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영사 추억과 천축산 풍광을 찾아서

기사입력 2023.02.1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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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산에서 바라본 동해와 울진읍


늦가을 천축산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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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산에 오른 필자(위)와 이종교 전 울진읍장(아래)

 

오랜만에 산에 간다. 목적지는 천축산(653미터)이다. 아침부터 등산복장을 챙겨 입었다. 신발장 구석에서 등산화를 찾아 신었다. 좀 낡고 먼지가 좀 있었지만 털어버리고 신었다. 아직도 신을 만하다. 오전 9시에 울진초등학교 앞에서 이종교(전 울진읍장)씨를 만나 승용차로 아래 하원 전치밭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그 마을 사정부(80세, 금강송면 하원리 거주, 전치밭 마을) 어르신에게서 천축산 등산로 대강을 파악했다. 그분의 말씀으로는 남쪽 방향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가 천축산까지 가서 하산은 시계 방향인 오른쪽으로 내려오면 된다는 것, 산행 시간은 불영사 쪽으로 너댓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우리는 전치 마을 동쪽, 배추밭을 지나 냇가 징검다리를 건넜다. 둘 다 천축산행이 처음이다. 이종교씨는 젊은 시절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이미 여러 차례 전국의 산을 오른 경험이 많은 친구이다. 이날 함께 천축산과 불영사 일대를 산행했다.

이번 천축산행은 울진에 살면서 불영사는 여러 십수 번 와 봤지만, 정작 불영사 하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산이 천축산이다. 이전부터 천축산 오르기를 벼렸지만 이제야 가게 되었다. 2022년 11월 6일, 오전 9시 30분, 늦가을 날씨가 산행하기에 너무나 좋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맑았다. 


전치밭 마을 앞 냇가에는 징검다리가 있었다. 오랜만에 건너본다. 광천지류인 가을 산골 물은 맑고 깨끗했다. 여름날 살찐 피라미가 한가하게 물길을 따라 오르내린다. 산등성이의 소나무는 그냥 푸르름을 내뿜고 있었다. 건너편 구 36번 국도의 단풍나무가 제철을 만난 듯 붉은빛이 가을 햇살에 반짝인다. 산기슭의 갈참나무, 싸리나무, 붉나무, 오리나무, 청미래(깜바구덩굴) 등 잡목이 제 빛깔을 달고서 늦가을을 맞고 있었다. 풀숲의 쑥부쟁이가 무더기씩 피어 우리를 맞아준다. 그리고 여름철에나 볼 수 있는 하루살이가 떼 지어 냇가에 하늘하늘 나르고 있다. 하루를 살아도 마치 백 년을 사는 것처럼 아침햇살에 찬란히 작은 나래 짓을 하고 있다. 살아 나르는 하루살이꽃! 그 광경을 대하니 문득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란 시가 생각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그냥 무심코 지나쳤으면 이 늦가을 하루살이에게는 마지막일듯한 나래 짓도 놓쳤을 것이다.

   

우리는 하루살이 떼들을 뒤로하고 폐사된 아미사 쪽 들머리의 냇가를 건너지 않고 오른쪽 산등성이를 타고 올랐다. 천축산도 등산로에도 산악회 사람들이 다녀간 리본을 달아놓아 길을 쉽게 찾아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천축산 가는 산길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가파른 산이다. 멀리서 보면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밋밋한 평탄 길로 보이나 막상 산을 타보니 그렇지 않았다. 어느 산등성이는 고슴도치 같은 바위와 사각 바위들이 널려 있어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가팔랐다. 코를 땅에 댈 정도의 비탈길이 70도 이상 되는 곳도 더러 있었다. 

그렇지만 평탄한 길에도 활엽수림인 참나무 잎들이 수북이 떨어져 발목이 빠졌다. 푹신하다. 소나무가 있는 비탈길에는 윤기 나는 솔잎이 잔잔하게 수십 미터 깔려 있다. 그야말로 양탄자는 아니지만, 갈잎이 깔린 갈탄자와 가을볕에 반짝이는 솔잎인 송탄자를 밟는 느낌이다. 바삭바삭, 푸석푸석하다. 때로는 미끄럼을 타면서 가을 산이 내준 갈탄자와 송탄자를 밝고서 천축산을 오른다. 가다가 숲이 뿜어낸 산소를 마음껏 들이마셔 폐활량 가늠도 해본다. 가을 산이 내어준 기분 좋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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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사 들머리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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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만산홍엽 가을 불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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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사 산태극수태극 계곡 전경(울진군청 제공)

 

천축산(天竺山)과 불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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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산 등산로(다음에서 캡쳐)

 

우리나라 산 이름에 천축산은 울진 불영사 천축산밖에 없다. 절은 조계종 소속으로 서울에 천축사가 있다. 울진의 불자들에게는 천축산과 불영사는 그만큼 각별한 산이요,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불영사가 앉아 있는 자리는 지리 풍수학적으로 산태극 수태극으로 명당자리라고 한다. 경내에 들어서면 남쪽으로 확 트이어 있고 아늑한 어머니의 품 안 같은 느낌을 준다. 필자는 풍수에 관해 문외한이고, 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풍수 대가들이 말하는 불영사에 관한 풍수적 지리적 고찰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불영사는 음양이 조화로운 풍수지형이며, 물이 고여 있는 것 같은 연못과 대웅전을 보호하면서 감싸고 있는 형세가 매우 안정적이다. 사찰 전반을 감싸는 능선이 황룡이라 전반적으로 안정된 지형인 점이 좋다. 그중에서도 응진전은 귀성이 있어서 풍수적으로 가장 뛰어난 자리라 하겠다. 전반적으로 회룡고조형의 형국이라 부처님께 충실한 제자가 배출될 것이며, 절구통 형국은 풍수적으로 늘 아쉽지 않을 만큼의 재물은 들어오는 지형이다. 회룡고조형이란 자기의 근원을 향한다는 의미이며, 천축산을 향하여 불영사 지형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다만 천축선원 우측의 능선이 상대적으로 낮으므로 비보를 추천한다. 부처님의 가피를 오래 지속되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의상의 화엄사상이 구현된 불영사의 지형과 공간, 김규순, 제2회 천축산 불영사 학술대회, 울진 불영사의 역사와 문화유산에서. 2018)

불영사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위치가 안정적이며, 회룡고조형으로 부처님의 충실한 제자가 배출되는 곳이라고 한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재물이 들어오는 지형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피(보호) 아래 늘 융성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천축국은 고대 인도를 말한다. 천축은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세계적인 이름이었다. 왜냐하면, 불법을 배우기 위해 중국, 신라 등지에서 유학생들이 고대 인도에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축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른 인물이 당나라의 현장법사(삼장법사라고도 한다)와 신라의 고승 혜초(慧超, 704~787)이다. 


혜초(慧超, 704~787)는 통일신라 시대의 승려이다. 천축국(오늘날 인도)을 갔다 와서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고대 인도의 다섯 국가(五天竺國)를 다녀온(往) 이야기(傳)란 뜻이다.『왕오천축국전』은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100명이 떠나도 돌아오는 이는 하나도 없다.』 는 멀고도 험난한 천축으로 구법 여행을 떠났던 신라의 혜초 스님이 남긴 여행 기록이다. 즉,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 아랍 등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하면서 당시의 사회상, 정치, 종교, 경제, 풍습 등 문화에 관한 사실적인 내용이 담겨있어 세계사적으로 평가받는 중요한 사료이다. 그가 다녀온 5개국은 ①천축국(현 인도), ②소륵국(현 파미르고원의 캬슈카르지역)과 구자국(현 파미르고원의 캬슈카르지역), ③토화국(현 아프가니스탄), ④파샤국(폐르시아: 현 이란 북부지역), ⑤대식국(현 이란)이다. 그는 한반도 태생으로 최초로 이슬람 문명권을 다녀온 인물이다.


천축국과 관련한 또 다른 인물은 중국 당나라의 현장법사(玄奘, 602~664)이다. 그는 혜초보다 100여 년 앞선 사람으로 불경을 구하기 위해 인도를 여행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서유기』에 나오는 고승이다. 현장법사를 흔히『삼장법사』라고도 한다. 삼장법사라 하면 불경의 3요소, 즉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을 모두 통달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현장법사는 당시 불법에 통달한 석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서유기에는 현장법사와 그 제자인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이 서역 천축국(인도)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천신만고의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져 있다. 이 서유기는 현장법사가 화동하던 시기보다 900년 뒤에 중국 명나라 시인 오승은(1500∼1582)이 쓴 소설이다.

신라인 혜초와 당나라인 현장은 1300-400여년 전에 불법 공부를 위해 지금은 상상도 못 할 고생을 하면서 인도에 갔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당시 불교 경전 수입해 민중들을 교화하고, 한편으로 동서양 문명 교류에 앞장선 여행작가이자 지식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옛 문헌에 나타난 천축산

우리나라에서 천축산과 관련한 옛 문헌의 기록으로는 고려말 조선조 류백유(柳伯濡, 1341∼?)의 천축산 불영사기가 있다. 여기에는 신라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불영사 창건 설화가 담겨있다. 불영사는 의상대사가 불법 공부를 하러 중국 당나라로 가기 전인 651년에 창건한 절이다. 

『신라 고비(古碑, 옛 비석) 비석에 따르면 당나라 영휘 2년(651)에 의상법사가 동경(현 경주)에서 해변을 따라 단하동(현재 불영사가 있는 곳)에 들어와 해운봉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감탄하기를『서역 천축산의 형상이로다. 흡사 바다 건너 먼 곳에 옮겨 온 듯하구나.라고 했다. 또한, 산골짜기의 개울물 위에는 다섯 부처님의 그림자가 생긴 것을 보고 더욱 기이하게 여기고 지류로 찾아 내려와 금탑봉에 오르니, 아래에 독룡이 있는 못이 있었다. 법사가 용에게 설법하고, 시주하기를 청하였으나 용이 따르지 않았다. 법사가 강하게 신통력으로 주문을 거니 이에 용이 발분(發憤)하여 산을 뚫고 돌을 깨고 떠나갔다. 법사는 곧 용지를 메우고 사찰을 건립하였다. 진방(震方, 동쪽)에 특별히 동쪽에 청련전 3칸과 무영탑 1개를 세워 비보하고 천축산불영사(天竺山佛影寺)라 편액 하였다. (이하 생략)『울진고문헌자료집성. 2016. 울진문화원, 한국수력원자력 발행』


이 창건설화를 살펴보면 독룡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독룡은 토속신앙(산신이나 용신 등)을 가진 토착세력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한다. 불법 전파를 방해하는 세력이다. 1400여 년 전, 의상대사가 울진지역에 불법을 전하고, 절을 창건하기 위해서는 토착세력의 지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떤 종교든지 그 지역에 들어가 전도하기 위해서는 토착세력이 믿는 용 신앙자 등과 대결하던가 아니면 그들과 타협, 교화, 포섭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법사가 강하게 신통력으로 주문을 거니 이에 용이 발분(發憤)하여 산을 뚫고 돌을 깨고 떠나갔다.』 것은,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 전쟁기였고, 울진 동해안 지역은 고구려권이었다. 어쩌면 의상의 불교 신앙세력에 밀린 고구려계의 잔존 토착세력인지도 모른다. 의상대사가 신통력과 주문을 했다는 것은 어떤 수단을 동원했다는 뜻이다. 결국, 그들을 포섭 또는 제압하거나 교화 설득하여, 불영사를 창건한 것이다. 

어쨌든 불영사 천축산은 고대 불경의 나라 인도(부처님이 계신 곳)를 상징하고, 또한 천축국에서 귀하게 얻은 불경을 바탕으로 정진수행 하는 불영사라는 사찰로서 의미를 동시에 간직했다고 볼 수 있겠다. 


화엄 사상의 주류, 의상과 원효

원효와 의상은 동시대를 살아가며 신라 불교의 대중화는 물론 삼국통일의 정신적 기반인 호국불교를 위해 노력했던 승려이다. 두 사람은 화엄 사상을 펴고 화엄종의 기반을 싹트게 했다. 원효는 무애행 등의 파격적 도승으로서 전국을 떠도는 선승의 모습으로, 의상은 교종을 중심으로 한 화엄종으로서 끊임없이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수양으로 깨달음에 닿기를 원했다. 

이들 승려는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신라를 떠나 인도로 향했으나 원효는 중도에서 되돌아왔다. 원효가 의상보다 7년 선배이다.


원효가 신라 땅으로 되돌아오게 한 해골 물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해골 물에 관한 이야기는 2가지 설이 전해온다. 


밤중에 원효가 목이 말라 물을 달게 마셨다. 이튿날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는 것을 원효는 심한 토악질을 했다. 원효는 그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결국, 해골 물이나 목말라 마셨던 물이나 매한가지라는 것. 이것이 해골물설이다. 또 하나는 토굴설이다. 날이 저물어 둘은 어느 토굴에서 잠을 잤다. 이튿날 알고 보니 사람 무덤(적석총)이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잘 때는 그냥 땅속의 토굴인 줄 알았는데 자고 나니 사람이 묻힌 무덤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꺼림칙했지만, 토굴이나 무덤이나, 단잠을 자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원효가 깨달은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안의 마음가짐이라는 것, 다시 말해『이 세상의 온갖 현상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며, 모든 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라는 이른바 그 유명한 문구인『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이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짓는 것은 환경과 물질이 아니라 마음가짐에서 온다는 뜻이렸다! 

당시 그들이 하룻밤을 잔 곳은 당항성 또는 당성이다. 당항성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중국(요동)으로 가기 위한 최적의 관문이었고, 그래서 삼국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인 지역이다. 당항성은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일대로 알려져 있다.


57년 전 불영사 1박 추억

울진사람치고 동해안의 으뜸 사찰의 하나인 불영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불영사에 대한 아련한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불영사를 노음초등학교 5학년 때(1965년도) 가을 수학여행으로 다녀왔다. 당시 노음초등학교 가을 수학여행은 5학년이나 6학년이 전통적으로 1박 2일로 꼭 다녀오는 곳이 불영사였다. 필수 장소였다. 필자에게는 노음초등학교 5학년 때 1박 2일로 이라 하여『원족, 遠足』을 다녀왔던 곳이기도 하다. 어른들은 불영사까지 멀리 걸어서 간다고 한자어로 원족이라 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말이다. 그리고 태어나서 하루에 5, 60리 먼 길을 처음 걸었다. 지금은 교통이 좋아 그렇지 꼬불꼬불한 산길과 한티재를 넘어갔으니 지금 생각하니 아이들 걸음으로는 100여 리는 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때는 시계가 없고 가을철이라 해도 짧아서 9시가 안 되어 출발한 것 같다. 모두다 1박 2일 동안 먹을 양식인 쌀 한 되를 짊어지고서 말이다. 쌀은 불영사 숙박 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즘처럼 흔한 배낭도 없던 시절, 어머니가 쌀과 점심 도시락을 함께 자루를 보자기에 싸서 마련한 짐보따리 짊어지고 불영사로 떠났다.

나에게는 잊지 못 할 일이 또 하나 있다. 아버지가 울진 오일장에서 사 온 까만 운동화이다. 나에게는 처음인 운동화였다. 당신의 아들이 불영사의 험한 산길을 간다고 특별히 사준 까만 운동화를 신고 말이다. 전날 저녁에 그 운동화를 머리맡에 두고 밤중에도 일어나 신어보곤 했던 적이 있다. 당시 아이들이 그랬지만, 대체로 촌아이들의 신발은 검둥 고무신이었다.

 

떠나기 전 운동장에서 김병성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담임(1반 유성두 선생님, 2반 김가진 선생님, 3반 남수신 선생님)의 인솔 아래 3개 반 160여 명이 줄을 지어 노음국민학교를 출발하여 구리재를 넘었다. 구산리 뒤뜰 동네를 지나. 수곡리 냇가(왕피천) 비들앞, 누금, 막금을 지나 한티재를 올랐다. 한티재는 근남에서 불영사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한티재에는 『찬물내기』라는 샘터가 있다. 그 둘레에서 점심을 먹었다. 산길과 벼랑길을 지나 아래 하원(전치밭마을) 냇가를 건너 잠깐 쉬고 다시 36번 자갈길 도로(지금 구 36번 국도이다)를 따라 서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었다. 이 고개를 넘어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현재 불영사 주차장이다. 지금은 불영사 주차장 남쪽에 불영사 일주문이 있지만, 1960년대에는 그곳은 불영사 들머리가 아니었다. 지금의 주차장을 지나 서남향인 30여 미터 지점에서 깎아지른 절벽 벼랑길이 불영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지금은 출입금지로 철책이 둘러쳐 있다. 그곳에서 20여 미터 벼랑길을 내려가면 냇가에 다다른다. 냇가에는 폭이 20여 미터쯤 되는 출렁다리가 놓여 있었다. 말 그대로 출렁거렸다. 짓궂은 친구들은 출렁다리를 흔들거려 건너오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냇가를 건너가니 동쪽에서 폭포 소리가 꽤나 컸다. 지금의 불영폭포(구룡폭포)였다. 불영사까지는 작은 오솔길로 아름드리 소나무가 맞아주었다. 어린 마음으로도 당시 그 길은 아주 서늘하고 맑고 싱그러웠다. 딴 세상 같았다. 불영사 경내에 들어서니 산그늘이 지고 가을 해가 꼴깍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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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송진채취로 망가진 천축산 일대 소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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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의 불영사 (울진읍 김연국씨 제공)

 

생전 처음 와본 불영사! 

깊은 산속에 고목이 곳곳에 있고, 큰 기와집과 온몸이 노란 부처, 변소(해우소)가 기억에 남는다. 고목 가운데는 불영사 굴참나무였다. 남쪽 들머리에 있었다. 천연기념물로서 불영사에서 꼭 보아야 할 나무이다. 그 뒤 1969년도에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다. 고사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죽은 등걸이 있었으나 지금은 등걸도 없다. 다음으로 불영사는 내가 본 기와집 중에서 가장 큰 기와집이었다.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대웅전이다. 몸과 얼굴이 온통 누런 얼굴을 한 부처님의 웃음 짓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또 하나는 해우소인 가장 큰 변소(요즘 화장실)였다. 당시 선배들의 이야기로는 불영사 변소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하게 깊다는 것이다. 똥을 누면 한참 뒤에『퉁』 하고 소리가 날 만큼 깊다는 것, 그날 저녁 똥을 누러 가야 하는데 혼자 가기에는 망설여졌다. 이미 들은 이야기가 공포심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앞 벽만 보고 두 눈을 딱 감고 똥을 누고 얼른 나왔다. 그때 뒤 닦기도 볏짚이었다. 

화장지도 없던 옛날이야기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말하면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이야기를 하는 꼰대라고 하겠지만. 

우리는 1박을 하고 다시 하원을 지나 한티재를 도로 넘고 해서 집으로 왔다. 지금 생각하면 불영사 1박은 이제 아련히 지나간 시간 속 추억 여행일 뿐이다.

 

불영사 14경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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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사 좌망대와 오룡대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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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사 삼각봉

 

앞서 이야기했지만, 불영사는 아늑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절이다. 그뿐 아니라 불영사를 감싸고 있는 둘레의 산수도 맑고 수려하다. 필자는 옛 문헌을 통해 나타난 시인 묵객들이 아름다운 풍광을 읊은 곳을 탐방해 보았다. 이른바 불영사 14경이다. 여기서 불영사 14경이라 함은 주로 임유후의 시에 기록한 14경을 말한다. 하지만 필자가 정작 문헌에 나타난 14경을 탐방했을 때는 정확하게‘이곳이다’하고 고증하는 이는 없었다. 또한, 필자는 2년 전, 후배들과 불영사 둘레의 생태경관보전지역을 다녀왔다. 이글에서는 14경을 대략 추정하여 소개하고 정확한 고증은 후일을 기약한다. 

문헌에 나타난 불영사 14경을 소개한 글은 다음과 같다.


천축산불영사기(류백우), 유천축산록과 불영사의 풍광을 읊은 시(김창흡), 불영사 14경(임유후의 시), 권섭의 유행록이 있다. 

류백우(1341∼?)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에 걸친 문신이다. 그는 천축산불영사기에서 불영사의 승경을 다음과 같이 11곳을 말하고 있다. 삼각봉, 좌망대, 오룡대, 향로봉, 청라봉, 종암봉, 부용성, 학소대, 금탑봉, 의상대, 용혈을 말하고 있다. 그의 글에는 해운봉과 원효굴은 없다.


임유후(任有後, 1601∼1673)는 조선조 인조 6년(1628년) 반란을 음모가 발각되어 4촌 아우 임지후(任之後)와 숙부 임취정(任就正) 등이 죽음을 당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울진(행곡 주천대)에 내려와 향인과 교유하면서 20여 년을 숨어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불영사 14경을 부용성, 금탑봉, 청라봉, 삼각봉, 해운봉, 향로봉, 종암봉, 의상전, 오룡대, 좌망대, 단하동, 용혈, 학소를 말했다.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은 울진 불영사에 들러 그 풍광 13곳을 읊었다. 그는 부용성, 금탑봉, 청라봉, 삼각봉, 해운봉, 종암봉, 향로봉, 원효굴, 의상전, 오룡대, 좌망대, 단하동, 남암봉을 시로 읊었다. 용혈과 학소대는 거론하지 않았다.


권섭(權燮, 1671-1759)은 숙종, 경종, 영조 때의 문인이다. 그는 조선조 전문 여행작가였다. 일생을 전국 방방곡곡 명승지를 찾아 탐승(探勝) 여행을 하며 보고 겪은 바를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가 남긴 유행록에는 앞서 말한 14경 외에 연화암, 송풍대, 침룡비혈, 해운동 총 18경을 말하고 있다. 이 네 사람의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문헌에 나타난 불영사 14경 위치

(불영사 대웅전 기준) 

×표는 기록이 없음을 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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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들이 과연 현장을 탐방하거나 천축산 줄기에 있는 해운봉과 종암봉 등을 실제로 올랐는지는 의문이다. 해운봉과 종암봉은 오르지 않아도 불영사 쪽에서도 보이는 산봉우리다. 여기에 임유후가 읊은 14경에 관한 시를 소개한다.


   임유후의 불영 14경               

              

1) 부용성 / 芙蓉城                            

기이한 새는 바위에서 울고 / 怪禽岩畔叫

달은 부용성을 비추네 / 月照芙蓉城

고요한 골짝엔 계향 가득하고 / 谷靜桂香滿

신선이 옥피리를 부는구나 / 仙人吹玉笙


2) 금탑봉 / 金塔峰

신선은 백옥루를 만들고 / 仙成白玉樓

부처는 황금탑을 쌓았네 / 佛築黃金塔

마정이 항복한 도량에서 / 云是服魔場

사마타가 진겁을 지냈다 하네 / 奢摩歷塵劫


3) 청라봉 / 靑螺峰

비가 개여 맑은 별이 뜨고 / 新霽淸陽上

하늘에는 티끌 한 점 없네 / 虛空絶點0

푸른 봉우리 거울처럼 깨끗하고 / 靑螺涵寶鑑

보살님은 선대에 기대어 섰네 / 菩薩倚禪臺


4) 삼각봉 / 三角峰

천지사방은 삼산을 실었으니 / 六鰲戴神山

옛 천축산이 옮겨져 왔네 / 移來古天竺

뭇 신선이 밟고 춤을 추니 / 羣仙舞翩躚

고운 머리처럼 뿔이 났네 / 綠髮散三角


5) 해운봉 / 海雲峰

기이한 봉우리 푸른 바다 굽어보고 / 奇峰俯碧海

가을 구름 사이 하늘에 더 높네 / 天闊綵雲消

옥녀가 고이 화장을 하고 / 玉女倚新粧

아침에 붉은 노을 보겠도다 / 時看絳節朝


6) 향로봉 / 香爐峰

보배 꽃들 여기저기 둘러 있고 / 寶花散還止

불꽃 향기 타올라 흰 연기 서렸네 / 香焰蟠虛白

옥 누대에서 밝은 달을 아끼고 / 瓊臺愛月明

봉우리 위에서 신선 곡조 고르네 / 峰上調仙曲


7) 종암봉 / 鐘巖峯

한밤중에 가을 서리 내렸고 / 霜落秋宵半

산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네 / 山風00生

절간이 청정하여 잠 못 드는데 / 禪堂淸不寐

속된 생각 종소리에 놀라네 / 塵想警鐘聲


8) 원효굴 / 元曉窟

냇가 골짝에는 가을 기운 어리고 / 澗壑生秋氣

스님은 없고 옛 굴만 차갑구나 / 僧亡古窟寒

지금도 흰 돌이 남아 있어 / 只今餘白石

아직 완성하지 않았더라 / 應是未全頑

9) 의상전 / 義湘殿

가장 경치 좋은 신승의 전당 / 最勝僧仙殿

앞에는 기이한 수석이 놓였네 / 前臨水石奇

상공이 부처를 더욱 좋아하여 / 相公偏好佛

시주한 공로 현판에 걸려 있네 / 功業見縣楣


10) 오룡대 / 五龍臺

우뚝한 오룡석이 / 巃嵷五龍石

수면 위로 윗부분 드러났네 / 水面列頭角

신과 물은 오랜 모습 되어 / 神物久宛亶

우레와 구름이 동천에 펼쳤다 / 雲雷總洞壑


11) 좌망대 / 坐忘臺

앉아서 맑은 시냇물 좋아하여 / 坐愛溪水淸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줄도 몰랐네 / 不知山日夕

발을 씻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 濯足望靑天

어디서 도라지 캐는 노래곡조 들려오네/ 高歌紫芝曲


12) 단하동 / 丹霞洞

흰 무지개는 산간 냇물을 마시고 / 白霓飮山澗

가랑비가 금모래를 적시는구나 / 小雨濕金沙

마을엔 구름사이로 햇빛이 비치니 / 洞天雲日漏 

푸른 산봉에 붉은 노을이 빛나도다 / 靑障暉紅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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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영사 들머리 단하동천 암각문           

              

 13) 용혈 / 龍穴

용이 누우니 비늘 덖지 잠기고 / 龍臥潛鱗甲

푸른 시내는 동혈이 가득하네 / 靑溪洞穴圓

만일 구름비가 인연이 없다면 / 只緣雲雨失失

어찌 단잠만 자고 있으리오 / 那必嗜甘眠


14) 학소 / 鶴巢

단하동 학이 멀리 떠나가서 / 鶴去丹霞逈

오랜 세월 둥지가 비었구나 / 巢空歲月深

돌문에는 계수나무 싸늘한데 / 石門松桂冷

이끼 낀 돌벽에 가을 그늘이 내렸구나 / 苔壁下秋陰 


울진은 자연풍광이 아름다워 신라 시대에는 화랑들이 산수 유람을 했다. 그 이후로 시인 묵객과 여행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더구나 불영사는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대사가 당나라 유학을 가기 전 창건한 절이다. 한 티끌에도 우주를 머금고 있고, 모든 개체의 평등과 조화를 말하는 게 화엄 사상이라고 한다. 불영사는 화엄의 공간이다. 그리고 전국 사찰에서 절을 창건한 승려의 이름을 딴 의상전이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의 선배였던 원효도 그 이름을 남겼다. 불영사의 원효 굴이 그렇다. 

 

불영사는 풍광이 아름다운 절이다. 그래서인지 고려말과 조선조에서는 유학자나 울진의 지방 관료들이 다녀가서 각종 기문, 유행록, 시를 남겼다. 위에 소개한 임유후의 불영사 14경이 그 대표적이다.

 

불영사는 비구니 승이 수도하는 절이다. 또한 불영사는 한때 호국도량이기도 했다. 근세 한말 울진에서 일어난 전기 의병들의 본부가 있었던 곳이다.

불영사에는 문화유산인 보물이 여럿 있다. 응진전(보물 730호), 대웅보전(보물 120호),영상회상도(보물 1272호)이다. 불영사 계곡과 불영사 둘레에는 자연유산인 각종 동·식물류가 있는 생태보고이기도 하다. 


천축산을 올랐다가 북바위봉과 북바위를 놓친 아쉬움이 있으나 하산하는 길에서 만난 다람쥐나 아름드리 금강소나무(제2의 대왕소나무라 할만하다), 철 이르게 핀 진달래, 공룡알 같은 바위와 사각바위들, 미끄러지면서 올랐던 갈탄자, 송탄자, 맑고 깨끗한 공기 등 하나같이 자연이 우리에게 내준 선물이었다. 하지만 불영사 14경 위치는 앞으로 다시 한번 고증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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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산 하산길에 만난 제2 대왕금강송. 가슴높이 둘레 2.6미터. 수고 25미터 추정함

 

유서 깊은 화엄의 공간, 불영사! 

구르는 돌에도, 천축산 바위에도, 아름다운 숲에서 지는 낙엽에도, 풍경을 울리는 맑은 바람 소리, 구룡소에 흐르는 물소리, 어느 것 하나 없이 모두가 부처님 경전 말씀이다. 그래서 불영사와 그 둘레 자연풍광은 앞으로도 길이 보전해야 할 가치가 있는 또 다른 보물단지나 다름없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울진 불영사의 역사와 문화유산(제2회 천축산 불영사 학술대회자료, 대한불교조계종 불영사, 2018.)

-울진고문헌집성자료(울진문화원,(주)한국수력원자력, 2016.)  

 

- 도움을 주신 분 -

불영사 주지 여학스님, 임영수(전 울진군산림과장, 불영사 신도), 전수연(불영사 신도회장), 윤상문(80세, 금강송면 하원리 불영사 인근 거주), 사정부(80세, 금강송면 하원리 전치동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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