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피천은 살아 있다. 3

울진의 생명수 왕피천 이야기(3)
기사입력 2022.09.29 14:36  |  조회수 128,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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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리 신석기 유물(울진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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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리 고인돌

 

왕피천 유역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나?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한 것은 지금부터 약 700만 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고고학계에서는 이러한 인류가 두 발로 걷고 처음으로 도구를 이용한 시기는 약 260만 년 전부터라고 추정한다. 그래서 인류의 활동을 문명사적으로 선사시대를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등으로 나누고 있다. 여기서 선사시대는 역사시대에 대칭되는 말로서 문헌 기록이 없는 시대를 말한다.

 

인류 문명사를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보았을 때, 한반도 최초의 구석기시대의 인류는 30만 년 전 구석기시대 전곡리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경기도 연천군 한탄강변에 있는 구석기인의 전곡리유적은 1978년에 발견되었다. 여기에 살았던 구석기인은 호모에렉투스(직립 인간)의 무리이다, 이들은 이동, 채집, 사냥, 석기 제작, 불의 이용 등을 했다고 한다. 


울진지역에서 공식적으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된 적은 없지만, 북면 주인리 석수동에서 유물이 채집되어 보고 된 바 있다. (홍영호·김상태, 2012,「경북 동해안 지역의 새로운 구석기 유적」,『한국구석기학보』, 한국구석기학회) 따라서 학계에서는 울진의 구석기인 살았다면 대략 기원전 12만 년에서 4만 년 전에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울진지역 신석기시대 유적은 죽변리 유적, 후포리 유적, 오산리 유적이 있다.

죽변리 유적이 발굴된 곳은 울진 죽변항 등대 일대이다. 후포리 유적은 후포 등기산 일대이다. 이들 유적지에서는 세골장(뼈무덤), 조개(패총), 긁개, 돌칼, 돌도끼, 낚시바늘, 바늘추, 골각기 등 유물이 다수 발굴되었다. 

후포리 등기산에는 후포리 신석기 유적관이 건립되어 있어 당시 신석기시대 울진 사람들의 원시생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다음으로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청동기시대는 구리와 아연 또는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처음으로 금속기를 생활 도구 등으로 이용한 시기를 말한다. 한반도의 청동기시대는 대체로 BC 10세기경부터 BC 3~4세기경까지로 보고 있다.


울진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그 대표적인 것이 고인돌군이다. 울진의 고인돌군은 고목, 부구, 신화, 화성, 구산, 나곡, 호월, 정명, 척산, 진복 등지에 80여 기가 있다. 이러한 고인돌은 울진의 해안가나 산기슭, 평평한 언덕 같은 곳에 있다 학계에서는 이와 같은 유적과 유물을 근거로 울진지역에서는 지금부터 2~3천 년 전에 이미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활동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왕피천 유역(하구)에는 언제부터 살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선사시대 유적을 살펴보아야 한다. 왕피천 유역에서는 구석기나 신석기시대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왕피천 유역의 하구에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수곡, 노음, 수산, 산포 등지에 있다. 청동기의 석기 편이나 토기류가 확인된 곳은 노음과 산포리 망양 유적지이다. 

산포리 선사유적은 2003년 울진군 유교문화권 개발과 망양정 공원 정비사업 시 문화유적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바 있다. 유물이 확인된 곳은 산포리 망양정 뒷산 일대로 청동기시대 돌도끼, 각종 석기, 토기들이 채집되었다.

노음리 유물산포지는『2008년 울진군 문화유적 분포지도』를 만들기 위한 기초자료 조사과정에서 2곳이 확인되었다. 유물산포지 1은 노음초등학교 뒤쪽 당두마을 북서쪽 구릉에서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여러 토기 조각, 석기의 깨진 조각, 조개무지 등이 발견되었다. 유물산포지 2는 여기서 남동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노음초등학교 뒤쪽 구릉의 북사면 일대 경작지에서 삼국시대에 속하는 토기 조각들이 확인되었다.


한편 고인돌은 근남면 수곡리와 수산리에 있다. 수곡리 고인돌은 막금 마을의 폐교된 수곡초등학교 운동장 서쪽에 2기가 있다. 그중 1기는 운동장 가까이 있는데 둘레를 철책으로 둘렀다.

 

수산리 고인돌군은 두 지역으로 나뉜다. 수산리 고인돌군1은 수산리 474번지에 있다. 수산교에서 국도 7호선을 따라 울진읍 방향으로 500m가량 올라가면 도로 상가 뒤쪽에 있는 남북으로 긴 야트막한 구릉상에 모두 16기의 고인돌이 있다. 남북으로 거리는 22m로 좁은 면적 내에 많은 수가 남아 있다. 주변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고 구릉에는 팔각 정자를 세워 마을의 휴식소로 사용되고 있다. 수산리 고인돌군2는 수산리 447-38번지[수산1길 45-15]에 있다. 울진의 굴참나무가 있는 구릉에서 북쪽으로 100m쯤 올라가면 민가 사이에 3기의 고인돌이 있다. 수산리 고인돌군1에서 남쪽으로 200m쯤 떨어진 지점이다. 


위에 서술한바 같이 왕피천 유역의 하구인 수곡, 노음, 수산 등지에서 선사시대 청동기 유적인 고인돌군과 조개무지 등과 삼국시대 토기 조각들이 확인되었다. 이는 왕피천 하구에 정착한 청동기인들이 노음, 수산의 들이나 구릉을 개간하여 농경 생활 등을 하였고, 이들은 해안지역에서 어로 활동 결과물인 조개 등을 식용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왕피천 유역에도 이미 지금부터 2~3천 년 전부터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적이다. 고인돌은 힘(권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고인돌과 같은 거대한 혹은 작은 돌덩이라도 이것을 옮기고 조성하는 데에는 반드시 많은 사람의 노동력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을 동원하고 지시, 명령, 조정하는 것은 권력의 힘이다. 이러한 권력의 제도적 힘은 그 지역 실력자인 우두머리라야 가능하다. 따라서 왕피천 하구에도 이미 작은 공동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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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피천의 구불구불한 계곡(감입곡류하천). 출처-인터넷 다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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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피천 지오트레일. (a) 왕피천의 지오트레일, 기존에 마련되어 있던 왕피천 생태탐방로와 동일함 (b) 용소 전경 (c) 용머리바위 전경 (d) 학소대 전경 (e) 거북바위, 송이바위 전경.(출처, 동해안 세계지지리공원 등재를 위한 정밀 학술 조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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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피천에서 관찰되는 테일러스(talus) 전경(출처, 동해안 세계지지리공원 등재를 위한

 정밀 학술 조사 보고서)

 

왕피천 지형과 지질

왕피천은 오랜 옛날 지각변동으로 땅이 솟아 올라오면서(융기) 생긴 산(山)과 골짜기가 생겨난 지형이다.


또한 영양군 수비 분지에서 발원 후 경사가 급한 동사면으로 흘러들면서 하천의 양안이 풍화작용(하방침식, 下方浸蝕) 등으로 깎여 만들어진 하천이다. 이러한 지형은 풍화작용을 거쳐서 강 상류에서 하류까지 구불구불하게 깊고 골짜기를 이루며 흐르는 감입곡류하천(嵌入曲流河川)이라고 한다. 

 

감입곡류하천은 그 절경이 경탄할 정도로 경치가 빼어난 곳이 많다. 왕피천이 그렇다. 왕피천도 양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서 있고,   그 가운데로 폭 수십 미터의 맑은 물이 흘러간다. 그래서 험준한 바위로 이루어진 암벽과 계곡 물길은 국내 3대 트레킹 코스로서 인기가 높은 곳이다. 그리고 협곡 전체가 금강송 등 짙푸른 숲들이 밀림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바깥 세계와 단절된 듯한 공간임을 실감할 수 있다. 그야말로 오염되지 않고 개발되지 않아서 원시 그대로의 생태계와 지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왕피천 하류는 석회암, 역암, 점토가 분포하여 성류굴과 같은 석회동굴, 남수산 일대 석회암 등이 있고, 노음리, 수산리, 산포리에 논밭 또는 평지와 언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상, 중류 지역은 약간의 석영, 장석, 흑운모를 포함한 포획암(捕獲岩)으로 화강암층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화강암층이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수많은 절리현상으로 깎아 지른 절벽을 이루고 있다. 그 대표 경관이 구산리 용소 협곡이다. 이 협곡의 용소와 용머리 바위는 둥글게 파인 돌개구멍 현상이 나타난 왕피천의 명소 중 한 곳이다. 이처럼 커다란 암반에 둥글게 파인 구멍을 돌개구멍(물의 침식작용으로 생긴 포트홀 현상을 말함)이라 하는데, 이곳에는 웅덩이처럼 파여 물이 고여서 깊다. 이런 소에는 용이 승천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용소를 지나면 또 다른 명소인 학소대와 거북바위를 만날 수 있다. 학소대와 거북바위 형성은 기존 큰 바위가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암석 조각들이 떨어지면서 생겨난 모양새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바로 올라가면 송이바위를 만난다. 송이 바위는 주변의 암벽과 분리되어 갑자기 우뚝 솟아오른 바위 형태인 토르 현상의 결과물이다. 

 

또 하나, 왕피천 지질 구조 현상으로 울진지역에서는 방언으로 돌서덜, 돌무데기라고 하는 테일러스 현상이다. 이러한 보기로는 구산리 안잘미 배잠사 유적지 남서쪽과 달길 가기 전 저수지 바로 앞산 전면에 흘러내린 돌조각 무더기를 말한다. 이곳에는 오랜 세월 풍화작용과 함께 잡목과 낙엽이 쌓여 있어 대체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왕피천은 지질학적으로 약간의 운모, 장석 등을 포함한 화강편마암 계통의 혼성암이고, 하류 지역은 석회암지대로 나타나고 있다. 계곡 형성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구불구불한 감입곡류하천을 이루어 동해로 흘러간다. 이러한 지형의 협곡에는 기암괴석과 빼어난 절경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왕피천은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지질학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보인다.


왕피천 유역의 빼어난 경관과 명소는?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에 정자를 짓고서 무슨 8경이니 10경으로 지정하여 볼 만한 명소로 선호해 왔다. 하지만 자연경관에 대한 평가는 지역마다 사람마다 다른 정서적 관점 때문에 어느 기준이 절대적일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왕피천에서 빼어난 경관과 협곡이 인문환경과 함께 어우러진 명소를 소개한다. 

먼저 『굴구지산촌마을 홈페이지』에는 굴구지 8경으로 왕피천, 울진금강소나무, 구산리삼층석탑, 이심소, 청암정, 칠성봉, 용소, 학소대를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곳도 경관이 아름다운 명소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왕피천과 금강소나무를 굳이 넣을 필요가 있을까? 한다. 왜냐하면 굴구지 자체가 왕피천이고, 왕피천에는 용소라는 명소가 있기 때문이다. 울진금강소나무 또한 마찬가지다. 금강소나무는 울진의 대표브랜드다. 굴구지 산촌만의 특색을 살린 경관과 소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얼마 전 필자는 청암정을 답사했는데 『此江軒』이라는 낯선 현판이 있었다. 또한 옛 청암정 터 들머리에는 돌에다 청암정이라고 새겨서 안내하고 있어서 처음 가는 일반인들은 정자 이름이 달라 당혹스러울 수가 있다. 현재 청암정 일대는 사유지이고, 철책을 둘러놓아 함부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어쨌든 이번에 필자가 탐방한 결과 『굴구지』라는 마을 범위를 벗어나서 왕피천 하류부터 상류 지역인 왕피리까지 절경 또는 명소 16군데를 추천한다.

 

1. 망양정 2. 성류굴 3. 왕피천 공원(케이블카) 4. 굴참나무 5. 민물고기체험관 6. 남사고유적지 7. 왕피천봇도랑길(왕피천은어길) 8. 청암정(차강헌) 9. 구산리삼층석탑 10. 이심소 11. 칠성봉 아래 냇가 12. 용소 13. 학소대 14. 거북바위 15. 송이바위 16. 왕피천생태탐방로이다.


왕피천 산촌마을(굴구지) 둘레 지명 전설 몇 가지

필자는 굴구지에서 『모래언덕캠핑장』을 운영하는 주상규(57)씨에게서 다음과 같은 땅이름 이야기를 채집하고, 사진도 함께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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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수평으로 떨어지는 굴구지 이심소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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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구지 이심소 자라못(주상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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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구지 용소(주상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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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구지 백발소(주상규제공)

 

1. 굴구지(구고)

1300년경 충주 지씨가 개척한 마을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왕피천을 끼고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경관이 아름다운 동네다. 월호동(달길)에서 아홉구비 고개를 넘어 마을이 있다하여 구고(九皐)라 한다. 자연부락으로 탑들(탑평), 원심, 오름마가 있다.  


2. 바람받재

바람밭재는 안잘미를 지나서 너우내를 건너면 바로 굴구지 마을로 넘어가는 재를 말한다. 바람받재란 이 재에서 부는 바람이 잘미 동네로 넘어와 들판 농사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 한다. 


3. 구보소

구보소는 잘미에서 굴구지 쪽으로 가는 봇도랑 벼랑길을 가다 보면 깊은 소가 나온다. 옛날 보(洑)를 설치했던 곳에 있는 깊은 소(沼)다. 음운현상으로 깊은소→ 굽은소→ 구보소로 된 이름 같다. 


4. 까치소

바람밭재 동사면 절벽 아래에 있는 소(沼)다. 깎아 지른 절벽 아래 소를 보자면 까치발 하듯이 조심스레 보아야 해서 붙은 이름 같다.

 

5. 중대방우아가리소

왕피천봇도랑길(왕피천은어길)을 따라가다 보면 나온다. 큰 바위 구멍이 세로로 험상궂게 입(아가리)을 벌리고 있는 형상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6. 이심소

굴구지에서 둘레 경관이 뛰어나고 폭포가 아름답다. 이곳 폭포는 일반적인 수직낙하 폭포가 아니고 수평낙하라서 길게 굽이쳐 흐른다. 그래서 찬찬히 살펴보아야 보인다. 이심소에는 모래가 쌓여 드러난 작은 자라섬이 있다. 


이심소 전설 또한 특이하다. 우리나라의 땅이름 전설 가운데 소와 관련된 전설은 대개가 용이나 이무기 이야기다. 이심이와 이무기는 다른 상상의 동물이다. 다시 말해 이무기는 용이 되고자 승천하기 전의 동물이다. 이심이는 스스로 용이 되지 않고 뭍으로 나와 어려운 지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심이를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고 했는데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머리만, 용감한 사람에게는 꼬리만, 마음이 착한 사람에게는 몸통만 보인다고 한다. 이심이 전체 모습을 다 볼 수 있는 사람은 지혜, 용감, 착한 마음, 정의와 같은 모든 덕목을 갖춘 사람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굴구지 산촌마을 홈페이지에 소개된 이심소 전설은 다음과 같다.

 

『1780년경 탑평마을에 사는 지동지(池冬至)라는 분이 아침에 소(沼) 맞은 편을 건너다보니 인기척이 있어서 가 보았다. 강 건너의 큰 바위에 붉은 옷을 입은 낯선 청년이 있었다. “웬 사람이냐?”고 소리쳐 물었더니 청년이 대답하기를 고향이 전라도인데 이심이를 잡으러 이곳에 왔노라. 했다. “그러면 이심이를 보았느냐?” 한즉 그가 말하기를 “내가 지금까지 이심이를 10마리 잡던 중 이 소에 가장 큰놈이 있는데 야광주가 아직 미숙한 관계로 잡지 않았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소(沼)를 이심소라 했다고 한다.


7. 용소

왕피리 마을에 사는 새댁이 만삭의 몸으로, 소가 있는 굴구지 친정으로 오게 되었다. 지금의 용소에서 대홍수를 예감한 용이 금빛 찬란한 비늘을 반짝이며 승천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새댁은 그 자리에서 눈이 멀고 낳은 아이는 몸에 금빛 비늘을 붙인 채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8. 백발소

안잘미 동네를 지나면 왕피천 너우내가 나온다. 너우내 북서쪽에 회백색의 암벽산이 있다. 바로 밑에는 봇도랑길이 있다. 그 밑에 백발소가 있다. 백발소란 그 길이가 백발이 되는 길다란 소란 뜻으로 붙인 것 같다. 가을에는 암벽산 벼랑의 풍광이 아름답다.


9. 팥죽소

동지날 이웃 동네에 팥죽을 주려고 가다가 발을 헛디뎌 사람이 빠져 죽은 팥죽소도 있다. 가난한 옛사람들의 안타까운 애환이 담긴 슬픈 소다. 안잘미를 지나 봇도랑이 시작되는 왕피천가에 있다. 예전에는 소가 깊고 벼랑길이 아찔했다고 한다. 지금은 지형변화로 거의 묻혔다.

  

10. 학소대

구산3리에 있는 굴구지마을의 앞으로 흐르는 냇물 가운데 우뚝 솟은 큰 바위에 학이 살던 둥지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하여『학소대』라 한다. 약 200년 전 어떤 사람이 학소대 바위에 흙을 덮고 조상 묘를 썼으나, 홍수에 쓸려 가버렸다. 학이 둥지를 버린 곳에 조상 묘를 썼으니 홍수 피해는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이라도 물가에는 묘를 쓰지 말라는 금기를 일깨워주고 있다. 또 이곳은 과거 많은 선비가 찾아와 절경에 흥취 되어 시를 지었다는 설도 전한다. 현재 『청송백운학(靑松白雲鶴), 학소운만리(鶴巢雲萬里)』라는 글이 남아 전한다. 지금은 학이 둥지에 돌아오지 않고 이름만 남아 있다. 

 

11. 거북바위

왕피천 용소를 지나면 거북바위가 나온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바위가 깎여나가 오늘날의 거북 모양을 하고 있다. 목마른 거북이가 왕피천으로 물을 먹으러 나오는 모양새다.


12. 송이바위

거북바위 바로 이어 송이 바위가 보인다. 송이의 고장 울진을 상징하는 바위이다. 바라보면 송이 향이 가득한 느낌이 다가온다.


13. 濁濯臺, 月湖洞天

달길마을의 왕피천 협곡에 있어 접근이 쉽지 않은 절벽에 명문 되어 있다. 누가 언제 새긴 글귀인지 미상이다. 남사고 선생이 이 둘레(남수산)에서 수련했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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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피리 생태탐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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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농마을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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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피천자연생태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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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피천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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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구지 오른마 70년대 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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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민물고기연구센터

 

왕피천의 인문환경

왕피천 유역의 인문환경을 지면상 간략히 기술한다.

상류에는 왕피리에는 초등교육의 요람이었던 왕피분교,동수곡분교가 폐교되었다. 폐교된 왕피분교는 울진군이 인수하여 2022년『왕피천 자연생태공원』으로 조성했다. 굴구지 산촌마을의 노음초등학교 구고분교가 폐교되었다. 왕피마을에는 1980년대 후반 이주해온『돌나라한국농촌복구회』인 종교공동체가 있다.

 

2000년대부터 굴구지 주민들이 펜션 등 민박 숙박시설, 캠핑장을 운영하고 마을 자체에서도 『굴구지산촌마을』을 정부 지원사업으로 조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굴구지에서 왕피천을 따라 너우내를 건너서 안잘미에 다다르면 남쪽 매화와 잘미에 걸쳐있는 남수산 북쪽 자락에는 석회 광산이 있다. 이 광산은 『남수산석회광산반대대책위원회』와 매화 주민의 채굴 반대에 부딪혀 잠정 중단한 상태다. 왕피천이 수곡 두전을 지나 한번 크게 굽이치는 수곡리에는 『격암 남사고선생유적지』가 있다. 

 

근남면 소재지인 왕피천 하구에는 3개의 교량(7번 구국도, 7번 고속국도, 왕피천 철교)이 나란히 남북을 도강하며 교통수단의 역할을 하고 있다. 1959년 사라호태풍으로 노음1리 현 근남면 복지센터에 자리했던 당시 노음국민학교는 유실되어 이듬해 현 매림동으로 신축 이전해 갔다. 이후 60년대 유실된 노음초 교정에 중학교 과정의 『제동공민학교』가 개설되었다. 이후 1974년 3월 울진 유일의 『사립제동중학교』가 개교하였다. 이후 농촌 인구의 급감으로 학생 수가 감소함에 따라 2007년 2월 28일 자로 폐지되었다.

 

왕피천 건너 수산리 들판에 1967년도에 설치한 『KBS포항방송국울진중계소』가 있었다. 안테나 탑의 높이만 해도 102m였다.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수산리의 동네의 비보림이었던 수산 솔밭은 80년대까지만 해도 군부대가 주둔하였다. 이후 군부대가 철거 이전하고, 2005년도와 2009년도에 『울진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 개최 장소로 활용되었다. 지금은 왕피천공원으로 변경되었고, 공원 내에 곤충관 등 각종 볼거리가 있어 군민과 관광객이 자주 찾는 곳이다. 이외에도 왕천 하류인 성류굴 맞은편에는 『울진군종합운동장』있고, 왕피천과 광천의 합수 지점인 구 36번 국도변 행곡리에는 경상북도『민물고기연구센터』와 『민물고기생태체험관』이 있다. 왕피천 하구에는 최근 『왕피천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왕피천 하구와 동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근·현대 왕피천 유역 주요 사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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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노음 소년단이 왕피천 하구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모습

 

노음소학교 소년단 군사훈련(일제강점기 1940년대)

일제는 강점기 말 제2차 세계 대전에 조선 학생들을 완전히 병사와 군수 인력으로 동원하였다. 소학교 학생들에게도 목도를 들고 군사훈련을 시켰다.

게시된 사진은 일제강점기 왕피천 하구에서 노음 소년단들의 군사훈련 장면이다. 

이 사진을 찍은 연대는 미상이나 일제가 최후 발악을 하던 1943-45년쯤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소학교 아이들에게까지 군사훈련을 시키고, 각종 군수물자 수집 등에 동원했기 때문이다. 왕피천 하구에서 노음 소년단 아이들이 군사훈련을 받는 모습이다. 훈련장소는 현재 왕피천 하구 솔밭(캠핑장) 근처로 추정된다. 사진을 살펴보면 앞쪽 한 아이가 들고 있는 깃발(욱일기)에 老音少年이라는 한자 표기가 있어 소년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사훈련 모습을 보자면 큰 소나무 뒤에는 넥타이를 맨 교사인듯한 사람이 칼을 들고, 지휘하고 있다. 그 뒤에는 소년 나팔수 2명이 나팔을 부는듯한 자세이다. 왕피천가에는 목총을 든 소년들이 포복 자세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그들 뒤에는 십자완장을 찬 간호 여성들 4명이 있다. 또 나팔수를 포함한 6명의 소년이 강가에 목총을 든 자세로 있고, 한 명은 물속에서 왼쪽 손을 허리춤에 얹은 모양새다. 그리고 거리가 조금 떨어진 강에는 작은 목선을 탄 대여섯 명이 보인다. 

이 사진은 근남 수산동 출신 김병용씨가 필자에게 제공한 것이다.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 소년단 군사훈련단 모습을 담은 울진에서 보기 드문 기록사진임에 틀림이 없다.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이러한 옛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있으면 제보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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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광우씨가 1950년대 후반 당시 왕피천 나루터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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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남 수산천 지금의 왕피천 하구의 줄배. 뒤로 수산교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사라호 태풍 전으로 보인다. 

왼쪽 끝에 뱃사공 노릇을 하는 청년이 보이고. 절은 아낙들이 철사줄을 잡고 있다. 

강 건너 수산 굴참나무가 보인다.

계절은 굴참나무 가지가 잎이 다 지고 없고, 배를 탄 사람들의 옷차림새로 보아 

늦가을에서 초봄이 아닌가 싶다.

출처, 김병용 제공(근남 수산동 출신, 현 경기 부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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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으나 6·25 한국전쟁 후에 수산교 다리교각을 

건설 중인 모습으로 보인다.

출처, 김병용 제공(근남 수산동 출신, 현 경기 부천 거주)

 

왕피천 뱃머리(1950년대)

필자가 태어난 섬마실(왕피천 하류 산포1리 도촌)에서는 왕피천을 『뱃머리』라 했다. 예전부터 배로 강을 건너게 했던 모양이다. 남광우(78세, 근남면 구산리 뒤뜰 거주, 海秱種苗 운영. 2022. 8. 28 구술증언)씨에 의하면, 왕피천 현 성유식당 북쪽 제방 아래를 뱃머리라 했고, 근남과 울진을 오가는 주민을 건네주는 뱃사공이 있었다고 한다. 그 뱃사공의 이름이 나덕화였다고 한다. 배를 이용하는 편의로 근남 일대의 사람들은 가호 당 여름에는 보리 1말, 가을에는 나락(벼) 1말을 승가세(乘家稅: 배삯)로 냈다고 한다. 당시 울진중학교를 다닌 남광우씨는 뱃사공이 늦게 나오는 바람에 지각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면 교문에서 지각생을 단속하던 선배 학생규율부장이 그 정상을 참작하여 교실에 들여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최초의 수산교 시멘트다리는 1951년경 공사가 시작되어 1958년에 준공되었다 한다.  


그 공사는 8년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아마 중간에 한국전쟁으로 늦어진 모양이다. 그 뒤 필자의 어릴 때 기억으로는 사공이 강을 건너 주는 생업을 그만두었는지, 어떤 일로 수산교가 끊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줄배라고 해서 『도라무깡(드럼통)』여러 개를 이어놓은 위에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배가 있었다. 강가 양쪽에 걸친 밧줄을 배에 탄 사람들이 함께 당기면서 건넜다. 임시방편으로 강을 건너는 교통수단이었다. 

현재 왕피천 하구에는 최초의 현대식 수산 다리가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일부 교각이 유실되어 복원된 적이 있었고 최근에는 확장 보강되었다. 그 옆을 나란히 7번 고속국도가 지나고, 철교가 준공을 앞두고 있다.


사라호 태풍(1959년)

1959년 9월에 발생한 태풍이다. 9월 15~18일에 한국의 중부와 남부지방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사라호는 일본 오키나와[沖繩]섬 서쪽 해상을 거쳐 동중국해에 이르면서 한국의 남해안지역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여 제주도와 영남지방을 비롯한 전국이 심한 폭풍우로 곳곳에 홍수가 났다. 사라호 태풍으로 사망과 실종 849명, 부상 2,533명, 이재민 37만 3,459명으로 한국에서 비교적 정확한 재해 기록이 이루어진 1900년도 이래 3번째로 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 또한 선박 피해 9,329척, 경작지 유실 21만 6,325정보 등 총피해추산액이 약 1,678억 7,000만 원에 달하는 막대한 피해를 났다고 언론이 보도했다. 필자는 당시 초등학교 입학 1년 전으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추석 당일 제사를 지내고 나서 점심 무렵부터 마당에 물이 차기 시작해 얼마 안 지나 섬(도촌동) 들판이 물에 잠기기 시작해 부모들은 가재도구들을 다락에 옮겨두고, 급히 마을 근처인 수산 공동묘지(현 근남중앙농협 동남쪽 인근으로 7번 고속국도가 지나간다)로 피난을 갔다. 이미 섬마을 사람들이 와 있었다. 공동묘지에서 오락가락하는 비를 맞으면서 밤을 꼬박 지샜다. 어찌해서 잠이 들어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동네 사람들이 피운 황덕불을 쬐면서 옷을 말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정부에서 추진한 이주민 정책으로 근남면 이재민 일부는 강원도 철원으로 이주해갔다. 지금도 강원도 철 철원군 근남면이라는 행정구역이 있고, 근남면이 고향인 1세대들이 생존해 있다고 한다.


- 이동 가설극장 영화 상영(1960년대)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근남면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저녁 상영할 영화 눈물 없이는 못 볼 영화 홍도야 우지마라. 신영균, 김지미 주연에 돈에 속고 사랑에 속는 홍도야 우지마라. 홍도야 우지마라.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홍도야 우지마라, 오늘 저녁 근남면민을 모시고 상영할 영화 홍도야 우지마라, 눈물 없이는 못 볼 영화 홍도야 우지마라……』

영화가 상영되는 날에는 오후부터 찝차나 트럭에 스피커를 달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선전(그때는 홍보라는 말이 없었다.) 방송을 하는 소리가 들리면 마을 처녀총각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전설 같은 이야기다. 이동가설극장 영화관람은 1960년대 농촌지역 사람들의 최고 문화생활 중 하나라고 할까. 한국 흑백영화사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당시 근남의 이동가설극장은 주로 오로동 경비행장 근처 모래밭 또는 현재 7번 고속국도가 지나는 중앙농협 맞은편 제방 아래 왕피천 냇가 모래밭이었다. 


- 울진·삼척지구 무장 공비 침투사건 (1968년)

1968년 11월, 120명의 북한 무장 공비가 유격대 활동 거점 구축을 목적으로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한 사건이다. 필자는 당시 울진중학교 2학년 재학생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처음 듣는 무장 공비라는 북한군이 울진에 침투했다는 것이다. 밤에는 통행금지 등이 있고 동네에 나다니는 것을 꺼렸던 기억이 있다. 당시 군사 작전하는 군인들의 트럭이나 헬기가 수시로 오로동 왕피천에 있는 경비행장으로 드나들었다. 어느 날 근남 산포(도촌) 집으로 하교하다가 친구들과 호기심에 경비행장이 있는 곳으로 가 보았다. 헬기에 실어 온 북한군 시신을 가마니 들것에 거적을 덮어 놓았는데 군화 신은 발목이 보였다. 이들은 국군의 작전에 의해 거의 섬멸되었다. 국방부는 군사작전이 끝난 후 사살된 무장 공비 시신을 왕피천 하구 소나무 숲(현 솔밭캠핑장)에 가매장을 하였다가 후일 이장해 갔다.


- 팬톰기 추락사건(1968년)

1967년인가? 필자가 늦가을 울진중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하교하다가 수산다리를 막 건너 당시 침례교회(현중앙농협자리) 쪽으로 오는 중 팬톰기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성류산 오로동으로 접근하였다. 그날 우연히 팬톰기가 추락하는 장면을 보았다. 갑자기 팬톰기 위쪽에 덮개가 열리는 순간 조종사가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듯했다. 그러자 순간 팬톰기는 현 성류길 건너편 대밭에 꽝하고 추락했다. 들판에서 벼를 베던 사람들도 깜짝 놀라 하늘을 쳐다보았다. 팬톰기가 추락한 민가에는 연기가 솟아올랐다. 그러자 시간이 얼마 안 되어 곧바로 경찰차와 군용 찝차가 달려왔다. 뒤이어 헬기가 날아왔다. 사고 수습으로 군 당국에서 출동한 것이다. 이 추락사고로 민가 2채가 파손되었다. 하지만 기체에서 탈출한 미군 조종사는 낙하산이 미쳐 펴지기 전 땅으로 추락해 사망했다.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는 것. 참 안타까운 사고였다. 후일담으로 당시 추락한 팬톰기 파편(두랄류민)이 튀어 날아가서 오로동 왕피천가에 널버려졌다고 한다. 그래서 근남 아이들은 이 쇠붙이 조각을 주워 엿을 포식하도록 바꿔 먹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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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경계병 산포리 어민 총격 사건 현장(근남 수산 염전해안). 출처 1998년 6월호 <말지>

 

 - 군 경계병 산포 어민 총격 사건 (1998년)

1998년 5월 7일 오전 새벽 3시 46분께 경북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앞바다에서 매복 중이던 육군 모부대 소속 경계병들이 고기잡이(숭어) 중이던 1.5t 유자망 어선 신광호(선주 崔모씨. 54)를 간첩선으로 오인해 실탄을 발사했다. 이 사고로 신광호에 타고 있던 선원 金모씨(60. 근남면 산포4리)가 그 자리에서 숨지고, 선주 崔모씨와 선원 南모씨(44. 근남면 산포리)는 각각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다. 사고가 터지자 유족과 주민 측에서는 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관계 당국(국방부, 관련 부대, 지역정치인,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 등을 보내고 관련 부대 항의 방문, 언론홍보, 관계 당국의 대책 마련 촉구, 국가배상 등을 요구하였다. 이후 유족측 등은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 배상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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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울진세계친환경농업엑스 개장을 둘러보는 

지역기관단체장, 출처 뉴시스

 

- 2005 울진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 개최 

2005년 7월 22일, 울진군(군수 김용수)이 야심차게 마련한 국내 최초로 친환경·유기농업을 주제로 세계적 규모의 행사가 지금의『왕피천공원』에서 개막되었다. 8월 15일까지 25일간 개최되어 해외 28개국, 국내 36개 업체, 전국 56개 기관·단체가 참가했다.

유기농 선진국의 사례를 비롯해 국내·외 친환경·유기농에 대한 모든 정보를 한 곳에 집약해 농업인들에게는 고품질농산물 생산을 통한 소득증대 방안이 제공되어 관람객 70만 명의 내외국인이 다녀갔다고 한다. 

이후 2009년 7월 24일부터 30일간『'친환경농업! 자연과 인간을 지키는 생명산업'』이란 주제로『2009 울진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가 24일 개막되었다.


영화 촬영지 등으로 인기가 높은 왕피천 

- 내셔널지오그래픽(NGC) '캠핑크루' 촬영지(2012년)

내셔널지오그래픽(NGC)은 굴구지 왕피천이 차박 명소로 최고이며, 둘레 풍광을 소개한 캠핑 시리즈물이다.


- KBS스페셜/물의 여행/왕피천, 그해 여름(2017년)

촬영지/ 왕피천

주인공/ 주상규(현 굴구지 모래언덕캠핑장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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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립군 촬영지 왕피천(출처 다음)

 

- 영화 대립군 촬영지(2017년)

영화 <대립군>은 1592년 임진왜란 중 분조를 맡은 어린 광해와 그를 호위하는 대립군 일행이 강계로 향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배우 이정재, 여진구, 김무열 등이 주인공이다.

 -이 밖에도 교육방송 한국기행에 ‘왕피천에 사는 이유’라는 프로그램과 MBN 여행생활자 ‘집시맨’ 촬영지로 왕피천이 소개 방송되었다.


왕피천 유역 숙박시설(펜션, 캠핑장, 민박 등)

- 굴구지산촌마을 (www.gulgugi.co.kr) 

경북 울진군 근남면 왕피천로 634

 054-782-3737, 010-2066-4395

- 왕피천모래언덕펜션/캠핑장

 (www.sanddune.co.kr)

경북 울진군 근남면 왕피천로 534-1

 054-783-0625, 010-4805-9694

- 왕피천하늘담펜션/캠핑장

 (www.haneuldam.co.kr) 

경북 울진군 근남면 왕피천로 555-111 

 054-783-9793, 010-3804-9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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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피천유역 생태·경관 보전지역 표지판

 

왕피천 탐방을 마치며

왕피천은 영양의 5대 지류에서 흘러 받은 물길이 장수포천이 되어서 울진으로 흘러와 왕피천으로 이름한다. 장수포천의 길이는 24.2㎞이고 왕피천은 60.9㎞이다. 모두 그 길이가 80㎞가 넘는 남한의 큰 10대 강 중의 하나에 속한다. 필자가 이러한 왕피천에 관심을 가지고 1990년대부터 나름대로 활동을 했다. 90년대에는 발원지에 관심을 두고 왕피천을 다녔다. 2000년대는 왕피천 보전활동과 자연생태학교에 참가해 아이들에게 왕피천과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자 노력했다. 그후 20여 년이 지나서 요즘 왕피천이 어떤가 싶어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조금 걷기도 했지만, 예전보다 편하게 지방도로가 개설되어 승용차를 이용해 중요지점을 둘러보았다.


이번에 주로 탐사하고 살펴본 지역은 왕피 속사에서 굴구지와 왕피천 하구의 문화재 유적과 역사, 인문환경과 왕피천 하구의 주요 사건들을 주마간산격으로 간략히 정리해보았다. 아쉬운 점은 생태환경인 동식물 등에 대해 기술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전문가의 영역이라 쉽지 않았다. 앞으로 자료 탐독, 직접 탐사와 전문가의 도움을 통해 보충해서 집필해보고자 한다.

‘왕피천은 살아 흐른다.’ 왕피천은 울진의 생명수다. 왕피천 본류의 하나인 영양 장수, 포천이 영양의 송방, 오무, 수하계곡 등 협곡을 지나 울진 경계 지역을 넘어 왕피 햇내, 속사에 이르기까지 아직 계곡물은 맑고 깨끗하다. 숲은 원시 그대로 아름다웠고, 공기도 맑고, 상쾌했다. 더구나 이 지대는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지역주민들이 철저하게 감시활동을 하고 있었다.


왕피천은 울진의 생명수다. 기후 변화로 일부 국가에서 물 부족 등으로 인류가 고통을 받고 있다. 물 부족과 고갈은 모든 생명체에게 생존 위기의 치명적 결과를 가져다준다. 이렇게 볼 때 왕피천 유역은 경관도 원시상태로 보존되고 있어 다행이다. 더구나 아직까지 1, 2급수의 맑은 물이 사시사철 살아 흐르고 있으니 복 받은 고장이다. 우리가 잘 관리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번 탐방에서 지역주민들 이야기를 몇 가지 덧붙인다.

-왕피천과 장수포천 일대 일부 유역에서 수질이 나빠질 우려가 있음으로  맑은 물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영양군과 울진군이 함께 대처해야 한다. 일례로 유역 마을에는 마을간이 오·폐수 정화시설이 필요하다.

-가뭄으로 왕피천 일부 하천에 청태 등 녹조류가 많이 끼어 수질이 나빠지고 있다. 이걸 어느 정도 방지하는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왕피천 하류의 민가, 각종 시설 등 특히 축산농가에서 나오는 오·폐수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여름철 왕피천 탐방객들이 아직도 이런 축사가 하천 둘레에 있었나, 하고 놀라워했다. 더구나 냄새 등으로 불편이 있었다.

-탐방로 안전성 강구다. 굴구지 상천에서 용소-속사까지의 일부 구간 생태탐방로를 안전하게 보수했으면 좋겠다.

-상천~속사까지 간 탐방객이 다시 승용차를 가지러 굴구지 마을까지 와야 하는 불편함을 해소하는 방안을 강구하자. 

-유역에 세워진 각종 안내판의 정비가 되어야겠고, 선사시대 문화재 등 주변 정비가 되어야 하겠다.

-어떤 시설물이나 옛 지명 등을 바꿀 때는 역사적 맥락이나 민속학 등 학술적 근거에 의거했으면 좋겠다.



 

<도움을 주신 분>

울진군청과 영영군청 관계자, 영양 이원형 문화해설사, 영양 권상원 전교장, 남광우(근남 구산), 방의수(금강송면 왕피리), 방한필(울진읍), 김병용(일제강점기 사진 3점 제공, 근남 수산 출신, 현 경기부천 거주), 구산 굴구지, 왕피 주민들, 이헌태(국립해양과학관), 최장석(왕피), 최중봉(매화), 울진생태연구소(이규봉), 왕피천환경출장소생태탐방안내소

 

 


 

왕피천 보전 운동의 어제와 오늘

 

울진자연생태학교 운영(2000년)

『울진자연생태학교』는 아이들에게 왕피천 답사 등 체험을 통해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고, 기후 변화 위기에 대응하는 교육을 실천하려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울진의 생명수인 『왕피천을 바로 알자』라는 주제로 2000년 제1회를 시작, 지역 초중교원단체, 시민단체, 민간인(환경운동가)등이 참여해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여름방학 기간 중 2박 3일간 운영해왔다. 울진군,울진교육청,녹색연합 등의 지원을 받아 최근(2018)까지 20여 년 동안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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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피천온천개발 반대시위(울진군 제공)

 

왕피천온천개발 반대운동(2005년)과 속사댐건설 저지운동(2001년)

2005년 『성류온천개발』이라는 민간사업자가 근남면 수곡리 왕피천 일대에 온천개발계획을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에 왕피천살리기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울진군민들과 함께 왕피천이 수달과 은어가 사는 자연생태계의 보고라는 점을 들어 반대운동에 나섰고, 반발이 거세지자 울진군과 경북도는 개발을 불허했다. 이에 맞서 업체는 소송을 제기해 대법원까지 가는 공방을 거쳐 승소했다. 패소한 경북도는 하천 수질오염 방지대책 수립과 오수관로 설치 등 각종 조건을 내걸고 온천개발계획을 승인했으나, 현재 온천개발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편 대책위는 정부가 왕피리 속사마을 협곡에 댐을 건설하려던 계획을 지역 주민과 시민단체, 환경운동가 등과 함께 저지운동으로 이를 막아내었다. 


왕피천 생태보전지구지정(2005년)

환경부가 수달과 산양, 삵, 담비, 매 등 멸종위기종들이 다수 서식하고 있는 왕피천 유역을 2005년 10월 『왕피천 생태경관보전지구』로 지정했다. 지정범위는 울진군의 왕피천 유역과 통고산, 천축산, 대령산 자락 등을 포함하는 102.84㎢(약 3천만평)의 광활한 지역으로 이는 지금까지 지정된 생태계보전지역 가운데 국내 최대규모이다. 따라서 왕피천 유역이 생물다양성, 지형과 지질, 자연 상태의 원시성 등으로 볼 때 생태계를 대표할 수 있는 학술적 연구 가치가 높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환경부는 금강송면 소재지 삼근리에 대구지방환경 왕피천환경출장소를 개소하여 『왕피천 생태경관보전지구』를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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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군청 앞 도로에서 국립공원지정 반대시위 모습

 

울진 왕피천, 불영계곡 국립공원지정 반대운동(2021년)

2021년 울진군이 왕피천 생태경관보전지역(8만4.243㎢)과 불영계곡 군립공원(2만5,595㎢)을 국립공원지정을 추진하자, 이에 해당 지역 주민(금강송면, 북면)들이 반발하면서 시작되었다. 주민들은 해당 지역이 생태 보호를 이유로 각종 규제를 받는 상황에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 규제가 강화돼 지역 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립공원지정반대투쟁위원회』는 울진군청 항의 방문, 왕피천 국립공원 결사반대 주민집회와 차량 시위 등으로 저지 운동을 했다. 

한편 『울진군이장연합회』는 주민소득 증대, 일자리 창출 등 울진 百年大計 위해 반드시 지정해 전국 최고 국립공원 만들어야 함을 주장, 범군민 서명운동 추진 등으로 울진군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최근 대책위 관계자에 의하면 2022년 민선 8기 울진군수는 국립공원지정 추진을 하지 않기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어쨌든 이 사안은 지자체가 주민의 원만한 설득과 동의 없이는 행정행위를 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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