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눈박이 등탑, 오늘도 울진 밤바다를 비춘다

죽변등대와 후포등대를 찾아서
기사입력 2021.03.23 10:26  |  조회수 2,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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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항


용추곶, 하얀 등대가 휘날리는 겨울 수채화


경북의 최북단 유인 등대가 있는 곳, 죽변 용추곶! 말 그대로 대나무가 있는 끄트마리 바닷가, 죽변의 자연부락명은 ‘대나무 마을’을 뜻하는 대까실이다. 그 대까실의 용추곶龍湫串은 오래전 그곳에 하늘을 오르고자 날마다 소망했다던 용 한 마리가 드디어 승천의 꿈을 이루어 노닐다 갔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죽변 용추곶龍湫串에서 바라보는 겨울 바다는 용이 승천한 곳답게 깊고 검푸르고 바람도 잠잠하다. 평소와 달리 하얀 깃 달린 까치발이 파도조차 없는 바다에는 선박 한 척이 꼬리에 흰 거품 뿌리며 한가롭게 북상한다. 

 

고개를 돌리면 시눌대가 우거진 벼랑을 따라 『용의 꿈길』이라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산책로는 드라마『폭풍 속으로』촬영 셋트장으로 이어진다. 촬영용 모형 집에서는『하트모양』 해안이 내다보인다. 절벽을 따라서 해양바이크레일이 가설되어 있다. 아직 개장하지 않았지만 곡선 쇠붙이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그 곁에 선 해송은 푸름이 여전하다. 둔덕을 빽빽이 두른 시눌대 숲은 겨울로 가는 길목에 누런 빛깔이다. 그 너머로 용추곶 등탑이 서 있다. 


저녁 답 겨울 햇살이 흐릿한 노을을 서쪽 하늘에 서둘러 푸는듯하더니 금세 해가 꼴깍 졌다. 어느새 별들이 저마다 빛을 드러내 반짝이고, 차가운 하늘이지만 손을 내밀면 금방이라도 묻어날 듯, 등탑 위로 솟은 별빛이 따스하다. 등탑 안마당에도 어둠을 타고 고요가 밀려온다. 산비탈 아래 마을 빛이 바닷물에 고이고, 고단한 하루를 마감한 고깃배들이 깃발을 내려놓고 쉬고 있다. 흐릿한 주점엔 술꾼 몇 사람, 철시한 어판장 이야기로 오고 가는 술잔이 즐겁다. 

 

망망대해도 수평선도 사라졌다. 죽변항에 겨울밤이 까맣게 내리고 있다. 갈매기 몇 마리만 등탑 위를 떠 날고 있다. 발아래 검은 바다를 뒤척이는 파도 소리가 저음으로 들려온다. 절벽 아래, 파도는 부서져 제 스스로 하얀 꽃이 된다. 어둠 속 겨울 백합이 순백으로 찬란하다.

 

맑은 날, 죽변 들머리 온양 목재에서 바라보는 죽변항, 하얀 등대가 바람에 휘날리고, 푸른 파도가 절벽에 하얀 꽃으로 피는 곳, 그야말로 살아있는 겨울 수채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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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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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죽변항 선박 진수식 모습(좌), 1910년 죽변등대 건립전 죽변항(우)

 

겨울 바다의 낭만 파수꾼, 죽변등대


그리고 용추곶 언덕배기 등불, 낮 동안 고독처럼 서 있던 외눈박이 사내, 죽변 등대! 칠흑 속에 드디어 내건 빛줄기 하나, 허공에 사선이 되어 미끄럼 타듯이 검은 바다로 쭉 나아간다. 그 빛은 밤바다를 항해하는 이들에겐 길잡이요, 위안이요, 사랑이다. 외눈박이 등탑은 오늘도 밤바다를 비춘다. 외눈박이 사내는 날마다 성스러운(?) 손길 들어 올려 겨울밤을 하얗게 새고 있다. 누군가에게 빛이 된다는 것, 빛이 되어주는 것, 참 고마운 일이다. 

 

가파른 절벽에서 어둠을 뚫고 망망대해를 내리쏘는 빛줄기, 죽변 등대는 1910년 건립되었다. 높이 16m의 백색 8각형 콘크리트 등대로, 밤마다 38㎞ 떨어진 바다까지 불빛을 비춘다. 안개가 끼거나 폭우가 쏟아질 때는 50초마다 『무신호(霧信號)』를 울리며 동해안을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을 지켜준다. 


12월 어느 날, 빛과 소리로 선박들의 파수꾼 역할을 하는 죽변 등대를 찾았다. 등대의 공식 명칭은 『해양수산부 포항지방해양수산청 죽변항로표지관리소』이다. 줄여서 『죽변 항로표지관리소』라고 한다. 마침 근무 중인 하호규(47)·오정욱(50)님이 반갑게 맞아준다. 직원은 3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근무하는 것 같다. 하호규 씨가 등대 건물, 장비 시설과 업무 등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준다. 

 

죽변 등대는 울진·영덕에서 가장 오래됐다. 1910년 11월 24일 첫 불을 밝혔고, 1950년 전쟁 중 폭격으로 한때 기능을 못하기도 했다. 1970년에 소리신호기를 설치해 안개가 짙거나 폭우가 내리면 음파로 신호를 보낸다. 2005년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경상북도 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돼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죽변등대의 불빛 도달거리는 통상 35여 킬로미터나 된다고 한다.

 

필자가 “요즘같이 선박 항법장치가 발달되었는데 등대가 할 일이 있겠느냐”고 넌지시 이야기 했더니 그렇지 않단다. 

『울진 연근해를 지나는 배들이 항해 도중 큰 풍랑을 만나거나 항법장치가 고장이 나거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선박들의 안전판 구실을 하지요.』 

하지만 요즘은 무인등대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등대 건물 바로 곁에는 사각형의 음파작동 통신시설이 있었다. 죽변등대와 사무실, 직원숙소가 있는 곳은 잘 가꾸어진 소공원이다. 잔디가 잘 다듬어져 있고 『행복한 바다』라는 조형물은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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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곶에서 바라본 드라마 촬영지 어부의 집, 하트해안, 최근 놓여진 해양레이크 바일 궤도 

 

죽변항이 뜬다?


죽변 등대를 나와 북쪽으로 500여미터쯤 걷는다. 민가 뒤쪽 바로 곁에 옛 봉화불을 올리던 봉수대와 토성이 등대까지 이어진다. 죽변성은 신라 진흥왕 때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토축으로 성을 조성하고 군사를 주둔시켰다는 내용이 전해온다. 고려 말에는 왜구가 극심했다고한다. 시눌대는 화살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고도 한다. 이곳 죽변성 일대 해안은 조선말 근대 무렵 일본어선들이 죽변 앞바다의 해산물을 침탈하려 했을 때 울진유진소 의병들이 총격으로 물리치기도 한 향토방위의 보루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1930년대 후반에 죽변항에는 울릉도를 오가는 화륜선이 있었다. 가수 남인수가 부른 『포구의 인사』라는 초기의 가사 3절에는 『해협 흘러가는 열사흘 달빛 속에/황소 실어가는 울릉도 아득하다/비 젓는 뱃머리야 비 젓는 뱃머리야/어데로 가려느냐』가 나온다. 육지 울진 쪽의 황소가 울릉도로 갔다는 이야기다. 물론 황소뿐만 아니라 다른 물자도 함께 건너갔다. 화물선은 부산까지도 오갔다. 이는 문화사적으로 죽변항이 울릉도와 부산을 뱃길로 연결한 중요한 문화전파사 구실을 했다는 대목으로 읽힌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죽변항은 오징어,문어,꽁치,명태,대게,도루묵등 산더미같이 쌓일 정도로 잡혀 풍어를 구가했다. 오징어가 하도 많이 잡혀 가을철에 집 나가 도시에 살고 있는 아들에게 오죽하면 『이까개락』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전보를 쳤을까? 『이까개락』 전보는 『지금 오징어(이까)가 하도 많이(개락) 잡히니 빨리 고향 죽변으로 와서 배를 타라』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한 때는 고래잡이 포경선 전진기지로 했을 만큼 유명했다고 한다. 1960년대 죽변중학교 사진첩에 남겨진 빛바랜 고래턱뼈 사진 한 장이 이를 말해준다. 지금은 고래잡이가 금지이지만, 그만큼 일제 강점기부터 당시까지만 해도 고래잡이가 성행했다는 반증이기도하다.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일제강점기 울산, 포항, 죽변, 후포 등 동해안은 일본의 1905년 독도 무단편입 어획권 획득을 계기로 포경선박들이 들어와 고래 등 해양생물을 싹쓸이해갔다. 독도 강치가 멸종된 것도 그들의 남획 때문이다. 요즈음 동해안이나 죽변 앞바다에서 고래 떼가 가끔 목격된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예로부터 죽변항은 동해 항로의 중간에 있어 국가 어항이자 독도와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항구이다. 앞으로 동서로 내륙 철도가 열리고, 삼척, 남북까지 철도가 연결과 죽변항에도 독도를 오가는 연락선 등을 상상도 해본다. 울릉도와 독도는 역사적으로 한때 울진의 부속된 영현이었다. 이러한 이점을 잘 활용한다면 장차 죽변항은 고래 떼가 다시금 죽변 앞바다의 세찬 파도를 가르고 공중으로 뛰어오르듯이 그 명성을 다시 찾을 것이다. 또 하나, 죽변을 찾는 여행객들이 놓치기 쉬운 유적이 있다. 국보(242호)로 지정된 『봉평신라비전시관』이다. 이 봉평신라비는 신라 법흥왕 시절 당시 이곳 지방민들이 신라 정부에 저항한 사건을 돌비에 새겨 놓은 유적이다. 전시관 뒤쪽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고대 비석들을 세워 모아 놓은 비석 공원이 있다. 역사 공부도 할 겸, 한 번 가볼 만한 곳이다.

 

『2020 죽변수산물축제』가 코로나로 무산된 것이 아쉽다. 하지만 『인근 덕구온천에서 여독을 풀고, 소주 곁들인 죽변 물회의 맛은 소문이 자자하다. 어찌 여행객들이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어떤 여행객의 말이다. 코로나의 겨울이 지나가면 예전처럼 회복되리라 생각한다. 

 

최근에는 죽변등대 둘레에 해양레이크 바일이 아름다운 죽변 해안가를 따라 놓였다. 아직 개장은 하지 않았지만 또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써 제자리 매김 할 것으로 보인다.

어판장을 지나 죽변 방파제로 나가보았다. 겨울 갈매기들이 죽변 발전을 기원하는 듯 더 높게 나르고 있다. 이 글과 함께 쓴 필자의 졸시 하나 소개한다.


<죽변등대> 그곳엔 언제부턴가/외눈박이 눈을 등불로 단/키 큰 사내 하나/밤마다/그의 고독은 밝고 빛났다.//그곳, 바다 사나이들의/등 굽은 갈퀴 손마디마다/무늬 없는 파문波紋/겨울 백합/흰 소금꽃 신성하게 핀다.//은빛, 죽변 바다/살아 있는 빛줄기 하나/우거진 파도 갈피마다/등불 든 사내의 /숨결로 따뜻하다. (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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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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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답의 후포등대

 

후하고 넉넉한 후포 바다와 후포 등대


예전에는 깃발과 봉화가 등대 구실을 했다. 등기산(해발 64미터) 지명 자체가 그것을 말해준다. 해안가의 산이나 섬 등에 봉화나 연기 또는 기를 꽂아 등대로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등기산은 옛날부터 후포 앞바다를 지나는 선박의 지표 구실을 했던 곳이다. 안개 낀 날에는 꽹과리 등 소리 나는 도구도 이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봉수대는 일정 부분 통신수단을 대신했다. 또 하나는 고깃배들이 고기를 한가득 잡아서 깃발을 꽂고 돌아오는가를 미리 알아보기 위해 이곳에 올라가 조망했다는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후포등대는 등기산에 있다. 무인 등대다. 1968년 1월 최초 점등을 하였으며, 죽변등대와 마찬가지로 불빛은 35km에 이르러 선박들의 길잡이일 뿐만 아니라 후포항과 동해바다를 관망하는 전망대가 되기도 한다. 옛 봉화대의 역할을 잘 물려받아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울진지역에 봉수대는 일곱 군데나 있다. 후리산봉수(후포면 후포리), 표산봉수(기성명 봉산리), 사동산봉수(기성면 사동리), 전인반산봉수(근남면 진복리), 죽진산봉수(울진읍 연지리), 죽변곶봉수(죽변면 죽변리), 항출도산 봉수(북면 나곡리)이다. 울진지역 봉수대 위치가 가지는 특징은 대부분이 그곳 해안선에서 높고, 사방이 확 트이고, 땅 모양이 바다 쪽으로 삐죽이 튀어나온 곳이다. 외적 침입 같은 전란 긴급시 울진에서 서울 목멱산(현재의 남산)까지 약 1시간이면 도달했다고 한다. 당시로써는 봉수대가 최고로 빠른 통신시설로써 국가 안위에 참으로 중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1931년)의 당시의 후포항 모습을 담은 사진에는 소화 6년이라는 제국주의 냄새가 나는 연호와 작은 궤도의 철로가 찍혀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 궤도는 당시 정어리 등의 해산물을 고깃배에서 집산지까지 운반하기 위한 철길로 짐작되고 있다. 당시 매일신보(1927. 1. 27.)의 기사 중『후포항만은 강원도 영동 6군내 유수한 항만으로 매일 어선과 상선 60여척의 정박도 있으며, 또는 1개년에 60여만원(대·중·소 정어리 25만원, 연어 10만원, 대구·삼치·청어 10만원)의 어획고를 거하는 중이나 선박의 피난 근거지인 방파제가 없으므로(이하 생략)』1920년대부터 30년대 중후반에 동해안에서 생산되는 수산물 어획고 중 정어리가 25만원으로 단연 최고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동아일보(1935. 1. 10.) 기사에는 정어리 풍어를 보도하고 있다. 『금년 겨울은 기후가 따뜻한 관계로 동해안 일대 특히 울진군 해안은 때아닌 정어리가 많이 잡혀서 가난한 어촌에 때아닌 활기를 얻었다 한다.』

 

당시 동해안의 고래, 정어리, 청어 등에서 생산한 기름을 경화유라고 하는데 선박용 연료, 화장품 등 공업용과 가정에서는 불 밝히는 등잔 기름으로 이용했다. 특히 일제는 경화유에서 글리세린을 추출해 무기(화약, 폭탄 등) 제조 등 군수용으로 조달했다. 이 군수용 기름을 조달하기 위해 동해안 일대에 정어리기름 공장이 성행했다고 한다. 이 공장 운영 사업은 대다수가 일본인들로 그 이익금은 그들의 차지였다. 한 마디로 조선어장은 일본에게 군수공업용 원료를 보급하는 경화유 공급기지가  되었다. 이는 일제가 강탈한 식민지 조선 어업 역사의 씁쓸한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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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일제 강점기(소화 6년) 후포항, 수산물을 하역하기 위한 철도 궤도가 이채롭다

 

옛 후포인이 남긴 흔적


등기산에는 고대와 중세, 근대와 현대가 교차하는 공간으로 고대 유적을 비롯해 조형물, 건축물들이 있다. 먼저 선사시대 유적이 있다. 등기산은 1983년 선사시대 울진 후포 사람들의 집단매장(세골장) 유적지로 확인되었고, 한반도 유일의 간돌석기가 한곳에서 최대로 발견된 곳은 아직 이곳뿐이다. 사람의 뼈와 돌도끼들이 발굴되었다. 여기에 울진의 유구한 역사를 알리는 『울진 후포리 신석기 유적관』이 있다.

 

등기산에는 등대 표본이 되는 모형 등대가 둘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인천 팔미도 등대(1903)와 세계 최초등대인 이집트 파로스 등대(기원전 250년경)다. 이 등대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힌다. 높이가 110미터, 나무나 송진을 태워 불을 밝혔다고 한다. 그 밖에 프랑스 코르두앙 등대(1611), 영국 스코틀랜드 밸록 등대(1811), 독일 브레어하펜 등대(1855)처럼 눈여겨 볼만한 모형 등대들, 국군충혼비, 그 외 비석과 현대 조형물들이 이곳저곳에 들어서 있다. 어떤 것은 유적 설명 표지판도 없다. 전체적으로 산만한 느낌이다. 좀 더 짜임새 있게 소공원답게 재정비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색다른 체험은 갓바위의 하늘 바닷길인 스카이워크는 강화유리판이다. 등기산 스카이워크는 높이 20m, 너비 2m, 길이 135m로 국내 최대 길이, 바다로 뻗어 나간 하늘길이다. 마치 바다 위 하늘을 살얼음 걷듯 바다 위로 나아간다. 나에게 오랜만에 짜릿한 맛을 안겨주었다. 전망대 끝에는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조형물이 있다. 좀 생뚱맞지만 선묘낭자와 의상대사의 애달픈 사연이 담긴 전설을 생각하면 수긍도 간다. 선묘는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갔을 때 만난 여인이다. 선묘 낭자는 첫눈에 의상 대사에게 반했지만 대사의 마음은 꿈적하지 않았다. 의상 대사가 떠날 때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었다. 후일 의상대사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나타나 도움을 주었다. 수호용이 된 선묘낭자가 바다를 박차고 나와 하늘로 휘감아 오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후포 바다의 색다른 멋과 맛이다. 멋과 맛을 육화되도록 미적으로 표현한 것이 예술이다. 그것을 문자로 표현하면 문학이다. 마침 이곳 출신의 유명 시인 김명인의 시 <후포>를 소개한다. 이제 후포에도 한국 현대 시단의 거목, 김명인 시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후포> 바다는 조용하다, 헛소문처럼/장마비 양철 지붕을 후들기다 지나가면/낮잠도 무성한 잔물결에 부서져 연변 가까이/떼 지어 날아오르는 새떼들/보인다, 어느새 비 걷고/그을음 같은 안개 비껴 산그늘에는/채 씻기다 만 버드나무 한그루//이따끔씩 원동기 늘어진 가지에 와 걸리고 있다//바람은 성채만한 구름들 하늘 가운데로 옮겨 놓는다/세월 속으로, 세월 속으로 끌고 갈 무엇이 남아서 적막은 저 홀로 힘겨운 노동으로/문득 병든 무인도를 파랗게 쌓아놓은/덕지덕지 그리움, 한 꺼풀씩 벗어야 할 허물의//쓸쓸한 시절이 네 마음속 캄캄한 석탄에 구워진다/그물코에 꿰여 삶들은, 모른다 하지 못하리//흉어에 엎어져도 우리 함께 견뎠던 여름이므로/키 큰 장다리 제철 내내 마당가에 꽃을 피워 더 먼 바다를 내다보고 섰는데/스스로 받아 챙기던 욕망은 다 그런 것일까/멈칫멈칫 나아가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자다 깨다 자다 깨다 눅눅한 꿈들만 어지럽게/헤매며 길을 잃는다./그래도, 눈을 들어보리라, 저 산들과 산들이 끊어 놓은 자리/다시 이어져 달려 나가는 눈물겨운 수평선을(김명인, 후포)

 

김명인의 시는 과거를 반추하는 기억법으로, 그의 경험과 사물의 풍경들과 그것에서 느끼는 사유들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을 ‘그물코에 꿰진 천형 같은 가난’으로 회상하며 언제나 탈출을 꿈꾸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다. 흉어가 덮쳐도 묵묵히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고향 사람들, 묵묵함이 생존의 방법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늘 눈물겨운 수평선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철 내내 먼바다를 바라보고 선 장다리다. 결국 수평선 밖을 동경하여 그곳을 탈출한다. 

후포는 김명인 시인의 고향이다. 과거 60년대 후포와 지금의 후포는 그 풍경부터 다르다. 당시 가난했지만 그 눈물겹도록 소박했던 삶, 그 삶이 지향하는 바를 오늘 우리에게 다시 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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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기산에 설치된 세계 유명 등대 모형>

① 독일 브레머하프 등대. 1855. ② 영국스코틀랜드 밸록등대. ③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등대인 인천 팔미도 등대. 1903. ④ 프랑스코르두앙 등대모형. 1611. ⑤ 1811. 이집트 파로스 등대. 기원전 250.

 

휘라포, 비단결 바다가 은하수처럼 흐른다!


등기산 마루에는 망사정이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해상 풍광은 빼어나다. 망사정은 신증국여지승람과 울진군지에 기록에 따르면 고려 시대 또는 조선조 강원도 관찰사 박원종이 건립했다고 한다. 망사정望槎亭은 한자말 그대로 바다에 뜬 떼배(뗏목 같은 배)를 바라본다는 것, 아니면 나무를 베어내고 바다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 지은 정자란 뜻이겠다. 내가 보기에 망사정 풍광은 관동팔경인 망양정, 월송정 경관 못지않다. 이런 풍광을 읊은 시인으로 앞서 말한 고려 안축, 원천석, 조선 성현과 서거정 등의 시가 있다. 참고로 망사정 아래에는 현대 시인 신경림 시비가 있다. 그 둘레는 지금 한창 나무 데크 계단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현재 망사정에는 근재 안축의 시가 게시되어 있다. 여행객으로 만고에 아는 이 없으나, 하늘이 자기를 알아보고 신선 같은 세계를 오늘까지 아껴 숨겨준 덕분에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영광을 누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눈부신 빛 허공에 떠/물에 비쳐 그늘지고/높이 올라 바라보니/굳은 마음 씻기네/비 개이니 푸른 나무에/꾀꼬리 지저귀고/바람 잔잔하니 물결은/백조의 마음이라/팔월에는 신선 뗏목이/은하수로 통하고/오래된 생선 가게는/숲 저쪽에 가렸네/높고 넓은 이곳 만고에/아는 이 없으니/하늘이 몰래 아껴두고/오늘을 기다렸네.(안축 시 전문)

안축이 망사정에 오른 것은 여름철, 팔월 무렵이다. 비 온 뒤의 꾀꼬리 영롱한 노래와 바다에 뜬 흰 갈매기, 그리고 목선인 떼배를 노 젓는 신선 같은 어부들, 그에게 망망대해는 우주를 관통하는 은하수 물결이었으리라. 생선 가게가 있는 후포어촌 풍경 등을 묘사했다. 이른바 음풍농월의 사생시이지만 신선 같은 생활을 꿈꾸는 자기의 철학을 곁들였다. 


등기산자락에는 활엽수인 팽나무가 많다. 그중 바다를 향해 있는 꽤 굵고 풍광이 아름다운 회화적인 팽나무 두 그루가 눈에 뜨인다. 여러 갈래로 뻗어 올라가 자랐다. 나무에 걸린 직선의 수평선과 하늘이 뚜렷이 나뉜다. 직선과 교차하는 굴곡진 나무의 목생木生, 잔잔한 바람이 잠깐 가지에 앉았다 흔적 없이 사라진다. 짧은 겨울 해가 수묵 그림자만 남겼다. 바라볼수록 짙은 청자 빛 바다와 은은한 하늘 청자 빛이 나무에 스며들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청자빛 물결이 잔잔한 바람결을 타고 나뭇가지를 빠져나가 사방으로 흩어져 나가는 듯하다. 손을 오므려 나뭇가지 사이로 흐르는 청자 빛 하늘물감 한 움큼 잡아 햇살에 뿌려본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다 느닷없는 생각 한 조각, 팽나무도 인간처럼 영원회귀를 생각할까? 부드러운 가지가 손을 들어 하늘과 바다를 향해 영원회귀를 기도하는 듯하다. 나무는 언제 보아도 사색의 공간이다. 잠깐 느티나무 옆, 흔들 그네에 앉아 바다 바라본다. 팽나무가 더욱 팽팽하게 바다를 잡아당긴다. 겨울 햇살이 연줄처럼 탱탱해졌다. 후포 앞바다는 그야말로 일망무제다. 말이 필요 없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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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기산공원 일대. 바다위 하늘길(스카이워크)과 왼쪽 아래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갓바위가 보인다

 

후포항도 죽변항처럼 풍요의 항구이다. 울진대게와 붉은대게가 유명하고, 바다목장 해상낚시공원도 찾는 사람들이 많다. 국제 수준의 후포 마리나베이항과, 울릉도를 오가는 여객선도 있다. 『백년 사위 남서방』 덕분에 유명한 벽화마을도 있다. 경북요트학교가 있어 요트체험도 즐길 수 있다. 

 

후포의 다른 말 『휘라포輝羅浦!』 비단결을 펼쳐놓은 듯한 『아름다운 후포』라는 뜻이렷다. 어떤 여행객은 후포항을 『동해의 나폴리』라 한다. 왜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두고 외국 것과 견주는지 모르겠으나, 후포는 후포 나름의 미적 요소가 있다. 우리에겐 우리 것이 더 아름다운 풍광 아닐까? 후포항과 등기산, 망망대해 후포 앞바다의 빼어난 풍광, 후포 등대의 빛이 매력이듯이 울진 죽변항과 후포항은 어느 진경산수화보다 더 아름다운 풍광이라면 지나친 언사일까.


등기산 너머로 저 멀리 산 너머로 겨울 해가 걸렸다. 12월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경자년이 가고 있다. 동해바다를 보면서 등기산 갓바위 쪽으로 내려왔다. 아까 읽었던 신경림 시비의 시 구절을 떠올려 본다.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동산 만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신경림, '동해바다 - 후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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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비

 

코로나로 모두가 힘든 한 해였다.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 온 인류가 휘청대고 있다. 새로운 문명의 갈림길에서 『방콕세상』이 되고 있다. 이제까지 누려왔던 생활방식을 버리고 바꾸라고,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하다. 어려운 때일수록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는 역지사지易之思之의 마음으로 살라고, 그래서 후포 바다처럼 남들에게 후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라고. 

새해, 하얀 소의 해 『신축년辛丑年』이 오고 있다. (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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