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제2화 호남(湖南)이 없으면 조선(朝鮮)도 없다

웅치전투의 영웅, 장렬공(壯烈公) 정담(鄭湛) 장군
기사입력 2023.09.0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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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방어진지. 정담 장군은 곰티재 입구로 향하는 지역에 1방어선을 구축하여 황박과 오정달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였다.


왜군이 산 아래로 달아나자 곰티재 골짜기는 조선군의 만세 소리로 뒤덮였다. 

“이겼다… 만세, 만세…, 우리 조선군 만세…”

“만세, 정담 장군님 만세…”

 

처음으로 맛보는 승전의 기쁨에 조선군 병사들은 참호 밖으로 나와 앞다투어 도망가는 왜군을 보며 기쁨에 겨워 두 손을 번쩍 들고 서로 얼싸안고 만세를 외쳤다. 잠시 후 조선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정담이 서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정담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칼을 높이 빼 들고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들으시오. 모두 수고했소. 이 승리는 모두 여러분의 공(功)이오, 우리가 똘똘 뭉쳐 이루어 낸 승리란 말이오. 고맙소. 정말 장하오.”

 

정담은 환하게 웃으면서 주변에 있는 비장과 병사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가며 소리쳤다. 감격에 겨운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곰티재 골짜기에 찌렁찌렁 울려 퍼졌다. 조선군들도 흥분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연신 “정담 장군 만세”를 외치며 호응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다시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느새 반달은 동편에 떠올랐고 땅거미가 빠르게 몰려오고 있었다.

“아직은 끝난 게 아니오. 이제부터 시작이오. 밤이 깊어지면 왜놈들은 틀림없이 다시 공격해 올 것이오. 먼저 부상병들을 치료하시오. 각자 자기 자리로 다시 돌아가서 진지를 보수하고 무기를 점검하시오. 무기와 화살도 골고루 나눠 주시오.”

 

예기치 못한 승리에 잠시 흥분했던 병사들은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리고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가 부상병을 치료하며 방어진지 재구축에 나섰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자 정담은 나주판관 이복남과 의병장 황박을 중심으로 중간 지휘관급 간부들을 불러 모았다. “우선 두 분은 각자의 부대 상황을 점검하시오. 그리고 부대를 재편성하는 게 좋겠소.” 

 

정담은 두 사람에게 자기 부대를 점검하도록 하고 나머지 중견 간부들을 향해 지시했다.

“그대들은 즉시 남은 화살과 장비들은 점검하여 보고하라. 방어진지는 튼튼하게 보수하고 부상자 가운데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자도 파악해서 보고하라.”

“예. 장군.”

 

모여든 간부들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몸에 걸친 옷이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검에 찢긴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정담은 잠시 숨을 고르고 힘주어 말을 이어갔다.

“왜놈들이 버리고 간 조총도 전부 회수해 모아라. 그리고 조총을 다룰 줄 아는 병사를 찾아서 데리고 오너라. 빨리 서둘러라.” 

“예. 장군.”

 

정담의 지시를 받은 장수들은 각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달빛이 내려앉은 계곡은 병사들이 오르내리는 소리로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각각 자기가 맡은 구역에 대한 상황을 파악한 부하 장수들이 다투어 정담 장군이 있는 지휘소로 오르내리며 보고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왜군이 버리고 간 조총도 제법 모아졌으나, 예상대로 화살은 거의 동이 난 상황이었다. 각 진영에서는 조총을 다룰 줄 아는 병사들도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지원군은 물론이요, 군수물자 보급도 기대할 수도 없는 게 아닌가. 왜군이 전주부성으로 가려면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곳이다. 이곳 곰티재를 지키지 못하면 이 자리가 바로 자신의 무덤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더군다나 이미 화살은 거의 동이 난 상황이라 왜군이 다시 공격해 온다면 싸울 무기가 별로 없었다. 

 

정담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면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곰티재를 내주면 전주부성까지는 그야말로 한달음에 갈 수 있다. 저놈들을 막아야 한다. 어떻게 하든 버텨야 한다. 무엇으로 버틸 것인가? 정담은 다시 사람을 보내 이복남과 황박을 불렀다.

 

“우리가 목숨을 다해 이 고개를 반드시 지켜내야 하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버티지 못한다면… ” 정담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두 분은 만약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되면 즉시 몸을 빼서 전주부성으로 가서 관군에 합류하시오.”

“장군.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아니 됩니다.” 

 

이복남과 황박이 황급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정담이 재빨리 그의 말을 끊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명령이오. 그리 해야 하오. 만약을 위해 다음을 기약하는 거요. 내 말 대로 하시오.”

“장군…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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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치전적지 범위. 곰티재 전투의 위치도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정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변에 있던 장졸들이 일제히 정담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몇몇 군사들은 피 묻은 흰 적삼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흐느꼈다.

“울지 마시오. 우리 조선의 운명이 오늘 밤 전투에 달려 있소. 호남이 무너지면 우리 조선의 강산도 없소. 나는 오늘, 이 곰티재에 내 뼈를 묻을 생각이오. 모두 진정하고 각자 자리로 돌아가 전투준비를 하시오. 어둠이 깊어지면 왜놈들은 야습해 올 것이오.”

“예. 장군”

 

이복남과 황박을 비롯한 수하 장수들은 비장한 각오를 다지면서 각자 군사들을 이끌고 진지로 돌아갔다.

 

골짜기에는 잠시 총성과 함성이 멈추고 고요가 찾아왔다. 산 정상 부근 7~8부 능선에는 피 묻은 흰 적삼을 입고 쓰러진 의병과 관군들이 왜군의 시체와 함께 널려 있었다. 


어둠이 내린 골짜기는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간간이 불어오는 밤바람을 타고 진한 피비린내가 콧속을 훑고 지나갔다. 조선 병사들은 대낮에 벌어졌던 전투 상황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한바탕 몸서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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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치전적비, 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와 완주군 소양면 월상리를 잇는 웅치(곰티재)에 세워진 웅치전적비


한여름 숲속의 모기떼는 정말 극성스럽게 달려들면서 병사들을 괴롭혔다. 부지런히 재편성을 마친 조선군들은 참호에 웅크린 채 달려드는 모기떼와 밤이 새도록 씨름했다. 

 

송편 같은 반달이 둥실 떠 있는 밤하늘에는 눈부신 은하수가 펼쳐져 있었다. 군사들은 모두 아무 말 없이 귀를 쫑긋 세우고 산 아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곳곳에 보초를 세워놓고 나머지 군사들은 휴식에 들어갔다. 오후 내내 치열한 격전을 치른 탓에 온몸이 녹초가 된 군사들은 하나둘 금방 고개를 떨구었다. 숲속은 깊은 고요에 휩싸였다. 은하수 사이로 별똥별 몇 개가 연달아 밤하늘을 가르면서 산 너머로 사라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정확하게 4개월이 지난 1592년(선조 25년) 8월 13일(음력 7월 7일), 전북 진안 곰티재의 후텁지근한 여름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왜군은 1592년 5월 22일(음력 4월 13일) 오후에 부산진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조선 침공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 정발(鄭撥)이 분전한 부산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5월 24일(음력 4월 15일) 에는 송상현(宋象賢)이 분전한 동래성을 함락시켰다. 곧이어 양산과 언양 그리고 경주 등을 점령했다. 예상보다 쉽게 북상하자 왜군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밀양과 김해를 공략했다. 두 곳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왜군은 여세를 몰아 1592년 5월 30일(음력 4월 21일)경에는 대구와 울산, 경주 등을 점령했다. 이로써 1주일 만에 경상도의 60여 고을이 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경상우도의 6, 7개 읍만이 겨우 전란을 모면한 상태였다. 

 

이처럼 순식간에 경상도를 짓밟은 왜군은 세 갈래로 나누어 거침없는 형세로 수도 한양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부산진 전투를 시작으로 수도 한양을 함락하기까지 겨우 20일밖에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왜군은 조선의 국토를 난도질하면서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부산진에 왜군이 상륙하여 영남을 도륙하고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급보는 나흘이 지난 5월 26일(음력 4월 17일)에야 조정에 보고되었다. 급보를 받은 조정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왜군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있을 리 없는 상황에서 조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선조는 급하게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조경(趙璥)을 우방어사로 임명하여 급히 영남으로 내려보냈다. 그러나 그 시각에는 이미 영남의 군대가 무너진 뒤였다. 왜군에 대한 정보가 있었더라면 군대를 영남으로 내려보낼 것이 아니라, 마땅히 충청과 수도권 사이의 전략적 지형을 선택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여 왜군의 북상을 막았어야 했다.

 

왜군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고 출전했던 이들은 6월 2일(음력 4월 25일) 상주에서 처음으로 왜군과 마주했다. 그러나 관군은 말로만 듣던 왜군의 조총 앞에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그뿐만 아니라 겁에 질린 관군은 마치 달리기 경주를 하듯 문경을 거쳐 충주로 신속하게 퇴각하고 말았다. 

 

6월 4일(음력 4월 27일)에는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주둔한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의 군대마저 무너지고 충주가 함락되고 말았다. 선조는 4월 29일 충주에서 신립의 부대가 왜군에게 참패하고 그토록 믿었던 신립마저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하고 믿을 수 없었다. 그제야 선조는 상황을 깨닫고 백성들 몰래 도성을 빠져나갈 궁리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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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장군 표준영정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 신립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시 무과의 병과에 급제한 그는 37세가 되던 1583년 함경북도 온성부사로 있을 때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조정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북쪽 변경을 넘나들던 여진족의 행패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진족 우두머리 니탕개(泥湯介)가 대군을 이끌고 변경을 침입해오자, 때마침 현지에 부임한 신립이 관군을 이끌고 이들을 격파함으로써 주목받았다. 그 후 그는 야인 토벌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니탕개의 난은 조선 건국 이래 최대급 외침으로 조선 전국이 준전시 상태에 들어갔을 정도로 그 충격은 엄청났다. 선조실록에 수록된 기사를 보면, 신립의 전투 방식은 그야말로 맹장형으로 뛰어난 무예를 활용한 개인 전술로 적진에 과감히 돌격하여 예상치 못한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남다르게 평가받았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활약으로 으뜸가는 전공을 세웠으니 주변은 물론 조정으로부터의 대접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대 조선 최고의 맹장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당시 신립이 함경도 두만강 유역에서 야인을 소탕하자 조정에서는 포상하기 위해 그를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선조는 그의 공훈을 매우 높게 평가한 것은 물론, 어찌나 감동하였던지 신립이 한양에 도착하자 자신이 직접 신립을 마중하러 몸소 나갔고 심지어는 자기가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서 직접 신립에게 입혀주기까지 했다. 왕으로부터 총애받은 신립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징비록(懲毖錄)』, 『상촌집(象村集)』, 『기재사초(寄齋史草)』, 『난중잡록(亂中雜錄)』, 『계갑일록(癸甲日錄)』 등의 기록에 따르면, 신립의 오만함과 거친 성품에 관한 내용이 많이 실려 있다. 즉, 그가 난폭하고 아랫사람을 함부로 다루어 덕이 없다는 내용이 공통으로 확인된다. 특히 『징비록』에는 류성룡이 신립의 자만심과 거들먹거리는 행동을 못마땅해하면서 그의 패전을 걱정하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실려 있다.


“머지않아 변고가 생기면 공이 마땅히 그 일을 맡아야 할 텐데 공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가 충분하오?” 

 

내 물음에 신립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예전에는 왜적이 창, 칼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과 같은 우수한 병기가 있으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요.” 

신립이 황급히 대답했다.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시 말했다. 

“태평세월이 너무 길었소. 그래서 병사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매우 걱정스럽소.” 

(『징비록』 중에서)


마침내 신립이 선조로부터 조선 최고의 명검이자 임금의 권한을 상징하는 상방검(尙方劍)을 하사받고 삼도순변사(三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왜군을 소탕하러 나섰다는 소식이 저잣거리에 전해지자 백성들은 길거리로 나와 환호성을 질렀다. 

 

신립은 의기양양하게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기병을 다루는 능력과 왕성한 돌격 정신은 최고의 기병대장이자 돌격대장, 용장으로서의 능력은 있었지만, 한 나라의 군 전체를 이끌고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자질은 없었다. 신립의 지휘 능력 문제는 충주 탄금대 전투 문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조선 최고의 장수 신립의 군대가 어이없이 무너지면서 사방에서 급보는 쉬지 않고 속속 올라왔다. 그런 와중에 왜군이 용인과 수원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급보를 받은 선조는 이튿날 6월 7일(음력 4월 30일) 아침에 부랴부랴 궁궐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를 실은 어가(御駕)가 임진강을 건너 개성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선조는 잠시 한숨을 돌리려고 했지만, 왜군의 진격 속도는 조선 지도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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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충혼탑. 신립은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전력과 무기의 열세, 전략적 판단 부족으로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이곳에서 옥쇄하고 말았다.

 

수원과 용인을 점령한 왜군이 6월 9일(음력 5월 2일) 광나루와 마전, 사평 그리고 동작나루를 건너면서 한강 방어선이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졌다. 마침내 이튿날 왜군이 관군의 저항 없이 한양에 무혈입성하면서 도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어서 6월 12일(음력 5월 5일)에는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군사를 나누어 북진을 시작했다. 가토는 동쪽으로 강원도를 지나 함경도로 향하였고, 고니시는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이양원(李陽元)이 이끄는 군대가 한때 양주 해유령에서 왜군을 포위 섬멸하는 승전보가 전해지기는 했으나 금방 무너졌고, 6월 25일(음력 5월 18일)에는 김명원(金命元) 등이 지키던 임진강 방어선마저 무너지면서 6월 27일(음력 5월 20일)에는 왜군이 임진강을 건넜다. 

 

선조는 평양에 도착하여 대신들과 평양 사수를 위한 방책을 논의하다가, 왜군이 임진강을 건너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혼비백산했다. 7월 19일(음력 6월 11일) 날이 밝자, 선조는 급히 행장을 꾸려 평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보름 후인 8월 3일(음력 6월 26일)에는 마침내 압록강 변의 의주에 이르렀다.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쳤으나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평양마저 왜군의 손에 떨어졌다는 보고를 받고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도망가겠다고 떼를 썼다. 강을 건너면 안 된다는 조정 대신들과 사직이 우선이니 명나라로 가서 원군을 청하겠다고 떼를 쓰는 선조 사이에 밀고 당기는 지루한 말싸움 대치가 이어졌다.

 

왜군은 7월 22일(음력 6월 14일) 대동강 왕성탄을 건너 관군이 도망가고 텅 빈 평양성에 무저항으로 입성하였다. 이에 따라 6월 말이 되면서 조선의 7도가 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제 조선은 오직 이순신이 지키고 있는 전라도만 남았다. 그야말로 역사상 민족 최대의 위기가 현실로 다가왔다.

 

한편, 수도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전쟁이 장기화하는 조짐을 보이자, 1592년 6월 15일(음력 5월 8일)경 임진강에서 작전 회의를 갖고 조선을 남북으로 나누어 분할 통치한다는 전략으로 수정하였다. 

 

이에 따라 왜군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전라도를 점령하는 것으로 정리하고 5월 중순부터 전라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동안 북으로만 진격하던 왜군이 조선을 분할 점령하겠다는 이른바 분지지계(分地之計)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전라도 점령의 임무를 부여받은 고바야카와는 왜군 육군의 제6진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임진강 전투까지 참여한 뒤 전라도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7월 2일(음력 5월 25일) 임진강에서 남하하여 전라도로 향하였다. 

 

그는 충주를 거쳐 조령을 넘어 7월 17일(음력 6월 9일) 선산에 도착하였다. 선산에서 제7군 대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만나 부대를 정비한 후, 김천에서 추풍령을 넘어 충북으로 들어가 황간을 지나 영동과 양산, 순양을 거쳐 무주와 금산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전라도로 가는 최단 코스를 택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공한 왜군 장수(倭將)라고 하면 우리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 등은 잘 알지만, 모리 데루토모(毛利輝元)가 가장 많은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조슈 번(長州藩, 오늘날 야마구치현)의 다이묘(藩主)였던 그는, 사쓰마 번(薩摩藩, 오늘날 가고시마현)의 다이묘였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를 도와 일본열도의 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이 공적으로 히데요시 수하의 다이묘 가운데 최대의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모리와 시마즈 등 두 장수의 행적은 고위급 왜장(倭將) 5명에 포함될 정도로 중요 인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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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군수 권종 추모 제향. 금산향교는 권종 군수의 우국충정을 기리고자 매년 음력 6월 22일 금산군 제원면에 있는‘권 충민공 순절비’에서 추모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사신은 제430주기 추모제에서 초헌관으로 봉행하고 있는 박범인 금산군수. 모리 데루토모의 왜군은 충청도 황간(黃澗)과 순양(順陽)을 거쳐 7월 27일(음력 6월 19일) 무렵에는 전라도 무주(茂朱), 7월 30일(음력 6월 22일) 무렵에는 금산 제원(濟源)으로 쳐들어왔다. 

 

당시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막료로 있던 이로(李魯)가 쓴 『용사일기(龍蛇日記)』 임진년 7월 30일(음력 6월 22일) 자에 실린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의 장계에 의하면 ‘7월 30일(음력 6월 22일), 그 수를 알 수 없는 적의 무리가 황간으로부터 순양역 근처 민가를 노략질하고 불사른 후 사방에 흩어져 있던 왜군의 진(陣)을 한 데 모았다.’라고 실려 있다. 이 기록에 실린 알 수 없는 적의 무리는 바로 모리 가문의 명장으로 알려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부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7월 30일(음력 6월 22일), 고바야카와 부대가 금산을 공략해오자, 금산군수 권종(權棕)이 급히 군사들을 모아 제원(濟原)의 저곡성에서 이들을 막아섰다. 전라도로 들어서는 관문에서 조선의 관군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고작 수백 명의 관군으로 왜군의 대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조선의 관군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무기도 보잘것 없었다. 금산군수 권종은 저곡성에서 군사들과 함께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권종의 관군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접한 방어사 곽영(郭嶸)과 김종례(金宗禮)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군사를 이끌고 고산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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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렬사

 

다음날 7월 31일(음력 6월 23일), 금산성이 별다른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왜군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왜군이 금산을 함락시키고 용담, 진안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주부성을 지키는 관군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전라감사 이광(李洸)은 광주목사 권율(權慄)을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삼고 영남과 호남의 경계를 지키게 했다. 그리고 호남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전략적 지역으로 진안의 곰티재(熊峙)와 금산의 이치(梨峙)를 방어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금산에서 퇴각한 방어사 곽영, 동복현감 황진(黃進), 나주판관 이복남 그리고 김제군수 정담(鄭湛)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이때 진안 곰티재의 방어는 김제군수 정담을 대장으로 하고 동복현감 황진, 나주판관 이복남 등이 그를 도와 방어할 것을 지시했다. 명령을 하달받은 김제군수 정담은 지체없이 현장으로 이동하여 황진, 이복남과 함께 웅치의 지세를 정밀하게 분석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군사들을 3개 부대로 재편하고 3개소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등 왜군의 공격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이제 왜군의 전라도 공략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왜군의 대군이 금산을 점령하고 용담을 지나 진안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곰티재의 정담 장군 진영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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