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물, 개드릅 이거 사소, 참 좋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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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멈춰 세운 시골 오일장
코로나가 세상을 2년여 멈춰 세웠다. 유사 이래 전지구적 멈춤이 최초가 아니겠는가? 하늘에는 비행기가 뜨지 않았고, 나라마다 입국이 철저히 제한되었다. 학교에는 아이들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거리두기로 만남이 꺼려졌고, 정다웠던 이웃집 방문마저 미덕이 아니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는 그림자 익명 시대가 되었다. 길거리에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 모임이나 행사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술집, 식당 등 소위 사람들이 소통과 즐거움을 나누던 공간은 장사가 부진해 문을 닫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은둔 아닌 은둔이 되다시피 했다. 재택근무가 많아졌고, 공개보다 비공개나 온라인상의 가상공간이 주를 이루고, 직접적 만남을 꺼렸다.
따라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행동거지가 조심스럽고 대폭 제한된 것이다. 그중 하나가 시골 오일장이다. 시골 장날은 직접적 만남과 소통, 교류의 장소이다. 흥겹고 정겨운 시골 장터가 코로나로 아예 폐업되다시피 멈춰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되었다. 지난 2년이 그랬다. 아직도 마스크 쓰기가 답답하지만 그나마 거리두기, 모임 제한 등이 풀려 일상 회복의 조짐이 보여서 다행이다. 그간 공포의 감염병으로 맹위를 떨치던 코로나도 이제 풍토병으로 자리 잡아 가는 모양새다.
울진은 초유의 대형산불로 어수선했다. 3월 10일에 산불이 진화되었다. 코로나로, 대형산불로 어려운 가운데 울진시장이 열렸다. 방역이 완화된 울진 장날(4월 27일)은 여기 말로 장이 섰다. 활기차다. 코로나로 폐쇄되다시피 했던 2년 전(2020년 4월)과는 대조적이다. 벌써 초여름 같은 날씨지만 예전의 장날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모처럼 장날다웠다. 울진군청 앞 울진군농협 시내버스 승강장에는 오전 8시에서 9시쯤에는 울진 장날에 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울진시장 들머리는 사방팔방이다. 차량과 사람들로 북적였다. 예전에는 주 통로가 울진교를 건너 현 성류 다방 골목길로 들어서거나 교육청 앞과 군청 쪽 사거리 골목이었다.
북쪽으로는 북면 죽변에서는 온양을 지나 울진초등학교 앞을 지나 울진고등학교로 들어서는 방향의 길이 주 통로였다. 동쪽으로는 현내는 연호정 쪽에서 공석과 말루는 작은 재를 넘어 울진장으로 들어왔다. 지금은 남쪽 읍남리에서 연호정 방향으로 도로가 개설되어 현대아파트를 지나 제2울진교를 통과, 울진시장으로 진입하고 있다.
60년대 울진극장이 있었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된 구 축협 건물터
울진시장 동쪽 대형 표지판
언제부턴가 시골 장날은 사람보다 차량이 많은 듯했다. 울진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울진 우시장이었던 공터가 일찌감치 주차장 시설로 변했고, 60년대 울진의 유일한 문화공간이었던 울진극장 터, 80년대 축협 건물이 들어서더니 축협은 7번 국도변으로 이전해갔다. 구 축협 건물터는 주차장이 되었다. 장터 사람들의 말로는 아직 그 용도가 정해지지 않아 임시로 주차장이 되었단다.
시골 오일장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냄새가 짙게 풍기고 인간미가 물씬 묻어나는 곳이었다. 울진에는 예전부터 울진, 죽변, 매화, 평해, 후포, 부구 등지에 장이 있었다. 울진장은 2, 7일, 후포,죽변장은 3, 8일, 부구는 1, 6일이었다. 지금은 많이 변했다. 장터가 바뀐 곳도 있다. 더구나 예전과 달리 시장 건물이나 유통환경이 180도로 바뀌었다. 7, 80년대 시골 읍면지역에 번성하던 수퍼나 구멍가게는 일제히 사라졌다. 이제는 우리나라 시골 어느 곳, 어느 때든지 각자가 필요한 소비 물품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업 등 유통업과 교통편의 발달 때문이다.
울진에도 대형마트 등 유통업체가 들어서서 시골 오일장이나 소매상들에겐 경쟁의 상대가 되고 있다. 지금은 그 자리를 대형 유통업체들이 점유해 가는 시대가 되었다. 인구 감소 등 지역소멸 시대에 시골 장날이 사라지는 것 같지만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옛 관행과 관습이란 사람들의 정서에 유지되는 경향 때문에 나들이 호기심, 기분전환, 정보교환 등 직접 만남과 교류의 장으로서 역할이 아직은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지역의 울진, 죽변, 후포, 부구 장날이 그나마 명맥을 이어나가 장날 풍경을 대체로 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오후 2, 3시쯤이면 파장이다. 예전처럼 해질녘까지 웅성 흥청대는 곳이 아니었다.
울진 산나물은 시큼한 바다 냄새가 난다
나물 골목 풍경
울진시장을 둘러보았다. 어느 아주머니가 할머니가 펼쳐놓은 개드럽을 보고
『개드럽이네, 어디 나물이요,
말래시더, (말래: 북면 상당리에 있는 동네)
한 두름 얼매요?
다 팔렸니더, 만 칠천 원이시더, 임자가 사놓고 갔니더!』
이미 마수거리를 한 물건이다. 마수거리란 장사를 시작하여 맨 처음으로 물건을 파는 일을 말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자기 나물 사라고 권한다.
『참나물, 개드럽, 이거 사시이소, 참 좋니더!』
그 아주머니는 그냥 훑어보고 지나가 버린다.
울진시장의 봄은 산나물로 온다. 온갖 나물들이 봄 햇살에 각각의 색깔을 드러낸다.
울진군청 쪽 도로 건너서 시장 들머리 도씨 칼국수집, 태수이용소, 구 축협 앞 골목에는 아침부터 시장에 온 할머니들이 나물들을 이지 가지 펼쳐놓고 앉았다. 이름을 물었다. 고사리, 참나물,개드럽, 참드럽, 취나물, 물개미추, 흰민들레, 바지쟁이나물, 물도오나물, 달랭갱이, 담배(잔대)싹, 미니리 등을 꼽다 또 뭐더라 하신다. 흰민들레, 담배싹, 영지버섯, 상황버섯은 약이란다. 80이 다 되어 보이는데 기억력이 대단하다. 산나물을 뜯으러 지금도 산과 들에 나가신단다. 저 산나물, 고사리 등 푸성귀 잎 하나하나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험산과 들에 나가 꺾고 뜯었을 것이다. 그 정성으로 읍내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맛나게 먹을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산나물과 관련하여 울진 출신 『남효선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산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지천으로 돋아나는 미역취가 뿜어대는 시큼한 바다냄새/ 산이 출렁거린다./꿀풀과 맥문동 자줏빛 눈부신 향내를/꿀벌들이 마구 넘나든다/괭이밥과 꽃다지가 온 산허리를 채우며/부른 봄을 풀어 놓는다/어쩌다 우리 매미들은 산중에 바다를 만들었을까/ 평생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꿈을 꾼겔까/넘쳐흐르는 바다를 몸속에 담그는 까닭일까/짭짤하면서도 훅 입안을 상쾌하게 훔치는/ 누이와 에미는/ 산중에 바다를 풀어놓고/ 깊고 깊은 자궁을 씻어낸 것일까/미역처럼 깊숙이 뿌리 내리고/온 바다를 유영하는 미역취를 뜯는 손가락에/ 푸른 바다 뚝뚝 달려온다 (남효선의 시 ‘산나물을 뜯는다’ 전문 시집『둘게삼』)
장꾼들에게 쑥떡을 돌리는 매화에서 온 어느 할머니
시장 한 견, 구 축협 건물 건너 앞 골목에서는 매화에 계신다는 어느 할머니가 쑥떡을 돌리신다. 무엇 때문에 돌리니껴, 옆에서 어느 분이 물으니 내가 전에 많이 얻어먹었으니 그 은공을 갚아야지 하면서 떡을 돌린다. 금방 떡방앗간에서 해왔단다. 김이 나는 듯하다. 훈훈한 시골 시장의 도타운 인정이 묻어나는 정겨운 풍경이다. 아까 나물을 팔던 할머니는 벌써 다 팔았는지 허리를 굽혀 군청 앞 시내버스 승강장 쪽으로 걸음을 뗀다. 물건도 다 팔았으니 걸음걸이가 가벼워 보인다.
강낭튀박 장사가 예전만 못해
울진군농협지부 옆 골목에서 강낭튀박 대신 나무 장사하는 모 사장님
추억의 뻥튀기 장사꾼을 찾았다. 농협 울진지부 골목이다. 필자 장날에 갔을 때는 과수 묘목을 팔고 있었다. 웬 과수 묘목을 파느냐고 했더니, 요즘은 코로나로 뻥튀기 장사가 잘 안된다고 한다. 10월에서 2월까지는 뻥튀기, 봄철에는 과수 묘목 장사, 여름에는 해수욕장에서 장사를 한단다. 이분은 인천이 고향이다. 울진에 온 지 벌써 20년여 년, 제2의 고향이란다. 울진이 바다가 있어서 좋고 인심도 괜찮아 몸 붙였다 한다. 그간 이것저것 장사하다 우연히 어느 분이 뻥튀기 장사를 해보라고 해서 했는데 잘되었다고 한다.
2009년도 울진 엑스포 행사장에서 장사를 했단다. 뻥튀기는 지금은 사양길이고, 사람들이 전통 과자를 잘 먹지 않고, 집에서 전통 과자 만드는 일도 힘들어서 잘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코로나로 장사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대화 도중에 뻥튀기 언제 하느냐는 어느 아주머니 물음에 5월 중순부터 장사한다고 대답한다. 잠시 후 대추나무를 사러 온 분을 반갑게 맞았다. 지금은 옥수수나 쌀과자 종류도 다양한 시대이다. 강낭 튀박은 당시 시골 아이들에겐 요긴한 간식거리였다. 쌀 튀박은 잘 먹어보지 못한 고급으로 유과 굽는 데 쓰였다. 뻥 하면 귀 막던 추억의 뻥튀기 장사가 잘되었으면 한다.
가난해서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전태만 어르신의 포장된 상자의 글씨체가 이채롭다
물건 배달나가는 전태만 어르신
울진시장에서 만난 전태만(83세) 어르신은 울진 대흥 깨밭골에서 태어나 행곡 함질로 이사와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선친은 농사를 지었으나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던 50년대 농촌 생활이었다. 중학교 진학조차 할 수 없는 형편에 선친은 자기만 울진중학교를 보냈다고 한다. 당시는 공납금을 미납하면 학교에서 눈총을 받던 시절이었다. 학교의 지침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공납금 미납 학생은 선배들에게 불려가 집단 구타를 당해도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부모님한테는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다고 한다. 당연히 마음이 불편하고 공부가 잘될 리 없었다. 돈으로 고통받는 것이 너무나 한스러웠다. 그런데다 자기만 중학교에 다녀 형들 보기도 미안했다. 안되겠다 싶어 1학년을 다니다 중퇴를 했다고 한다.
모처럼 필자에게 말하는 듯 전씨 어르신은 어두운 시절 이야기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중학교 중퇴 후 농사로는 도저히 생계가 어렵고, 장사에 나섰다고 한다. 청년 시절부터 울진시장에서 메리야스 옷가게부터 시작해 여러 장사를 하여 지금의 점포를 열어 자립했다고 한다.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울진읍에 집도 장만하고 자식들도 대학까지 공부시켰다고 한다.
전씨 어르신 점포가 두 칸으로 한 칸은 창고용인 것 같다. 창고 점포에 포장 상자에 물품명과 가격을 적어두었는데 매직으로 쓴 한글과 한자 글씨체가 반 명필이다. 그러한 전씨 어르신의 얼굴은 필자가 보기에 키도 크고 훤칠해 조선 선비 같은 풍채다. 필자가 한자 구절 해석과 뜻을 부탁했더니 바로 해주셨다.
그 내용은 부모 공경과 생활 규범에 관한 교훈적 사자성어였다.
그의 부인인 권모 여사가 대담 중 대화를 거든다. 결혼 초기 생활이 말도 못하게 어려웠다고 한다. 그야말로 단칸방에 취사도구는 냄비 하나로 시작한 살림이었다고 한다. 권모 여사는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시고, 사회봉사 활동에도 열성적인 분이다. 그러한 공을 인정받아 효부상까지 받은 분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 나가시는 전씨 어르신의 품새가 젊은이 못지않다고 않다고 말을 건네자, 이제는 그렇지 않다며 허허 웃으신다.
평생 건어물 장사하다.
평생 건어물 장사만 한 김성수 어르신
울진시장 어물전에서 건어물 장사만 60여 년을 했다는 김성수(87세) 어르신을 만났다. 어느 분한테 장사하면서 살아왔던 삶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더니 손사래를 치던 분이 있었지만, 이분은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대화를 나누기에 편안했다.
이 어르신은 군에 갔다 오자마자 동네에서 담배, 술 등을 파는 잡화로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결혼한 뒤에는 그곳에서 번 돈으로 울진에 점포를 열었다. 남해에서 멸치 등을 떼다가 울진 등지에서 주로 판매하고, 울진의 미역 등 건어물은 서울 가락시장 등지로 보내 판매했다고 한다. 자녀들은 일찌감치 당시 초등학교부터 서울로 전학시켰다고 한다. 부인은 자녀 뒷바라지로 서울에 거주하고, 자기는 울진에서 장사를 했다고 한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취로 일관해 오늘날까지 혼자 살다시피 한다고 한다.
『젊은 시절 내 인생 목표는 부모로서 아이들을 교육시켜 가난을 면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서울로 아이들을 모두 보냈니더, 초등학교부터 전학시켰어요. 내보고 사람들이 미쳤다 했니더. 서울까지 아이들 보낸다고. 그랬거나 말거나 나는 서울로 아이들을 보냈어요. 아들 둘, 딸 하나 모두 서울에서 초중고 대학을 나왔니더. 우리 아들 하나는 독일 베를린 대학과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에 유학했니더. 지금은 모두 공직에도 있고, 사업하고 살고 있니더, 돈도 벌 만큼 벌었니더. 모두 자녀 교육시키는 보람으로 살았지요』하며 미소 짓는다.
하지만 그의 얼굴과 손에는 평생을 고생한 흔적이 역력하다. 어쩌면 지난 세월 고생하며 자식들 공부시키고, 잘살고자 했던 우리 서민들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얼굴이 아니겠는가?
예전에는 새벽으로 1시에 일어나 물건을 떼러 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 한 3년 전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고생을 많이 했단다.
이 어르신의 고생담에서 한국인 특유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 상인으로서 성실함과 끈질김을 느낄 수 있었다.
울진시장에 주인 없는 가게도 있다?
젊은 최 사장이 운영하는 주인 없는 가게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꾸는 시대다. 그에 따른 상업활동도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온라인으로 생산자와 소비자 상행위 등 택배 문화가 성행하고, 주인 없는 가게, 점포도 생겨나고 있다. 시골 지역도 예외가 아니다. 소비자가 물건을 구매 바코드로 찍고, 카드로 결제하는 것, 24시간 영업으로 소비자는 있되 무주인 가게이다. 판매원을 두지 않아 인건비를 절약하는 이점이 있다. 울진장터, 어느 식료품 매장이다.
이 가게의 주인은 젊은 청년이다. 대담을 요청했는데 흔쾌히 응했다. 34세, 최정윤 사장, 상호는 ○○플래시? 상호가 우리 말이 아닌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더니 친절히 설명해준다. 우리말로 『담는다』는 뜻과 영어로 『플래시는 신선하다는 뜻』으로 『신선한 식료품을 판다는 가게』라는 뜻 같다. 우리말+영어다. 어쨌든 그렇다 치고, 요즘 젊은이들은 공무원 공부, 아니면 대기업 등 회사에 취직, 또는 끼리 모여서 회사 창업 등을 하는데 굳이 이 시골에서 가게를 개업한 동기가 무엇인지 물었다. 최 사장의 답변이다.
사람은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 식료품은 늘 수요가 있다는 것, 시장에 가지 않고 바로 끓이기만 하면 되는 식품을 파는 가게는 없을까 하다가 이 회사와 연결된 것이란다. 먹는장사는 공급 아이템이나 마케팅 전략만 좋으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울진에도 이런 식품 가게가 하나 있으면 잘 될 것 같아 개업했다고 한다. 개업한 지는 3개월 정도, 제1호점은 울진, 제2호점은 죽변에 개업, 성업 중이란다.
이 식품류는 완제품에 가까워 집에서 데우기만 해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식품이라고 한다. 손질하는 시간 등이 절약돼 1인 가구나 맞벌이 부부에게 특히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울진의 소비자 유형을 물었더니 젊은 주부, 젊은 사람, 학생, 노인분들까지 다양하다고 한다. 현재 40가지의 정제된 조리식품(밀키트)을 판매한다고 한다. 배달도 하나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한다.
그간 수입이 어땠냐고 묻자, 영업비밀이라면서도 그런대로 괜찮다나. 수입이 짭짤한 거 같다. 어쨌든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젊은 최 사장에게 행운이 따르길 바란다.
고기 장사 난전과 막회 골목 할머니들
구 울진 축협 앞 장터에서 평생 고기 장사를 했다는 할머니를 만났다. 올해 연세를 물었더니 83세로 젊은 시절 고기 장사를 시작해 60년을 했단다. 울진장, 죽변장, 부구장, 호산장터 등을 방티 장사로 시작했단다. 방티(방퉁이의 사투리)란 곡식이나 어물, 과일 등을 담아 운반하는 나무 그릇이다. 주로 여성들이 머리에 이고 다녔다. 방티장사란 방티로 물건을 떼와서 장날에 점포도 없이 장날 길거리에서 주로 하던 상행위를 말한다.
지금도 간간이 있지만 60-70년대 주로 여성들이 많이 했다. 죽변 해군부대 부근에 사시는 이 할머니는 자녀가 셋인데 모두 장사를 해서 공부시키고 출가시켰단다. 지금은 허리 아프고, 다리도 아파 다 치워버리고 울진장에만 장사하고 있단다. 할머니는 장바닥에 포장을 깔고 앉아 주로 죽변에서 나는 물가자미류를 팔고 있었다. 자녀들이 만류하지만, 놀면 뭐 하냐면서 유일한 놀이란다. 할머니에겐 용돈도 벌고, 시간도 보내는 유일한 오일장이다.
오늘같이 초여름 같은 봄날,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가려주는 유일한 그늘은 알록달록한 파라솔이었다. 대담 도중 바람이 불어 넘어지자 다시 세운다. 아직도 정정하시고 힘이 대단하네요. 했더니 온몸이 쑤시고 아프단다. 갈퀴 같은 할머니의 손은 그야말로 온갖 풍파를 겪은 세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했다.
그 연세에 고기를 어떻게 가져오냐고 했더니, 전에는 버스에 싣고 다녔지만, 지금은 울진 장에다 단골로 운반해주는 차가 있단다.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냐고 했더니, 못난 얼굴 찍어 모할라꼬? 하며 응해 주신다. 한 장 찰깍!
장사를 놀이처럼 한다는 할머니의 거짓 없는 말, 상도의가 따로 있겠는가? 장사를 놀이처럼 즐기고, 거짓으로 이문을 남기지 않고, 성실하게 노력한 만큼 그 대가로 건실하게 생활하는 모습에서 짠한 감동을 느낀다.
가자미 등 막회를 파는 황미자 할머니(79세)
울진막회시장
마른 가자미를 파는 죽변 할머니
평생 생선 장사를 하신 김복금 할머니
필자가 단골로 가는 울진 막회 파는 곳, 울진 어물 시장 남쪽 끝이다. 익숙한 칼 솜씨로 할머니들의 가자미회 손질이 바쁘다. 외지 사람도 잘 알고 있는 물가자미 등 막회로 유명한 곳이다. 양도 괜찮고 가격도 헐하다. 이곳에서 35년 넘게 장사한다는 황미자 할머니(79)가 칼질을 하면서도 살아온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신다.
요새는 코로나 때문에 사람이 없어 장사가 잘 안된다고 한다. 90년대는 울진에 사람이 많아 장사가 잘되었는데 인제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더구나 젊은이들은 이런 데 와서 물건을 사지 않고, 마트나 큰 상점에 가고 이런 시장에는 잘 오지 않는다고 한다. 예전에는 남편이 팔 물건이나 생선을 새벽같이 죽변에서 물건을 떼다가 갖다주었단다. 지금은 죽변에서 직접 배달차가 배달해 준단다.
삼척 임원에서 울진에 시집와서 여태까지 장사를 한단다. 아들 딸자식이 못하라고, 이제는 편히 쉬라고 한단다. 그래서 자식들보고 내가 장사 안 하고 들어앉아 있다가 치매 오면 어떻게 할 거냐면서, 일하면서 건강도 유지하고, 자기가 좋아서 지금껏 하고 있단다.
모두 삼남매 자식들 공부시켜 어엿하게 잘살고 있다고 한다. 황 할머니 회감을 쓰는 솜씨가 날렵하다. 아직도 정정하다. 서울 같은 곳으로 배달이 되냐고 묻자 택배로 된다고 한다. 앞으로 10년 이상은 장사할 수 있겠다 하니 활짝 웃는다.
이 두 할머니 이야기에서 보듯이 당시 장사를 시작하던 60, 70년대는 대부분 가정이 경제적으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당시 억척같은 한국의 어머니들은 농촌이나 도시 등을 막론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고, 물건을 떼 장사를 하면서 자식 뒷바라지에 헌신했다. 그들의 삶 자체가 억척스러웠고, 그러한 헌신이 오늘날 한국 산업화와 경제 발전에 한 몫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던 시골 장터
어린 시절 추억을 살리며 풀빵을 사먹는 필자
여기서 필자의 어린 시절 울진 장날 풍경을 추억해 본다. 60년대의 울진 장날 풍경은 장작 나뭇단을 팔러온 사람, 말 광대 가설무대, 강낭 튀박 장수, 풀빵 장수, 엿장수 가위 소리, 나물, 채소, 참외, 수박 장수, 옹기장수, 동동구리분 장수, 닭 장수, 강아지 장수, 꽁치 고등어 방티장수 아지매등 어물장수들로 붐볐다. 여름날 건물 아래 외진 그늘에서 흰 두루마기에 갓 쓰고 장죽(긴 담뱃대)을 뻐금뻐끔 빨아대던 노인네나 소 팔고 막걸리 한 잔에 기분 좋아 불콰해진 시골 소장수의 갈지자 걸음새도 없다. 장작더미를 놓고 서는 장작 시장도 없다. 그때는 아직 전기, 가스, 석유등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주 연료가 연탄이나 나무가 대신했다. 울진 산골 등지에서 장작 한 짐을 걸방이나 지게에 지고 와서 장날에 팔았다. 저녁때는 꽁치나 고등어 같은 어물을 지게가지에 달고, 해거름에 먼 길을 가기도 했다.
또 하나는 필자가 중학교 시절 국회의원 선거철로 기억된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도중 한번은 울진극장(구 울진축협 건물터) 발코니에서 열변을 토하는 국회의원 후보들의 유세를 듣곤 했었다. 마침 울진 장에 온 마을 어른을 만나 영문도 모른 채 이끌려 시장에서 공짜 국수를 얻어먹은 적도 있었다. 배고픈 시절 꿀맛보다 더 달고 맛있는 요기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국회의원 선거표 국수였다. 한국 정치가 난장판이었던 이른바 60년대 선거는 막걸리와 고무신으로 유권자의 표를 사던 시대였다.
울진시장을 돌다가 풀빵과 호떡 파는 곳이 있어 풀빵을 사 먹었다. 장날에는 서너 군데에서 장사를 하는 것 같다. 아직도 풀빵 맛은 60년대와 다름없었다. 굽는 기계가 하나하나 손으로 일일이 뒤집던 방식에서 한꺼번에 구워내고 있었다. 능률적이다. 풀빵은 뭐니뭐니해도 앙꼬 팥 맛이다. 몇 개를 사 먹었다. 앙꼬 팥 맛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그 맛은 살아있었다. 오랜만에 어린 시절, 누나와 풀빵을 사 먹던 옛 추억을 되살려 보았다.
때깔 좋은 울진미역
난전에 아지매들이 미역을 팔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로 붐빈다. 사람들 사이의 대화다.
어디 미역이요?
대나리에서 왔어요.
미역 좋으네요. 올해 풍년이라던데,
뭐요, 그렇지도 않니더.
저쪽에서는 풍년이라고 하던데?
많이 나면 뭐해요. 팔려야 하지. 대나리는 얼마 안났어요. 가새(가장자리)는 없니더.
바닷가 가까운 짬(미역바위)에는 미역이 예전같이 돋지 않는다는 말이다.
코로나가 와서 안 팔려요.
어느 아주머니가 물었다.
미역 끝났니껴?
이제 미역 한물이시더.
마른미역보다 생미역이 팔기에 나아요.
그러자 옆에 있던 아지매도 거든다.
요새 아도(아이도) 안 놔, 먹지도 않니더, 전보다 안 팔리니더!
그 말에 필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대화들이 울진 장날에는 아직도 살아있다. 필자가 쓴 졸시(울진돌미역)다.
『울진돌미역 좋니더/한번 잡사보소/을매니껴?/싸게 해줄테니 사소//바위가 피워올린 꽃다발/예부터 나라님에게 진상했다는/ 울진돌미역/파도 결에 너울대던/쪽빛 바다가 치렁치렁하다// 봄 햇살에 감청 빛도 자르르/시퍼런 물길에도 검붉던/짭조름하고 달콤한 미역귀마다/끈끈한 사투리가 흘러내린다. (김진문의 시·산문집『울진+산책 1. 울진돌미역』 전문.2021. 윌이엔씨)
아시다시피 울진 고포미역은 예부터 임금에게 진상했다는 유명세를 타는 미역이다. 더구나 마른미역은 조선시대 울진과 봉화를 오가는 보부상들이 취급했던 주요한 상품이었다. 미역 단위는 1단 20오리, 10단 묶음은 1재비이다. 보부상들은 당시 대엿단씩 쪽지게에 달아지고 울진 봉화간 산간지역 열두고개를 넘나들었다.
울진미역이 산모들의 산후 몸조리에 특효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봉화, 영주 등 내륙의 주민들은 울진 미역을 산모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로 생각했다고 한다.
산모에게 주는 미역을 살 때는 미역을 동강이 내어 꺾거나, 그 값을 깎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태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어 난산이 된다는 마음 때문이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태아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믿음과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속설이기도 하다.
지역 농산물을 판매하는 로컬푸드
로컬푸드 연호정 우리진 장터(2019)
로컬푸드가 있는 골목으로 가보았다. 그런데 장사하는 사람들이 없다. 처음 개설할 때는 연호공원 등지에서 시작하다가 그 후 울진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로컬푸드란? 양글말 그대로 지역의 먹을거리란 뜻이다. (로컬푸드, 굳이 양글말로 해야 하나?ㅎ) 다시 말해 지역에서 생산된 먹을거리를 그 지역에서 소비하자는 운동이다.
농장에서부터 식탁까지, 생산지에서 소비자까지의 거리를 최대한 줄여 먹을거리의 신선도와 안전성을 확보하고, 환경적 부담을 적게 하며, 나아가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사회적 거리를 줄여나가자는 운동이다.
외국의 경우 북미의 100마일 다이어트 운동, 일본의 지산지소 운동 등이 대표 사례이다. 국내에서는 (사)로컬푸드운동본부가 여러 지방자치단체와 민간단체가 함께 로컬푸드운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울진도 2003년경 로컬푸드협동조합이 있다.
시장 골목을 나오다가 마침 울진로컬푸드협동조합 회장인 이재욱(61) 씨를 만났다. 그는 로컬푸드 식품으로 김치를 생산하여 팔고 있다. 필자도 김치 맛이 입에 딱 맞아 사 먹은 적도 있었다. 이 회장에게 로컬푸드 장사 안 하냐고 했더니 지금은 일시 중단되었단다. 그래서 5월 14일부터 연호공원과 죽변해안스카이레일 들머리 근처에 주말 장터가 개설되었다.
마땅히 지정장소가 없어 울진군에서는 로컬푸드 사업 등 지역 농산물 매장 건물을 내년에 준공 예정이라고 한다. 위치는 근남면 왕피천 공원이다.
로컬푸드 회원들의 기대가 큰 것 같다. 지역에서 나는 것은 지역민들이 적극 소비하여, 지역 생산자도 살리고, 소비자는 신선하고 안전한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로컬푸드협동조합! 비단 먹을거리에만 해당하겠는가. 성공을 바란다.
역사 속 울진 보부상, 그들은 누구인가?
우리의 전통시장이 생겨난 역사도 오래되었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 서기 490년 신라 소지왕 12년에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최초의 장(場)인 경사시(京師市)가 열렸다 한다. 조선 시대에 와서 경시(京市)와 향시(鄕市)로 구분되어 장터가 형성되어 전해 내려오다가 지금은 오일장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울진장시에 관한 문헌 기록은『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상고부터 한말 대한제국(1906년)까지 각종 제도와 문물에 관한 기록이다.
울진 장시는 조선 선조 때부터 개설, 당시에는 초장, 중장, 종장 순으로 2, 7일을 기점으로 3일간 달마다 2회씩 개장되었다고 한다. 초장은 울진읍 성내, 중장은 고성리 성밑 마을, 종장은 지금의 호월리(무월동)과 도청동 사이의 들에서 열렸다고 전한다. (울진바지게 시장 입간판에서)
이후 전통적으로 조선조에서 전문적 상행위의 주인공은 보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보부상은 울진지역에도 존재했다. 보부상은 원래 부보상이라 했다. 보상을 ‘봇짐장수’, 부상을 ‘등짐장수’를 말한다. 흔히 말하길 장돌뱅이, 장돌림, 봇짐장사라고 했다. 이 보부상은 조선조 500년간을 면면히 이어온 전문 상인조직이었다.
울진에서는 보부상을『바지게꾼』,『등금쟁이』,『선질꾼』이라 했다.
싸리로 엮은 발체 달린 지게를 다닌다해서 『바지게꾼』등에 물건을 지고 다닌다 해서『등금쟁이』, 쪽지게를 지고 서서 쉰다고 해서『선질꾼』으로 이름했다. 울진의 보부상은 울진과 봉화지역 특산물을 산간 십이령을 통하여 내륙으로 운반, 사고파는 중간자 역할을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봉화 특산물로서는 벼, 기장, 조, 보리, 왕골, 꿀, 밀(황랍黃蠟), 여우가죽, 노루가죽, 산달피(담비가죽), 돼지털, 자리, 칠, 잣, 웅담, 인삼, 백복령, 산감초, 송이버섯, 은구어(은어)이다. 울진의 특산물로 오곡, 뽕나무, 삼, 감, 밤, 배, 닥나무, 꿀, 밀(황랍黃蠟), 철, 호도, 석이, 오배자, 조피나무열매, 미역, 칠, 사슴포, 여우가죽, 삵괭이가죽, 노루가죽, 범의가죽, 돼지털, 대구, 문어, 숭어, 전복, 홍합, 복령, 승검초뿌리(당귀當歸), 바디나물뿌리(전호前胡), 대왕풀(백급白芨, 자란의 뿌리) 오미자, 인삼, 가는대와 왕대, 바디나물뿌리(전호前胡) 등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염분이 61개소, 자기소가 1곳으로 나타나 있다.
조선 전기 봉화나 울진에서 논이나 밭, 산간 지역에서 나는 품목은 거의 비슷하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봉화에서 생산되지 않는 울진 해산물이 조선 후기 지방 장시의 발달과 교통로 확보로 물자 교류가 활발해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역, 대구, 문어, 숭어, 전복, 홍합 등 건어물과 소금이 봉화, 영주, 안동 등지의 내륙 지방으로 운반, 판매되었다. 봉화 등 내륙지역에서는 대마, 담배, 콩 등의 산간 지역 농산물이 울진지역으로 넘어와 흥부장(부구), 울진장, 죽변장에서 거래되었다.
그 상행위의 주인공이 울진 봉화 간 보부상들이다. 예부터 지역경제의 윤활유 역할은 물론 보고들은 세상사를 이 고을 저 고을로 전하는 사발통문의 입소문으로 문화전파사 역할도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의 상도와 규율도 엄격했다고 한다. 이러한 부보상 정신의 의미를 반추할 필요가 있는 오늘이다. 지금도 보부상에 관한 다음과 같은 구전민요가 전해온다.
『한자두자 삼척장 베가 많아 못보고/값 많은 강릉장 값이 싸서 못보고/정들었다 정선장 갈보많아 못보고/울퉁불퉁 울진장 울화나서 못보고/안창곱창 평창장 국술 좋아 못보고』(이하생략)
강원도 동해안과 산간 지역장의 특성을 나타낸『장타령』이라는 민요다. 울진장은 울퉁불퉁 울화나서 못본다고 했다. 교통이 불편한 산간오지라는 장터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울진 해산물이 보부상을 통해 강원도 정선, 평창까지 운송,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안동 간고등어 염장식도 울진에서 생산된 토염(소금)이 일조했다는 설도 있다.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가는 고개/대마 담배 콩을 지고 울진장을 가는 고개/반평생을 넘던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자고 넘네/꼬불꼬불 열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후렴)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고개 언제 가노/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위 구전민요에는 열두고개(십이령)을 넘나들며 장사를 하던 보부상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열두 고개 즉 십이령은 흥부, 울진, 죽변 노선이 있었다. 이들 노선은 두천 바릿재부터는 공통노선으로 봉화 소천(현동)장까지 길이 같았다. 십이령 고개는 다음과 같다. 흥부장 출발이다.
울진 흥부(부구)-쇠치재-세고개재-바릿재-너삼밭재-저진저터재-새넓재(적은 넓재)-큰넓재-고치비재-곧은재-맷재-배나들재-막지고개-소천(현동)장-살피재-모래재-춘양장으로 이어졌다.
(김진문의『십이령의 문학적 소재와 지명 유래 '가노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울진문화원, 2010)
십이령은 울진봉화간 차마고도와 같이 동서 문물이 교류되었던 역사적인 길이다. 발품 팔아 한양으로 가던 옛 교통로이다. 이 길에는 보부상 등 민초들의 애환이 담긴 인생길이기도 하다. 지금은 울진금강송숲길과 함께 개설되어 전국에서 찾아오는 발길이 잦은 숲길 관광지로 이름난 울진의 대명사가 된 길이다.
울진 보부상 이야기를 생생하게 재현해낸 소설 『객주』
왕피천공원 관송헌 소설가 김주영 집필실 현판식(2011년)
작가 김주영이 쓴 소설『객주』는 조선 후기부터 근대 자본이 탄생하기까지 보부상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려내고 있다.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한 천봉삼을 주인공으로 보부상과 노비, 부패한 관료, 농민 등 다양한 계층 간의 여러 인간군상과 행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설 객주는 1979년부터 1984년까지 서울신문에 연재하여 아홉 권으로 묶여 대하소설로 출판되었다.
2011년 울진군은 십이령보부상 이야기(Storytelling)를 관광문화자원으로 개발하고자, 작가 김주영과 계약을 맺고 그의 집필실을 왕피천공원에 ‘관송헌(觀松軒)’을 제공한 바 있었다. 이후 장터와 길 위의 작가로 자리매김한 김주영이『객주』 10권째를 2013년에 발간했다. 객주 9권을 쓴 지 34년 만이다. 10권째는 울진십이령을 배경으로 한 보부상단의 이야기다. 필자는 객주의 매력에 빠져 10권이 나오자마자 단숨에 읽었다.
독자들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될 수 있으면 1~10권까지 모두 읽기를 바란다. 객주 10권의 첫 머리글은 현재 폐교된 금강송면 소광리(빛내골) 폐교된 소광분교 섶다리(호음교) 일대를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섶다리 아래로 끊임없이 들려오는 여울물 소리가 그윽하고 오묘했다. 그래서 호음교라 부르기도 하는 빛내골(소광리 혹은 소조원) 계곡 위를 가로지르는 행상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갑신년 2월 하순, 시절은 봄빛이라지만 아직은 여우도 눈물을 짜낼 만큼 맵고 짠 추위는 산자락에 묻어 있다. (중략) 울진 해안에 흩어진 염전이나 흥부장에서 내륙의 현동 저잣거리를 거쳐 내성 장시까지는 줄잡아 160여 리 상거에 내왕 행보에는 눅게 잡아도 8, 9일이 걸린다. 북에서 남으로 뻗은 백두대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십이령 내왕길에는 관원들의 숙소인 원집도 여럿이었다.
일행의 숙소참이었던 그곳 빛내골 숫막거리는 십이령 중에서도 가장 깊은 산속에 자리 잡았다. 관원들이 묵는 원집이 있다지만, 1년 열두 달에 도임하는 현령 일행이 한두 번 지나다닐 뿐 울적하리만큼 적막한 편이었고, 울진 포구 염전에서 현동과 내성장을 오가는 소금 짐들과 고포 미역, 그리고 연안에서 거둔 염장품과 건어물들이 열두고개로 이름난 이 산협길을 분주하게 오갈 뿐이다. 십이령 고갯길 여기저기에는 샘수골, 시치재, 말래, 샛재,저 진터, 빛내골과 같은 숫막촌이 여럿이지만, 어느 숫막을 막론하고 해질녘에 찾아든 길손들에겐 끼니 값만 받을 뿐 보놋방은 공짜로 내준다. 그래서 일행들 역시 숫막 울바자 곁에서 싸늘하게 식은 새옹밥으로 겨우 허기만 모면하고 봉노에 끼어들어 노루잠으로 때운 것이었다.』(소설 객주 10권, 멀고 먼 십이령, 9-11)
여기 소설 도입 부분에서 보듯이 흥부장에서 봉화(내성) 장시까지는 160여 리이고, 보부상단이 울진에서 내륙으로 운반하는 주요 물목은 소금과 고포미역, 소금에 절인 어물인 염장품과 건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새옹밥이란 놋쇠로 만든 작은 솥 쇠옹에 밥을 지어 대개는 그대로 먹는 밥을 말한다. 이렇게 보부상들이 12령을 오가면서 겪는 고달픔도 엿볼 수 있겠다.
조령 성황사
내성행상불망비
이러한 보부상단의 유적인 샛재 성황사 현판과 보부상단의 우두머리 격인 권재만, 정한조의 공적비(내성행상불망비)가 북면 말래 두천리에 있다.
여기에 천봉삼은 소설 속 가공인물로 등장해 보부상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설 말미에 천봉삼은 봉화 생달마을에 정착하여 촌장으로 역할하고 한편으로, 객주를 개설하여 울진, 봉화, 영월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다.
객주 작가 김주영에 따르면 울진 12령에는 보부상 유적과 그 흔적이 전국에서도 가장 많이 산재해 있다고 한다.
소설 끝부분에 탐욕이 아닌 정의로운 부를 쌓는 장사꾼, 천봉삼! 그가 이른바 깨끗하게 번 돈, 청부(淸富)로서 정착하고자 했던 이상향이『생달마을』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잠깐『생달』이라는 지명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생달』이라는 지명은 울진군 소광리 대광천의 황장봉계표석(문화재 자료 300호)에도 다음과 같이 음각되어 있다.
黃腸封界 地名 生達峴 安一王山 大里 堂城 四回
『이 표석의 내용은 황장목의 봉계 지역을 생달현(生達峴)·안일왕산(安一王山)·대리(大里)·당성(堂城) 네 지역으로 하고, 이 지역을 명길(命吉)이라는 산지기에게 관리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안일왕산이 고을 서쪽 41리에 있는 진산(鎭山)으로 되어 있을 뿐 다른 지명은 나타나 있지 않다.『청구도(靑邱圖)』와『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안일왕산과 생달산이 표시되어 있으나, 그 위치가 부정확하고 대리와 당성이 표시되어 있지 않아 봉계 지역을 상정하기가 어렵다.
『대동지지(大東地誌)』에는 안일왕산이 울진에서 서북쪽으로 40리, 생달산은 서쪽으로 50리 떨어져 있고, 황장봉산이 하나 있다고 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지역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명문이 발견된 곳의 바로 뒷산이 생달산이며, 산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안일왕산성이 있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http://uljin.grandculture.net]
이 황장봉계표석은 일반백성들에게 생달현까지 금강송(황장목)을 함부로 벌채해서는 안 된다는 금표로서 바위에 새긴 일종의 법적 경고문이었다. 황장목은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쓰이던 조선조 왕실 전용 소나무였다. 이른바 왕의 나무, 이 황장목을 함부로 베는 백성에게는 곤장 50대의 형벌이 내려졌다.
그런데 여기서 생달현은 어디이며 어디까지인가? 하는 점이다. 당성은 샛재의 성황사? 대리는 소광2리이지만, 생달은 솔평지(소광1리)인가? 아직도 고증되지 않았다.
필자는『대동지지(大東地誌)』에 안일왕산(울진의 진산)이 울진에서 서북쪽으로 40리, 생달산은 서쪽으로 5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한 것에 주목해본다.
현재 소광리 황장봉계는 혹 봉화의 선달산(쌍달산, 1,236미터)까지가 아닌지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이와 관련하여 이 생달이라는 지명은 봉화군에도 있다. 봉화군 물야면 오전2리 일대는 생달마을로 알려져 있다. 소설 객주에 나오는 생달마을이다. 인근에는 선달산(쌍달산)이 있다. 이러한 봉화의 생달현, 생달마을, 선달산, 쌍달 등이 소광리 황장봉계표석에 나오는 생달현과의 관련성, 각종 문헌 기록, 언어의 음운적 변화, 관련 전설 등이 종합적으로 고증되어야 황장봉계석의 금표 구역의 범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천봉삼 등 보부상들이 꿈꾸던 이상향, 생달마을
객주 10권의 끝부분은 반수 권재만과 도감 정한조, 공원 천봉삼 등이 보부상단이 12령 도적떼를 완전히 소탕한 공로를 인정받아 울진 현령에게서 융숭한 접대를 받았다. 정한조는 도감에서 접장으로, 천봉삼은 공원에서 도감이 되었다. 한편 도적 떼가 그간 민간과 행인들에게서 수탈한 재물과 물화는 안동부사의 지시대로 보부상단에 보상 격으로 일천 냥에 가까운 거관(거금)을 회수 받았다. 이들은 되돌려 받은 천 냥에 가까운 거금과 다시 보부상단 개인들이 내놓은 쌈짓돈을 합해 2만 냥을 밑천으로 삼아 새 삶터를 찾아 출발하였다. 지금의 봉화군 물야면 생달이라는 곳이다. 이 생달 일대에서 천봉삼과 보부상 등 유민들이 정착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튿날 천봉삼과 곽개천 그리고 박원산 세 사람은 중두리를 지고 곧장 생달과 애전으로 발행하였다. 나머지 행중은 흥부장으로 발행하여 포주인 조기출이 지키고 있는 어물 도가에서 소금과 미역을 떼어 다시 십이령에 올랐다. 그리고 보름 뒤에 말래 접소 근처에 흩어져 기거하던 농투성이들과 아녀자들도 생달마을로 떠났다.
밤이면 비루먹은 개 짖는 소리만 공허하였던 생달마을에 다시 인총이 붐비기 시작하여 생기가 돌고, 구룡산 도래기재를 넘던 영월 태백산 부상들도 박달령 상로길로 돌아왔다. 경상도 내성과 안동의 경계는 멀어야 50여 리 내외였고, 충청도 단양과의 경계는 60여 리 상거리였다. 박달령만 넘으면 영월과 태백이 코앞이었고, 울진으로 곧장 가자면 십이령 넘어 150리, 그야말로 사통팔달의 길지에 상단들은 춘수전과 추수전 때마다 여축없이 갹출하여 토지를 사들였다. 피폐하였던 마을에 인총이 늘어나면서 각성바지 유민들이 모여들어 마을은 금세 30여 가호로 늘어났다. 밭에는 옥수수가 길길이 자라 지붕을 덮을 지경이었고, 풀뭇간이 들어서고 마방 딸린 숫막이 다섯이나 들어섰다. 마당에는 대낮에도 노루가 뛰어들고, 솥에는 꿩이 저절로 날아들었다. 천봉삼 내외는 생달마을 한가운데서 객주를 열었고, 달덩이 같은 아들을 얻었다. 천봉삼은 생달마을 촌장이면서 울진흥부장, 내성장과 영월 태백의 장시의 거래를 주름잡는 객주가 되었다. 적굴에 살던 농투성이들이 각자 집을 가지고 애전과 생달 일대의 드넓은 묵정밭을 꿀이 흐르는 문전옥답으로 바꾸는 데는 불과 2년여밖에 걸리지 않았다.』(소설 객주 10권, 정착촌, 298-299)
소설 속 천봉삼이 정착한 곳은 봉화 생달마을과 오전 일대로 그려지고 있다. 실제 일부 보부상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한다. 그들은 공동으로 토지를 사들일 때 자신의 이름 대신에 별칭으로 사들였다.
예를 들어 태생지가 안동이면 장안동처럼. 그것은 후손들이 재물과 재산을 두고 일어날 다툼과 사적 소유를 예방키 위한 삶의 지혜였다. 공동소유, 공동 분배와 같은 소유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토지에서 소출이 난 것은 함께 나누었다.
당시 보부상들이 사들인 토지는 마을에 기부하였다고 전해온다. 봉화 오전 약수터도 전설에 따르면 어느 보부상이 이곳 쑥밭(애전)에서 잠이 들었다가 꿈에 산신령이 약수가 나는 곳을 알려주었다는 곳이다.
지금도 봉화 물야 생달마을에서는 당시 보부상들의 넋을 기리는 합동 제사를 해마다 지내주고 있다. 마을 들머리에 보부상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시골 오일장은 건재한가?
울진 읍내 떡방앗간도 예전 같지 않다. 남부떡집 윤모 사장은 20여 년 전에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 울진에 돌아와 떡방앗간 운영하고 있다.
대구에서 섬유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섬유업도 사양길이라 경기도 좋지 않던 중 누님의 권유로 떡방앗간을 매입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처음에는 떡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다고 한다. 당장 먹고살아야 하기에 이전 떡집 주인한테 기술을 전수받기도 했단다.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재미도 있고 하여 열심히 했단다. 그간 떡집 경기가 괜찮았는데, 지금은 코로나로 각종 단체 행사도 축소되어 매출도 반밖에 안 되어, 빨리 경기가 회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40대 초반에 고향으로 왔는데 이제 60을 바라본다고 한다. 윤 사장은 울진 인구가 채 5만도 안 되는데, 대형 유통 마트 등이 늘어나 울진시장이 자꾸 죽어간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서민 먹거리인 옛날 국수와 막거리를 주로 파는 새마을레스토랑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생수 한 병을 사도 집까지 배달해 주는 편리함이 1인 가구나 맞벌이 부부에게는 큰 매력이다. 더구나 택배 문화의 발달로 온라인 구매소비도 그중 하나다. 대형마트에는 소비자가 원하는 다양한 상품, 식품의 경우 신선도 등 정제된 상품이 대다수여서 소비자들이 당연히 선호한다.
경제 주체가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어울려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 전통 오일시장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우리가 백화점이나 대형유통 마트에 가서 물건값을 흥정할 수 없다. 이미 매겨진 가격대로 값을 치러야 한다. 하지만 전통시장이나 오일장은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말처럼 대등한 인간관계에서 물건값을 주고받을 수 있다.
시골 오일장과 전통시장은 자꾸 축소되고 죽어가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인구 격감과 고령화로 시골 오일장은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울진에도 백화점식 마트와 생활공산품을 판매하는 대형 유통업체가 입점하여 전통시장과 소상공인 등 자영업자에게는 불리한 유통구조이다. 이렇듯 몇몇 대형유통기업 독과점 구조에서는 전통 오일시장의 소상공인과 자영업점들은 절대 약자일 수밖에 없다. 서로 상생하는 방안은 없을까.
현대화된 울진시장
울진시장도 현대화가 많이 되었다. 하지만 시장에는 사람이 붐벼야 한다. 외부 관광객 등을 유치하자면 남다른 뭔가가 특별한 게 있어야 한다. 고객 쉼터 등 각종 편의시설 확충, 지역농산물 전문화와 특성화, 향토 음식 전문 식당가 조성 등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 거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울진만의 전통 특색시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지자체, 상인, 지역민이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평소에도 울진 오일장 돌아보기를 즐긴다. 아직도 울진 장날은 옛 향수와 정취가 살아있고 사람살이의 냄새가 흠뻑 묻어나는 곳이다. 어린 시절 소를 팔러온 부모님을 따라 먹던 국밥은 지금도 나의 입맛을 자극한다. 울진우체국 앞 도로 건너 남쪽 주차장이 60년대는 소를 사고파는 우시장이었다. 우시장 근처에는 소고기 국밥집이 있었다. 장작불에 끓인 소고기국밥 냄새는 코를 자극하고, 국밥 한 그릇이 십 리 장터를 따라온 꼬맹이의 주린 배를 채워주며 행복감에 젖어 들게 했다. 어디 그뿐인가?
『사돈요 점심 먹었니껴? 모로요, 점심은요!』하면서 말을 먼저 꺼낸 사돈이 국밥을 사주며 도타운 정을 나누던 곳이 장터 국밥집이었다. 그래서 시골 오일장은 우리네 삶의 애환을 만나는 곳이다. 북적이는 장터에 가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울진군청 앞 시내버스 승강장과 울진농협 사거리 북쪽 시내버스 승강장에는 귀로의 장군들로 오랜만에 빼곡하다. 4월 어느 봄날, 화창한 울진 장날, 코로나도 물러가고 언제나 이와 같아라.
구 우시장 근처(현 울진우체국 앞 주차장)
울진시장에서 35년째 음반 등을 판매하는 박금용 사장의 뮤직박스
코로나 방역 완화로 오랫만에 귀로의 장꾼들로 붐비는 울진군청 앞 시내버스 승강장
울진소방서 홍보 활동
보부상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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