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피천은 살아 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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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오기못 상류 우천 마을 민가의 발원지(샘터)
발원지를 돌아보는 영양군 이원영 문화해설사(우)와
일월 출신 권상원 전초등학교장(좌)
왕피천 상류 영양 장수포천의 지류(영양군청 제공)
왕피천의 본류와 지류
왕피천의 지류와 이름을 말하기 전에 발원지의 개념을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하천 발원지의 사전적 의미는 하천이 처음 시작되는 곳을 말한다.
사전적 정의는 흐르는 물줄기가 처음 시작되는 곳(네이버 사전), 수계의 발원지는 정확한 하천 길이의 측량상 하구로부터 가장 먼 곳(한국 하천 일람)으로 최장 거리 발원지를 말한다. 또 하나는 최장 거리보다는 오래전부터 발원지라고 인정한 장소로서 역사적 발원지를 말한다. 이 때문에 큰 하천의 물줄기(본류)는 수많은 지류가 합쳐진 것으로 발원지를 하나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발원지에 관한 지역 간의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기도 하다. 지금은 최장 거리 발원지와 역사적 발원지로 구분하는 경향이다. 일례로 한강의 경우 최장 거리 발원지는 태백 검룡소, 역사적 발원지는 평창 오대산 우통수로 인정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왕피천은 남한 10대 강 중에서 그 길이가 8번째로 60.95킬로미터이다. 왕피천은 불영천 유역, 매화천 유역, 장수포천이라 하는 3개의 유역과 7개의 지류로 구분할 수 있다. 또한 오염되지 않은 낙동정맥의 산간지대에서 발원하여 연중 유량이 풍부하고, 협곡과 생태 경관이 수려하기로 이름 나 있다.
왕피천의 경우도 상류 지역에서 본류인 장수포천(24.02㎞)으로 흘러드는 지류로는 신암천(10.42㎞), 본돈천(5.26㎞), 신원천(9.36㎞), 발리천(6㎞), 지류이다. 이 지류가 합쳐져 영양지역에서는 장수포천이란 이름을 하고 있다. 이 장수포천은 울진군 왕피로 흘러든다. 왕피리에서는 통고산 점봉골에서 흘러드는 지류가 있다. 왕피천은 왕피리를 경유하여 구산리(굴구지)로 유입하면서 산골짜기에서 이름 없는 작은 지류의 물을 합쳐 흘러든다. 또 하류는 매화천, 광천이 합쳐져 왕피천(본류)은 동해로 흘러드는 것이다. 따라서 왕피천은 대략 영양 수비의 상류 쪽에 신원천(금장산 본신계곡), 본돈천(수비 울연산 근처),발리천(수비) 신암천(수비 신암)등 4개 지류와 왕피리 점봉골 지류 1개이다. 하류에서는 매화천(매화)과 광천(근남 행곡리)이 합쳐지고 있다. 모두 7개의 지류가 합쳐져 본류인 왕피천이다. 하지만 왕피천의 발원지 또한 어느 곳이 발원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역사적 발원지로는 오기못 상류 웃천마을 또는 발리천의 용수골(곡)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최장 거리 발원지로 금장산(신원천 본신계곡) 중턱을 말하기도 한다. 이는 앞으로 더욱 고증이 필요하다.
영양 오기저수지
왕피천 유역의 마을
왕피천 유역의 마을은 대체로 협곡에 있다. 주로 왕피천이 지나는 개활지에 형성된 곳에 논과 밭들이 있다. 왕피천이 흐르는 지역은 대부분 산간벽지이다 하류 지역에 속하는 굴구지, 근남 수곡, 뒤들, 노음 수산, 산포 등지에 조금 너른 평야 지대이다. 왕피천의 이러한 자연환경은 대체로 잘 보전되고 있으나, 1980년대 후반부터 인문 지리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왜냐하면 왕피천 상류 발원 지역인 영양군의 장수포천과 오무 송방등 수하계곡에는 영양군 청소년수련원, 반딧불이생태공원과 민간상업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1980년대 말에는 울진지역 금강송면 왕피리에 종교집단촌인 한농복구회가 집단으로 입주해 인구가 갑자기 불어나기도 했다. 굴구지기 산촌에는 민간상업시설인 팬션과 캠핑장이 들어섰다.
왕피천이 본격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0년대부터이다. 자연생태란 인간의 손길이 미치면 훼손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무분별한 개발을 막고 왕피천생태보전활동을 위한 노력이 시민환경단체 등에서 본격 시작되었다. 그러한 결과 2005년도에 행정당국에서는 왕피천 유역을 『왕피천생태환경보전지역』으로 지정하였다. 현재는 국가 기관인 대구지방환경청(왕피천환경출장소)에서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
한편으로 금강송면 왕피리와 근남면 굴구지 등에서는 도로가 다소 개선, 확장되었다. 왕피천 일대 하류인 수산교 일대는 옛 수산교와 7번국도 수산교(4차선)는 포항, 삼척 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 왕피천 하류에는 상업 관광시설인『왕피천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다. 또한 포항과 삼척을 연결하는 철도가 건설되어 완공을 앞두고 있다.
이 글에서는 울진군의 왕피천 유역 마을인 금강송면 왕피리, 근남면 구고리(굴구지), 수곡리(비월, 막금, 두전), 노음리(장평, 오로동), 수산리, 산포리 1리(도촌, 일명 섬마실), 산포4리(망양, 일명 둔산) 만을 대략 소개한다.
왕피 마을
울진군 금강송면 지역으로 원래 행정구역명이『서면』이었는데 2015년 4월 21일에 『금강송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왕피리는 왕피1리와 왕피2리로 되어 있다. 왕피 1리는 영양 수비와 경계를 이루며 맞닿아 있다. 북쪽은 통고산 지맥인 박달재를 넘어가면 금강송면 소재인 삼근리이다. 왕피리는 김녕김씨가 처음으로 입향,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피리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하나는 울진과 영주를 잇는 국도 36호선 부근인 금강송면 하원리 새터 마을에서 통고산을 향해 개설된 임도를 따라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국도 7호선 주변에서 매화면 매화리로 들어와서 대령산을 넘어 왕피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왕피라는 마을 이름 유래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울진이 실직국(삼척)에 합병으로 있을 때 안일왕이 예(강릉)의 침공으로 왕피를 근거지로 저항했다는 설이다.
둘째 서기 935년경에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왕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손씨(孫氏) 모후(母后)와 함께 이곳으로 피신 왔다가 모후가 이곳에서 별세하고 왕자는 금강산으로 갔다는 설이 있고, 셋째로 1361년 원(元)나라 말엽에 홍건적이 한반도로 남침하므로 고려 31대 공민왕이 피신하였던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 세 가지 설화를 검토한바 필자는 안일왕저항군 주둔설이 유력함을 이미 언급했다.
왕피천 너우내 은어길 안내판
왕피천은 햇내(한천 寒川)라 했다.
왕피리의 자연환경은 서쪽에는 통고산(通古山)[1,066m], 동쪽에는 대령산(大嶺山)[652.1m], 북동쪽에는 천축산(天竺山)[653m] 등이 높이 솟아 있다. 대부분이 첩첩 산맥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마을 중앙으로는 영양군에서 발원한 왕피천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장수포천은 울진군 경계지역에 들어와서는 왕피천이라 하지만 왕피리 상류에서는 햇내(한천)라 했다고 한다. 그 유래는 안일왕 또는 공민왕이 이곳에 피난 왔다가 내를 건너면서 눈 녹은 물이 몹시 차다하여 한천(寒川)이라 했다고 전해온다.
1980년대 후반 왕피리에 종교단체인 한농복구회(韓農復舊會)가 입주해 신자 대부분이 농사 등에 종사하고 있다. 이 한농복구회는 친환경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으며 소외된 농민들의 복지증진으로 이상적 농촌을 복구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주요 성씨로는 김녕김씨, 삼척김씨(三陟金氏), 홍천용씨(洪川龍氏), 순흥안씨(順興安氏), 김해김씨(金海金氏) 등이 살고 있다. 현재는 한농복구회 주민들이 왕피리 전체 인구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2006년에는 왕피천 유역 생태·경관 보전지역 지정되어 주변 경관이 잘 보존되고 있다.
굴구지 산촌 마을
울진군 근남면 구산3리 마을이다. 1300년 전 충주 지씨가 개척한 마을로 알려져 있다. 근남면 소재지인 노음리에서 구산리 뒤뜰과 잘미, 달길을 지나야 비로소 굴구지 마을에 닿는다. 굴구지 산촌 생태 마을은 왕피천 하류에서 아홉 고개를 넘어야 비로소 마을이 있다고 해서 예부터 『굴구지』 또는 ‘구고동’이라 했다.
왕피천이 흐르는 계곡 경치가 수려하고, 마을 사람들의 인심이 후한 오지 마을이다. 울진군에서는 이 마을의 자연 자원을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여 주민들의 소득 증대에 이바지하기 위해 2009년에 마을을 정비한 마을로 산촌체험센터가 있다. 이 마을에 오면 산촌 생활상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산촌체험 프로그램으로 감자떡 만들기·손칼국수 만들기·산나물 채취·송이 채취 등이 있다. 그리고 태양초 고추·유기농 쌀·무·배추·육쪽 마늘·산골 감자·콩·참깨·양파·메밀을 구매할 수 있다.
주민 대부분은 농업과 임업에 종사하며, 특히 가을철에는 송이 판매로 소득을 올린다. 왕피천 생태 탐방로 2구간이 굴구지 마을에서 왕피리 속사 마을까지 나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해마다 6월 중순쯤에는 『왕피천 피래미 축제』를 열어 산신제, 길놀이, 피라미 낚시 대회, 은어와 송어 잡기 체험 등을 제공하고 있다.
굴구지 산촌마을은 최근에 많이 알려져 탐방객들이 찾고 있다. 그래서 마을 탐방객 등을 위한 민박, 팬션 시설인 『왕피천하늘담팬션캠핑(www.haneuldam.co.kr』, 『왕피천모래언덕펜션(캠핑장)』, 『굴구지산촌팬션』등이 운영되고 있다.
근남 수곡 비들앞마을 전경
왕피천은 수곡리에서 수곡천이라 했다.
수곡리는 울진군 근남면 지역으로 누금(累金, 수곡1리), 막금동(幕錦洞, 수곡2리)·두전동(斗田洞)·비들앞(飛前洞, 수곡1리)을 합하여, 수곡리라 한다.
왕피천은 굴구지 산촌마을 동남쪽과 남수산 아래를 지나 제법 강폭이 너른 너우내를 지나서 잘미 마을을 동쪽에 끼고 말앞(두전)으로 흐른다. 이제 수곡리 마을 앞을 지남에 따라 왕피천은 수곡천이라 이름한다.
자연환경은 서쪽에는 천축산[653m]이 있고, 동쪽에는 매봉산[154m]과 동해로 흐르는 왕피천 건너 울진의 성류굴이 있다. 서쪽은 통고산맥(通古山脈)이 동쪽으로 뻗어 한티재[寒汰嶺]를 이루고 있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주요 농산물은 쌀·콩·고추·감자 등이 생산되고 있다. 비들앞·누금·막금·두전 등의 자연마을이 들어서 있다. 주요 성씨로는 울진장씨(蔚珍張氏), 여양진씨(驪陽陳氏), 경주이씨(慶州李氏) 등이 많이 살고 있다.
누금은 자연경관이 빼어난 왕피천과 성류굴이 가까이 있는 작은 마을이다. 울진군은 2006년 12월 남사고의 생가터가 있는 수곡리 일대를 경북 북부 유교문화권 관광자원으로 『격암 남사고 유적지』를 조성했다. 왕피천은 격암 남사고 유적지 바로 앞을 흐르고 있다.
굴구지로 가는 너우내 냇가
근남면 구산리
울진군 근남면의 지역으로 뒤들(북평동, 구산1리), 바깥잘미(구산2리), 안잘미(구산4리), 달길(月湖), 굴구지(구산3리, 구고, 굴구지 산촌마을)로 되어 있다.
자연환경은 구산리의 동쪽은 매화천(梅花川)이 흐르고 있고, 동쪽에는 남수산(嵐峀山)[437.7m]이 매화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쪽은 통고산맥(通古山脈)과 금장산맥(金藏山脈)이 있으며, 그 사이에 왕피천이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구산리(안잘미) 성산못을 지나면 왕피천이 제법 폭이 넓어진 굴구지로 가는 너우내가 있다. 너우내를 건너 바람받재를 넘어가면 청암정이 있는 왕피천 냇가이다. 지금은 너우내를 건너지 않고 달길을 지나는 도로가 개설되어 굴구지 산촌마을로 편리하게 드나들 수 있다.
뒤들은 논밭 토질이 비옥하여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주요 성씨로는 신안주씨(新安朱氏), 영양남씨(英陽南氏), 경주이씨(慶州李氏), 울진임씨(蔚珍林氏), 현풍곽씨(玄風郭氏), 삼척김씨(三陟金氏), 광산노씨(光山盧氏), 울진장씨(蔚珍張氏), 김녕김씨(金寧金氏) 등이 살고 있다.
왕피천은 성류굴 앞쪽에서 매화천을 받아서 흐르다가 민물고기체험전시관 앞쪽에서 행곡리의 광천과 합류하여 수산천을 이루어 동해도 흘러든다.
노음리 오로동 전경
근남면 소재지 노음리
근남면 노음리와 오로동
울진군 근남면 지역이다. 노음리의 동쪽은 산포리의 도촌(島村)마을과 인접하고, 서쪽으로 울진의 성류굴과 수곡리에 경계를 하고 있다. 남쪽은 매화면 금매리와 경계를 하고, 북쪽은 왕피천이 동해로 흐르고 있다. 왕피천은 성류굴 앞을 지나 동남쪽에 노음리 오로동을 끼고 제방을 따라 수산교와 7번 국도 교량과 현재 건설 중인 철교를 두고 동해로 흘러든다. 오로동은 1450년경 영양남씨인 5명(상유, 순하, 순행, 순시, 순화)의 노인이 촌장격으로 동민을 이끌어 갈 때 원님이 순시할 때 노인의 이름을 몰라 오로(五老)라 한데서 마을 이름을 오로라 하였다.
근남면 소재지인 노음리는 파출소, 우체국, 농협 지소, 노음초등학교가 있다. 구국도 7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지나고, 있다. 이 외에도 소규모의 도로가 곳곳에 연결되어 있다. 노음리 주민 일부는 소재지와 성류굴 주변에서 상가, 식당, 다방, 여관 등 상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오로동 대다수 주민은 농사를 짓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벼를 비롯하여 양파와 감자가 많이 재배되고, 이 외에도 마늘·고추·콩·참깨 등이 있다. 주요 성씨로는 영양남씨(英陽南氏), 파평윤씨(坡平尹氏), 김해김씨(金海金氏), 밀양박씨(密陽朴氏), 전주이씨(全州李氏), 김녕김씨(金寧金氏), 강릉최씨(江陵崔氏) 등이 많이 살고 있다.
근남면 수산마을
왕피천은 수산마을에서 수산천이라 했다.
울진군 근남면에 있는 수산리는 원래 수산마을, 염전동, 비래동으로 되어 있었으나, 염전동과 비래동에는 민가가 없다. 최근 모두 이사해 수산본동으로 옮겨 왔다.
수산이라는 마을 이름 유래여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수산역이 있었으므로 수산·수산역 또는 역마·역굴이라 하였고, 둘째는 왕피천을 수산천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하천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수산리라 하였다. 셋째는 옛날에 왕피천 물이 넘쳐 강변석산(江邊石山)[독뫼산]이 급류를 막아 마을의 침수 되지 않았다. 그래 수산(守山)이라 하였다고도 전한다.
자연환경으로는 수산리의 동쪽에는 비래봉과 동해에 각각 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금산(錦山)의 지맥(支脈)이 마을 뒷산을 이루고 있다. 남쪽은 왕피천이 동해로 흐르고, 북쪽은 2㎞ 거리에 군 소재지인 읍내리가 있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주요 농산물은 쌀·콩·고추·감자 등이 생산되고 있다. 주요 성씨로는 우계이씨(羽溪李氏), 삼척김씨(三陟金氏), 울진임씨(蔚珍林氏), 울진장씨(蔚珍張氏) 등이 살고 있다.
왕피천 하구에는 경상북도에서 운영하는 민물고기체험관과 왕피천 공원이 조성되었다. 또한 최근에 망양정 케이블카가 조성되어 동해 경관 등을 즐길 수 있다.
국도 7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지나고, 서쪽으로 국도 36호선이 봉화군과 연결되고 있다.
왕피천 하류 섬마실(근남면 산포1리 도촌동) 전경
섬마을과 둔산마을
울진군 근남면에서 왕피천이 지나는 곳으로 산포1리(도촌, 일명, 섬마을)와 산포 4리(망양동, 일명 둔산)이 있다.
옛날 왕피천 하구(河口)에 모래가 쌓이기 전에는 1000m 이상이 포구(浦口)로 되어 있어 배가 왕래(往來)하였다 하여 산포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인 둔산동(屯山洞)과 세포동(細浦洞)에서 ‘산(山)’자와 ‘포(浦)’자를 따 ‘산포(山浦)’가 되었다.
왕피천은 성류굴 앞을 지나 오로동과 노음리 소재지를 거쳐서 수산천이 된다. 다시 산포1리(도촌, 일명, 섬마을) 북쪽을 지나 산포4리(둔산동)가 있는 동해로 흘러든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주요 농산물은 쌀·콩·고추·감자 등이 생산되고 있다. 주요 성씨로는 삼척김씨(三陟金氏), 청풍김씨(淸風金氏), 평해황씨(平海黃氏), 울진장씨(蔚珍張氏), 김해김씨(金海金氏), 신안주씨(新安朱氏), 평창이씨(平昌李氏) 등이 살고 있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이 있고, 특히 여름에는 해안선을 따라 해수욕장이 형성되어 있어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인근 산포리, 진복리 해안가에는 낚시터가 좋으며, 동해안에 빼어난 경관을 이루는 촛대바위가 있다.
장수포천과 왕피천 유역의 문화 유적
영양 장수포천 일대 문화유적
영양 수비 장수포천
장수포천 입간판
약천정(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78호)
이 정자는 영양군 수비면 한티로 443번지에 있다.
약천정(藥泉亭)을 건립한 사람은 이곳 발리 출신인 조선 정조 때의 유명한 학자인 금희성(琴熙星)이다. 그 유래(由來)는 선생이 오랜 속병이 있었는데 아무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어 많은 고생을 하다가, 어느 날 영양 석보 쪽으로 흐르는 물을 마시자 고질병이 씻은 듯이 다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은 이곳에 정자를 짓고,『약천정』이라 이름하였다.
『약천정』과『반곡정사』의 현판은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이시영의 친필이다.
수산 유허비 영양군 수비면 발리리에 있다.
이 비는 조선 중기 유학자 석계 이시명(1590-1674, 石溪, 李時明)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석계 선생은 인품이 출중하고 경사와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한때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영해에서 수비로 들어와 20년간 은둔하면서 영양군 최초로 영산서원을 설립하여 주민교화와 학문연구에 힘썼다. 선생의 석계고택은 석보면 원리리(두들마을)에 있다. 선생의 부인은 한글 최초 조리서『음식디미방』저자인 장계향이다.
울진 왕피천 유역의 문화 유적
수산리 고인돌(출처: 한국문화전자대전)
고인돌
청동시대의 대표 유적으로 왕피천 유역에는 수산리와 수곡리에 분포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선사시대인 울진 왕피천 하구에는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산리 고인돌군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474번지에 있다. 마을 가운데 남-북으로 긴 야트막한 구릉에 있으며 모두 13기이다. 마을 사람들의 쉼터로 활용되기도 한다.
수곡리 고인돌은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721-1[막금1길 77]에 있다. 마을 북쪽의 폐교된 수곡초등학교 교정 서쪽에 2기의 고인돌이 있다.
구산리 삼층석탑(보물 제498호)
이 탑은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굴구지) 1494-1에 있다. 이곳에는 통일신라시대 청암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왕피 산성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왕피리 641에 있다. 통일신라시대 토석 혼축 산성지이다. 울진에 왕피성이 있었다는 옛 기록은 없다. 다만, 최근의 읍지나 군지에 실린 간단한 자료가 있을 뿐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피성은 석축성인데, 지금은 그 형태가 불분명하다. 다만, 이 일대에 있는 마을 이름은 병위[군사 병영]·포전(급식)·거리고(식량창고) 등으로 모두 군사와 관련되어 있다.
현재 톱거리에서 남쪽으로 난 산로를 따라 고개를 넘으면 폐교된 왕피초등학교가 있는 거리에 이른다. 이 일대에서 왕피리 성지의 흔적을 다소나마 확인할 수 있다. 왕피초등학교 북쪽의 산기슭에는 김재희 정효각(金在禧 旌孝閣)이 있다. 이 정효각 북쪽에 동서로 길게 뻗은 구릉이 있고, 이 구릉 너머에는 왕피천이 흐르는 깎아지른 듯한 계곡이 있다. 왕피리 성지는 정효각 북쪽의 구릉성 산지를 따라가며 일부 남아 있다. 왕피리 성지가 위치한 곳의 지형은 북쪽의 토석 혼축 성벽 너머에 절벽이 있으며, 그 절벽 아래로는 왕피천이 흐르고 있다.
구산리 잘미 성산성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외성산에 있는 고대 산성지이다.
성산성에 관한 문헌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울진군지』울진읍 성곽 성산성조에 “현(縣)의 남쪽 성산동에 석축유지(石築遺址)가 있으나 지금은 사실을 알 수 없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어 성의 정확한 존폐 여부와 운영 기간 등을 알 수 없다. 성이 위치한 구산리는 과거에 잠미동[잘미동]으로 부르다가 이곳에 성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깥잘미 동쪽 산에 외성이 있고, 안잘미 서북쪽 산에 내성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왕피천은 안잘미 마을을 두고 북쪽으로 흘러간다.
왕피리 김재희 정효각(출처: 한국문화전자대전)
왕피 김재희 정효각(1832-1894, 金在禧 旌孝閣)
울진군 금강송면 왕피리 산52-1에 있다. 왕피초등학교 북쪽의 산기슭에는 김재희 정효각(金寧金氏, 金在禧 旌孝閣)은 1910년(순조 4년) 6월 11일 건립되었으며, 단칸의 맞배지붕 와가이다.
완재정 터 답사. 후손 최중봉씨와 왕피주민 최장석씨
강릉최씨 후손의 宛在亭(완재정) 찾기
이번 왕피리 마을 탐방시 강릉최씨 문중 유적인 완재정 터를 찾기 위해 매화 거주 최중봉(매화 거주)씨와 함께 했다. 이 정자는 18세기 중반에 세운 정자로 추정된다. 최중봉씨의 5대조인 최주하(1818∼1868)라는 분이 세웠으나 불이나 소실되었다고 한다. 후손 최중봉씨에 따르면 당시 최주하 할아버지는 매화 최촌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인심이 후덕한 선비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곳 왕피리에 완재정 건립하여 독서를 즐기며 유유자적했다고 한다. 또한 왕피리 주민인 최장석(75, 전 해주최씨 울진대종회장)씨 증언에 따르면 예전부터 이곳에 매화의 어느 부자가 세운 정자가 있었다고 전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완재정 터에는 아름드리 500년 된 향나무가 있었으나, 왕피리 도로 확장 개설시 베어버렸다고 한다. 따라서 이 정자는 왕피 마을에서 경치가 가장 수려한 왕피천 언덕에 세워져 있어 옛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장소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지금은 정자 터가 사유지로 되어 있다. 지난 7월 왕피리 답사시 완재정터를 고증해주신 왕피리 주민 최장석씨께 감사드린다.
한편 후손 최중봉씨는 완재정에 관한 문헌의 기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집안 어른들의 구전으로만 들은 바 있지만, 실제 현장을 답사하여 확인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완재정 맞은편 왕피천이 흐르는 강변 바위에는 각석문이 있으나 지금은 숲이 우거져 보이지 않았다. 각석문은 8자로 懶睡洞天(나수동천)과 宛在洞天(완재동천)이다.
『懶睡洞天라수동천』『宛在洞天완재동천』석각문
석각문
『懶睡洞天라수동천』『宛在洞天완재동천』
이 각석문은 금강송면 왕피리 298-3 일대로 왕피리 포전 남쪽 남변에 있는 큰 바위의 북향면에 새겨져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강릉최씨 최주하라는 분이 왕피리 왕피천변에 완재정을 짓고 강 건너 맞은편 바위에 새긴 글자이다. 필자가 후손 최중봉씨와 이곳 완재정 터를 답사했을 때는 맞은 편 강변에는 여름철이라 숲이 우거져 보이지 않았다. 새긴 시기는 미상이나 1890년대에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각석문 한글풀이에 대해 어떤 이는『나수동천』,『라수동천』,『뢰수동천』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 뜻은 『신선이 쉬며 졸다가는 신천지라는 이상향』을 말하는 듯하다. 요즘 말로 하면 신선도 살다 갈 만큼 경치가 수려하고, 물 맑고 공기가 좋으며 또한 전쟁 등 재난을 피해 사람 살기에 가장 안전하고 좋은 곳이렸다!
『十山七六십산칠육』
이 각석문은 왕피리 98-1번지에 있다. 왕피천 지류인 곡내천을 따라 동쪽 1.4 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교량 옆 자연 암반에 있다. 十山七六(십산칠육)의 네 글자다. 이 각석문은 누가 언제 무엇 때문에 새겼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산천경개와 풍수 관련을 추정할 뿐이다.
濁濯臺(탁탁대) 月湖洞天(월호동천)
울진군 근남면 구산4리 산 173번지에 있다. 이 암각문은 달길 마을 오른쪽 산길을 따라 왕피천 계곡을 끼고 있어 접근이 쉽지 않은 곳에 있다. 격암 남사고 선생이 각석문 암벽 아래에서 수도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 濁濯臺 月湖洞天은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문인이었던 굴원이 지은 어부사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했다고 한다. 그 뜻은 이렇다. 혼탁해진 몸과 마음을 씻어내는 곳(탁탁대), 신선이 사는 달빛 호수가 있는 곳(월호동천)을 말한다.
청암정
차강헌
청암정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에 있는 정자로서 구고동(굴구지) 청암폭포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청암정은 매화면 매화리에 거주하던 만둔(晩遯) 윤상건(尹相健)의 장루지처(杖屢之處)이다. 윤상건의 동생 윤상일(尹相馹)이 형을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지붕은 겹처마에 골 기와로 팔작지붕을 이었다. 평면 구성의 경우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있고, 앞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 마루를 두고 평난간을 둘렀다.
지난 8월 초 청암정에 들렀다. 예전의 靑巖亭이란 현판은 없고, 此江軒이라는 현판이 낯설게 걸려있었다.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최근 청암정 둘레의 토지가 매매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1980년도 구고분교 근무할 때 청암정 아래 청암 폭포에서 꺽지와 은어 낚시를 한 추억이 생생하다. 둘레 풍광이 수려하여 구고분교 아이들과 봄 소풍을 이곳 냇가에 오기도 했다. 왕피천은 여기에서 산을 휘돌아 너우내를 지나서 안잘미 마을을 동쪽에 두고, 두전으로 흘러간다.
배잠사지 당간지주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에 있는 고려시대 당간지주로 추정되고 있다. 배잠사지 당간지주는 구산리 외성산마을 중등산 아래쪽에서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논 가운데에 있다. 이 일대는 배잠사지로 알려져 있다.
격암 남사고 유적지
격암 남사고(南師古, 1509-1571)선생은 근남면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이 유적지는 조선의 노스트라다무스라고 하는 격암 선생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그는 조선 명조, 선조대에 사직참봉, 관상감 천문교수로 발탁되어 한양에서 벼슬을 했다.
격암선생 유적지는『경북북부유교문화권관광개발사업』으로 2007년 건립되었다. 유적지에는 격암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 서재가 있다. 왕피천이유적지 바로 앞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고, 둘레 풍광이 수려하고, 여유롭다.
성류산과 성류굴
성류굴 진흥왕 명문
성류굴 (천연기념물 제155호)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산30에 있다. 2억 5천만 년 전에 형성된 석회암 동굴로 아름다운 종유석이 마치 금강산 같다하여 지하금강이라고 한다. 이 성류굴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동굴에 관한 산문여행기(東遊記)가 있다. 이 동유기는 고려 1349년(충정왕 1) 이곡이 울진군 소재 성류굴 탐사와 평해읍 월송정까지 여행하고 지은 유람일기이다.
2019년에는 성류굴에서 『560년 6월 진흥왕 다녀가다』라는 국보급 명문이 발견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예로부터 이 성류굴에는 시인 묵객의 왕래가 잦았다. 성류굴 풍광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그 가운데 생육신 김시습의 시를 소개한다. 이 시는 『울진 성류굴 근처』에서 묵으며 맑게 흐르는 왕피천과 둘레의 풍광을 읊은 시다.
宿蔚珍聖留屈
屈前春水漾苔磯 굴 앞 봄물이 이끼 낀 바위에 흐르고
巖後山花映落暉 바위 뒤 들꽃에 노을 햇살 비치네
更有一般淸絶味 여기에 빼어난 맑은 흥취 있는데
夜深巢鶴警人飛 깊은 밤 둥지의 학이 사람에 놀라 날아가네
왕피천 하구와 망양정
망양정 望洋亭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716-1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이다.
망양정은 관동팔경의 하나로, 처음에는 기성면 망양리 해안에 세워졌으나 1860년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둔산동 해안가인 현 장소로 옮겨왔다. 이후 두 차례의 보수를 거쳤으나, 2005년 경북 북부권 문화관광개발사업시 완전 해체하고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590년 평해군수 고경조가 중수한 지 415년 만의 일이다.
망양정(望洋亭) 현판은 전임 군수였던 이태영(李台榮)이 썼다. 망망대해와 수려한 풍광으로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관계로 그들이 남긴 시 현판들이 정자 안 곳곳에 걸려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관동별곡(關東別曲)」, 조선 숙종이 하사한 ‘관동제1루(關東第一樓)’라는 편액(偏額)과 시(詩), 정조의 어제시(御製詩), 정추(鄭樞)의 시, 심수경(沈守慶)의 시, 임회(林薈)의 시, 박란(朴蘭)의 시,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시,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시 등이 있다.
단원 김홍도 그림도 있다. 겸재 정선도 망양정을 찾아 그림을 그렸다.『관동명승첩』중『망양정도』다.
다만 우리는 여기에서 불편한 진실이 하나 있다. 망양정에 관한 여러 시문과 그림은 현재의 망양정 풍광을 읊거나 그린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어쨌든 조선 개혁 군주였던 정조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정조도 겸재가 그려다 준『망양정도』를 보고 시를 썼다. 이른바 음풍농월이다. 원문은 생략한다.
『태초의 기운 아득히 바다에 풀어지니 / 뉘라서 이곳에 망양정을 알 수 있으리 / 흡사 문선왕 공자의 집을 훑어보듯 / 종묘며 담장 하나하나 훑어본다』
왕피천은 서쪽으로는 성류굴 앞을 흘러 행곡리의 광천과 합쳐, 이곳에서 너른 하구를 이룬다. 이제 왕피천은 2차선 구 수산교, 4차선 7번 국도와 현재 건설 중인 영덕 삼척 간 동해 철교를 지나 드디어 대망의 큰 바다인 동해로 흘러든다. 왕피천 하구에는 북쪽으로 왕피천 공원이 있고, 망양정과 왕피천 공원을 연결하는 관광시설인『왕피천케이블카』가 운행 중이다. 해안가에는 망양해수욕장이 있다.
울진 수산리 굴참나무
경북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381번지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96호이다.
이 굴참나무는 나이가 3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0m, 둘레 5.94m이다. 수산교 마을 입구의 오른쪽 언덕에서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신라 의상대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며, 한때는 불영사를 찾는 스님들의 길잡이가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굴참나무 맞은 편에는 솔숲이 울창한 왕피천 공원이 있다. 예전 굴참나무 아래 왕피천(수산천)가에는 강을 건너주는 뱃사공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6.26 한국전쟁 후 수산교가 건설되었으나 사라호 태풍시 일부 교각이 떠내려 갔다. 그래서 수산강을 건널 때 한때 도라무깡으로 만든 줄배가 있었다. 굴참나무는 왕피천 하구의 이 모든 일을 300여 년 동안 묵묵히 바라보았을 것이다.
현재는 1959년 사라호 태풍에 남쪽 가지가 부러지고 썩은 부분을 수술한 상태이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굴참나무를 알고 있었다. 사라호 태풍시 굴참나무 가지가 부러졌다는 것을 어른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여기에 굴참나무에 관한 필자의 졸시 한편을 소개한다.
왕피천 수산강가 나무거인 굴참나무/ 비바람 눈서리에굽어진 팔다리다/사라호태풍 견뎠던 사연일랑 말마소
봇짐진 장꾼도 배 띄운 왕피천에/구름도 바람따라 자취없이 지났다오/망양정 고객창연한 세월이 어저께요
수산가 은하수에 날랜몸매 은빛은어/강태공 세월도 기약없어 낚시대 졸고/망망한 동해하늘엔 케이블이 달렸다
수산리 나무거인 굴참나무 초록일들/수평선 아침햇살 가득받아 사랑담고/지나는 승용차마다 울진풍광 안겨주네(김진문,『울진+산책 1, <시>울진수산리굴참나무』에서)
왕피천은 굴참나무가 있는 하구를 지나 불과 500미터 정도를 두고 동해로 흘러들어 마지막 여정의 끝을 맺는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강물은 스스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운명처럼 말이다. 결국 자연은 자연을 품고 돌고 도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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