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국보 181호 장양수홍패張良守紅牌의 비밀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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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수홍패가 있는 국보각의 월계서원 전경
우리 울진에는 국보가 2점 있습니다. 국보 181호 『장양수홍패(張良守紅牌) 이하 홍패』가 있고요. 또 하나는 국보 242호 『봉평신라비』입니다. 경북의 타시군에 비해 국보나 보물 등의 문화재 소유점수가 많은 편입니다.
더구나『장양수홍패』와 『봉평신라비』는 울진문화유산의 대표적 양날개이자 상징입니다. 그만큼 위상이 큰 문화재이기도 합니다.
『장양수홍패』는 울진읍 고성리 월계서원 『국보각』에 『봉평신라비』는 울진읍 온양리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국보 181호인 장양수홍패(이하 홍패)와 관련하여 『울진장씨대종회(회장 장국중)』에서 이관설이 나오고 있습니다. 보존·관리의 어려움 때문이죠. 이대로 가면 홍패가 더욱 훼손되어 망실 우려와 천재지변이나 인재 등 보안에 문제가 있다는 게 대종회 측의 입장입니다.
대종회 측의 바람은 장차 울진군에 이관하여 군 당국에서 국보를 관리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러하지 못하다면 국학진흥원이나 국립박물관에 이관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앞으로 이관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하는 귀추가 주목되는 바이고, 울진의 문화재는 울진에 남아 옛 문화의 향기를 오래도록 전승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이 귀중한 문화재를 800여 년간 고이 간직해 온 『울진장씨대종회』에 경의를 표하면서, 이번 이관설을 계기로 홍패에 관해 세부적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국보181호 장양수홍패
홍패의 주인공 장양수는 누구?
이 홍패는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 전, 고려 희종 1년(1205) 울진장씨 집안의 장양수가 당시 고려 정부가 시행한 국자감진사시(國子監進士試) 병과(丙科)에 급제했답니다. 당연히 임금이 진사시에 합격했다는 교첩을 내렸겠죠. 이 교첩이 바로『장양수홍패』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국가 공무원 채용에 응시하여 받은 합격증과 같은 것이죠.
이 홍패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행정공문서로 평가를 받아 1975년 10월 13일 대한민국 국보 181호로 지정되었지요. 현재 울진읍 고성리 월계서원(月溪書院)『국보각』에 있답니다. 소장자인 『울진장씨대종회』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장양수 홍패 국보각(울진읍 고성리 월계서원 소재)
월계서원 국보각에 소장된 소라껍질로 만든 술잔. 1531년도 제작.(상-소라함, 하-소라술잔)
『장양수홍패』 크기는 월계서원 국보각 설명서에는 가로 93.5㎝, 세로 45.2㎝로 되어 있습니다. 2022년도 12월 발행한 울진군지 장양수홍패 기록에는 크기가 가로 88㎝, 세로 44.3㎝로 나와 있어 정확한 측정이 필요합니다. 한편 홍패 사본 수십 축이 장씨 문중의 각 가정에 기념으로 소장하여 조상의 덕업을 기리고 있다고 하네요.
이 홍패의 주인공인 장양수는 본관이 『울진장씨』이고, 고려 개국공신 장정필의 12세손이자, 울진부원군 장말익(蔚珍府院君張末翼)의 8세손이죠. 여기서 부원군이란 고려와 조선 시대 왕실의 인척과 공적이 많은 신하에게도 주어진 명예직으로 정1품에 해당하는 관직입니다. 아마 장말익이 고려 왕조에서 부원군의 작호를 받아 울진에 정착함으로 울진장씨의 관시조(貫始祖)가 되었던 겁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장양수는 과거에 급제하여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나중에 그 벼슬이 추밀원부사(府使樞密院,)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추밀원(樞密院)은 국왕의 왕명을 받드는 자문기관의 벼슬이고요, 전리판서는 현재 법무부 장관에 상응하는 관직입니다. 상호군은 고려 시대 중앙군사 조직의 근간으로 왕을 호위하는 별관직 무관 벼슬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경호실장격의 직함입니다. 장양수는 고려 시대 문무를 겸직했던 중앙 정부의 최고위 관료로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장양수의 중앙관료 경력이 관찬사서인 고려사와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나오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쨌든 당시에는 대단한 출세로 집안의 명예를 드높였던 인물로 평가되지요. 하지만 그의 생몰연대와 묘소는 미상이라고 합니다. 후손들은 현재 그를 추모하기 위해 죽변면 매정에 제단(祭壇)을 만들어 해마다 한식에 제향을 올리고 있답니다.
장양수 급제를 인준한 이 홍패는 고려 국왕이 아래로 내리는 공문서인 교첩 등의 실상을 알려주는 『1차 사료』라는 점에서 일찍이 학계의 관심을 끌어왔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서 하나로 800여 년 전, 당과 송의 공문서 양식이 고려에 도입되어 변화해 온 과정, 고려와 주변국과의 조공과 책봉 등 외교 관계, 당시 고려 왕조의 관료제도와 행정공문서 처결 방식, 과거제도사, 고문서의 글씨체 등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역사 타임캡슐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이 홍패에 담긴 비밀코드(?)를 하나씩 풀어볼까요.
장만시가 후손에게 남긴 사오당 가훈(장학중 고가. 울진읍 읍내리)
울진읍 읍내리 장학중 고가에 게시된 장양수 홍패 사본
홍패의 문안 짜임은 이렇다.
『장양수홍패』(44p 사진 참조)에 나타난 문안 짜임을 필자는 1. 머리글자 2. 본문 3. 연호 4. 관인 5. 재상의 관함 6. 초압 7. 첨부문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1. 머리글자
ㅇㅇ 右人張良守(우인장양수), 貢院(공원)… 判乙以點(판을이점)…
2. 본문
敎可丙科(교가병과)
及第牒至准(급제첩지준)
敎 故 牒(교 고 첩)
3. 연호
泰和五年乙丑四月日牒(태화5년을축4월일첩)
4. 관인
오늘날 기관의 직인. 붉은 사각도장(관인)이 찍혀 있다.(52p 참조)
5. 재상의 관함
① 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太子小傅王
(금자광록대부/참지정사/태자소부왕)
② 門下侍郞平章事寶文閣太學士同修國史柱國
判戶部事任
(문하시랑평장사/보문각태학사/주국/
판호부사임)
③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吏部尙書上柱國
上將軍判兵部御史臺事崔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이부상서/상주국/
상장군/판병부어사대사최
④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柱國上將軍
監修國史判禮部事奇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주국/상장군/
감수국사/판예부사기
⑤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修文殿太學士
上柱國判吏部事崔(草押)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상주국/판이부사최(초압)
6. 초압
수결(sign)은 당시 국무총리격인 최선이 대표로 했습니다.
7. 첨부문
이 글은 장만시가 후손들에게 홍패를 잘 관리하라는 당부의 글입니다.
公諱良守, 高麗熙宗孝大王元年, 奉使于中朝, 泰和
공휘양수, 고려희종효대왕원년, 봉사우중조, 태화
五年乙丑四月日, 登丙科及第, 時則宋寧宗開禧元
5년을축4월일, 등병과급제, 시칙송영종개희원
年也, 爵至奉翊大夫樞密院副使, 典理判書, 上護軍
년야, 작지봉익대부추밀원부사, 전리판서 상호군
致仕, 噫試券文字, 雜失於兵燹 之間黃牌寶墨, 遺傳
치사, 희시권문자, 잡실어병희 지간황패보묵, 유전
於五百載後, 勅文章德業, 遺風晟㤠照人耳目髣髴當
어오백재후, 칙문장덕업, 유풍성열조인이목방불당
時, 而一隅僻鄕, 雲仍漸替, 名湮沒而不稱, 悲夫勉
시, 이일우벽향, 운잉점체, 명인몰이불칭, 비부면
矣, 後孫敬守勿失, 留作世世之寶, 千萬幸甚, 崇禎
의, 후손경수물실, 유작세세지보, 천만행심, 숭정
後甲子戊午, 後孫萬始謹誌
후갑자무오, 후손만시근지
<풀어쓴 글>
공의 휘는 양수이다. 고려 희종성효대왕원년(1205)에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금 태화 5년(1205) 을축 4월 일에 병과에 급제하였다. 이때는 남송의 영종 개희 원년이다. 관작은 봉익대부, 추밀원부사, 전리판서, 상호군으로 치사하였다.
아아! 시권의 문자는 병란의 사이에 잃어버렸지만, 황패의 보배로운 글씨는 5백 년 뒤에까지 전하게 되었으니 문장과 덕업, 유풍과 성열을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이, 당시를 방불케 한다.
그러나 한 귀퉁이 구석 시골에서 후손들이 점차 쇠락하여 이름이 묻혀서 칭송하지 않게 되었다. 슬프구나, 힘쓸지어다. 후손들은 공경히 지켜서 잃어버리지 말고 대대로 보배로 삼는다면 아주 다행이겠다. 숭정 후 갑자 무오년(1738, 영조 14)에 후손 장만시는 삼가 기록한다.(출처 고려시대 중서문하교첩·심영환)
홍패의 문안 짜임과 용어, 문서양식 등 분석해 보기
필자 나름으로 홍패에 나오는 문안과 용어, 문서 양식 등과 그 역사적 배경을 필자 나름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분석해 볼 문안 짜임과 용어는 ⓵右人張良守(우인장양수)②교가(敎可) ③급제병과(及第丙科) ④첩지준교(牒至准敎) ⑤고첩과 피휘(故牒과 避諱) ⑥연호(年號) ⑦관인(官印) ⑧재상의 직함(職銜) ⑨서체 ⑩첨부문(후손 장만시 글)입니다.
■ 홍패의 첫머리 글자는?
홍패의 첫머리 글자는 거의 없어지고 우인 장양수(右人 張良守), 공원(貢院)과 판을이점(判乙以點)만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는 과거에 급제한 주인공인 장양수 이름을 썼습니다. 또 공원(貢院)이라는 용어는 고려 시대에 과거시험의 실무를 담당한 상서예부에 속한 부서입니다.
당시 과거 응시자는 행권과 가장을 공원에 제출했습니다. 행권은 응시자의 이름·나이와 4대조 아버지(父)·할아버지(祖)·증조할아버지(曾祖)·외할아버지(外祖)를 적은 인적 사항입니다. 가장은 행권의 세계(世系)를 증빙해 주는 가계표(家系表)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홍패는 과거 합격증이므로 큰 글자로 제목을 썼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요즘의 상장·표창장 하듯이 말입니다.
우인 장양수, 공원… 판을이점은 과거 시험 채점자인 공원의 판정에 따라 이 교첩을 발급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추정컨대 이 문안은 『(삼가)교명을 받들어 오른쪽(위) 사람 장양수에게 <이 홍패를> 공원에서 발부하는바, (병과로) 급제(합격)하였기에 認可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 국왕의 의지(명령) 표현인 교가(敎可)
이 교가(敎可)라는 용어의 문서 양식은 당·송에서 기원을 두고 유래 되었는데요. 황제의 의지(명령, 지시나 말 등)를 내려주는 문서입니다. 唐(당)은 여섯 가지, 宋(송)은 일곱 가지 양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당의 제(制), 칙(勅), 책(冊), 령(令), 교(敎), 부(符)입니다. 이 중에서 황제가 내리는 것을 제(制), 칙(勅), 책(冊)이라고 했습니다. 한자 말뜻대로 황제에게 결재를 올리기 전에 그 의지를 파악하여 작성하겠죠. 그 결과 생산된 문서를 제(制), 칙(勅), 책(冊)이라고 하죠.
그리고 황태자가 내리는 의지는 령(令)이라 했고요. 황제의 친인척인 친왕과 공주가 내리는 것은 교(敎)라고 했답니다.
마지막으로 부(符)가 있는데요. 부(符)라는 공문서는 중앙관청(상서성)에서 하부 지방 행정기관인 州(주)→縣(현)→鄕(향)에 내리는 것을 모두 부(符)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송나라는 황제의 명령을 내리는 문서로 冊書(책서), 制書(제서), 誥命(고명), 詔書(조서), 勅書(칙서), 御札(어찰), 勅牓(칙방) 등의 일곱 가지 양식이 있어서 고려가 여기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거죠.
고려 초기부터 국왕의 의지표현을 勅(칙), 詔(조), 制(제), 敎(교) 등으로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종 5년(986) 이후부터 詔(조)를 敎(교)로 고친 것은 당시 중국 북송과의 관계 때문으로 보입니다. 북송에 조공을 바치고 연호를 쓰면서 황제의 의지표현인 詔(조)를 계속 쓰기가 아무래도 껄끄럽기 때문이었다고 봐야죠.
결국, 문서 양식도 큰 변화를 가져와 詔(조)→ 敎(교)로 바뀌어 정형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과거시험 합격 등급인 병과급제(丙科及第)
고려 광종 이전 삼국시대나 고려 초에는 국가 사무를 담당하는 관리로 진출하는 길은 음서제(蔭敍制)가 있었는데요. 음서제는 지방의 유력 호족이나 문벌귀족들이 관직의 세습을 통해 자식을 국가관리로 등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음서제로 임용된 벼슬아치를 음관(蔭官)이라 했죠. 말하자면 조상을 잘 만난 덕분에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자손 대대로 관리로 채용되었던 겁니다.
소위 낙하산 출신으로 당시 금수저인 왕족 종친, 공신, 귀족 자제들에게 주어진 특혜였죠. 지금으로 치자면 아버지나 아버지의 친인척, 혹은 어머니의 친인척, 혹은 삼촌, 장인 등이 고위 공직자이면 태어날 때부터 임용시험 없이 공무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려 제4대 국왕 광종(925-975) 때 중국 귀화인 쌍기의 주도하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과거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됩니다. 과거제를 통해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해 국가의 공적 사무를 관리케 한 것입니다. 물론 광종의 입장은 호족과 공신 세력을 누르고,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여 중앙집권체제를 확립은 물론 왕권 강화가 목적이었겠죠. 과거로 합격하여 관리가 된 인물들은 당연히 왕의 친위세력이 되어 왕권안정에 그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이같이 관리 등용 방식에서 음서제가 가문과 혈통을 중시한다면, 과거는 자질과 능력을 중시하였습니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음서보다는 과거의 비중이 커졌습니다.
고려의 과거시험은 예부에서 주관했으며, 문과, 잡과, 승과로 분류해 관리를 선발했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행정직, 기술직, 종무직을 과거로 뽑았습니다. 고려는 불교 국가라 승과(종무직)를 따로 보았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문과의 시험과목은 시(詩)·부(賦)·송(頌), 유교 경전, 시무책 등을 논술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시험은 총 3단계로 나누어 시행했습니다.
1차 시험은 향시로 지역에서 치르는 것으로 개경, 지방, 외국인으로 구분하여 선발했고요. 1차 향시 합격자는 2차 시험을 국자감에서 시험을 보았으며, 여기에서 합격한 사람을『진사』라고 별칭 했습니다. 3차 시험은 2차 시험에 합격하여 올라온 진사 급제자가 중앙관청인 예부에서 응시하는 마지막 관문의 시험입니다.
당시 고려 희종 대에는 선발인원을 몇 명 뽑았는지 모르지만, 조선의 과거시험 합격자 수를 볼 때 3차 시험에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 모두 33명의 합격자를 선발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장양수가 응시한 국자감시는 70인을 선발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어쨌든 고려의 전국 고을에서 수천수백 명이 과거에 응시했을 것인데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장양수는 문과에 응시해 당당히 합격했던 것입니다.
3차의 최종 합격자에게 홍패라는 합격증을 주었다고 합니다. 장양수가 어려운 3차 시험까지 통과하여 받은 합격증이 바로 국보 181호로 지정된 홍패입니다.
이 과거제도가 고려에 이어 조선에서도 관리 채용방식으로 자리 잡혔죠. 하지만 폐단도 만만찮았죠. 과거에 실패하면 1수, 재수, 삼수, 그리고 평생을 과거에 매달리는 인생들이 많았다니 오늘날로 말하면 고시 낭인이라고 할까요. 지금은 사법고시가 폐지되어 『전문법학대학원(로스쿨)』으로 바뀌었지만요.
당시 과거 합격자는 국가와 사회의 우대를 받으며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최선으로 본인만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었다지요. 그래서 일반 평민에서 벗어나는 수단은 과거 합격으로 관리가 되는 것만이 신분 상승의 지름길이자 평생 염원이었을 겁니다.
어쨌든 장양수는 당시 어려운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에 영광을 안겨준 인물이었죠, 오늘날의 행정 9급부터 벼슬에 나아가『전리판서』까지 승진했다 합니다. 당시 전리판서는 오늘날 법무장관급의 고위관직입니다.
따라서 그가 남긴 출세의 증표라 할 수 있는 『홍패』는 오늘날에 국보까지 되었으니 죽어서도 울진장씨 가문의 명예를 높이고, 이름값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 과거 합격 사실을 알리는 첩지준교
원래는 본문에 牒至准(첩지준)이라로 쓰고, 그다음에 敎 故 牒(교 고 첩)으로 띄어쓰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뜻풀이는 牒至准+敎로 하였습니다.
이 문안의 뜻은 『병과 급제가 가(可)하다고 교(敎)하셨다. 첩이 이르렀으므로 교에 준하여 첩한다.』입니다.
이 문구는 장양수의 급제 사실을 인준하는 왕언(王言)입니다. 그가 과거 병과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아서 그 왕명으로 홍패인 합격증을 장양수에게 내린다는 뜻입니다.
■ 공문서 이행체제인 故牒(고첩)
장양수 교첩에 등장하는 고첩(故牒)이라는 용어는 공문서의 이행체제를 말합니다. 상부 관청에서 아래로 내려보는 하행 공문 이행을『고첩(故牒)』이라 하고, 아래에서 상부로 올려보내는 상행 공문이행을『근첩(謹牒)』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장양수 교첩은 당송의 칙첩(勅牒)에 그 양식 기원을 두고 있으므로, 당연히 고첩(故牒)이라는 용어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첩(故牒)은 국왕의 의지를 첩(牒)의 양식으로 전하니 잘 이행하라는 명령입니다.
■ 왜 牒(첩)자와 準(준)자는 피휘하였나
이 첩(牒)자는 『서판, 기록, 공문서』라는 뜻을 가진 한자입니다. 장양수 홍패에는 첩(牒)자가 세 번 나오는데요. 이 牒(첩)자를 云(운)자처럼 썼지요. 이것은 당나라 황제의 이름 이세민의 世자와 民자를 피해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장양수가 받은 홍패에도 牒(첩)자인 나무 木(목)변 위에 世(세)자가 들어가 있어서 云(운)자처럼 고쳐 썼고, 准(준)자도 북송의 재상 寇準(구준)의 이름인 準(준)자를 피하여 准(준)자를 썼다고 합니다. 고려도 당나라 문서 양식을 적용, 피휘(避諱)했습니다.
당시 중국 문헌에는 대체로 世→代자로, 民→人자로 바꾸어 썼다고 하네요. 어쨌든 세(世)자와 민(民)자는 피해야 했습니다. 모든 문건에 황제 이름 글자까지 엄금했으니 그 권력과 위세가 하늘을 찌를듯한 시대였다고 보아야죠.
■ 홍패 발급 연대를 알리는 연호
泰和五年乙丑四月日牒(태화 5년 을축 4월 일 첩)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고려는 금(金)나라와 교류하던 시대였습니다. 금나라 장종 완안경(金 章宗, 完顔璟, 1168년~1208년)의 연호인 태화(泰和)를 썼습니다. 고려가 독자적으로 연호를 쓰지 못했던 것은 금과의 조공과 책봉 관계 때문입니다. 고려 희종은 재위 2년(1205)째에 금(金)에게 책봉을 받았습니다.
『조공』과 『책봉』관계(朝貢冊封關係)는 동북아시아의 중원 국가인 중국과 주변 국가 간의 『주종관계』를 말하는 용어입니다. 『조공(朝貢)』은 주변 국가의 국왕이나 수장이 당시 가장 강력한 위세를 가진 중국왕조에 대하여 정치적 의례입니다. 고려에서는 일 년에 한두 차례씩 중국 황제의 경사, 명절 등에 사신단을 보내어 교류했던 것입니다.『당신의 신하국(?)으로서 의리를 지킬 테니 잘 봐주세요.』 하는 거죠.
『책봉(冊封)』은 중국 황제가 주변국 수장들에게 특정 관작과 물품을 하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고려 국왕이 왕위에 오를 때는 반드시 중국 황제의 승인을 받는 절차를 거쳤습니다. 이러한 사대적 외교 관계가 조선 시대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외교 관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국제적 외교 관계에서 강대국의 힘의 논리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장양수홍패 재상들의 관함
■ 재상의 관함, 문서 결재방식, 초압이란?
고려는 983년(성종 2)에 중앙 행정조직 체계를 당·송의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의 3성(省)과 6부제 중 2성 6부 체제로 조직,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두고 운영했습니다. 그 하위에는 6부 체제를 두었습니다. 그중『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은 당시에 국정 운영의 최고 의결기관으로 국가행정 전반과 언론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래서 권력과 영향력으로 소위 끗발(?)이 최고 센 행정관청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6부의 최고관직을『판호부사』등을 줄여서『판사』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각 부처의 장관직과 같은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는『판서』라고 했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고려의 중앙행정 체제는 2성 6부)로 운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장양수 교첩에는 중서문하성 고위 관료인 재상(현 수상 또는 국무총리급)과 장·차관급의 정2품 이상의 관함이 기록되어 있어 이 홍패의 위상이 남다르게 높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죠.
그리고 관함 끝에 姓(성)만 써 놓았네요. 이는 당시 시험관이던 ① 태자소부(太子少傅) 왕규(王珪), ② 판호부사(判戶部事) 임유(任濡), ③ 판병부어사대사(判兵部御史臺事) 최충헌(崔忠獻), ④ 판예부사(判禮部事) 기홍수(奇洪壽), ⑤ 판이부사(判吏部事) 최선(崔詵) 5명을 말합니다.
홍패에 등장하는 인물의 서열순 1위는 수상(현 국무총리급)인 최선(崔詵)이고, 그 밖의 인물은 장관급입니다.『무신정권시대』실권자인 최충헌은 병부판사(현 국방부장관)를 맡고 있네요. 이들은 낮은 서열인 왕규(王珪)부터 수상인 최선(崔詵) 순으로 관함을 나열했습니다.
수결은 수상격인 최선이 서명을 했습니다.
필자는 홍패에 나타난 재상의 관함을 보는 순간 이렇게 긴 관함을 가지고 있다니! 그래서 이들 5명에 관하여 역사 기록에 나타난 인적사항을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① 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太子小傅/王
(금자광록대부/참지정사/태자소부/왕)
☞ 왕규(王珪, 1142-1228)는 본관이 개성왕씨이며, 그 시조는 고려 태조 왕건 (王建)이다. 그는 태조 왕건의 종제인 왕만세(王萬歲)의 7세손이다. 벼슬은 의종 때 군기주부동정(軍器注簿同正)으로 시작하여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郎)과 어사대의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까지 이르렀다. 太子小傅(태자소부)라는 벼슬로 보아 그는 장차 국왕이 될 태자의 교육을 담당한 스승이었다. 정1품으로 현 국무총리격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왕규는 1170년(의종 24) 무신난이 일어나 문신이 도륙될 때, 마침 휴가를 받아 어머니를 보러 가게 되어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한때 벼슬에서 물러나 있다가 1174년에 복직되어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203년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으며, 문하시랑동중서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平章事)에 이르러 병으로 사임하였다.
② 門下侍郞平章事/寶文閣太學士/同修國史柱國/判戶部事/任
(문하시랑평장사/보문각태학사/동수국사주국/판호부사/임)
☞ 임유(任濡, 1149-1212)는 고려의 문신이다. 본관은 정안(定安)이다.
명종 초에 과거에 급제하고, 1187년(명종 17)에 예부시랑으로 금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좌승선을 거쳐 참지정사가 되고, 1197년에는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郎平章事判吏部事)에 이르러 20년 가까운 기간 재상(현 국무총리급)의 자리에 있었다.
특히, 세 차례의 지공거와 한 차례의 동지공거를 역임하여 모두 네 차례나 과거를 주관하였다. 또한,『제고(制誥) 16년에 일시의 책문(冊文) 등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라고 할 만큼 대단한 문장가였으며,『가세(家世)·세위(勢位)를 가지고 남에게 교만하지 않은 인품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③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吏部尙書/上柱國/上將軍/判兵部御史臺事/崔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이부상서/상주국/상장군/판병부어사대사/최
☞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은 고려 무신정권의 제5대 집권자로 본관은 우봉 최씨가문 출신이다. 왕을 두 번이나 갈아치운 권신(權臣)이다. 최씨 정권을 연 첫 권력자이자 장군이다. 1196년부터 1219년까지 23년 동안 고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그는 고려 474년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인 정치가로, 생전에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렸다.
1219년 9월에 개성부 안흥리(安興里) 집에서 사망했는데, <고려사>에 의하면 그는 죽기 전 연회를 열다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장례식은 고려의 임금의 장례식과 다를 바 없었다 한다.
사후 4대에 걸쳐 최씨 무신정권의 세습 권력을 닦았으나, 고려멸망 후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반역 열전에 실렸다. 결국, 무인 독재자로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한때 그의 권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벼슬 이름이 어마어마하게 길다. 글쎄 최충헌이 이 기다란 관함을 다 외우기나 했을까요?
『벽상삼한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장군상주국병부어사대판사태자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上柱國兵部御史臺判事太子太師)』이었다.
④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柱國/上將軍/監修國史/判禮部事/奇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주국/상장군/감수국사/판예부사/기
☞ 기홍수(奇洪壽, 1148-1209)는 본관이 행주이다. 어려서는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하였으나, 장년이 되어서 무인이 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203년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로 물러났다. 정2품으로 현 장관급 등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
1204년 정월에 최충헌(崔忠獻) 등과 신종에게 희종 선위(禪位)를 논의하였고, 희종 때 이부(吏部)에서 전선(銓選: 인사행정)을 맡았으나, 최충헌에게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음악과 글씨를 즐겼다고 한다.
⑤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判吏部事/崔(草押)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상주국/판이부사/최(초압)
☞ 최선(崔詵, 1138~1209)은 본관은 창원(현 강원도 철원)이다. 태조(太祖) 때의 공신(功臣) 최준옹(崔俊邕)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 최유청(崔惟淸)이다.
1160년(의종 14) 문과에 급제했으며, 1178년(명종 8) 공부낭중(工部郞中)으로서 흥화도(興化道)에 찰방사(察訪使)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다. 정1품(현국무총리급)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
1186년(명종 16) 국자시(國子試)의 시험관을 맡아 양공준(梁公俊) 등 37명을 선발했고, 그 뒤에도 두 차례나 과거의 문과 시험관인 지공거를 담당하였다.
1209년(희종 5) 최선이 죽자 임금이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고려사』는 최선에 대해「최유청전」에서 이렇게 평했다.
『최선은 문학(文學, 학문)으로 세상에 소문이 났다.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했으며, 말수가 적었다. 자기의 문벌을 자부하지 않았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선비를 우대했으며, 두 차례 지공거를 맡으면서 명사(名士)를 많이 얻었다.』
초압(草押)과 결재방식은 당시 수상격인 최선이 직접 붓으로 쓴 수결(서명)을 말합니다.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공문서 내용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그에 대하여 책임진다는 서명(署名, sign)입니다.
당시 홍패 서명에는 5인 재상이 모두 하지 않고 수상격인 최선이 대표로 서명하였습니다. 홍패에 그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 당·송의 칙첩은 서명 부분이 첨서인데 비해 장양수홍패는 수상(최선)이 대표로 단서로 결재했다는 점이 당·송과 결재방식이 다른 점이라고 합니다.
고려 시대에는 관인은 있었지만, 개인의 사인(도장)이 없던 시대라 이같이 중요 문서에는 초압(수결)을 하였네요. 요즈음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도장보다 사인이 흔하게 이용됩니다. 우리 조상들이 수결을 쓴 게 오래되었다고 봐야지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수결, 위키백과사전
당의 관인(중서성지인, 상서병부지인)과 장양수 홍패(중서문하지인) 관인(출처 고려시대 중서문하교첩·심영환)
■ 관인과 종이는?
장량수 교첩에는 관인이 1과(顆)가 찍혀 있습니다. 찍힌 곳은 연호 부분에 걸쳐서 찍혀 있죠. 아쉬운 점은 찍힌 글자가 선명치 않아 판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당송의 칙첩의 영향을 받은 문서라는 점에서 추정을 해 볼수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는 공문서를 작성·완결 후 발급기관인 中書省之印(중서성지인) 또는 尙書兵部之印(상서성지인) 등 사각 도장을 관인으로 찍었다고 합니다. 고려의 경우도 이같이 홍패에 中書門下之印서(문하지인)이라는 관인을 찍을 것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월계서원 국보각 설명서에는 科擧之寶(과거지보)라는 관인을 찍었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홍패에 찍힌 이 관인 또한 미상의 문제입니다.
교첩의 종이도 누런색(黃)이므로 이 역시 중국의 제도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으로 보고 있답니다. 중국에서 수입해서 쓴 황마지라는 종이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지만 당시 중국에서 수입했다면 모르지만, 고려가 독자적으로 생산한 다른 성분의 종이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이 문제는 문서 성분을 엄밀히 과학적으로 분석해보아야만 정확히 알 수 있답니다.
장양수 교첩에 나타난 재상 관함의 글씨체
■ 서체와 문안 작성자는?
장양수 교첩에 나타난 ① 문안을 쓴 사람은 누구이고, ② 서체는 어떤 글씨체인가입니다.
① 고려 시대에는 예부 공원에서 국자감시를 주관하여 과거 합격자에 대한 국왕의 재가를 받고 다시 중서문하성을 경유하여 합격자에게 발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교첩을 작성한 사람은 중서문하성에 소속된 문서관리인 주사(主事), 서령사(書令史), 영사(令史)들입니다. 이들이 장양수 홍패 문안 글씨를 썼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② 홍패의 글씨체는 일관되게 한가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본문은 휘갈겨 쓴듯한 초서로 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뒤에 문서를 처리한 재상들의 관함이 있는 부분은 특이한 글씨체입니다. 마치 인쇄한 것처럼 상하간의 자간이 거의 없이 빽빽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세로획은 힘 있게 내리그어 납작하고, 가로획은 가늘면서 일직선으로 그었습니다. 이런 글씨 모양을 보통 납작 글씨라고 하지요. 그래서 이 서체 방식을 고상한 용어로 병대자편사(並大字扁寫)라고 하네요. 어떤 분은 이 글씨체를 소동파 서체라고도 합니다. 또 전서체라고도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문서관리인들은 과거시험을 치를 때 미리 재상의 관함 부분을 써두었다가 합격자 명단이 나오면 바로 이름과 등급 따위를 써넣을 수 있게 했다고 봅니다.
■ 장양수 홍패와 관련한 내력 하나
울진장씨 집안에서 전해오는 홍패 관련 내력을 소개합니다.
영조때 장양수의 후손 동준(東浚)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백패를 가지고 선조의 사당에 배알하고, 황패(黃牌)를 받들고 가서 글씨와 그림을 본떠서 그리려고 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 1771년(조선 영조 47) 2월에 종손 태항이 꿈속에서 한 도인을 만났는데『보첩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태항(泰恒)이 두려워 잠에서 깨어 곧장 동준의 집으로 가서 황패를 받들고 나와 정명촌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 날밤에 동준의 집에서 큰불이 일어나 사당과 백패가 모두 불에 탔다.
이에 여러 종인들은 『보첩은 천자(임금)의 은총으로 하사한 것으로 600여 년을 전해왔으니 화마라도 이를 태울 수 없는 것이다.』하였다.
공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어찌 후손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그 터를 닦고 빗돌을 깎아 비를 세웠다. (출처 월계서원『국보각』게시현판『장양수의 단향비』에서)
죽변 매정동 소재 장양수 제단
■ 장양수 홍패의 이관설과 전망
오랜 세월 앞에 종이의 지질이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장양수 홍패!
지난 2023년 7월 29일, 울진읍 소재 『울진장씨대종회(회장 장국중)』 회관에서 이사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주요의제는 국보 181호 『장양수홍패』 이관 문제였습니다.
이날 회의에서 현재의 위치에서 다른 곳으로 이관하자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사회의 결론은 홍패를 다른 곳으로 이관, 안전하게 영구적으로 보관·전승하자는 데는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어디에? 이관할 것인가?』입니다. 그 대안으로서 문화재 관련 전문기관에 이관하여 보존하자는 의견과 울진에서 문화재 시설을 마련해 보존, 전승하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다른 의견으로 월계서원은 국보를 품고 있기에 그 위상이 높다. 국보가 월계서원에서 떠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이날 회의에서 제기된 세 가지 의견은 모두 일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필자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이제는 지역 문화재가 중앙집중이나 타 지역기관으로의 유출 또는 이관을 막아야 합니다. 지역에서 출토되거나 생산된 문화유산은 그 지역에서 보존·전시·전승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각 단위 지자체에서 문화유산 관련 시설 건립이나 보존·전승 역량이 미비했을 수도 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국의 각 지자체에서는 자기 지역의 문화유산을 보존·전시·전승을 위해 1군 1개 박물관 건립 등으로 지역 문화유산은 지역에서 관리하는 추세입니다.
울진에는 여러 문화재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국보 181호 『장양수 홍패』와 국보 242호 『봉평신라비』는 울진 문화재의 양날개이자, 문화유산의 상징입니다. 울진군민의 문화적 자존심입니다. 이제 국보 『장양수 홍패』를 길이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 관련 문중과 울진군민, 관계 당국 등이 진지하게 정책적으로 고민할 때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풀뿌리 문화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문화 다양성을 존중하는 길입니다.
800여년의 고려의 숨결이 담긴 장양수 홍패를 울진에서 잘 관리하여 미래 세대들에게 물려줍시다. 울진군은 그만한 역량이 충분히 있으니 긍정적으로 검토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참고문헌>
노명홍 외, 한국고대중세고문서연구(하),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박재우, 고려 국정운영의 체계와 왕권, 신구문화사, 2005.
심영환, 고려시대중서문하교첩, 소와당, 2010.
김용선, 고려,사회, 사람들, 일조각, 2018.
울진군, 울진군지 1권, 울진군지편찬위원회, 2022.
장영태, 성공한 독립운동은 흔적이 없다. (주)멘토르. 2023.
(인터넷)디지털울진문화대전, 위키백과, 한국대백과사전
울진 월계서원 국보각 내 장양수홍패 설명게시판 글
<자료협조 등 도움 말씀을 주신 울진장씨대종회 장국중 회장님, 전울진장씨대종회사무국장 장헌기님, 후손 장영태님, 전울진군의원 장시원님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인터뷰> 울진장씨대종회 장국중 회장
국보181호 장양수홍패 이관설 왜 나오나
● 지금까지 장양수홍패는 어떻게 관리해 왔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이름있는 가문들은 장양수홍패보다 더 오래된 유물들을 갖고 있었지만, 후손들이 관리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전해지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울진장씨의 가문도 여타의 가문들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1738년에 청파공 장만시 어른이 떠돌아다니는 장양수홍패를 보고 이를 안타깝게 여겨 후손들에게 조상의 덕풍유업을 전할 생각으로 그 뜻을 기록하여 홍패에 배접한 후 큰 문중에서 보관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종손과 대종회장에게 전하여 오던 홍패는 장만시의 9대손 장학중이 중심이 되어 대종회의 여러 종인과 함께 노력으로 하여 국보로 지정되면서 지금의 월계서원 국보각에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 대종회에서 왜 이관설이 나오는가요?
유물 관리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진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 상황에서 이를 확인한 국학진흥원의 적극적인 유치 의사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 현 국보각에서 관리의 문제점은?
유물 관리에 대한 방온과 방습 등 국민의 눈높이를 충족하지 못한 시설물의 한계와 두루말이 형태로 보관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이 노출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손들이 찾지 못하는 유물에 대한 반성으로 후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국보가 되었으면 하는 가치에 대한 문제입니다.
● 이관에 따른 대안은?
먼저 울진군에서 관리하고 전시할 수 있는 시설의 건립이며, 둘째는 국학진흥원과 국립박물관에 기탁하는 방안입니다.
● 울진군에 국보 이관 의견을 타진했다는데?
지난 8월 1일에 울진군수와 만남을 통해 대종회의 의견을 전달했으며, 아마도 적극적인 검토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대종회장으로서 하고 싶은 말씀은?
유물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원칙으로 월계서원에서 보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월계서원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국보 관리에 대한 운영비를 감당할 수 없고, 개인 소유로 되어 있는 국보에 대한 국가의 예산 지원이 힘든 현실에서 가장 좋은 관리 방안을 찾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울진장씨 대종회는 월계서원에서 국보 관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먼저 울진군에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울진을 본향으로 1000년의 역사를 품은 울진장씨의 유물을 울진의 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다면 국보가 울진을 떠났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울진군의 국보 관리에 대한 지원 시스템이 열악하다면 국립박물관이나 국학진흥원에 기탁하는 것이 차선일 것입니다.
울진대종회도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800여 년을 지켜온 유물입니다. 개인적으로 울진군 내의 박물관 또는『장양수국보기념관』을 건립하여 국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울진의 후학들이 조상들의 덕풍 유업을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울진장씨대종회 이사들. 울진읍 소재 대종회관. 2023.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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