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산을 지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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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2리와 남수산 일대 전경
남수산은 아프다
신축년 새해 1월 1일 오전 11시경, 울울한 송림으로 둘러싸인 산등성이에 고사 읽는 소리가 낭랑했다. 매화 남수산 남서쪽, 영하의 날씨지만 천지신명에게 고하는 목소리만큼은 결기가 서려 있었다.
『유세차 단기 4354년 신축년 1월 1일 오늘 남수산석회광산반대대책위원 일동은 남수산 자락에서 이 땅의 모든 산하를 굽어보시며 모든 생명을 지켜주시는 남수산 신령님께 고하나이다.
남수산을 배우고 산을 닮으며 그 속에서 하나가 되어 살아가고, 남수산을 본래대로 지키고자 남수산과 한 몸이 되는 기쁨과 행복이 충만 되기를 바라옵고... (이하 생략)』

남수산에서 고사를 지내는 대책위와 남수산 보존회원들(좌), 남수산 지킴이들(대책위와 보존회원들)(우)
정초부터 매화의 남수산에서 고사를 지내는 이들은 다름 아닌『석회광산반대범대책위원회(공동위원장 : 김영호, 최부열, 전병철, 사무국장 최중봉)』와 남수산보존회(공동회장 : 최일랑, 전병윤, 최부열, 남상균, 사무국장 황춘섭)분들이다.
진산이란 풍수상으로 그곳 도읍이나 읍락을 난리 또는 재난 등에서 안전하게 보호해준다는 산으로 진호주산(鎭護主山)의 준말이다. 국가나 고을과 마을의 중심이 되는 산을 말하는 것, 고려시대 개성 송악과 조선시대 오악(금강산, 지리산, 묘향산, 백두산, 삼각산)이 그러하다. 울진군의 진산은 안일왕산이다.
매화의 진산 격인 남수산은 아지랑이 남(嵐)자에 돌구멍 수(峀)자를 쓴다. 안개가 바위틈에 서린 동굴산이란 뜻으로 유서 깊은 산이기도 하다. 남수산 아래 매화와 금매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농촌 마을로 동으로는 매화천과 들판이 펼쳐져 있다. 이 마을은 수백 년 전부터 파평 윤씨, 강릉 최씨, 영양 남씨가 입향한 집성촌으로 지금도 이웃 간에 정이 많고, 애향심이 도타운 살기 좋은 곳이다.

시위에 나선 매화주민들(대책위 제공), 석회광산 반대 투쟁 깃발(몽천교 일대)

남수산 지키기 현수막을 내거는 매화 주민들(좌), 석회광산(근남면 구산리 잘미 소재)
남수산, 함몰되다
하지만 평화롭던 매화가 2016년부터는 투쟁의 마을로 변모하였다. 남수산 석회광산(주,한국공항) 때문이었다. 이 석회광산은 남수산을 중심으로 1980년대부터 30여 년간 석회를 채굴해 왔다. 주민들에 따르면 광산이 1차로 꺼져내리기 시작한 것은 2007년도였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당국과 회사를 상대로 함몰원인 규명과 주민들의 안전대책을 마련을 촉구하였다. 광산업자 측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안전진단을 의뢰했고 이상이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주민들은 안전진단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추가대책 요구를 하였다.
그러던 2016년 2월 23일, 지진과 함께 남수산 능선에 수백 미터 금이 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주민들은 대책위를 중심으로 당국에 주민안전과 남수산원상복구등 대책을 촉구하는 저항운동에 돌입, 2019년 8월에는 남수산보존회가 조직되었다. 마을과 보존회는 함몰 원인 진상규명, 주민안전대책 수립, 상수원오염 방지, 석회광산 폐쇄 등을 광산업자측과 산업부에 요구했다. 또 남수산 함몰 국회사진전 등을 개최하여 정치권의 대책도 촉구하였다.

수백 미터 무너지고 크게 금이 간 남수산 (일부)
주민들의 가열찬 저항운동과 요구에 광산업자 측은 2차 안전진단 결과를 발표했지만, 주민들은 1차 때와 마찬가지로 그 결과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조사목적이 주민 안전대책보다는 광산업자측의 조업 재개에 있다고 보고 있다. 주민들은 조사단구성도 문제 삼았다. 2007년 1차 안전진단에서 함몰원인이 광산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다시 한번 조사 용역을 맡게 된 것이다. 주민들은 “오늘의 사태는 과거에도 정밀진단을 요구했으나 산자부나 광산업자 등이 방치한 결과이기에 책임규명, 안전진단시 자연동굴확인 문제, 과채굴 문제 등을 명확히 해야 함”을 요구하였다.(2016. 7. 18일자.『오마이뉴스』시민기자 이규봉 기사 일부 내용을 인용함.) 그 후 4년 동안 매화 주민들은 끈질긴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광산개발 주체인 ㈜한국공항측의 내놓은 대책은 ‘노천채굴’이다. 노천채굴이란 산 일부를 절단하거나 아예 갱도를 무너뜨려 그 위에서 석회석을 채굴하고, 채굴이 끝나면 복구 기간을 7년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책에 대해 주민들은 결국 남수산을 까뭉개 없애고 노골적으로 채굴사업을 계속하겠다는 음흉한 심보라면서 더욱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남수산은 437m 높이이다. 200m 이상 절토를 하면 과연 완전복구가 될까? 주민들에 따르면 남수산 지하는 이미 개미굴처럼 채굴되어 지반이 위험한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남수산을 이제 더는 훼손하지 말고 주민 안전대책과 원상복구를 광산업자측에 요구하고 있다. 자연은 한번 훼손되면 완전복구까지 적어도 수백 년 이상이 걸리기 때문이다.
지금 석회광산은 임시 폐쇄되어 휴업 중이다. 주민들은 당국에 대해서도 실효성 있는 남수산 원상복구와 주민안전 대책이 마련될 때까지 남수산 보존을 위해 결사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어 싸움은 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다.

남수산 가는길,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빽빽하다(좌), 남사고 학문터를 둘러보는 대책위 최중봉 사무국장(우)

남수산 남사고 학문터 일부(좌), 남수산(가진봉 정상)에서 대책위 사무국장 최중봉씨(우)
남사고 선생과 남수산
남수산! 매화 주민들은 왜 목숨을 걸고 남수산을 지키고자 할까, 이들에게는 조상 대대로 어머니 품 같은 산이요, 수백 년간 삶을 지탱해온 목숨줄 같은 터전이요, 조선시대는 물론 근현대사가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역사문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의 한가운데에 격암 남사고 선생이 있다.
서양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가 있었다면 동양에는 조선의 남사고(南師古, 1509 ~ 1571)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동시대인이다. 남사고 선생은 근남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양(英陽). 호는 격암(格庵)이다. 역학(易學)·천문(天文)·복서(卜筮) 등에 두루 통달하였다고 전해온다.
격암 선생은 명종 19년(1564)에 효렴(孝廉:효도가 지극하고 청렴한 사람에게 벼슬을 주는 것)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사직서(社稷署) 참봉(參奉)벼슬을 하였으며, 선조 때 천문학 교수(종6품)를 지냈다. 명종 말기에 이미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을 예언하였고, 임진년(1592)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으로부터 나라를 침범하리라 하였는데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 왔다. 죽은 뒤 1709년(숙종 35)에 울진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으며, 후세 사람들이『해동강절(海東康節)』이라 불렀다. 어쨌든 남사고 선생은 조선 중기 왕조실록에도 나오는 울진의 유학자 중 한 분이다.
구전에 따르면 남수산이란 명칭도 남사고 선생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온다. 선생은 평소 도학 공부 중 심신을 수련코자 남수산을 오르내렸다고 한다. 남수산에는 그가 심신을 수련했다는 학문터가 있다.
필자는 지난 1월 중에『대책위』최중봉사무국장과 함께 남수산 가진봉을 올랐다. 최국장은 이곳 매화2리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남수산을 오르내려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현재 남수산 정상은 군 레이더 기지가 있어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남수산 표지석은 가진봉에 있어 등산객은 이곳을 오르내린다. 가진봉을 지나야 갈면 대령산으로 가는 방향이다.
최국장을 따라 가진봉에서 서쪽으로 50여 미터쯤에 이르자 남사고 선생 학문터라는 팻말과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설치한 국가기준점인 삼각점이 있었다. 이곳에 설치한 학문터의 삼각점은 동경 129도 21분 29초, 북위 36도 54분 59초, 높이 429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이를 보아 수백 년 전에 이미 남사고 선생이 이곳을 학문터로 정했다는 것은 그의 범상치 않은 예지가 번득인 장소이기도 하다. 학문터 둘레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고 300여 평의 평지 구릉으로 편안하고 아늑한 곳이다. 동쪽으로는 진복, 무령의 푸른 동해가 보이고, 남쪽으로는 현종과 삼산 일대의 풍력발전기와 서북쪽으로 굴구지 일대가 보인다.
학문터에는 범상치 않은 소나무 한그루와 밑동이 꽤 굵은 철쭉 예닐곱 그루가 있어 봄철에는 꽤 볼만한 꽃동산이 될 것 같다. 지금은 매화 청년회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살평상을 설치하고, 둘레의 잡목을 제거하는 등 정성스럽게 가꾸어 놓은 현장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남사고 선생의 학문터 유래 설명 표지판을 세웠으면 한다. 한편 앞으로 남사고 선생 학문터를 기리고, 남수산을 보존하자는 뜻에서 숲속 작은 예술제 등 기념행사라도 열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최국장과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500여 년 전 남사고 선생은 아마 이곳 남수산을 오르내리면서 수신제가와 도덕 세상을 꿈꾸며 세상과 만물의 이치를 궁구했을 것이다. 그가 출생한 인근 수곡리에는 격암선생 유적지가 있다.

울진 기미독립만세운동 시 최초로 태극기가 게양된 남수산 선산목 일대

매화2리 마을의 역사와 정자수, 팽나무와 홰화나무에 대해 설명하는 주민 최웅열씨
남수산, 일제가 풍수 침략했을 만큼 명산이다.
풍수 침략! 일제가 풍수 사상을 중요시하는 우리 민족의 심리를 역이용하여 국운을 끊기 위한 온갖 만행을 가리킨다. 일제는 역사적으로 유명 인물이 태어난 곳, 산천의 혈맥의 기가 왕성한 곳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른바 풍수 침략이다. 일제가 지도를 만들기 위해 표지석을 박은 것일 뿐 풍수 침략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풍수 침략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풍수 침략설에 따르면 남수산은 이미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풍수침략 대상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가 현소(玄蘇)라는 일본 고승(高僧)을 몰래 조선으로 들여보내 명산의 정기를 쇠진시킬 목적으로 남수산 정상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이곳에 쇠말뚝을 박았는데 최근 레이더 기지 설치 과정에서 제거했다는 설이 있다. 두 차례나 일제의 풍수침략지가 된 남수산이 그만큼 지기가 강한 명산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부 역술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가 풍수침략으로 한반도에 박아 놓은 혈침(쇠말뚝)은 모두 365개인 것이라고 한다. 1995년 김영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운동 일환으로 추진된 바 있는 쇠말뚝 찾기 사업으로 경북에는 주민제보로 61곳이 조사되었다. 울진에도 8곳이 있다고 전해온 바 있어 1995년 경북도에서 이를 답사, 조사했다.(광복50주년기념, 지명유래조사와 쇠말뚝찾기사업 결과보고서, 2005. 김규탁) 그 8곳은 울진읍 읍남리 바리재(솟골), 울진읍 대흥리 아구산, 근남면 수곡리 매봉산(막금), 근남면 행곡리 금산, 원남면 매화리 남수산, 금강송면 통고산으로 말뚝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남수산은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울진군지』(1971)에 의하면 1960년대까지 이곳에서는 매화면 단위의 기우제를 열었다. 마을 사람들은 가뭄이 심할 때 남수산 정봉(頂峰)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온다고 믿고 있는 신령스러운 산이기도 했다.
이러한 명산을 무너뜨려 노천광산으로 하겠다니 매화 주민은 물론 출향민들까지 분노하고 있다. 남수산과 1킬로미터도 안 되는 인근에는 남한 최고의 자연 석회 동굴인 천연기념물 155호인 성류굴이 있다. 최근에 신라 제24대 임금 진흥왕(540∼576)이 560년에 성류굴을 다녀갔다는 국보급의 명문이 나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끈 바 있다.
성류굴에서 바로 보이는 산이 남수산이다. 이 두 개의 산은 근남과 매화의 상징으로 쌍둥이 형제산이나 다름없다. 성류산 코앞의 남수산이 파괴되어 흉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울진 자연 풍광과 관광산업에 대한 그 이미지 훼손은 불보듯 뻔하다.

몽천(샘물)과 삼조어비각(오른쪽), 황림 선생 신도비와 우암 선생 유허비(왼쪽)
매화몽천은 울진 선비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
남수산 끝자락 금매마을 목련봉(木蓮峯) 아래에는 맑은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몽천이 있다. 지난 1987년에 경향신문사와 자연보호중앙협의회에서 한국의 명수(名水)로 지정되었다. 이 샘물은 약 400여 년 전 이 마을 매오(梅塢) 윤몽열(尹夢說)이 산 아래 바위틈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 나와 큰 소(沼)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보고 『산하출천왈 몽(山下出泉曰 蒙)』이라 역리상(易理上) 몽괘(蒙卦)를 따서 몽천(蒙泉)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찬 샘물이다.
몽천에는 삼조어비각(三朝御批閣)이 있다. 조선 효종, 숙종, 정조 임금 때 이곳 선비인 우암 윤시형, 그의 맏아들 윤여룡, 증손자 윤사진이 당시 고을 관리의 무능과 부패로 백성들이 민생고를 겪고 있음을 상소하여 임금으로부터『기쁘고 고맙다』는 비답을 받았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가정책을 비판하고 대안을 건의하여 정부로부터 답신을 받은 것이다. 이 삼조어비각은 삼선생(三先生)이 임금에게서 받은 비답을 기념하여 지은 건물이다. 우암은 문장으로 울진 선비들에게도 명망이 높았던 인물로 몽천서원에서 유생들을 모아 강독하던 선비였다. 따라서 몽천은 당시 울진유학을 진작시킨 곳으로, 꼿꼿한 선비정신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남수산 선산목, 울진최초 독립만세 태극기 휘날리다!
1919년 3·1운동은 서울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져 울진에서도 일어났다. 1919년 4월 11일, 울진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을 촉발한 태극기가 내걸린 곳이 매화의 남수산 선산목이었다.(또 다른 주장은 4월 10일 밤 자정에 선산목에서 횃불을 밝혔다는 설도 있다) 선산목은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전설이 있는 봉우리로, 선산목에서는 마을 전체를 관망할 수 있다.
매화만흥학교 출신 학생들과 뜻있는 인사들이 주도하여 촉발된 매화 만세운동은 지역주민과 장꾼 등 50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고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이 만세운동은 4월 13일 흥부장터로 이어졌다. 당시 매화, 흥부장터 만세운동 주동자들은 일경에 체포되어 다수가 고초를 겪었다. 이처럼 매화는 울진의 3.1운동 발상지로서 울진 출신 독립유공자 82명 중 매화출신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그 영향이 미쳤음을 말해주고 있다.

울진 기미독립만세 기념탑(매화면 매화리 소재)
매화는 울진지역 최초 근대 교육의 요람지다.
만흥학교는 1907년 10월 독립운동가 주진수를 주축으로, 지역 독립운동단체인 관동학회 회원과 지역민이 함께 세운 울진 최초의 근대학교이다. 주진수는 일찍이 신학문을 공부하여 민족의식을 키웠으며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신민회 강원도 대표인 총감으로 활동하며 국권회복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지역의 독립지사이다. 그의 항일독립정신을 기리는 비가 현재 울진초등학교 입구에 세워져 있다. 매화 만흥학교는 기성면 사동리에 국오 황만영이 세운 대흥학교와 함께 1910년 국권침탈이 되자 일제에 의해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학교로 탄압을 받아 강제 폐쇄당하고 말았다.
만흥학교 터는 현재 매화2리 마을 정자수와 전병철씨가 운영하는 울진 토속주 제조 작업실 일대로 알려져 있다.

남수산 여름 풍경과 유영국 화백, 남수산 그림(작은산)
울진이 낳은 세계적 화가 유영국이 그린 남수산
유영국(1916∼2002)은 울진읍 말루 출생으로 한국 추상화의 태두이자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화가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울진공립보통학교(현 울진초교)를 졸업 후 서울에서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를 다녔다. 1935년 봄, 일본 문화학원 유화과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유럽의 추상미술을 공부하여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해방 이후 1948년 유영국, 김환기, 이규상 등 신사실파로서 첫 전시회를 열어 화단에 이목을 끌었다. 추상적인 선과 점, 색채로 한국적인 모더니즘을 구축한 한 것은 마음으로 느낀 대로 표현하는 것이 새로운 사실이라는 관점으로 신사실주의라 표방했다고 한다. 6.25 한국전쟁으로 잠시 낙향, 울진 죽변에서 어업과 양조장(현 죽변 사거리 코끼리 노래방 위치로 알려짐)을 경영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상경하여 두문불출, 평생 추상화 작업에만 심혈을 쏟았다고 한다.
유영국은 생전에 『나는 경북 울진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자라는 동안 늘 바다와 산을 가까이하여 즐길 수 있었던 환경으로 산을 그리기 시작하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 산을 그리게 되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는 평생 울진 고향산천을 가슴에 품고 살면서 특히 울진 산을 점, 선, 면과 독특한 색채로 작품을 그려낸 화가이다. 필자는 2016년 유영국 출생 100주년 기념전(서울덕수궁)에 초대되어 그의 추상화를 감상한 적이 있었다. 그림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울진 산천을 추상화로 그렸다는 감동과 색채의 황홀함을 아직 잊을 수 없다.
미술계에서는 유영국을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등과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의 명성에 걸맞게 세계적 권위를 가진 미국 뉴욕의 리졸리 출판사에서 추상화가 유영국:정수(Yoo Youngkuk 0uintessence)를 영문판으로 펴냈다고 한다. 미국 출판사가 한국 화가의 작품 전집을 펴낸 것은 유영국 화백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이다. 최근 그의 그림 한 점이 미술 경매시장에서 7억 3천만 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내년 2022년은 유 화백 사후 20주기를 앞두고 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울진에서 그를 기리는 계기가 있어야 않을까 하는 여론과 바람이 있기도 하다.
미술 평론가 이태호씨는 유영국 화백의 작품에서 남수산과 일치하는 형상의 작품을 찾아내어 다음과 같이 평한 적이 있었다.
『남수산은 정삼각형에 근사한 세 개의 봉우리로 연결돼, 오후 햇살을 등지면 실루엣이 아름답다. 산봉우리는 영락없이 유영국의 추상화, 1984년 작은 산(개인소장)의 삼각형 구성과 똑 닮았다고 했다.』(2018. 10. 10. 블로거아트하우스)
그의 묘지석 비명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고 한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화가 유영국
묘지명처럼 유영국 화백은 평생을 울진의 산과 자연풍광을 끊임없이 추상작품으로 그려낸 울진이 낳은 불후의 세계적 거장이다. 남수산! 유영국 화백의 혼이 투영된 또 하나의 산이다. 그 산은 무너지지 않는다.

근남 수산 왕피천에서 바라본 안개가 스린 겨울 남수산 일대(2021. 2. 1)
남수산이 말한다
필자는 남수산에 대해 주민이자 대책위원장 중 한분인 김영호씨의 말을 들어 보았다.
『남수산은 매화주민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이자 목숨줄과 같은 산이다. 이 산은 조상들의 얼과 혼이 배인 곳으로 예전에 가물 때에는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냈고, 특히 울진독립운동의 시발지이기도 하다. 그러한 산을 무너뜨려 노천광산으로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남수산은 매화의 진산으로 반드시 보존하여 후세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명산이다. 우리는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 반드시 지킬 것이다.』
김 위원장의 말에서 남수산 보존에 대한 날선 결기와 의지가 느껴졌다. 매화 주민들의 보존의지에 대한 남수산은 묵언으로 다음과 같이 화답하는 듯하다.
남수산이 말한다.
이 세상 천지자연이 원래 주인이 있었던가?
저 산이 어찌 네 것인가?
다람쥐의 것이고, 토끼의 것이고,
노루의 것이고, 멧돼지들과
산새들의 것이고, 개미의 것이었다.
만물의 자유 천지 세상이 아니던가.
그래서 만물의 것이고, 누구나의 것이다.
남수산이 말한다.
누가 함부로 경계 짓고,
망치로 두드려 깨뜨리고, 구멍 내고,
파서 뒤지고 금이 가게하고
갈라지게 하고, 무너지게 한단 말인가!
설령 자네 것이라 해도
그곳에 깃든 만물을 불안케 하여
평화를 파괴하는 죄값을 어이할거나.
남수산이 말한다.
인간과 자본의 탐욕에 휘둘리지 말고
나를 괴롭히지도 말고, 더는 아프게 하지 말라.
내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얼만큼의 세월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너희들 때문에 오장육부가 찢어지거나 고장이 났다.
나의 속은 텅텅 비었다.
훅 불면 날아가 먼지가 될 지경이다.
혹 큰비가 오거나 지진이 난다거나
자연 생태계가 순환이 안 돼 배탈이 난다면
나는 설사 만난 사람처럼 무너져 앉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나를 아끼고 보존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가상하여
이대로 버티고 있음을 알아라.
남수산이 말한다,
나를 원상 복구하여 제발 그대로 놔두라!
(202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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