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어도 죽지 아니한 것은 나라 사랑하는 혼령이로세(死而不死愛國之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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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張植), 잊힌 이름, 숨겨진 이름?
일제강점기 조국 자주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은 이곳 강원도(당시) 벽지였던 울진에서도 줄기차게 진행되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은 외세침략에 저항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기점으로 일제강점기인 1945년 광복까지 51년간이다.
의병항쟁, 구국계몽 운동, 만주 망명과 독립군 기지건설, 의열단 투쟁, 1919년 3·1 독립만세,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활동, 1920년대 청년운동과 사회운동, 1930년대 정당 중심의 독립운동과 국내외 노농투쟁(1940년대의 광복군의 독립전쟁, 국내의 결사대 등(울진의 독립운동사 19쪽) 항일투쟁이었다.
울진도 마찬가지였다. 울진인들이 국내외에서 펼친 독립운동도 다양하다. 을미의병을 기점으로 구국 계몽운동, 만주 망명 독립기지건설, 청산리전투, 3·1 독립 만세, 울진청년회 활동, 신간회 울진지회 설립, 이상촌 사건, 적색 농조 사건, 창유계 사건 등이다.
이러한 항일투쟁 결과로 정부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은 울진 독립유공자는 100여 명이나 된다. 이 숫자는 전국 시군의 평균 두 배를 넘는다는 것은 울진사람들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최근 찾은 조선총독부에 보고된 강원도 치안 상황 보고 자료를 보면 울진군의 요시찰대상자가 1938년 당시 총 53명(국내 31명과 국외 22명)으로 당시 강원도 강릉군 다음으로 두 번째다.

요시찰인 및 요주의인 통계표(조선총독부 치안상황 15∼16쪽, 강원도, 1938. 12.)
하지만 아직도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도 정부로부터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 이들도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바로 일선(一仙) 장식(張植) 선생(이하 장식)이다. 그가 죽은 뒤 울진유지 일동이 기록한 묘갈문에 나타난 그의 독립운동 관련 공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묘갈문의 원문은 한문으로 번역된 것을 일부 발췌하여 인용했다.

1929년 촬영(39세), 1941년 촬영(51세)

일선공 장식의 묘 - 근남면 행곡리 금산 자락
『장식(1890∼1957)은 경북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건중(建中), 호는 일선(一仙)이다.
본관은 울진으로 호부상서 장말익을 시조로 하며, 후대에 이르러 청파 장만시와 효자 장동유의 후손이다. 부친은 죽차 장규한이고, 모친은 주경화의 따님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일찍이 문리에 성취하였고, 나이 14∼15세에 공부하러 영남에 유학하였다. 18세에 백운 주진수 선생의 만흥학교에 들어가 의기를 분발하여 원근에 가서 원조를 구하니 흥기하는 자가 많았다.
이후 압록강을 건너가 만주 신흥학교에서 이시영의 비서가 되어 독립군조직을 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와 3·1운동을 돕고, 선일 약국을 운영했다. 장식은 뜻을 함께하는 지역 인사들과 청년회를 주도적으로 창립하여 회우보를 발간하였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청년회 활동으로 그는 국민계몽을 위해 흑인해방극의 각본을 직접 쓰고 배경음악까지 맡았으며, 공연의 비용을 담당하였다.
그뿐 아니라 울진 교육 발전을 위해 울진청년회 발기로 제동학교를 설립, 그 비용을 담당하였다. 좌우와 더불어 신간회 지부를 설치하였다. 이상촌 설립을 모의하다가 체포되어 강릉경찰서에 수감된 것이 10개월이나 되었다. 아들 헌태가 독립공작당 사건으로 11개월간 독형을 받고 출옥한 뒤에 병으로 죽었다. 공 역시 어렵고 험한 일을 여러 번 겪어 명현 한 약제를 복용하고 날로 폐인 자처를 하였으며 혹 산수간에서 방랑하기도 하고 혹 사람을 대하여 선학(仙學)을 말하기도 하였다. 정유년 4월 1일에 졸(卒)하였다.』 되어 있다.
필자가 장식 선생의 이름을 최초로 알게 된 것은 울진군지(1991년판, 울진군 발행, 521쪽 사립학교설립과 폐쇄 복교)를 통해서였다. 울진의 제동학교는 일제강점기 울진청년회의 발의로 울진강습소를 설립하고 2년 후 제동학교로 승격시켰다는 것이다. 이 당시 장식은 강습소 설립 및 제동학교 설립에 발기인과 후원자로 참여한 사실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울진군지(2001), 울진의 독립운동사(2011) 등에 등장했지만, 필자에게는 잊힌 이름이었다.
최근에 필자는 ‘울진독립운동의 발상지를 찾아서’라는 칼럼을 내보낸 후 장식 선생의 후손들로부터 각종 자료와 증언을 통해 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잊힌 이름 장식(張植)을 망각기억 속에서 다시 복원시켰다.

선일약국터(독립기념관 국가수호사적지, 독립기년관), 현 울진읍 헤어사랑

장식-서면일대 의생 면허 취득(조선총독부 관보 제3354호(1923.10.16.)
※장식의 양약 취급면허 자료는 찾지 못함.
장식, 잊힌 이름일까. 숨겨진 이름일까? 필자에게는 기억의 망각으로 잊힌 이름을 다시 복원시켰지만, 어떤 이에게는 숨겨진 이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숨겨진 이름이라면 왜?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 ‘왜’를 통해 규명해보고자 한다. 그는 당시 울진금융조합의 이사로 지역에서 재력가였으며, 울진 북부지역 최초 양약국을 운영한 약사이기도 했다. 약국 이름은 선일약국이었다. 그의 호인 일선을 거꾸로 하여 붙인 이름이다. 위치는 현재 울진읍 시장 입구이다. 그와 선일약국은 일제강점기 울진독립운동사에서 독립운동의 전위 역할을 했다. 군자금 모금 활동으로 재조명받고 있는 이상촌비사사건(理想村秘社事件)으로 강릉검찰국에서 10개월여 구속수사로 고초를 당했다
장식은 울진독립운동사에서 결코 지워진 이름이 아니라, 숨은 공로자가 아닐까 여겨진다. 필자는 그의 일대를 통해 장식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가 재평가를 받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따라서 그의 공적을 기리는 뜻에서 이 글의 제목 또한 장식 선생의 묘갈명에서 인용,『죽었어도 죽지 아니한 것은 나라 사랑하는 혼령이로세』로 하였다.
■ 주진수·황만영 선생과 만주 독립기지건설에 참여하다.
만흥학교가 폐교된 뒤 장식을 비롯한 다수의 졸업생이 만주로 갔다. 이것은 주진수 선생의 영향뿐만 아니라 시대정신인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자주독립과 항일저항정신의 숭고한 발로라고 볼 수 있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자료에도 만흥학교 졸업생 『곽종욱·주대근·진규환·황의영·황진환·윤인보·장식·황병문·전오규·주병웅·남재수·윤병헌·주병륜 등이 서간도로 이주하였다.』라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 가운데 주병웅은 매화만흥학교 졸업생으로 정미칠적을 처단하는 27결사대에서 활약하였다.
주진수 선생은 1911년 초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안동의 이상룡, 김대략 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하지 못하고, 1912년 6월 출옥한 뒤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갔다.
울진인들의 만주 기록은 안동의 김대락이 쓴 백하일기에 다수의 울진인들이 등장한다. 백하일기는 김대락의 1911년부터 1913년까지의 만주 망명 생활을 기록한 일기이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황만영 외 황씨 12인(황씨 일가로 추정)과 울진사람 안덕종·이만엽·이만영·이휘영·전봉련·전응선·전자문·정동수·한영육·곽종목·김삼룡·윤병용·윤병헌·윤상우·윤이보·윤철규·장기연·장식·전오규·전재건·주병륜·주병웅·주진수·주병휘이다.
이 당시 울진에서는 평해황씨 일가, 평해 직산의 이희영 일가 등이 대거 만주로 이주했다. 더구나 평해황씨 일가는 안동의 안동 김씨 등과도 혼반을 맺고 있어 동반 망명을 했다. 일제의 『고등경찰요사』에는 안동·영해·평해 등지에서 1911년경 2,500여 명이 망명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황만영 등은 선발대로 이주할 터를 물색하려고 김대락 일가에 앞서 만주로 다녀오기도 했다. 황만영 일가가 만주로 이주해간 시기는 알 수 없다. 김대락 일가는 1910년 12월경 안동을 떠났다. 황씨 일가도 대략 그 무렵에 평해를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1911년 서간도에 이주한 안동지역 이상룡 등의 망명가들은 경학사를 조직에 이어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황만영과 주진수는 신흥무관학교의 모태가 된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여하였다. 교육기관인 경학사나 신흥강습소는 장차 국권 회복을 위한 인재양성이 목적이었다. 울진인 가운데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인물로는 이규동·최해·최경호 등이 있다. 이규동은 평해 직산에서 만주로 이주한 이희영의 아들로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해룡현에 신창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해 독립운동을 하였다. 최해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에서 활약하였다. 나중에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였다. 최경호는 1929년 조직된 조선혁명군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동안 장식에 대한 만주의 활동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최근 연구되고 있는 김대락의 백하일기 1912년 1월 5일 자에 장식의 이름이 등장한다. 『오후에 주병륜과 장식이 찾아왔다』(백하일기 1912. 1. 5일자)고 기록되어 있어 장식은 당시 유하현 삼원포 합리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나이 20대 초반이었다.
울진군 유지 일동이 쓴 장식의 묘갈명에도 당시 장식이 만주(서간도 유하현)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했음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가 주진수선생과 함께 『독립운동기지촌건설』에 매진하면서 『성제 이시영의 서사직(書士職)』으로 근무했다는 것으로 보아 장식은 학생 신분이 아닌 관리하는 직원으로 근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장식의 청년기 활동을 울진독립운동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장식은 원남면 매화리에 설립된 만흥학교(백운선생실록, 단기 4338년 발행, 서기 2005년 재발행, 주극중)와 서울의 경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영해 송천의숙과 울진제동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백운실록에 따르면 장식을 포함 매화만흥학교 설립과 수학생 명단에는 62명이다. 그 뒤 백운 주진수와 함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국내로 돌아와 신간회 울진지회 및 울진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2011년 울진독립운동사, 162∼163쪽)

백운선생실록, 전영경, 1959.
※ 독립유공자 백운주진수 선생 기념비 제막 시 펴낸 백운선생실록, 1959년 펴내고 2005년 재발행되었다(필자 소장)
■ 애국청년, 3·1 독립선언서 가슴에 품다
일제의 강압 통치에 조선의 전민중이 드디어 폭발했다. 그게 바로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을 시작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터져 나온 대한독립 만세 시위이다.
장식은 만주로 떠날 때 주진수 선생의 비서로 활동했다고 한다(백운실록 19쪽, 전영경). 그리고, 국내로 들어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가족의 증언에 의하면 1914년 4월이라고 한다. 아마도 백운 주진수 선생이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자 장식은 성제 이시영의 서사(書士)로 근무한다고 하였다가 1914년경 주진수 선생과 함께 귀국한 후 장식은 남고 주진수 선생은 만주로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장식은 1년간 감리교 선교 활동을 하면서 양약 취급면허를 취득하고, 1915년 3월부터 선일약국을 열었다고 전해져 온다. 일례로 1914년경 부산의 군자금 모집책인 백산상회의 안희제가 만주에서 국내에 들어오게 되는 제일 큰 이유는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자금 확보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이시영의 영어 강사 시절 좁쌀 장수를 하며 학생들의 끼니를 해결해야 했던 장식으로서는 선일약국이 안희제의 백산상회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 만주에서 귀국한 동기가 비슷하다. 황상봉 선생 증손녀의 증언에 의하면 이 당시 황상봉은 감리교 교인들과 접촉이 많았고,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고 전한다. 장식 또한 서울로 향한 이유로 우선 3·1운동에 가장 적극적인 기독교인들이 감리교의 교인들이었고, 학생단체로는 경신학교 학생들과 졸업생들이었다. 그리고, 주진수 선생을 비롯한 만주 유하현의 동지들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을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러한 이유 중 하나로 서울 만세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울진군지 등에 의하면 장식은 파고다 공원에서 동향인 황상봉과 경신학교 선배인 정재용을 만나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동향인 황상봉은 명동 입구에서 일경 기마부대에 포위되어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나 며칠간 조사를 받고 훈방조치 된 후 만주의 간도국민회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함께 시위에 참여한 장식은 체포된 사실이 없는데 아마도 서울 유학으로 종로의 지리에 밝은 까닭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독립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고향 울진의 시위 계획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울진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황상봉은 만주간도국민회 활동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복역한 사실 등으로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됨)

경성우체국 발행 기념엽서 - 경신학교 단체 기념사진 1910. (후손 장영태 제공)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독립선언서를 울진에 가져온 주인공과 그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울진군지, 울진의 독립운동사에 의하면 2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근남 행곡의 장식이 서울의 3·1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비밀리에 입수하여 울진으로 가져와 매화의 윤병관에게 전달하였다. 또 하나는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북면 고목 전병겸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서울의 홍규익(전병겸의 외조부)이 박사형(양주 사람)에게 주었고, 다시 박사형은 북면 고목의 전병겸에게 전달했다는 설이다. 전병겸이 전달받은 것은 조선독립선언서 정본이 아닌 사신형식의 전단이었다고 한다. 한편, 장식은 서울 시위 현장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했을 것을 보여 그 취지와 내용, 문맥에 대한 정보가 더욱 충실하게 울진으로 전달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3.1운동 당시 장식은 경신학교의 학생 신분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각종 기록에 장식이 서울 경신학교 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손들의 증언으로는 이 당시에는 울진에서 선일약국을 운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경신학교는 1909년부터 2년간 수학했다고 한다. 얼마 전 후손들이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찾으러 학교(현 경신중학교)를 방문하여 졸업생 명단에 확인하니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 자료는 한국전쟁으로 모두 소실되고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동문들의 탐문으로 작성된 명부라 한다. 이 당시 경신학교의 졸업생 수는 13명(1910년), 9명(1911년), 9명(1912년), 14명(1913년)이 등재되어 있는데 졸업생 명단에 없었다 한다. 그런데 1910년 경성우체국에서 발행한 경신학교 단체 사진(경신중학교 100년사)에 학생 수는 180여 명으로 모두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다. 3년제면 한해 평균 졸업생이 60명, 5년제라도 평균 36명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졸업생은 10여 명 정도라면 아마도 이 당시 졸업보다는 수학만 하고 중도에 이탈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식 또한 2년 남짓 수학은 했으나 졸업은 하지 않고 만주로 간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당시 장식의 나이는 29세로 경신학교 학업 차 상경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표면적 이유로 경신학교 동기들 모임이나 모교 방문의 이유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장식은 만흥학교와 신흥무관학교 시절 비슷한 동년배의 청년들은 신흥무관학교 학생이었지만, 당신은 학생의 신분이 아닌 것으로 보아 남다른 역량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서울로 간 것도 만주의 독립운동기지와 지속적인 연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울진의 3·1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11일, 전병겸과 윤병관 등이 주도한 원남면 매화 장날과 4월 13일 북면 흥부 장날에 일어났다.
4월 12일 울진 장날 만세시위는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감리교 측의 준비 부족과 일경에 의한 일부 관계자들의 예비 검속으로 무산되었다. 울진면(현 울진읍) 시위는 『울진감리교회가 주도적으로 이끌기로 계획되었는데』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후세 사가들은 울진 만세시위 불발원인을 당시 교회발전 등을 생각한 지도자들의 시위 참여에 대한 소극적 태도와 준비 부족, 독립 만세운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등을 들고 있다. 하지만 감리교인의 개별 참여는 평가되어야 한다. (1984년 울진군지 480쪽. 2001년 울진군지, 198-199쪽. 2011년 울진의 독립운동사 198-199쪽. 1928년 1월 7일. 중외일보)
여기에서 2001년 군지 등 일부 기록에서는 1919년 2월 윤병관의 친구인 장식이 서울의 경신학교 수업차 서울에 갔다가 3·1 독립선언서를 (윤병관에게)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장식이 일경의 예비 검속을 당할 것을 예상하고 서울에서 내려오면서 윤병관에게 전달하고 집으로 귀가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울진의 만세시위는 타지역에 비해 조금 늦은 편으로 울진군수까지 동원되어 만세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다녔다고 하니 일제가 얼마나 긴장하고 예의 주시하고 있었나를 알 수 있다. 필자는 이번 조사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두 가지를 찾았다.
첫째로 매화장터와 흥부장터의 만세시위는 같은 연장선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부구 흥부장터의 만세 운동을 이끈 전병항은 매화장터 만세운동을 이끈 고목리 전병겸의 사촌이며, 또 다른 주도자인 남병표는 매화장터 시위에도 참여한 사실이 있다. 즉 흥부장터의 만세 운동은 매화장터 만세 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울진장터의 만세시위 불발로 경찰 인력의 분산은 다음 날 흥부장터의 만세시위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울진 3·1 만세운동은 치밀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울진의 민중항쟁이었다. 그 가운데 장식이 있었다. 장식으로 시작된 독립선언서의 전달과 정보제공이 울진 3·1 독립 만세시위를 촉발시킨 계기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장식-치안유지법 위반 벌금 50원 판결문 사본 1쪽(울진지청, 1921. 6. 6.)
■ 민중계몽과 애국 청년운동에 앞장서다
장식은 울진 3·1 독립만세시위가 끝난 뒤 울진지역의 청년단체 결성에 집중하여 1919년 8월 10일 울진청년회를 창립하였다. 매일신보(1919. 8. 14.)에 의하면 ‘울진군내의 청년풍기 진숙과 지식계발 및 민풍개선을 목적으로 장식, 임시호, 이우영, 전인술, 주진휴가 발기하여 울진청년회를 조직하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울진청년회는 3·1운동에서 살아남은 청년과 울진의 뜻있는 유지들이 발기하였다. 창립 당시 회장은 전영직, 부회장은 장식이 맡았으며, 임원으로 이우영, 장용석, 노기일, 전영경 등이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 후 1920년대 초기에는 장식이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전국적으로는 1920년 12월에 조선청년연합회가 결성되었으니, 이보다 앞선 시기에 울진청년회가 창립되어 활동을 전개하였으니 울진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다.
1920년 전반기 울진 청년단체가 펼친 중심 활동은 문화 운동이었다. 그래 10월 장식의 각본으로 해방극(미 링컨대통령의 노예해방을 민족해방으로 빗댄 작품)의 공연을 통해 지역의 봉건성 극복 등 독립운동사상을 고취 시키는 주민계몽에 앞장섰다. 이 해방극은 울진 최초의 연극으로 장식의 묘갈문에 의하면 각본과 배경음악을 직접 하였고, 경비부담을 모두 책임졌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에도 일제의 탄압으로 울진청년회는 회원 수가 감소하는 등 조직의 침체를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조직의 활성화를 꾀하기 위해 장식, 이우영, 장용석, 이순재 등이 중심이 되어 회우보를 발간, 회원들에게 배포하였다. 1921년 6월 11일 울진청년회우보에 장식은 『나의 비감과 낙오자』등의 기사를 게재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온건적인 청년회 활동도 치안유지법 위반과 청년회관 건립기금을 불법으로 모금했다는 이유로 장식, 이우영, 장용석은 각각 벌금 50원, 인쇄를 맡은 이순재는 벌금 20원의 판결을 내렸다. 이후 일제 경찰의 해산명령을 받고 울진청년회 활동은 침체 되었다.
이후 뜻있는 일부 청년들은 대중의 문맹을 퇴치하고, 근대지식과 사상을 보급하려는 학교설립 운동으로 나아갔으나 결과가 여의치 않았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1922년 8월에 울진청년회 회원들 일부가 직접 울진강습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울진강습소는 울진지역의 유일한 사립교육기관으로 1924년까지 수백 명의 학생을 배출하여 지역민의 교육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울진강습소는 1925년 사립보통학교인 제동학교로 전환·발전되었다.
후손들의 증언으로는 이 과정에서 장식은 울진강습소가 1925년 사립 울진제동학교로 발전 설립될 때부터 1943년 일제의 울진공립보통학교와 통합시까지 20년간 교직원 부족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교 교육 재정부족 시 토지(산)와 비품 등을 지원함으로써 인재양성에 공헌, 다수의 울진 출신 독립애국지사를 배출하였다. 이런 이유로 훗날 육촌 동생 장성업씨가 제동중학교를 설립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1925년 장식은 청년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나 울진청년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장식, 노기일, 주준황 등은 독서클럽을 조직하여 회원들의 지적 교양 축적, 청년들을 위한 도서모집, 회원의 사회적 공헌을 강령으로 채택하여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표면적으로 회원들의 지적 교양을 쌓는다는 목적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뒤에 나타나는 사상단체가 주목적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 1925. 11. 21. 울진의 독립운동사. 2011. 237쪽, 239쪽)
1920년대 중반의 중국, 러시아 등 동아시아의 사상 흐름은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는 다른 계급계층에 비해 개방적, 진취적 특성과 감수성 짙은 청년들에게 빠르게 확산되었다. 청년운동도 사회주의적 성격을 담보하여 펼쳐졌다.
1924년 4월에는 사회주의 계열 청년단체가 중심이 되어 전국 중앙조직인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하였다.
1926년 1월 울진청년회는 혁신과 더불어 『무산자동맹』이라는 사상단체 결성을 추진하였으나 일제 경찰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결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같은 해 1월에 『우리동맹』이라는 사상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 집행위원장으로 청년회의 전영경이 선출되었고, 집행위원으로 노기일, 장용석, 장식, 주진복 등이 선출된바 주민계몽에 주력하였다.(1926년 1월 25일 조선일보, 울진의 독립운동사. 2011. 242쪽)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 내면의 목적은 사회주의 사상 보급을 통한 조선의 자주독립 운동이 목적이었다.
장식은 울진지역에 가장 먼저 결성되었던 사상단체인 정진회에서 활동하였다. 이 정진회는 1926년 10월 임시 집행위원회시 군내 각 면에 새로운 청년회 조직을 결의할 시 근남면 담당으로 활동했고, 울진형평분사와 협력하여 형평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26. 11. 1. 조선일보)
1927년 5월 19일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에 참여한 강원도지방 대의원 10여 명이 전강원도 사회운동 단체대회를 1927년 7월 10일 개최하기로 결의하며 장식과 조훈석이 울진 대표가 되어 활동했다.
뒤에 후술하겠지만, 조훈석은 영양사람으로 울진청년회와 신간울진지회 활동하였으나, 울진에 온 이유는 울진이상촌비사 때문으로 사업이 종료되자 영양으로 돌아간 사람이다. (2006년 국민훈장 애족장 추서).

신간울진지회 발기인 대회 1927. 12. 10.(조선일보, 1927. 12. 18.) 상
신간울진지회 설립대회 1927. 12. 23.(중외일보 1928 .1. 7.) 하
울진신간회 창립을 적극 주도하다.
신간회는 1927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이 결집해서 창립된 좌우 합작 독립운동 단체이다. 초기 조직 확대에 주력하여 1928년 말경에는 지회 수 143개, 회원 수 2만에 달하는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신간회의 각 지회는 각 지역 청년단체들과 민중운동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지회 단위의 주요활동으로 웅변대회와 연설회 개최, 야학 개설, 강좌 개설 등의 계몽수단을 통해 대중의 의식개발에 노력했다. 또한 생존권 수호의 차원에서 노동농민단체와 함께 소작료와 소작권 보호운동, 일본인 이민반대, 수리조합 설치 반대 또는 횡포 타파, 농회 반대, 최저임금제의 확립, 노동조건과 임금에서의 민족적 차별 철폐 등을 제기하여 일제의 식민지정책 반대운동을 했다
그동안 신간울진지회의 설립은 중앙지회의 성장과 확대에 따라 울진에서도 자연스럽게 설립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서울본부의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강원도 시골 벽지에 파견되었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갖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장식의 일대를 조사하면서 신간울진지회는 단순히 신간회 지방지회의 수준을 뛰어 넘어 신간회 설립을 주도한 사실을 찾았다. 최소한 한쪽에서라도 울진인들이 보여준 노력들은 아래와 같이 울진신간지회 설립 시 많은 회원의 동참으로 나타났다.
-. 1927. 5. 경성 전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출석, 울진정진회 장식 중심(2018. 강원도사)
-. 1927. 5. 29. 강원도 7개 군 단체 대표자회의, 전강원도사회운동단체대회를 소집하기로 협의함(동아일보, 중외일보 1927. 6. 5.)
-. 1927. 7. 11. 전강원도사회운동단체대회 개최, 울진대표 장식·조훈석 참석(중외일보, 신간회에 가입하기로 결의(대의원 총 40명 중 18대 16으로 가결됨), 전강원청년연맹대회 촉구(2018. 강원도사)
-. 1927. 9. 28.∼30. 전강원청년연맹혁신대회 개최, 조훈석 집행위원 선임, 전강원도 청년회는 민족단일당 결성에 촉진할 것을 결의(중외일보. 1927. 8. 21.)
이런 과정을 거쳐 울진의 청년 및 사회운동을 주도한 울진청년회의 정진회가 중심이 되어 1927년 12월 10일 울진신간지회의 발기인대회를 장식이 운영하는 선일약국에서 개최하였다.

후손 장영태 제공
1927. 12. 23. 신간울진지회의 설립대회를 예정된 선일약국에서 동명유치원으로 변경하여 개최하고 회장에 황만영, 부회장에 장식을 선출했다. 설립대회의 장소가 선일약국에서 동명유치원으로 변경된 이유가 많은 회원들의 참석으로 선일약국에서 대회를 진행할 수 없었다. 12월 10일 발기인 대회 이후 13일 만에 등록 회원 122명 중 55명의 참석이라는 놀라운 성과는 인근 삼척신간지회가 참석회원 34명과 방청객이 100여 명이었다고 하니 울진지회의 참석자는 짐작하건대 엄청난 인파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일부 축전(전보)은 경찰이 압수했다고 한다. 이날의 풍경을 중외일보(1928. 1. 7.)는 아래와 같이 보도하였다.
이상과 같이 설립대회가 성황리에 마무리된 이유는 그동안의 울진청년회 중심의 노력을 바탕으로 회장 황만영의 역할도 한몫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역량들로 인하여 서울본부의 홍명희 아들 홍기문이 파견된 이유가 아닐까 추측된다. (중외일보 1928. 1. 7. 울진의 독립운동사 2011. 254∼255쪽)
그리고, 신간울진지회는 설립 후 일제의 탄압으로 유명무실했던 타지역의 지회와 달리 여러 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신간울진지회는 1년 뒤 창립대회를 기획하지만 제지당하고, 이듬해 두 번의 총회를 모두 일제의 간섭으로 거부당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1929. 3. 16. 임시대회를 통하여 갑작스럽게 황만영과 장식은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며, 제2기 임원진이 출범한다. 그리고, 제2기가 출범한 지 5개월도 되지 않아 1929. 8. 24. 임시대회를 통하여 신간울진지회의 제3기 임원진이 출범하는데, 장식은 다시 검사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필자는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의문 사항과 울진독립운동사의 흐름을 재발견하였다. 갑작스러운 제2기의 출범으로 5개월을 가지 못하고 제3기가 출범하며, 제2기는 임원 구성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황만영은 금강산으로 요양을 갔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다.
신간울진지회의 제3기는 그동안 울진독립사에 소외되었던 역사였다. 좌우합작의 이념적 합의가 신간회의 근간이었다면 신간울진지회의 제3기는 좌우합작의 형태에서 벗어난 조직체다. 총무간사의 일원 체제를 통일하면서 상무회의를 별도의 조직으로 두었다. 이는 업무의 효율성을 높인 조직의 구성이다. 하지만 제3기 역시 일제의 계속된 탄압 등으로 자연 해소되었지만, 이들은 1930년대 울진 노동운동의 주체가 되어 울진적색농조와 창유계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신간울진지회 제3기와 더불어 재평가되어야 한다.

울진이상촌비사사건 면소 결정문 1쪽과 7쪽 (후손 장영태 제공)
울진이상촌비사(蔚珍理想村秘社) 사건으로 10개월간 수감되다.
『돈을 갖고 튀어라!』
이 말은 제국주의 침략에 은행털이로 맞선 약소국 독립군들이 군자금 마련을 위한 목숨 건 금언이었다.
당시 약소국들이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식민지해방을 위한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자면 무기 구입 등에 따른 재정수요가 필수였다.
한일병탄 후 만주 독립단체들이 군자금을 모집한 전략은 대체로 세 가지였다. 현지 동포들에게 모금하거나 국내에 잠입해 친일 부호의 돈을 모금하거나 뜯어내는 방법이었다. 아니면 은행이나 현금 차량을 습격하여 탈취하였다.
일례로 1920년 1월 4일, 만주 한인 무장단체인 『철혈광복단』 단원 6명이 간도 룽징(龍井)에서 일제 조선은행의 무장 호송대를 습격해 돈 궤짝을 빼앗아 달아난 사건이다. 당시 탈취금액은 15만 원이었다. 지금 가치로 치자면 100억 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다. 탈취목적은 독립군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 정도 돈이면 독립군 5,000명을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시킬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체코군이 매물로 내놓은 무기 3만여 정을 사려던 이들은 밀정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군에게 체포됐다. 탈취한 돈도 대부분 회수되었다. 단원 중 최봉설(1897~1973)은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3명은 체포되어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이는 조국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처절한 투쟁사의 한 토막이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부터 독립운동자금 모금과정에 대한 반성이 일어난다. 강압과 협박에 의한 모금과정의 반성으로 일제와 친일파를 대상으로 무력에 의한 모집 방법도 경계를 강화하면서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이에 새로운 방법의 모색이 부산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안희제이며, 울진의 선일약국이다. 부산 백산상회 안희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일제 자본에 맞서는 민족기업으로 발전시킨 인물로 광복 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례가 바로 『울진이상촌비사사건』이라고 추정된다.
사건의 시작은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취임하는 이상룡을 황만영이 수행한다. 3개월 뒤 이상룡이 사임하고 함께 만주로 돌아온 시기가 1925년 8월이고, 황만영이 귀국한 시기도 동년 8월이니 하순경일 것 같다. 황만영의 귀국 동기는 군자금 모금으로 이 당시 10만 원을 만주로 가지고 간 사실이 있다. 황만영은 만주 이적 당시 가산을 모두 정리한 상태였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모금하였을까? 그런데 1926년 여름에 영양 동아일보 지국장 겸 기자인 조훈석이 울진청년회에 가입하고 신간회 울진지회 임원이 된다.
1927년 2월 24일 울진 행곡 출신 장식, 주진복, 주진희, 장재환과 울진금융조합의 조합장 노기일과 간사 주진철 그리고 영양 무장독립단체 오오회의 조훈석과 권국찬, 만주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군자금 모금으로 출옥한 지 5개월 된 영해의 이겸호, 청송의 박영석(이후 영양 동아일보 임원) 등이 모여 공동경작의 모범 농원을 건설을 목적으로 모임을 갖는다.
1927년 12월 23일 신간울진지회 회장에 황만영과 부회장에 장식이 취임하고, 재무에는 행곡인 주진복이 맡는다. 1928년 4월 3일 주진희의 방에서 권국찬과 주진희의 공동경영계약서를 작성하고 청송의 수리관개 공사를 진행한다. 이때 취득한 금액이 일제 검사의 조사에 의하면 밝혀진 것만 2만 1천 원이다. 1929년 3월 16일 황만영이 신간울진지회 회장을 사임하고 금강산으로 요양을 떠난다. 수리공사는 완공되었으나, 부대 공사비의 과다로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수리공사로 취득한 토지를 매각한 후에도 채무가 발생하여 변제를 모두 한 시점이 1930년 5월 30일로 이상촌 건설이라는 꿈은 무산되었다고 한다.
1930년 10월 조훈석이 영양으로 돌아가 영양청년회와 신간회 영양지회의 간부로 활동했다. 1931년 11월 7일 조훈석이 금화군 취재 영업 허가면허를 취득한다. 금화군은 금강산 길목의 현재 북한 땅인 김화군이다. 1931년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조훈석은 영해 이겸호의 집에서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는 재산공유계약서 등이 발견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가 다시 울진경찰서로 이관되고 다시 강릉지청 검사국에 마지막으로 송치된 것은 1932년 1월 4일이다. 1932년 2월 2일 조훈석이 경주지청 검사 분국에서 횡령죄로 불기소처분을 받는다. 1932년 11월 30일 강릉지청으로부터 울진이상촌사건의 면소처리 결정이 난다.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장식은 주모자로 지목받아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예심 결정 판결까지 10여 개월간 강릉지청 미결수로 옥고를 치르는데, 긴 구속 기간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판결이다.
성공한 독립운동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필자의 의문은 다음과 같다. 과연 이들에게 『이상촌건설』의 꿈은 있었을까?
첫째 국내의 현실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으로 출옥한 지 5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영덕의 이겸호와 함께 이상촌을 건설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는 청송수리공사의 종료 후 더 이상 이상촌건설을 전개하지 않고 침묵했다는 사실이다.
셋째 조훈석의 행보다. 울진청년회 가입과 떠나는 시기가 의심스럽다. 그리고, 금화군 취재 영업권은 왜 필요했을까? 금화군은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의 요충지로서 황만영이 있는 금강산으로 지속적인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이동이 자유로운 기자 신분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는 너무 큰돈이 움직였다. 어떤 과정을 거쳐 자금 추적을 피했을까? 울진금융조합 등에서 자금을 대출받아 토지를 매입하고, 다시 그 토지 등 되파는 수법으로 장부상에 출자금을 부도 처리한 것이었을까? 당연히 부도처리 된 원금과 차익금은 비밀의 독립군자금이었을 것이다.
공사를 담당한 울진 측 인사는 주진복으로 신간회 울진지회의 재무간사를 같이 맡고 있었다. 울진인을 제외하고 조훈석과 이겸호는 공훈록에 올라가 있으며, 이겸호는 두 번이나 추서되어 국민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그런데 그 중심에 있었던 울진인들은 숨바꼭질 중이다. 또 하나 의심스러운 정황은 신흥무관학교이다. 황만영은 신흥무관학교 재무를 맡은 바 있고, 장식은 이시영의 서사였다. 그리고, 이겸호는 신흥무관학교 학생 출신인 군자금 모금책이다. 누가 보아도 군자금을 조성하기 위한 비사인데 10여 개월의 조사에도 밝히지 못한 일제는 얼마나 허탈했을까? 비밀군자금 모금계획과 조직 보안은 철저히 함구 되어 일제 경찰의 심문과 진술조서 작성과정에도 교묘히 피한 전략은 신통방통하다고나 할까. 그리고 이런 치밀함이 지금의 우리를 힘들게 하는 부분이다. 누구의 말처럼 『성공한 독립운동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가 수긍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동안 울진군지 등의 기록에는 『1928년에는 신간회 울진지회 대표회원이던 장식과 조훈석이 노기일과 함께 영덕 출신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던 이겸호와 울진, 영덕, 영해, 정선 등지에서 이상촌을 건설하려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규합하여 공동으로 토지를 매입하고 공동으로 경작의 모범 농원을 경영하는 이상촌을 건설하려는 계획이었다.』 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농촌 이상촌(울진, 영덕, 영해, 정선 등지)을 건설을 겉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군자금 마련의 비책이었다. 그 방법으로 이 자금을 만주독립운동기지 또는 임시정부에 보내려다 일제에 탄로가 난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이른바 돈세탁을 통한 비자금(군자금) 마련 사건이다.
이를 탐지한 일제 경찰은 군자금 마련과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를 시행하려는 계획이라는 혐의로 이들을 체포·구금하였다.
결국 장식, 노기일, 주진복, 주진휴, 주진희, 장재환, 주진철, 주진휘, 영덕의 이겸호, 영양의 권국찬, 조훈석, 청송의 박영석이 일제의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들 가운데 주진휴와 주진휘를 제외한 인사들이 모두 기소되었다. (울진의 독립운동사 2011. 260~263쪽)
이때 장식은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예심 결정 판결까지 10개월간 강릉지청 미결수로 옥고를 치렀다.

조훈석 금화군 취재영업권 취득(조선총독부 관보 제1459호 1931. 11. 7.)

울진 약종상 해군에 헌금(1937. 9. 25. 2면 동아일보)
황만영과 장식, 조훈석의 관계
황만영은 만주에서 이시영(李始榮)을 도와 신흥학교의 재정을 담당하였던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파견되었다가 일제의 감시로 만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대신 1927년 창립한 신간회 울진지회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황만영 선생이 신간회 울진지회장을 맡는 것은 이례적으로 보인다. 이 시기 황만영은 군자금 10만 원을 마련하여 만주의 이상룡에게 전달하고 병을 얻어 울진 고향에 머물던 시기였다.
1925년 8월 황만영의 귀국과 함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없으나, 1926년 여름에 영양인 조훈석이 울진에 들어온다. 1927년 2월에 울진이상촌비사의 첫 모의가 시작되었다. 1927년 12월에 황만영이 신간울진지회 회장을 맡고, 1928년 4월에 이상촌비사의 토지 매득금 21,000원을 출자하여 청송수리공사 공동경영계약을 체결하고 사업에 들어간다. 1929년 3월 황만영이 신간울진지회 회장을 갑자기 사임한 후 금강산으로 요양을 떠나고, 1930년 5월 청송 수리공사는 채무의 과다로 빚을 지고 종료되어 이상촌건설이 무산된다. 10월에 조훈석이 영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31년 11월에 조훈석이 금화군 취재영업권을 취득한다.(조선총독부 관보 제1459호 1931. 11. 7.)
이런 일련의 과정이 우연의 일치만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그 후 조훈석은 강원도 금화군을 담당하여 취재영업권을 갖게 되는 것은 일반인들보다 신문기자라는 신분으로 취재 활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조훈석의 금화군 취재영업권 취득은 황만영과의 연계를 위한 독립운동 군자금 마련의 방편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하겠다.

반민족행위처벌법 공소시효 종료 불기소처분명단(조선중앙일보 1949. 8. 31. 국사편찬위원회 목록 참조)
조국의 독립은 의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장식의 일대를 추적하면서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 동아일보(1937. 9. 25. 2면)와 매일신보(1937. 9. 26. 3면)에 보도된 『울진 약종상 장식이 해군 휼병금으로 20원을 울진경찰서에 전달했다.』는 내용을 접하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용어도 생소한 휼병금(恤兵金)? 전쟁에 나간 병사를 위로하기 위하여 쓰이는 돈을 말한다. 일제는 당시 중·일 전쟁 등을 치르기 위해 휼병금과 같은 국방헌금을 대대적으로 강요했던 것이다.
광복 후 장식은 이 사건으로 반민족특위의 조사 대상이 되었으나, 바로 기소유예 처리되었다. 당시 격동하는 국내의 상황 등으로 장식이 기소유예 처리된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얼마 전 후손들이 찾아낸 조선중앙일보의 보도 자료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였다. 필자는 또 다른 ‘왜’라는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장식의 과거 행적을 살펴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당시 20원의 화폐가치를 떠나 장식은 변절한 것일까? 라는 물음으로 1937년의 신문자료들을 조사하였다.
1937년 매일신보(1937. 10. 30.)에 의하면 울진군 국방헌금 총액이 11,741원39전으로 신문에 보도된 개인 헌금자들은 1원에서 40원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국방헌금에 대한 평가는 금액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헌금을 낸 사실이 문제가 된다. 장식의 일대를 글로 써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런데 장식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몇 가지의 의문점을 발견하였다.
하나, 국방헌금과 관련된 당시의 신문 보도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만 보도하고 있는데, 이례적으로 장식의 해군 휼병금 제출 관련 보도만은 동아일보가 매일신보에 하루 앞서 상세하게 다뤘다. 무슨 이유일까?
둘, 일제는 1936년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제정하고 전시체제로 전환하면서 신문의 보도 내용은 국방헌금과 더불어 시국 강연에 대한 홍보가 많아졌다. 그리고, 장식이 휼병금을 낸 1년 뒤 울진의 청년운동과 사회운동을 주도한 주요 인사들의 사상전향자 시국 강연을 참여하는 이가 많았는데, 이 연사들 명단에는 장식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
셋, 1938년 12월의 『조선총독부의 강원도 치안 상황에 관한 보고』에 의하면 해군 휼병금을 낸 1년 뒤에도 일제는 장식을 믿지 않았다. 반전향자로 분류한 뒤에도 특별요시찰대상자로 위험 등급을 낮추지 않고 계속 감찰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동아일보의 보도 자료는 동아일보 울진지국을 운영했던 장식의 국방헌금 제출은 동아일보의 입장에서 부담스러운 일임에도 이례적으로 보도한 사실과 약종상의 배상금이라고 상세히 보도한 것은 장식과 울진경찰서의 이해관계가 있는 듯하다. 이 당시 울진적색농조 사건 등 매우 난처했던 울진경찰서의 입장에서는 장식의 국방헌금에 대한 동아일보의 보도는 실적과 체면을 갖게 했을 것이고, 장식의 입장에서는 약종상의 배상금을 강조함으로써 약국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모종의 자금을 조성할 수 있었으리라 판단된다. 만약 장식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포항과 원산 사이의 군자금 조달과 전달책이었다면 말이다.
여기서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독립군의 군자금 전달 경로는 이렇다.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으로는 포항 쪽에서 조성된 군자금은 강원도 정선 전상요(제3대 국회의원 역임)에게 전달되었고, 전상요는 다시 원산까지 전달했다고 한다. 원산으로 전달된 군자금의 행방은 어디로 갔는지 묘연하다. 그런데 포항과 정선 사이의 중간 전달자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중간 전달자가 후손들은 울진의 장식이라고 하지만 역시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후손들의 주장으로는 이상촌의 비사로 조성된 군자금은 이 경로를 통해 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군자금과 관련하여 배달 사고가 많았다는 사실은 모두 주지하고 있는 내용이다. 특히, 자금의 규모가 크면 누구라도 믿지 못한다. 앞서 황만영과 조훈석의 관계를 언급했듯이 금강산으로 요양을 떠난 황만영에게 조훈석이 여러 차례에 걸쳐 직접 전달했을 것으로 주장한다. 따라서 조훈석이 자금 전달책으로 활동하기 위하여 1931년 11월의 금화군 취재영업권을 취득한 이유라는 것이다. 1925년 8월 황만영이 귀국하여 모금한 군자금 10만 원은 그후 이상룡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황만영은 이 자금을 이렇게 빠른 기간에 마련하지 못했다. 그가 신간울진지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국내에 오랫동안 머문 것도 군자금 마련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군자금에는 이상촌비사와 신간울진지회 등의 자금 등이 포함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신간울진지회 재정부 총무간사인 주진복은 울진이상촌비사의 청송수리공사 울진 측 공사 책임자였다.
둘째로 1937∼1938년경 울진 관련 기사에 관한 국내신문을 들여다 보면 일제의 전시체제를 위한 발판으로 시국 강연에 대한 보도가 유난히 많다. 그리고, 시국 강연과 관련하여 사상전향을 했던 주요 인사들 가운데는 이 당시 울진의 청년운동과 사회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대다수이다.(思想에 關한 情報 11, 江高 제2983호, 思想轉向者의 防共講演會에 관한 건, 강원도 경찰부장, 1938. 11. 19.) 그러나, 울진 사상단체인 정진회를 이끈 장식은 강사명단에 없다. 어쩌면 해군 휼병금 제출은 차선의 선택이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울진경찰서는 장식을 끝까지 믿지 않았다. 1928년 어대례(御大禮)에 관한 상황 제8호(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 6쪽, 강원도, 1928. 11. 13.)에 장식은 『특별요시찰대상』이었고, 해군 휼병금을 낸 1년 뒤인 1938년 12월의 조선총독부 강원도 치안 상황 보고(12쪽, 1938. 12. 13.)에도 특별요시찰대상자였다. 이유는 동군내주주의자(同郡內主主義者-주주의자는 중국어로 주모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장식은 변절했거나,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광복 당시 장식의 재산은 개간한 박토 3두락(450평)뿐이었다.
그리고, 해군 휼병금을 제출하기 1년 전인 1936년은 장식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의 한 해였다. 3월에 부친인 죽차 장규한이 돌아가시고, 5월에 아들 장호명이 먼저 세상을 떠나며, 10월에는 스승인 주진수 선생이 만리 이국땅에서 세상을 등진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들을 겪어야만 했을까? (주진수의 사망에 대한 자료는 국가공훈록에 기록된 자료를 근거로 함)
장식의 일대를 기록하면서 독립운동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다. 특히, 세 번째의 기록은 일제가 보고한 감찰 비밀문서이고 보면 울진독립운동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식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해야 한다. 특히, 울진이상촌비사사건의 진실은 이런 맥락에서 재조명해야 할 가치가 있는 까닭에 국방헌금은 장식의 일대기에 옥에 티가 아니라 지속적인 독립자금을 준비하려는 시대적 상황에서 차선의 선택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조선총독부 강원도 관내 치안 상황 보고(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특요, 장식, 당 48년) 12쪽, 1938. 12. 강원도 경찰국)
장식, 재평가되어야 한다.
一仙 張植 선생은 일제강점기에서 광복까지 청장년 시절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했던 분이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처럼 그의 아들 장호명도 조국 독립운동 제단에 몸 바쳤다. 장호명(장헌태, 1913∼1936) 선생은 광복 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필자가 앞서 서술했듯이 일제강점기 장식 선생의 만주독립기지 건설 참여, 3·1독립선언서 전달, 울진청년회 조직과 활동, 제동학교 후원 활동, 독립군자금 마련을 위한 이상촌사건 등이 재평가되어야 한다.
울진지역의 최초 양약국이었던 선일약국은 당시 독립운동과 진보 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일제에 휼병금과 같은 국방헌금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속시키고, 군자금 마련을 위한 차선책이었다고 판단된다. 1937년∼1938년 무렵, 일제의 지독한 강압으로 사상전향을 하여 친일 시국 강연회에 동원된 인사들이 있다. 이 가운데는 광복 후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은 분들도 있다. 소위 선항일, 후친일이다. 당시 이분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시국강연회에 동원되어 연사로 나섰을 것이다. 어쨌던 친일 시국 강연회 연사명단에도 장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제는 장식의 휼병금과 신문 보도의 대가로 약국의 운영을 보장하고, 시국강연회 연사동원 등에서 제외시켜 준 게 아닐까? 라는 추측을 해본다. 일제가 이런 선의를 제공했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다. 이런 첫째 이유는 휼병금의 제출 이후 작성된 총독부의 강원도 치안 상황 보고에 여전히 특별 요시찰 대상으로 확인된 점이다. 두 번째는 선일약국을 통하여 지속적인 군자금 조달책임자였을 가능성 때문이다.
장식은 일제 경찰에 끝까지 울진 군내 군자금 조달 등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평생을 일제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특별 요시찰 인물이었다.
광복 이후 신문에 보도된 국방헌금 문제로 장식은 반민족특위의 처벌 대상이 되었지만 바로 기소유예 처리되었다. 필자는 장식의 일대를 조사하면서 ‘옥의 티’라고 느낀 국방헌금(휼병금) 문제로 그의 공적을 조명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을까 반신반의(半信半疑)하였다. 하지만 후손들이 먼저 밝힌 당당한 증언과 자료 제시 등으로 계속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식에 대한 조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조사한 사실만으로도 그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이 국가에서 인정받아 우리 독립운동사에 당당하게 기록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장식 선생의 묘갈문에 울진유지들이 헌사 한 시 구절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는다.
살아서 만 가지를 가슴에 안고 세상을 떠나
선문(仙門)으로 들어가셨네.
(生昏胸包萬彙謝入仙門)
죽었어도 죽지 아니한 것은 나라 사랑하는
혼령일세
(死而不死愛國之魂)
착한 것으로 인한 복이 후세에 있어서
자손이 뜰에 가득 하누나.
(穀以在後滿庭兒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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