘은 지금까지 빗장이 잠겨진 북한 땅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땅, 통일이 안 된다면 앞으로도 평생토록 가볼 수 없는 땅일 수도 있기에 우리 일행은 너무나 많은 기대와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에 남한과 북한의 관계가 좋지 않아 그동안 계속되던 금강산 관광도 얼마 전에 중지되었고 12월 1일부터 개성관광도 중단한다는 발표가 있어 어쩌면 한국에서 북한에 들어가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우리는 11월 25일 울진을 출발하여 북한이 가까운 파주쯤에서 1박을 하고 26일 새벽에 파주에 서 북한에 들어간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곤 개성 시내를 거쳐 인근에 있는 박연폭포를 관광하고 당일 오후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1일 관광코스였다.

두 달 전부터 여행사에 관광 신청을 해놓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제 낮 TV 속보로 ‘개성관광 중단’을 북한에서 통보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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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리시의 건원릉
 
우리들은 너무나 당황하여 여행사는 물론 통일부와 출입국 관리소 등 알 만한 곳은 모두  확인하는 소동을 벌였다.
다행히 개성 관광은 오는 12월 1일부터 중단한다는 조치였으므로 우리까지는 개성을 방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 일행은 울진에서 새벽부터 부산하게 서둘러 충북 음성에 있는 ‘돌 조각공원’을 경유하여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을 구경하고 파주 시내에서 1박을 하였다.

말로만 듣던 북한 땅에 들어가다

어제 저녁나절에 파주에 도착한 우리들은 모처럼의 여행에 들떠 술도 한잔하고 가까운 사람들끼리 노래방에 가서 회포를 푸는 것이 예사겠지만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과 함께 생전 처음 가보는 북한 땅이라는 중압감으로 아무도 놀러 나가는 사람들이 없었다. 우리 일행들은 일찌감치 깨끗하고 럭셔리하게 꾸며진 호텔 방에서 TV나 보면서 일찍이 취침하였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출발 예정인데 새벽 5시에 모닝콜벨이 울렸다. 나는 5시 이전에 이미 일어나 화장실도 다녀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같이 한방을 쓴 ‘김동헌’이란 친구는 “자네가 코를 많이 골아 한숨도 못 잤다”고 투덜거리면서 겨우 일어났다.

함께 여행을 하면서 회원들끼리 대화하는 내용은 대부분이 공통된 생각이었다. 모든 분이 평생 처음 가 보는 북한의 실상에 대해 궁금해 하였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북한 주민들은 ‘친구든 아버지든 ‘동무’라고 호칭하며 양식은 매일 배급을 타 먹고, 옷은 남루하며 감시가 심하여 자유가 전혀 없다’라고 배웠다. 정말 그럴까? 아마 반공교육 때문에 크게 과장했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이번의 북한 방문은 우리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학교 때 배운 북한의 실상을 확인하는 중요한 기회였기에 모든 일행이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얼른 세수하고 짐을 챙겨 부산하게 호텔 로비로 내려오니 버스가 벌써 대기하고 있었다. 새벽이라 그런지 바람이 매서웠다. 우리를 태운 관광버스는 곧장 어둠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고 얼마를 지나 임진각 ‘도라산’ 역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일반 관광버스는 들어갈 수 없고 현대 아산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개성공단이 있어 이곳의 출입 차량은 현대 버스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우리는 현대 아산 버스를 갈아타고 남측 출입국 사무실까지 다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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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 출입사무소
 
얼마를 달렸을까 북한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감지하며 남측 출입국 사무실에 도착하였다. 2층 건물로 된 남측 사무실에 도착한 우리들은 북한에 들어가서 주의할 점과 여러 가지 절차 등에 대해 약 5분간 교육을 받았고 교육 절차가 끝난 후에 입경 절차에 들어갔다.

북한에 가서 가장 조심할 것이 입조심이라고 하였다. 정치 이야기, 지도자 이야기, 사상적인 이야기, 종교 이야기 등은 절대 입에 담지 말라고 당부했다. 잘못 말실수를 하면 전체 일행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여러 차례 경고를 했다.

소지품도 한국 상표가 붙은 것은 절대 휴대할 수 없고 화장지까지도 포장지를 벗긴, 맨 화장지만 휴대해야 한다고 했다. 카메라도 필름 카메라는 휴대할 수 없고 디지털카메라만 허용이 되는데 그것도 줌 기능이 좋은 것은 안 된다고 하였다.
호칭도 남한, 북한이란 말을 쓰면 안 되고 남측, 북측으로 표현하라는 주문이다.

아직은 북한 땅이 아닌데도 분위기는 냉기가 돌고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우리는 2층의 식당에서 설렁탕 한 그릇씩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오늘 우리들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가는 인원은 200여명이 넘는데 전국에서 모인 관광객들이었다.

남측 출입국장에서 입경 수속을 마치고 한참을 기다려 우리는 현대 아산 소속의 버스에 분승하여 북쪽으로 달렸다. 여기서부터 7km의 남측 비무장 지대를 지나야 군사 분계선에 도착한다. 

군사 분계선에 도착하니 남측 사무실이 있고 여기서 다시 북한의 입국 허가를 받아야 북한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본래 여행사의 계획으로는 아침 9시에 북한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무슨 꿍꿍이인지 오랜 시간 지체하여 9시 40분이 넘어 겨우 북한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북한 땅에 들어가자마자 북측 출입국 관리소가 있었고 우리는 다시 입경 절차를 밟게 되었다. 작달만한 키에 새카맣게 그을은 얼굴의 북한 군인들은 우리들의 신분증과 얼굴을 일일이 대조하고 카메라는 물론 들고 있는 손가방까지 모두 풀어 헤쳐 조사하였다. 카메라는 필름 카메라는 휴대할 수 없고 디지털카메라만 허용하되 행여 먼 거리를 당겨 찍을 수 있는 망원렌즈 사진기는 나갈 때 되돌려 준다고 하면서 압수하였다. 

나는 당시 줌 성능이 좋고 일반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던 일제 소니 707 신형 디카를 가지고 갔었는데 북한 군인이 처음 보는 디카인지 한참을 돌려가며 살펴보더니 휴대해도 된다고 돌려주었다.

북측 출입국 관리소에는 제복을 입은 북한 군인들이 많이 나와 있었는데 모두 덩치가 작았다. 키와 체격이 한국의 중학교 2학년 정도였는데 피부는 볕에 그을린 듯 새카맣다.

우리들이 입경 절차를 밟고 있는 사이에도 눈동자가 반들반들하고 검은 외투를 입은 민간인 차림의 북한 청년들이 어느새 우리들 속에 섞여 버린다.

그들이 우리 일행들 속에 섞여도 눈빛이나 얼굴색, 옷차림이 달라서 단번에 북한 사람이라는 표가 났다.

입경 절차를 마친 우리들은 현대 아산 버스에 다시 분승하였다.

우리가 탄 버스에는 북한 안내원들이 함께 승차하였다. 현대 아산 안내원 1명과 북한 안내원 3명이 탑승하여 앞과 중간, 뒤쪽에 한 사람씩 가서 앉았다. 그리곤 맨 앞쪽 문에 기대선 안내원이 안내를 시작하였다.

“남측에서 오신 여러 동무들을 환영합네다. 저는 여러분을 안내할 김 모이고 저 뒤쪽 동무는 김 00 동무로 여러분을 불편함이 없도록 도와줄 것입네다.”

나는 깜짝 놀랐다. 초등학교 때 배운 ‘동무’라는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섬뜩한 기운이 감돌았다. 문 앞에 기대선 안내원은 군사분계선에서 11km의 북측 비무장지대를 지나 개성시에 진입하는 동안 차창 밖의 풍경들을 계속 설명하였다. 

일행들은 동승한 감시원들을 의식한 탓인지 누구 하나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차창 밖의 낯선 풍경에도 손짓 한번 하는 사람 없이 그냥 눈으로 보고 듣기만 했다.

개성 공단이 가까워질수록 도로가 잘 포장되어있었고 연두색 철책과 가드레일이 정연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재질이나 방식이 한국에서 보는 시설들과 비슷한 걸 보니 모두 개성공단 측에서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북한 경치를 절대 촬영하면 안 된다는 경고와 입조심 경고를 수차례 받은 우리들이라 차 안에서도 누구 하나 농담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다. 다만 빠르게 스쳐 가는 차창 밖의 모습들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들이 역력했다.

북측 출입국 관리소에서부터 느끼는 북한의 첫 모습은 ‘산에 나무가 한그루도 없다’는 것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얕으막한 산들은 많은데 먼 산이나 가까운 산이나 모두 갈대와 같은 잡초뿐이지 나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한국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비무장 지대를 지나니 좌우로 넓은 들판이 형성되어 있었다. 옛 고려의 도읍지인 철원평야였다. ‘과연 태조 왕건이 탐낼만한 땅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야를 지나 한참을 달리다 보니 우측으로 큰 공단이 보이는데 바로 한국에서 조성 중인 개성 공단이었다.

부지가 무려 100만 평이라고 하며 현대식 공장들이 아직도 계속 지어지고 있었다.

중장비들이 작업하는 모습과 공단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들이 보였고 우리들의 차량 행렬이 지날 때마다 손을 흔들거나 머리 숙여 인사하는 광경도 보였다. 한국에서 간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개성공단을 지나니 산 계곡 사이로 형성된 북한 마을들이 자주 보인다. 가까이 보이는 마을도 있지만 대부분 도로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 사람들이 조그맣게 보인다. 북한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인 모양인데 사람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집들은 모두 한 계곡에 집단적으로 지어져 있었고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 도로가 하나로 만들어져 있었다.

결국 모든 마을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나 있는 출입구를 지나도록 되어있었다. 마을 출입구에는 총을 멘 군인이 마네킹처럼 부동자세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나는 마을마다 유심히 관찰하니 총을 멘 군인이 없는 곳이 없었다. 초소 같은 작은 건물도 없이 길거리에 그냥 서 있었다.

북한 주민들의 출입을 감시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왜냐하면 마을들이 몇 가구씩 산재된 가옥들이 없고 모두 집단 마을이었고 마을로 출입하는 길이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길목에 무장한 군인이 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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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민둥산 / 녹색연합 제공
 
산들은 모두 민둥산인데 마을과 가까이 있는 야산들은 꼭대기까지 빈틈없이 개간하여 농작물을 심었던 그루터기가 남아있고 가끔은 홍수로 밭 중간이 물도랑처럼 패여 있었는데 아직 복구를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모든 일행은 말은 하지 않지만 차창 밖의 모습들을 유심히 보면서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운 북한의 실상들과 어떻게 다른지 확인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었다. 

약 40분 정도를 달려왔을까 개성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 개성시는 인구가 30만 명이고 시내 거주자만 13만 명인 북한에서는 한두 번째 가는  큰 도시라고 하였다.

개성은 옛 고려 도읍지로 유서 깊은 역사와 고려의 문화가 산재한 북한 최고의 관광도시이다. 가까이 있는 만수산(萬壽山:송악산)에는 태조 왕건의 능도 있고  최영(崔瑩, 1316년~1388년) 장군의 유적도 있다. 또한 이성계(1335-1408)의  조선 건국 설화를 비롯하여 포은 정몽주 선생이 마지막을 장식한 선죽교도 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산속에 깊이 숨어들었던 ‘두문동’을 비롯해 고려유적을 집합시킨 ‘고려 박물관’도 있어 외국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라고 하였다.

이렇듯 외국 관광객이 많이 오는 곳이다 보니 북한당국은 개성 시가지 도로나 주택, 도시 경관을 시범적으로 잘 가꾸어 놓았다고 한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비교적 깨끗하게 정비된 개성 시내를 거쳐 쉬임없이 박연폭포를 향해 산골짜기로 줄곧 달렸다.

박연 폭포에 올라

박연 폭포는 개성에서 서북쪽으로 70여리 떨어진 산 계곡 속의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위치하였다.

우리가 탄 버스는 산골짜기를 계속 들어간다. 도로는 아스콘 포장길인데 꼬불꼬불하고 좁아서 자동차 두 대가 교행하기가 힘들다. 

도로 옆으로는 계곡마다 북한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집단 마을이 저 멀리에 자주 보인다. 왕래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마을 입구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군인들만 보인다.

주택들은 모두 단층이고 건물의 벽체는 시멘트 블록이었다. 시멘트 블록은 모두 덧 미장이 없는 맨 블록을 쌓았는데 블록 벽이 일직선이 되지 않고 구불구불한 게 뱀이 기어가는 듯하였다. 아마 줄을 대지 않고 손으로 그냥 얹어놓은 것 같았다.

집 주변에는 담장이 없는 집이 대부분인데 지붕은 시멘트로 만든 기와를 얹었는데 많이 깨어져서 첩첩이 덮어놓았다. 지붕의 용마루도 일직선이 없고 꾸불꾸불하고 창문틀 같은 것도 아무렇게 만들었는지 삐딱했다.

가도 가도 산에는 나무 한 그루 없이 잡초만 우거졌고 드문드문 박힌 전봇대는 분명 시멘트로 만들었는데 나무로 만든 것인지 분간이 안될 만큼 가늘고 짧다.

전봇대는 4각으로 시멘트가 비에 씻겨 모래알이 보일 정도로 낡았다. 전깃줄도 가는 철선이 2줄로 나란히 이어져 간다. 우리나라 군인들이 임시 전화줄을 사용하는  삐삐선 같은 것이었다. 한국의 전봇대를 몽둥이에 비교한다면 북한의 전봇대는 회초리 정도이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좁은 길에 이리저리 쏠려가면서도 동승한 북측 안내원은 고려 도읍지였던 개성의 소개와 주변 산야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다.

저 산을 두 개 넘으면 두문동이라고 한다. '두문(杜門)’이란 말은 ‘문을 닫다’ 또는 ‘문을 막다’라는 뜻으로 외부와 단절하며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란다. 본래의 지명은 아닌데 고려의 절신(節臣)들이 은거한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고 한다. 많은 고려의 충신들이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으로 은거했는데 유일하게 ‘황희(黃喜 1363∼1452)’ 정승만이 세상에 나와 고려 공민왕 때부터 조선 문종 때까지 4왕조를 거치면서 영의정을 지냈다. 
 
황희 정승은 두문동 동지들의 안전을 위해 조선 조정과의 타협 의미로 두문동에서 대표자로 뽑아 벼슬을 하게 하였으며 너무 약하거나 강하게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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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폭포 앞에서
 
개성에는 옛날부터 세 가지가 유명한데 바로 ‘송도삼절(松都三絶)’이 그것이다. 송도삼절은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 그리고 박연폭포를 일컫는다.

황진이는 15세 무렵 동네 총각이 그녀를 연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자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미모, 詩·書·歌 등 다양한 재능으로 당대 문인들과 유림들을 매혹시켰다.

어떤 남성이라도 황진이를 보는 순간 정신을 잃을 정도의 미인이라 하였다.

황진이는 종친인 벽계수(碧溪守)와 깊이 교제하며 시(詩)로 애정관을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라는 유명한 시를 남길 만큼 인테리 여성이었다.

청구영언에는 조선 시조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그녀의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동짓달 기나긴 밤을> <산은 옛 산이로되> 등 6수가 전해온다고 한다.

한번은 10년간 수도한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까지 시켰는데 황진이는 자기가 마음에 드는 남성을 발견하면 손쉽게 굴복을 시켰다. 황진이가 가장 마음에 둔 남성이 화담 서경덕이었다. 그러나 화담은 절대로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 그럴수록 황진이는 더욱 서화담에게 끌려 끈질기게 유혹한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그러나 서화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황진이는 유혹이 번번히 실패하자 최후 수단으로 육탄 돌격을 감행한다.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는 날 속살이 비치는 얇은 옷차림으로 비를 흠뻑 맞고 일부러 몸살을 만들어 금방 쓰러질듯이 서화담을 찾아가 안겼다.

그러나 서화담은 끝내 몸을 가까이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웃옷을 벗어 입혀 주었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황진이는 더 이상 유혹을 멈추고 화담을 일생동안 스승으로 모셨다는 일화가 전한다,
북쪽 안내원은 설명하다 시간이 좀 남았는지 ‘고향의 봄’ 같은 노래를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몇 곡을 불렀다

박연 폭포로 가는 산길은 아스팔트 포장은 되어있었지만 꼬불꼬불한 산길에 교행이 어려운 비좁은 도로로 30여분 가까이 달리는가 싶더니 주차장에 당도했다.

주차장에서 폭포까지는 좁은 산길이라 오르막 오솔길을 걸어가야 한다.

날씨가 가물어 산골짜기 좁은 하천에는 거의 물이 말라 있었다. 수량(水量)도 적은데 날씨가 추워 조금씩 흐르던 냇물이 얼어버렸다. 우리는 무분별하게 삼삼오오 짝을 지어 계곡을 따라 걸었다. 내 옆에는 마침 버스에서 해설하던 북측 안내원이 함께 걷고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까 해설을 상세히 해 주어서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고 나도 남측에서 관광지 해설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북측 안내원은 깜짝 놀라면서

“남측에도 관광지가 있어요?”라며 되묻는다.
“그럼요 관광지가 얼마나 많은데요. 전 세계사람들이 관광을 오는데요”

안내원은 한국에 관광지가 있다는 시실을 처음 아는 듯했다. 북한은 완전히 폐쇄된 사회라 외부의 정보를 전혀 모르는구나 싶은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자녀들이 몇입니까?“
“아들 하나 딸 하나 남매입니다.”
“학교는 어디까지 시켰나요?”
“학교는 모두 대학을 나와서 결혼도 다 했지요”
“네? 선생님 젊을 때 무슨 일을 하셨나요?”
“여기 온 우리 일행들은 모두 공무원 퇴직자들입니다.”
“그런데 공무원 하면서 자녀들 대학을 어떻게 보내나요? 자본주의 국가는 돈이 있어야 되는데 월급 타서 먹고 살기도 힘들지 않나요?”
“돈 없으면 대학 못 보내지요. 그래도 남측은 다 대학 보냅니다”

안내원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듯 머뭇머뭇한다.

“인민공화국은 위대하신 수령 동지의 은덕으로 누구든지 다 공짜로 대학을 다니지요”

안내원은 이해하기 힘든 북한 자랑을 몇 마디 한다. 그러나 한국의 실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듯했다   

몇 마디 하는 사이 어느덧 박연 폭포에 당도했다. 폭포는 골짜기 안쪽에 있었으며 산꼭대기 높은 곳에서 아래쪽으로 심한 경사를 이룬 암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폭포의 높이는 무려 37m나 되어 암벽이 상당히 높다.

박연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 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 중 하나라고 하며 폭포 위쪽에 직경 8m 정도의 바가지 모양으로 생긴 못이 있는데 이 못에 물이 고였다가 흘러내린다고 한다.

폭포 아래는 ‘고모담’이라 하는 못이 있는데 겨울철이라 물이 얼어 빙판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들은 폭포 주변 공터 여기저기서 기념촬영을 하느라 매우 혼잡하다.

어떤 이들은 사진도 찍고 다리 아픈 분들은 바위에 앉아 쉬기도 하면서 폭포 구경을 한다. 우리는 단체 사진을 찍은 다음 폭포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범사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또 합동 촬영을 했다.

정자 위로는 고려시대 축성한 ‘大興山城’이 있고 성곽 위에는 문루가 있었다. 이 산성은 길이가 10km나 된다고 설명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일부분만 볼 수 있다. 우측 경사진 산길 위에 작은 정자도 있고 산성문루도 있었다.
문루를 따라 올라가니 박연 폭포의 상부에 닿게 되어 폭포 전체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이 위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관음사’라는 절이 있다고 했다.
이 절은 서기 970년 고려 광종 21년에 세운 것으로 국보문화유물 125호로 지정된 북한 측에서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 하였으나 아쉽게도 지난여름 홍수 때 길이 떨어져 나가 가볼 수 없다고 하였다. 

폭포 주변에는 흐름한 샷시로 진열장을 만들어 놓고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두 군데의 가게에는 한복을 입은 아가씨들이 땅콩, 강정, 곳감, 참기름, 과자, 콜라 같은 것을 팔고 있었다.

과자의 포장지는 아주 얇은 투명 종이로 금세 찢어지고 구겨지는 조잡한 얇은 종이였다.

우리는 1달러를 주고 조그만 땅콩강정을 사서 나누어 먹어면서 내려왔다. 어떤 이는 작은 곶감을 사서 나누어 먹기도 하였다. 화폐는 달러가 아니면 통용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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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폭포의 매점
 
통일관에서 점심
우리는 박연 폭포관광을 마치고 다시 개성 시내로 내려와 ‘통일관’이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 식당은 외국 손님이나 귀빈들을 접대하기 위한 고급식당으로 약 500명이 동시 식사할 수 있는 큰 식당이었다.

양쪽으로 여닫는 식당의 큰 문을 열자 한복 차림의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가 “반갑습네다”를 연발하며 일일이 인사를 한다.

식당 내부는 귀빈 전용 식당답지 않게 컴컴하고 구질구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60대 초반 정도는 됨직해 보이는 아주머니가 다른 여자 종업원들에게 이것저것 시키는걸 보니 아마 이 식당의 책임자인 것 같았다. 식당 안에는 한복을 입은 여자 종업원 여럿이 서빙을 하며 음식을 갖다 놓느라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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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첩 반상기 정식
 
점심 메뉴는 북한에서 상당히 자랑으로 여기는 한식으로 11첩 반상기에 갖가지 음식이 담겨 나왔다, 모든 식기는 방짜유기 같은 놋그릇이다.

반찬은 주로 나물 종류가 많은데 그런대로 먹을만 하였다.
고사리, 산나물, 계란, 김치, 장아찌 등 조금씩 담아낸 반찬은 한국 음식과 맛이 거의 비슷하였다.

밥은 좁쌀을 섞어 지었고 반찬 양이 매우 적어 밥을 남기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밥을 먹다 천정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보는 순간 북한에서는 형광등을 ‘긴불알’ 샹들리에를 ‘떼불알’이라고 부른다는 말이 생각났다.

“진짜 그렇게 부르는가? 누가 웃으려고 지어낸 말이 아닌가?“

늘 이런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옆에 있는 동료에게 물어보았다.

“저 샹들리에를 뭐라 하는지 한번 물어볼까?”
“그래 한번 물어봐”

나는 조심스럽게 책임자 여자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리고 나직이 물었다

“선생님 저 샹들리에를 여기서 무엇이라 합니까?”

아주머니는 망설임 없이 ‘무리등’이라고 대답했다.

점심 후 마당으로 나와 커피를 한 잔씩하면서 쉬는 시간을 주었다. 식당 마당에서 서북쪽으로 ‘자남산‘이라는 꽤 높은 산이 보였고 식당은 산으로 가는 입구쯤인 것 같았다. 식당 마당 앞으로 큰 도로가 나 있는데 얼마나 넓은지 왕복 6차선쯤 되었다. 이 거리는 김일성 동상을 세우기 위해 개성 시내 근교에 특별히 도로를 만들고 주변에 고층 빌딩을 세운 북한에서 가장 현대화된 거리라고 하였다. 식당 마당에서 바라보니 서북쪽으로 엄청 큰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모든 관광객은 여기서 사진을 찍는 것이 허용되었다. 다만 동상이 일부라도 잘리면 큰 야단이 난다고 경고를 하였다. 동상을 손으로 가리켜도 안 되며 그저 차렷 자세로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하였다. 관광객들은 동상 귀퉁이가 잘리지 않게 사진을 찍느라 매우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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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김일성 동상. 사진이 조금만 잘려도 안된다 

우리가 식당 밖에서 커피를 마시며 쉬는 시간이 한 시간가량이나 되었다. 북한 감시원들과 섞여서 환담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자유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식당 옆으로 난 큰 도로에 자동차가 다니는 것을 보기 힘들었다. 한 시간가량 다니는 자동차를 세어 보았더니 자동차가 총 5대 정도 지나다니는 게 고작이었다. 5대의 자동차도 개성공단 승용차 2대. 북한 군용트럭 2대, 그리고 오토바이가 한 대였다. 버스 같은 것은 전혀 볼 수 없었고 자동차 이외에 간혹 걸어 다니는 민간인이 몇 명 있었고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몇 있었다. 

사거리 중앙에는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았지만 교통정리를 하는 군인이 서있었다. 푸르스름한 두꺼운 오버에 털이 달린 모자를 썼는데 키가 작은 군인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쉬는 장소에도 하나같이 검은색 반코트 차림의 감시원들이 중간 중간에 섞여 있어서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식당 뒷쪽에는 낮은 야산인데 올려다보니 산꼭대기에도 군인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그들이 왜 아무도 없는 산꼭대기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로는 넓고 아스콘 포장도 깨끗한데 측구에는 물 빠짐 시설이 없었다. 우리 일행 중의 ‘엄모’ 회원이 무심코 혼잣말처럼 한마디 했다.

“이 넓은 도로에 하수구도 없노”
이내 근처에 있던 감시원이 획 돌아보면서
“지금 뭐라고 했소. 지금까지 한 번도 홍수가 난 적 없소”하면서 째려보는 바람에 기겁을 하고 말문을 닫기도 하였다.

내 옆에 북측 감시원이 있어 나는 주머니에 있던 한국 알사탕을 몇 개 꺼내 주었더니 고맙다며 누가 볼세라 얼른 받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는 그 감시원에게 “북한 주민의 평균 수명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더니 모른단다.
다만 세계적으로 고령화 시대인 것은 알고 있다고 하며 오히려 남한을 걱정하였다.
자본주의 국가는 돈을 벌지 않으면 먹고살지 못하니까 그게 걱정이란다.

나는 “사회 복지 제도가 잘 되어있고 평균 소득이 높아 나이 많아도 걱정 없다”고 얘기해 주었는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북한은 모든 것이 국가에서 책임지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도 생계에 지장이 없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개성의 남대문

식당 마당에서 남쪽으로 커브를 돌아가 보니 도로변에 전통건물이 보였다.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남대문’이라고 하며 그쪽은 접근 금지 구역이니 가지 말라고 했다. 가까운 거리라 나는 구경하고 싶어 “남대문이 보고 싶은데 구경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 감시원은 “그럼 남대문까지만 갔다 오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커브를 돌아 건물에 올라가지는 못하고 멀찌감치서 바라보기만 했다. 한국의 남대문보다는 훨씬 작고 허술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남대문처럼 북한에서도 국보 124호로 지정한 중요한 문화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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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현판 / 한석봉의 글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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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 남대문 

남대문은 개성의 남문으로 1391년 고려 공민왕 3년에 착공하여 1393년 조선 이태조 2년에 준공되었다. 그러나 6.25 때 파손되어 1954년에 다시 복원된 건물이라고 한다. 현판은 한석봉의 친필이라고 하며, 축대의 가운데는 무지개 문을 내었고 팔작지붕 구조에 문루 기둥이 배흘림기둥으로 만들어져 고려시대 건축물 기법을 잘 따르고 있다 한다.

시간이 넉넉하면 자세히 좀 살펴보고 싶었지만, 관광객의 통행이 허용되지 않아 건물 앞에까지 가 본 것만도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할 판이다.

우리는 버스에 올라 남대문 옆을 돌아 다음 코스인 선죽교로 향했다. 선죽교를 가는 도중 개성 시가지를 통과하는데 시가지에는 몇 개의 학교를 볼 수 있었다. 학교는 초등학교 같았는데 어린아이들이 하교하는 시간인지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이 몇 명 보였다. 우리들은 학교 담장에 쓰인 구호를 보고 또 한번 놀랐다.
 
학교 정문과 좌우 담벼락, 고층 건물의 외벽 등에는 어김없이 붉은 글씨로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 만세!’ 같은 찬양 문구가 쓰여 있었고 ‘항일유격대 정신으로’ ‘우리는 우리식대로 살자’ ‘미제국주의 어쩌고....’ ‘남조선 괴뢰도당을 때려잡자’ 등의 섬뜩한 문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철없는 어린이들에게까지 전쟁 문구, 사상적 선동을 일삼는 문구들을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선죽교의 핏자국

버스는 개성 시내를 여기저기 돌아 선죽교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善竹橋는 본래 善地橋였는데 정몽주가 이방원 수하인 조영규에게 철퇴를 맞아 피살되고 그의 선혈이 흐른 곳에서 대나무가 피어났다는 데서 선죽교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선죽교의 길이는 6.67m 폭은 2.54m라 하였다.

본래는 난간이 없었는데 조선 후기에 개성유수 정호인이 자신의 선조가 피살된 다리를 밟고 다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여 선죽교는 난간으로 막고 바로 옆에 난간 없는 돌다리를 또 하나 만들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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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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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의 핏자국(사진 중앙의 붉은 선)
 
돌 판 하나에는 마치 옛날의 선혈이 지워지지 않는 듯 붉은 선의 석맥(石脈)이 박혀져 있었다.

이방원은 자기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려 충신들을 회유해왔는데 그중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이 포은 정몽주 대감이었다. 정몽주는 대쪽같은 선비로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성품이지만 이성계와는 둘도 없는 사이였고 개혁 의지도 있는 충신이었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아껴 어떻게 하든 죽이지 않고 새로운 조선 건설에 참여시킬 심산이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찾아가 정중히 인사하며 하여가를 지어 뜻을 전한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을 살고지고」

이에 정몽주는 서슴없이 답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는 목숨을 버릴지언정 반역의 도당들과 합세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단심가로 화답했다. 이에 더 이상 회유가 불가능함을 알고 이방원은 수하인 조영규를 시켜 귀가하는 정몽주 대감을 선죽교에서 철퇴로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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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주 대감이 말을 탈때의 디딤돌
 
정몽주 대감은 명나라에 네 번이나 다녀오면서 명나라에 강제로 잡혀간 수백 명의 고려인을  데려오기도 하였고 공물로 바치던 세공도 면제를 받는 등 탁월한 외교능력을 발휘한 외교가였다. 그의 대쪽 같은 애국심을 명나라 고관들도 존경해 마지않았다. .

정몽주 같은 만고의 충신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었다. 훌륭한 인물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다는 말이 있듯이 정몽주는 어머니의 시퍼런 가르침을 받고 자랐음이 분명하다.

문병을 가는 정몽주를 바라보며 팔순 노모가 아들을 염려하여 지은 시이다.
까마귀 싸호는 골에 白鷺(백로)야 가지 마라
셩낸 까마귀 흰빗츨 새올세라
淸江(청강)에 죠히 씨슨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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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 앞에서
 
표충각(表忠閣)

선죽교 옆에는 한석봉이 쓴 선죽교비가 있고 반대편에는 ‘표충각’이 있다.
표충각 안에는 정몽주의 충의를 기리기 위하여 조선 영조와 고종의 어제 어필로 새긴  표충비가 암수 거북기단위에 세워져 있다. 거북코를 만지면 예부터 자식을 낳는데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거북코가 손때로 새까맣다.
선죽교 앞에 북한 아가씨들이 노점상을 차려 놓고 북한 술과 과자류를 팔고 있었다.
그런데 기념품은 하나도 없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선죽교를 돌아 나와 ‘숭양서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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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각 내부의 표충비
 
숭양서원 (崇陽書院)
 
숭양서원은 정몽주 선생이 살던 집터에 1873년 ‘문충당’이란 이름으로 세운 건물이다.

처음에는 정몽주와 서경덕의 위패를 모시다가 1575년 ‘숭양’이란 사액(賜額)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1668년 김상헌 대감의 위패를 모셨고 1681년 김육, 조익, 1784년에 우현보를 추가 배향하였다. 1868년 흥선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유서 깊은 곳이다.

서원 안으로 들어가니 동재와 서재가 있고 계단을 오르니 강당이 있다. 강당 뒤로 난 담장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파른 축대 위에 문충당이 나온다. 

본래 정몽주 선생은 개혁파로 사림 출신이며 이성계의 개혁 성향을 따라 반원친명(反元親明)을 주장한 인물이다. 조선 건국에 협력만 하였어도 죽이지는 않았을 터인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막상 죽이기는 했지만, 그의 인물됨을 애석히 여겨 사후에 이방원이 시호를 내렸다.

정몽주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이성계의 역성정변(易姓政變)에 참여했던 이직(李稷)은 이런 시를 지었다.
까마귀 검다하고 白鷺(백로)야 웃지 마라
것치 거믄들 속좃차 거믈소냐
것 희고 속 거믄 즘생은 네야 하노라」

이직(李稷)의 말처럼 변천하는 시대에 어울려 살았다면 죽지는 않았을 것을, 하는 생각도 해본다.

문충공을 모신 건물의 좌측 방에는 선생의 족자형 영정이 서쪽 벽면에 걸려있고 영정 앞에는 배향에 필요한 향로와 술잔, 동물문양의 받침을 한 촛대가 상 위에 놓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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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양서원
 
025.jpg숭양서원 내의 정몽주 선생 영정
 
숭양서원 목조 기와집 건물은 건물 전체가 뒤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느낌이었고 그에 따라 출입문 기둥도 문틀과 맞지 않아 틈새가 벌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면 먼지가 그대로 방안으로 날아 들어갈 것 같았다.

포은의 영정이 진품인지 안내자에게 물어보니 진품이란다. 그렇다면 이렇게 귀중한 문화재를 어떻게 저렇게 허술하게 보관할 수가 있을까 족자식 영정 자체도 유리곽 같은 상자를 짜서 보관해야 할 물건 같은데 얇은 족자가 바람에 그냥 펄럭이니 너무나 안타깝게 보였다.

대부분의 건물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숭양서원은 임진란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하였다. 숭양서원과 문충당 건물의 배치가 아주 조화롭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파른 계단과 화단의 짜임새가 매우 아름답게 짜여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충당 밖의 좌측에는 곧게 자란 전나무 한그루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숭양서원의 마당에는 의자와 비슷한 네모진 석물이 양쪽으로 있는데 무엇이냐고 물으니 정몽주 선생이 말을 타고 내릴 때 사용하던 디딤돌이란다.

정사각형의 돌 사각 면에는 동물 문양을 정성스럽게 양각하였다.

우리 일행 중에는 정몽주 선생의 후손도 있어 영정 앞에 술을 한잔 올리고 싶었으나 술이 없어 아쉬워하며 목례로 예를 표하기도 했다. 우리는 고려 박물관을 관람키 위해 다시 버스에 올랐다.

고려 박물관 

고려 박물관은 992년 처음 지을 당시는 ‘국자감’이었다가 이후 성균관으로 개칭하여 고려 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성균관은 보통 조선시대가 대부분인데 고려 때의 성균관으로서는 유일하다고 하며 조선시대 성균관과 구별하기 위해 고려 성균관으로 불렀다고 한다.

박물관 뜰은 매우 넓다. 넓은 마당안에는  웅장한 고목들이여기저기 서 있고 안쪽으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목조 전통 기와집으로 된 건물로 명륜당, 대성전, 동재, 서재 등 총 18동이 있고 건물 안에 고려시대의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다.

이것도 박물관이냐 할 정도로 전시 유물은 몇 점 안 되었다.
균열이 보기 좋은 고려청자들과 환두대도, 창, 화살촉, 竹箭. 옥 장식, 고려시대 전쟁 무기 등이 전시되었고 벽면에 고려시대 전쟁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전시하였다.

유리곽으로 된 진열장은 자연의 온도 습도에 따라 유물이 변색되거나 부패, 변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박물관 유물은 매우 과학적인 방법으로 보관해야 한다. 내가 본 고려 박물관의 진열 장치는 아무런 대비책이 없는 듯이 보였다. 목재로 만든 진열장은 부엌에 쓰는 찬장같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박물관 건물은 목조기와로 단열이 잘 안 되는 홑벽 건물인데다 내부 진열장마저 너무나 초라하니 한국의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박물관만 보아왔던 우리에게 너무나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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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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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화사 7층석탑 /국보유적 139호
 
마당에는 몇백 년은 됨직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석탑, 석등, 비석 같은 무겁고 큰 석조 문화재는 모두 마당 밖의 화단에 배치해 두었었다. 헌화사 7층 석탑과 951년 보봉산 남쪽 기슭에 세워졌었다는 불일사 5층 석탑이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어 마당에 전시되고 있었는데  훼손됨이 없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헌화사는 개성시 장풍군 월고리에 있었던 고려 때 절로서 7층 석탑은 높이 8.64m로 규모가 큰 석탑인데  전체가 균형이 잘 잡혔고 세부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다워 고려시대의 발전된 석조 건축물을 대표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한다.

옥개석 받침도 한국의 탑과는 조금씩 다른 모양을 하고 있어 매우 흥미로웠으나 시간이 없어 찬찬히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야외 잔디밭에는 강감찬 장군이 나라의 안녕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흥국사 돌탑, 개국사 석등 등이 세워져 있었다.

여성 안내원이 메가폰을 들고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해 주었으나 관광객 숫자가 많아 잘 듣지 못하고 그냥 안내판만 열심히 보고 다녔다.

박물관 한쪽 건물에는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어 모든 기념품은 여기서 사야 되도록 되어있었다. 이제 버스를 타고 나가면 물건 살 곳이 없단다. 그래서 너도 나도 가게에 들러 선물들을 고르느라 약간 혼잡했다. 고려청자를 재연한 도자기 가게, 그리고 들쭉술, 인삼주 등 각종 주류, 북한선전 책자, 북한 화가들이 그린 그림, 벌꿀, 경옥고, 고추장, 말린 산나물, 각종 과자, 한복을 입힌 인형 등을 파는 가게였다.

우리들은 주로 과자류와 술, 담배 같은 것을 많이 사고 도자기나 경옥고를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건들이 맛이야 어떤지는 먹어보지 못해 모르지만 포장이 우선 너무 초라해서 고급스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약 30여분간 기념품점을 돌아보며 쇼핑을 하고나니 오후 5경으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개성 시내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서둘러 남측으로 귀향할 채비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로 개성 시내를 나오는데 지나가는 북한 주민들이 간혹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였다,

땅거미가 지고 있어 실내에는 전등을 켜야 할 시간인데도 개성시내 건물에 전등불이 켜진 곳이 한 곳도 없었다. 단층 주택은 물론 몇 층짜리 아파트 같은 건물에도 불빛이 있는 곳이 없다.

개성 시내 건물 유리창 안으로 아이들이 손을 흔드는 모습도 보였다.
하천 옆에 있는 어느 건물 앞에는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 수십 명이 줄을 서 있는 것도 보였다. 아마 말로만 듣던 식량 배급을 타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대부분 검은색 옷인데 두꺼운 천인지 매우 투박해 보였다.

개성 시내는 10층 정도 되는 아파트 같은 건물이 여러 채 보였다.
5층 정도의 어느 건물 옆을 지나는데 건물 2층 안에는 몇 사람이 아파트 공사를 하고 있었다.
시멘트 콘크리트 작업을 하는 모양인데 레미콘 같은 장비를 쓰지 않고 사람이 직접 시멘트 몰탈을 섞고 있었다.
어느 건물의 구석 공터에는 사람들 수십 명이 떼를 지어 모여 있었다. 어떤 사람은 서 있기도 하고 자전거에 기대선 사람도 있었다.

혹자는 인민재판이나 마을 회의를 하는 게 아니냐 하는 이도 있었지만, 아무튼 이상한 모임 같았다.

귀향

개성을 벗어난 우리 버스는 중간에 세울 데도 없이 바로 임진각을 향했다.
귀향길 차창 밖으로 보이는 북한은 어딜 보아도 주민들이 살고 있는 가옥들이 한결같이 같은 모양으로 단층 시멘트 기와집이며 어김없이 마을 입구에 군인 1명이 부동자세로 서있었다.
산은 모두 민둥산이고 밭 뚝 까지도 개간하여 곡식을 심은 그루터기들이 그냥 있었다.

개성 시내를 약간 벗어나 남측으로 향하는데 추수를 완료한 들판이 무척이나 넓어 보였다.
전등불이 없이 캄캄하던 개성 시내를 지나 개성공단 옆으로 지나오는데 공장마다 전깃불이 휘황하다.
갈대밭으로 우거진 비무장 지대를 지나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하니 북한 군인들이 일일이 검열을 하는데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린다.

우리의 가방과 소지품을 모두 아예 바닥에 풀어놓고 조사했다. 카메라를 열어 일일이 찍은 사진을 확인하노라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통과되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통과 즉시 임진각을 향해 남쪽으로 달렸다.

이제 임진각만 넘어서면 남측 구역이다. 임진각에 도달하기까지는 모든 일행이 어두워 보이지도 않는 차창 밖만 주시할 뿐 아무 말 한마디 없다가 임진각을 넘어서자 모두 긴장이 풀리는지 표정들이 금세 밝아졌다.

어둠속을 뚫고 임진각을 지나 남측 출입사무소에 들렸다. 여기서도 간단한 입국 수속을 거쳐야 한단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버스에 탄 우리 일행은 이제야 맘을 놓은 듯 표정이 밝아지면서 웃고 떠든다.

남북이 분단된 지 얼마런가?
같은 민족끼리, 같은 땅에서 살면서 60여년을 가 볼 수 없었던 땅.
설마 그토록 자유가 없고 비참한 생활을 하겠는가 하고 늘 궁금해했던 땅.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북한은, 초등학교 때 배운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도 외국 관광객이 많이 오기 때문에 특별히 잘 꾸며 놓았다는 도시가 이 정도라면 이름 없는 시골로 들어간다면 어떻게 해 놓았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몇 해 전에 캄보디아에 갔을 때 관광버스가 닿으면 “원달러 원달러”하면서 수십 명이 떼거리로 몰려와 아우성 치던 일이 생각나는데 그쪽은 그래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왕래하였고 건물들도 반듯한 집들이 더러 많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거리의 모습이나 건물들이 더 할 나위 없이 조잡스러웠고 더욱 비참한 것은 사방에 감시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지도자 하나 잘못 만나면 이렇게 눈과 귀가 멀게 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비참해질 수도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철의 장막이라 일컫는 북한 땅! 내 평생에 다시 한번 올 수 없는 땅!

어떻게 하면 북한의 주민들이 자유로운 우리나라의 실상을 알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파주에서 저녁을 먹고 울진까지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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