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해황씨해월종택 平海黃氏海月宗宅

기사입력 2021.09.03 11:49  |  조회수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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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종택

 

해월종택과 집터에 관한 유래

 

해월종택은 울진군 기성면 사동 1리 사동분교 동쪽 골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길 찾기는 기성 남쪽에서 사동 터널을 지나면 북쪽으로 사동분교가 보이고 그 둘레에 남쪽으로 들어앉아 있는 아늑한 동네가 행정구역으로 울진군 기성면 사동 1리이다. 북쪽인 울진 쪽에서는 새로 난 남쪽 7번 국도를 따라오다가 사동 군부대 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굴다리를 지나 동남쪽으로 4∼50미터쯤 내려오면 사동 진료소가 나온다. 그곳에서 사동분교 교문을 지나 동북쪽으로 300여 미터에 이르면 해월헌이 있다. 


해월종택이 자리 잡은 터에 대해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현재 종택을 관리하는 후손 황의석 선생(84세)의 구전에 따르면 해월종택은 풍수지리적으로 봉황이 알을 품은 듯한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으로 강릉 이남 경주 이북에서 보기 드문 길지라고 한다. 

이러한 길지에는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되는 기운을 가진 지세란다. 임진왜란 당시 서인의 탄핵을 받아 평해로 유배 온 아계 이산해도 그가 남긴 해월헌기에서 『태백산줄기가 끝나는 곳에 반드시 정기가 뭉쳐진 길지가 있다. 

이 해월헌 터가 바로 내가 찾던 곳이다.』라고 했다 한다. 따라서 해월종택이 자리 잡은 풍수 기운을 잘 이어가고 가문이 잘 되자면 대대로 딸에게 집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이 터에 자리 잡은 조선조 세종 임금시 정선군수를 지낸 권조(權組)가 살다가 중종시 홍천군수를 지낸 사위 이명유(李明裕)에게 물려주었다. 

이명유는 사위인 정담(鄭湛) 장군의 부친인 정창국(鄭昌國)에게 물려 주었다. 

정창국은 판결사 황응징(黃應澄, 해월 선생의 부친)에게 물려주었다. 하지만 황응징은 딸이 없어 외아들인 해월 황여일에게 물려주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해월종택을 사동재에서 바라보면 서북과 동북이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하다. 햇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앞쪽이 확 트인 곳에 집이 앉은 모양새다. 마악산에서 흘러내린 사동천이 동해로 흘러 배산임수 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종택 둘레의 울창한 소나무의 멋스러움과 왕대 숲은 옛 선비들의 기품을 엿보는 듯하여 고색창연한 해월헌 운치가 빛난다.


해월 종택의 구조와 배치

 

<울진 평해황씨 해월종택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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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에 있는 조선 중기 주거 건축물로서 조선조 울진 지역 상류 주택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종택 건물은 3동으로 1985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1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경상북도지정문화재 156호로 격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월종택의 일부인 해월헌은 1588년(선조 21)에 건립된 건물로 1847년(헌종 13)에 후손들이 현 종택 안으로 이축하였다. 종택 둘레는 토석 담장을 둘렀다. 

담장 입구에는 1993년에 복원한 대문채가 자리 잡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의 안채 정침과 사랑채(모고와)와 해월헌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안채 정침은 북쪽을 중심으로 대청마루가 있고 동쪽(오른쪽)으로 상방이다. 

상방과 곳간 사이에 사당으로 나가는 문과 통로가 있다. 바로 이어서 중방이 있고 사랑채(모고와)로 연결된다. 서쪽(왼쪽)으로는 큰방과 부엌이 있다. 그 남쪽에 연결된 곳간과 정침 안채로 들어오는 대문이 있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인데, 앞면은 좌·우로 1칸씩이 돌출되어 양 날개 집의 형상을 하고 있다. 울진에서는 이러한 『ㅁ』 자 모양을 뜰기와집이라고 한다. 

해월헌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방이 딸린 팔작기와집이다. 해월헌 뒤편으로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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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연못

 

사당 뒤편에는 송림과 대숲이 우거져 있고,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연못이 하나 있다. 이 연못은 낙엽이 쌓이고 물만 고여 있었는데 최근에 복원되었다. 

연못은 네모나고 연못 안에 흙으로 작은 모양의 둥근 작은 섬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황의석 선생에 따르면 네모난 연못은 땅을, 작은 섬은 둥근 하늘을 나타낸다고 한다. 주역 음양의 원리로 복원되었다.   


판액과 현판이 유명한 해월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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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헌 현판 일부

 

해월헌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당호인 해월헌 편액을 비롯하여 내부에 빼곡하게 걸린 해월헌기를 비롯한 현판이다. 모두 20점이다.

현판(懸板)은 글씨나 그림을 나무, 종이, 비단에 쓰거나 새겨서 건물에 거는 액자류의 모든 목판을 말한다. 편액(扁額)은 건물 정면의 문과 처마 사이에 거는 목판을 일컫는 것으로, 현판보다 좁은 의미로 쓰인다.

우리 선현들은 건물의 공간에다 성현이 남긴 경전, 또는 유명한 학자들의 글을 인용하여 명칭을 부여하고, 당대 이름난 사람의 글씨를 받아 목판에 새겨 건물에 내걸었다. 선현들이 남긴 독특한 현판문화이다. 몇 글자 안 되는 현판(편액)의 의미를 알면 건물의 기능과 용도, 그곳에서 생활했던 선현들의 삶의 지향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판(편액)의 글씨를 통해 시대정신을 엿볼 수도 있다

아마도 해월헌처럼 종택과 부속건물 1개인 軒에 20점의 현판과 편액이 게시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현재 현판은 총 17점이다. 15점이 해월헌에 게시되고 있다. 근차해월헌 판상운(謹次海月軒 板上韻, 황진규黃鎭奎)과 죽와기(竹窩記, 김준영金駿永) 2점은 현 해월종택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현판과 편액들은 해월 선생과 동시대인이거나 그 후 해월헌을 다녀간 조선조 유명 인사들이 남긴 글씨와 시 문장들을 새겨서 걸어둔 것이다. 따라서 이를 볼 때 해월 선생이 울진(평해) 유일의 이퇴계 학맥으로 그가 영남 선비들과 많은 학문적 교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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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계 이산해 친필 <해월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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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봉 한호의 글씨로 추정된 <만귀헌>

 

<편액>

 

해월종택에는 『①만귀헌(晩歸軒) ②해월헌(海月軒) ③모고와(慕古窩)』의 편액 3점이 있다. 당호인 해월헌은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의 친필로 힘찬 글씨체이다. 『만귀헌』은 석봉 한호의 친필이라고 하나 낙관이 없다. 이에 대해 후손 황의석 선생은 구전일 뿐 한석봉 글씨라는 근거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사랑채에 걸린 『모고와』 편액도 누가 썼는지 불분명하나 아마 8대조(황상아)의 친필로 추정하고 있었다. 만귀헌은 해월 선생이 사동으로 내려와 만든 편액이나 한번도 현 해월헌에 게시되지 않았다고 한다. 해월 선생 사후 후손들이 선생 묘소 앞에 제실을 건립하고 내건 편액이라고 한다. 불과 40여 전까지만 해도 제실이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이후 만귀헌 편액은 해월 종택에 보관중 현재 『만귀헌』과 『해월헌』 진본 편액은 한국국학진흥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현 종택 해월헌에 걸려있는 편액 『해월헌』은 복제본이다.


<현판>

 

현재 해월헌에 게시된 현판(15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실학자의 원조로 유명한 지봉 이수광 현판도 게시되어 있다. 울진 출신의 현판 게시자는 대해 황응청, 사계 이영발이다. 평해에 유배 온 아계 이산해 현판은 2점이다. 해월 선생과 함께 명나라 외교 사신으로 갔던 백사 이항복과 월사 이정구의 현판도 게시되어 있다. 백사 이항복의 호가 또 다른 필운(弼雲)으로 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현 해월헌에 게시되지 않고 종택에 보관 중인 근차해월헌 판상운(謹次海月軒 板上韻, 65×30, 황진규黃鎭奎)과 죽와기(竹窩記, 71×33, 김준영金駿永) 현판 2점에 대한 황의석 선생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근차해월헌 판상운(謹次海月軒 板上韻, 65×30, 황진규黃鎭奎)의 작자 황진규는 울진현령으로 해월 사후 종택에 들렀다가 쓴 기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죽와기는 필자가 김준영이다. 내용은 5대조(황면구)에 대한 인물평과 해월헌에 관한 내용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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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종택의 주인공 황여일(黃汝一, 1566~1622)

 

조선조 울진과 평해지역에서 중앙정계로 진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가문은 평해황씨 해월 가문이다. 해월 가문이 지역의 명문가로 발돋움하게 한 주인공은 해월 황여일(海月 黃汝一, 1556~1622)과 그의 아들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 1577~1648)이다. 사후 해월은 이조참판(현 행정자치부 차관)으로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황중윤은 좌무승지(현 청와대 비서관)라는 벼슬을 지냈다. 

그렇다면 해월종택의 주인공 황여일(黃汝一)은 어떤 인물인가? 다음은 후손 황의석 선생이 증언한 이야기를 종합해서 기술한다.


본관은 평해이다. 해월 선생의 아버지는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노비관리업무 등 관장 벼슬)에 추증된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이다. 어머니는 충무위사직(忠武衛司直, 임금경호업무 등 관장 벼슬) 야성(野城, 현 영덕) 정씨인 정창국(鄭昌國)의 딸이다.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하담(霞潭), 해월(海月), 만귀(晩歸)이다. 그는 마지막 벼슬인 동래부사를 마치고 고향 사동으로 낙향하여 호를 만귀라 하였다. 海月(해월)은 황여일 선생 자신이 지은 호라고 한다. 사동 바다(海)와 달(月), 광대무변한 우주의 기상을 담고, 늘 변함없는 지조와 기개를 상징하는 선생의 이미지와 딱 맞는 호(號)라고 할 수 있다. 만귀보다는 해월이라는 호가 보편화 되었다.


그는 일찍이 중부(仲父)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에게 수학하였다. 14살 때 이미 사서삼경을 다 읽고 즉흥시를 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뛰어난 문재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7세에 평해 수진사(修眞寺)에 들어가 공부할 때 3년을 문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스무 살에 『시전(詩傳)』과 『서전(書傳)』을 연구하였다. 이 일로 영재임을 알아본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이 사위로 삼는다. 28세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찾아 근사록(近思錄)의 강의를 듣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20세 때 안동 향시에 장원급제하였다. 158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겸 춘추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거쳐 호당(湖當)에서 경전을 강의하고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냈으며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종사관으로 활약, 국난극복과 명나라와 외교분쟁에서 조선국익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이다. (후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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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담 장군 유허비(왼쪽)와 해월 황여일의 신도비(오른쪽)

정담 장군의 유허비 문장은 황의석 선생이 지었다. 사동1리 남쪽 들머리에 있다. 


해월종택의 일부인 해월헌은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 별구(別構)인 대청이다. 

최초 1588년(선조 21)에 건립된 건물로 1847년(헌종 13)에 후손들이 현 종택 안으로 이축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마악산 아래 동해가 보이는 언덕배기에 있었다. 남쪽에서 사동재(일명 토혈고개 또는 도지재)를 넘어 오른쪽 샛길로 내려오면 사동1리 들머리(구 7번 국도변)에 해월 선생 신도비와 정담 장군 유허비가  있다. 그 신도비와 연결된 마악산 기슭, 언덕배기에 해월헌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새로 난 7번 고속국도가 남북으로 지나가고 있어 이제는 자취가 없다. (사진 참조) 


해월 선생의 국난극복 활동과 외교적 역량

 

<임진왜란 중 권율 장군 종사관으로 활약, 이순신 장군과 수전에 대비하다.>

해월 선생은 7여 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국난극복에도 힘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함경감사 윤탁연의 종사관으로 참모 역할을 하던 중 국경인(?∼1592) 일당의 반역으로 임해군과 순화군이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595년 그는 도원수 권율(權慄) 장군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여 행주대첩에 공을 세웠다. 1596년 12월에는 도원수 권율 장군과 함께 울산 도산성 전투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조·명 연합군은 울산 태화강 전투에서 대승하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왜군은 사기를 잃고 철군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며 권율 장군 진중에 있을 때 이순신 장군과도 긴밀히 논의(2개월간 23회 소통)하여 왜군과 싸움에 철저히 대비했음을 알 수 있다. 난중일기에 해월 선생이 종사관으로 참모 역할을 충실히 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6월 25일 맑다. 다시 무씨를 뿌리도록 하였다. 아침을 먹기 전에 황 종사관이 보러와서 수전에 대하여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다. 또 원수(권율 장군을 말함)가 오늘 내일쯤 진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다. 함께 군사 문제를 토론하다가 늦게서야 잠이 들었다. (이순신 난중일기)』


<명나라와 외교분쟁에 소임을 다 하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인 1599년(선조 31년) 해월 선생이 44세 되던 해에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외교분쟁이 일어났다. 이른바 정응태의 무고 사건이다. 정응태는 명나라 관리로 임진왜란 중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당시 명나라에서 조선에 파견된 장수는 양호였다. 이들 사이가 비틀어지자 선조가 양호를 두둔한 것이다. 이에 앙심을 품은 정응태가 명나라 신종 임금에게 조선 정부와 양호를 무고한 글을 올린 것이다. 명나라에서는 배은망덕한 조선을 토벌하자는 등 여론이 비등했다. 정응태가 올린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선이 옛 고구려(高句麗) 땅인 요동을 회복하고자, 왜병(倭兵)을 불러들여 함께 명(明)나라를 치려 한다는 것, 또한 조선(朝鮮)에 파견되어 명(明)나라 장수인 양호(楊鎬)가 사당(私黨)을 만들어서 조선의 임금과 신하(臣下)들과 결당(結黨)하여, 명(明)나라 황제를 속이고 대적(對敵)하려 한다.』라고 무고하였다.


정응태의 무고로 명나라와 조선 정부 사이가 벌어졌다. 조선 정부는 외교 사신으로 변무진주사(辨誣陳奏使)를 명나라에 파견했다. 『변무진주사』란 말 그대로 명나라의 불신과 오해를 풀기 위해 파견한 외교 사신을 말한다. 변무진주사로 정사(正使)는 백사 이항복과 부사(副使)는 월사 이정구였다. 해월은 서장관(書狀官)으로 그 직무를 다했다. 그가 남긴 해월문집의 『청석령』이라는 시는 당시 명과 조선의 왕복 6개월간의 힘든 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자 원문은 생략함)


청석령(靑石嶺)


굽이굽이 청석령은 한낮에도 어둡고

층층이 쌓인 얼음 눈과 서리 두껍네

사람 만나 수레 부순 땅을 실컷 말하지만

우스워라 다시 마부 꾸짖는 마음 일어나네

나라를 위한 이 몸 기꺼이 불 속에 뛰어들어

성을 불태우는 참설 통렬하게 쇠를 녹이네

어찌 산령이 문서 옮기지 않았음을 알았냐고 물으니

중국을 두루 다녀 나라 망함을 면했네

『황여일, 해월선생문집 9권』

  

해월 선생이 명나라 외교 사신 변무진주사로 파견되어 겨울철(1598. 12. 11)에 청석령을 지나며 쓴 시이다. 청석령은 만주에 있는 지명으로 명나라로 가는 여정 중 험난한 바윗길이다. 겨울에는 얼음과 눈이 겹겹이 쌓이고, 때로는 수레가 부서지는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는 좁고 험준한 고개라고 한다. 한마디로 변무사신으로 가는 해월 선생의 애국충절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또한, 당시 해월 선생의 외교 활약상에서 명나라 임금 신종과 해월의 문답은 유명하다. 다분히 작위적인 설화지만 그의 우국충정과 외교적 역량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신종과 대화 과정에서 만에 하나라도 신종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답변이 시원찮으면 목이 달아날 판이었지만, 해월 선생의 침착한 기지(機智)로 잘 해결되었다고 한다. 후손 황의석 선생이 전한 신종과의 해월 문답설화는 다음과 같다.


『조선은 손바닥만한 삼천리인데 그대는 만리 정기를 타고나서 명나라를 정복하려는 관상이구나?』

신종 임금이 해월의 심중을 넌지시 떠보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신의 집 앞에는 만리창해인 동해가 있습니다. 신은 동해 바다만 바라보고 살았지 중국 땅은 추호도 넘보지 않았습니다.』

해월의 탁월한 외교적 언사에 탄복한 신종은 

『듣던 대로 조선에는 인물이 너 하나밖에 없구나.』 하며, 『너 하나밖에 없다.』는 뜻의 『여일(汝一)이라는 이름이 딱 맞다.』라고 칭찬했다는 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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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해월헌과 고택 하나가 있었던 곳, 지금은 7번 고속국도가 지난다. 

남→북, 흰선으로 표시된 곳

 

백사 이항복은 후일 자신의 문집인 백사집(白沙集)에 『신종의 오해를 푼 것은 해월의 공이었다.』며 당시 해월의 외교적 활약상을 기록했다.

해월 선생은 귀국 후 급히 사동에 내려와 바로 동해가 보이는 마악산 기슭에다 새로 고택 하나를 지었다고 한다. 왜냐면 실제의 해월(海月) 선생의 집은 정남향(正南向)이라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명(明)의 조정에서 황제(皇帝)를 농락(籠絡)했다며 트집을 잡을까 하여,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집을 짓게 된 것이다. 후일 이 집은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 


수시처중(隨時處中),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삶

 

어떤 이는 해월 선생을 두고 수시처중, 광풍제월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 수시처중(隨時處中)은 어중간한 가운데가 아닌 최선의 자리, 최적의 묘(妙)로써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는 삶이랄 수 있겠다. 언제나 바른 삶을 한결같이 살아간다는 인생 철학을 나타낸 말이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은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이란 뜻이다. 즉 훌륭한 인품을 비유하여 쓰는 말이다. 


해월 선생은 조선 중기 울진이 낳은 출중한 인물의 한사람이다. 해월헌과 종택은 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했던 곳이다. 벼슬을 다 지낸 뒤에는 낙향하여 사동의 평민들과 격의 없이 어울려 살았다고 한다. 순리에 따라 벼슬을 할 수 있을 때 나아가고 불가하면 물러났다. 조정이 붕당으로 갈라져 그 화를 피하기 어려웠는데 그 기미를 예견하고 벼슬을 물러났다.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당해 종사관이라는 관리로서 그 소임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시문에 능해 서정관(외교문서 관리)으로서 명나라와 외교분쟁을 원만하게 잘 마무리 지었다. 

해월선생이 남긴 저술에는 『조천록(朝天錄)』,『해월집(海月集)』등 14권 7책이 있다. 시(詩), 부(賦), 서(書), 소(疎), 서(序), 발(跋), 찬(贊), 전(箋), 행장(行狀), 묘지(墓誌), 은사록(銀槎錄) 등이 발간되어 세상에 전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당시 그의 애국충의 정신과 시대상을 보여주어 과거를 통해 우리의 미래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한편 해월헌의 편액과 현판에서 보듯이 조선 중기 교유 인물의 폭이 넓었음을 보아 그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다. 해월은 평해 지방을 중심으로 퇴계 학맥을 정착시키고, 전파시키는 선도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관직에 물러나서도 울진의 효자 충효당 주경안(1536~1614) 이야기인 『주효자전』을 써서 향리의 예악질서 정립에 노력했을 알 수 있다. 


해월 선생은 1601년 예천 군수를 거쳐 1611년 길주목사(吉州牧使), 창원부사(昌原府使), 1615년에 동래부사 등의 벼슬을 거쳤다. 이어 65세(1620) 되던 해에 조정 대신들이 경상도 감사로 천거하였지만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22년(67세, 광해군 14)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가선대부, 이조참의 등이 추증되었다. 1758년 기성면 정명리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숙부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과 함께 배향하였다.


해월종택과 관련 인물 


관련 인물이 많지만, 이산해, 정담, 황만영을 소개한다.


평해지방 관련 유배기록을 남긴 아계 이산해(李山海, 1539년~1609년)

본관은 한산, 자(字)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이다. 그는 조선 중기 영의정 벼슬 등을 지낸 문신이자, 정치인, 시인이며 성리학자이다. 

아계 이산해는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의 의주 파천으로 서인에게 탄핵을 당해 3년간 평해로 유배 왔다. 그가 평해 유배 생활에서 가장 많이 교유한 인물은 진보현감을 지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이다. 그는 해월 선생의 중부(仲父)이자 어린 시절 학문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아계는 대해를 자주 찾아가 학문을 논하면서 유배 생활의 무료함을 달랬다.

해월헌 편액은 이산해의 친필이다. 현재의 현판은 복제본이다. 진본현판은 한국국학진흥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해월헌기가 현판으로 있다. 그 문장은 아계유고(기성록)에 실려있다. 그가 남긴 아계유고인 『기성록』에는 당시 울진 평해의 자연, 인물, 사회상 등을 시·문으로 기록한 것이다. 기성록은 조선 중기 평해 지방을 살필 수 있는 유의미한 역사문화자료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호남 땅을 지켜낸 울진 사동 출신 정담(鄭湛, 장군 1548∼1592)

정담은 평해군(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가 출생지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사동리 현 해월 종택에서 성장했다. 부친인 정창국이 사위 황응징에게 고택을 물려주고, 영덕 창수 인량으로 이사했다 한다. 해월의 아버지(황응징)가 정담의 매형이 되고 해월에게는 외삼촌이 된다. 정담 장군은 해월종택 시절, 매형인 황응징(해월의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후일 『정담』은 무과로 급제하여 무신의 길을 걸었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방어의 중책을 띄고 김제 군수로 부임한 뒤 웅치 전투에서 화살이 다 떨어지자 백병전까지 감행하며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던 용장이었다. 웅치는 현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서 진안으로 넘어가는 해발 430여 미터의 험준한 고개이다. 


한편 정담 장군 진중어록은 평소 그의 애국충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영가살일적이사(寧加殺一賊而死) 불가퇴일보이생(不可退一步而生)

적을 하나라도 죽이고 죽을 것이며, 살아서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치열했던 웅치전투가 끝난 후 왜군은 비록 적군이었지만, 정담의 충절에 감명받아, 전사한 조선군의 시신을 한곳에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어 그 위에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 즉, 『조선국의 충신과 의사의 간담을 조상하노라』라는 뜻의 팻말을 세워 조선군의 넋을 위로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백사 이항복 『백사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의 장인 권율 장군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내가 주도한 행주싸움의 功이 크다고 하나 사실은 전라도 웅치싸움을 주도한 정담이 가장 크고, 다음은 행주싸움이다. 그가 일천 명도 안 되는 약한 군사를 데리고 10배가 넘는 대적을 맞아 잘 싸우다 죽었고, 그러므로 호남이 보전되었으니 어찌 그 공이 적다 하겠는가!”』 

호남을 방어한 그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

사후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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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영 선생 가옥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국오 황만영 선생(黃萬英, 1875~1939)

해월 선생 후손으로 그의 애국충의 정신이 일제강점기에도 후손들에게 이어져 왔다.

호는 국오(菊塢), 자는 응칠(應七), 해월 황여일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황수이다.

청년 시절부터 조국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기성면 사동리에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세우고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국권침탈 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 등과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연해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 참가하였고, 9월 주진수(朱鎭洙) 등과 함께 만주로 파견되어 순회 강연을 개최하면서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신간회 울진지회 회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월송정 들머리에 기념비가 있고, 해월 종택 앞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해월종손 황의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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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종택 앞에 선 종손 황의석 선생


6월 어느 날, 오랜만에 해월헌을 방문했다. 담장을 둘러친 대문을 들어서자 마당은 잡초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담장과 꽃밭에는 접시꽃과 여름꽃들이 환하게 앞다투어 피어나고 있었다. 안마당 서쪽의 텃밭에는 옥수수, 오이, 고추가 6월 햇살에 푸른 빛을 내뿜으며 싱그럽게 자라고 있었다. 얼음알같이 가꾼 텃밭과 정갈한 종택 마당은 야무진 종부의 손길을 보는 듯했다. 후원의 소나무와 대나무숲은 예나 지금이나 아늑하게 자리 잡은 해월종택을 더욱 운치 있게 감싸 안고 있다. 정침 안채문을 들어서자 두 분 어르신께서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며칠 후 안동 한국국학진흥연구원(원장 정종섭) 직원 70여 명이 방문한다고 하여 접대 준비에 14대 종부 이정숙 여사가 분주하다.

해월 종택은 필자와도 인연이 있는 집이다. 필자가 1978년 3월 당시 사동국민학교(현 기성초등학교 사동분교)에 발령을 받아 교사로 근무할 때 본채에 딸린 방 하나를 빌려 약 2년간 자취하며 기거했었다. 당시 종택의 종부로서 인품이 넉넉했던 이차야 할머니, 13대 종부로 안동 고성(固城) 이씨(李氏)가문에서 이곳 해월헌으로 출가한 이차야(李次也) 여사다. 이차야 여사는 2012년 100수를 다 하고,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육이오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된 남편을 대신해 6남매를 키워낸 분이다. 시집올 때 안동에서 가마 타고 해월 종택에 왔단다. 이 분은 사대부 반가 종부의 예절과 품격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는 분이셨다. 나에게도 언제나 온화하게 공대하며, 때로 여름철에는 안채 마루를 독차지하도록 했다. 안채 마루 뒷문을 열면 주산재(해월헌 뒷산 봉우리) 산기슭에서 소나무와 대나무 숲에서 뿜는 청록의 바람이 한여름의 더위를 식혀주곤 했다. 더구나 필자가 기거했던 당시(1978년) 정침 안마당에 있던 우물은 현재 현대식 상수도로 바뀌었다. 두레박 물맛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해월가문이 조선조 지역 명문가로 발돋움한 것은 해월 황여일 이후이다. 그 요인은 해월의 뛰어난 문재와 당시 관료로서 임진왜란의 국난극복에 헌신한 충의정신, 그가 지닌 위민정신인 인품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는 해월가문은 해월 선생이 안동 학봉(鶴峰)의 중형(仲兄) 되는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의 사위가 된 이후 중앙정계로 진출한 것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 이후 해월 가문은 안동의 주류인 의성김씨, 고성이씨, 진성이씨 가문 등과 학맥과 혼맥을 맺어 나간다. 이러한 가문의 전통과 해월 선생의 애국충의 정신은 후손들에게도 이어져 일제강점기 평해황씨 집안 일부가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추신한 황만영 등의 애국지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전통가문들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가문의 전승과 종택 관리이다. 해월종택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공직에 있다가 퇴직한 14대 후손인 황의석 선생과 종부 이정숙 여사가 종택에 거주하며 관리 중이다. 84세인 황 선생은 이제는 나이가 들고 하여, 종택 관리도 힘에 부친다고 한다. 지금은 경북도에서 종택 일부를 보수 중이라 한다. 해월헌 정자 마루에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가재들이 쌓여 있었다.


해월종택은 1980년대 두 번에 걸쳐 고서, 고문서, 문집들을 4천여 점이나 도난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황 선생은 도난과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2004년도에 집안 선조들이 남긴 유품들을 한국국학진흥원(경북 안동 소재)에 500여 점을 기탁했다. 해월 선생을 비롯한 선조의 문집, 고서, 고문서와 유품인 관대(冠帶)를 비롯한 전통용(傳通用) 복대(腹帶), 마상용(馬上用) 주통(酒桶), 사복각(紗纀角), 휴대용 모필갑(毛筆匣), 옥잠(玉簪), 화살, 옥잠(玉簪), 화살, 비녀 등이다. 명나라 외교사신으로 갔을 때 가져온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는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금도 황 선생은 도난당한 선조의 유산을 찾기 위해 『KBS 명품진품』 방송을 유심히 시청한다. 혹시나 해월 종택에 보관했던 고문서 등 장서가 소개되면 행방을 찾기 위함이다. 한번은 고서가 『진품명품』에 소개되어 경찰서 형사들과 대구 소재 모 고서적 책방을 뒤졌으나, 해월헌에 보관한 장서는 맞는데 필사본으로 진본은 아니었다. 해월종택의 문집이나 고서 등 소장 진본은 『海月獻藏해월헌장』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어야 한다는 것. 그때 도난당한 고서나 문집 등은 행방이 오리무중으로 일본 등 해외로 유출되지 않았을까 추측만 할 뿐이라고 한다. 그의 얼굴에는 후손으로서 조상들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잘 보관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앞으로 해월종택 관리를 어떻게 해갈 작정이냐고 하자 다행히 외아들이 직장 퇴직 후에는 종택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살겠다고 하니 더없이 기쁜 마음이라 한다.

그는 선조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며 웬만한 전문해설가들 못지않게 가문에 대한 내력을 훤히 꿰뚫고 있다. 지금도 해마다 해월 선생의 불천위 제사를 정성스럽게 올린다고 한다. 

필자가 요즘 세대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질문하자. 우리 것에 대한 보전의식이 거의 없어진다는 것, 우리의 근본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 남의 것을 무조건 따라가는 유행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전통문화에 대한 가치관이 자꾸 옅어져 가고 있는 게 안타깝다는 것이다. 옛것을 참고하여 새롭게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강조했다. 팔순을 지난 황의석 선생의 종가에 대한 긍지와 언변에 힘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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