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도 나오고, 쌀도 나오고

행곡 주천대와 천량암 이야기
기사입력 2020.11.25 18:02  |  조회수 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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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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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정비된 구미마을의 쉼터와 수령 150년 된 보호수인 은행나무

<풍광이 좋은 구미, 샘실마을>

천량암과 주천대가 있는 곳은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이다. 왕피천 하류인 수산교 서쪽 방향으로 36번 구도로와 민물고기 전시관을 지나면 아담한 마을이 나타난다. 행곡리는 불영계곡의 광천을 따라 좌우로 형성된 배산임수형의 농촌 분지마을이다. 현재 행정단위로 분화된 ‘구미(행곡4리)’, ‘샘실(행곡1리)’, ‘내앞(행곡2리)’, ‘함질(행곡3리)’이다.

오랜만에 주천대가 있는 행곡(구미, 샘실) 마을을 찾았다. 마을은 고요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둘레 산들은 푸르렀고, 들판은 모살이를 한 녹색 벼들이 햇볕에 반들반들 빛났다. 그 생기가 바람에 살랑거렸다. 주천대 냇물은 청자 빛 하늘을 드러내 구름을 품고 있었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햇살은 유난히 따가웠다. 주천대 들머리 구미교에서 바라본 왕피천과 광천의 합수 지점 일대에 있는 성류산 언저리는 녹색 물결로 빛났다. 유월 어느 날이었다. 마을 쉼터의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먼저 나를 반겼다. 불현듯 어린 시절 이곳에 소풍 왔던 풍경 하나가 떠오른다. 당시 노음초등학교 단골 소풍지로는 성류굴, 망양정, 주천대, 수산솔밭이었고, 5, 6학년 때 수학여행지로는 불영사와 백암온천이었다. 어린 시절 그때처럼 주천대 들머리에는 은행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었다. 다만 냇가였던 곳이 제방으로 잘 정비되어 은행나무는 보호수로 지정, 구미마을 쉼터가 되어 있었다. 구미와 샘실은 언제 와 봐도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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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곡3리 구 36번 도로 산 정상 바위굴이
백련산 천량암터 일대이다.(네모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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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36번 도로가의 지하에서 물이 샘처럼 솟구친다는
샘실(못) 일부, 현재 백천모텔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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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량암터 가는 길 안내판 

<문헌상의 천량암과 주천대>

우리나라 어느 곳을 막론하고, 전설이 없는 곳이 없다. 여기 광천이 흐르고 풍광이 수려한 행곡도 마찬가지다. 술도 나오고, 쌀도 나오고, 행곡 주천대와 천량암 이야기다.

술과 밥! 쌀은 고대로부터 우리 주식이다. 술은 인류의 유흥문화를 발전시켰다. 밥과 술은 인류 식문화로서 하나의 공동체 통합의 매개체로 자리 잡았다. 쌀을 비롯한 곡식은 밥으로, 일부는 술을 빚었다. 술이 밥보다 흔하고, 술보다 밥이 흔한 시대. 아니다. 둘 다 차고 넘치는 풍요의 시대다. 하지만 울진의 선인들은 술을 매개로 수려한 풍광 속에서 어떤 풍류를 즐기며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글은 천량암 이야기도 언급하겠지만 주로 주천대에 관한 이야기를 쓰겠다.

천량암은 내앞마을 천전교 건너 구 36번 도로의 산줄기 정상 못 미쳐 구멍 뚫린 단애가 선명히 드러나 있다. 

천량암 이야기는 문헌상 신증동국여지승람 45권 울진현에 『천량암은(백련산, 현재 금산으로 추정됨)에 있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원효가 이 절에 머물 때 바윗돌 사이에 구멍이 있는데 쌀이 나왔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동국여지지 사찰편에 『천량사는 백련산에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원효 대사가 머물렀다고 한다. 관동읍지 울진현편에 『천량혈은 서쪽 10리 떨어진 곳에 있다. 쌀이 하루에 매번 한 되씩 흘러나왔다. 욕심 많은 승려가 쌀이 많이 나오게 하려고 석혈(石穴)을 파서 깨뜨린 이후 진액이 흘러나와 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고촌(米庫村)이라 하였고, 혹은 천량암이라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지금도 천량암 유적지에는 시대 미상 석축과 기와 조각들이 발견된다. 이른바 하늘이 내린 양식, 쌀이 나오는 바위구멍 전설이다. 그 밖의 이야기는 세월이 흐르면서 덧붙여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하나는 설화가 주는 교훈이다. 불교의 무소유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 또 하나는 현재 행곡이라는 옛 지명을 『미고촌』이라 했던 것, 우리말로 쌀구멍을 뜻하는 『쌀구』로 불려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쌀구를 살구나무의 한자음인 행(杏)으로 엉뚱하게 표기된 것이다. 샘실(천연) 내앞(천전)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은 없어지고 한자지명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또 하나의 전설은 두 잔 이상 나오지 않는 술바위, 『주천대』전설이다. 영월에 술의 샘이 있고 평양에 술산이 있다면, 경북 울진에는 ‘주천대’(酒泉臺)라는 술바위가 유명하다. 바위의 움푹 파인 곳에서 술이 나온다. 문제는 이 바위 역시 사람을 가렸다는 것. 상민에게는 주지 않고 양반에게만 술을 준 고약한 술바위였다. 고려 충선왕 때 마농로라는 사람이 돈을 써서 고을의 원이 됐는데, 이 정도면 주천대의 술을 마실 수 있겠구나 해서 찾아갔다. 주천대에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술은 나오지 않았다. 이어서 남루한 차림의 청년이 표주박을 댔고, 술이 나왔다. 결국 마농로는 자괴감에 빠져 술이 나오는 틈을 다 없애버렸다. 이 주천대에서 나온 술은 늘 사람 수에 맞게 나왔다고 한다. 두 사람이 가면 두 잔, 세 사람이 가면 세 잔만 나왔다. 과음을 경계한 것이다.(술 바위 이야기는 명욱의 『동네술이야기』에서 대략 옮겨 왔음)

여기에서 이 술바위는 주천대(거북 꼬리부분) 자체이다. 구미라는 마을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했다. 제4경인 창옥벽을 두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주천대 바위 건너 창옥벽에는 술이 나오는 듯한 구멍 뚫린 바위가 있다. 전은우(행곡마을 출신, 울진농촌기술센터 소장)씨의 말로는 구멍 뚫린 바위를 용구멍이라 했다하며, 어린 시절, 여름철에 이곳 창옥벽과 주천대 바위(무학암)에서 멱을 감으며 동무들과 다이빙했다고 한다.

어쨌든 쌀구멍과 술바위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비슷하지 않은가? 무절제, 과욕, 과소비, 개발이라는 명분의 자연환경파괴 등을 경고하는 어쩌면 오늘날 우리 삶을 단순하게, 검약하게 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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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동의 주천대 일대 전경, 오른쪽 산줄기가 거북형상이고, 주천대가 거북 꼬리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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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경 송풍정(소나무가 있는 평탄한 곳)과 무학암(소나무 아래 돌출된 바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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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경 족금계(바위 아래로 흐르는 냇물)와 제4경 창옥벽(바위절벽) - 네모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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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정자가 들어서 있는 일대가 제5경 해당서이다. 지금은 제방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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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경 비선대는 냇가의 돌자갈밭이다. 제8경인 앵무주(모래섬)는 구미교 일대로 추정되나 지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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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선생 유허비와 수령 350여 년 된 소나무(보호수)가 있는 주천대 들머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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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천대 맞은 편 봉우리가 옥녀봉이다.(동그라미 부분)
옥녀봉 8부능선에 고산서원이 처음 건립다고 한다.

<주천대(酒泉臺) 8경은 어디인가>

주천대란 지명은 조선조 임유후(任有後. 1601~73)가 붙였다. 그가 남긴 『주천대기(酒泉臺記)』에는 주천대 8경에 관한 이름 지은 경위를 밝히고 있다.

『고을 어른들이 내가 여기에 온 것을 즐거워하면서 대 위에 술과 음료를 벌여놓고 서로 나를 부르면서 마시니… 드디어 서로 취하여 춤을 춤추면서 손짓하여 아르기를 이 대에 올라가면 돌이 겹겹이 쌓인 꼭대기에 바람이 우수수 부는 소리가 나니 송풍정(송풍정)이라 하고, 그 밑의 바위는 무학암이라 하고, 냇물은 족금계라 하고, 좌우로 수면에 벌린 절벽은 창옥벽이라 하고, 벽의 북쪽에 있는 것은 해당서라 하고, 돌다리 동쪽에 상투처럼 생긴 봉우리는 옥녀봉이라 하고, 관 쪽으로 걸려있는 것 같은 땅은 비선탑이라 하고, 오른쪽 모래톱은 앵무주라 하였다(이하 생략)』라고 쓰고 있다.

위와 같은 근거로 필자는 지금의 주천대 둘레 자연환경과 한자의 뜻을 종합, 이름을 유추하고 팔경의 위치를 고증하고자 한다.

제1경은 이대에 우수수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나니 송풍정(松風亭)이다. 주천대를 두고 말함이다. 어떤 사람은 당시 이곳에 정자가 있었다고 하나 문헌상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풍수지리상 거북 꼬리형에 해당하기 때문에 건물 따위나 인공물을 얹힐 경우 지형이 침몰한다는 풍수의 금기 때문에 정자는 없었던 것 같다.

제2경은 무학암(舞鶴岩)이다. 송풍정 밑에 튀어나온 바위이다. 지금 일부는 물속에도 있다. 바위에서 학이 춤추고 노니는 모습 또는 바위 형상이 학이 춤추는 듯하다. 실제 당시 둘레가 소나무숲이고 냇가라 백로들이나 학이 먹이 활동으로 날아들었을 것 같다. 6월 모살이가 끝난 성류굴 쪽 들판엔 백로 몇 마리가 보였다.

제3경은 족금계(簇錦溪)이다. 주천대를 흐르는 냇물을 두고 말함이다. 냇물에 조릿대가 비치고 비단결같이 일렁이는 아름다운 풍광을 두고 이름을 지었던 게 아닐까 한다. 지금도 대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멋진 풍광이다.

제4경은 창옥벽(蒼玉壁), 냇물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벌어진 절벽이다. 지금도 푸른 옥빛을 내며 냇물에 그 모습이 비친다.

제5경은 해당서(海棠嶼)이다. 창옥벽 북쪽이다. 해당화가 핀 모래 작은 언덕을 말하나 지금은 모래섬도 해당화도 없다.

제6경은 옥녀봉(玉女峰)이다. 돌다리 동쪽에 상투처럼 생긴 봉우리다. 아름다운 옥 같은 산봉우리를 말한다.

제7경은 비선탑(飛仙榻), 고산 쪽에 걸려 있는 돌자갈 땅이다. 길고 좁은 돌자갈이 깔린 냇가를 두고 말한 듯하다.

제8경은 앵무주(鸚鵡洲), 냇가 건너에 모래밭을 말한다. 앵무주는 이태백의 시에 나오는 것으로 중국 하북성[河北省] 한양현[漢陽縣] 서남쪽의 장강[長江] 안에 있는 모래섬을 뜻한다. 아마 임유후도 이를 본 따 지은 것으로 생각한다. 주천대의 앵무주인 모래섬은 현재 구미교 건너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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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3선생 유허비 /
(오른쪽) 1991년 후손들이 세운 임만휴 선생 유허비 앞에 선
필자(우측)와 전현우 울진농업기술센터 소장

<주천대 3선생, 동봉, 만휴, 서파>

주천대와 관련한 주요 인물에는 문헌상으로 세 사람이 있다. 동봉 김시습(東峯 1435~1493),  만휴 임유후(任有後. 1601~1673), 서파 오도일(오도일 1645-1703)이다. 자는 열경(悅卿)이며 호는 매월당(梅月堂) 또는 동봉(東峯)이다. 현재의 주천대에는 만휴 임유후의 유적비와 동봉 김시습, 만휴 임유후, 서파 오도일을 기리는 삼선생 유허비 등이 세워져 있고, 보호수로 지정된 소나무 수 그루가 모여 있어 절경을 이룬다. 마치 그 소나무들이 학문 높고 고고한 3선생을 상징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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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서원 현판

<울진유학을 진작시킨 임유후>

임유후는 누구인가? 그는 조선조 한양 출신으로 소위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잘 나가던 관료이자 지식인이었다. 자는 효백, 호는 만휴다. 시호는 정희, 본관은 풍천이다. 1628년 (인조 6년) 동생 임지후의 역모로 숙부인 임취정과 그의 아들이 참형을 당하는 등 가문이 풍비박산이 났다. 다행히 그는 역모 혐의에서 벗어나 산간오지인 울진으로 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울진에 20여 년간 은거하여 유학 진작과 제자를 양성, 학문을 연구했다. 사후 그 공덕을 잊지 못한 후학들이 그가 살던 구미마을에 고산사(孤山祠)를 지어 위패를 모셔 기리다 다시 고산서원(孤山書院)을 세우게 되었다. 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 현재 강당은 구미동 민가에 고산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지금은 민가이지만 고산서원은 처음 위치는 어디인가? 함께 동행을 한 전은우(현 울진농업기술센터 소장, 행곡리 출신) 씨는 고산서원의 본래 위치가 주천대 팔경의 하나인 옥녀봉 정상의 일대 8부 능선 평지에 있었던 것으로 마을 어른들에게 전해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나, 이 부분은 더 고증해봐야 할 것 같다. 또 하나는 만휴 선생은 울진 행곡에서 20여 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그가 당시 행곡에서 살았던 집터는 어디인지 불분명하다.

<천하의 신동 김시습, 그는 주천대에 왔었나?>

김시습(1435-1493)은 조선 세종 임금시 5세 신동으로 장래가 촉망된 인물이었다. 그의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본관은 강릉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로 삶의 허무함을 느끼고 전국을 방랑할 때 성류굴 성류사에 머무른 적도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울진 장씨이고, 김시습은 외손으로, 울진은 외가 동네였다. 그가 울진에 와서 주천대를 방문했다고 하나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가 주천대 풍광을 감상했더라면 시 한 편이라도 남겼을 법한데 문헌상으로 발견되지 않는다. 임유후의 주천대기에도 이와 관련하여 김시습이 그 발자취가 주천대에 미치지 못한 아쉬움을 기록해 놓았다.

『이 대(臺)가 외진 동네에 묻혀 있어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한 상태로 수천 년을 지냈다.
옛적 김시습이 (울진) 성류사에서 하룻밤을 쉬어 갔지만 그 발자취가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였고, 또 격암 남사고 선생이 이곳에서 스스로 깨치면서 무성한 풀을 베고 벽돌로 터진 곳을 막으면서 힘써 노력하였지만, 격암 또한 작은 집조차 장만하지 못하였다.』는 데서 알 수 있다.

한편, 윤사진(1713-1792)도 그가 남긴 『고산서원 사적기』에 김시습의 시 『울진에 들르다』를 인용, 주천대와의 인연을 설명하고 있으나, 그가 외가 동네인 울진이 선사(울진) 장씨의 내력을 말하는 것이지 이곳 주천대에 들렀다는 뚜렷한 내용은 없다. 그가 쓴 고산서원 사적기 일부이다.

『고산은 산수의 경치가 빼어나기로 선사에서 제일인데, 옛날 청한자가 세상을 피하여 다닐 적에 가끔 이곳에 와서 쉬고 또한 시도 읊었으니, 그 시에 울진에는 외가의 친족이 있는데/분파와 자손은 선사에서 나왔다네』라고 하였을 뿐이다. 

김시습은 전국 각지를 유랑할 때 울진에 와서 『울진에 들르다, 울진 성류굴에 묵으며, 평해 월송정에서 노닐며, 망양정에 올라 달을 보며, 울릉도를 바라보며』등의 시를 남겼다.

<울진에 들르다>

울진에는 외가의 친족이 있는데/분파와 지손은 선사에서 나왔다네/사람들이 장건의 후손이라 말하니/계보가 한나라 신하의 집안이네/서역으로 일찍이 사신으로 나갔고/동쪽 삼한으로 또 수레 몰고 왔다네/오호라 때와 세대 벌어졌으니/바다 끝 저 멀리를 생각하네.

<울진 성류굴에 묵으며>

굴 앞 봄물이 이끼 바위 위로 흐르고/바위 뒤 산꽃에 노을 햇살 비치네/여기에 또한 빼어난 맑은 흥취가 있는데/깊은 밤 둥지의 학이 사람에 놀라 날아가네.

<주천대를 사랑한 오도일>

서파 오도일은 울진현령으로 3여년(1683-1686)간 재직했다. 그는 주천대를 사랑하여 자주 이곳에 와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그는 울진현감을 지낸 뒤 10여 년 후 강원도 관찰사로 승진, 울진에 다시 와 유람했다. 서파는 생육신인 김시습을 흠모하여 동봉 별묘를 건립한 바 있으며, 그가 죽은 뒤 만휴묘에 합향하고 다시 동봉 김시습과 합향, 고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서파는 평해 망양정, 불영사, 취운루 등 울진 관련 20여 편의 시를 남겼다.

<주천대에서 가을을 감상하며>

시내 비와 산 구름에 술 한 잔 마시니/좋은 때에 게다가 국화 피는 시기임에랴/도롱이 입은 태수는 광흥이 넘치는데/아전이 앞으로 나와 절구 시를 바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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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군 산림조합의 금강송이주 / 울진술도가의 미소생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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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철씨가 생산하는 금강송주
 
<조선 중기 울진의 술>

조선조 16세기 중후반의 임유후를 비롯한 울진의 시인 묵객들은 어떤 술을 마셨을까? 문헌상으로는 박주(막걸리), 삼해주, 꽃술, 보리술, 송화주가 나온다.

①임유후(1601-1673)의 애제자들이 만휴 타계시 지은 제문에 『달 밝은 밤에 텁텁한 막걸리를 마시고, 질박한 안주를 서로 권하며』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텁텁한 막걸리는 당시에 쌀보다는 밀이나 보리로 만든 농주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②이형상(1653-1733)의 월송정서에는 『삼해의 아름다운 술을 거르니 금당의 노을 뿜고 오신의 좋은 안주를 갖추니 은실의 회를 잘랐네』 여기서 삼해(三亥)의 아름다운 술이란 음력 정월의 세 번째 해일(亥日)에 담근 술로, 삼해주(三亥酒)라 한다. 이 술은 12간지 중 돼지날을 정해 술을 빚는데, 이는 돼지가 의미하는 복을 기원하며 빚는 술이라 한다. 삼해주는 멥쌀과 흰 누룩(백곡)을 원료로 써서 빚는다. 음력 정월에 빚기 시작하여 저온에서 석 달 걸려 세 번을 거듭 발효시켜 얻는 맑은 술로 그 맛과 향이 뛰어나다고 한다. 삼해주는 현재 서울 무형문화재 보존회에서 생산하고 있다.
③성현(1439-1504)의 『흥부역 뒷산 만개한 출단화』라는 5언 율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바람기 차가우니 농사는 더디어라, 한스러운 건 친구들이 곁에 없어, 꽃술 달여 금 술잔 권하지 못함일세』꽃술 달였다는 꽃술을 데워서 먹었다는 것, 꽃술은 각종 꽃을 넣어 발효시킨 술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무슨 꽃인지는 불분명하다.
④이산해(1539-1609)가 울진 평해 유배 시절 남긴 문집 아계유고에는 풍류와 술에 관한 이야기에 박주와 보리술이 나온다. 그의 7언 율시에 『막걸리 석 잔을 애오라지 권하니 인생은 덧없는 한바탕 꿈이라네』『막걸리 다 비워도 어이 취하지 않던지』라는 구절이 나온다. 막걸리는 누룩으로 빚은 술이란 뜻의 박주(薄酒)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이산해의 죽붕기에는 1594년 여름 달촌(지금의 평해 삼달리)에서 화오촌(지금의 평해 월송리)에 이주하여 촌로들과 죽붕(더위를 피하기 위해 대나무를 이용해 만든 다락집의 일종)을 만들고 보리술을 마셨다는 구절이 나온다. 『죽붕이 이루어지자 이웃 노인들과 함께 보리술을 마시며 축하하였다.』
⑤오도일(1645-1703)이 불영사 인근의 금강연 동쪽의 바위를 취선대라 이름 짓고 쓴 칠언절구에『송화주』가 나온다.
『송화주 잔뜩 마시고 외롭게 휘파람 부니, 삼각봉 그늘이 술잔에 거꾸로 비치네』

그렇다면 21세기 현재 울진지역에는 어떤 술이 생산, 시판되고 있는가? 지금 대량 생산되어 시판하는 술은 울진 술도가(대표 홍시표, 울진군 근남면 노음리)의『미소생막걸리』다. 울진군산림조합(조합장 남동준))에서도『금강송주』『금강송 힘찬술』등을 생산, 판매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집에서 빚는 술을 가양주라고 한다. 현재 울진농업기술센터 산하 울진전통주 연구회(1기 최연경 회장, 2기 전병철 현 회장)가 울진 전통주를 연구하고 있다. 그래서 새로 개발한 술이 최근 선 보이고 있다. 가양주 전문가인 최현경(울진읍 읍내리)의 술과 윤현수(매화면 매화2리)씨의 대통매실주가 있으며, 전병철(매화면 매화2리)씨가 생산하는 금강송주가 있다. 
                        
<주천대와 천량암이 주는 교훈>

주천대와 천량암은  조선중기 울진의 선현들이 당시 인문학인 유학을 진작시키고, 삶의 흔적과 풍류와 전설이 깃든 곳이다. 세월이 흐르면 인물도 가고 자연도 변하지만, 인류 문화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오늘날까지 쉼 없이 이어져 발전해 왔다.

그래서 주천대 풍광에 걸맞은 옛 고산서원 복원, 3선생 비석 정비, 안내판 교체, 계단 등 환경정비가 필요할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 마을 출신 전은우(현 울진농업기술센터 소장)씨는 주천대 건너 옥녀봉 바위에서 어린 시절 다이빙으로 물놀이 하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이 절경을 그대로 두기보다 잘 활용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또한 만휴선생이 붙인 송풍정이라는 정자를 인근에 건립하고, 옥녀봉과 주천대를 잇는 출렁다리 하나쯤 놓인다면 더 멋진 풍광이 될 거라고도 했다. 거기에다 옛 선인들의 발자취가 주는 이곳의 의미를 알고, 소소한 자연풍광을 즐기면서 한담을 나눌 수 있는 소박한 전통주막 또는 찻집이나 커피점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요즈음 스트레스나 코로나로 지친 현대인들에겐 주천대와 같은 수려한 자연풍광이 최고의 치유(힐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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