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피천은 살아 있다 1

울진의 생명수 왕피천 이야기(1)
기사입력 2022.07.26 15:19  |  조회수 8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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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피천 위치도

 

왕피천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맑은 바람과 물, 바위가 둘러쳐진 협곡, 빽빽하게 들어선 금강송 등이 하늘 높이 치솟은 자연 숨결 그대로인 남한에 몇 남지 않은 첩첩산중(오지)! 등산인들에게는 국내 3대 트레킹(내성천, 동강, 왕피천 등) 장소요, 국내 생태관광지 명소인 왕피천(王避川)! 총길이 67㎞인 왕피천 계곡은 국내에서 가장 넓은 『생태경관보전지역』이다. 지금은 왕피천 일대가 지류를 포함해 3개의 생태탐방로가 개설되어 국내 생태관광지로서 크게 이름나있다.

이곳에 오면 억겁의 시간이 멈춘 듯한 원시 생태 보고가 있다. 계곡의 시원한 바람과 물소리, 새소리, 금강송 향기는 덤이다. 낙동정맥 중 생태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생물다양성이 뛰어난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멸종위기의 동물인 산양을 비롯한 희귀생물들이 서식한다. 한편으로 왕피천과 관련한 조상들의 전설과 삶의 이야기가 유장하게 흐르는 곳이기도 하다.


왕피천의 중심마을인 왕피리 일대는 1980년대까지는 남한의 최고 깊은 산골짜기의 대명사인 여러 오지 가운데 하나였다. 한반도 등뼈 격인 백두대간의 지맥인 낙동정맥의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교통이 아주 불편한 곳이기도 했다. 당시 금강송면의 교원 등 공직자들이 공무 출장시 많은 애로를 겪었다고 한다. 겨울철이 가장 문제였다. 큰 눈이 내려 길이 막힐 때는 옥방 쪽으로 나가 기차를 타고 다시 삼척으로 돌아서 울진을 오가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2박 3일의 출장 기간이 소요되기도 했다. 지금도 36번 국도를 지나는 금강송면 삼근리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좁은 산길을 따라 다시 승용차를 이용해 왕피리로 맨 끝자락의 속사마을까지는 40여 분을 가야 한다. 현재 속사마을은 독가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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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피리 속사마을 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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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가 없는 구산리 너우내 현재 모습

바로 앞재가 바람받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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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너우내 돌다리(징검다리)

 

왕피천 유역의 인문환경 변화도 1980년대 후반 본격 개시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자연부락이었던 왕피리 일대가 본격적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으로 왕피리에는 한농복구회라는 모종교 집단촌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그래서인지 금강송 면 소재지에서 왕피리 동네로 들어가는 교통편의가 다소 개선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교통 불편은 더 개선되어야 할 것 같다. 

이후 1990년대 후반부터는 왕피천 하류 지역인 근남면 굴구지의 수려한 계곡과 하천에는 숙박 시설과 야영장 등 민간 상업지구가 들어섰다. 상류 지역인 영양군 수비 일대도 마찬가지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향토 특성을 살린 축제(굴구지 피라미축제, 수하계곡 별빛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와 함께 2000년대에는 근남면 수곡리 일원에 민간인의 온천개발 문제로 울진 주민과 시민단체 등의 환경보전 운동이 본격 시작되었다. 왕피천 온천개발은 결국 무산되었다. 


2005년에는 환경부가 천혜의 자연환경 보전을 위한 노력으로 왕피천 일부 지역을 남한 최대의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하였다. 2013년에는 생태관광지로 선정되었다. 

울진군에서 2021년에는 왕피천과 불영사 계곡 일대를 『국립공원』으로 추진하고자 했으나 관련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2022년 현재 왕피천 하구에는 왕피천 공원과 케이블카가 구축되었다. 또한 7번 국도가 확 · 포장되는 동시에 울진역과 철도 개설을 눈앞에 두고 있는 등 울진, 영양지역 등에서 인문환경 면에서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한 변화의 몸살에도 왕피천은 유장하게 살아서 흐르고 있다. 때로는 굽이치고, 때로는 고여서 소(沼)가 되고, 내리꽂히는 폭포수가 되어 깨어지고, 부서지고, 흐르고 흘러서 뭍 생명을 살려낸다. 마침내 동해로 흘러들어 장쾌한 하나의 너른 바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했던가!


1990년대 왕피천 발원지를 탐사하다

필자가 최초로 왕피천 탐방 기행을 한 것은 1992년 8월이었다. 이후 두 차례 탐방은 시민단체와 2000년, 20001년 울진자연생태학교 활동 때였다. 지금은 30년 세월이 지난 2022년 7월 현재, 왕피천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가? 

제4차 탐방일시는 상류지역은 2022년 6월 25일-26일(1박2일), 중·하류는 7월 초순 경이다. 이번 탐방 중점 지역은 영양군 일월면의 오기못 우천 상류 지역 발원지이다. 우천마을의 발원지 1차 탐방(1992년 8월 1일) 시 발견한 발원지 샘이 참으로 궁금하였다. 그래서 왕피천 발원지를 발원지는 물론 그 둘레의 자연과 인문환경이 변화된 모습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왕피천을 편의상 하류, 중류, 상류인 3개 구역으로 나누어 탐방했다. 제1구역인 하류는 근남면 망양 4리 왕피천 하구부터 근남면 구산리 용소까지, 제2구역인 중류는 용소부터 왕피리 햇내, 영양군 수비면의 수하계곡 일원까지, 제3구역인 상류는 영양군 수비면 장수 포천과 일월산 오기못 지류인 우천마을 상류 발원지를 중심으로 하였다. 


모든 강의 발원지는 작은 샘이다.

최근 문화재청에서 남한 5대강 발원지를 문화재청에서 국가 명승으로 지정하기 위해 첫 삽을 떴다는 언론보도(22. 6. 4)가 있었다. 국가 명승 지정은 강의 시작점인 발원지를 보호하고 그 둘레의 역사와 문화 등을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모든 하천의 시원은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샘물이다. 바로 그곳이 발원지이다. 그 작은 물길이 차츰 내와 소나 연못을 이루고, 마침내는 유장하게 흐르는 물줄기가 되는 강이다.


참고로 남한의 5대강 발원지는 다음과 같다. 한강의 발원지는 태백의 금대봉(1418m)의 검룡소(儉龍沼), 낙동강은 태백시의 황지(黃池) 연못, 금강은 전북 장수 신무산(987m) 중턱의 뜬봉샘, 섬진강은 전북 진안 천상데미봉(1099m)의 데미샘, 영산강은 전남 담양 용수산(523m) 가마골의 용소(龍沼)이다. 이와같이 5대강의 발원지는 소(沼)가 아니면 샘이다.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은 나라이다. 국토 특성상 면적이 산지가 전체 국토의 63.3%를 차지하고 있다. 산이 많은 지역은 대체로 계곡들이 물을 머금고 있어 웬만한 가뭄에도 물이 흐른다. 다시 말해 산이 물을 대어 주지 않으면 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하천의 시원은 산줄기의 어느 작은 샘물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물줄기는 바다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고, 드디어 대양에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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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구지 산간마을. 오른쪽 하천이 왕피천이다

 

왕피천 발원지는 어디인가?

왕피천은 한반도 등뼈 백두대간의 낙동정맥이 남북으로 곧게 뻗어 내리는 산간 협곡에서 서에서 굽이쳐 내리다가 망망대해 동해로 흘러든다. 왕피천은 울진의 대표적 하천으로 생명의 젖줄에 비유된다. 총길이가 61㎞이고, 어떤 자료는 68.5㎞로 제각각이다, 발원지의 최초 시작인 발원 지점이 정확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유역 면적은 514㎢이다. 

한편 울진군이 제공한 지방 하천관리 현황에 따르면 관내 하천수는 왕피천, 남대천 등을 비롯해 23개에 이른다. 남대천이 1993년, 왕피천이 1994년에 기본계획이 수립, 그때부터 울진의 주요 하천이 행정당국에서 본격 관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하천이라 함은 하(河)는 강(江)을 말한다. 川(천)은 내를 말한다. 통상적으로, 하(河)는 물이 많고 강 아래 면적(유역)이 넓은 큰 강을 말하고, 천(川)은 그보다 작은 강을 말한다. 왕피천이 강(江)이라 이름하지 못한 것은 다른 강에 비하여 하천 유역에 넓은 평야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왕피천은 총길이만으로는 남한 10대 강 중 8대 강에 속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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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8월 1일 금장산 중턱 기슭의 발원지 확인하다.

정연철 선생(좌)과 필자

 

왕피천에는 여러 지류가 있다. 영양군 수비면에 걸쳐 있는 금장산(849m) 기슭에서 발원하여 지류인 신원천이 된다. 이곳의 여러 작은 지류가 합쳐 영양군 지역에서는 수비나 수하계곡에서는 심천(기프내), 장수포천(長水浦川)이다. 또 하나의 발원지는 영양 일월면 일원산 기슭 오기 저수지 상류 지역인 우천마을 지류이다. 이 지류가 흘러 장수포천으로 되었다가 울진군 금강송면 왕피리에 유입되면서 왕피천이라 한다. 울진 통고산 중림골에서 흘러내리는 지류가 왕피리에서 왕피천으로 흘러든다. 왕피천 하류인 성류굴 일원에서 매화천과 광천이 합수하여 수산천을 이루어 동해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그 맑고 푸른 왕피천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어디에서 시작하여 수억 년을 두고 흐르는가?

울진지역에서 왕피천 발원지 논란은 90년대에 있었다. 필자도 그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강줄기를 따라 상류까지 올라가 확인하는 것이다. 통상 왕피천은 그 발원지가 영양 일월산에서 시작한다고 알고 있다. 정말 그럴까? 하는 통념을 깨뜨리기 위함이었다. 

 

1992년 8월, 1차는 탐방은 영양 수비와 울진 온정면의 금장산 일대였다. 왜냐하면 지도상 왕피천 길이가 일월산보다 금장산 물길이 길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행자는 후배인 노음초등학교 정연철 선생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충 야영 장비를 갖추고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왕피천 계곡을 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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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구지 오름마 생태경관보전지구 제4초소

생태지킴이와 함께(맨오른쪽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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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피리 속사마을 입구 생태경관보전지구 제3초소

 

우리는 근남면 구산4리 굴구지의 구고분교 아래의 강줄기에서 출발 기점을 잡고서, 오름마까지 물길을 따라갔다. 왕피천은 협곡 속사마을을 굽이굽이 흘러서 굴구지 오름마를 서쪽에 두고 강줄기는 잠시 구고분교 앞에서 그 폭이 약간 여유롭게 넓어진다.

굴구지 산촌마을 앞 남서쪽은 일곱 개 봉우리(칠성봉)이 마을을 감싸 안는다. 칠성봉 아래로 흐르는 왕피천은 물길도 서늘하고 풍광도 아름답다. 구고분교 앞 냇가, 물길을 따라 오르며 용소까지 50여 분 가면 너른 개활지와 자갈밭이 나오고, 산세가 수려한 협곡에는 너른 암반이 나온다. 바로 용이 승천했다는 용소(龍沼) 들머리이다. 필자는 1980년대에 구고분교 교사로 근무했기에 동네 사람들에게 용소(龍沼)의 전설을 들은 바 있었다. 


용소는 암벽 전체가 아주 깨끗하고 하얗다. 물은 시퍼런 소로 되어 있고 흘러넘쳤다. 암벽 아래 냇가에 물에 바로 들어갔더니 참으로 시원하다. 우리는 용소는 험한 암벽으로 후일을 기약하고 바로 앞산 고개(바랭이골)를 넘었다. 그 재를 넘어 계곡을 따라 오르면 만나는 왕피 첫 동네가 속사마을이다. 당시는 2가구가 있었다.

속사에서 1박을 하고, 영양 오무 송방 등지를 지나 울연산 계곡을 따라 영양 수비의 장수포천을 살펴보았다. 장수포천은 예나 지금이나 상수원 보호구역이었다. 당시 우리는 일월산 오기못 우천마을 상류 지역은 보류해 두고, 동쪽 신암천을 따라 수비 본신을 지나 온정면 주령 금장산의 남서쪽 중턱에 이르렀다. 주령을 넘으면 백암온천이다. 작은 개울 물줄기를 따라 오르니 산기슭의 한 웅덩이를 발견했다. 샘이었다. 그 당시는 정확한 위치 추적이 어려웠지만 금장산 쪽 왕피천 발원지를 확인하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왕피천 총길이에 대한 그 시작점인 정확한 발원지는 아직 미확정인 셈이다.


2차 탐사는 2000년 7월 말경, 제1회 『울진자연생태학교』에서 2박3일간 왕피천 수계 탐사 활동에서 시작되었다. 필자를 비롯하여 교사, 학생, 학부모 등과 함께 일월산 중턱으로 탐사했다. 당시는 왕피천 민물고기나 조류, 동물 정도를 관찰, 조사하는 수준이었다. 

2차 탐사시 왕피천 발원지의 하나인 영양 일월 오기못 상류지역인 우천마을 샘을 발견한 것이다. 나름대로의 성과라면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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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구지 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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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들머리

 

3차 탐사는 2001년 여름, 왕피천 계곡의 절경인 용소를 처음으로 살펴보았다. 제2회 『울진자연생태학교』 아이들과 교사 등과 왕피천 계곡을 둘러볼 때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굴구지 용소 탐방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용소 위쪽으로 등산로는 물론 안전한 시설을 갖춘 탐방길이 아니었다. 나는 용소를 보기 위해 들머리의 북쪽 기슭을 타고 올라갔다. 가파른 바위 위에서 용소를 내려다보았다. 발아래 용소를 처음 보는 순간 아찔한 기분이었다. 시원하고 깊은 소였다. 용이 꿈틀대듯 흐르는 물이 소용돌이친다. 문득 앞을 바라보니 앞산은 높고 하늘은 까마득하다. 바위틈에는 장자의 굽은 소나무들이 구만리 장천을 나르고 있는 형상이다. 나는 오금이 저려 뒤로 물러나 산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지금은 왕피천 제2 탐방로가 개설되어 안전하게 용소와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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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구지 생태탐방로 제1구간

 

문헌에 나타나는 왕피천

앞서 기술했지만 왕피천은 경상북도 영양군 수비면 본신리와 일월면 오기리 산지에서 발원하여 금강송면 왕피리에서 왕피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그래서 왕피천 상류 지역 이름 또한 영양군 수비 일대에서는 신암천, 심천(기프내)란 이름으로 흐른다. 이 지류가 합쳐진 장수포천은 깊은 계곡으로 크고 작은 소(沼)와 폭포를 이루며 약 20㎞를 울진 방향으로 흐른다. 장수포천은 울진군 왕피리로 유입되면서 들면서 왕피천이 된다. 하지만 왕피리에서는 햇내, 근남에서는 수곡천, 장천, 수산천, 수산 냇가 등으로 이름한다. 마을 지명이 냇가 이름이 된 것이다. 왕피천이라는 이름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보편화된 것은 최근이다. 이제는 왕피천이 공식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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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일부)

 

문헌적으로는 고산자 김정호(?-1884)가 만든 대동여지전도(출처: 한국 TV 방송국 발행)에는 울진지역의 지명으로 안일왕산, 죽진곶, 울진, 월송, 백암산이 나타나고 서쪽 경계로는 영양의 울연산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울진 남쪽에 지렁이 모양의 지형이 나타나는데 아마 왕피천을 말하는 것 같다. 


1939년판 울진군지 하천 편에 따르면 읍내천은 울진면 읍내리에 있고, 흥부천은 군의 북쪽 4리 되는 부구리에 있으며, 수산천은 군의 남쪽 1리 되는 수산리에 있다.

여기 기록에는 왕피천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왕피천 하류인 수산천이 나타나 있다.


1984년판 울진군지 하천편에 왕피천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문헌상 『왕피천』이라는 이름이 공식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왕피천- 영양군 일월산 동록 아래 수비리에서 발원하여 백암산 및 금장산의 서쪽 모든 물을 합하여 심천리에 이르고 다시 그곳에서 심천수와 합하여 서면 왕피리에 와서는 통고산 물을 받아 한천이 되었다. 다시 근남면 구산리 구고동에 와서는 청암폭이 되고 수곡으로부터 북평동을 회류하여 매화천 물과 합수된 후 노음리 장평 평야의 저수지가 되고, 성류굴 관광객의 선유장이 되어 행곡리 앞 광천을 합하여 수산리를 거쳐 망양정하를 감돌아 해수욕장을 바라보며 동해로 유입한다. 연중 장류수는 군내에 왕피천 뿐이다. 1950년 이전에는 행인은 물론이요, 자동차까지도 도선장으로 월천케 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왕피천이 일월산 동쪽 기슭에서 발원한다는 것이나 정확한 위치 고증은 없다. 또 백암산 금장산의 물을 합하여 심천리에 이른다고 했다. 심천리는 심천(深川, 기프내)이다. 현재의 울진의 왕피리와 경계 지역으로 수하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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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남 왕피천교(일명 수산다리) 현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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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에서 바라본 왕피마을

 

울진 온정면과 금장산과 주령 너머 영양 수비면의 본신리와 신원리의 지류로는 신원천이 흐른다. 신원천은 발리리를 지나 장수포천이 된다. 발리리에서 낙동강과 왕피천 등으로 나누어 지류가 흐른다. 또 하나는 근남 노음리와 수산리에 놓인 왕피천교는 1950년(한국전쟁) 이전까지 시멘트 다리가 건설되지 않아 사람과 자동차 등을 운반수단인 도선으로 왕피천을 건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전쟁 이후 세멘트 다리가 놓인 것을 알 수 있다. 

왕피천은 문헌적으로 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에는 강의 모양이 곡선 형태로 나타냈다. 1939년 구군지에는 수산천으로, 1984년 울진군지에 공식으로 왕피천이라 했다.


왕피천의 전설

전설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형태의 설화이다. 전설은 민담(옛날이야기)과 달리 역사상 사건을 소재로 하고, 증거물이 남아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왕피천에는 3가지 전설이 흐른다. 먼저 왕피라는 지명은 왕이 피난 왔다는 데서 유래한다. 예전에는 사람이 더욱 접근하기 어려운 첩첩산중 왕피에 피난살이 했던 왕은 누구일까?


전설 1. 다른 하나는 먼 옛날 삼한시대 삼척과 울진지역을 지배하던 실직국의 안일왕이 예국(강릉)의 침공에 맞서 왕피와 소광리 일대에 성을 쌓고 저항했다는 설이다.


전설 2. 935년경에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왕자 마의태자가 금강산을 입산하기 위해 잠시 머물다 갔다는 이야기이다. 

 

전설 3. 1361년 원나라 홍건적의 침입을 받은 고려 31대 공민왕이 왕피천으로 피신해서 지명을 왕피라고 했다는 설이다. 필자 나름으로 이 세 가지 전설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전설 1은 고대 동해안 지역에는 강릉의 예국, 삼척의 실직국, 울진지역에는 성읍국가인 파조국(波朝國)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삼국이 공존했지만, 세력권 다툼으로 삼척의 실직국 안일왕이 파조국을 침범 합병하고, 그 실직국은 예국(강릉지역)에 합병되었다. 예국이 실직을 침공했을시 안일왕은 울진군 소광리 일대에 피난 와서 산성을 쌓아 저항했다. 이 산성을『안일왕산성』 또는『애밀왕성터』라고도 한다. 


한때 실직국왕이 머물렀던 왕피리에는 군사 관련 지명이 여럿이다. 병위(兵衛)는 실직국 안일왕의 군사들이 머물렀던 곳이고, 포전(飽田)은 군사들이 밥을 먹던 곳이다. 또 핏골은 왕이 적에게 붙잡힌 곳이다. 실직국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을 거리고라 했다. 금강송면 소재지 삼근리에서 왕피로 넘어오는 재를 (복두괘현이 박달재로 음운변화가 됨)이라고 한다. 이 박달재는 애밀왕성이 함락되자 왕이 신하와 옷을 바꿔 입고 도망하다가 이곳에서 복두를 쓰지 못하고 그냥 도망한 곳, 두건을 걸어 놓은 고개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설 2는 지금부터 1200년 전의 일이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고려 왕건에게 귀순했다. 하지만 경순왕의 아들이자 왕위계승자로 영순위였던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지 않고, 단순히 금강산으로 들어가 여생을 마친 걸로 기록된다. 하지만 고려에 귀순하기를 끝내 거부한 태자가 쉽게 금강산으로 들어가 일생을 마쳤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삼국사기 기록은 좀 허술하다. 왜 그가 신라에 저항치 않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은둔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없다. 


한편으로는 이 전설에 따르면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울진 왕피를 지났다는 것인데 왜 이런 험한 노정을 택했을까 싶다. 당시에도 금강산으로 가는 제일 빠른 길은 경주·영천·선산·충주·양평·홍천·인제·금강산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역사가들이 이와 관련한 연구에 따르면,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지 않고, 강원도 인제 일대에서 신라 부흥 운동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이후 그 후손은 만주로 이동해 금나라를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따라서 전설 2는 마의태자가 왕피에 왔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지나 더 역사적으로 규명할 문제이다.


전설 3은 1391년 고려 31대 왕인 공민왕이 원나라 홍건적을 피해 왕피로 피신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울어지는 고려 국운을 생각하며 통곡했다는 산이 통고산이라고 한다. 또 왕피리의 임광터(군사가 쉬었던 곳), 거리고(병기나 곡식을 보관했던 창고)니 하는 지명은 군사와 관련된 지명이다. 글쎄다. 옛날 왕이 피신할 때면 많아 수십 명 정도 사람일 텐데 군사가 머무를 정도로 많은 수가 왕을 따라왔을지 의문이 든다. 더구나 먹을 식량도 조달하기 어려운 첩첩산중에 과연 피신했을까?

문헌 기록상 공민왕은 홍건적 침입 시 경상도 복주(현 안동)로 피신했다고 되어 있다. 또 다른 전설로는 영주시 평은동의 왕유동으로 피신했고, 청송의 청량산에도 피신했다고 전해온다. 

 

이 세 전설은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화자(말하는 이)와 청자(듣는 이)가 서로 내용이 바뀌거나 새로 덧붙여져 전해 오기에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기에는 어렵다. 하지만 필자는 전설 1에 주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전설상 여러 화소와 내용이 풍부하고, 그 증거물인 지명이 여러 곳에 유래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직국 전설은 기록상 고대 부족국가 시절 파단(波旦)으로도 이름했던『실직국』이 역사의 장에서 사라진 시기는 102년, 파사이사금(波娑尼師今: 신라의 왕을 지칭함) 때인 10월 자진 항복한 것으로 나온다. 국보 242호인 봉평신라비에도 『실지』라는 이름의 지명이 나오기 때문에 전설1이 신빙성이 더 있어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다. 이와 관련 왕피천에 대한 필자의 졸시 한편 올린다.


안일왕이 쫓겨오고/마의태자가 숨어들고/공민왕이 피난오고/ 비경보다 더 깊고/청산도 울고 드디어 통곡하고/비탄과 한이 서렸다는 전설의 강// 망국의 슬픔/ 그들만의 슬픔이었을까/ 백성들의 슬픔이었을까/아니면 둘다 슬퍼했을까/아니면 이도저도 아니었을까// 백성들이야/ 강물처럼 흐르고 흘러 유장하지만/천년왕조 빛나던 부귀영화도/구름 따라 낙엽 되어/굳어버란 화석 한 조각// 저 강가/ 청산을 희돌아/종종대며 달려온/ 물새 한 마리/ 빗살무늬 발가락마다/ 오래된 청동 구리 전설이 흐른다. (김진문, 울진+산책1, ‘왕피천 1’ 연작시에서)


역사를 옛말로 통감(通鑑)이라고 했다. 그래서 역사는 더욱 옛일을 상고하고, 미래를 비추는 거울로 삼으렸다! 오늘도 왕피천은 이러한 애환의 전설을 간직하고 거울처럼 유장하게 흐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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