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辛未年 영해+울진 동학 거사 2일 천하 이야기

기사입력 2023.04.19 14:26  |  조회수 24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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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52년 전, 1871년 3월 10일(음, 수운 최제우 순도일:기일)을 택하여 영해, 평해, 울진 등 전국 12곳에서 모인 500여 명의 동학도와 비동학인이 영해부 관아를 기습 점거한 사건이 이른바 신미년 영해 동학 거사이다. 거사 대의명분은 동학 교조 최제우 신원 회복과 지방 탐관오리 척결 등 제세안민이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이든 간에 반드시 그 사건에는 원인과 배경, 인물, 사건의 경과와 결말 등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먼저 이 거사를 기획하고 주도한 여러 주요 인물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평해, 울진의 동학과 관련하여 최시형(제2대 교조), 이필제(홍성), 전동규(평해 월야동), 남두병(매화 금매)만을 언급하도록 한다. 


최 보따리와 도바리는 운명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여 1861년 6월부터 포덕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1863년(철종 14년) 12월 10일, 조선 정부 선전관 정운구에게 체포되어 대구 감옥소에 갇혔다. 선전관은 왕명을 받고 국가의 중대한 죄를 범한 사람을 체포하는 일을 맡은 관직이다. 요즘으로 치면 특별 수사관(검사)이나 다름이 없었다. 체포 이후 수운선생은 경상감사 서헌순(1801년∼1868년)의 가혹한 고문으로 넓적다리가 부러지기까지 했다. 초 죽음 상황에서도 그는 동학이 사악한 도(道)가 아님을 주장했다. 경상감사는 수운선생의 심문 결과를 조정에 올렸다. 

 

조정에서는 수운 선생을 반란을 꾀하는 사학(邪學)의 우두머리로 혹세무민한 좌도난정(左道亂正之律)이라는 죄명으로 효수할 것을 판결했다. 이듬해 3월 10일, 대구 경상감영 안의 관덕정(觀德亭) 뜰 앞에서 처형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1907년 순종 때 그의 죄가 풀려 이른바 명예가 회복되었다.


하지만 수운 선생 사후 스승의 유지를 받들고, 동학의 제2대 교조가 된 해월 최시형(이하 해월 선생)에게는 고난의 역경이 시작되었다. 그에 앞서 1864년 3월 3일 해월 선생은 지명 수배자임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경상감영 옥리인 곽덕원(옥바라지)의 종으로 행세하여 스승 수운을 만났다고 한다.  일설에는 마지막으로 제자를 만난 수운은 해월 선생에게 시 한 편을 건네주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두 줄의 시는 동학의 진리를 앞날에 펼칠 해월 선생에게 주는 것으로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 있다고 보겠다.


등불 환히 비추는 물 위, 아무런 혐의의 틈이 없구나. (燈明水上無嫌隙)

-이 구절의 뜻은 물 위에 비추는 등불과 같이 민중을 구할 새로운 진리인 동학에는 아무런 혐의(죄가) 없는데, 자신은 혹세무민의 죄로 붙잡혀 감옥에 갇혀 있음을 말한다. 


기둥은 마른 것 같으나 아직 그 힘이 남아 있도다 (柱似枯形力有餘)

-이 구절 또한 동학이 현재 조선왕조의 탄압으로 다 죽어 가는 듯하나 마침내는 그 도(진리)를 펼칠 사람(해월 선생)이 살아남아 꽃을 피운다는 뜻이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해볼 수 있겠다. 


수운 선생은 해월에게 따로 高飛遠走(고비원주)라는 쪽지도 전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이 시간 이후 멀리 도망하라는 뜻으로 너(해월)는 살아남아 동학의 도를 세상에 널리 전하라는 것이다. 

이후 해월 선생의 최 보따리와 도바리 인생이 시작되었다.

이 말은 평범한 시골 청년이었던 최시형이 동학에 입도하여 시작된 고난의 인생을 잘 나타낸 개인의 별명이자 동학이 겪은 수난의 상징어이다. 


그는 스승 수운 최제우의 유지를 받들고 포덕 활동을 할 때 관의 수배를 피해, 전국 200여 곳을 도피와 은신으로 연명하면서 한편으로는 동학을 설법하며 살았다. 『도바리』란 은어로 관의 지명수배를 받고 도망 다니는 일이나 그런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그는 30년을 넘게 전국을 떠돌며 당시 조선의 민중에게 사람은 모두가 귀한 존재로 양반, 상놈 없이 평등하고, 사람대접을 받고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대동 세상을 꿈꾸는 동학의 가르침을 펼치기 위해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그는 도피할 때마다 달랑 보따리 하나를 메고, 깊은 산골짜기를 떠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최 보따리다. 산천경개를 유람하는 팔자 좋은 방랑객도 아닌 그가 깊은 산골에서 식량이 떨어져 열흘을 나무뿌리, 열매, 풀뿌리 등으로 연명하며 한순간은 바위에 떨어져 죽을 생각까지 하였다니 그 고초를 무엇에 견주겠는가. 

평범한 시골 할아버지였던 해월 선생의 최 보따리와 도바리 인생은 팔자소관으로 운명이었다.

 

이 한 장의 사진을 보라

이 한 장의 사진을 보라! 

순박한 시골 할아버지 등 뒤에 이른바 죄인 동학 괴수 최시형이라는 무시무시한 글귀가 붙어있다. 백 마디 말보다 이 한 장의 사진이 인간 최시형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한편으로는 눈물겨운 행색이지만, 어찌 보면 평범한 우리 이웃집 할아버지와 같다. 필자는 그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싶다.

『저 형형하고 순한 눈빛은 살아있는 동학이다. 수풀로 우거진 수염과 손가락 마디마다 엉겅퀴 같은 세월이 휘감고 있다. 발은 퉁퉁 부어 있고, 바람도 자고, 갈 수 없는 남루한 옷차림에도 조선의 혼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사람의 존재를 더없이 거룩히 했던 사람! 해월 최시형! 조선 민중에게 바다와 달의 존재 같았던 그대! ‘다시개벽’의 진리를 무기 삼아 시대의 가시밭길을 온몸으로 걸어간 해월은 진정한 동학의 괴수다. 그는 조선 민중을 사랑한 진정한 조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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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처형 직전 찍은 해월 선생(사단법인 동대해문화연구소 제공, 포항)

 

어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도 간디는 잘 알지만, 정작 해월 선생은 잘 모르는 같다고 한다. 동학(후일 천도교)의 어머니 같은 존재가 바로 해월 최시형 선생이라는 것이다. 한 인물의 진정한 평가는 그가 한 말이 아니라 평생을 걸어온 그의 행적이 말해주는 것이다. 해월 선생이 그렇다.

저 눈물 나면서도 엄숙한 생의 마지막 선생의 모습 사진은 해월 선생이 처형 직전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찍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기간 설사와 탈진으로 혼자 앉아 있기도 버거웠기에 뒤에서 누군가 숨어서 쓰러지지 않게 잡고 있어서 저고리가 오른쪽으로 쏠렸다는 설이 있다. 


여기서 인간 최시형이 어떤 인물인지 간략히 살펴보자.

최시형은 본관이 경주 최씨로 경주 동촌 황오리에서 1827년 가난한 농사꾼 아들로 태어난 해월 선생은 5세대 어머니를, 15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다. 비교적 어린 시절에 조실부모한 고아가 된다. 해월 선생의 아버지는 최종수이고 어머니는 월성 배씨이다. 아버지 최종수는 몰락한 양반 집안의 권위를 찾기 위해 어린 최시형을 당시 경주의 이름난 서악서원에 보내어 학문에 입문시킨다. 하지만 집안 형편으로 서악서원에서 공부는 오래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해월 선생의 가계를 위로 더듬어 올라가면 신라 말기 대석학인 고운 최치원 선생이 제1세로 시조이다. 해월 선생은 최치원의 30세손이 되는 후손인 셈이다. 어릴 때 이름은 경상(慶翔)이다. 자(字)는 경오(敬悟), 도호(道號)는 해월(海月)이다. 시형(時亨)이라는 이름은 천도교의 『도원기서』에 따르면 1875년 해월 선생이 스스로 개명한 것이라고 한다. 時亨이라는 이름은 1875년(포덕 16년) 최경상의 나이 49세 때 단양 송두둑에서 용시용활(用時用活)이라는 법설을 하고 나서 고쳤다고 한다. 이때 강수도 姜時元으로 이름을 고치고 최시형의 다음 도통을 이어받을 사람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전성문은 전시황(全時晄)으로 개명했다. 개명의 뜻은 용시용활이란 때(時)를 살려서 쓸 것을 강조한 최시형의 가르침을 뜻하는 천도교 교리이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에 따르면 자기(최시형) 이름과 두 제자의 이름을 ‘때 시(時)’자를 넣어 고쳤으며 자(字)도 ‘살릴 활(活)’ 자를 넣어 고쳤다고 한다, 본래는 하루 열두 시간을 살려서 잘 쓰라는 의미였으나, 나중에는 넓게 풀이하여 시간·시기·시대를 알고 신속히 활용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천도교가 1900년대 초에 개화운동을 벌였고, 1910년대에는 민족문화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1920년에 신문화운동을 크게 편 것은 시대에 맞게 이 사상을 시대에 맞게 적용을 시켰다고 할 수 있다.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함)


청소년 최경상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어린 누이동생을 데리고 17세까지 떠돌이 머슴 생활로 전전했다. 그는 열일곱 살 되던 해에 머슴 생활을 마감하고 아버지 고향인 현재 포항시 신광면에서 조지소(造紙所)에 일자리를 구해 안정을 되찾았다고 한다. 조지소는 닥나무로 한지를 생산하는 수공업 형태의 공장이다. 그는 그곳에서 일하면서 19세에 흥해 매곡의 밀양 손씨를 배필로 맞아 혼인했다. 그 뒤 조지소를 그만둔 그는 신광면 마북으로 이사하여 마을의 집강( 마을에서 온갖 굳은 일을 하는 봉사역할)이 되기도 했고, 다시 신광면 검등골(검곡)으로 이주해서 화전민 생활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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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소(포항시 신광면 기일리497번길 36-1) (사단법인동대해문화연구소 제공. 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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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최시형) 선생 옛 집터 표지판과 집터(사단법인동대해문화연구소 제공. 포항)

  

물과 구름, 바다와 달이 만나다.

그가 어떻게 수운 선생을 만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체로 수운 최제우 선생이 1860년 『다시개벽』의 무극대도인 동학을 창명한 뒤이다. 일설에는 일찍부터 수운 선생이 먼 일족인 해월을 보살펴주기도 했다. 그러던 중 1861년(철종 12년) 종이 조지소를 찾아온 먼 일족인 최제우와 세상 일에 관한 담론을 하다가 그의 제자가 되어 동학에 입도하였다. 또 하나는 해월 선생이 경주 용담으로 직접 수운 선생을 찾아가서 방문하고 입도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2년 뒤 1863년 음력 7월, 수운 최제우로부터 동학을 이어받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 당시 동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인 경북 북부와 동해안 지역의 최고 지도자를 말함)으로 임명, 1863년 2대 교조가 되었다. 


수운 선생은 전국에서 찾아오는 유학자, 지식인 등 인물들이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시골에서 근근이 일용노동자로 살아가는 최경상을 동학을 책임질 인물로 택했을까 한다. 아마 수운 선생은 정직한 우직함과 이른바 고매한 지식에 물들지 않고 자기 희생적인 참인간을 최경상에게서 발견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을 새롭게 바꾸는 동학이 내세우는 다시개벽의 신인간형을 해월에게서 진면목을 보았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수운 선생의 예지력이 탁월했음이 나타나는 대목이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관계를 인연이라고 한다. 수운과 해월의 만남은 그저 평범한 만남은 아니다. 하늘의 뜻과 땅의 마음이 만나 시천주하여 진리가 마침내 큰 바다로 이르러 다시 개벽을 이루어 가는 것이 무극대도가 아니겠는가.


앞서 이야기했지만, 수운 선생 사후 최시형은 동학의 최고 책임자로서 온갖 고초를 겪어가며 36년 동안 보따리를 걸머메고, 도바리 생활을 하면서 동학 재건에 힘썼다.

특기할만한 것은 해월 선생이 스승 수운이 『고비원주』하라는 유명을 받고, 4월 영덕 직천의 강수집을 거쳐 울진 평해, 죽변에서 1864년 여름을 머물렀다고 한다. (일설에는 평해, 죽변에서 수운 선생 가족과 머물렀다고도 함.) 평해는 황주일의 집에 은거했고, 죽변의 은거지의 주인 이름과 주거위치는 아직 미상이다. 황주일은 동학도임에 틀림이 없고, 평해황씨로 보이는데 실제 황주일이 거주했던 집의 정확한 현 위치(주거지)는 아직 미상이다. 그 뒤 해월 선생은 울진지역을 떠나 영양 용화동 윗대치로 은신하였다고 한다. 그때가 1865년 3월이다.


해월 선생은 영양 위댓치라는 산골에서 은거하는 7여 년 동안 수운 선생 탄신향례와 순도제례, 동학 재건을 위한 계 조직, 수운 선생 가족 보살핌, 사인여천과 귀천차별 철폐 관련 등 법설, 전국에서 방문하는 동학도인 지도, 1871년 영해·울진 등 동학거사 지도자 역할과 같은 많은 일을 했다. 그래서 동학의 초기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1894년 전봉준 등이 기포한 동학농민혁명 당시 해월 선생은 주모자로 수배자로 또다시 은거 활동으로 전전하다가 그가 72세 되던 해인 1898년 4월 강원도 원주 송골에서 관군에 체포되었다. 그는 한양으로 압송되어 스승 최제우와 같은 죄목인 좌도난정율로 사형을 언도받고, 같은 해 6월 2일, 한성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천덕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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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산 원경(영양 이상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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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일월산 용화 대티 가는 길(영양 이상국 제공)

 

해월 선생이 없었다면

해월 최시형(1827-1898)이 도바리 인생에 있어서 한곳에 가장 오랜 기간 머물렀던 곳이 영양 윗대치가 아닌가 쉽다. 머문 기간이 7년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동학의 중심 교리인 인시천(人侍天), 양천주(養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 이천식천(以天食天) 등의 교리를 체계화시켰다. 또한, 1871년 영해 동학거사, 1894년 동학농민혁명 등을 지도하고, 무너져 간 동학 조직을 재건하여 민중들에게 그것을 전파해 동학을 거대한 세력으로 형성시킨 인물이다. 

서양 로마 시대 초기 기독교 지도자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바울이다. 바울의 열정적 전도로 당시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 널리 퍼져 나갔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가 없었다면 바울도 없었겠지만,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운이 없었다면, 해월도 없었겠지만, 해월이 없었다면 동학도 멸절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 지나친 언사일까? 기독교의 사도 바울과 같은 인물이 바로 동학의 해월 선생이다.

 

해월 선생의 일대기에 관하여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는 『겉보기에는 산속으로 떠돈 중늙은이였지만 해월의 실천적 삶에 감동해 많은 이들이 따랐다.』며 『종교를 떠나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귀한지 평생 가르치고 실천한 민중의 지도자로, 오늘날 같은 갈등과 혼돈의 시대에 그의 가르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해월 선생은 포항 사람이다. 현재 동학과 해월 선생 삶과 유허지 등에 관해 재조명하는 사업을 펼치는 기관단체로 『사단법인동대해문화연구소』(이사장 이석태)가 있다. 이 연구소는 1994년에 창립되어 지금까지 포항의 역사문화 등을 연구하고,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지역발전에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며 기관지 『동대해문화연구』를 펴내고 있다. 특히 해월 선생의 삶을 보여주는 『해월선생동학기념관』 건립 등의 목표도 가지고 있다. 


이필제는 시대의 풍운아인가

① 이필제!(李弼濟 1825-1871) 그는 시대의 풍운아인가. 아니면 변혁운동가인가. 우리가 영해·울진 동학 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필제이다. 그를 두고 모기에 빗대어 문장군(蚊將軍)이라고도 한다. 모기처럼 여기저기 찝쩍대다 죽었다는 뜻으로 어찌 보면 이필제를 비하하는 말이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천도교 쪽에서는 이필제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껄끄러운 인물이다. 그는 전봉준과 마찬가지로 동학 조직을 와해하고 위축시킨 인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필제는 2020년도 국가공무원 시험문제에도 출제될 만큼 조선 후기 민중봉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최근 영화에서도 등장했다. 영화 『개벽』에 원로배우 김기주씨가 이필제로 분장했고, 특유의 강한 인상을 보여주었다. 


그는 충청남도 홍성(洪城)인 홍주(洪州) 출신으로 몰락한 향반(鄕班 시골 양반)으로 전국을 떠돌면서 여러 차례 이름을 바꿨다. 근수, 제발, 필제, 이홍, 진명숙, 김창정, 김창석 등으로 바꿨다. 이와 같은 변 성명은 당시 사회의 분위기와 흐름을 잘 이용하는 정치적 수완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필제는 과거 시험을 치러 무과에 급제했지만, 당시 무과에 합격해도 바로 임용되는 게 아니었다. 조선 정부는 필요에 따라 수시 임용하였다. 그래서 무과에 급제한 사람을 선달이라 했는데 요즈음 같으면 공무원 대기 발령자이다. 이름 좋은 선달이었지만 빈둥대는 건달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런 실업자 생활을 하면서 당시 어지러운 국제정세와 국내 정치 상황을 관망, 청나라를 친다는 북벌을 계획하거나 이씨 조선왕조 멸망 이후 정씨 왕조 개창설 같은 정감록 비기설을 신봉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아마도 그는 사회불안에 동요하는 민심을 이용해 국가와 사회를 어찌해보겠다는 야심을 불태웠을 것이다.


시대의 풍운아였던 이필제는 민란을 주도했던 이전의 지도자와는 완전 다른 사고방식을 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이미 1869년 진천작변, 1870년 진주작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1871년 영해 거사, 조령(문경)의 난 등을 주도하였던 인물이다. 결국, 이필제는 영해, 울진 등 전국에서 함께한 500여 명의 동학, 비동학인이 함께 한 영해 거사에서 자기가 뜻한바 일부를 성취했다고 보여진다. 그는 영해 거사 후 단양으로 도피했다가, 그해 4개월 후인 1871년 7월 5일, 문경(聞慶)의 요새인 조령관(鳥嶺關)을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서원 철폐 등으로 조정에 불만을 품은 유생들을 모아 반란군을 조직하였으나 사전에 탄로가 나서 체포당해 실패했다. 이필제는 1871년 12월 23일 반역 죄인으로 한성 감옥(지금의 서울시청 프레스센타)에서 처형당했다.

 

이필제의 행위를 요즘의 상식으로 보면 황당하고 무모한 면도 있지만, 그는 조선 후기 민중봉기(운동권)의 대부였다. 불과 2년 사이에 5번이나 전국 각지를 도망 다니면서 끊임없이 반란을 선동했던 지명 수배자였다. 그런 와중에서 지역에서 활동자금 등 후원자를 물색하여 지원받고, 동조자들을 규합하여 민중봉기를 통해 사회변혁을 도모했다. 그는 변혁운동가였다. 그가 일으키려고 했던 민중봉기는 조선 후기의 국가 통제력이 그만큼 약해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이필제는 나름대로 조선 사회의 모순을 분석하고 그 바탕 위에서 구제책을 제시했다. 더욱이 그는 당시까지는 그 누구도 생각지 않았던 청나라(중국)정벌이라는 거대한 구상을 했다. 물론 그 이전 시대 효종이 북벌의 의지가 보이기는 했지만 19세기 중반에는 누구도 감히 하지 못했던 발상이었다. 오히려 모화사상에 젖어 소중화를 외치고 일신의 영달만을 위해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던 양반지배층에 대한 각성을 주는 진취적 기상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1871년, 영해 동학 거사는 비록 봉기 이후 대대적인 관의 탄압을 받지만 그들의 저항정신만은 꺾을 수 없었다. 그것은 23년 뒤의 동학농민혁명으로 계승되었다고 학계에서는 평가한다.


울진 동학도 진보 유학자 남두병

② 남두병(南두병)과 전동규(全東圭)는 울진 사람이다. 먼저 남두병에 대해 알아보자. 

남두병의 또 다른 이름은 남칠서다. 영양남씨로 울진 매일리(현 매화면 금매리) 출신의 유학자였다. 그는 심문(조선정부 기록인 적변문축)에서 호를 미촌(眉村)이라 했다. 다른 사람의 진술에서 나온 양파(羙坡)는 할아버지의 당호라고 했다. 아마 그가 자기 이름을 미파니, 남양파니 하면서 본명을 바꾼 것은 자기 집안을 보호와 동학 거사의 비밀유지를 위해 그러했을 것이라고 후손들은 증언하고 있다. 


그는 영해 동학 거사시 창의 민병을 모집한다는 소모문을 쓴 인물이다. 그는 당시 영해 거사 수년 전부터 이필제와 김낙균과 교유했던 것으로 관변측 문서에 기록되고 있다. 처음에 이필제가 영해 거사에 남두병을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자, 다시 김낙균을 보내 설득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남두병이 당일 영해 거사시 현장에 있었는지는 불명확하다. 남두병은 거사 후 울진현에서 1차로 심문 후 아무 죄가 없다고 하여 풀려났다. 그런데 흥선 대원군(이하응)이 밀파한 배선달이라는 무인(특별수사관)에게 체포되어 영해부에 압송되어 심문 중 고문치사(물고) 당했다. 


교남공적(안핵사보고문서)에는 그를 두고 다음과 같이 비난을 하고 있다. 

『남두병은 제발(이필제를 말함)과 더불어 둘이면서 하나이다. 창자가 서로 이어지듯이 머리에서 꼬리까지 얽혀져 있다. (중략) 무리를 규합해서 울진에서 소리와 세력으로 일으켜서 영해의 동학을 모의하는데 호응하였다. (중략) 여러 번의 심문에서도 계속 잡아떼어 감히 잘못을 벗어날 계획을 세웠으니 소집하고 모이는 글(소모문)을 스스로 지었다는 것을 승복함이 없이』(이하생략)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정부에서는 이필제와 남두병을 둘이 한 몸이 되어 반역을 도모한 극히 사악한 인물로 판정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남두병은 영해 거사에 초기 단계부터 관여하여 주도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울진에서 재지사족으로 일컫는 영양남씨 집안에서 그것도 유학자였던 그가 조선 정부에서 금하는 동학에 입도하여 반역을 도모하는 무리와 놀아났다는 세간의 평에 집안에서는 큰 충격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는 일찍부터 이필제와 교유를 하면서 세계사적 조류와 시국에 대해 서로 공감하고. 사회체제 변혁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즈음으로 치면 선구적 진보 인사이다. 그는 영해 동학혁명 후 체포되어 대구 경상감영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이별시를 남기고 옥사했다. 당시 그의 아들이 옥바라지를 했으나 시신은 수습지 못해, 고향 금매리에 의관장을 했다고 한다. (후손 현 울진 매화 금매리 거주. 남상균 증언, 68세)


그가 남긴 창의 소모문은 앞으로 좀 더 세밀히 살펴 분석해 볼 만한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전문을 소개하지 않는다. 소모문(창의문)이나 격문은 소위 선동과 참여를 독려하는 글이다. 그런데 남두병이 쓴 소모문이 거사 전, 각 지역에 사발통문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남두병이 쓴 창의 소모문은 조선 정부가 수운 선생을 처형하여 동학을 탄압하는 부당함과 부정부패 등으로 민생고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제하여 나라가 외세 침략에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천륜이요, 그것이 올바른 것을 돕고 사악한 것을 배척하는 제세안민의 길이요, 시대적 대의를 실현하는 것임을 강조한 내용이다. 그는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이별 시를 남겼다. 한자 원문은 생략한다.


『나이 사십에 자괴감을 갖는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해 질 무렵에 무거운 쇠사슬이 전신을 짓누르는구나./천금으로도 죽지 않는 것은 모든 헤아림의 말이거늘/삼목에 매달린 몸이 능히 살아난 사람 몇이나 될까./지옥 같은 신음과 울부짖음이 영해 본래의 뜻인가./갇힌 사람의 눈물도 금하니 다시 상처받은 신이던가./광활한 중국을 잘 아는 형제들을 중도에 헤어지니/원컨대 다른 생에 다시 맺어 이번 세상 인연 전하리.』


그는 갖은 고문을 당해 옥사하면서도 『감히 살 속의 간이나 쓸개를 찢어 늘어놓고 피를 뿌리는 일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 조선 선비 기개를 죽을 때까지 잃지 않은 그의 모습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동학도 전의철 장군 추모비가 말한다.

③ 기술 장교 전동규, 조선 정부가 영해 동학 거사와 관련한 교남공적 등의 기록에는 전동규, 전의철, 전인철이 뒤섞여 등장한다. 필자가 후손 전동일(66. 대구 거주, 2021년 9월 12일)씨에게 면담, 확인한 결과 삼명동인으로 전동규가 본명이라고 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에서 전동규로 통일하여 기록한다. 

전동규는 세간에서 전의철 장군으로 통한다. 전동규는 정선 전씨로 기성 방율 출생이다. 전동규는 당시 평해현의 현직 무관 장교였다. 

교남공적(안핵사보고문)에 『전인철은 본래 역에 속한 천한 신분에서 읍교의 반열에 오른 무관 장교로서 간교함이 넘치는 습성을 가지고 이제발과 공모하여 명색이 동학 대열에 중군이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죽창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여 공급하고 (중략) 화를 불러들인 것은 형제 숙질 조손들을 함께 불러들여 한 덩어리를 이루었으니』(이하생략)』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아 그는 평해 역인으로 일했으나, 마차제작, 수리와 무기제조 능력이 탁월해 무기 제작 책임자인 장교로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중인계급의 기술직에 종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기성면 방율리(마을) 들머리에 건립된 기념 추모비에는 『東學敎主旌全公義哲之追慕碑』라고 되어있다. 비석 측면에는 府君諱東圭子季五號月坡別諱義哲姓全氏旌善人이라고 되어 있어 전의철은 전동규로 확인된다. 

그리고 이 비석은 울진 유일의 동학 관련 기념 추모비로서 후손들이 1984년 10월에 건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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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도 전의철(전동규) 장군 추모비. 기성 방율마을(범밭) 도로 들머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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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규가 전의철과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을 말하는 비문

 

여기에서 우리는 아쉬운 대목을 발견한다. 동학 교주라는 부분과 측면 비문 내용의 역사적 사실이 미비한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세운 추모비라 당시에는 동학 관련 정보나 자료가 부족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후손 전동일씨가 집안에 전해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동규 할아버지가 영해거사시 ① 전 재산을 처분했다는 것 ② 방율 생가에서 서쪽으로 1㎞ 떨어진 방비에 제2의 대장간을 두고 무기(화승총, 칼 등)를 만들었다는 것 ③ 관군이 전동규 장군을 체포하러 왔을 때 손자를 마루 밑에 숨겨 두었다가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전동규는 외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나중에 치마 속에 숨겨 할머니 친정 영해로 피신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영해 동학 난으로 집안 형제들이 욕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고초와 이웃으로부터 질시를 당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후 전동규와 거사에 참여한 후손(친인척)들은 이사를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전동규 부인도 방율(생가)에서 → 영해(친정) → 모래골(방율 사전) → 정명리(곰실) → 황보리(월송) → 대구(현 직계 후손) 그 외 후손도 흩어져 울진 노음,  대구,  포항 등지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기성 방율 마을은 깊은 산골이다. 7번 동해안 고속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사동을 지나 기성 쪽으로 오다가 서쪽으로 샛길 도로가 있다. 그곳에서 재를 넘어 냇가를 따라 승용차로 들어가면 전동규 추모비(방율 범밭)가 있고, 여기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전동규 생가가 나온다. 생가는 대나무 숲으로 싸여 있다. 그곳에서 조금 올라가면 방비라는 곳이 제2의 대장간이 있었던 곳이다. 북동쪽을 향해 있는 스레트지붕의 가옥이다. 이곳 역시 대나무숲에 둘러싸여 있다. 울진의 우스개로 소를 잡아먹어도 아무도 모를 깊은 골짜기이다. 

전동규는 당시 평해현의 현직 무관 장교였다. 그는 영해동학 거사에 필요한 무기를 제작하기 위해 생가가 있는 곳에서 조금더 떨어진 방비라는 곳에 제2 무기 제작소를 차려놓고 죽창, 화승총, 칼 등의 무기를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방비라는 곳은 외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좋은 산골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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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무기 제작소로 추정되는 곳(방비), 전동규 후손 전동일 증언.(기성면 방율길 701-1 소재)


전동규는 영해동학 거사 당시 중군의 직책을 부여받고 무기를 공급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그의 생가 마을 촌로에게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집(현 기성 방율리 생가, 지금은 타인 소유임) 뒤편 대나무 숲에 대장간을 두고 무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정로 기성 방율리, 88세, 동네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로 증언, 이분은 최근 고인이 되었다.) 전인철이 만든 무기(죽창 180개, 몽둥이, 장검, 화승총 따위)는 영해 동학 난 참여자들에게 지급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 기록인 『교남공작』에 『전인철(전동규를 말함)은 도적의 대열에 아우와 형, 아재비, 조카, 할아버지와 손자를 끌어들인 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동학도로서 영해 거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활동했다. 영해부 관아기습시 가장 먼저 점거하여 동헌에 횃불을 밝혔다. 선봉에서 활약한 셈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당시 조선 정부의 현직 무관 장교로서 쉽지 않은 결단을 역사는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는 거사 후 체포되어 효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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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규(전의철) 장군 생가가 있는 기성 방율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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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규(전의철) 장군 생가. 지금은 타인의 소유이며 현대식으로 지붕과 문틀을 바꾸었다. 생가 뒤로 대나무 숲이 울창하다. (기성면 방율길 552-10 소재)

 

지난 겨울, 다시 방율에 들어가서 전동규 생가와 동학 추모비를 둘러보았다. 

겨울 해는 짧아 산그늘도 미처 거두지 못한 채 서쪽 하늘에 약간의 붉은 빛을 비추며 저물어 갔다. 1871년 3월의 봄날에도 구름과 물은 흐르고, 해와 달과 별은 뜨고 졌으리라. 

이곳 친인척들도 영해 동학 거사에 참여키 위해 전동규, 전영규 형제, 일가친척들은 황보 들판을 가로질러 영해로 내달렸을 것이다. 152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혼백은 하늘과 땅으로 흩어져 사라져 갔다. 저녁 붉은 노을이 잠깐 동네 들머리 추모비를 비추며 사라져 갔다. 우리에게 추모비는 말한다. 『다시 개벽은 오고 있는 것인가』 라고.


1871년 당시 조선왕조는 안팎으로 어수선했고, 유교적 지배 질서가 무너져 가고, 신분 계급이 다소 느슨해졌지만, 근본적으로 씨족과 가문이 얽힌 향촌 사회였다. 울진에서 영해 동학 거사에 참가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영양남씨, 정선 전씨, 평해 황씨가문 외에도 각성받이 다수가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친형제, 숙질, 사촌 형제나 사돈지간 등 친인척 또는 이웃 사람들이었다. 과연 이들을 거사에 추동한 배경은 무엇이고, 어떻게 참여하여 활동했고,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 궁금한 대목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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