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辛未年 영해+울진 동학 거사 2일 천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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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독자로부터 영해 의거 관련 문헌을 궁금해하기에 이해를 돕고자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1871년 영해 동학 의거에 관한 조선 정부 측의 관변기록으로 교남공적, 영해부적변문축, 승정원일기 등이 있다. 민간기록으로는 도원기서, 신미아변시일기, 나암수록이 있다. 이 문헌 기록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다. 지금 연재되는 이 글도 앞서 말한 문헌을 번역하여 나온 도서를 바탕으로 현장 답사를 통한 탐색, 관련 논문의 검토, 필자의 견해 등을 쓰고 있음을 밝힌다. 관련 도서는 다음과 같다.
① 도원기서道源記書
동학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원제는 ‘최선생문집도원기서’다. 1880년 경진년 간행된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동학 관련 문서로 동학의 연원과 역사를 밝혀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이 책은 최시형이 직접 엮은 동학의 정통 역사서로 그 가치가 아주 높다. 특히 최제우가 동학을 창립하게 된 계기와 배경이 나와 있고 최시형이 동학을 뿌리내리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② 교남공적嶠南公積이란 문헌은 1871년(고종 8) 3월 10일 경상도 영해에서 최시형,이필제, 강수, 김진균, 남두병, 전영규, 전동규 등이 일으킨 영해 의거 관련자들을 체포하여 문초처벌(問招處罰)한 기록한 문서로서, 사건 관련자들이 4월 22일부터 5월 26일까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진술한 내용이다. 이 교남공적은 조선 후기 민중운동과 초기 동학과의 관계를 실증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는다. 교남(嶠南)이란 말의 뜻은『험준한 산이 많은 남쪽 지방』즉, 조선 시대 당시『영남(嶺南)』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문헌은 아직 완전 번역이 되지 않았다.
③ 영해부적변문축寧海府賊變文軸이란 문헌은 1871년 영해 동학의거후 조선 관군이 5개월여에 걸쳐 각 지역에서 동학군을 체포하여 심문, 기록한 진술서이다. 교남공적과 다른 점은 죄과에 따른 형벌기록은 없다. 이 문헌도 교남공적과 마찬가지로 아직 완전 번역이 되지 않았다.
④ 신미아변시일기辛未衙變時日記는 조선 고종 신미년(1871)에 아헌(영해부관아)에서 일어난 사변을 기록한 일기란 뜻이다. 여기서 사변이란 최시형, 이필제 등 동학도가 일으킨 영해 의거를 말한다. 이 기록은 개인 일기가 아니라 향중(당시 영해향교 향회))에서 공적으로 기록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관청의 업무일지와 같은 것으로 6하원칙에 의거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영해 의거 후 총 27일간의 동학도 체포 등 사후 수습을 기록했다. 1871년 영해 동학 의거 연구자들에게는 당시 영해 유림과 관의 활동에 대한 또 다른 자료로 평가된다. 2022년도에 영덕문화원에서 번역(역자 권호기) 발행되었다.

현 영해면사무소(좌)와 옛 영해부 관아 부속 건물로 책방관사(우)가 유일하다.
동학 역사상 최초로 혁명의 횃불을 들다
최경상(최시형)의 통문을 받은 각지의 동학도들은 영해 형제봉(703미터) 아래 병풍바위 박사헌 집 부근에 모여서 1871년 음 3월 10일(양 4월 27일) 고천제를 지냈다. 이들이 의거 성공을 위해 고천제를 올린 곳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형제봉 정상이다. 이들은 저녁밥을 먹은 뒤 지도부의 지휘 아래 7시 30분경, 영해부 관아를 향해 출발했다.
우정골(또는 우정동)은 현 영해면 신기 2리다. 현재의 위정 관광농원부터 서북쪽 주막거리 등을 거쳐서 형제봉까지 이르는 골짜기를 말한다. 지금도 깊은 산골이다. 현재는 형제봉 아래 영양군과 영해군의 경계 지역으로 지금은 영양 쪽으로 포장된 지방도로가 있다. 150여 년 전에도 우정골에서 곧장 30여 분 내려오면 영해에서 영양으로 가는 삼거리이다. 현재는 길목에 남서쪽인 우정골로 들어오는 시멘트 다리가 있다. 그 다리 앞 도로가 영양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당시는 동쪽으로 송천(松川)을 따라오면 창수 인량을 지나 영해부 관아(현 영해면사무소)로 내려온다. 송천은 창수면과 영해면 일대를 흐르는 하천으로 창수면 울치재에서 발원하여, 영해면 일대를 흘러 동해로 흘러든다. 하류에는 영해평야를 이루어 영덕 지역의 농업 중심지이기도 하다.
당시 동학도가 행군하여 영해부 관아(현 영해면 사무소)까지의 거리를 따져보면, 병풍바위에서 현재 918번 지방도로가 있는 우정동(현 영해면 신기 2리) 삼거리까지 3㎞이다. 병풍바위에서 우정동 삼거리까지는 산길로 내리막길이다. 현 우정동 삼거리에서 영해부(관아)까지 8㎞이다. 그래서 모두 11㎞로 당시 요즘처럼 정비된 도로가 아닌 점을 고려하면 3시간 정도 걸어서 영해부(관아)까지 도달하는 시간이다. (출발지:병풍바위→우정동(3㎞)→영해부(관아:8㎞)
지도부의 주요 인물 살펴보기
1871년 음 3월 10일 영해 의거에 최시형의 명령으로 각 지역 12곳에서 동원된 동학도는 500여 명이다. 당시 영해 의거 참가한 신분은 대체로 동학도, 몰락 양반이나 유학자 등이 참가했다. 지도부는 대체로 몰락 양반이나 지식층이었다. 그 주요 인물은 최시형, 이필제, 강수, 김진균, 박사헌,남두병, 전영규, 전동규 등이었다. 여기 지도부와 관련한 울진 인물은 남두병, 전영규, 전동규이다. 여기에 주요 인물을 간략히 소개한다.

최시형(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① 최시형(1827-1898)
1827년 경주에서 출생했으나 어린 시절을 현 포항에서 자라난 포항 출신이다. 처음 이름은 경상(慶翔)이다. 동학에 입도 후 최시형으로 고쳤다. 어린 시절 영일군 신광면 길(터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5세에 부모를 잃고 여동생과 친척 집에 의탁하여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났다. 17세에 신광면 터일의 제지소에서 직공으로 생계를 도모하다 19세에 밀양손씨와 결혼했다. 한때는 신광면 금등골(검곡) 등지에서 화전민 생활을 했다. 35세에 최제우 선생을 만나 동학에 입도하였다. 수운 선생에게서 제2대 교주로 지명받고, 최제우 순도 후 조선 정부의 동학 탄압으로 지명 수배자가 되어 전국 200여 곳 이상을 은신과 피신을 다니며 포덕 활동을 했다. 1871년 영해동학 의거와 1894년 동학혁명을 막후에서 지휘했다. 1998년 12월경 스승 수운 최제우와 마찬가지로 『좌도난정』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최시형은 동학 교리면에서 최제우의 동학사상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의 경전을 펴내었다. 최시형으로 이어진 제3대 교주 손병희, 김구 등은 동학교도로서 일제 강점기 조국 해방과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임은 다 아는 바이다.
최시형의 처남이 손병희다. 동학교도였던 친일파 이용구는 손병희와 갈등 끝에 결별하고 시천교를 창시해 교주가 된다. 원조 동학은 1906년 손병희를 교주로 하는 천도교로 개칭한다.
손병희의 사위가 그 유명한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 선생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근대 만민평등과 자유, 어린이 인권사상, 여성존중 인권 사상 등은 동학사상이 효시이다.
최근 들어 최시형 선생은 우리나라 근대 사상가이자 혁명가로서 재조명되고 있다. 그의 외손자인 정순철은 우리가 잘 아는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라는 졸업식 노래를 작곡한 사람이다. 윤석중이 노랫말을 쓰고 정순철이 작곡해서 1946년에 만든 노래다. 우리 아기 행진곡’이라 이름 붙였던 ‘짝짝궁’(짝짜꿍), ‘새 나라의 어린이’, ‘어깨동무’, ‘아기별’, ‘늙은 잠자리’, ‘나뭇잎배’ 등이 정순철이 작곡한 노래다. 정순철은 6·25 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최시형 선생의 고손자인 최인경(현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장)최인경)은 최근 최시형 관련 학술세미나, 동학 유적지 관련 사업 등으로 영해, 포항, 영양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② 이필제(1825-1871)
1825년(순조 25) 충청도 홍주(현 홍성)에서 출생했다. 처음 이름은 근수이다. 그 후 전국을 방랑하며 필제, 이홍, 주지, 진명숙, 김창정, 창석, 주성칠, 이제발 등으로 여러 차례 바꾸었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를 못했다. 정감록에 심취하여 스스로 진인이라 하고 자처하고 중원(중국)을 정벌하여 차지하겠다는 의지로 행동했다. 영해 의거 전에 진천작변과 진주작변을 시도했으나 밀고자의 고발로 두 번 다 실패했다. 1870년 7월 그는 도망 다니던 중 영해로 잠입하여 박사헌, 이수용, 권일언, 박군서, 남두병 등 동학도를 접촉하고 억울하게 죽은 수운 선생의 명예를 회복하자는 명분을 내세웠다. 소위 교조신원운동이다. 이에 최경상(최시형)을 움직여 영해 동학 의거를 일으켰다. 이후 1871년 3월 10일 영해 의거 후 관군의 추적을 피하여 영양, 단양 등으로 피신함. 1871년 문경에서 또다시 동조자들과 난을 일으키려다 체포되어 서울에서 처형 되었다. 그를 두고 후세 사가들은 영해 병란, 민란, 변란 주모자 또는 사회변혁운동가 또는 혁명가로 그 평가가 다르다.

포항 소재 (사)동대해문화연구소가 개최한 해월 최시형 선생의 초기 학술대회 세미나(포항예술회관. 2023. 6. 16.)
③ 강수(?-1894)
강수는 현 영덕군 강구면 원직리 출신이다. 진주 강씨로 강시원, 강사원으로도 이름한다. 영해동학 의거시 이필제와 의거 시기와 정당성을 두고 논쟁을 벌였던 인물이다. 영해 의거부터 관군의 추적시 최시형의 최측근으로 끝까지 함께 했다, 전봉준 등이 일으킨 1894년 동학혁명시 최시형 다음 지위로 막후에서 역할을 하였다. 강수는 1879년 동학의 초기활동을 알 수 있는 『대선생주문집』을 집필했다. 그는 동학 초기 동학 포덕과 발전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강시원(강수 강사원) 충청감영에 체포되어 1894년에 처형되었다.
최근 『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위원장 권대천)에서 강수 선생의 묘라고 추정된다는 제보를 받고 강구면 상직리 마을 산에서 탐사 결과 추정일 뿐 아직 미상이다. 『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는 영해동학혁명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그 유허지를 보존하려는 영덕의 시민단체이다.

초기 동학과 1871영해동학혁명, 1894년 동학농민전쟁 시 막후 지휘한 동학 지도자 강수 선생의 묘소로 추정되는 영덕군 강구면 상직리 마을 산의 봉분임.(1871영해동학기념사업회 김용록 위원 제공)
④ 박영관(박사헌)(?-1871)
현 영해 출신이다. 함양박씨라고 알려졌으나 그의 아버지 박하선이 영해 동학 접주였다. 당시 박하선은 유림측과 관의 탄압으로 체포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박영관은 영해 접주였던 아버지 박사헌 죽음 이후 관의 탄압을 피해 우정골 병풍바위 아래에 은둔하며 살았다. 영해 의거시 동학 모임과 결행 장소가 되었다. 그는 천제를 올릴 때 집에서 기르던 소를 제물로 바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의거 후 그는 물론 동생 둘과 어린 사위도 체포되어 효수형을 당했다.
⑤ 김진균(?)
충청도 충주 출신이다. 체제 불만자로서 저항적 몰락 양반이다. 이필제의 최측근 참모로 알려졌으며 1871년 영해동학 의거시 이필제의 명으로 부사 이정을 처단했다. 영해동학의거 이후 이필제와 함께 문경새재에서 각 지역의 유림들을 모아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도피했다.
⑥ 남두병(1828-1871)
울진군 매일리(현 울진군 매화면 금매리)에서 출생한 영양 남씨 집안의 유학자이다. 교남공적 등 역사문헌에는 그의 다른 이름은 남양파, 남양피, 남칠서로 기록되어 있다. 양촌과 칠서는 그의 호다. 그는 1871년 영해동학혁명시 창의민병을 모집한다는 소모문을 쓴 인물이다. 이 소모문의 성격 규명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진하다. 그는 영해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필제, 김낙균과 교류를 수 차례 갖고, 당시 세계사적 조류와 시국에 대해 서로 공감하고, 사회 체제 변혁의 꿈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영해동학혁명후 관군에 체포되어 경상감영(대구)에서 모진 고문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옥중에서 남긴 이별시가 전해온다.
당시 그의 아들이 옥바라지를 했으나, 그도 아버지와 함께 대구에서 죽었다고 한다. 시신은 수습치 못하고 고향 금매리에 의관장했다.

남두병 관련 내용이 담겨있다는 임하만록
후손 남상균 소유 (울진군 매화면 금매리)
⑦ 전영규(?-1871)
전영규는 정선 전씨로 평해 월야동(현 기성면 방율리 범밭) 출신이다. 그는 평해지역에서 동학 접주 역할을 했던 듯 하나 관련 기록에는 접주라는 기록이 없다. 전동규와는 한동네 출신으로 사촌 간이다. 1871년 영해동학혁명시 참가자중에서 우두머리급 지도자(중군)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학자인 남시병을 집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으로 둘만큼 경제력이 있었다. 영해동학 혁명후 관아에서 수배와 검거 선풍이 불자 그는 음약자진(음독자살)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당시 가정교사였던 훈장 남시병도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무관함이 밝혀져 풀려났다.

출처: sbs 사극「비밀의 문」에서 화승총을 발사하는 장면, 총대에 달린 노끈이 심지(화승)이다.
⑧ 전동규(1826-1871)
울진군 월야동(현 기성면 방율리, 범바위골) 출신으로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동규, 전의철, 전인철은 동일 인물이다. 당시 평해군 현직 무관인 장교급이었다. 그는 무기기술 장교로서 자기 집 뒤편에 대나무숲에 대장간을 두고 무기를 제작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의 생가가 있는 둘레에는 대나무 숲이 울창하다.
1871년 영해동학 혁명 전 평해를 방문한 최시형을 만나 이필제의 거사 계획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영해관아 점령 출동시 참가자에게 죽창 180개 등을 제공했으며 별무사라는 임무를 받아 활동했다. 전영규의 사촌 동생이다. 김귀철이 그의 매부이고, 심문 중 고문 치사했다. 황억대는 사돈으로 효수당했다.
그는 관에 체포되어 효수당했다. 고향 방율리(범밭 동네) 들머리에 그를 기리는 후손들이 세운 기념비가 있다.

기성면 방율리 범밭 전동규(전의철) 장군 기념비
당시 동학군의 무장은 어떤 상태였을까
당시 교남공적 등의 기록에 나타난 영해부 관아를 점령한 500여 동학군은 무장 모습을 살펴보자 그들 대부분이 죽창과 몽둥이로 무장을 했고, 장검이나 화승총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로 보인다. 몇몇 인물들의 무장 모습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요 간부는 갑옷, 장검, 화승총 등으로 무장했다. 그 밖의 다수의 동학도는 죽창, 몽둥이로 무장했다.
지도부의 한 사람인 김진균은 갑옷을 입고 장검을 찼다. 갑옷은 쇠붙이 조각을 가공해 옷감에 붙여 만든 군복이다. 주로 고위 지휘관인 장수들이 갑옷을 입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면갑도 등장했다. 이 면갑은 대원군이 총알을 막기 위해 면 30겹으로 만들었다는 갑옷이다. 일종의 방탄복이나 제대로 실용화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김진균이 입었던 갑옷은 어떤 갑옷인지는 모른다. 그는 또 장검을 찼다고 한다. 유독 그가 장검을 가졌다는 것은 이필제로부터 부사 이정을 처단하라는 사전 임무를 부여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황억대(울진)는 주머니에 연환을 차고, 등에는 두꺼운 상피를 지고, 성안으로 진입했다. 장성진은 화승총을 소지했다. 전윤환은 청포를 입었고, 가지고 있던 조총을 손경석에게 주었다. 손전윤환은 평해 월야동(현 기성 방률) 사람이다. 전윤환은 손경석의 처남이다. 조총과 화승총은 이름만 다를 뿐이다. 화승총(火繩銃)은 화약가루를 총구에 넣고 다시 그곳에 쇠구슬(총알) 넣는다. 그런 다음 방아쇠를 당겨서 장치를 작동시키면 불심지가 점화구에 닿아 총 내부로 불을 붙이면, 화약이 폭발하여 그 압력으로 총알이 발사되는 구조다. 화승총은 비가 오는 등 궂은날에는 화약이나 심지에 습기가 차면 발사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당시 화승총은 총기 제조업 장인을 통해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영해 의거 시 화승총을 지닌 동학군은 황억대와 장성진 등 수명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황억대는 평해 출신이다. 장성진은 안동 출신이다. 둘 다 화승총과 탄환을 가진 것 보아 영해부 관아 진입시 선봉대 역할을 한 것 같다. 거사 후 둘 다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 외 일반 동학도의 대다수는 죽창으로 무장했다
죽창은 대나무로 만든 무기이다. 죽창은 누구나 쉽게 제작,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무기에는 낫, 곡괭이, 도끼 등의 쇠붙이 농기구는 보이지 않는다. 죽창과 조총(화승총)등 무기 공급은 평해 전의철(전동규, 전인철, 전의철 동일 인물)이 공급했다고 한다. 죽창 180여 개를 사전 준비하여 거사 당일 지급되었다.
필자가 실제로 전의철의 후손 전동일(대구 거주)씨와 기성면 방율 현장에 가 확인한 결과 대밭이 있었다. 지금도 대밭은 무성했다. 후손의 증언에 따르면 무기를 만드는 대장간도 있었다고 한다. 전의철은 평해 역인에서 무관으로 발탁되어 관아에 무기를 공급하는 책임기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영해 의거시는 별무사로 직책을 부여받아 영해부 관아를 공격했다.
한편 당시 영해 관아를 기습한 일부 동학도는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것은 아마 무기고에 비치된 도검류로 자신들의 빈약한 무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왜 그들은 푸른 도포와 붉은 도포를 구분해서 입었나?
한편 이들은 복장을 청홍차림으로 갖춰 입고 영해 관아로 출동했다. 동학도는 푸른색 도포 복장(청의)으로 비동학도 등 일반인들은 붉은색 도포(홍의)로 옷차림을 구분했다. 머리에는 유건과 갓을 썼다. 누가 유건을 쓰고, 갓을 썼는지 뚜렷이 구분되지는 않으나, 조선 후기 선비나 유생들의 관모는 통모자 같은 유건(儒巾)이나 갓을 머리에 썼다.(그림 참조)

머리에 쓰는 통모자 같은 유건(좌) 영조의 도포. 파계사 소장.(좌우 사진 출처 나무위키)
조선시대 선비와 양반이 평상시에 입었던 겉옷이다.
머리에 쓰는 갓 차림은 유림과 선비의 상징적 의관이었다. 후대로 오면서 유생들은 관(館)에서만 유건을 쓰고, 길에서는 갓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도포(道袍)는 조선조 남성의 통상 예복으로 입던 겉옷을 이르는 말이다. 깃은 두루마기의 깃과 같고 동정이 있다. 소매는 넓은 두리 소매이다. 옷감은 명주·비단·공단·모시·생모시·삼베·광목 등으로 만들었다. 색상은 백색·초록색·청색·다홍색·미색 등으로 여러 가지이고. 임진왜란 이후 입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도포(道袍)는 조선 시대에 상류계층에서 주로 입었으나, 말기에 가서는 하류 계층에서도 일반화되었다.
『신미아변시일기』에는 당시 영해부관아 공격시 동학도의 복장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원문 생략함)
『그날 밤 戌時 亥時 쯤에 흉도 5, 6백 명이 갑자기 성 서쪽과 남쪽 두 문으로 들어왔는데, 머리는 검은 수건으로 감싸고 몸에는 소매 짧은 옷과 푸른 도포를 입고 손에는 죽창과 장검을 들고서 성으로 들어오자말자, 일부는 군기소로 달려가서 창고 문을 도끼로 부수고 병기를 탈취하였으며, 일부는 선포청選砲廳으로 달려가서 지키던 군사를 수색하여 체포하였다.(이하 생략)』
위의 『신미아변시일기』에는 머리는 검은 수건, 소매 짧은 옷과 청의(푸른도포)를 입었다고 했다. 유건은 동학인과 비동학인(일반인)이 모두 착용한 것 같다. 그런데 또 다른 기록에는 동학도의 옷차림을 청의(청색 도포)와 홍의(붉은색 도포)로 구분했다고 한다. 푸른색 도포는 동학인으로, 일반인은 붉은색 도포로 복장을 구분 통일한 까닭은 무엇인가? 필자가 가장 궁금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아마 지도부에서 역할을 준 동학도인 임무 부여자(청)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자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관군과 접전 시 피아를 구분하는 표시로 그렇게 했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관군 측에서는 기습한 동학도들이 입은 청홍색 복장을 보고 더 쉽게 역공할 수 있다는 점이 불리할 수 있다. 여기에 관해서 적변문축의 동학도였던 임영조가 말한 심문기록에서 그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으나 아직 명쾌한 논리는 아니다.
『삼한비기에서 묘방(24방위 중에 정동의 15도가량 기울어진 방향)이 생기가 있다. 그래서 검은 갓은 북쪽의 살기를 억제하고, 푸른 옷은 동방에 응하여 푸른 제왕의 옳고 의로움을 상징하는 연유로 영덕, 영해 두 곳을 일시에 먼저 거사를 일으키는 것이고 이하생략)』(김기현, 자유를 향한 영웅들. 213쪽 적변문축, 한국지방세연구회(주), 2015.)
위의 심문 진술에서 보듯이 당시 민중들은 정감록과 같은 비기의 사상을 믿은 것 같다. 이런 주술적 미신 심리들은 오늘날에도 일부 사람들에게 작용하는바, 거사에서 적으로부터 자신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한 심리적 방책일 수 있겠다 싶다. 한편으로는 지도부의 입장은 검은색으로 거사에 방해되는 나쁜 기운을 쫓아내고, 자신들의 행위가 정의로움을 나타내는 대의명분을 살리는 상징성과 거사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이들이 왜 청홍주의(푸른색과 붉은색 도포)를 입고 의거에 출동했는가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그들이 동학교도와 일반인을 구분할 요령으로 유건을 쓰고, 청주의와 홍주의로 나눠 복장을 통일하고 군호를 왜 정했는지 따져 볼 일이다. 해월이 제공한 거사자금이 동학교도들의 성금일지라도 자신들을 표시하기 위해 구분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은 단순한 생각일 뿐이다.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거사를 준비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을 쪼개서라도 구분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동학교도와 평민을 구분하지 않으면 거사를 진행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복장을 구분했다는 사실은 영해 거사의 명분이 교조신원운동으로 규합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따라서 영해 거사는 수운의 교조신원운동과 이필제의 체제전복을 지지하는 두 세력이 불협화음을 내면서 치른 병란에 불과한 것으로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란 쉽지 않다. <이하생략> (이필제 입장에서 본 1871년 영해, 영해 거사의 진실을 찾아서, 김영진. 1871 최초의 동학혁명 영해동학의거, 2023. 동학학회)
이 주장은 1871 영해 거사의 성격 규명과 관련된 것으로서 동학교도와 일반인을 복장 등으로 구분했다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은 불편한 진실이 규명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교조신원운동을 중심에 둔 최시형 측과 탐관오리 척결을 내세운 이필제 측과의 불협화음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한 상관관계는 앞으로 더욱 명쾌하게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영해관아는 동헌, 객사, 대동청, 군기청, 형옥 등 29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혼을 말살하고자 철저히 파괴시켰다고 한다. 영해부관아에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부속 건물인 책방관사이다. 오늘날 기초단체장을 보좌하는 비서실같은 곳이다.
앞서 기술했지만 1871년 3월 10일 밤 술시(戌時) 해시(亥時)쯤에 흉도 5, 6백 명이 갑자기 성 서쪽과 남쪽 두 문으로 들어왔다. (신미아변시일기중에서) 영해의거시 동학도 500여 명이 영해부관아(현 영해면사무소) 공격한 것을 양력 4월 29일 현재의 시각으로는『오후 07시-오후 09시(술시 戌時)에서 9시-11시(해시 亥時) 사이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병풍바위에서 영해까지 도보로 행군한 것으로 추정한다면, 그날 밤 10시 30분쯤 관아 성문에 도착했을 것이다. 영해부 관아 성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사전 첩보 활동으로 동학 지도부와 관아의 누군가와 내통이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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