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辛未年 영해+울진 동학 거사 2일 천하 이야기 1

기사입력 2023.02.20 10:04  |  조회수 329,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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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글의 중심 주제는 1871년(신미년) 음력 3월 10일, 영해·울진의 동학도들이 2일 천하로 영해부를 점령한 전후의 이야기이다. 그에 앞서 23년 후 전국적으로 전개된 1894년『동학농민혁명』부터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우리나라 근대사에 끼친 영향이 참으로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배경지식으로 간략히 언급하고자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필자)


민간에서 구전되는 노래를 민요라 한다. 민요는 그 시대의 애환을 담고 있다. 파랑새라는 노래는 동학혁명에 대한 조선 민중의 소망과 애환과 처절한 조선 역사를 담고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청포장수 울고 간다


필자는 동학하면 녹두장군 전봉준과 파랑새가 생각난다. 파랑새라는 동요 가사를 60년대 국어 교과서에 배웠던 기억이 있어서이다. 사실 이 동요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입을 빌려 부른 민요이다. 파랑새라는 노래 유래가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몇 가지 설이 있다. 

일설에는 『만가(輓歌)』라고도 한다. 만가는 죽은 이를 애도하는 노래로,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나아가면서 부르는 구슬픈 소리를 말한다. 

파랑새 민요는 동학 농민군의 아내나 가족들이 전사한 남편, 형제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울부짖으며 불렀던 노래였다는 것이다. 조선 민중의 한이 서린 노래라고 할까, 이 노래를 부르거나 들어보면 애잔하고 구슬프다. 


또 하나는 가사의 상징성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 무언가 새 세상이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조선 민중들은 가지고 있었다. 당시 『동학농민군』과 전쟁시 일본군이 푸른색 군복이 푸른색이어서 파랑새는 일본군을 뜻한다. 또한, 녹두밭은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을, 청포 장수는 백성을 상징한다는 것이 유력하다. 그래서 이 청포 장수는 동학군이 이기기를 소망하는 당시 민중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다. 녹두는 그 열매를 갈아 묵을 만든 것이 청포(묵)이다.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은 전봉준이 어린 시절 녹두 콩만큼 작아서 붙은 것이다. 

그가 동학 농민군의 대장이 되어서도 녹두장군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전봉준이 관아에 잡혀갈 때(녹두꽃이 떨어지면서) 당시 민중 소망을 접을 수밖에 없기에 청포 장수 울고 간다라고 애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런 민요도 전해 온다.「녹두새요」다. 가사는 이렇다.

『아랫녘 새야 웃녘 새야/전주 고부 녹두새야/녹두밭에 앉지마라./두류박 딱딱 우여』

새는 민중이고, 두류박은 두류산(頭流山)이며, 녹두새는 전봉준(全琫準)의 별명이요, 딱딱 우여는 ‘날아가라’는 뜻이다. 그 무렵에「봉준요」도 불렸는데 “봉준아, 봉준아 전봉준아/양에야 양철을 질머지고/놀미 갱갱이 패전했네.』라고 하였다. 놀미는 논산(論山)이요, 갱갱이는 강경(江景)의 토박이말이니 전봉준이 싸움에 지는 곳을 예언한 것이다.


필자는 전봉준이 무슨 무과에 급제하여 된 무사 출신의 장군이 아니고 일개 농민 출신의 장군이었다는 것도 중힉교 국사 시간에 알았다. 참 무지했던 국사 지식이었다. 당시 국어 선생님이자 담임이었던 아무개 선생님은 자기가 동학난을 일으켰다고 우리에게 우스개 소리를 하곤 했다.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자가 동학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다.


혼돈의 조선 쇠망의 길을 가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에는 반드시 그 원인과 배경이 있다. 유교의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개국한 조선왕조는 18세기에 들어서 쇠망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정조의 개혁 군주 시대도 잠깐이었다. 정조 사후 개혁은 도루묵이 되었다. 

조선 후기 혼돈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조선 민중은 왜 동학에 매료되었는가를 알려면 먼저 조선왕조 쇠망을 먼저 파악해야 할 것 같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대체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크게는 정조 사후 순조, 헌종, 철종의 3대 동안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몇몇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로 통치 기강이 무너지고 민생 파탄이 났다. 다시 말해 세도정치(勢道政治)가 판을 쳤다. 특정 가문을 중심으로 세도정치는 국왕에게 위임을 받은 특정인과 그 추종 세력, 즉 소수의 외척 가문들의 개입에 따라 행해지는 독과점적 정치 형태를 말한다. 세도정치는 조선 후기의 현상만은 아니었다. 왕조 특성상 혈연집단 또는 유력 가문이 대리청정 등 권력의 중심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조선 후기는 아주 심했다고 보면 된다. 

예나 지금이나 물이 고이면 썩기 마련이다. 이들의 부패상은 이를테면 국정농단과 집안의 부를 축적하는 행태도 나타났다. 일례로 과거시험 합격도 이들 유력집안 출신이어야 유리했고, 그렇지 않으면 연줄을 대거나 뇌물을 쓰지 않으면 관리로 진출할 수가 없었다. 이른바 매관매직이다. 예를 들면 도지사격인 방백은 1만 냥, 시장·군수급인 현령 현감은 3천 냥이었다. 돈으로 관직을 산 부패 관리들은 뇌물로 바친 본전을 뽑기 위해 임기 동안 갖은 수법으로 백성들에게 재물 등을 수탈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조차도 더 많은 돈을 주고 관직을 산 후임자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삼정문란으로 쥐어짜인 조선 농민


또 하나는 삼정문란이었다. 삼정문란이란 19세기 조선왕조에서는 국가 재정 수입의 3대 요소로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이 있었는데 이것을 통틀어 삼정(三政)이라고 하고, 삼정의 문란이란 바로 이 제도가 문란해져 올바르게 운용되지 않았던 것을 말한다. 이 삼정문란은 조선 후기 농민 봉기의 직접 도화선이 되었다.


첫째로 전정(田政)문란이다. 즉 전세, 농사짓는 땅에 매기는 토지세를 말한다. 조세를 걷는  지방 수령들의 조세 횡령이었다. 19세기 이후로 이 토지세를 현물인 쌀이나 면포가 아닌 화폐로 걷었다. 농민들에게서 거둘 때의 가격과 중앙에 갖다 낼 때의 가격이 달라, 그 차액은 지방 수령 등이 이익으로 취하였다. 더구나 지방의 말단 아전들은 정액의 월 급여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조세 수취 횡포가 심했다. 그들도 먹고살아야기 때문에 만만한 농민들이 수탈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온갖 꼼수를 발동했다. 


토지에 부과되는 세액은 전세 결당 20여 두가 기본이나 실제로는 재정 부족을 메우기 위해 잡다한 명목으로 부과하여(무명잡세) 결당 70~100두 징수하거나, 경작하지 않는 토지와 도망간 농민의 토지에도 부과 5가작통제를 시행하여 연대책임의 공동 납부토록 했다. 토지 1결이란 곡식 1결(300두. 1두는 18리터)을 생산할 수 있는 면적을 뜻한다. 1결의 면적은 토지 비옥도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3,000여 평에 해당한다. 


둘째로 군정 문란이다. 요즈음도 국방의 의무를 회피하여 사회문제화되기도 한다. 군대 가기 싫어하기는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군정은 군역을 지지 않는 대신 16세 ~ 60세의 남성들이 내는 군포(軍布)를 말한다. 군포는 주로 삼베나 무명으로 대신하였고, 후대에 와서는 대동미나 화폐로 대신했다. 균역법으로 군포 1필로 축소되었으나 재정 부족으로 다시 증가했으며, 부농층은 신분 상승을 통해 군역을 면제받기도 했다. 이들의 군포는 면역 빈농층에 전가되었다. 군포를 받기 위해서 죽은 사람을 장부상에는 산 사람처럼 꾸며서 징수했다. 이게 그 유명한 백골징포(白骨徵布)다. 

황구첨정(黃口簽丁)이란 것도 있다. 황구(黃口)는 어린아이를 말한다. 당시 군역은 16세 이상 남성이 그 대상이었다. 군역의 대상이 아닌 아이를 16세 이상이라고 거짓으로 만들어 군포를 징수하였다. 

이외에도 60세를 초과한 노인들은 나이를 60세 이하로 낮추어서 군포를 징수하였다. 만약 군포납세를 못 버티고 도망을 하는 경우 연좌제를 적용하여 친족이 대신 납부를 하도록 했다. 이를 족징(族徵)이라 했다

지방 수령들은 장부상의 군역 조세를 걷지 못하면 인사고과에서 평가가 깎였기 때문에 별 희한한 방법을 통해서 군포를 걷어야 했다. 결국, 이런 폐단은 순조 이후 세도정치 시기에 극에 달하게 된다.

 

셋째로 환정(換政)이다. 다른 말로 환곡이라고도 한다. 조선 시대에도 춘궁기에 먹을 것이 없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관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되받는 바람직한 의도의 복지제도였지만 세도정치 때는 각종 고리대의 온상이 되었다. 처음엔 백성들을 보릿고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자 했던 바가 도리어 백성들을 쥐어짜는 제도로 변질하여 버렸다. 


이런 조세 수탈로 늑대(勒貸)라는 게 있었는데 이는 환곡을 이용하지 않으려는 백성들에게 강제로 곡식을 빌려주고는 받을 건 다 받아 챙겼다. 정말 이리 늑대 같은 조세 수탈이었다. 장리는 애초 약정보다 고금리로 받는 것 말하고, 분석은 빌려주는 곡식에다 쌀겨, 모래, 돌 등을 섞어서 주거나, 물로 불려서 양을 속이는 경우를 말한다. 

이것은 횡령의 방법의 하나인데 이 분석의 행태가 제대로 터진 게 조선 후기 왕조몰락의 시발점인 임오군란이다. 이외에도 장부를 허위로 조작하는 반작(反作), 전임(前任) 관리나 지방의 아전이 결탁하여 창고에 있는 양곡을 횡령, 착복하고 장부상으로는 실제로 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기재하여 후임 관리에게 인계하는 허류(虛留) 등이 있었다. 


자식새끼 낳은 죄, 조선 사내 양물을 자르다


이러한 삼정 문란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로 학정에 시달린 민심은 이미 조선왕조를 떠나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 쓴 애절양(哀絶陽)은 당시 학정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참상을 그대로 표현해놓았다. 한시 원문은 생략한다.

 

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 길게 우는 소리/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출정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한 일 있다 해도/ 사내가 제 양물을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네/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이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억울한 하소연 하려 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져 끌고 갔다네./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이하생략)


백성들이 과도한 군역과 세금 수탈에 시달려 아이를 낳은 죄로써 남자의 양물(생식기) 스스로 자르고 슬퍼한다는 시다. 당대에 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인가. 유배지에서 이런 엽기적인 조선민중의 이야기를 들은 정약용. 정조에게 발탁되어 개혁정치로 조선 민중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했던 그로서는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후 조선은 소수 가문과 연합한 노론 세력의 정치 독무대가 판을 치다가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주춤하였으나, 다시 민씨가문의 세도정치로 치달았다. 


조선 후기 학자 조수삼(趙秀三, 1762-1849년)은 피폐해진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유리 걸식하고, 농촌을 떠나 한양으로 향하는 장면을 다음과 시로 나타냈다.


걸음걸이 빠른 젊은이들 어서 오라고/ 어린것과 늙은이를 재촉하고/ 집집마다 말하기를/ 서울로 떠난다고/ 봄바람은 야속하여/ 부황 든 얼굴에 스치네/ 어느 날에나 가 닿으리/ 저 먼 서울에.


이와같이 과중한 조세부담 등 학정에 먹고 살길이 없어 유리걸식하는 농민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들 영세농민이나 도망친 노비들은 탄광의 노동자로 전락하고, 때로는 산적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최하층 빈민은 몰락한 양반들과 제휴하여 민란을 추동, 조선왕조 체제의 위협적 요소가 되었다. 

조선 후기는 민란의 시대였다. 철종 시대(1862)는 한 해 동안 100여 개에 이르는 군현에서 민란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다시 말해 조선왕조를 지탱해 오던 유교적 지배 체제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일어난 시대모순의 절정기였다. 조선왕조의 유교적 지배 체제의 모순은 집권 세력의 부패와 함께 삼정의 문란을 초래하고, 양 반 토호들의 수탈로 민중의 삶이 어려워지게 되자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1811년 평안도 홍경래의 난,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광범하게 일어난 농민 항쟁인 1862년 임술민란 등이 그 대표적이다. 

조선정부는 하루가 다르게 일어나는 민란에 대처하고 흉흉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1862년(철종 13) 5월, 임시 관서인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여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고자 하였으나 미봉책에 그치고 말았다.

19세기 조선 정부의 무능·비리·부패,·무질서 등 종합 망조 세트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외세는 조선을 넘보기 시작했다. 군자의 나라라고 자부하던 조선은 서서히 쇠망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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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무영진도(巡撫營陣圖).

 

제작연대와 작자가 미상인 이 그림은 1811년 조선정부 순무영 군사가 평안도 정주에서 홍경래난을 진압키 위해 부대별로 목책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순무군영은 전쟁이나 지방의 반란을 진압키 위해 임시로 설치한 군사기구이다.(출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 역사문제연구소, 1996.)

 

학정에 시달린 농민, 조선 왕조에 저항하다


조선 후기의 사회변동은 19세기 들어 더욱 가속되었다. 양반 등의 신분제를 골격으로 된 조선봉건 체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부문의 변동과 함께 해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권력은 세도 정권 아래서 소수의 가문이 털어 쥐고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이들 소수 가문은 국가의 모든 법과 통치기구를 장악하고, 봉건체제에 뚫고 성장하려는 모든 세력들을 억압하고 처단했다. 국가의 경영과 운용은 예나 지금이나 재정이 없이는 유지될 수 없었다. 한편 조선 후기의 화폐 경제의 발전과 농업 생산력, 광공업, 수공업 등의 발달은 조선민들의 소비생활을 향상시키기도 했다. 반면 양반 지배층의 사치 욕구를 자극하여 국가 재정의 지출을 증대시켰다. 국가 재정 악화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더 걷을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지방 수령의 조세 횡령 등 갖가지 편법으로 민중을 수탈했다. 그 수탈 대상은 대다수가 농민이었다. 농민의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농민들은 이래죽으나, 굶어 죽어나 마찬가지라 그들은 봉기하였다. 

 

1811년 평안도 농민항쟁(일명 홍경래의 난), 1862년 진주농민항쟁, 같은해 개령농민항쟁 등이 일어났으나 이들 농민 항쟁의 주된 요구는 조세 수탈과 수령 등의 부정 탐학 철폐에 있었다. 그래서 봉건 왕조의 구조적인 모순인 토지 소유의 철폐나 신분제의 폐지 등과 같은 근대적인 변혁 요구가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직접 타도 대상이 아니고 군현 단위의 국지적 일회성 투쟁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농민항쟁을 통해서 봉건 왕조의 무능과 세도정치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 214-219쪽』에서 일부 참조했음. 역사연구소, 1996) 


동학 농민군, 외세 일본과 전쟁을 치르다


하지만 30여 년 후 일어난 1894년 고부 농민항쟁은 그 양상이 달았다. 전국으로 확대된 고부 농민봉기 주축 세력은 동학사상으로 무장된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봉건적 토지 소유제 폐지, 신분제 철폐, 문벌 타파 인재 등용, 외세 배격 등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동학 농민군의 요구를 일정 정도 수용했으나 끝내 양반 등 기득권층은 체제 위협 세력으로 보고 탄압했다. 이에 정부군과 동학군이 대결했으나 정부군이 패배로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일대를 장악했다.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군의 진압이 어려워지자 외세를 끌어들이고 말았다. 이에 동학 농민군은 전국에서 집결, 외세인 일본군과 전쟁을 벌였으나, 내부 분열, 무기 등의 열세로 패하고 말았다. 1894년 12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 지도부가 체포, 처형됨으로 동학 농민전쟁은 끝나고 말았다. 이후 조일 토벌군(조선정부군과 연합한 일본군)은 조선 일대, 특히 호남 등 나부 지역에서 동학농민군 색출에 나서 무자비하게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설에는 농민전쟁에 동원된 농민군 숫자는 30여만 명 이상, 전사자 등 희생자 수도 30여 만에서 40여 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앞서 파랑새라는 민요에서 언급된 전봉준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전쟁(이하 농민전쟁)의 지도자였다. 1894년 전봉준 등 동학 농민 세력이 일으킨 이 역사적 사건을 두고 학계에서는 그동안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갑오농민운동, 동학농민혁명등의 용어로 쓰여왔다. 지금은『동학농민혁명』이라는 용어가 공식화되었다. 왜냐하면, 2017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약칭: 동학농민명예회복법 )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 관변 측의 역사기록은 동학농민군을 모두 역적의 무리, 동학의 비도, 흉도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당시 역사기록의 주체는 강자인 봉건 왕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  해석은 후세인들의 몫이다. 필자는 당시 동학농민군이 외세인 일본군을 내쫓기 위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기 때문에 이글에서는 동학농민혁명전쟁(이하 농민전쟁)이라고 이름하여 쓰고자 한다.


전봉준,『愛國丹心誰有知』


이 농민전쟁은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전쟁이다. 전쟁의 상대자는 조선왕조와 외세인 일본군이었다. 그 시작은 1894년(고종 31) 1월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격분한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全琫準)이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농민봉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앞서 기술했다.

이 농민전쟁은 동학을 신봉하는 동학도와 비동학도 등 대다수가 농민군이 주축이 되어 당시 부패하고 무능했던 조선왕조와 외세인 청나라와 일본에 대항하여 치른 전쟁이었다. 동학농민군들은 반봉건체제에 저항하여 인간 평등의 실현, 사회 비리의 척결, 외국 침략세력의 척결이라는 대의명분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무장투쟁을 하였던 것이다.

 

1895년 4월 23일(고종 32년 음력 3월 29일) 재판장은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 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장에 전봉준의 다음과 같이 외쳤다 한다.

『정도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바 없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

이로써 동학 농민봉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죽기 전, 전봉준은 시 한 수를 지어 자신의 회한을 읊었다.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힘을 합하더니 / 時來天地 皆同力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 運去英雄 不自謨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야 / 愛民正義 我無失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 愛國丹心 誰有知』


비록 농민전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안으로는 갑오경장을 추동했고, 밖으로는 또 청일(淸日)전쟁을 일어나게 하였다. 더구나 농민전쟁은 영향은 수천 년간 이어오던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치열했던 1894년『동학농민혁명전쟁』이 실패하자 일부 동학 지도부와 동학도들은 의병이 되었거나, 조선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항일 독립투사가 되어 민족 제단에 몸 바쳤다. 그들의 피어린『반제반봉건,애민애국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 발전의 노둣돌이 되었음은 역사가 긍정 평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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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농민 봉기 지역도. 출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 (1996)


서양 열강 조선을 넘보다

 

19세기는 동아시아는 혼란기였다. 한마디로 서세동점으로 요약된다.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를 침략하는 형국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양선의 출몰과 청의 아편전쟁 등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민심 흉흉해지고 사회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이양선(異樣船)이란 조선 후기에 조선 연안 지역에 출몰했던 정체불명의 배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모양이 동양 세계의 배와 달리 특이한 모양이어서 이양선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양선은 영조, 정조 때부터 출몰하였으며 순조 때(1832년) 영국 상선이 최초로 통상을 요구해 왔다. 이들은 본국 정부 차원에서 정식으로 통상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이나 동남아에 진출한 상인이나 군인들이 독자적으로 조선에 진출하고자 한 것이지만 일부는 해안에 상륙하여 약탈하는 등의 만행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에 조선 정부의 실권자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등의 통상 요구에『척화쇄국정책』으로 고수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와 충돌한 병인양요(1866), 미국과는 신미양요(1871)가 일어났다. 대원군은 자신의 통상수교거부 의지를 널리 알리고자 척화비(斥和碑)를 한양 종로 네거리를 비롯해 전국 교통 요충지 200여 개소에 세웠다. 비문은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매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을 주장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개화와 개국을 완고하게 거부한 조선의 모습은 서양에서는 조용한 은둔의 나라로 인식될 뿐이었다. 그 가운데 흥선대원군은 며느리인 민씨 세력과 정국 주도권을 놓고 갈등이 심화되어 갔다.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잘 아는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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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척화비(斥和碑·경남 유형문화재 제120호)

<출처 : 양산시 시립박물관 >

 

불온한 사상가 최제우와 동학 


내우외환이랄까. 서세동점의 외세 위협까지 가세하는 상황에서 동쪽 나라 조선에서 동학이 창도 되었다.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들은 봉건 수탈과 억압에 신음하던 농민대중이 대부분이었다. 조선 민중은 특히『사람을 하늘 같이 모셔라.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원래 양반과 상놈은 없다.』등의 인권 존중과 인간 평등의 동학사상에 매료되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자, 봉건 정부와 기득권 양반과 유림 층은 동학사상을 이단시하고 배척했다. 결국, 조선 정부는 1864년 3월 최제우를『서양의 요사한 가르침을 이름만 바꾸어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로 처형하고 동학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법화하여 탄압하였다. 그러나 동학은 2대 교주 최시형에 이르러 더욱 널리 퍼져나갔고, 특히 1880년대에는 삼남 지방까지 전파되었다. 


1894년 동학 농민세력은 왜 목숨을 걸고 조선 정부와 연합한 외세인 일본군과 무장투쟁에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을까? 그들을 마음을 사로잡고 추동한 동학이란 무엇이고, 그 동학사상을 창도한 최제우라는 인물에 대해 간략하나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후세 사가들은 동학은 우리 근대사에서 조선 민중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상적 흐름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필자는 역사 전문가도 동학 전문가도 아님을 미리 전제한다. 개인적, 상식적 수준에서 동학과 최제우에 관한 연구 논문 등을 참고한 저술기록과 필자 생각을 덧붙여 기술한다. 


수운 최제우는 불온한 사상가였다. 조선왕조 입장에서는 동학을 통해 새 세상이 올 것처럼 조선 민중을 혹세무민한 대역죄인이요, 유교를 숭상하는 지배계급인 양반 측면에서는 좌도난정의 사상범이었다. 하지만 그는 과연 사도난정의 대역죄인인가, 혹세무민의 교주인가, 후천개벽을 꿈꾸는 혁명사상가인가. 어쨌든 후세 사가들에게서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는 좀체 보기 드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최제우 그는 누구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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