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울진의 독립운동 발상지를 찾아서
기사입력 2020.11.25 17:03  |  조회수 2,296
댓글 2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032.jpg
매화장터 시위에서 시위 전 최초로 태극기가 내걸린 
매화2리 남수산 선산목 일대(동그라미 부분)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역사는 기억이다. 오래되고 빛바랜 고대의 역사적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뚜렷이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왜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가. 100년 이내의 역사는 현재에도 이어져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참으로 굴곡졌다. 겨레에게는 많은 비극과 고통을 현재까지 안겨주고 있다.

일제 강점에서 독립투쟁과 해방, 곧바로 이어진 분단과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그렇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당시 전범국이었던 독일은 미소에 의해 동서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전범국이었던 제국주의 일본은 본토가 분단되지 않고, 정작 식민지 조선이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북은 소련의 의지대로 그들 노선으로 나아갔고, 남쪽은 3년간 미군정을 거쳐 유엔감시하에 총선거를 치러 정부를 수립했다.

어디 그뿐인가. 해방 직후 국민들의 염원, 친일파 청산. 그 염원에 답하고자 1948년 10월 제헌 헌법에 의거해 국가기구『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한다. 반민특위는 출범 초반부터 강력한 추진력을 보인다. 하지만 친일 청산을 위한 역사적 작업은 이승만 정부의 방해로 무산되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반민특위가 취급한 친일 혐의 688건 중 반민 재판에 회부된 인물은 단 41명에 불과하며 공소시효가 끝날 때(1949. 3. 31.)까지 체형을 선고받은 자는 겨우 12명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951년 반민족행위 처벌법은 폐지되고 ‘친일’을 언급하기 어려운 세상으로 바뀐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는 해방 이후 일제 강점기 경찰 출신들이 또다시 요직을 차지하여 독립운동을 한 인사들을 도리어 탄압한 당시의 현실,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에게는 정의가 죽고 불의가 판치던 세월이었다.

지금도 그 현실은 이어져 내려와 현재까지 친일파는 완전 청산되지 않았다. 토착 왜구와 같은 신조어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이런 역사가 있다. 우리 근현대사는 광복 이후 뭔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는 것, 일제 강점기 국내외 등 독립투쟁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동가식 서가숙으로 풍찬노숙했던 선열들에겐 통탄할 일이 일이 아니겠는가!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침입으로 나치정권 시절을 보낸 적이 있다. 대전이 끝난 후 그들 국가는 반민족행위를 어떻게 처벌했는가?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프랑스가 ‘반민족행위’를 한 사람은 그가 공직자는 물론 심지어 민간 신분의 언론인까지 철저하게 단죄했다.

프랑스 일간신문 <오주르디>의 편집인 쉬아레즈는 『우리의 땅을 수호하고 있는 것은 독일인』이라며 ‘히틀러를 찬양했다’는 까닭으로 총살당하고 재산까지 몰수당했다. 프랑스는 불과 3년 정도 나치 하에 있었지만, 해방 이후 나치에 협력하여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만 158,000여명 이며, 처형된 사람만도 1만 여명이나 되었다. 이후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색출과 처벌은 40년간 계속 됐다. 이는 반민족, 반인륜 범죄에 대한 시효 자체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또 하나, 광복 이후 전범국 일본은 어떤가.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했다. 한반도에서 철수했던 미군이 급거 한국을 돕기 위해 출병하자 미군이 필요로 하는 군수물자를 일본에서 조달로 갑자기 일본 경제에 갑자기 거대한 수요가 발생했다. 한국전쟁을 통해 생긴 특별한 수요를 ‘특수(特需)’라고 불렀다. 이웃 나라의 불행으로 일본 경제가 부흥했던 것, 지금도 그들은 식민지배에 대한 진정한 사과는커녕 지금도 제국주의적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우리에게 터무니없는 독도 영유권 주장, 경제보복 등으로 꼬장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고 있다. 우리는 반일이 아닌 극일로서 그들을 대응할 국력이 되었다. 경제보복에 우리 정부와 기업들의 적정한 대응을 하고 있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코로나 방역에서 보듯이 선진국다운 국격으로 도약하고 있다. 그렇다면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고 역사가 토인비가 했던 말이다. 지나간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것, 우리의 몫이다.

2020년 8월 15일은 우리 겨레가 일제 식민지에서 광복을 맞은 지 75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는 일제 사슬에서 해방되고, 암울한 어둠에서 자주독립의 빛을 찾기 위한 선열들의 강고한 투쟁 덕분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 기도하던 시기 한말 의병투쟁을 비롯하여 강점 이후 3.1 독립만세투쟁, 애국계몽운동, 국내외 독립투쟁 등을 통해 자주독립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줄기차게 저항해왔다.

일제 36년간 당시 강원도 울진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울진 지역은 한말 의병운동과 이후 해외독립기지 건립 운동에 적극 참여한 곳이다. 1910년 이후 항일정신이 그대로 이어져, 울진에서의 3·1운동과 민족교육운동, 신간회 설립으로 나타났고, 이후 사회주의 계열의 적색농민조합운동 등으로 연결된다. 또한 울진은 비밀결사운동의 형태인 조선독립당과 창유계 사건 등과 같은 민족해방운동이 전승되는 항일투쟁의 고장이기도 하다.

2020년 8월 현재 전국의 독립유공자는 15,900여명이다. 경북은 2,295명으로 전국에서 으뜸이다. 울진은 안동, 영덕에 이어 세 번째로 그 수가 80여명이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그들에게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곽 무, 곽종열, 김광수, 김기영, 김봉문, 김재수, 김병두, 김용욱, 김일수, 남정성, 남재량, 남태영, 남지학, 남원수, 남용식, 남왈기, 남석순, 남복이, 남병표, 남광호, 노하순, 박춘근, 박양래, 박문술, 백수영, 배희직, 사문성, 손창준, 안천수, 엄종수, 이화익, 이목익, 이재선, 이윤명, 임도식, 임도술, 임시헌, 윤학규, 윤종수, 윤상흥, 윤병관, 윤두현, 윤대규, 윤강규, 한영육, 장형관, 장호명, 장영준, 장영인, 장세전, 장세용, 장봉숙, 주진욱, 주진수, 주유만, 주영석, 주병책, 주병웅, 전세호, 전재호, 전인학, 전원강, 전영경, 전병항, 전병천, 전병겸, 전배근, 전만수, 최효대, 최황순, 최 해,  최중모, 최재소, 최동인, 최경호, 황상봉, 황정걸, 황종화, 황만영, 홍우현
 
이에 필자는 1990년대부터 울진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흔적을 답사했다. 그래서 2019년 11월, 울진의 독립운동 선열들이 나고 자랐던 생가(3곳), 3.1 독립 만세시위 장터(2곳), 조선독립을 위해 모의했던 장소(2곳) 등에 한정하며, 이와 관련된 사건 개요를 당시의 신문과 최근 발간된 문헌과 증언을 통해 확인하고, 그 현장을 답사해보았다. 따라서 이 글은 울진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독립투쟁 정신을 오늘에 계승 발전시키고, 우리의 역사 인식을 새롭게 함에 있다고 하겠다.

033.jpg
 매화2리 전병철씨(67)가 구 매화장터 일대를 가리키고 있다.
매화리 벼건조장 건물과 창고가 보인다.

<울진 매화장터와 흥부장터에서의 3.1 만세시위>

일제 강점기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전국과 외국으로 독립만세 운동이 퍼져나갔다. 울진에서도 1919년 4월 11일 매화장터에서, 이틀 후인 4월 13일 흥부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매화장터 만세시위>

매화 장날 시위의 발단은 1919년 2월 경신학교 수업차 서울에 갔던 장식(張植)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 친구 윤병관(尹炳寬)에게 전달하였다. 윤병관은 고성리 주진휴(朱鎭烋)와 고목리 전병겸(田炳謙)에게 연락하여 매화 장날과 부구 장날에 만세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이에 4월 10일 밤, 윤강규(尹康逵)·장형관(張炯觀)·전병겸(田炳謙)·최효대(崔孝大) 등은  매화마을 뒷산 남수산(南峀山) 중턱인 선산목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그런데 밤사이 이것이 알려져 윤상흥(尹相興) 외 5명이 잡혀가고, 경찰의 경계도 더욱 삼엄해졌다. 하지만 다음 날인 11일 매화장이 열리자 오후 3시경 최효대가 목면으로 만든 태극기와 ‘대한독립’ 등을 쓴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외쳤으며, 이에 장터에 모인 군중들이 합세하였다. 이 가운데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11명은 체포되어 징역 6월에서 징역 4월을 받아 옥고 등을 치렀고, 태형에 처해 진 분도 있었다.

하지만 옛 장터(구 매화장터, 현재의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 898답, 울진농업기술센터 북쪽 일대)의 모습은 사라지고 현재는 논이다. 서쪽으로 도로 건너 맞은편에 벼 건조장이 들어서 있다. 여기서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4~5백 미터 거리에 울진농업기술센터가 있다. 서쪽으로는 남수산이 자리하고 있다. 들판 동쪽으로 매화천을 건너 금매1리 구국도 7번 도로가에 울진기미독립기념탑이 건립되어 있다.

남수산은 매화의 진산이다. 남수산 꼭대기에 태극기가 게양되었다고 일반적으로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남수산 중턱인(일명 선산목) 부근으로 울진에서 최초로 3.1독립 만세를 외친 곳이다.

선산목은 삼일운동 때 태극기가 내걸린 곳으로, 청소년 시절 남수산 선선목에 나무를 하러 함께 다녔던 어른들에게서 들어서 잘 알고 있다고 했다.<매화2리 전병철(65)씨 증언. 2019. 11. 9.>

남수산은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석회광산 채굴로 남수산이 붕괴하려는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매화2리 마을 들머리인 남수산교에는 석회광산 채굴을 반대하고 원상회복을 바라는 투쟁 깃발이 바람에 처연하게 날리고 있었다.

034.jpg
 1930년대 일제 강점기 부구천변 흥부장터 일대, 현 부구교 건너 덕구 온천 방향.
도로 건너 흥부장터기미만세기념비가 있다. 
036.jpg
 울진흥부장터만세 독립움동에대해 1998년 죽변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과
대화하는 장영인 독립유공자(왼쪽)

<흥부장터 만세시위>

흥부 장날 3.1만세(일명 칠보산 3.1운동)시위는 흥부장터(구 부구장터, 부구리 150-12와 하천일대)의 만세 운동은 매화장터 만세 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다. 1919년 4월 13일 오후 1시 무렵에 일어난 흥부시장 만세운동은 전병항(田炳恒)·남병표(南炳豹) 등이 이끌었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시장 중턱인 칠보산 언덕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여기에 장꾼들이 합세하여 참여자가 500여 명에 이르자 무장한 일본 헌병들은 총을 쏘며,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전병항과 남병표는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이날 흥부장터 시위에 참여했던 김일수(金一壽)는『매일신보』를 읽다가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고, 기회를 엿보다가 시위에 가담하였다. 황종석(黃宗錫), 홍우현(洪禹鉉), 김기영(金琪榮), 김도생(金道生), 박양래(朴揚來), 김봉석(金鳳錫), 김재수(金在壽), 이상구(李相龜), 김광수(金光壽) 등도 이날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였다. 이날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사람 가운데에는 전문규(田文圭)·김경선(金敬善) 등 노인도 있었다. 김경선 노인은 청년들에게『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혈투하는 이때 민족으로서 방관하는가』라고 꾸짖자 김일수 등 청년들은 칠보산에 올라 야간 시위를 계속하였고, 신화리와 고목리에서도 뒷산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들 가운데 11명이 징역 7월에서 4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흥부장터는 현재 울진군 북면 울진북로 2067과 하천 일대 (부구리 150-12와 하천)인 북쪽 부구교량 왼쪽 일대이다. 덕구온천으로 향하는 도로 건너 언덕에 흥부장터독립만세 기념 비석엔 고 전인식 전울진문화원장의 시가 있다. 부구초등학교 남쪽 바로 앞, 칠보산이 있던 자리는 현재 주택과 상가가 들어서 있다.

035.jpg
 울진 연호정 전경

<연호정은 ‘울진공작당’창립지>

울진읍 소재 연호정이 항일비밀결사체였던 울진공작당 창립 모의 장소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울진공작당 창립일은 1931년 7월 15일이다. 울진공작당 창립총회에는 이우정(李愚貞)·윤두현(尹斗鉉)·주맹석(朱孟錫)·남왈성(南曰星)·전영경(田永境)·주병순(朱秉淳)·주진황(朱鎭晃)이 참석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당시 청년운동과 신간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이우정의 사회로 진행된 창립총회에서는 종래 합법적 운동의 한계와 비밀결사운동의 필요성에 대하여 인식을 같이하였다. 그리고 중앙 책임에 이우정, 조직부 책임에 윤두현, 선전부 책임에 주진황(朱鎭晃) 등을 선정하고, 만주로부터 들여온 권총 1정을 구비하여 울진경찰서 습격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당시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하고자 풍류지인 연호정에서 항일 비밀결사체를 창립했다고 보겠다. 지금도 연호정 일대는 울진의 명소이자 군민들의 쉼터로서 구실을 하고 있다.

037.jpg
울진시장 들머리인 상원이네 집이 일제 강점기 울진면의
선일약국 터(현재 우리양복점 맞은편 헤어사랑) 

<신간회 울진지회 발기총회는 선일약국에서>

선일약국(仙一藥局)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울진에서 유일하게 양약을 팔던 신식 약국이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위치는 울진읍 읍내2길 18-7일대이다. 정확한 연유는 모르지만 해방 이후 현대약방으로 개명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며, 60년대 현대약방을 운영했던 분은 김영호씨였다. 이분은 인자하고 친절했던 분으로 필자가 읍내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약품을 구매했던 기억이 있다. 촌 할머니들한테 약을 어디서 샀느냐 물으면 『영호약방 김현대씨』라고도 하여 웃음을 터뜨린 적이 있다. 그만큼 울진에서 유명한 약방이었다.

신간회 울진회 창립일은 1927년 12월 10일이다. 신간회는 1920년대 후반에 창립, 결성된 항일단체이다. 1920년대 부르주아민족주의 계열의 문화 운동 침체와 타협적 사회주의자들의 자치론이 대두되면서 국내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의 일환으로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모여 1927년 2월 15일 창립한 신간회(新幹會)는 울진지역을 포함하여 전국 149곳에 지회(支會)가 설립되었다.

1927년 12월 10일 울진 읍내 선일약국(仙一藥局)에서 신간회 울진지회 발기총회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12월 23일 창립대회를 열기로 하고, 발기준비위원을 뽑았다. 창립준비위원으로 이우영(李愚榮), 주진복(周鎭福), 장인환(張仁煥), 김병호(金炳虎), 남정호(南廷鎬), 윤호규(尹鎬逵), 조헌석(趙憲錫) 등을, 규약기초위원(規約基礎委員)에 이우영, 윤호규, 조헌석, 주진복, 남계원(南啓源) 등이다.

이들은 예정대로 12월 23일 울진읍내 동명유치원에서 설립대회를 가졌다. 울진지회 회원의 대다수는 3.1독립만세에 참여한 경력이 있거나, 청년운동에서 활동하던 인물이다. 지회 설립 당시 회원은 122명이었으며, 임시 회관은 이곳 선일약국 안에 두었다.

설립 이후 울진지회는 지역의 명망가와 연대하여 사회운동을 이끌어 갔다. 당시 주요활동으로는 울진지역은 농촌 인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작 농민들을 위한 소작 관계 개선 투쟁 등을 벌여 소작 농민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하려 하였다. 장식, 주진복 등은 청송군 일대에 이상적 농촌을 건설하려 하였다. 교육 활동으로 울진군 전역에 야학회, 독서회를 만들고 순회문고 설치를 추진하는 등 문맹 퇴치와 의식 구조 개선에 노력하였다. 이 밖에도 사이비 종교 단체 박멸을 결의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에 들어와 활발한 활동을 펼치자 일제 경찰의 감시가 심해졌다. 1929년 초 신간회 울진지회 간부들은 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만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1930년에 들어 신간회 해소론의 대두와 함께 일경의 탄압이 더욱 심해지면서 지회의 역량은 차츰 축소되었고, 결국 울진지회는 해체되었다.

현재 모습은 월변교를 건너 북동 방향으로 40미터쯤 가면 울진시장 들머리인 성류다방과 우리양복점 맞은편인 헤어사랑, 상원이네 집이 일제 강점기 울진면의 선일 약국 터다. 
  
038.jpg
  울진읍 고성리 방향의 일진사 건물이 당시 울진양조장 분점이었다.
뒤쪽 사이로 울진군청이 보인다.

<울진조선독립당 창립지는 울진읍 울진양조장 분점>

1941년 7월 중순경, 조선독립당이 창립되었다. 독립운동 모의 장소는 현재 울진읍 읍내 향교로 8번지이다. 울진군청 앞 고성리 쪽 도로 방향이다. 현일사(도장 새기는 곳)이다. 당시 이곳은 울진양조장(술도가) 분점이었다.『울진조선독립당』에 대한 명칭은 이론이 있다. 일반적으로 『울진조선독립공작당』으로 알려져 있으나 관련 인사였던 장영인 선생 생존시 필자와의 면담에서 명칭관련질문에서『울진조선독립당』임을 명백히 했다. 여기에서는 선생의 주장을 따른다.

1941년 3월경 부산초량상업실수학교 동문인 장영인, 장영호, 이재선 등이 자주 어울려 조선독립을 열망으로 의기투합하던 중 1941년 7월경 장영인선생의 부친이 운영하는 울진양조장 분점에서 항일비밀결사체인『울진조선독립당(이하 조선독립당)』을 조직했다.『조선독립당』은 다음과 같은 강령으로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활동했다고 한다.

‘제1조 조직의 명칭을 조선독립당이라 한다. 제2조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체로 한다. 제3조 민족의식 고취와 문맹 퇴치에 역점을 둔다. 제4조 우리 민족의 우월성과 국권 회복에 역점을 둔다. 제5조 회합 장소는 비밀로 하고 수시로 변경한다.’

이후 이들은 울진 창유계 사건 때 발각되어 일경에 피체되었다. 장영인 등 관련 인사들은 울진경찰서 등에 1년 이상 유치 또는 기소유예되었고, 장영인 선생은 장기 3년 형을 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1년여 넘게 복역하던 중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장영인 선생은 해방 이후 교직에 종사하였고, 1993년 정부로부터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그는 생존시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지 못한 동지들의 포상신청 등에 노력했다. 장영인 선생은 1985년 매화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했으며 당시 필자와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어 울진 최대 독립운동사건이었던『창유계』에 관한 대강을 들을 수 있었다. 장영인선생은 2017년 1월 11일 작고했다.

039.jpg
 당시 옛 모습은 없고, 현대식 주택을 지어 주태언씨가 살고 있다.
040.jpg
 주진수 선생 기념비, 현재 울진초등학교 들머리에 있다.
041-.jpg  043-.jpg
주진수 선생 생가를 증언하는 장정자 할머니 / 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정자 할머니
042.jpg
 매정리 마을 전경, 언덕 하나를 두고 왼쪽이 주진수 생가 마을,
오른쪽이 주병웅 생가 마을이다.
 
<울진군 근북면 매정리에는 주진수, 주병웅 집터가 있다.>

이 매정 마을은 독립운동가 주진수, 주병웅, 주진욱의 집터가 있는 곳이다.

독립운동가 주병웅(朱秉雄, 1883-1925)은 당시 강원도 울진군 근북면 매정리(현 울진군 죽변면 매정길 32-7, 후정리 823) 출신이다. 그는 1919년 만주에서 이탁(李鐸)이 주도하여 결성한 27결사대에 참여하였다. 27결사대는 조직목적은 광무황제의 국장일을 기해 국내로 잠입하여 을사5적(乙巳五賊)을 주살하고, 독립선언서의 지방 배부와 독립운동 자금모집 등이었다. 주병웅은 결사대 대원들과 함께 1919년 2월 24일 봉천(奉天)을 출발하여 2월 말 경 서울로 들어오는데 성공, 결사대의 매국노 처단은 광무황제의 인산일인 3월 3일에 실행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권총과 탄환의 입수가 늦어져 1차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3월 10일경 이탁이 권총과 탄환을 입수하자 주병웅과 동지들은 다시 거사 준비에 들어갔다. 주병웅 등 결사대는 무교동(武橋洞) 박홍일(朴泓鎰)의 집에서 운동자금 500원을 확보하고, 5적들에게 보내는 성토문과 경고문을 독립문과 종각(鐘閣) 등에 붙이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1919년 5월 5일 주병웅과 결사대원 일부가 붙잡히고 말았다. 주병웅은 징역 8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4년 만에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주병웅선생 집터에는 주태언씨가 현대식 주택을 지어 주거하고 있다. 주태언씨 부친은 창유계사건으로 옥사한 독립유공자 주진욱선생이다.

주진수(朱鎭壽, 1878-1936)는 울진군 죽변면 매정 마을(현 후정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운(白雲)이다. 1907년 만흥학교(晩興學校)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1909년 봄 서울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 간부들이 만주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계획하자, 여기에 참여하여 강원도 책임자가 되었다. 양기탁·이동녕 등과 함께 만주 일대를 답사하는 등 이주 준비를 해나갔다. 그러나 1911년 1월 105인 사건으로 붙잡혀, 1911년 7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2년 9월 출옥한 그는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 삼원포를 중심으로 이시영(李始榮)·이상룡(李相龍)·이동녕(李東寧)·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전영화(田榮化)·황만영(黃萬榮)·윤인보(尹仁甫) 등과 미국 차관 3백만 불 도입 문제를 논의하고, 만주의 곳곳을 순회하며 강연 활동을 전개했다.

1926년 4월 주진수는 길림에서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 차이로 고려혁명당이 분열되자, 그는 소련으로 돌아갔다. 그 뒤 주진수의 행적은 드러나지 않는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당시 주진수 선생의 집은 없다. 현재 장정자(여, 80) 어르신이 살고 있다. 장정자 어르신 말씀에 따르면 집안 시숙인 죽변 주극중(작고)씨가 바로 옆 터(서쪽)가『주진수 선생이 태어나 자란 곳이라고 말했다.』고 증언한다. 남편 주홍중(작고)한테도 주진수 선생이 나신 터라고 들었다고 한다. 이 증언은 필자가 고 주극중씨한테  독립운동가 주진수 선생 생가 관련 취재차 2000년대 갔을 때와 증언이 일치한다.

044.jpg
한말 울진의병 창의지 불영사/울진군청 제공

<울진 의병 창의지는 불영사>

불영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동해안의 대표적 사찰로 울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학창 시절 소풍 갔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 불교 사찰은 역사적으로도 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의병들의 창의 장소 등 전진기지로서 그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한말 전기 의병이었던 태백산의 호랑이라 했던 신돌석 장군이 동해안 지역의 일본군 격퇴를 위한 온정 선미 골짜기를 넘어서 이곳 불영계곡과 불영사를 넘나들었다.

울진 의병 창의도 이곳에서 했다. 1906년 2월 영양의 이현규(李鉉奎. 1874∼1917.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출신으로 경북 북부권 등에서 활약했던 의병장)와 이강년 휘하의 김현규(金顯奎, 경남 김해 출신으로 이강년 휘하의 의병장)가 의병을 창의한 곳이다. 이현규는 1905년 11월 영양에서 창의하여 청송의 주왕산 대전사에서 주둔하다가 1906년 2월 19일 울진으로 들어와 불영사에 주둔하였다. 또 김현규는 강원도 남부의 각 군에서 의병을 독려하면서 1906년 2월 울진에 도착하여 의병을 모집하니 100여 명이 되었다. 당시 삼척에서 활동하던 김하규(金河奎)와 강릉에서 활동하던 황청일(黃淸一)도 20여 명의 포군을 거느리고 합세하였다. 여기에 전재호(田在浩)·김용욱(金容旭)·전배근(田培根)·최경호(崔慶鎬)·장진수(張鎭洙)를 비롯한 울진 출신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신간회 울진지회 창립대회는 동명유치원에서>

신간회(新幹會)는 1927년 2월 15일에 사회주의, 민족주의 세력들이 결집해서 창립한 항일단체로, 1931년 5월까지 지속한 한국의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이다. 신간회는 그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시켰다. 그 결과 전국 149곳에서 신간회 지회가 만들어졌다. 울진에서는 1927년 12월 10일 울진읍내 선일약국(仙一藥局)에서 발기총회가 개최되었다. 참가자들은 12월 23일 창립대회를 울진읍 동명유치원에서 열기로 하였다. 당시 동명유치원이 있었던 곳은 현 울진중앙감리교회 일대(현재 울진초등학교 남쪽 언덕)이다.

12월 23일 울진읍내 동명유치원에서 신간회 울진지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창립대회는 준비위원대표인 이우영의 개회, 출석회원 점명, 축하문 낭독, 임원선출, 결의사항을 논의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울진지회 회원의 대다수는 3.1 독립만세에 참여한 경력이 있거나, 청년운동에서 활동하던 인물이다. 지회 설립 당시 회원은 122명이었다.

045.jpg
 복원된 황만영선생 생가

<황만영 집터는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황만영(黃萬榮, 1875~1939)은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출신으로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곳곳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나자, 성익현 의병에 군자금 800냥을 지원하였다. 이어 1907년에는 신민회 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이어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그는 1912년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하여 신흥학교(新興學校) 재정을 담담하였다. 이어 1913년에는 러시아로 이동하여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 참여하는 한편, 문창범(文昌範)·이상설(李相卨) 등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후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황만영은 주진수(朱鎭壽) 등과 함께 만주로 파견되어 순회 강연을 개최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하지만 그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파견되었다가, 일제의 감시로 만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1927년 12월에 창립한 신간회 울진지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기성면 사동리의 황만영 선생 생가는 황 선생이 결혼 후 분가하여 살았던 곳으로 전해진다. 2016년 12월 22일 울진군에서 복원, 준공하였다.

046.jpg
 북면 나곡2리 골마, 최익한선생과 최재소,최학소형제 집터.
현재 김종도(63세)씨가 『명가농원』을 운영하며 주거하고 있다.
2003년 최구소씨와 필자가 답사시의 농가주택은 골간은 유지하였으나,
지금은 붉은 벽돌로 개축하였다.
047.jpg    048.jpg
(왼쪽) 2003년도 최익한 생가를 찾은 최구소씨. 최익한 선생과 최구소 씨는 5촌 당숙간이다. /
(오른쪽) 최근 나온 최익한 선생의 저서 일부
 
<최익한, 최재소, 최학소의 3부자 집터는 북면 나곡리 골마>

울진군의 독립운동가 중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 최익한(崔益翰) 3부자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울진군 북면 나곡2리[속칭 골마]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는 사회주의 사상에 의거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였고, 해방 후에는 통일 민족국가 건설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또한 많은 국학 관련 저술을 남겼다. 그는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1920, 30년대 가운데 1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의 많은 저술은 최근에 간행되어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최익한이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1934년 2월에 그의 장남 최재소(崔在韶, 1914∼1937)와 차남 최학소(崔學韶)가 울진공작당 사건에 연루되어 각각 징역 2년 6월형과 3년형을 언도 받았다. 최재소는 1937년 3월 고문의 후유증과 열악한 감옥 생활을 이기지 못해 옥사하는 비운을 겪었다. 2000년 국민훈장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최학소는 1943년 3월 다시 창유계 사건으로 검거되었으나 도중에 탈옥하였다. 그는 해방 후인 1945년 12월 조선청년단체총동맹 전국대회가 개최되자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저서로 1946년에 지은《농민조합론》이 있다.

<창유계원들이 유치, 고문치사 당한 일제경찰 연무장은 울진군청 안 남쪽 주차장>

현재 울진경찰서는 월변에 있지만,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는 울진경찰서가 현 울진군청 안 남쪽 주차장 일대였다. 연무장은 경찰서 부속 건물로 체력과 무술을 단련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 경찰은 창유계 사건 관련자들을 여기에 가두고 고문 등을 하였다.

울진 최대의 독립운동 사건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창유계는 일제 강점기 후반 울진적색농민조합이 해체된 이후 이 조합의 주도적 인물이었던 최학소, 전원강(田元江), 남왈기(南曰紀), 남원수(南源壽) 등이 이전의 적색농민조합운동을 계승하고자 울진지역에서 1939년 조직했던 계 조직 형태의 항일 비밀결사체이다.

창유계원들은 자체적인 모임을 통해 결속을 다지던 중 1943년 3월 중경 임시정부에 연결되어 밀파된 계원 남원수가 만주로 향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다. 같은 달 19일에는 지방의 정세를 전달하기 위해 중경으로 출발하려 했던 계원 장세전도 출발 전날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제 경찰의 관련자 102명을 검거, 당시 울진연무장에 수감한 후 그중 22명이 송치되어 고문치사 5명, 복역 중 옥사자 7명, 징역 10여명으로 다수가 희생되었다.

창유계는 울진농민조합의 붕괴로 사회운동이 침체 국면에 빠져 있을 때 활동한 독립운동 조직체였다. 특히 울진농민조합의 목적을 계승하여 조선의 독립 등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그 운동이 일제 말기까지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울진선열들이 펼친 독립운동에는 조국애와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충절과 자기희생, 공동체 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거기에는 당시 외세를 배격하고, 식민지배에 대한 항일독립 정신, 또한 독립운동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이념을 초월한 민족 통합정신, 보수를 뛰어넘는 혁신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따라서 항일독립정신, 민족통합정신, 혁신성같은 겨레의 혼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그 가치가 유효하다. 그것은 당시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바랐던 울진 선열들의 독립투쟁 정신과 8.15 광복 이후 남북 분단을 극복하려는 대다수 겨레의 여망과 그 맥이 닿아 있다.

심훈이 조선 독립을 바라며 쓴 시 『그날이 오면』처럼, 오늘의 분단 현실을 극복하고 민족을 통합하는 평화통일의 그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량이면,/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기뻐서 죽사오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심훈 ‘그날이 오면’ 전문)
<저작권자ⓒ빠른뉴스! 울진뉴스 & ulji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59838
댓글2
  •  
  • 장영태
    • 신간회 창립준비위원 '조헌석'은 영양출신 '조훈석' 입니다.
      디지털울진문화대전에서도 오기가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은 국가기록원에 명확하게 등재된 영양 출신 독립 유공자입니다.

      1. 영양군 오오회 출신으로 극렬한 독립운동가 이며 사회운동가입니다.
      2. 동아일보/시대일보의 영양지국장
      3. 울진 청년회에 가입하여 장식선생과 함께 전강원도울진대표 및 강원도 간부로 활동
      4. 신간울진지회 창립 준비위원 및 초대 정치문화부 간부로 활동
      5. 영양으로 돌아가 영양청년회 및 신간영양지회 가입 및 간부활동
      6. 경북북부지역 사회운동 주도 및 복역
      7. 1932년 '울진비사사건' 일명 '이상촌 무옥사건'의 당사자
      8.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 받음.
      ※ 한마디로 울진청년회에서 학습하고 고향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몸 받친 왼쪽운동가입니다.
      문의 010-6273-2012
    • 0 0
  •  
  • 장영태
    • 선일약국(仙一藥局)은 일선(一仙) 공 장식(張植)선생이 경영한 약국으로 울진 북부지역에서 양약을 판매할 수 있었던 유일한 약국이었다고 합니다.
      선일(仙一)은 장식선생의 호인 일선(一仙)을 거꾸로 하여 지은 약국인데 한글의 약국 이름으로는 괜찮은 상호같군요.

      1923년 장식선생이 서면일대 의생면허증 7085호(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 참조)를 참고로 하면 울진 읍내리에서 양약 판매허가를 받기 위해서도 어려운 자격증을 취득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울러 울진 신갼회의 창립 과정들은 다시한번 사실에 준하여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읍니다.

      [사설] 울진의 독립운동사는 뿌리보다는 가지가 산만한듯 한 각개전투 양상입니다. 분명 그 중심에는 누군가가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일경이 기록해 놓은 '主主意者' 중국어에서 번역하면 '주모자'로 울진의 독립운동의 중심에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 0 0
 
 
 
 
 
    울진뉴스/월간울진(http://uljinnews.com |   창간일 : 2006년 5월 2일   |   발행인 / 대표 : 김흥탁    |   편집인 : 윤은미 
  • 사업자등록번호 : 507-03-88911   |   36325. 경북 울진군 울진읍 말루길 1 (1층)   |  등록번호 : 경북, 아00138    |   등록일 : 2010년 7월 20일                         
  • 대표전화 : (054)781-6776 [오전 9시~오후 6시 / 토, 일, 공휴일 제외(12시~1시 점심)]   |  전자우편  uljin@uljinnews.com / ytn054@naver.com
  • Copyright © 2006-2017 uljinnews.com all right reserved.
빠른뉴스! 울진뉴스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