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辛未年 영해+울진 동학 거사 2일 천하 이야기

영해 동학 의거는 어떻게 진행되어 갔는가?
기사입력 2023.07.2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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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 형제봉 정상에서 답사자 일행(사진작가 김용록 제공)

 

필자는 2021년 5월 29일, 동학 연구 전문가(성주현 교수 등) 일행과 함께 영해 동학 현장을 답사했다. 그 한곳이 형제봉(兄弟峯, 703.8m, 일명 용두산, 용두봉)이다. 높고 낮은 두 개의 봉우리가 형제와 같이 나란히 솟아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형제봉이다. 이 형제봉은 영해면 소재지에서 보이는 가장 높은 산봉우리다.

 

1871년 이필제 등 영해 동학 의거 주역들이 천제를 지냈다는 형제봉과 병풍바위, 우정동 박사헌의 집터 등을 답사했다.

 

답사자 일행의 출발은 영해면 소재지에서 작은 트럭으로 형제봉 아래 임도까지 1시간여를 달려가 도착했다. 다시 그곳에서 걸어서 1시간 30여 분을 오르면 형제봉 정상에 다다른다. 형제봉 정상은 널따란 평지로 비상시 헬기가 충분히 뜨고 내릴만한 공간이었다. 정상에서 망망대해 동해가 푸르다. 동쪽으로는 영해 너른 들판과 면 소재지가 펼쳐져 있다. 서쪽으로는 일월산이 북동쪽으로는 온정의 금장산이 보인다. 이곳 정상에서 사방을 관망한 뒤 하산을 했다.


정상에서 20여 분 내려오면 병풍바위를 만난다. 좌우로 30여 미터 길이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이 병풍바위 주변에서 당시 전국에서 모여든 동학도가 노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병풍바위가 있는 곳은 경사가 그리 심하지 않아 노숙 장소로도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있겠다 싶다. 현재 병풍바위 둘레는 숲이 우거져 무심코 내려오면 그냥 지나칠 수 있다. 그 아래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박사헌이 살던 집터이다. 이 집터는 300여 평쯤 되어 보이는데 평평했으며, 지금은 숲이 우거지고 잡목이 무성했다. 군데군데 집터 흔적인 돌무더기가 이곳이 예전에 사람이 살았음을 무언으로 말해 주었다. 알다시피 박사헌은 영해 초대 접주 박하선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박하선이 영해 관아에 동학교도라는 혐의로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이곳 집에서 사망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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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봉 아래 박사헌의 집터를 살펴보는 답사자들(사진작가 김용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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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봉 동학 탐방로 일부(사진작가 김용록 제공)


이 집터는 현 창수면 신기 2리 깊은 산골짜기에 있다. 이 외진 산골이 150여 년 전 영해 동학 의거 당시 전국에서 동학도가 모여들고 일부는 병풍바위 둘레에서 일부는 이곳에서 노숙하면서 개벽 세상을 꿈꾸며 결의를 다졌다는 곳이다. 다름 아닌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곳에 동학 초창기에 큰일을 한 『동학도 박하선, 박사헌 집터』라는 표지판이라도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고 답사 일행들이 말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에서 영덕군의 지원을 받아 형제봉까지 『영해동학유적지탐사로』를 개설하였다. 이렇게 자연환경 또한, 역사적 사건에서는 중요한 배경적 요인이 되어 그 자취를 남겨 후세에 교훈을 주고 있다.


이제까지 필자의 글은 앞장에서 영해 울진 동학도가 일으킨 1871년 영해 의거 배경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 글에서는 이후의 경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다시 말해 사건 진행의 흐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필제의 사전 공작과 강수와의 논박

필자는 여기에서 도원기서, 적변문축, 교남공적 등의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핵심인물로서 영해동학의거의 주요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 핵심인물에는 이필제를 중심으로 한 김진균, 남두병, 김낙균, 권성거 등이다. 이들은 사회체제의 비판적 유림지식인 계열이다. 이른바 이들 인물은 이필제를 따르는 사회체제 변혁을 꿈꾸는 급진개혁파들이었다.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박영관, 강수, 전영규, 전동규(전의철, 전인철)등은 수운 교조 신원 회복에 중점을 둔 동학도였다. 그들은 종교적 신념의 개혁파들이었다. 이것은 강수와 이필제의 논쟁에서 물론 의거 전개 과정과 활동 등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① 먼저 이필제 측의 사전 공작이 있었다. 

천도교 측 기록(도원기서)을 살펴보면, 이필제는 1866년부터 1871년까지 교주 최시형을 비롯해 다양한 인물과 접촉했다. 그는 강수, 이수용, 박사헌등의 지역의 주요 동학교도들과만 거사 준비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 진천 작변에 실패한 이필제가 영해에 들어온 시기는 1870년 7월이었다. 이필제는 당시 울진 매일리(현 매화면 금매리) 유학자 남두병과도 은밀히 만나 시국을 논하면서 소모문 작성을 부탁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이필제는 이홍이다. 혹 주성칠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정씨라 칭하기도 하고 이제발이라 칭하여 이름은 변한다. 아직 멈추지 않은 2, 4년 전 공주에서 일어난 일, 진주 사건, 이번 영해 사건까지 다 그가 한 짓이다. 나는 그와 더불어 병인(1866)년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인데 글을 짓는데 뛰어났고, 글의 내용을 사랑했을 뿐, (중략) 얼마 후에 김낙균을 보내와서 나를 설득시켰다. 김낙균은 우두머리를 보좌하는 심복이며 충주사람이다. 나는 또 처음에 소모문을 지어 달라는 것을 처음에는 따르지 않았다.(이하 생략)』(영해부적변문축, 신미 4월 9일, 남두병 첫 진술) 


이 남두병의 진술을 살펴보면 이필제는 이미 남두병을 1866년부터 서로 왕래하며 교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누구의 소개와 어떤 연유로 서로 접촉이 있었는지는 미상이다. 여기에 나오는 김낙균은 이필제의 막후에서 교섭과 연락을 담당하는 참모나 비서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가 영해로 잠입해 처음 만난 인물은 동학도인 이수용이었다. 그는 이수용을 통해 박사헌을 만났다. 당시 박사헌의 아버지인 박하선은 영해의 초대 접주였다. 박하선은 동학도라는 죄명으로 영해 관아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들을 만난 언변 좋은 이필제는 억울하게 죽은 수운선생의 교조신원운동을 해야 한다고 이들을 부추겼다. 이필제의 주장에 결국 동조한 영해의 강수, 박사헌을 비롯한 동학도는 최시형을 다섯 번이나 찾아 설득했음은 이미 전술한 바와 같다.


② 강수와 이필제가 의거 결행을 앞두고 논박을 벌이다. 

이들의 대화 과정을 보면 서로의 주장을 밀고 당기는 대목이 나온다. 강수의 신중론과 이필제의 시급론이다. 이 과정에서 강수는 일을 신중히 처리할 것을 주장하나 이필제는 일이 이미 정해졌으니 운을 따를 수밖에 없음을 설득하고 있다. 도원기서의 기록이다.


강수가 필제에게 말하기를 『노형(이필제를 말함)의 마음이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노형은 어찌 하필 도인으로서 일을 일으키려고 하는가?』라고 묻자 필제는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도를 배반한 사람이다. 내가 지금 스승을 위하는 마당에 사근취원(捨近取遠)하겠는가? 선생의 일을 도모하는데 도인을 취하지 어찌 세상의 무리를 취하겠는가. 강수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남자가 세상일에 있어 홀로 그 욕심을 취하여 그 이치를 살피지 아니하며, 끝내 실패하게 될 것이다. 노형은 항우의 우직함을 보지 못했는가? 고집을 부리다가 뜻을 잃게 되니 (중략) 지금 일을 일으키려 하는 것을 내가 어찌 멈추겠는가? 노형은 헤아려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필제가 (중략) 날이 정해졌으니 물러나기가 어렵고 나아가기가 또한, 어렵게 되었소. 운이라는 것은 다시 오지 않는 것이오. 때라는 것도 다시 오지 않는 것이라 때는 3월이니 오직 선생님의 원통한 날이라 이 어찌 춘삼월 호시절이 아니겠는가?(이하 생략) 』


위와 같은 대화 장면을 볼 때 이미 이필제 측은 날짜를 정하여 실행을 할 계획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도원기서』에는 1871 영해동학의거가 순탄하지 않음을 예견한 듯『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이른바 진퇴유곡이라고 할 국면이 있다.』고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하나는 이렇게 설전을 벌이는 도중 이필제의 참모였던 김낙균이 들어와 무슨 중요문서를 이필제에게 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또한 이필제 측이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장면이 아닌가 싶다. 다음은『도원기서』의 기록이다.

『강수 역시 부득이 이를 좆을 때에 김낙균(金洛均)이 경중(京中)으로부터 당도하여 소매 안에서 관인이 찍힌 서찰을 꺼내어 필제에게 주니, 필제가 펼쳐본 후 기쁜 빛이 있는 것 같더니 수선스럽게 유혹하며 말하기를, 이 편지는 지금 관리로 있는 금장의 서찰이요, 또 다른 편지 한 장은 지금 관리로 있는 훈장의 서찰이라, 이와같이 정녕코 되었으니 어찌 의심함이 있으리오.』


글쎄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것은 이필제가 해월 선생 측에 우리는 든든한 빽이 있으니 사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과시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금장(金將)과 훈장(訓將) 서찰을 보낸 자가 누구인지, 어떤 내용인지 전혀 미상이다. 아니면 거짓 문서로 이필제 측이 사전 김낙균 등과 모의하여 연출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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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면 소재지 전경

 

폭풍전야의 우정동 병풍 바위골

요즘도 어떤 행사든지 행사를 추진하자면 목적(방향과 의의), 사전 계획과 비용과 역할 분담, 진행 방법(수단과 대안), 사후 평가 등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물적·인적 기반이다. 앞서 기술했지만, 당시 의거 지도부는 전국에서 모여든 동학도를 먹이고, 또한 무기와 무장을 어떻게 마련하고 집행하였는지 궁금한 대목이다.

 

영해 동학 의거 대의명분은 억울하게 죽은 수운선생의 교조 신원인 명예 회복임을 설득한 게 주효했다. 요즘으로 치면 정치적 복권이다. 그래서 해월 선생에게서 동학 측의 거사 자금 출연과 전국 동학도의 참가 협조를 얻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동원된 500여 동학도가 모인 가운데 드디어 1871년 (신미) 음 3월 10일에 역사적 영해동학의거를 위한 고천제를 시작으로 전야제인 출정식이 열린 것이다.


① 형제봉에서 출정하는 고천제를 올리다.

도원기서를 보면 당시 지도급 대다수 도인이 이필제의 교조신원운동에 동조 입장을 피력했다. 이에 해월 선생은 결단을 내리고 전국에 사람으로 보내 병풍바위 박사헌의 집으로 집결하라고 통지를 보냈다. 이로써 영해 동학 의거는 시작되었다. 이에 전국 곳곳에서 최시형의 동원령을 받고서 자발적으로 500여 동학도가 모여들었다. 당시 참가 지역은 영덕, 영해, 경주, 영양, 상주, 안동, 울산, 평해, 울진, 칠원(경남), 영산(경남) 남원 등이었다. 이들은 교통수단이 불편한데도 전국에서 육로는 도보로, 심지어 일부 참가자들은 대진항(大津港)으로 배를 타고 들어왔다고 한다. 평해의 참가자들은 마차를 이용해 우정동으로 모였다. 어떤 이는 말을 타기도 했고 참가자 중에는 보부상들도 있었다. 따라서 동학도뿐만 아니라, 비동학도의 참여가 있어 그 열기가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


동학 의거 지도부와 참가자들은 형제봉에서 해가 질 무렵 5시에 형제봉에서  소 두 마리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천제 장소에 대해서는 형제봉 정상이다. 혹은 병풍바위이다. 라는 2개의 설이 있다. 정확한 장소는 미상이나 영행 유학 이군협이 영해부적변문축의 진술에는 우정동 형제봉으로 나온다. 또 그날 당일 황혼 무렵에 동학인을 이끌고 산 위에 올라 축문을 고하면서 제천을 마친 후(이하생략, 영해부적변문축 신미 4월  26일)라고 기록한 걸 보아 형제봉 정상에서 천제를 지냈다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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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 영해동학혁명 제151주년 기념 추모제(영해면사무소. 2022. 4. 29)

 

어쨌든 이날 천제시 제물이었던 소 한 마리는 박사헌의 것이고, 한 마리는 사 온 소였다. 이 천제 의식이야말로 당시 지도부에게는 영해 동학 의거 출정 성공 확신과 참가 동학도에게는 엄숙한 결의를 다지는 한편 백배의 심리적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이들은 천제에 앞서서 도록을 작성했다고 한다. 도록은 참가자 명단이다. 현재까지 참가자 도록(명단)은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이 명단이 관측에 입수되어 원인 제공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극비리 보관되거나, 불태우는 등으로 없앴을 것이다. 다음으로 하늘에 고하는 축문은 핵심지도부가 고축문을 읽었다. 영해부적변문축(신미 5월 13일)의 영양 유학 이군협의 진술이다.


『우정동 형제봉에서 천제시의 주 제사자는 이제발이고, 축문을 읽은 사람은 김진균을 비롯해 강사원, 박영관, 최경오, 전영규, 전인철, 정치겸, 장성진 등이다.


위의 문장으로 보면 한 장의 축문을 여럿이 돌아가며 읽은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고축문은 핵심지도부가 각자가 작성했다는 것과 이필제가 고하는 축문은 박한용이 작성해 주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들은 고축문에서 인내천의 평등과 개벽세상이 이루어지도록 의거 성공을 빌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출정식 당시 동학의 시천주 주문을 외우며, 형제애라는 종교적 이념 아래 화기애애하며 먹고, 자고 하며 교조 수운의 신원 회복과 시국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동질감을 돈독히 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영해 관아를 점거하는 일에 관해 이야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당일 저녁 고천제를 지내고 출정식에 이르러서는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감과 엄숙함이 덮쳐왔음은 뻔한 사실이다. 그 긴장감과 엄숙함을 깨트리는 장면 하나가 인상적으로『도원기서』에 기록되어 있다. 도원기서는 수운 선생의 가르침을 담은 동학 초창기의 역사서이다. 또 다른 장면 하나는 다음과 같다.


② 이필제의 변신술

『필제가 단을 설치하고 몸소 천제를 행할 때에 전일에 정(鄭)이라 행세하던 자가 갑자기 바꾸어 『이일회(李一會)』라고 스스로 칭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 왕왕 구덩이마다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분분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이른바 진퇴유곡(進退維谷)이라고 할 국면이 있다.』(도원기서, 윤석산 역주, 2014. 모시는 사람들) 

이 장면은 이필제가 전날 정(鄭)이라고 하더니, 갑자기 당일 저녁 그가 안면몰수하면서 이름을 이일회(李一會)라고 하였다. 이에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놀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진퇴유곡의 국면이 있다 함은 일의 사태가 원만하게 풀리지 않고 꼬여 갔음을 말한다. 또한, 영해 의거 후 이필제는 동학 측에서 부정적 인물로 보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영해 의거를 당해 관의 탄압으로 동학이 궤멸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해 의거가 초창기 동학교단 발전에 진퇴유곡을 가져왔음을 뜻한다. 따라서 이필제를 동학의 부흥을 일시적으로 가로막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필제 일개인에게만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해 의거는 당시 동학의 최고지도부가 결단으로 참가했기 때문이다. 실패든 성공이든 공동의 결과적 책임이다.


어쨌거나 이필제는 앞서 기술한 대로 떠돌이 선비(지식인)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어찌 보면 중국을 정벌하여 창업하겠다는 등 황당무계한 주장과 변설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비상한 선동가이기도 했다. 어떤 이는 이필제를 두고 비기와 병서에 밝은 조선 후기의 변혁운동가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필제는 그의 나이 25세(1850년, 철종 1년) 때에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바로 자기 외가인 풍기에 있는 선비 허선과의 만남이다. 그는 정감록 등 도참사상을 신봉하는 선비였다. 이필제는 그에게서 진인으로 지목받는다. 그래서 도탄에 빠진 백성과 어지러운 나라를 구하고 서양의 침범을 막아내며 나아가 중국까지를 북벌한다는 꿈을 가지게 된다.(혁명가 이필제의 생애와 영해. 임형진. 2014. 동학학회) 그때부터 그는 변혁운동가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허선은 그에게 필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준다. 본래 이름은 근수(根洙)였다. 필제라는 뜻은 바로 弼(필)자가 弓弓(궁궁)이고, 그가 乙酉生(을유생)이라 乙(을)자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궁궁을을이다. 완전한 인간형, 다시 말해 진인의 출현이다. 여기서『궁궁』을 영원한 생명, 완전무결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일부 동학도들은 이필제를 개벽한 새 세상을 도래시킬 鄭眞人(정진인, 일명 정도령)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 도참사상을 집대성한 도서가 조선 후기 민중을 사로잡았던 것이 바로 정감록이다. 이 황당무계한 혹세무민의 성격(?)이 강한 정감록에 관해서는 후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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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봉  병풍바위(동학연구자 김기현 제공). 지금은 숲이 우거져 바위 전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

 

③ 의거에 따른 비용은 어떻게 조달했나?

전국에서 모여든 이들은 의거 이틀 전부터 박사헌의 집 병풍바위 부근에서 노숙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1871년 음 3월 10일 전, 우정골과 병풍바위에서 전개된 고천제 등 이들은 거사 전 1871년 3월 8일, 전국 각지에서 영해 우정동(현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 형제봉 병풍바위 아래 200여 명이 노숙을 했다. 이후 총참가자는 각종 기록에 이른 아침에는 100여명이었으나 저녁 무렵에는 5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도원기서) 이 참여 인원에 관해 학계에서는 최소 인원인 150여 명으로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500여 명으로 참가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다수설로 되어 있다. 

 

또 하나는 출정식에 따른 경비, 수백 명이 먹는 양식 등은 누가 조달했는가이다. 교남공적 등의 기록에서 영양유학 이군협(효수당함)의 진술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이군협은 신미년 3월 초에 동학에 입도하여 지도부에서 참모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식량과 자금은 이제발, 최경오, 박영관 등이 주선해서 변통했다. 영양에서 공업을 경영한 정치겸이 가장 많이 출연했다. 자금은 모인 사람들에게 하루 이틀 정도 모으기도 했다는 것을 보아서 아마 참가자들한테서 공동모금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물에 쓰인 소는 박영관 소 한 마리이고, 한 마리는 사 왔다. 소는 식량 가마니를 병풍바위골로 옮기는 운반 역할을 했다. 책임은 영양 신계리 우대교가 맡았다. 큰 솥 6개를 준비했다. 500여 명의 식사 준비를 감당하자면 아녀자들도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없다. 수운 선생의 제물은 따로 준비했다. 이들은 아마 천제 후 수운 선생의 제사를 따로 모셨다.

 

죽창 등은 전인철(전동규, 전의철)이 마련했다. 전인철은 의거시 죽창 180개를 준비해 당일 참가자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솟까지도 준비하여 횃불을 밝혔다. 솟까지는 소나무 송진이 박힌 등걸이나 가지를 말한다. 이 솟까지는 불이 잘 붙는다. 


이들은 1871년 신미년 음 3월 10일, 고천제 의식을 치르고 저녁밥을 든든히 먹은 뒤에 우정골에서 영해부 관아까지 12여㎞(3,40여리)를 출발할 채비를 마쳤다. 우정골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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