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辛未年 영해+울진 동학 거사 2일 천하 이야기 2

기사입력 2023.04.0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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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선생 경주 생가


수운 최제우의 생가를 찾아서

경주는 신라 천 년의 옛 도읍지이자,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불국토이기도 하다. 또한, 19세기 후반 수운 최제우 선생(1824-1864, 이하 수운 선생)이 창도한 동학의 성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경주는 역사적으로 이야기가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수운 최제우는 경주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래서 신미년(1871년) 영해·울진의 동학도들이 일으킨 동학 거사를 알기 위해서는 수운 최제우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는 세간의 학자들에게 한국 사상사에서 걸출한 사상가의 한사람으로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동학(지금은 천도교)을 창도한 교조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동학혁명의 원조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학 관련 조사와 연구를 위해서는 1차로 그의 생가 방문은 필수이다. 


필자는 2023년 1월 11일(수) 오후 경주의 수운 선생 생가(경주시 현곡면 가정1리 315)를 방문했다. 두 번째 방문이다. 10여 년 전, 가을 최제우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첫 번째 방문에는 필자 혼자였으나 이번 방문은 경주 토박이자 친구인 남호명(69, 전 초등학교장)씨와 함께였다. 그는 경주 출신으로 고향 경주에 대한 애향심은 물론 경주 지역사에 관해 두루 잘 알고 있어서이다. 마침 그가 시간이 있어 안내해주겠다고 해서 동행을 했다. 이날 수운 최제우 선생의 생가와 유허비, 그의 묘소, 경주시에서 건축하여 개관 예정인 동학기념관과 교육수련관을 견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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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선생 생가 조감도


지역사를 연구하는 우리 같은 아마추어 시민사학자들(필자는 역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과 구분하는 뜻으로 종래의 지역사를 연구하는 향토사학자라는 말보다 시민사학자, 시민역사연구자 또는 민중사학자라고 말하고 싶다.)에게는 어떤 역사적 주제에 관해 집필하고자 할 때는 현장답사는 필수다. 현장답사를 하지 않고 문헌으로만 연구한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역사적 현장의 생생함을 그대로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책상 앞에서 관련 문헌만 뒤적이는 것은 나무에서 가지만 보고 숲을 볼 수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사학자는 1차로 문헌 연구는 물론이고 발로 뛰는 현장답사는 늘 새로운 역사 현장이다.


수운 선생 생가는 경주 시내에서 10킬로미터쯤 되는 현곡면 가정 1리 315번지에 있다. 승용차로 이동했다. 겨울 날씨라지만 포근했다. 생가가 있는 동네는 우리나라 여느 농촌이나 다름없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남향으로 된 생가는 앞이 확 트인 곳으로 마을 앞산의 구미산을 바라보고 있다. 구미산에는 수운선생의 묘소가 있다. 생가와 묘소가 불과 1천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마주한 형국이다. 


수운 선생 생가는 남향으로 낮은 산 언덕배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생가 앞에는 수운선생 유허비가 있었다. 관리사무소에서 해설사 한 분이 나와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생가의 배치는 안채, 사랑채, 방앗간, 잿간, 화장실로 되어 있었다. 대문 밖 뜰에는 유허비가 있다. 복원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고풍스러운 맛은 없었다. 생가 안쪽을 둘러보았는데 깔끔하게 잘 정돈된 느낌이다. 사랑채에는 수운 선생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수운선생이 정자관을 쓰고 팔자수염의 근엄한 모습으로 앞을 내다보는 듯한 눈빛이다. 정자관은 조선 시대 사대부가 쓰는 관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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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생가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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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와 남호명 선생, 수운 생가 방문(2023.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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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선생 초상화. 경주 생가 

 

처음 수운 선생이 살았던 생가는 선생이 20세 무렵에 불타 없어지고, 오랜 기간 터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 천도교에서 1971년 집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2014년 고증과 관련 자료를 토대로 경주시에서 동학의 문화유적을 되살리고자 생가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1971년에 세웠다는 유허비는 돌거북 형상에 벌써 50여 년이 흘러서인지 고풍스럽고 단아했다. 비석 새김 글은 天道敎祖大神師水雲崔濟遇遺墟碑(천도교조대신사수운선생최제우유허비)라고 되어 있다. 이 새김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라고 한다. 참고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버지는 박성빈(1871-1938, 경상도 성주목 망성방 철산리 사읍촌, 現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장산리 철산마을)이라는 분이다. 박성빈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성주군의 동학 접주로 활동하다 처형당할 뻔했는데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다음으로 생가 해설사의 안내로 수운 선생 묘소가 있는 마을 앞산 구미산으로 이동했다. 묘소는 경북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산 75번지에 있다. 마을 들판의 농로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차량 이동도 가능했다. 그리 높지 않아 오르기가 편했다. 소나무 사이로 뚫린 산길은 호젓했다. 초입에서 산줄기가 아늑하게 펼쳐지고, 묘소는 북쪽을 향해 있었다. 묘소는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운치가 더했다. 묘소는 석축으로 둘러 있고 제단 위에는 돌항아리가 양쪽에 놓여 있었다. 조화 국화가 꽂혀 있었다. 묘소는 잔디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잠깐 참배한 뒤 산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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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선생 생가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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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선생 묘소

 

수운 선생 대구 기념물과 경주 동학기념관 

1864년 3월 10일(음) 수운선생이 대구 남문 밖 관덕당 앞뜰 장대(현 대구 종로초등학교)에서 처형된 뒤 그 제자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운구하여 자인현(현 경산)에서 3일간 유숙(빈소)한 뒤, 경주 구미산 아래 용담 앞 기슭에 안장했다. 이후 1907년 10월 17일 현 장소인 가정리 산 75번지에 이장했다고 한다.(도올 김용옥 지음, 동경대전 2, 동학연표. 397, 2021. 통나무)

 

앞서 이야기한 대구 관덕당(觀德堂, 관덕정이라고도 한다.)에는『최제우 나무』라고 이름 붙인 느티나무가 있다. 동학 교주 최제우가 종로초등학교 바로 옆 경상감영에서 지금의 반월당 관덕정 자리로 끌려가 처형된 역사적 사실을 기려, 1864년 3월 10일 당일의 그 참형을 지켜보았을 법한 거목 느티나무에『최제우 나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오마이뉴스. 20. 10. 10, 정만진) 

 

한편 관덕당은 과거 대구읍성의 남문이었던 영남제일문 밖 서남쪽에 있었다. 행정구역상 주소로는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245번지에 있던 경상감영이었다.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곳으로 천주교 성지로서 기념하고 있다. 천도교에서는 동학의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가 처형된 장소라 하여 주요 성지로서 기념한다. 관덕당은 2개 종교 성지가 겹쳐져 있는 셈이다.

수운 선생의 동상은 대구시 서구 비산동의 달성공원에 있다.


묘소를 참배한 뒤 경주시에서 건축하여 개관 예정인 동학기념관과 교육수련관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한창 마무리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천도교 측에서 시행하는 줄 알았는데 경주시에서 많은 예산을 들여 건립한다고 한다.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555번지 일원(29필지, 3만5,401㎡)에 동학 성역화 사업으로 진행된 이 기념관은 최제우 선생 생가 복원과 유허비 이설에 이어, 근대 사상의 뿌리인 동학을 재조명하고 동학 발상지 경주를『한국정신문화』의 중심지로서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조성됐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동학기념관의 주요 컨텐츠로는 동학 역사 애니메이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등의 자료를 터치식 모니터로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동학가는 길』등 동학 관련 프로그램을 연계해 운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더구나 내년 조성될『동학가는 길』(서경주역 ~ 수운생가 ~ 동학기념관)’ 9Km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동학가는 길은 1861년 해월 최시형 선생이 포항 흥해 검곡에서 경주 용담으로 수운 선생을 만나기 위해 왕래하던 길로 우리나라 고유의 근대화 출발의 역사적인 길로 조성한다고 하니 기대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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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건립 동학기념관(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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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건립 동학기념관 교육수련관 안내도

 

수운 선생의 가계

이 부문은 필자가 독서한 동경대전 등 몇 문헌을 참고하여 수운 선생의 가계와 성장 이력 등에 관한 배경지식을 간략히 기술한다. 왜냐하면 배경지식을 알아야만 그가 주장하는 동학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최제우는 순조 24년(1824) 10월 28일(양력 12월 18일) 경상도 경주부 현곡면 가정리(現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315번지)에서 유학자였던 아버지 근암(近庵) 최옥(崔鋈, 1762 ~ 1840)과 셋째 부인인 어머니 곡산 한씨(谷山 韓氏, 1785 ~ 1833) 사이의 1남 1녀 중 서자로 태어났다. 그는 '경주 최부자 집'의 비조인 최진립(1568-1636)의 7세손이다. 최진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 참전하여 공을 세운 무장이다. 부친 최옥은 경주지방에서 이름난 퇴계 이황의 영남학파였다. 수운 선생은 아버지 최옥에게서 유학을 공부한 이른바 지식인이었다. 근암 최옥의 묘갈명은 퇴계 10대 종손 이희녕이 썼다고 한다. 이를 보아 영남지역에서 유학자로서 근암 최옥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따라서 수운선생도 따진다면 아버지 최옥에게서 가학(家學)을 이어받았으므로 퇴계 이황의 영남학파의 유학자라고도 할 수 있다. 

 

수운은 10세 때 어머니 한씨가 돌아갔다. 늦게 아들(수운)을 얻어 기뻐하고 가학으로 학문을 가르치던 아버지 최옥마저 그가 17세 때 세상을 떴다. 


한편, 앞서 언급한 그의 조상 정무공 최진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에서 싸운 역전의 칠순 노장이었다. 그는 병자호란 때 장렬하게 전사했다. 1637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가 정무공이다. 최진립 장군은 5남 1녀를 두었다. 셋째아들이 최동량이다. 최동량 가계에서 우리나라의 모범적 윤리관을 지닌 깨끗한 부의 상징인 경주 최부자가 나왔다. 경주 최부자는 소위 가진 자의 사회 도덕적 책무인 노블리스오블리주의 전형이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경주 최부자 하면 웬만한 사람은 알고 있을 정도이다. 최동량의 가계가 수운 선생의 큰집인 셈이다. 넷째 아들이 통덕랑 최동길이다. 최동길 가계에서는 조선 후기 우리나라 정신사의 큰 산봉우리 할 수 있는 사상가 수운 선생이 태어난 것이다.


최제우의 호가 수운이다. 그의 호는 용담에서 연원 되었다고 한다. 용담은 수운 선생이 태어난 곳의 작은 못 이름이다. 또한 용담은 아버지 최옥이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고, 초야에 묻혀 제자들을 교육하는 재실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가을철 용담 둘레는 단풍으로 풍광과 운치가 멋진 곳이다. 필자가 지난 1월에 갔을 때는 물이 얼어 있었다. 둘레의 풍광은 겨울 골계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 수운 선생은 이곳에서 마음을 모으며 구도에 관한 깊은 사색을 했을 것이다. 

 

용담 표지판에는 수운 선생이『사람을 한울같이 섬기고 존엄하게 섬기고 보국안민, 광제창생, 지상천국을 건설하라는 인내천 진리를 창명하여 펴시던 성지 수련도장입니다.』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표지판이 덩그렇게 세워져 있는 것이 둘레 풍광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여기서 수운선생이 남긴 시 구절을 인용한다. 윤석산 교수가 쓴 글이다.


용담龍潭의 물이 흘러 사해四海의 근원이 되고

구미산龜尾山에 봄이 오니 온 세상이 꽃이로다.


용담의 물이 흘러서 온 세상(四海)의 근원이 되듯이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맥맥한 정신으로 살아남아 우리의 가슴에서 흐르고, 구미산에 봄이 오면 온 세상에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것처럼 동학의 무궁한 이치는 후천의 밝고 밝은 세상을 열어갈 진리로 자리 잡고 있다.

 

초월성과 내재성이, 절대성과 상대성이, 영원성과 시간성이, 무한성과 유한성이, 물질과 정신이, 신과 자연이, 신과 인간이 대립하고, 그러므로 갈등·대립과 모순이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오늘. 수운 선생의 가르침은 이 위기의 시대에,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니요, 한울님과 내가 둘이 아니요, 만유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조화調和와 융합의 정신을 통하여, 무너지고 훼손된 우주적 질서의 참다운 회복을 꿈꾸며, 현대라는 이 어둠의 벌판을 적시며 오늘도 맥맥히 흘러가고 있다. 드넓은 후천의 무극無極 바다를 향하여.(윤석산 지음,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306-307쪽, 2013,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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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경주 용담교구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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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정 성지 표지석

 

전국 방랑으로 시대의 흐름을 체험하다

수운선생이 19세 되던 해 울산의 밀양 박씨와 결혼을 했다. 그가 결혼 후 1년쯤 되던 해에 가정리 생가가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렸다. 그 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그는 아내를 남겨 두고 1884년 21세 되던 해에 집을 나가 1854년 31세까지 장사꾼으로서 10여 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방랑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방랑기인 셈이다. 그는 장사꾼(부보상)으로서 전라도 지방까지 넘나들었다. 그는 방랑 중 국내외적으로 정세 파악을 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삼정문란(三政紊亂) 등으로 고통당하는 민중의 참담한 생활을 직접 체험했다. 더구나 당시 민중들에게 전염병처럼 번져가는 것은 다름 아닌 도참신앙이었다. 인간은 시대 상황이 불안할수록 때로 도참신앙이나 정감록(鄭鑑錄) 같은 예언적 믿음에 기댄다고 한다. 

 

정감록은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널리 퍼진 예언서이다. 무능한 조선 왕조가 멸망하고 다음에는 정씨라는 참다운 지도자(진인, 眞人)가 나타나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고, 민중을 복되게 하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비밀스러운 내용이 담긴 책이다. 조선의 민중들은 정감록과 미륵신앙으로 지배계급의 무능과 폭력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조선 왕조는 정감록 신앙의 현실변혁 능력에 두려움을 느껴 정감록을 가지고 있기만 해도 구속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정감록은 당시에는 불온서적이었다.


또 하나는 앞서 이야기한 국제정세다. 바로 아편 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이다. 

아편전쟁(阿片戰爭)은 1840년과 1856년 두 차례에 걸쳐 대영제국과 청나라의 무역 수지 문제로 일어난 전쟁이다. 계속 청으로 유출되는 은화(銀貨)를 영국이 다시 회수하기 위해 청에 아편을 수출하여 중국의 민중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것이 원인이다. 영국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으로, 당시 동아시아 최 강국이었던 청 제국에게는 패배와 치욕을 안긴 게 아편 전쟁이었다. 영국은 아편 전쟁 승리의 결과로 중국의 여러 항구의 개항을 받아 냈으며 홍콩을 영국령으로 넘겨받아 자유무역항으로 만들었다. 이 아편 전쟁의 결과는 조선 왕조로 보아서는 유교의 종주국이 서양 세력에게 무참히 짓밟히는 경천동지의 사건이었다. 그 뒤 155년만인 1997년 7월 1일, 영국령이었던 홍콩은 중국으로 다시 반환되었다.


태평천국의 난은 1850년에서 1864년까지 중국에서 벌어진 대규모 내전이다. 태평천국은 기독교가 자극되어 생겨난 현상이었다. 기독교인이었던 홍수전이라는 인물이 자신을 예수의 동생으로 내세우고 하느님 앞에서 사람은 평등하고 모두가 형제자매라는 천하 일가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배상제회라는 기독교 단체를 만들어 종교 국가인 태평천국을 건설한다면서 내전을 일으켰다. 교전 상대는 청나라 황실이었다. 

 

이 내전으로 죽은 사람은 2천만 ~ 7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은 한때 남경까지 점령하며 사실상 국가 체제를 갖추고, 중국 남부에서 크게 세력을 불렸다. 결국, 청나라의 이홍장, 좌종당 등이 일으킨 의병과 태평천국의 확장을 두려워한 서방 세력과 연합해 난을 진압하였다. 

 

중국의 아편 전쟁이 끝나자, 태평천국으로 중국이 혼란에 빠지는 등 그야말로 도덕 윤리도 없고, 무력을 앞세우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조선은 조선대로 왕조의 무능으로 국가경영은 겨우 지탱하고 있으며, 관료의 부패가 다반사였다. 삼정문란으로 수탈에 시달린 농민들은 전국 도처에서 조선 정부에 저항하여 봉기하였다. 민심은 사나워 사회윤리와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각자도생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전국을 방랑하며 시대 상황을 절감한 수운 선생은 순망지탄(脣亡之歎, 동학론)과 순망지환(脣亡지之患, 포덕문)으로 표현하여 조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다. 이 두 용어는 입술이 망가지면 이가 시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이 망하면 이웃 국가인 조선도 서양 세력 등에게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근심을 말한다. 이 한마디로 당대의 국·내외 정세를 꿰뚫어 본 수운은 진실로 시대를 앞선 예언자였다. 


결국, 조선에도 서양 열강의 침투가 시작되어 민족 위기의식이 조성되어 있었다. 더구나 서학(천주교)의 전래는 사상과 풍속이 다른 조선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따라서 서양은 우리의 안위를 해치는 침략자이며, 이들이 내세우는 서학 역시 침략하고 정복하는 상극(相克)을 불러오는 종교로 진정한 의미의 한울님을 덕을 펴는 가르침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된다. 또 하나는 인간의 내면문제로 타락한 심성을 어떻게 하면 다시 도덕적 심성으로 회복할 수 있겠는가도 고민했을 것이다. 결국, 서학은 침략을 앞세운 종교로 세상을 올바르게 제도할 바른 가르침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다. (윤석산 지음,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76쪽, 2013,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수운선생은 아마 이 시기에 조선의 운명과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도하는 새로운 사상(동학)을 꿈꾸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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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 앞에선 필자

 

내 마음이 너 마음이다, 하늘땅 마음을 창도하다.

그는 10여 년의 방랑 생활을 끝내고 고향 경주 용담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고향 용담은 그를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는 다시 처가가 있는 울산(울산 여시바윗골, 울산광역시 중구 유곡동 639, 수운 최제우 유허지)에서 1년 반을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우연히 금강산 유점사 선승한테서 의문의 책 한 권을 받게 된다. 이 책이 바로 을묘천서(卯天書)다. 그 해가 을묘년(1885년)이어서 책 이름이 을묘천서다. 이 을묘천서를 두고 학계에서는 천주실의라는 책이라고 주장한다. 천주실의는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가 저술한 천주교 교리서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실제의 책이나 문건은 아니고 종교적으로 신비한 영적 체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함이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을묘년(1855년)에 하늘로부터 천서(계시)를 받았다는 뜻이다. 


현재에는 을묘천서의 내용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하늘에 기도하라(祈天)』는 가르침이 있었다고 한다. 이 가르침에 따라 수운 선생은 경남 양산 천성산 내원암과 적멸굴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수련에 맹진하였다.『도(道)를 밖에서 구하지 말고, 자신(내) 안에서 구하자.』는 깨달음을 얻은 수운 선생은 고향 경주 구미산 용담정으로 돌아왔다. 

고향 용담에 와서도 게으름 없이 오직 수련에만 정진하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용담정은 수운 선생의 아버지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학당이 있었던 곳이다. 그는 용담정에서 구도를 위한 수련에 들어간다. 수운 선생은 이 무렵, 자신의 처음 이름인 제선(濟宣)에서 제우(濟愚)로 개명한다. 세상을 어리석음에서 구제하겠다는 굳은 신념의 표현이자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의 표출이라 하겠다.


그러다가 어느 날 조카 생일잔치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 갑자기 몸이 떨리는 현상을 느끼고, 하늘님과 문답을 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내 마음이 너 마음이다.)인 무극대도(無極大道)의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이때가 경신년 1860년(포덕 원년) 4월 5일이다. 천도교에서는 이날을 천도교 원년으로 삼아 ‘천일기념일(天日紀念日)’로 기리고 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창도자의 탄생일을 기준 삼아 그 종교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천도교는 수운 선생이 득도를 한날을 기준으로 하고 포덕 원년으로 하고 한다.


그렇다면『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내 마음이 너 마음이다.)은 무엇인가. 이 말은 하늘님의 마음이 수운 선생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수운 선생이 하늘님과 일체를 이루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천인여일(天人如一)의 경지를 말한다. 하늘님은 다른 초월적인 공간에 계시는 게 아니라 본래 내 안에 모셔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시천주(侍天主)라고 하며, 동학의 근본 사상이다. 

 

하늘님을 모셔라, 하늘님은 외계에 있는 게 아니라 너의 몸과 마음에 있다. 너가 바로 하늘님이니 인간은 하늘과 같이 존귀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천주는 인간의 존엄성 중시와 만민평등 의식은 기본적으로 서민 대중을 근간으로 한 사상이다. 서학의 인간관과는 아주 색다른 해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서학(천주교) 등은 신과 인간과의 평등구조가 아니라 수직적, 예속적 관계이요 유일신관이다. 하지만 동학은 하늘님을 마음 속에 모신 평등한 관계로 인간이 주체적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적 구조나 환경 등에서 벗어나 이 땅의 현실문제를 인간이 해결하여 다시 개벽의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타 종교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수운 선생의 ‘양반도 상놈도 없이 모두 하늘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근원적으로 모두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 정신인 인간 존엄성, 평등사상 등의 선포는 당시 노예적 신분질서와 생존의 한계에 처해 있는 일반 백성들에게 급속히 확산이 되었다.

이 시천주 사상은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이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제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이르러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발전하여 천도교로 나아갔다. 

 

수운선생이 창도한 도는 처음에 무극대도(無極大道, 끝없이 훌륭한 진리)'라 하였다. 그 뒤 동학(東學)이란 수운선생이 서학(西學, 기독교)의 도래에 대항하여 동쪽 나라인 우리나라의 도(道)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1905년에 제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 때 천도교(天道敎)로 이름이 바뀌었다. 


세상에 처음 나오는 진리는 박해를 받는다.

1863년 5월 하순 최제우는 관의 지목에도 적극적으로 동학 강론을 했다. 당시 동학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관심과 기대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동학 강론이 활발하게 진행될수록 지방 유생들과 조선 정부는 동학을 죽음의 골짜기인 서학으로 몰아 본격적인 동학 탄압에 발동을 걸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경상감사 서헌순이 장계를 올려 동학을 이단으로 지목하고 최제우를 교수형에 처하라고 한다. 동학의 교세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으로 비변사등록의 철종 14년 1863년 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령으로부터 경주에 이르기까지 400여 리의 10여 주군에서 동학 이야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듣지 않음이 없고, 경주 주위의 여러 읍은 그 이야기들이 더욱 심하니 주막의 부녀자들과 산골짜기의 아이들까지도 그 글을 전하여 읊지 아니함이 없다』라고 했다.


1863년 9월 13일-상주 우산서원의 동학배척 여론조성, 영남 일대의 유생들은 한결같이 수운을 혹세무민하는 술법을 부리는 서학의 무리보다 더하다고 맹렬하게 비방했다. 우산서원은 동학배척 통문을 상급서원인 도남서원에 발송했다. 통문 내용은『지금 소위 동학이라는 것은 어떤 무리의 요마 흉물인지 제 모습을 포장하여 알 수가 없다. 서양의 학을 하는 도적들이다. 무지한 백성은 그들에게 더욱 감염되기 쉬울 것이다.』 동학세의 확장을 우려한 지역 유생들의 동학 처벌이 조선의 중앙정부까지 상신하기에 이르렀다. (도올 김용옥, 동경대전, 동학 연표, 392-393쪽 참조함)


동학의『인간은 존엄하다. 양반, 상놈 없이 모두 평등하다.』등을 설파하는 최제우를 조선 정부는 좌도난정이라는 죄목으로 1864년 3월 10일 대구 관덕정에서 처형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1907년 순종 때 그의 죄가 풀렸다. 좌도난정(左道亂正)'이라는 것은 도가 아닌 것으로 유교의 정신을 어지럽혔다는 뜻이다. 사형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동학의 우두머리 최제우, 사술(詐術)로서 사람들의 질병을 고친다고 했고, 주문으로 국가 민족을 기만했고, 칼 노래로 국정 반역을 모의했고, 간사한 도로 풍속이 바른 질서를 문란 시켰음으로써 처형함을 선고한다.』


소크라테스도 신성 모독과 청년을 잘못 인도한다는 대중(배심원)의 판결로 독배를 마셨다. 예수가 기득권 유대교의 율범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결국 십자가형을 받았다. 역사적으로 그랬다. 국가든, 당시의 기성종교든 관습적 질서이든 간에 고착된 기득권층은 관습화된 안주와 노예적 안정을 희망한다. 그래서 체제나 기득권의 위협요소가 될만한 도전은 무조건 깔아뭉개고 본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들의 모순적 관습과 위선, 무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이 그랬다. 수운 선생도 무극대도를 창도하자 사술로서, 주문으로, 칼 노래로 반역을 꾀한 죄로 처형되었다. 그렇지만 박해받은 진리는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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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규 생가(기성면 방율길 552-10). 현재 타인 소유의 집이다. 후손은 대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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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두병 선생 생가(2000년대 모습, 매화면 금매1리) - 좌, 개축된 와가 앞에선 남두병 선생 후손 남상균씨(매화면 금매1리) - 우

 

평해·울진지역에도 동학 포덕이 시작되다.

경주에서 창도 된 무극대도(동학)는 차츰 흥해, 영해를 지나 평해·울진으로 북상하게 된다. 이후의 글은 필자가 이미 발표한 1871년 영해·울진 동학거사에 소개(울진학연구소 논문집, 울진사향, 제8호, 2022년 12월 발행)한 내용을 주로 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수운 최제우는 1861년 6월, 경주 용담에서 포덕을 시작했다고 한다. (김용옥 동경대전 동학연보, 385쪽) 포덕 이후 동학은 경주를 시작으로 동해안을 따라 급속 확산이 되었음은 물론 접주제를 만들어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를 확보하였다고 한다.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자 교단 관리를 위해 최제우는 경북 흥해 매곡동 손봉조의 집에서 1862년 음 12월 29일, 최초로 16접주를 임명했다. 경주 서부 백사길, 강원보, 영덕 오명철, 영해 박하선, 영양 황재민 등이다. 한 접은 30-50호 단위라고 한다. 초기 접주 명단에는 울진 접주는 없다. 이로 보아 아직 울진에는 동학이 크게 미치지 않은 듯하다. 동학을 신봉하는 이들이 있었다 해도 접주를 임명할 만한 위상을 갖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필제는 병인(1866년) 영해 병풍바위가 있는 우정동에 이주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1863년 7월 23일 수운 교조로부터 평해의 기성면 방율리 전동규 접주, 울진 매일리 남두병(남두병)접주, 죽변의 전청오 접주 50여 명이 이필제와 교류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이필제는 이미 3년 전에 여러 접주와 접촉하거나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나온 동경대전1(도올 김용옥, 동경대전1, 동학연표, 1779-2021쪽, 2021,)에 따르면 수운선생은 마침내 글을 띄워 파접을 하였다. 그때 모인 사람이 거의 4-50명이었다. 수운은 해월을 북도중주인에 임명하였다. 사실상 해월 최시형을 후계자로 내세웠다. 북도중주인은 경북의 북부지역인 검등골 일대, 영일, 청하, 영덕, 영해, 평해, 울진, 안동, 영양, 단양, 신녕, 예천, 상주, 보은 등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이다. 여기에 수운은 해월을 임명한 것이다. 수운이 파접(접을 일시적으로 깨는 것)은 조선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자 미리 동학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전 방책을 강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수운의 파접과 해월을 사실상 제2대 교주로 임명 당시 거기에 모인 사람이 4-5명 되었고, 평해와 울진이 거론되는 것은 이미 평해와 울진지역에 상당수의 동학도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이미 평해, 울진에도 접주가 있었지만, 사정상 드러내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평해 접주는 전동규, 울진 접주는 남두병이라고 생각한다. 1871년 당시 전동규(전동규, 전인철, 전의철은 동일인물)는 평해군 무관직 장교로서 현직 관리였다. 조선 후기 장교(將校)는 각 군영과 지방 관아의 군무에 종사하던 낮은 벼슬아치이다. 군병의 성격이라기보다 경찰·호위의 임무를 맡는 일이 많았다. 요즘 직책으로는 일정 지역의 치안을 책임지는 경찰서장격이라 할 수 있다. 


남두병은 유학자이며, 본관은 영양남씨다. 호는 칠서, 조선조 남회(南薈, 호 정일재(精一齊)가 그의 선조이다. 남회는 1420년(세종 2년) 무과 급제. 낙안군수, 제주 목사를 지냈다.『남두병 할아버지는 힘이 장사였고, 유학자로 엄정한 정신을 가진 선비였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진보적 지식인이었다고 한다. (현 후손 남상균 증언) 남두병은 영해거사시 주요 핵심인물로 소모문을 지었다. 거시 후 관의 탄압과 심문과정에서 물고(고문치사)로 사망했다. 그가 옥중에서 남긴 시가 전한다. 대구 감영에서 처형 후 시신 수습을 못하고 의관장을 했다고 한다. 

 

이들은 동학을 금하는 조선 정부의 억압적 조치와 세인들의 지목은 물론 지역 유림의 우려 등을 고려치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기존세력과 사상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일이고, 조선 정부에는 역적 행위라 목숨을 담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용기가 필요했다고 보겠다. 당시 지식인으로서 남두병 선생의 애간장 녹이는 심정이 이별시에 잘 나타나 있다.

 

제2대 교주 최시형은 스승 최제우가 처형당하고 나서, 그의 지시대로 고비원주(高飛遠走)하여 몸을 피했다. 그는 평해(황주일)와 죽변에서 은거하다가 다시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상죽현(윗대치)으로 몸을 숨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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