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십이령을 넘은 보부상들은 어디로 향했는가?

‘봉화 지역의 보부상 유적을 찾아’
기사입력 2022.07.01 09:33  |  조회수 130,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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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 김성준 울진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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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천 바릿재 입구의 ‘내성행상 불망비각’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우리나라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이 이른바 ‘신작로’라 하여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낸 것이라 하겠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보로 오솔길을 따라 태산준령을 넘어 다녔다.

재를 넘는 사람 중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아마 보부상들이었을 것이다.

 

보부상들은 전국을 무대로 행상을 하던 속칭 장돌뱅이들이라 항상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녔다. 그들의 삶은 가족들과 떨어져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기 때문에 가장 힘든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보부상 옛길은 신작로의 출연으로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불과 100년도 채 안되었다. 

지금은 모두 숲이 되었거나 새로운 길과 합해져서 옛길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당시 보부상들은 동해안에서 생산되던 토산품들을 내륙지방에 공급하였고, 내륙지방의 토산물을 해안지방에 공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울진 지역에서 물건을 구입한 보부상들이 봉화, 영양, 안동 등 내륙지방으로 넘어 다니던 길은 세 갈래였다.

 

울진 북부지역인 흥부장, 죽변장에서 물건을 구입한 보부상들은 두천 주막거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새벽 십이령을 넘어 소천장, 춘양장, 내성장으로 넘어갔다. 

 

울진의 중간지점 코스는 울진장, 매화장을 보고 갈면리의 동막 주막에서 유숙한 뒤 다음날 새벽 고초령을 넘어 영양장, 수비장으로 넘어가는 코스였다. 

 

남쪽으로는 평해장, 기성장을 보고 온정 외선미 주막에서 유숙한 후 구슬령(珠嶺)을 넘어 수비장, 영양장으로 가는 코스였다. 

 

북면 흥부장에서 물건을 구입한 장꾼들은 험준한 열두 고개를 넘어야 되기 때문에 십이령이라는 말이 생겼다. 

 

흥부장에서 쇠치재 → 세고개재를 넘어, 두천리 주막에서 유숙한다. 다음날 새벽 바릿재를 지나 샛재 → 너삼밭재 → 저진터재 → 새넓재→  큰넓재 → 꼬채비재 → 맷재 → 배나들 → 노룻재를 넘어 소천장에 이른다. 

 

지금까지 울진에서 조명된 기록들을 살펴보면 십이령을 거쳐 소천장까지 가는 재의 이름을 위와 같은 코스로 나열하였다. 

 

필자는 울진의 토산품들을 구매한 보부상들이 십이령을 넘어 어디로 향했을까? 하는 부분에 대하여 늘 궁금하였고, 봉화 지역도 울진 못지않게 전통시장들이 있었기 때문에 필시 어떤 유적이 남아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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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변의 보부상 위령비 앞에서

 

봉화 지역의 보부상 유적


울진 흥부장에서 출발한 보부상들은 두천 주막거리에서 하룻밤을 유숙한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일찍이 바릿재 입구에 있는 내성 행상 불망비에서 예를 올린 후 바릿재를 올라 조령 성황당, 한나무재, 너삼밭재 등 12령을 넘어 봉화의 소천장에 다다른다. 

 

소천장까지의 12고개는 참으로 험준하다. 소광리, 광비마을 등은 인가가 전혀 없는 무인지경의 산길인데다 산도적들이 많아 집단으로 다니지 않으면 해코지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사람들이 주막에서 반드시 유숙을 하고 새벽에 출발하는 이유가 바로 산도적떼 때문이다. 이렇게 힘들고 위험한 산길을 보부상들은 짐을 잔뜩 짊어진 채로 넘어 다닌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인지경의 준령을 넘어 울진 구역인 ‘광해분교’ 앞을 지나면 ‘꼬치비 재’가 나온다, 꼬치비 재도 보통 험한 산이 아니다. 꼬치비 재를 넘어 분천역 앞을 지나게 되면 다시 ‘곧은재’를 넘어야 한다. 곧은재도 상당히 높은 재인데 지금은 산속으로 터널이 뚫렸다. 가파른 곧은재를 넘어서면 다시 ‘멧재’를 만난다. 

 

멧재에 올라서면 낙동강 강줄기가 보이는데 마치 우리나라 지형같이 강물이 국토를 한 바퀴 휘감아 예천의 회룡포와 같은 형국을 볼 수 있어 가슴이 후련해진다. 지금은 멧재 정상에 ‘오로지’라는 신식 카페가 만들어져 있다. 

 

보부상들은 멧재에서 곰방대에 불을 당기며 잠시 지친 다리를 쉰다. 이제부터는 오르막보다는 내리막길이 많음에 안도하였을 것이다.

 

멧재에서 잠시 원기를 충전한 보부상들은 낙동강 계곡을 행하여 산 옆구리로 비스듬히 난 비탈길을 따라 내려간다. 하천을 따라 낙동강 상류쪽으로 이동하게 되면 현동역 앞에 이른다. 여기서 작은 배를 타고 강물을 건너게 되는데 배를 타고 건넌다고 하여 ‘배나들’이라 부른다. 하천을 건너 소천장에 가기까지 또 하나의 재를 넘어야 하는데 바로 ‘막지고개’이다. 마지막 고개라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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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장터, 면 소재지이다(위 좌) / 춘양 재래시장(위 우)

봉화읍의 내성 재래시장(아래 좌) / 저수지 아래의 이 마을이 ‘오전 장터’였다(아래 우)


막지 고개를 넘으면 마침내 소천장에 이른다.  

자연 부락 명칭은 ‘현동’이고 행정 명칭은 ‘소천면’이다.

 

소천장에서 춘양장으로 넘어가는 길에는 또하나의 재를 넘어야 한다. 이곳 사람들은 이 재를 ‘씨라리골’이라 부른다. 한자로는 ‘전피현’으로 표기하는데 십이령 바지게 노래의 후렴구인 ‘시그라미 우는 고개’라는 가사가 이 ‘싸라리골’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은 언제가노/ 대마 담배 콩을 지고 울진장을 언제가노/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미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전피현 고개를 넘어 약 5백미터쯤 내려오면 두 갈래의 길로 갈라지는데 위쪽으로 가면 ‘내성장’을 가고, 아랫쪽으로 가면 ‘춘양장’으로 가게 된다.

 

요즘의 봉화읍 소재지인 봉화장이 예전에는 ‘내성장’이었다. 춘양장은 예전에는 매우 규모가 컷다. 연접한 울진 소광리 일대가 국내 최대의 황장목 군락지이다 보니 일제 강점기에는 이 부근에서 벌채된 황장목을 춘양 열차역에서 싣고 외지로 반출했기 때문에 지금도 황장목을 ‘춘양목’이라 부른다. 따라서 돈이 많은 나무 목상들의 왕래가 활발했기 때문에 춘양장은 거래가 활발했다. 전국의 장돌뱅이들이 다 모이다 보니 장꾼들도 많거니와 각종 희귀한 물건들도 많다. 보부상들은 춘양장에 들러 울진 해안에서 가져간 물건들을 팔고 남은 물건은 다시 내륙에 가서 판매한다. 

 

춘양장을 본 보부상들은 ‘오전장’으로 향한다. 오전장은 춘양에서 지금의 ‘백두대간 수목원’ 앞쪽 계곡을 따라가게 되며 봉화읍 소재지에서 물야면 소재지를 거쳐 갈 수도 있다. 오전마을은 강원도 영월군과의 경계인 백두대간 산맥 아래에 있는데 옛날부터 있었던 전통장터이다. 지금은 오전 마을 아래쪽에 있는 물야면 소재지가 집단부락이 형성되고 장터도 옮겨졌지만 예전에는 물야면 소재지에는 장터가 없었다. 물야면(物野面) 소재지는 6·25 한국 전쟁 이후 형성되었다고 한다.

 

어느 해 큰 수해로 마을이 황폐해지자 물야 마을이 새롭게 형성되면서 물야면(物野面) 소재지가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물야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오전 장이 중심 부락이었다. 

 

오전장에서 물건을 매매한 보부상들은 오전 시장터 옆에 있는 ‘애전(艾田)’ 마을에서 모처럼 편히 안식한다. ‘애전(艾田)’이란 말은 ‘쑥밭’이란 뜻인데, 이 마을은 보부상들이 자체적으로 기금을 마련해 집을 짓고 살던 이른바 보부상 마을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보부상 마을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봉화군에서 2000년 초 ‘내성천 농업용수용 댐’을 만들면서 보부상 마을 전체가 저수지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자기 집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한 보부상들은 또다시 행장을 꾸려 영월장이나 영주장, 내성장으로 향한다.  

 

애전 마을에서 백두대간 산맥의 안쪽계곡을 따라가면 막다른 마을이 ‘생달’ 마을이다, 생달은 자연부락 명칭이고 행정부락명은 오전2리에 속한다.

 

생달 마을에 들어가는 입구에 보부상 위령비가 세워져 있고 제향을 올릴 수 있는 제단과 보부상들의 이름이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2000년도 봉화군에서 ‘내성천 농업용수댐’을 만들면서 수몰된 지역의 지주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보부상 마을도 당시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은 폐동이었지만 예외없이 보상을 받게 되는데 토지보상을 위해 토지의 등기부를 확인한 결과 보부상단들의 땅임이 밝혀졌다.

 

등기부에는 대부분 토지 소유주의 후손들이나 연고자가 없었다고 한다. 예전부터 보부상 마을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전해지고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등기부를 확인한 결과 놀랍게도 토지 소유자 이름들이 보부상들이 쓰던 이름 그대로였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과 역사적인 내력을 조사해 옛날 보부상들이 자기들만의 마을을 만들어 놓은 것이 확인되었다. 등기부 등본상의 성명도 모두 보부상들의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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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 상수도저수지

 

민속 학자들의 연구 논문을 보면 옛 보부상들은 전국을 떠돌아 다니던 장돌뱅이였기 때문에 이름을 잘 모르고 보통 ‘김공’, ‘이공’ 등으로 부르거나 성에다 출신 지역의 명칭을 붙여 부산 사람이면 ‘김부산’, 울산 사람이면 ‘박울산’ 등으로 호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등기부상 모두 그런 이름들이 확인된 것이다. 

 

부득이 이 마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의논 끝에 보상금을 수령하여 보부상들 유적을 만들고 매년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려 주기로 했다고 한다.   

 

당시 물야면장이었던 ‘이춘연’ 면장은 보부상들의 흔적이 없어지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겨 “그들의 삶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면장 재량사업비를 투입해 보부상 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생달마을 입구에 조성된 보부상 공원에는 ‘보부상 위령비’와 제단이 설치되어 있어 마을 주민들이 매년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수몰지구의 맨 안쪽 산밑 마을이 ‘생달’ 마을이다.

필자는 ‘생달(生達)’이란 지명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어쩌면 ’생달’이란 지명을 밝히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울진 소광리 하천변에 있는 ‘황장봉계’ 표석에 ‘생달(生達)’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울진에는 ‘생달’이란 마을 이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곳 ‘생달마을’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를 늘 궁금하게 여겨 왔기 때문이다. 

울진에서 찾지 못한 지명이 어째서 이렇게 먼 곳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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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비문의 지명을 딴 보부상 이름

 

울진 소광리 하천변의 자연적인 바위에 ‘황장목봉계’ 표석이 있다. 이 표석에는 ‘황장봉계지명생달현안일왕산대리당성사회(黃腸封界地名生達峴安一王山大里堂城四回)’라는 19자가 새겨져 있다. 또한  왼쪽 면에는 ‘산직명길(山直命吉)’이라는 기록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조선 숙종때 조선의 대규모 황장목 군락지마다 백성들이 함부로 베는 것을 금지하기 위하여 보호구역을 설정하고 표석을 세운 것이다.

 

그 표석에 ’生達峴 (생달현)’이라는 지역 명칭이 나온다. ‘생달 고개’라는 뜻이다.

글자 크기는 대체로 8㎝, 한 획의 굵기는 8㎜, 음각의 깊이는 약 3㎜ 정도이다.


「황장목의 봉계 지역을 생달현(生達峴)·안일왕산(安一王山)·대리(大里)·당성(堂城) 등 네 지역으로 하고, 이 지역을 명길(命吉)이라는 산지기로 하여금 관리하게 한다」는 뜻이다.

필자는 수십년 동안 울진군 향토사를 연구해 왔으나 ‘생달’이나 ‘생달현’이란 지명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울진군 홈페이지에 생달에 대한 기록을 고서를 인용해 약간 언급되어 있는데 지역을 명확하게 표현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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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군 소광천변의 황장봉계표석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안일왕산이 고을 서쪽 41리에 있는 진산(鎭山)으로 되어 있을 뿐 다른 지명은 나타나 있지 않다.『청구도(靑邱圖)』와『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안일왕산과 생달산이 표시되어 있으나, 그 위치가 부정확하고 대리와 당성이 표시되어 있지 않아 봉계 지역을 상정하기가 어렵다.

           

『대동지지(大東地誌)』에는 안일왕산이 울진에서 서북쪽으로 40리, 생달산은 서쪽으로 50리 떨어져 있고, 황장봉산이 하나 있다고 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지역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명문이 발견된 곳의 바로 뒷산이 생달산이며, 산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안일왕산성이 있다.

 

이처럼 울진군의 지명 유래에는 ‘생달’이란 지명에 대해 명쾌한 답이 없어 필자는 평소 매우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봉화 지역에서 ‘생달’을 발견한 것이다, 

 

거리상 울진과 연관짓는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곳 생달 마을 뒷산이 백두대간 끝자락 준령이며, 이곳도 황장목이 자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조건 관련이 없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조선 숙종 임금이 황장목 경계를 만들 때 혹시 이곳까지 포함한 것은 아닐까는 가능성을 조심히 점쳐 본다.

 

생달마을 뒷 산인 백두대간을 넘어가면 바로 강원도 영월 땅이며 ‘영월군  김삿갓 면’이다.

봉화군의 생달면 부근 지명에 대한 유래는 상당히 재미있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웅녀의 전설이 이곳 지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신화편에 범과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해 쑥과 마늘을 먹고 동굴 속에서 백일 기도를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내용들과 관련된 지명들이 생달 마을 부근에 모두 모여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곰지기마을’, ‘범바위골’, ‘쑥밭(艾田)’, ‘예천바위(하늘에 제사지내는 곳)’, 선달산, 박달령, ‘주실령’ 등의 지명이라고 한다.

혹시나 하여 봉화군청 홈페지 지명 유래편을 찾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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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변의 보부상 위령비 앞에서

 

오전장에 대한 지명

 

면소재지인 오록 뒤편에 있는 들이라고 하여 뒤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지역은 1948년경까지 물야면에서는 유일하게 5일장이 섰던 지역으로 보부상들이 부석, 풍기, 봉화, 춘양, 태백, 영월 등 각처에서 드나들었으며, 당시로는 도보 교통의 요충지로서 상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곳이다. 지금은 장이 섰던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농촌마을로 변모하였다. 


애전·쑥밭


이 지역은 생달과 물집 계곡의 물이 합수되는 지역으로 하천이 범람하여 항상 늪지대를 형성하게 되어 그런 뜻으로 水田(수전)이라고 하였으며 늪지대 즉, 수전을 또 다른 말로 쑤뱅이 등으로 불리던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말이 변천되어 쑤밭, 쑥밭으로 부르게 되었다. 1904년 행정구역 개편과 더불어 쑥밭으로 불리던 명칭이 한자로 쑥애(艾)자와 밭전(田)자를 따서 애전(艾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과 옛날에 약수탕 약물이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문둥병 환자들이 약물을 먹고 몸을 씻고 이 지역에 있는 쑥으로 피부에 뜸을 뜨고 달여먹고 하여 병을 고쳤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쑥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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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의 생달마을 표지석(좌) / 생달마을 표시(우)

 

생달

先達山(선달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이 마을을 가로질러 흘러가는데 굽이쳐 흘러내리는 형세가 마치 둥글게 두개의 달과 같은 형상이라고 하여 ‘쌍달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천하여 ‘생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보부상들은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가족과 떨어져 낯설고 물설은 타향을 전전하면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들의 신세를 늘 한탄했다. 때로는 자신들을 보호해줄  지역 토호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더구나 전국 장터를 누비다 보니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험악한 세상을 살아 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하며 때로는 허세도 필요하다.

그래서 보부상을 만나본 사람들은 “그들이 너무 거칠었다”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규칙이 있어서 엄격한 규율 속에  조직이 운영되었다. 접장이나 반수에게 하극상을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고의든 실수든 규칙을 위반하게 되면 멍석말이와 같은 혹독한 벌칙이 적용되었고 금도를 벗어나는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조직에서 추방 당하는 벌칙도 있었다고 한다.   

 

흥부장에서 소천장까지 흔히 열두고개를 넘는다고 한다. 혹자들은 열한고개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훨씬 많은 고개를 넘었을 것 같다. 어쨋든 보부상들은 봉화, 영월, 서울까지 울진의 물건들을 공급했을 것이다. 

 

특히 오늘의 답사를 통해 더욱 의미있는 것은 연구자들의 논문을 통해서만 듣던 보부상들의 호칭들이 확실히 확인된 점과 더욱 더 연구해야할 과제이지만 ‘생달(生達)’이란 지명을 발견한 것이다.


울진과 연결된 보부상단들의 진로와 그들이 남긴 흔적, 그들에 얽힌 사연과 지리에 대하여 확인할 수 있었던 참으로 의미있는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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