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후의『격암선생유전』을 통해서 본 남사고 행적

기사입력 2022.04.2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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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암 선생 유적지 일부(근남면 수곡리)

 

남사고(南師古, 1509-1571)와 관련한 옛글은 현재 임유휴(任有後, 1601-1673)의 『격암선생유전格庵先生遺傳』,홍만종(洪萬宗, 1643-1725)의 『남사고전南師古傳』,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남사고南師古』이다. 이 3편은 남사고(南師古,1509-1571)와 관련한 옛글은 현재 임유휴(任有後, 1601-1673)의 『격암선생유전格庵先生遺傳』,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의 『남사고전南師古傳』,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남사고南師古』이다. 이 3편은 모두 한문체로 격암 선생에 대한 전기성격의 글이다. 

 

홍만종의 『남사고전』은 격암 선생의 특이한 행적에 관한 글이다. 성해응의 『남사고』는 이괄의 난을 예언한 남사고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언급하였다. 홍만종과 성해응의 글은 임유후의 글보다 짧은 산문이다. 임유후의 『격암선생유전』은 남사고(이하 격암 선생)의 일대기를 제자 임천(臨川)남세영(南世英)을 직접 만나 그의 말을 준거로 대체로 소상하게 기술했다. 여기에 인용한 해제 글은 2016년 울진문화원, 한국수력원자력(주)한울원자력본부에서 발행한 『울진고문헌자료집성』에서 인용했음을 밝힌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조선조 16세기 울진에서 은둔하며 시인 묵객으로 20여 년간 살았던 임유후가 쓴 전기문인 『격암선생유전』을 통해 그의 일생의 단면을 유추하고자 한다. 먼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남사고와 임유후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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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암 생가(격암 유적지, 근남면 수곡리) - 좌, 격암 기념관 -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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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암 기념관 - 좌, 남사고 초상화(격암 선생 기념관 내) - 우


격암 남사고 관련 유적지는 여섯 곳이 있다. 격암이 태어난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설두, 눈금)다. 그곳에는 남사고 생가, 자동서원, 수남정사, 치격사, 기념관 등을 공원화하여 최근 조성해 놓았다. 이 유적지는 경북북부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으로 2006년 12월에 준공되었고, 치격사, 자동서원 등은 2007년에 건립하였다. 다음으로 1894년에 창건한 양현사이다.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 화방동에 있는 양현사(尙賢祠)에 남사고(南師古), 남계명(南季明)과 함께 배향되었다. 양현사는 이후 1959년에 중건하여 고려 중랑장 남영번을 함께 봉안하고 상현사로 개칭하였다. 이 밖에도 주천대에서 잠시 살았다. 남수산 아래로 이사하여 살았다. 남수산 아래가 현재의 매화리 근처인지, 구산3리 안잘미 동네인지 분명치 않다. 안잘미에는 그의 묘소가 있다. 남수산 중턱에는 그가 자주 올라가 심신을 수련했다는 학문터가 있다. 행곡리(구미동)에는 그의 후손 남도원씨가 관리하는 <격암선생 별묘>가 있다. 


격암 남사고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로 본관은 영양이며, 자는 경원(景元), 경초(景初), 복초(復初)라 했으며, 대학(大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호를 격암(格菴)이라 했다. 남사고는 조선 중종 4년(1509) 경북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에서 남희백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독서하기를 좋아하였고, 뜻을 확고히 하여 재물을 구차하게 얻고자 하지 않았다. 평생 ‘소학(小學)’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확고하게 실천하였다. 수차례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번번이 낙방하였으며 후에 자연 속에서 천문지리와 복술을 연구하는 정열을 기울였다. 명종 때에 효렴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1564년(명종 19년) 종 9품의 사직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곧바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학문에 몰두하였다. 선조 때에 1570년(선조 3년) 종 6품 관상감 천문 교수로 다시 발탁되어 재직 시 자신의 소임을 다 하였다. 1571년(선조 4년)에 한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세상 사람들은 그를 해동강절이라고 했다.

격암 선생 유적지는 2007년 완공되었으며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387-2에 잘 정비되어 있다. 


임유후(任有後, 1601~1673)의) 자는 孝伯, 호는 萬休, 시호는 貞僖, 본관은 豊川이다. 1628년 동생 임지후가 반란을 음모하다가 발각되어 숙부인 예조판서 임치정과 그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자 사직했다. 이 해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울진 행곡 주천대 옆에 집을 짓고 20여 년간 살았다.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구미 마을의 고산 서원에 배향되었다. 그는 울진 행곡 주천대에 우거하면서 울진 유학 진작에 힘써 유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 뒤 복권되어 예조참의, 경기감사,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저서로 만휴당집, 휴와야담이 있다.

 

『격암 선생 유전』의 주요 내용


임유후는 격암 선생의 인척이자 애제자인 임천 남세영과 둘레의 父老(둘레 노인들을 칭함) 입을 빌려 격암 선생의 생전 평소 행동과 덕을 칭송하고 있다. 주요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필자가 약간 부연했다.

  

■ 독학으로 과거급제를 향한 집념

격암 선생은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름 높은 선생에게서 가르침 받은 바도 없고, 학우도 없었다. 오로지 독학으로 공부해서 과거 시험에 응시했던 가난한 유생이었다. 하지만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했다. 


『격암 선생은 집이 가난해서 스승을 두지 못해 독학으로 진리의 근원과 우주의 법칙을 깊이 관찰하고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그 지극함을 알았다. 이것을 격물치지라 했다.』    

여기에서 남사고의 호가 대학의 격물치지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大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빌려와 호(號)를 격암(格庵)이라 하였는데, 『사물의 지극한 곳까지 이치를 궁리하겠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격암 선생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 스승을 두지 못해 독학했다고 하나 최근에 펴낸 남지심의 평전소설 『격암 남사고』에는 이와 다르다. 이 소설에는 당시 성균관 교수를 역임한 정석명에게 공부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격암의 스승으로 등장하고 있다.


『소학을 언제나 책상에 두고 있었다. 만년에는 더욱 생각을 깊게 하여 완역도를 직접 저술하여 자리에 걸어두고 천도를 즐겼다.』


소학은 송나라의 유자징이 8세 안팎의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1187년에 편찬한 수양서로서 요즘으로 치면 도덕 교과서이다. 내용은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효자의 사적 등을 모아 놓았다. 

『공은 처음 설두에 살다가 남수산 아래로 옮겨 살았다. 몇 칸의 와실은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했다. 뜨락은 쓸쓸하였고, 다 떨어진 거적을 문에 매달아 놓더라도 즐거워하며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일찍이 구대의 경관을 좋아하여 날마다 관동들과 오가면서 그 아래에 우거하였다. 구대(龜臺)는 바로 지금 주천대(酒泉臺)이고, 공이 명명한 것이다.』

『얼마 뒤 그곳(주천대)에 오두막집 하나를 짓고는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 속세에 대한 잡념을 떨쳐버리고 태극의 오묘한 원리에 잠심하였다.』


구대(龜臺)는 현 구미동을 둘러싼 산의 형상이 거북 형상이라 이름한 것이다. 처음 이름은 수천대라고 전해온다. 주천대라는 명칭은 임유후가 지은 것이다. 이 무렵 격암 선생이 한양에서 사직참봉 벼슬살이를 마치고 울진으로 내려와 현 행곡리 구미동에 살았다. 이후 격암 선생은 선조 초 다시 관상감 벼슬이 제수되어 한양으로 올라갔다. 

 

조선조 남성들의 과거 급제는 최고 출세이자 말 그대로 입신양명(立身揚名)이었다. 과거 급제는 집안의 명예를 드높이고 개인의 영예는 물론 남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는 봉건왕조 시대 지배계급으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자 신분 상승의 발판이었다. 왜냐면 과거를 통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과 함께 그 결과에 따라 많은 특권(特權)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특권이란 생진시에 급제하여 그 증서인 백패(白牌)만 받으면 살인죄(殺人罪) 이외의 범죄(犯罪)에 체포(逮捕)나 감금(監禁)을 면하였다. 또 대과(大科)에 급제한 사람이 있는 동네 앞에는 소도(蘇塗)를 높이 세워 그 마을을 지나는 사람들이 경의(敬意)를 표하도록 하였으며,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은 말에서 내리게 하여 지나가게 하였다고 한다. 이를테면 대과급제는 요즘으로 치면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등에 합격하여 고급 관료로 임용되는 격이다. 물론 과거와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초연하게 생각하고 일생을 초야에 묻혀 제자양성과 인격 수양으로 보낸 선비들도 있었으나, 유학을 공부한 선비들이면 일생에 한 번쯤 응시하는 것이 필수로 여겼다. 남사고는 1564년(명종 19) 최운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구에 과거를 보러 떠나려던 차인데 가는 길에 찾아뵙겠다고 했다. 이것으로 볼 때 그가 53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여전히 과거에 집착했음을 알 수 있다. 격암 선생도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고자 도모했다. 『격암선생유전』에 과거 시험을 두고 격암 선생과 제자 남세영의 대화가 흥미롭다. 일화에는 과거 시험에 대한 격암 선생의 복잡한 심경을 엿볼 수 있다.


『격암 선생도 일찍이 과거 공부를 하여 세상일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였고, 그래서 더욱 깊이 자취를 숨기고 음풍농월하였다.』

『괴롭구나. 또 이렇게 이(利)하기도 하고 불리하기도 한 길을 가봐야 하구나』

선생님께서 역리에 밝으시니 이로우며 나가시고 불리하면 가시지 않으면 되는데 무엇을 그렇게 초조해하십니까? 공이 웃으시며 말하기를

『내가 성공할 수도 있고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영이 묻기를

『역리는 하나뿐인데 어찌하여 이룰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할 수도 있는 두 가지 이치가 있을 수 있습니까?』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내가 일찍이 조에서 운명을 추산하여 보았더니 비록 공명객이 되지 못하지만,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놀라게 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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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서원 - 좌, 치격사 -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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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남정사 - 좌, 유적지 홍살문 - 우


■ 격암 선생이 옮겨 살았던 거처이다

격암 선생은 ①설두(현 근남면 수곡리 설두)에서 태어났다.→ ②남수산 아래로 옮겼다. 돌을 쌓아 층계가 되는 섬돌을 만들고, 그 위에 오두막집을 지었다.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를 둘레에 심었다.→ 선조 조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참봉직 벼슬을 하며 ③한양에서 거주했다.→ 다시 울진 ④주천대(현 구미동)에 거주했다.→ 선조 조에 다시 천문 교수에 천거되어 ⑤한양으로 옮겨 살다가 사망했다. 격암 묘소는 현 근남면 구산3리(안잘미)에 있다. 


격암 선생이 거처를 여러 번 옮긴 것으로 보아 그의 삶이 그다지 안정적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설두(현 근남 수곡리 누금동네)는 격암 선생이 성장하고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이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남수산 아래에서는 가난했지만, 집 주위에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를 심고, 술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기며 유유자적했음을 알 수 있다.

 

격암 선생의 남수산 아래에 거처에 대해 후손인 남도원 씨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②매화리 남수산 줄기가 구산3리 안잘미까지 뻗어 나가기에 현 구산3리(안잘미 동네)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기성 사동의 해월 황여일(1556년-1622년)이 만년에 쓴 『주효자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효자 주경안이 남격암이 성산(城山) 아래 초가를 지어 머물며 문을 닫고 독서한다.’는 말을 듣고 격암에게 배우기를 청했다.』는 것이다. 성산은 구산3리(안잘미)를 말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격암 선생의 거처는 한때 구산 3리(안잘미)로도 비정할 수 있겠다. 남도원 씨는 현재 근남면 행곡리 구미에 거주하며, 격암 선생에 대한 봉제사(奉祭祀)는 물론 별묘와 묘소 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 대인의 기상과 배려정신

『공은 어릴 때부터 의연하여 대인의 기상이 있었다. 평해의 황응청과 벗으로 교유하였다. 하루는 함께 외출하였다. 자색 허리띠를 찬 칼을 찬 사람이 길에 버려져 있었으나 공은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아마 이것은 자색 허리띠에 넣은 칼집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결국 세속의 하찮은 재물 따위는 선비가 취할 도리가 아님을 말한다.』

『공은 천성이 고결하여 티끌만큼도 남의 것을 취하지 않았고 비록 친구들이 주는 것이라도 함부로 받지 않았다.』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공은 더욱 곤궁하였다. 봉급 대부분은 가난한 친족들에게 어떤 때는 하루가 지나도록 굴뚝에 연기가 보이지 않지만, 오히려 태연하였다.』

이를 보아 격암 선생은 가난했지만, 인간의 도리를 지키고 청빈함을 지조로 삼고 자기보다 불우한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가진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 격암은 애주가였다.

『간혹 술을 싣고 찾아오면 사양하지 않았다. 부인이 술 좋아하는 공을 위하여 힘들게 술을 빚어 겨우 마실 만하면, 곧 술을 걸려 술동이에 옮겨 담고는 그 속에 표주박을 띄우고 자작하였다. 이따금 집 앞을 지나는 사람이 있으면 불러서 같이 마시는데 술동이를 비우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격암 선생의 벼슬

격암 선생의 가문은 영의공 남민(南敏)을 시조로 한 울진의 재지사족으로 증조부인 남호(南顥)는 조선 초에 만호(萬戶) 벼슬을 했다. 그러나 조부인 남구주(南九疇)와 부친 남희백(南希伯)이 관직에 오르지 못하면서 남사고 대에는 한미한 가문에 머물렀다. 경제적 사정도 궁핍했던 것으로 보인다. 

『격암선생유전』에는 『선생의 벼슬은 만년에 효렴(품행이 효성스럽고 청렴한 사람)으로 벼슬길에 천거되어 명종조에는 사직참봉과 천문학 교수를 역임하였다.』라고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사직참봉과 관상교수는 종9품에 해당하는 미관말직이다. 두 번의 벼슬길에 나아간 것이다. 참봉에 나간 시기를 어떤 이는 선조대로 보고 있어 정확하지 않다. 그 뒤 선조 대에 천문 교수(관상감)를 재직하던 중 1571년(선조 4) 12월 3일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병으로 사망했다. 천문교수(관상감)는 아마 선생이 천문과 역리에 밝은 점으로 미루어 천거되었을 것이다. 


■격암 선생의 예지력 

예지(豫知)의 사전적 의미는 이론적으로는 내다볼 수 없다고 생각되는 앞날의 일을 미리 지각하는 초감각적인 지각을 가리킨다. 예견(豫見)이라고도 하며 이에 대한 능력을 예지력(豫知力)이라 한다. 이러한 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을 가리켜 흔히 이인(異人, a man of unusual ability)이라 했다. 임유후도 격암 선생을 두고 이인(異人)이라 했다. 요즘 흔히 예언가라고도한다.


『아! 격암 남공 같은 이는 참으로 이인이다. 혹시 한유(韓愈)가 말하는 괴기(魁奇)하여 충신과 재덕을 두루 겸비하신 일민(逸民)이란 말인가. 세상 사람들이 공을 색은행괴(索隱行怪)하는 것으로 공의 행적을 의심하고 있느니, 이 사람들이 어찌 공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옛날 촉나라에 엄군평(嚴君平)은 성도(成都) 시장에서 점을 쳐 주었다. 사악하고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물으면 시귀(蓍龜)에 의하여 이해득실을 말하였고, 신하 된 사람에게는 충성을 강조하고, 자식 된 사람에게는 효도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공도 또한 그와 비슷하다.』 

『격암 선생이 소시에 풍악산에 놀러 갔다가 신선과 같은 중한테 도서 3권을 받았다는 괴이한 일이라고 했다. 그 신승이 정희량이라고 했다.』 

정희랑(1469-1502년)은 조선의 문신으로 김종직의 문인이다. 무오사화 때 사초 문제로 탄핵을 받아 의주로 가 귀양살이를 했다. 복권 후 행방불명이 된 인물이다. 이로 보아 격암 선생은 젊은 시절, 훌륭한 스승을 찾아 유람한 것 같다. 아니면 정희량을 마음속에 스승으로 둔 것일까?

『사기 노자열전에 보면 주나라 태사 담이 주와 진의 이합을 말한 것과 송나라 소강절이 선천수로써 추산한 일은 그릇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사자숙어인 색은행괴(索隱行怪)이다. 이 용어는 중용에 나오는 말로 『숨겨진 것을 찾고 괴이한 것을 행하는 것』을 뜻한다. 시귀(蓍龜)는 중국에서 톱풀과 거북 등딱지로 앞일을 미리 알아내기 위해 점을 치던 것을 말한다.

 

임유후는 결국 격암 선생을 두고 당시 세상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일을 벌이는 인물로 부정 평가하고 있는 세태를 꼬집는 한편 격암 선생을 엄군평 등의 행위에 비견하여 긍정 평가하고 있다. 엄군평은 중국 후한 시절, 예지력이 뛰어나 점쟁이의 전설이 된 인물이다. 그는 성도(成都)에서 점쟁이 노릇을 하면서 사람들을 충효와 신의로 이끌었다. 그는 하루에 돈 100전을 벌면 가게 문을 닫고 노자(老子)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따라서 임유후가 격암 선생을 두둔하면서 엄군평에 빗댄 것은 점술로 사람을 현혹하기보다 윤리적 행동으로 이끈 도덕적 교사의 일면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는 성리학을 금과옥조로 하는 조선조 선비들은 인간과 세상의 일을 점복 따위로 예견하는 행위를 혹세무민하는 사술(詐術) 또는 술수라고 생각해 기피하였는데, 임유후의 평가는 의외이다. 그것은 격암 선생이 점술 따위가 아닌 합리적 사유로 천문 역리에 통달한 유학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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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사(죽변면 화성리 격암 선생 사당) - 좌, 격암 선생 별묘(근남면 행곡리 구미동) - 우


■ 격암 선생의 명예언에는 어떤 것이 있었나?

앞서 이야기했지만, 정확한 예지력 또는 예언가적 초감각 능력이 뛰어난 기질의 사람을 두고 흔히 이인 또는 예언가 등으로 이름했다. 격암 선생을 두고 후세 사람들은 서양의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에 비견하여 동양의 예언가라고도 한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6세기 프랑스 사람이다. 그는 자기 죽음이나 후원자의 죽음 등을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등장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총격 테러, 보스니아 전쟁, 9.11 테러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사건들을 예언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격암선생유전』에서 격암 선생의 예지력에 관하여 임휴후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 임진왜란을 예언, 피난처(십승지)로 영주와 풍기를 말하다.

『공이 말하기를 오늘 밤 일본의 섬에 간웅이 태어나는데 이 아이가 자라면 우리나라가 먼저 화를 입을 것이다.』 

『공이 영주에 사는 박록(朴麓, 1542-1632)과 소백산에 올라가서 말하기를 일본 왜놈들이 辰年과 巳年에 난을 일으켜 국왕이 피난하는 등 나라가 위태로움을 예언하자, 그는 공에게 어느 곳이 피난 할 수 있는 복지냐고 하자 영주와 풍기라고 했다. 모두 그 말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


역시 용해인 임진년(선조 25)에 왜적이 쳐들어와서 격암 선생의 예언이 꼭 맞아떨어졌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유재란까지 7여 간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전 국토가 유린 되었다. 선조와 세자는 평양, 의주로 피난하였다. 아마 피난처인 영주, 풍기설에서 정감록에 등장하는 이른바 십승지설(十勝地·최고의 피란지에 관한 주장, 복지)이 나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2. 문정왕후의 죽음을 예언했다.

『격암선생유전』의 내용이다.

『내가 들은 바로는 문정왕후 말년에 중 보우의 횡포가 심했는데 소를 올린 유생들조차 견책을 받게 되어 사림들이 걱정하였다. 중국의 천자가 오랫동안 등봉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천하에 마귀 같은 괴이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말년에 천지가 동쪽에 봉하면 저절로 우환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했다. 다음 해에 문정후가 승하하여 태릉에 장사지냈으니,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여기에서 등봉(登封)이란 태산에 올라 봉선(封禪 )하는 것으로 제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일을 뜻한다. 이것은 중국의 태자에 빗대어 문정왕후의 죽음이 곧 정국안정이 올 것을 예언한 거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격암 선생은 중종 당시 훈척세력(공신, 외척)들의 국정농단을 비판하고 있다.

명종 19년(1564) 격암 선생의 예언 후 이듬해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사망해 태릉(泰陵)에 장사지냈다는 것이다. 중정 왕후는 조선 11대 중종의 왕비로 명종의 어머니이다.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그는 동생인 윤형원 등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주어 조정을 좌지우지한 인물이다. 대윤인 윤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중 보우를 신임하여 선교양종을 부활시키고 승과·도첩제를 도입하고, 중종의 능을 보우가 주지로 있는 봉은사(奉恩寺)로 이장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3. 지명을 破字로 해석해 동서분당을 예고했다.

『동쪽에 駱峰이 있으니 말이 서로 각각 달리는 것이고, 서쪽에 鞍峴이 있으니 혁신을 한뒤에 안정을 유지할 것이다. 얼마 뒤에 동인은 남인과 소북과 대북이 되었고, 서인의 뜻을 얻으려면 반드시 국면에 변화가 있었으며, 금상 계해년(1623:인조반정)에 이르러 더욱 징험하였다.』 


여기서 駱峰(낙봉)의 駱字는 馬字와 各字가 합쳐진 글자이고, 鞍峴(안현)은 革字와 安字가 합쳐진 글이다. 격암 선생은 이러한 낙봉과 안현의 지명에서 破字를 이용해 당시 정치 권력의  기상도를 예견하기도 했다. 학자들은 조선조 붕당의 시작은 조선 선조 대부터 발로되었다고 보고 있다.


4. 선조의 등극을 예견했다.

공이 하루는 손님과 함께 사직 재실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손님에게 내 손가락 가는 곳을 주목해보라 하므로 그가 지목한 곳에 서기가 서린 덕흥군(선조의 생부) 집이었다고 한다. 중종의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이다. 하성군은 중종의 손자이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즉위하였다. 그가 곧 선조였다. 다시 말해 『지금 사직동을 둘러보니 왕기(王氣)가 서려 거기서 임금이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한 것이 적중했다. 


5. 격암 선생, 자기 죽음을 예언하다.

격암 선생이 자기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하는 여기에는 2가지 설이 전한다. 

하나는 격암 선생과 함께 근무했던 천문관(星官)이었던 이번신이 평소 알고 지내던 재상을 찾아가 천상을 살펴보니 자기(이번신)의 수명이 다 되어 작별을 고하는 인사를 했다. 다시 말해 자기가 죽을 운명이라 충청도 고향 가기 전에 죽을 운명이라는 것. 하지만 이번신은 며칠 뒤에 다시 『재상을 찾아와 남사고가 죽었다고 하면서 자기가 관측한 운세가 잘못된 판단을 했다.』라고 했다. 천문관으로서 판단의 오류를 인정한 것이다.

또 하나는 홍만종의 남사고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격암 선생이 만년에 천문학 교수로서 서울에 있을 때 태사성(太史星· 천문담당 벼슬을 상징하는 별) 무리가 지자 관상감정 이번신의 나이가 늙었으므로 자기가 곧 죽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남사고가 웃으면서 따로 해당될 자가 있다 하였다. 두어 달 후 남사고가 과연 병들어서 죽었다.』고 기록했다.

울진에는 이번신의 이 같은 행위를 두고 이번신아, 바보야 하고 우스개 소리를 한다. 이 우스개는 어떤 일에 잘못 판단하거나 어리석게 행동한 것을 두고 바보(번신:병신)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때 쓰이는 울진 방언이기도 하다. (남문열 전울진문화원장이 세간의 그 유래를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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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년 된 고욤나무(격암 선생 유적지)와 금강소나무009.jpg

격암 선생 묘소(근남면 구산리(안잘미)) - 좌, 격암 선생 묘소에서 후손 남문열, 남도원씨 - 우

 

■격암 선생과 교유한 인사들

울진인으로 평해의 대해 황응청이 벗으로 나온다. 황응청은 해월 황여일의 숙부로 학식 높고 현감 벼슬을 했다. 영주에 사는 박록(朴漉, 1542-1632)과 친했다. 그와는 소백산에 올라가 동남쪽의 이상한 기운을 보고 임진왜란을 예언하기도 했다. 

『강릉 부사로 부임한 봉래 양사언 선생이 공을 초청하여 함께 역리를 토론하였는데, 천과 인의 관계와 귀와 신의 정상 등에 있어서 들어보지 못한 학설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절을 하고 말하기를 내가 지금에 와서야 선생이 신인(神人)임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대우하기를 매우 삼갔다. 매번 편지로 안부를 물을 때면 간혹 사씨라고도 쓰고 간혹 자동(紫洞)선생이라고 썼으니 그 공경히 예우함이 이와 같았다.』고 『격암선생유전』에 기술되었다.


이와는 다르지만 최근 남지심의 평전소설『격암 남사고』에는 16세기 비주류이지만, 당대의 일가를 이룬 명사들이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12장, 한양에서의 새로운 교류)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로는 『박지화, 토정, 정작, 허준, 이건』 등이다. 이들은 유학자이면서 사상적으로 유불선을 넘나들면서 교유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 이같이 격암 선생은 당대의 학문적으로 이름 높은 명사들과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울진 지역에서는 황응청, 황여일, 주경안, 윤시형 등 유학자들과 교유하였다.


■격암 선생의 대표작 해옥첨주부

최근 격암 선생 연구자들에 의하면 『동상유초東床遺草』,『임광기林廣記』,『천자문주해天字文註解』가 있었으며 앞서 말한 그림으로는 음양의 이치를 궁구하는 완역도(玩易圖)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임유후의 『격암선생유전』에는 『공은 자신이 스스로 숨겨서 이름을 후세에 전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 기상(機祥)과 대이(災異)에 관한 학설이 마침내 인몰(湮沒)하여 전하지 못하니 애석할 뿐이다.라고 하였으며, 완역도를 직접 저술하여 걸어두고 천도를 즐겼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격암선생의 시문과 관련하여 한문학 대가인 울진 출신의 덕초 전광홍 전 성균관 학술원 교수에 따르면 『몇 편의 시와 문』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 외 것은 모두 정체불명의 위서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하지만 다행히 격암 선생의 방후손인 무실재 남진영 선생이 격암의 명성이 잡되게 회자 되는 것을 민망하게 생각한 나머지 격암에 관한 기록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였다고 한다. 이 가운데 하나가 해옥첨주부(海屋添籌賦)이다. 이 부(賦)는 육지와 바다를 대비하여 음과 양을 설명하는 것인데 육지의 뿌리라고 하는 곤륜산(崑崙山)을 양의 대표로 하여 곤륜도사(崑崙道士)를 등장시켰고, 바다는 영주(瀛州)섬을 음의 대표로 하여 영해진인(瀛海眞人)을 등장해 놓았다. 그래서 천지만물의 이치를 설명하고 비유하고 있으며, 그 밑바닥에는 도가사상이 깔려 있는 작품이나 비판적이다. 하도와 낙서야말로 진리라고 주장하였다. 격암 선생은 해옥첨주부를 과거 시험 답안지로 제출했으니 당시 유학 일변도의 가치관을 가진 국유속사(局儒俗士)들이나 주역에 몰이해한 채점 시관들에게 보나마나 불합격처리 되었음은 불문가지다. 

 

해옥첨주부는 요즈음으로 보면 황당무계한 공상과학 소설 같지만, 한편으로는 격암 선생이 주역에 관한 방대무애한 지식을 마음껏 펼쳐놓고, 주인공인 곤륜도사의 입을 빌려 세속에 초연하여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이상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덕초 선생은 『이 첨주부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선생의 천부적인 지(智)와 용(勇)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했으며, 『적어도 이 분야만은 생이지지(生而知之) 할 수 있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사람이 최상』이라는 공자(孔子)의 말처럼, 실로 천문역리에 달통한 격암 선생의 천부적 재능을 격찬하고 있다.


■ 『격암선생유전』에는 없는 『구천십장』과 최근 『위서 논란』

필자도 어릴 때 격암 선생이 부친묘를 명당복지에 쓰려고 아홉 번 옮겼다는 구천십장(九遷十葬) 이야기 함께 그에 대한 여러 설화도 들었다. 대부분 신기한 도술을 부린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러한 구천십장 설화는 윤색되어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남사고가 난두산(남수산을 말함)아래 집에 가만히 앉아서 도술을 부려 농부가 울진시장에 팔러 가는 참외를 훔쳐먹었다. 시장에 간 농부가 막상 지게를 보니 바숙에 자갈만 가득하더라. 또는 꾸리재 넘어 친정 가는 새댁의 떡을 훔쳐먹었다든가, 남수산 꼭대기나 바리재에 앉아 낚시를 던져 망양정 앞바다 고기를 낚았다』는 등의 이야기다. 

한편 남사고가 풍수에 능한 이야기도 들었다. 『남사고가 밤마다 서당에서 공부 마치고 집에 올 때마다, 산모퉁이에 예쁜 여인이 나타나 함께 놀았다. 남사고는 허깨비에 홀린 듯했다. 어느 날 서당 훈장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선생은 오늘 저녁에 만나 입 맞추기를 할 때 구슬 하나가 너 입에 들어올 것이다. 너는 그 구슬을 삼키지 말고 하늘을 보고 뱉어라. 그러면 너의 눈이 확 뜨이고 하늘이 환해질 것이다.

남사고는 그날 저녁 입에 들어온 구슬을 그만 땅을 보고 뱉었다. 그러자 그의 눈에는 땅속이 환하게 비췄다. 그와 동시에 여인은 여우가 되어 달아났다고 한다.』 만약 남사고가 하늘에다 대고 구슬을 뱉었다면 천문에 능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다. 


격암 선생 관련한 많은 이야기는 사후 전국에 퍼져 윤색되어 지금까지 문헌이나 구전해오고 있다. 이렇듯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격암 선생의 명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다음으로 구천십장(九遷十葬)에 관한 이야기다. 부친 남희백묘는 현재 수곡리 대현산(일명 한티재)에 있다. 한티재는 불영사로 가는 옛길이다. 그 재를 넘어가면 금강송면 아래 하원이다.

 

격암 선생이 부친묘를 아홉 번 옮겨 열 번째 이곳에 썼는데 그 자리가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飛龍山川(또는 九龍爭珠)인 명당으로 알고 썼다. 그런데 봉분 후에 그 지형 지세가 마른 뱀이 나무에 걸려 있는 고사괘수(枯蛇掛樹)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풍수적으로 생룡이 아닌 사룡이었다는 것, 따라서 격암 선생이 구천통곡(九遷痛哭)을 했다는 풍수설화이다. 이 내용은 그야말로 구전된 설화일 뿐이다. 실제로 두 번 옮겼다는 이천삼장(二遷三葬)이 사실이다. 남희백 묘비에도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남희백의 최초 묘소 위치는 아직 의문이다.

 

또 하나의 설화는 시집간 격암 선생 딸이 윤씨 집안에 시집을 갔는데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의 묘터가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그 명당자리를 빼앗아 시아버지를 그 자리에 모셔 친정을 잘되게 하려는 욕심에 밤에 몰래 물을 퍼다 부어 묘터를 흉한 터로 만들었다고 한다. 결국, 격암 선생 묘를 다른 데 썼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것이 탄로 나서 사돈끼리 반목했다는 설화도 전해온다. 그래서 이 동네 앞에는 내가 흘렀는데 서로 반목하여 남가 다리, 윤가 다리가 따로 만들어 건너다녔다고 한다. 이 동네는 매화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하지만 설화일 뿐이다.

 

이러한 풍수 설화는 조상의 음덕을 빌어 현실의 고난을 벗어나려는 백성들의 간절한 소망이 풍수술과 결합 되어 나타난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위 설화에 대해 후손 남도원씨는 사실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격암 선생은 자식을 2남(응진,귀진)과 1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이 일찍 죽어 후사가 없다고 한다. 딸은 남편이 영양 남씨인 『남백년』한테 시집을 갔다고 한다. 확인 결과 『남씨대동보』에는 격암 선생의 사위가 남백년이다. 그래서 줄곧 외손 봉사를 했다고 한다. 윤씨 집안으로 출가했다는 것은 허구다.


다음으로 격암 선생이 저술하지 않는 위서(격암유록) 논란이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격암 선생의 저술은 남아 있지 않으며 최근 등장한 격암유록, 남사고비결 등 많은 책은 그의 이름을 빌려 가탁한 것이다.』 (격암 남사고와 조선중기 유학의 흐름, 성균관 한림원교수 임옥균, 2012, 제7회 경북역사인물학술발표회, 한국문화원연합회경상북도지회)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많은 기록이 아무 여과 없이 국중에는 물론이고 국외에까지 전파되어 있는가 하면 사이비 종교와 감여가, 점술가, 예언가 등등이 잡다한 문건들을 조작하여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라고 비판한다. (격암 남선생의 해옥첨주부, 격암 남선생 치격사 봉안식, 전 성균관 학술원 교수 전광홍, 2018)

 

격암 십승지론은 정감록에 등장하여 조선 후기 사회불만층이나 체제변혁을 꿈꾸는 세력들에게는 금과옥조로 이용되곤 했다. 더구나 최근 나온 『격암유록』은 1960년대 어느 신흥종교인이 신앙촌에서 격암이라는 이름을 빌러, 온갖 비결서, 성경 구절을 그럴듯하게 꿰맞추어 가짜 예언서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이 위서는 또 다른 필사자 손에 들어가 발간되어 세상에 퍼뜨렸으며, 심지어 이 위서가 국립중앙도서관까지 들어가 소장되었다는 것이다. (2007 월간동아 제43회, 논픽션 당선작/허진구 작품집, 익명시대, 격암유록의 실체를 밝힌다. 2008, 도서출판 문중) 

 

필자도 허진구의 작품집 <익명시대>를 읽어 보았다. 이 논픽션의 작가 허진구의 아버지가 이 책을 최초로 신앙촌에 집필했다는 것이다. 이 격암유록을 분석한 전문가들은 격암유록이 위서라는 까닭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①격암유록에 사용된 한자어는 일본식 한자어가 많다. ②철학(哲學), 공산(共産), 원자(原子) 등 기껏해야 만들어진 지 100여 년 밖에 안 되는 한자 조어가 등장한다. ③책의 일부 내용이 성경을 그대로 전제하고 있다. 

어쨌든 이 책은 지금도 버젓이 서점에서 팔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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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씨 대동보(남사고 가계, 남문열 제공) - 좌, 허진구 작품집 익명시대 - 우

 

■격암 선생은 유학자인가, 예언가인가?

격암을 바라보는 관점과 인식에 따라 유학자인가, 아니면 예언가인가? 다를 수 있다.

격암 선생은 유학자이다. 왜냐하면, 평생을 과거 공부를 했고 과거 시험 과목이 유학 경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학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후학들에게 학문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근거를 들어 그를 유학자라고 인식했다.

 

반면에 일단의 유학자들은 그가 천문과 역학, 풍수지리에 정통하고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탁월한 점을 들어 예언가로 인식했다. 격암 선생이 해동의 강절로 불렸던 까닭은 중국 소옹처럼 역학을 바탕으로 한 탁월한 예지능력을 가진 예언가 측면도 내포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필자가 보기에는 둘 다 겸비한 유학자이자 도학자였다고 본다. 어쨌든 그는 16세기 조선조 울진의 궁벽한 곳에서 자기의 이상을 펼치기 위해 유학과 역학을 공부하고, 소학을 통한 자기 관리에 철저한 인물로서, 울진의 유학을 진작시킨 인물로서 현재에도 유림의 추앙을 받고 있다.


해월 황여일도 다음과 같은 시로 격암 선생을 추앙했다.


有憶南格菴

-격암을 생각하며


吾年十四至十八 내나이 열넷 열여덟에 이르러서야

慣見仙鄕長者風 선향에서 덕망높은 격암을 볼 수 있었지

月窟天根探獨樂 천근월굴을 혼자서 탐상하고

龜圖馬易玩상工 하도와 낙서를 더욱 깊이 공부했다네

皇喪謂至明朝後 명나라 황제의 죽음도 미리 알았고

壬亂知生乙卯中 임란의 위험도 앞서 근심하였지

近者妖星與白氣 요즘에 요성과 백기가 난무하는데

九原安得起吾公 공을 구원에서 살려왔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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