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辛未年 영해+울진 동학 거사 2일 천하 이야기

기사입력 2023.05.18 17:51  |  조회수 165,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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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군 창수면 신천리 함양박씨 집성촌 세거지 표지석. 

이곳은 동학 영해 초대 접주 박하선과 그의 아들 박사헌의 출신지로 알려져 있다.

 

중국 고전『시경(詩經)』위풍(魏風)에「석서(碩鼠)」란 시가 있다. ‘큰 쥐’란 뜻이다. 위풍은 위(魏)나라에서 전해오는 노래를 말한다. 위나라(魏, 220년 ~ 265년)는 후한이 멸망한 후 중국을 지배했던 세 나라(위, 촉, 오) 중 가장 강대했던 나라였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명나라의 나관중이 쓴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일명 삼국지)이다. 


큰 쥐야, 큰 쥐야/ 내 기장을 먹지 마라/ 삼년이나 너를 알고 지냈건만/ 내 처지를 돌아보려 않으려 하니/ 이제 나는 너를 떠나/ 저 즐거운 땅으로 떠나련다/ 즐거운 땅(樂土)이여, 즐거운 땅이여/ 거기서 내 살 곳을 얻으리라. (이하 생략)


위나라 지배자가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자, 백성들이 고통이 가득한 위나라를 떠나 수탈이 없는 즐거운 땅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서 ‘큰 쥐’가 가렴주구의 상징인 위나라 왕과 귀족을 비유한 것이다. 이는 백성을 쥐어짜는 위나라의 정치를 말한다. 이러한 정치는 끝내 피지배자의 반발과 저항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어느 나라치고 민중봉기가 없었던 시대가 없었다. 민중은 왜 봉기하는가? 인류가 고안한 정치체제 중 가장 최선이라고 일컫는 소위 21세기 민주 시민 사회라고 하는 자유 민주주의 시대에도 데모 등 항의시위가 빈번한 것은 모두가 정치사회의 결함이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시민의 정치 행위의 표현이자 대안을 찾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늘의 신과 같은 존재였던 정치 권력을 가진 봉건왕조 지배체제에 백성들은 왜 저항하는가? 왕조에 대한 역린(逆鱗)은 곧 반역이었다. 왕조의 지배 이념과 체제의 불만은 곧 죽음을 뜻하였다. 

하지만 이판사판의 민중 저항 배경에는 대체로 강고한 봉건 신분제 등 차별적 대우, 지배층 관료의 부정부패, 폭압 정치, 민중에 대한 인권 유린, 경제적 빈곤에 대한 불만 등 여러 복합 요인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때로는 민중봉기가 커지면 각 계급 간의 내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조선조 19세기의『홍경래 난(1811)』이나『임술농민봉기(1862)』『동학농민혁명(1894)』등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조 19세기는 그야말로 민중봉기 시대였다. 


홍경래 난은 조선 정부의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대우, 세도 정치의 난맥상 등이 그 원인이었다. 평안도 몰락 양반이었던 홍경래가 그 지역의 농민, 상인, 광산 노동자들을 끌어모아 조선 정부에 저항하여 일으킨 난이다. 한때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여 5개월간 위세가 높았으나, 결국 조선 정부의 토벌군에게 정주성에서 진압되었다. 홍경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크고 작은 농민 봉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임술 농민 봉기는 전국 각지에서 한 해 동안 80여 회나 일어났다.『임술농민봉기』는 그 해가(1862년) 임술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앞장에서 지적했지만, 조선 후기의 민중봉기는 대개가 농민이 주축이 되었다. 농민들의 불만과 요구는 과중한 세금 징수 개선과 부정부패 관료 척결이었다. 당시 탐관오리들은 세금 착복 방법은 기상천외였다. 그들은 중앙정부에 공납할 세금에서 착복한 만큼 벌충하자니 별의별 방법으로 농민들에게 세금을 더 거둬들였다. 죽은 자에게도 세금을 매기고(백골징포), 세수가 부족할 때는 유랑민이 되어 떠나간 이웃의 세금(인징, 족징, 동징) 등까지 이웃 농민들이 그 부담을 떠안았다. 하지만 앞에서 보듯이 홍경래 난 이후 50여 년이 지나도, 농민들은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중앙정부의 개선책은 유야무야될 뿐이었다. 


1862년 진주 농민 봉기를 계기로 농민들이 관아를 점령하고, 세금 수탈에 앞장선 지방 향리들을 척결하는 등 격렬한 저항이 계속되자 조선 정부는 중앙 관리인 안핵사를 파견하여 농민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부정부패한 관료를 처벌하기도 하였지만, 미봉책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당시 지방 수령은 중앙의 세도 가문과 끈끈한 인맥 등으로 엮어져 있었기 때문에 부정부패 척결이란 말뿐이었다. 모두가 한통속이었다. 부유하고 세력 있는 가문들이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며 토지를 긁어모았다. 이것이 국가재정과 군대를 파탄 냈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동학혁명(1894년)을 유발시킨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이다. 조병갑은 당시 유배형에 처해져 전라도 고금도로 귀양살이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인맥, 뇌물 등을 이용해 구명운동을 벌였으며, 당시 고종의 대사면령에 따라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다시 대한제국의 판사로 등장하여 동학 제2대 교조 최시형에게 사형을 판결했다. 이른 걸 두고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 했던가. 역사의 정의가 허망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최근 조병갑의 증손녀되는 후손은 청와대 수석을 지내기도 하여 구설에 올랐다. 청와대 수석이라는 벼슬이 아니라 그의 말 때문이었다. 그가 선대의 역사적 과오를 변명할 게 아니라 솔직히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구설에 올랐겠는가. 그가 조병갑은 죄가 없다는 식으로 말을 했기 때문이다. 뚜렷하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그리고 당시 지식인들이 조병갑의 범죄사실을 기록한 문헌 자료가 있음에도 그가 자기 선대에 대해 구차하게 면피성 발언을 하였다. 

 

조상인 선대가 저지른 역사적 과오를 두고 그 후손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가  선대가 저지른 민족적 범죄행위의 역사적 진실 앞에 겸허했더라면, 어찌 구설에 오를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5.18 광주 민주화 항쟁 학살의 책임자로 지목받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손자가 할아버지의 역사적 과오를 사죄하는 방송을 들었다. 자신의 선대가 저지른 역사적 범죄를 기억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부담이 큰 것은 사실이다. 그로서는 큰 용기를 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을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언제나, 다시 되풀이된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한일 간의 외교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사과와 반성은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깨어 있는 민중의 자각 의식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식이다. 이야기가 약간 샛길로 갔다. 다시 동학 이야기로 돌아가자.


조선 후기 민중봉기의 주체세력은 대다수가 농민과 몰락한 일부 향반이나 유림 등 지식계층도 있었다. 당시는『못 살겠으니 지배 세력을 갈아엎자』가 아니라,『못 살겠으니 좀 살게 구제해주시오』라는 정도의 온건적 저항이었다. 기껏해야 고을 최고 책임자인 현령이나 군수에게 상소하거나 성토 수준이고 좀 과격하면 농기구나 몽둥이 등을 들고 떼 지어 관아를 공격하는 행태였다. 다시 말해 봉건 이씨 왕조를 갈아엎고 민중이 주체가 되는 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이나 인권과 같은 신분 철폐 등의 혁명적 발상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백성들은 양순하여 조정에서 안핵사를 파견하여 불만이나 요구 조건에 대하여 개선 약속을 하고 달래거나 회유하면 순순히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위군충성(爲君忠誠) 하는 순박한 백성들이었다. 

 

영해·울진의 민중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871년 신미년 영해·울진 동학도의 거사 대의명분이 앞서 일어난『임술민중봉기』등과는 색다른 양상을 띠었다. 왜냐하면, 대의명분이 좀 다른 측면이 있고, 그 주체세력이 동학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사 기간도 짧게는 16시간이고, 길게는 이틀 정도였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도 ∼2일 천하로 정한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1871년 신미년 영해·울진 동학도들의 거사 배경, 전개 과정, 울진 동학도의 참여 상황과 역할, 조선 정부의 대응과 조치, 동학 지도부의 퇴각, 동학도의 수배와 형벌, 참여 희생자 등을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신미년 영해·울진 동학 거사의 배경

먼저 영해 지역의 1871년 동학 거사에 관한 이야기 전에 영해 지역의 역사 연혁과 전통 가문 형성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이는 후술하는 영해 지역의 동학 거사에서 조선 후기 향촌 사회 다툼이었던 향반사회의 권력 행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영해는 역사적으로 영덕과 분리되어 있던 행정 구역이었다. 고대 삼한 시대에 영덕은 야시홀군, 영해는 우시군(于尸國)으로 칭했다. 야시홀군(也尸忽郡)은 영덕읍을 중심으로 지품면·달산면 등 영덕 서부 일대 지역이다. 우시군(于尸郡)은 지금의 영해면과 창수면·병곡면·축산면 동해안 일대이다.

 

신라 757년(경덕왕 16)에는 야시홀군은 야성군(野城郡), 우시군은 유린군(有鄰郡)이 되었다. 고려 초에는 야성군은 영덕군(盈德郡), 유린군은 예주(禮州 현 영해)로 개칭하였다. 조선 시대에 와서 영덕은 영덕현으로 영해는 영해도호부로 개편되었다. 그러다가 1895년 제2차 갑오개혁 때 영덕현은 영덕군으로, 영해도호부는 영해군으로 개칭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영덕, 영해 2개 군이 현재는 영덕군으로 합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더구나 조선 시대 영해 지역은 동해안 지역에서 들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였으며, 유학의 고장으로 경상도 지역에서 소안동(小安東)을 자처하는 지역으로 이름을 매기기도 했다. 이러한 연유에는 그 지역의 명망 있는 지식계급층인 유력한 정치세력이나 경제적인 부를 축적한 재산가 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고려말 성리학 대학자요, 최고 관직을 지낸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이 출생한 곳이 영해이다. 이들 부자에 대해 잠깐 언급하겠다.

 

이색의 아버지인 가정 이곡(1298∼1351) 처가 고향이 유서 깊은 현 영해 괴시리 전통마을이다. 이곡 선생은 고려 공민왕 때 진사였던 함창 김씨 간재 김택 선생의 딸과 혼인하였다. 목은 이색 선생은 영해 괴시리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이곳에는 이색의 기념관이 있다. 현재 괴시마을은 목은 선생 외조모였던 영양남씨 후손들이 1630년부터 집성촌을 이루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버지 이곡과 아들 이색 부자는 고려는 물론 원나라에서 시행한 과거에 급제한 국제적인 인물로서 한산이씨가 명문가 반열에 오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말 그와 같은 연배로 학문적·사회적 명망을 앞서는 집안이나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편 이곡은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동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당시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던『원간섭기』(1259~1356) 시대의 비극적 산물의 하나인 공녀(貢女)라는 제도가 있었다. 원나라에 바치는 공녀는 동녀(童女)라고 표현되는 주로 13세에서 16세까지의 앳된 소녀들을 선발해 원나라에 보냈다. 그의 애절한 상소문에 원 황제도 공감하여 고려 여인 징발을 폐지시켰다. 그가 고려 여인들을 성적 수난에서 해방시킨 공은 현대판 페미니즘 주의자로 평가받을만하다.


이곡은 울진과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관동 지방을 유람하면서 많은 시와 기(記)를 남긴 동유기(東遊記)가 있다. 특히 울진의 아름다운 주요 자연경관을 바라보며 지은 작품으로「선사관(仙槎館)」,「월송정(越松亭)」,「연희정(延曦亭)」,「성류굴기(聖留窟記)」등이 있다. 그의 후손이었던 조선 선조 때 영의정 아계 이산해는 기성(현 평해)에 유배 오기도 하였다. 그는 유배기록으로 아계유고(鵝溪遺稿)인 기성록을 남겼다. 조선조 토정비결 저자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이 그의 후손이다. 이렇게 영덕·영해 지역을 거점으로 성장한 세력들은 고려 말 신흥 사대부(士大夫)로 성장하여 유학 발전을 이끌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명문 사족 가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가문이나 정치세력을 재지사족(在地士族)이라 하였다. 재지사족 향촌 사회의 유교적 소양을 갖춘 선비나 혈연집단을 가리킨다. 하지만 주로 지역의 향촌 사회의 유교적 소양을 유림 또는 경제적 여유를 가진 지배 세력을 말한다. 속된 말로 그 지역에서 끗발이 있고 잘나가는 정치세력인 셈이다. 이들은 조선 시대에는 주로 지역의 경제력이 풍부한 지주계급이나 중앙정부에서 출세한 유력 양반계층과 연결된 씨족 혈연집단이었다. 조선 후기에 양반 수의 증가는 양반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양반계층의 분화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그래서 벼슬을 하지 못하거나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몰락한 양반들을 두고 잔반(殘班)이라 칭하기도 했다.


영해 영덕의 경우 재지사족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 대흥백씨(大興白氏)·무안박씨(務安朴氏)·선산김씨(善山金氏)·수안김씨(遂安金氏)·안동권씨(安東權氏)·야성김씨(野城金氏)·야성정씨(野城鄭氏)·영양남씨(英陽南氏)·영천이씨(永川李氏)·영해박씨(寧海朴氏)·재령이씨(載寧李氏)·진성이씨(眞城李氏)·파평윤씨(坡平尹氏)·평산신씨(平山申氏)·함양박씨(咸陽朴氏) 등의 토성과 타관 출신의 가문이 영덕·영해 지역 재지사족 가문으로 자리매김하며 현재까지도 세거지를 형성해 오고 있다. 이들 가문 일부는 후일 조선 후기 역사적 변혁 운동인 영해·울진 동학 거사에 적극 동참하여 지도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영해 거사는 1871년 3월 10일, 영해 우정동에서 출동한 500여 명의 동학도와 비동학인들이 영해부를 16시간 기습, 점거하고 퇴각한 사건이다. 영해는 동학 거사의 첫 시발지로서 그 의미가 크다. 그리고 당시 동학의 확장세가 평해, 울진, 영양 등지로 뻗어 나가는 관문의 위치이기도 하다. 또한, 영해 출신의 박하선, 박사헌, 강 수와 같은 인물들은 후일 동학 교단을 유지 발전시키는 데에도 그 공로가 큰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들은 영해 울진 동학 거사에도 직간접으로 관여하여 지도하였다. 이러한 1871년 영해·울진 동학 거사 배경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 영해·울진 동학 거사는 지역 유림의 세력다툼도 작용했다.

영해 동학 거사에는 영해 지역의 재지사족이었던 그들만의 세력다툼인 해묵은 향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는 서얼 신분제의 변화에 따른 결과이기도 했다. 서얼(庶孼)은 주로 대부분 조선 시대 양반 후손 가운데 첩(妾)의 몸에서 나온 소생이라는 자손(서출 후손)을 뜻한다. 그와 동시에 양인(良人)이라는 신분에 속하는 첩이 낳은 서자(庶子)와 천민(賤民)에 속하는 첩이 낳은 얼자(孼子)를 모두 아울러 함께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조선 후기 영조 48년(1772년) 서얼 3,000여 명이 서얼 신분 철폐를 상소하자 그들에게 청요직 진출과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용한 통청윤음을, 정조 1년(1777년)에는 정유절목을 대책으로 내놓았다. 이 대책은 서얼의 신분 제도를 완화한 일종의 특별조치법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서얼 출신이었던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 등 인재가 등용되었다. 이러한 대책으로 신분 제도가 어느 정도 완화되자 서얼 등이 양반계층으로 상승하게 되었다. 서얼 차별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완전철폐되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조선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로 양천제였다. 양인(사농공상)과 천민인 노비가 있었다. 갑오개혁 이후 신분 차별이 철폐되자 모두가 양인인 양반행세를 하는 풍조가 생겨나고 가문을 중시하는 족보가 유행하였다. 양반은 이름 그대로 조선 시대의 귀족을 말한다. 1910년 전국 호구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 중 약 2%만이 양반이라는 통계가 있다. 조선 초기에 이름에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15%, 조선 후기엔 30%뿐이었다. 양반은 정말 얻기 힘든 칭호였다. 갑오개혁 전후로 신분제가 폐지되자 상놈들도 성을 갖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본관만 있고 성은 대다수 사람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 


현재 한국에는 대략 286개 성씨와 5,582개 본관이 파악되고 있다. 본관도 주요 성씨와 마찬가지로 거대 씨족으로 몰리는 경향이 뚜렷해서 김해 김씨가 9.0%로 가장 많고, 그다음이 밀양 박씨 6.6%, 전주 이씨 5.7%를 차지한다. 반면 1,000명 미만의 본관도 66%가 넘고, 1985년 이후 새로 만들어진 본관도 한양 강(姜)씨, 장지 김(金)씨 등 15개 성관(姓貫)이나 된다. 

 

사실 우리나라 족보는 15∼16세기에 나온 안동 권씨 성화보 (安東權氏成化譜)등 몇몇 가문의 족보 이외는 대다수가 믿을만하지 못한다고 전문가들이 진단하고 있다. 왜냐하면, 조선말이나 일제강점기에도 소위 족보 장사가 유행했기 때문이다. 본관이나 성씨가 없던 사람들이 족보를 사서 양반 가문에 등재 하거나, 일부 가난한 양반계층에서는 돈을 받고  끼워 주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현존하는 족보의 내용은 80∼90%는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이 통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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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향교 춘계 석전제(이 사진은 본 내용과는 관련 없음)

 

현재 우리는 사는 21세기는 민주주의 시대다. 민주주의 시대에 가문이나 족보 자랑은 자칫하면 꼰대소리 듣기 쉽다. 가문과 족보 자랑 금지는 상식이 아니겠는가.


조선 후기 이런 신분 완화 조치와 시대의 변화로 등장한 서얼 계층의 양반을 신향(新鄕), 기존의 양반계층을 구향(舊鄕)이라고 한다. 영해 향전(鄕戰)이란 영해 지역 신향(노론 계열)과 구향(남인 계열)이 향촌의 향권 지배를 위한 싸움을 말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석전제를 주관하는 권한이다. 조선은 유교 사회라 유교의 종주인 공자가 모셔진 문묘에 제사(석전제)를 지내는 권한을 갖는다는 것은 양반으로서 상징적인 특권이었다. 이 석전제에는 향촌의 양반 유생들이 대부분 참석하였으며, 석전제에 참석한다는 것 자체가 향촌에서 양반으로 인정받는 것이기도 하였다. 당시 지역의 향교 지도자들은 지역(향촌)에서 지방 수령의 권한을 견제하거나 보좌 또는 자문하고 조세 수취권 등 향촌을 움직이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조선 정부의 신분 상승 정책으로 상민에서 새롭게 양반이 된 지역 거부나 서얼 등의 신향들은 석전제에 적극적으로 참여, 제관으로 임명이 되려고까지 하였다. 영해 지역에서 1840년(헌종 6)에 영해부에서 석전제의 제관으로 참석할 수 없었던 신향 계층인 서얼들이 수령에게 부탁하여 제관에 임명받으려 한 사건이 바로 영해 향전의 시작이었다.

 

당시 영해 부사였던 최명헌이 신향 편을 들어 석전제의 문묘 제임권을 신향 측이 주도하도록 했다. 여기에 반발한 구향은 구향대로 추계 석전제를 추진함으로써 갈등과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이 향전으로 영해 부사 최명현은 영덕 현령에 의해 봉고 파직되어 관아에서 쫓겨났다. 이 향전을 치룬 신향은 동학이 영해까지 포교 되자, 동학의 신분 차별 철폐 등 평등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에 따라 대다수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이 결과는 향전으로 피해의식에 쌓여 있던 신향은 동학을 종교로 신봉하고, 30여 년 후 이를 통해 사회변혁까지도 지향하게 되었다. 

 

영해·울진 동학 거사시에 신향 출신 후손들이 대세로 활동하였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영해 거사 전 동학을 신봉했다는 죄목으로 관의 고문을 당하다 풀려난 후유증으로 사망한 영해 초대 접주인 박하선이 대표적인 신향이다. 영해지역에는 당시 신향 세력으로 안동권씨, 영양남씨, 무안박씨, 재령이씨, 대흥백씨 등 소위 영해에서 내노라하는 가문(5대 성)에서 다수 인사들이 동학에 가담하고 있었다.


●조선 민중의 근대적 자각의식과 동학사상의 결합이었다.

모든 역사적 발단은 그 사건을 유발하는 정치, 사회 환경 요인과 배경이 있다. 수운 최제우가 활동하던 시기는 국내적으로는 조선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쌓여 민중들의 불만이 민란으로 여러 차례 표출되었다. 이는 지배계층의 무능과 부패로 삼정의 문란과 양반계층의 분화가 일어나 신분 질서가 동요되어 무너져 가던 혼돈의 시기였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서구 열강들의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대외 식민지 쟁탈전에서 청나라가 대영제국과 아편 전쟁에서 패배하여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대내외적으로 상황으로 조선 사회는 안정되지 못하고, 민중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서두에서 거론했지만, 조선 철종(1862)대 한해만 해도 전국 80여 개의 군현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였다. 민중의 고통이 날로 증가하던 시대, 백성들은 새로운 시대를 갈구하기 마련이다. 바로 그때 경주의 유학자이자 몰락 양반이었던 최제우가 혜성같이 나타나 시천주 사상으로 개벽을 설파하며 동학을 창시해 도탄에 빠진 조선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인간 존엄과 평등사상 등은 기존 지배계급의 횡포와 수탈에 염증을 느낀 일반 민중에게는 직간접으로 복음과 같은 심리적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조선 민중 다수의 자각 의식이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고자 하는 동학의 개벽 사상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당시 민중들의 근대적 자각 의식은 울진동학도인 김귀철이 체포되어 진술한 적변문축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울진현의 김귀철은 평해 월야동의 전인철(전동규, 전의철 동일인물)과는 인척간이다. 김귀철의 처남이 전인철이다. 김귀철은 심문 중 물고(울진역인, 고문치사)로 사망했다. 


『인철이 나에게 말하기를 진인이 있는데 작년 7월부터 박영관 집에 유숙했는데, 우리는 무극대도의 후천개벽 오만년의 횃불을 밝히고자(이하 중략) 이미 서양에서는 임금을 4년마다 백성들의 손으로 뽑아서 정하고, 임금을 처형한 나라도 있다고 하는데 병인년에 그 나라들은 배를 타고 와서 우리나라 연안까지 드나들면서 우수한 무기와 큰 배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모든 백성이 존귀한 후천개벽을 앞서 이루었기 때문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진인은 정감록과도 관계가 있는 인물로서 영해·울진 동학 거시의 핵심주도 인물인 이필제를 두고 말한다. 조선 후기 정감록과 민중 변혁 운동과의 관계는 후술하고자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서양에서는 임금을 4년마다 백성이 뽑는다는 것에서 ①민주주의 대의제를 서양에서는 이미 시행하고 있다는 것, ②백성이 임금을 탄핵하여 처형한 나라(1789년 프랑스 혁명, 루이 14세 처형)가 있다는 것, 1866년 ③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공한 나라가 프랑스였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당시 조선 민중들도 말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민중의 근대적 자각 의식에다가 기름을 부은 것은 동학사상이었던 셈이다. 당시 동학의 인간 존엄성과 만민평등, 반제 반외세의식과 보국안민 정신 등은 조선 민중에게 다시 개벽의 새 세상을 꿈꾸는 혁명사상이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은 세계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이다. 프랑스 혁명은 엄밀히 말해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도 함께 일컫는 말이지만, 1789년의 혁명만을 가리킨다. 이들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계몽주의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을 강력히 받았다. 이는 직접민주주의 이념인『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열망에서 특권층에 의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항거하려는 이념으로 혁명에 가담하였다. 

 

이 혁명을 주도한 것은 평민계급으로 그들은 프랑스 왕조의 모순인 불평등한 사회체제 타파하고, 박애, 자유와 평등을 내세웠다. 결과는 황제 루이 16세가 처형당했으나. 그 후에는 왕정복고가 다시 되고, 정세가 어지러운 틈을 탄 군인 출신인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집권하여 황제로 등극하는 등의 난맥상을 보였다. 이러한 우여곡절의 반동과 혁명파의 갈등을 거쳐 거의 86년이 지나서야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자유와 평등, 박애가 확고히 자리 잡아 오늘날 프랑스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원년인 1789년은 해마다 7월 14일로 국경일이자 공휴일이다.

이 1789년 프랑스 혁명을 1871년 영해동학거사를 두고 비교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혁명으로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1871년 영해동학거사의 성격에 관하여 혁명, 사변, 작변, 민란, 정란, 적변 등의 이견이 학자들 간에도 분분하다. 아직 이 영해동학거사는 성격 규명이 확고하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동학에 관한 비전문가인 필자가 이를 두고 거사라 했던 까닭이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는 1866년(고종 3년)에 병인박해를 명분으로 프랑스가 일으킨 전투이다.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탄압인 병인박해로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사망하자 이를 구실 삼아 천진에 있던 프랑스 극동 사령관 로즈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조선(강화도)을 침공하였다. 이러한 서양의 열강들이 조선 정부에 통상과 개항 요구하며 서해안에 출몰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와 민중들은 외세가 침입할 것이라는 불안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불안감은 당시 민중에게 정감록 등 비기에 등장하는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인 십승지를 찾아 나서게 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새로운 사상인 동학에 기대어 심리적인 안정과 물론 불평등한 사회체제 개혁을 열망하였다고 보아 진다. 따라서 동학은 조선 후기 사회개혁의 사상이자 조선 민중에게는 구원의 복음이었던 셈이다. 조선 정부는 민주주의 사상인 사람을 하늘과 같이 귀히 여기라는 동학의 이념인 인간 존엄성, 신분 철폐 등에 대한 민중의 근대 의식 자각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동학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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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현곡  가정리 용담의 수운 최제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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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건립 동학기념관과 동학수련관

 

●영해는 동학 포교의 전진기지였다.

초기 동학은 경주를 중심으로 동북지역과 동남지역인 동해안으로 확산이 되었다. 영해 지역에 수운 최제우가 동학의 시천주 사상을 포교한 것은 1861년부터였다. 이해 11월 박하선이 영해지역 최초 접주로 임명될 정도로 동학이 전파되어 교세가 불어났다. 이러한 동학 세력의 확장은 1871년 동학 거사의 시발점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보아 진다. 

1871년 동학 거사는 이러한 동학의 확산 분위기 등으로 인적, 물적 지원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해거사시 가장 많은 수의 동학도가 참여했고, 지도부는 대개 신향 출신들이었다. 핵심주도 인물인 초대 접주 박하선은 수운 최제우가 대구에서 처형당하자 시신을 모시고 경주 용담까지 함께 하였다. 때에 따라서는 최시형보다 앞서 거론되었다. 박하선의 지도력과 활동으로 영해지역에 동학을 포교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그는 동학 포교로 관에 지목되어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1869년 말 사망했다고 알려진다. 그의 아들 박사헌은 영해 거사의 장소 제공 등 물심양면으로 거사를 지원하고 이끌었다. 강수는 최시형과 끝까지 함께 하여 동학 경전을 펴내는 등 동학 발전에 공이 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최경상을 움직인 이필제의 담판이 있었다.

이필제(李弼濟. 1825~1871)는 충청남도 홍주 출신이다. 그의 신분은 몰락한 향반(鄕班)으로 무과에 급제했으나 임용되지 못한 한량(閑良))이었다. 한량은 무과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을 일컫는다. 오늘날 한량은 여기에 유래된 말로 게으르거나 직업 없이도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던 그가 1863년(철종 14) 동학에 입도하여 동학을 적극, 포교하면서 민중들을 규합해 나갔다. 그는 동학에 입교한 뒤 9년간에 걸쳐 4회의 진천·진주·영해, 문경 민중봉기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진천, 진주에서 민란을 기도했다가 실패하고, 영해로 잠입, 안면이 있던 영해 초대 접주 박하선의 아들 박사헌에게 접근하여 최경상과 만남을 여러 번 시도했다. 명분은 교조 신원 건 등으로 해월 면담을 타진했다. 결국, 다섯 번 만에 해월 최시형과 강수 등이 영해 박사헌의 집에서 이필제와 면담이 이루어졌다. 오고초려(五顧草廬)인 셈이다. 

천도교 측의 기록인 도원기서에 따르면 이필제가 최경상(최시형의 개명 전의 이름)과 대화에서 그의 영해 거사 명분을 읽을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최경상에게 다음과 말했다. 어찌 보면 상대인 최경상을 대하는 태도가 설득의 대화가 아니라 이필제가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내용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최경상에게 썰을 풀었다.


『옛글에 이르기를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오히려 재앙이 된다고 했소. 나 역시 천명을 받은 사람이라 옛날에 단군의 영혼이 유방에게서 화하여 태어났고, 유방의 영이 주원장에게 화하여 태어났으니, 지금 세상에 이르러 단군의 영이 다시 세상에 나왔다고 하니, 하루에 아홉 번 변하는 것이 바로 나 이필제요, 한가지는 선생의 부끄러움을 설원하는 것이요, 또 한가지는 뭇 백성의 재앙을 구제하는 것이오, 첫째 나의 뜻은 중국을 창업하는 것이라 이렇듯 내가 이 땅에서 일을 일으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은 까닭으로 동학이라 하였으니 영해 지역이 바로 우리나라의 동해이기 때문에 동쪽에서 일을 일으켜 지금에 이르렀으니 스승님을 위하여 사람이 어찌 이에 따르지 않는단 말이오.』


그는 위와 같은 발언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거사 모의를 함께 꿈꾸는 김낙균, 심홍택 등에게 강력한 무장 1천 명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강력한 군대 1천 명만 있으면, 조선 정부를 장악하고 그 여력으로 청나라와 일본을 정벌한다는 계획을 말하기도 했다. 그의 변신술도 재미있는 썰이다. 하루에도 아홉 번을 변하는 변신술을 하는 도사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전국에 다니며 자기의 이름을 자주 바꾸는 변성명에는 능한 듯하다. 처음 이름은 근수이다. 다음으로 필제, 제발, 이홍, 주지, 진명숙 등으로 바꾸어 활동했다. 이는 당국의 수배를 피하기 위한 신분 위장 전술로 보인다. 또한, 그는 중국의 황제 등에 비유하며 앞으로 자기의 대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 부족국가인 고조선의 건국 시조인 단군의 영(靈魂)이 중국의 한나라 건국자인 유방(漢 太祖 劉邦, 기원전 247년~기원전 195년)을 태어나게 했다. 또다시 그 유방의 혼이 주원장에게 들어가 주원장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유방과 주원장은 신분이 평범한 민초 출신으로 황제로 등극한 인물들이다. 본래 거지였던 주원장도 사람들을 모아서 명나라를 세우고 중국의 황제가 되었다고 하면서 이필제가 이들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자기도 왕조를 창업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한 썰로 보인다. 


유방은 초한지(漢楚誌)에 나오는 인물로 항우와 경쟁을 벌여 결국 한나라의 황제에 오른 인물이다. 시골 한량으로 평민 출신이었던 유방은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한 진시황 사후 농민 봉기 등 혼란한 틈을 타서 제후들을 규합하여 중국을 다시 천하 통일한 인물이다. 정치적 경쟁자였던 항우와는 초한 전쟁 이야기가 유명하다. 여기서 이필제의 발언은 어찌 보면 황당무계하다. 

 

주원장은 명나라 태조(明 太祖, 1328년~1398년)를 말한다. 주원장(朱元璋)은 젊은 시절, 백련교도의 떠돌이 탁발승으로 힘들게 보내다 홍건적 세력과 연합하여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14세기 초 황제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설화도 전해지는바, 당시 이필제가 중국의 고대의 황제 유방이나 명 태조인 주원장을 내세워 자기와 동일시 하는 심리적 경향도 있는 것 같다. 

 

자기의 원대한 꿈은 결국 중국을 정벌해 새로운 나라를 창업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망상과 같은 심리 현상으로 보이나 당시 조선에서는 모화사상과 재조지은에 감읍한 지식인들이 꿈도 못 꿀 원대한 생각을 가졌던 게 아닌가 한다. 

또 하나, 그가 내세운 것은 동학 교조 최제우 선생 신원건과 백성구제이다. 그가 주장하는 대의명분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제세안민과 교조신원운동이다.


이러한 이필제의 주장에 대해 최경상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 자제하라는 말로 화답한 것으로 나와 있다. 1871년 최경상은 이필제가 제기한 교조신원운동 등에 관하여 강수 김낙균, 전동규, 박춘서, 이경여 등 동학 도인들과 의논한 후 동의하여 수락했다. 이로써 이필제의 교조신원운동의 명분으로 내세워 최경상의 동의를 받아 실행되었다. 최경상은 동학교도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영해, 영덕, 경주, 영양, 평해, 안동, 울진, 상주, 노성(충청), 울산, 칠원(경남), 영산(경남), 진보, 남원(남원) 등 한강 이남의 전 지역에서 동학도가 동원되었다. 당시 영해 울진 동학 거사에는 전국에서 봇짐을 메고 개별 혹은 삼삼오오 하여 도보로 심산유곡인 영해 우정동 병풍바위 골(현 영덕군 창수면 신기2리)에 살고 있었던 박사헌의 집에 속속 모여들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참여한 사람이 500여 명이다. 당시는 조선 정부와 양반계층이나 보수적 유림에서는 동학을 금하고 불온시하는 엄중한 시대 상황이고, 교통이 불편한 점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참가 인원도 대단한 것이다. 평해 울진에서도 150여 명이 참여했으며 이는 영해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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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수면 신기2리 우정골 다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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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 동학 답사자들이 형제봉 아래 창수면 우정골 박사헌의 집터를 살펴보고 있다(2021. 5. 29)

 

●평해·울진 지역의 동학도 다수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영해지역의 초기 동학은 영해와 가장 가까운 지역인 평해로 확산이 되었음은 명약관화하다. 울진지역의 동학 세력은 그 수가 얼마인지 구체적 자료가 없어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울진지역에도 상당수의 동학도가 분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최제우가 체포되어 경상감영(대구)에 수감생활을 할 때 울진 동학에서 350금을 지원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최제후 사후 제2대 동학 교주 최시형이 조선 정부의 수배시 울진의 죽변, 평해(황주일) 등지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당시 죽변 은거지는 미상이다. 이 과정에서 최시형은 울진 동학의 도움을 받아 은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871년 영해 거사시 평해, 울진지역에서 전의철, 남두병이 5백여 명을 직접 인솔해 참가했다는 설이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정확하지 않은 구전으로 보인다. 학계에서 적변문축, 도원기서, 교남공적 등의 문서에서 파악한 종합결과를 보면 1871년 영해 울진 동학 거사시 평해와 울진지역에서 적어도 150여 명 정도 참여했다고 한다. 이 150여 명도 이필제의 영향력이 아니라 최경상을 따르는 동학도들로 추정된다. 평해 울진지역에서는 평해(오곡), 기성(방율), 매화(매일리 현 금매), 울진현 (현 덕구), 덕순(현 매화면 덕신) 등지에서 동학도들이 참여했다. 당시 참여자에 관한 기록은 관변 측 문헌인 적변문축 등에 심문을 당한 일부 사람들의 출신지 기록밖에 없어 대다수의 참여자 출신지는 미상이다. 이 적변문축은 조선 정부가 거사 동학도를 체포하여 심문하고 기록한 조선 정부의 공식문서로 죄인 문초 기록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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