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이윤명(李潤明, 이명: 李東廈)

기사입력 2020.12.09 13:15  |  조회수 14,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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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준.JPG
김성준 울진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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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장 이윤명 생가터인 울진군 북면 주인리 679번지. 지금은 논이다. 3대 후손 이희국씨

의병 활동 개요

이윤명(李潤明. 이명: 東厦))은 1884년 4월 14일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주인리 679번지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우계(羽溪)’, 兒名은 ‘경학(敬學)’ 이명(異名)은 ‘동하(東厦)’이다. 그의 가계는 조선 단종 때의 문신 도촌 이수형의 후손으로 그의 셋째 아들 전설서 별좌 이양근의 13대손이며 부친은 ‘태진(泰鎭)’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행동거지가 비범하고 대범하여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고 하며 어른들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매우 총명하여 만나는 어른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점차 성장하면서 학문과 함께 무예와 궁술도 익혀 지역 청년들 중에서 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조선 말기 일본인들은 조선을 탈취하기 위해 갖은 만행을 서슴지 않았고 조선의 국력은 날이 갈수록 쇠퇴해져 나라를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약관 20대의 이윤명 청년도 쓰러져 가는 국가의 운명에 통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국운이 좋아질 기세가 없자 피 끓는 젊은이로서 망국으로 치닫는 나라를 더 이상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어 주변의 청년 동지들을 규합하고 의병을 창의하기로 작정하였다. 이미 전국 도처에서 이윤명 청년과 같은 뜻을 가진 많은 청년들이 자진하여 구국의 행보를 시작하여 우후 죽순처럼 의병들이 창의되었다.

1906년 3월, 마침 가까운 영해에서 신태호(신돌석)이 의병을 창의하여 나날이 그 세가 불어나고 있었다. 이윤명(이동하)은 그동안 자체적으로 결성한 의병 동지들을 이끌고 신돌석 의진에 합류하였다.

신돌석 의진에 들어간 이윤명은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지킬 것을 맹세하고 소모장(昭募將)이 되어 평해, 울진, 삼척 등지로 의병을 모집하여 本陣에 합류시겼다.(신돌석 장군 실기 23쪽)

한편 작전 시에는 군령장(軍令將)을 맡아 늘 선봉장에 섰고 일본군을 기습 공격, 일본 헌병을 사살하는 등 충실하게 군령장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신돌석 의진의 기세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907년 2월 신돌석 의진은 울진을 야밤에 기습하여 울진 탈환에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군대는 완전히 물러가지 아니하고 1개 소대가 상주하고 있었다. 신돌석 의병들의 공격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신돌석 의진은 성익현 의병진과 각 진의 의병들이 합세하여 재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이윤명 군령장(軍令狀)은 지역 출신이라 지리와 상황 파악이 밝아 작전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08년 2월 이윤명 군령장은 성익현 부대와 합세하여 울진군 북면 흥부동의 칠보산(七寶山)에서 일본군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다수의 일본 헌병을 사살하였고 우리 의병들도 많은 중상자가 발생했으며, 13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의병들의 조직이 날이 갈수록 조직화되어가자 일본군들은 조선 조정을 압박하여 거세게 반격을 꾀했지만 에도 조선의 의병들은 전국에서 그칠 줄 모르고 일어나게 되었다.

급기야 조선조정에서는 친일파 대표로 알려진 송병준(宋秉畯)이 의병해산선유사(義兵解散宣諭使)로 의병 해산령을 내리는 한편 일본의 통감부(統監府)와 협의하여 일본군을 증강 배치하고 의병들을 강력히 공격했다.

1908년 11월 신돌석 의병장이 피살되자 의병들의 사기는 크게 위축되었고 활동폭도 축소되었다.

이윤명 의병장은 1909년 4월 정경태 의진에 합류하여 포군장(砲軍將)을 맡았다.(판결문 참조)

포군장을 맡은 이윤명 의병장은 1909년 5월 17일 봉화군 소천면 승부리 권재룡(權載龍)집을 불태우는가 하면 동월 20일에는 승부리 김형규(金炯奎)에게서 돼지 1마리를 탈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경태 의병장은 1910년 정경태 의병장이 체포되어 또다시 의병들의 사기에 위협을 주었다. 정경태 의병장이 경성 감옥에서 사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의병들은 깊은 산간오지로 피신하여 분진 항쟁을 계속하였다.

송병준의 의병 해산령 때 많은 의병들이 투항하고 가정으로 돌아감으로써 목숨을 걸고 투쟁을 결심한 많은 의병들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그러나 이윤명 의병장은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굽히지 아니하고 수명의 동료 부하들을 인솔하여 소백산 깊은 산속을 은거지로 삼고  계속하여 일본군을 기습하였다.

산속 생활은 식수에서부터 시작해 식량, 수면, 무기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뿐이었다. 말이 사람이지 산 짐승들과 같은 생활이었다. 언제 적을 만날지 알 수 없는 긴장 속에서 상황 변동에 따라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했다. 남아있는 의병들은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각 의진별로 분진하여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윤명 부대는 어느 날 강원도 삼척군 기곡(杞谷)에서 항전하다가 밀고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가 1913년 6월이었다.(공훈록에는 1909년 12.30일 옥중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따라서「독립운동사」자료집에는 1913년 6월 체포되어 1913년 7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언도받았다고 되어있어 어느 기록이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판결문’이나‘독립운동사 자료집’에 이윤명의 부인‘전옥이’여사가 시신을 인도받았던 상황 등을 참고하면 공훈록의 사망 연도인 1909년은 오류라고 사료됨)  

일본 경찰은 그를 체포한 후로 어디로인가 데려갔다. 가족들은 체포된 것은 소문으로 알았지만, 일본군들이 한 번도 가족에게 소식을 전해 주지 않아서 가족들은 그의 생사여부는 물론 복역 장소도 몰라 애를 태웠다.

체포된 이윤명 의병장은 1913년 7월 대구형무소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다.(판결문 참조)

그 후 복역 중 심한 고문을 받았고 결국은 총살형을 당하였다.(국가보훈처 공훈록 상세정보 기록에 이윤명 사망 일자를 1909년 12월 30일로 적었는데 오류로 추정됨)

그는 복역 중에도 혹독한 고문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윤명의 부인이 남편의 옥중 순국 소식을 듣고 시신을 인계하러 갔을 때 “시신은 온몸이 피멍과 상처 투성이었고 머리에 총알이 관통한 구멍이 있었다”라고 증언하였음을 볼 때 형무소에서 참혹하리만치 혹독한 고문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이동하 의병장의 부인이 며느리인 亡 전옥이(98세)씨에게 전해준 말로서 전옥이씨는 다시 아들인 이희수, 이희국 형제에게 전해 주었다)

이때 나이 30대로 그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을 당할 때까지 몇 년동안 수형 생활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선고된 10년을 다 채우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그의 부인의 증언을 참고하면 약 3년 정도 옥고를 치른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인들은 10년형을 선고한 후에도 계속 참혹하게 고문을 계속하여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우니 총기로 살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윤명의 부인 김매산씨는 생전에 며느리 전옥이씨에게 이렇게 전하였다고 한다.

“남편이 붙잡혀 간 후 어느 형무소로 갔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을 못 들었다. 행방을 모르다가 한 3년 후에 대구 형무소에서 시신을 가져가라는 연락이 와서, 마을 청년 8명을 동원하여 도보로 대구까지 가서 시신을 인계받아, 청년들이 교대로 짊어지고 왔다.”라고 하였다. 가족들은 시신을 찾아와 고향 마을 뒷산인 주인리 수태골(水胎谷) 경좌(庚坐)에 안장하였다. 

그 후 부인이 사망하자 남편의 묘 옆에 안장하였다가 1995년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제2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문헌 기록

△ 독립운동사 자료집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있다.

 「1908년 11월 신돌석 의병장이 피살되자 의병들의 사기는 크게 위축되었다. 신돌석 의병장은 동해안 지역 의병의 상징으로 믿었던 인물인데 일가의 밀고에 의해 피살되자 의병들의 사기는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병들은 나름의 전력을 정비하여 각 의진별로 활동을 재개하였던바 의병장 이동학(李東學: 이윤명의 이명)은 1909년 4월 정경태 의진에 합류하여 포군장(砲軍將)으로 활약하였다. 이윤명 포군장은 동료 부하 수명과 함께 소백산을 근거로 분진(分陳) 활동하면서 당시 반의병과 친일자들을 징계(제거)하는데 앞장섰다.
1909년 5월 17일에는 부하 4~5명과 함께 경북 봉화군 소천면 승부리 權載龍의 집을 불태웠으며 같은 달 20일에는 같은 장소에 사는 金炯奎의 집에 들어가 양돈 1마리를 탈취하기도 하였다.(「독립운동사 자료집」 /의병항쟁 재판기록 289.290쪽)

△「울진의병사」 「울진군지」에는 아래와 같이 소개하였다

1910년 정경태 의병장이 체포되어 경성 감옥에서 사형되고 말았다. 정경태 의진에 속하여 활동하던 많은 의병들은 또 한번 지도자를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더구나 정부군의 의병 압박이 점점 거세어지면서 의병들은 점점 산간오지로 숨어들었다. 의병들은 분진하여 활동을 하던 중 이윤명 의병장은 1913년 6월 삼척 기곡에서 밀고에 의해 체포되었다. 1913년 7월 16일 대구 법원에서 징역 10년 형을 받고 사형 순국하였다.(독립운동자료집 별집/의병항쟁 재판기록 판결문 289~290쪽) 
송병준(宋秉畯)이 의병해산 권고로 많은 의병들이 귀순하였지만, 이윤명은 끝까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투쟁을 계속하다가 결국은 체포된 것이다.(「울진의병사」431쪽.「울진군지」(1984년 493쪽)
당시 수형 사실들을 보면 체포된 의병장은 대개 강도, 살인죄를로 처형되고 나머지 의병들은 일제의 조선 침략을 위해 도로 공사에 동원되었던 사실을 감안하면(울진 약사 2002. 244쪽/ 2002 울진문화원 간) 이윤명 의병장은 너무나 악랄하고 처참하게 옥고를 치른 것으로 보인다.

이윤명 의병장의 정신
 
○ 의병 출정 시(詩)

이윤명 의병장은 의병군을 창의하여 집을 떠나면서 “내 몸 하나 던져 나라를 구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결연한 의지를 보이며 시를 남겼다.

江山爾失 精神否  강산을 이미 잃었으니 제정신이 아니요
己一 東濟 不復回  자신을 한번 일제와 가지런히 하면 다시는 회복치 못하리」

또한 아래 시에서 평소 그의 애국정신을 읽을 수 있다.

 光武(대한제국 연호 / 고종 34년인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사용하였음.) 江山 千古碧  광무의 강산은 천고에 푸르른데
隆熙(대한제국 연호/ 고종 말년(1907년)부터 대한제국이 멸망하기까지 1909년까지의 연호) 日月 萬邦紅  융희의 해와 달은 온 세상을 비춘다오
紫芝非藥 神仙去  자초는 약초가 아님에도 신선따라 갔나니
鶯聲四月 此間遊  꾀꼬리 우는 사월에 이곳에서 노닌다오」

○ 이윤명의 비문

오, 숭고한 그 뜻이여! 보람이여!
그 이름 그대로
영원히 밝아라
나라 위한 그 말씀
겨레 위한 그 말씀
오늘 큰 꽃되어 강산에 피었네

오, 임의 크신 말씀
고향 앞바다에도
큰 빛 내리리
큰 꿈 묻던 七寶山에도
신선한 바람 부리

오, 숭고한 그 행적
겨례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영원히 빛나리

이동하((李東廈, 이윤명) 의병장의 판결문(이동하(李東廈)는 이윤명(李潤明)과 동일인으로‘경학(敬學)’으로도 불렀다.)

◇ 판  결(이 판결문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1974년에 간행한『독립운동사 자료집』별집 1, 의병항쟁재판기록 288~290쪽에 실린 내용으로 ‘이동하’편만 발췌한 것임

∴ 강원도 울진군 원북면(遠北面) 중리(中里)
∴ 피고 이동하(李東廈) 30세

위 방화 및 강도 피고 사건으로 검사 적정정의(赤井定義) 관여로 심리를 수행하고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문
피고 이동하를 징역 10년에 처한다.
∴이유
피고 이동하는 명치 42년 4월 5일경부터 적괴 정경태(鄭敬泰)의 부하가 되어 각지를 횡행하였다.

제1. 명치 42년(明治 42년은 1909년임) 음력 5월 17일 오전 5시경 성명 모르는 여당 4~5명과 함께 정경태의 명령에 의하여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小川面) 승부리(承夫里) 권재룡(權載龍) 집을 방화할 목적으로 동인 집으로 달려간즉, 그 집 식구가 모두 도주하므로 이집 부엌 아궁이에 남아 있는 불씨를 가지고 쌓아둔 땔나무에 불을 질러서 동인의 집을 소각해 버렸다.

제2. 동년 동월 20일 밤 3명의 여당과 함께 총기 및 곤봉을 휴대하고 같은 장소 김형규(金炯奎) 집으로 돌입하여 총을 겨누며 동인을 협박하여 양돈 한 마리를 탈취하였다.
이상의 사실은 당 공판정에서 피고의 사실에 대한 판시에 부합되는 자백과 아울러, 정경태의 명령에 의해서 권재룡 집을 소각하기 위해서 4~5명의 인원과 함께 동가로 달려가서 그 집 앞에서 망을 보고 있을 무렵 다른 자는 부엌으로 들어가 불을 지른 뒤에 곧 연소해 버렸는데 무엇 때문에 방화를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다는 공술로써 범죄의 증빙이 충분하다.

이를 법률에 비춰보니 제1의 소위는 형법대전 108조에, 제2의 소위는 형법대전 제593조 전단에 해당하고 제1의 소위에 관해서는 그 범한바 정상에 동정할 만한 점이 있어서 징역형을 선택하고, 병합죄가 되므로 동 제46호에 의하여 제2의 소위에 좇아 처단하며 그 범한바 정상에 생각할 점이 있어서 형법 제68조를 적용하여 동조 제1호의 범위 내에서 징역 10년에 처하기로 하고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예심 종결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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