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다.

울진사람 원병상, 피맺힌 통한의 회고록 나와
기사입력 2023.11.23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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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2015년에 개봉된 영화 제목이다. 배경은 1933년, 무대는 경성, 주제는 일제의 주요 요인과 친일파 척결을 위해 경성에 잠입한 암살단인 여자독립군 저격수(안옥윤), 폭파 담당(황덕삼), 속사포(추상옥)로 이름한 항일독립투사 3인의 활약상을 그렸다. 최동훈 감독작품이다.

이외에도 이중 첩자 염석진, 암살단을 뒤쫓는 하와이 피스톨과 영감, 부와 출세와 일신의 영달만을 위한 친일파 강인국, 그의 딸 미츠코(안옥윤과 자매) 등이 등장한다. 

 

『암살』은 1,300만 관객을 동원할 만큼 흥행에 성공한 영화로 필자도 관람한 바 있다. 아직도 영화 속 주인공들이 남긴 의미심장한 대사 몇! 기억에 남는다. 


『제 임무가 뭡니까?』

『독립운동도 배가 불러야 하는거지』

『명은 짧아도 역사에 이름은 남겨야 되지 않갔네!』

『내래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야!』

『16년 전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등이다.

이 가운데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던 

『내래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야!』


주인공 속사포가 했던 이 한마디가 단연 명대사였다. 그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속사포 배역은 배우『조진웅』이었다.

더군다나 2015년은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한 지 70년이 되던 해였다.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잊혀가는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끈 영화였다. 더구나『암살』개봉 이후 이름도 낯선『신흥무관학교』에 대한 관심도가 부쩍 높아졌다. 속사포 배역을 맡은 배우 조진웅은 이런 계기로『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의 홍보대사가 되었다고 한다. 


먼저 이 글머리를 영화 이야기로 시작했다. 필자가 원병상(1895-1973년) 회고록을 소개하고자 하는 까닭은 그가 울진 온정 태생의 사람이고 약관의 나이에 만주 서간도에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힘쓴 공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회고록의 구성과 그 대강만을 소개하고 당시 울진인의 만주 이주 관련 지역사적 이야기 등을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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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만주 길림성 일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신흥무관학교 생생한 기록 출간되다

신흥무관학교!

조선국권을 회복하고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조선 청년의 피 끓는 무장투쟁의 독립군을 기르던 요람지였다. 


최근『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는 일제강점기 만주 서간도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와 관련하여 의미 있는 책을 출간했다. 바로『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 회고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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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학우보 표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원병상 회고록!』 

원병상은 당시 강원도(현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녹정동 출신이다. 이 회고록은 그의 일가가 1911년 8월 고향인 온정 녹정동을 떠나 만주로 이주하여 겪은 온갖 일과 해방 후 1946년 8월 서울로 돌아와 6.25 한국 전쟁 등을 거치면서 겪은 50여 간의 생생한 삶의 기록이다. 

 

1911년 이역만리 낯설고 물선 만주 생활 체험과 눈물겨운 가족사, 신흥무관학교 경영과 고난의 역사, 해방과 한국 전쟁 등을 거친 파란만장한 그의 삶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하면 비록 사건 중심으로 기록했지만, 원병상 선생의 평생 일대기라 할 수 있겠다. 

이 회고록을 읽어보노라면 어떤 장면은 가슴 찡하게 다가오고, 어떤 장면은 눈시울 붉히게 한다. 원병상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그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동북아지역인 만주라는 곳이 어떤 곳인가? 세계열강의 세력다툼이 치열한 곳이었다. 일부는 중국 군벌이 차지하였고, 동쪽으로는 일제가 관동군을 배치해 식민화시키고, 또, 러시아가 철도를 개설해 동쪽으로 진출하던 시기이었다. 

 

또한, 만주는 우리에게 익숙한 서간도 북간도라 칭하던 곳으로 식민과 미개척의 공간이었다. 만주로 이주 간 사람들은 지금까지 수백 년을 살던 정든 고향을 버리고, 낯설고 물선 공간에서 새로운 정착지를 마련해야 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뿌리뽑힌 조선 사람들의 설움은 그 무엇에 비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원병상 가족들은 이를 극복하고 민족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삶의 궤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울진과 평해지역에서 만주로 이주한 울진 사람들의 일부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원병상 회고록에 등장하는 신흥무관학교는 울진 지역 독립운동과도 연결되는 고리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신민회의 국외독립기지 건설에 참여한 울진의 독립운동가인 주진수, 황만영, 장식 등의 참여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식민지 치하에서 한 인간이, 한 가족이, 한 민족이, 인간답게 온전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항일독립투쟁은 나라다운 나라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우리 민족의 치열한 몸부림이었다. 우리는 원병상 선생의 회고록을 통해 이를 생생하게 느끼고 알 수 있다. 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결과 오늘 대한민국 발전의 노둣돌이 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윤경로, 이종찬, 원건희 서문

이번 회고록이 가지는 신흥무관학교 관련 1차 사료로써 그 중요성을 다음 세 분의 축하글에서 알 수 있다.

윤경로 선생(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은 책을 펴내는 인사말에서『독립운동과 한국전쟁에 관한 소중한 기록이다. 원병상 선생이야말로 신흥무관학교가 역사에 남을 수 있도록 결정적인 공헌을 한 숨은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당신의『조부 이회영 여섯 형제가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한 깊은 인연을 이야기하면서(중략) 이 회고록은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역사만이 아니라, 동포들의 눈물겨운 이주와 정착 과정, 경신참변, 친일파의 횡포, 만보산 사건, 대도회 사건,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의 만주 진입 등 시대상을 세세히 묘사하고 있어 앞으로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독립운동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결정적인 역사자료가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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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경 가족 사진(강릉에서. 아랫줄 왼쪽이 원병상 선생, 

뒷줄 가운데가 친인척인 원용수씨. 현 대구 거주).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원병상 선생의 손자 원건희씨는 감사 말씀에서 조부인 원병상 선생의 육필 회고록 등을 보훈 관련 기관에 찾아가 문의했지만, 그곳에서는 후손에게 선대의 모든 행적에 대해 증명할 수 없다고 했다. 역사와 옛 자료에 능통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 답답한 마음에 여기저기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무위였다고 한다. 그래서 찾은 곳이『민족문제연구소』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알게 된 것이 민족문제연구소였다. 연구소의 구성원들은 할아버지의 오래된 책을 들고 찾아온 나를 아무 사심도 없이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이것이 이 책이 나오게 된 계기이다.』라고 하면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와 민죽문제연구소에 감사함을 표했다. 


그는 또『비장함을 품고 만주로 향하는 첫발을 뗀 지 112년이 지난 이제서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무대로 올린다.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라고 하면서 일관된 삶을 살아오신 할아버지와 민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수많은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무한한 존경과 감사함을 전했다. 


  원병상 선생은 어떤 분인가

회고록에 따르면 원병상(1895-1973, 元秉常, 본명, 元義常) 선생은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났던 그해, 1895년 8월 5일, 강원도 울진군 온정면 금천리 외가(현 울진군 온정면 금천리)에서 태어나고, 녹정동(현 온정면 소태 1리)에서 자라났다. 

1911년 아버지 원세형이 일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할 때 그는 17살로 결혼 2년 차의 야심 찬 젊은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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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병상 선조 원빈이 18세기 처음 입향한 현 평해읍 화구마을(현 월송1리)  

 

그는 36여 년간 만주 일대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5월 서울로 돌아와 원효로에 정착하였다. 


해방 후 1947년 이시영이 주도한 신흥무관학교 후신 신흥대학 설립에 참여했다. 신흥대학은 현 경희대학교의 전신이다. 

1948년에 54세의 늦은 나이에 육군사관학교 제8기 특별 2반에 편입, 군사 간부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했다. 6.25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1953년 7월에는 대민사업에 투입되어 고향 울진군에 읍민관을 신설하였다고 한다. 이 읍민관은 어떤 건물을 건립한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미상이다. 

원병상 선생은 1956년 계급정년으로 대령으로 전역했다. 그는 1973년 1월 1일 79세로 서울 자택에서 별세했다. 후손들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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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병상 선생의 친인척인 원용덕씨(좌, 온정 녹정동 거주)와 필자, 2023. 9. 1. 온정에서

 

한편 그가 태어나고 청년 시절을 보냈던 고향 울진 온정에는 당시 그의 일가친척은 거의 세상을 떠났다. 현재 고향 온정 녹정동에는 친인척인 원용덕(69, 전 울진재향군인회 사무국장)씨가 거주하고 있다. 녹정동은 백암온천을 지나 영양 주령으로 넘어가는 국도 88호 도로 서남쪽에 있는 자연부락이다. 

 

지난 9월 1일 원용덕씨를 온정의 한 커피점에서 만났다. 그는 원씨 가계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필자가 원병상씨를 알고 있느냐 묻자, 자세한 것은 잘 모른다고 했으나 그는 원병상 선생을 원의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원병상 선생을 1970년경, 15세 무렵, 평해 뒷산에 선조들의 비석을 세울 때 한번 얼굴을 뵌 적이 있고, 자기한테는 집안의 아저씨뻘이 된다고 했다. 그간 원 선생의 직계 후손들과는 지금까지 연락 없이 지냈다고 하였다. 


울진에는 원씨 일가가 거의 도시로 나가고, 자기밖에 없다고 한다. 온정 금천이 원병상 선생의 외가 곳이라고 일러주었다. 일정때 녹정동 원씨 일가는 거의 만주로 이주했는데 왜 여기에 남았느냐고 했더니『자기 부친이 약간 장애가 있어서 아마 만주로 이주하기에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고도 했다. 


그는 녹정동의 유래(전설)에 대해 말해 주었다. 녹정동 앞 골짜기 시내는 백암산 중턱 바위틈에서 나오는 샘물(우물)이 나오는데 쌀도 함께 솟아 나왔다고 한다. 어느 욕심쟁이가 더 많은 쌀이 나오라고 구멍을 뚫은 이후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는 전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녹정동이라고 이름했다고 한다. 


한편 원용덕씨는 마을 골짜기 바로 앞이 백암산으로 오르는 길인데 지금은 백암온천 관광호텔 등 상가가 들어서 있는 남쪽으로 등산로가 개설되었다고 덧붙여 이야기해주었다. 

원용덕씨는 원병상 선생의 생가터를 안내해 주었다. 그의 생가터는 현재 소태1리 녹정동 경로당(소태1리 1292번지)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회고록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나

이번 회고록은『민족문제연구소』와『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주도하여 펴냈다. 

원병상이 남긴 기록에는 이미 세상에 나온 수기 두 편이 있다. 이 수기는『광복의 증언-만주 독립군 활동』이라는 제목으로 1969년 신동아 6월호에 연재물로 발표되었다. 

또 하나는『원병상 수기』라는 제목으로 독립운동자료집『제10집』에 수록되어 있다. 앞엣것을『신동아본』, 뒤엣것을『자료집본』이라고 한다. 이번 회고록은 2023년 8월에『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회고록』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지은이 원병상, 엮은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펴낸이 방학진, 펴낸 곳은 민연주식회사이다. 정가는 40,000원이다.


이 회고록은 그가 직접 원고를 필기구로 꼼꼼히 작성하여 그 사본을 후손에게 남겨 두었다. 200자 원고지가 아닌 모 기관의 이름이 인쇄된 용지에 그야말로 깨알같이 국한문 혼용체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후손인 친손자 원건희(서울 거주) 씨가 2014년『민족문제연구소』를 방문해 직접 조부의 회고록 사본을 기증하면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이 회고록 사본의 내용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두 편의 수기에서 다 못 쓴 기록을 메우는 것으로 보인다. 

이 수기와 회고록은 1951년 10월부터 쓰기 시작해 1967년 12월에 마치고 이루 1972년 이력서를 추가할 때까지 쓴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학계의 비상한 관심, 원병상 회고록

회고록이 학계의 관심을 끄는 까닭은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지금까지 1차 사료인『신흥교우단』의 기관지인 신흥교우보(1913),『신흥학우단』의 기관지인 신흥학우보(1915) 밖에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원병상 선생은 재학 중 신흥학우단의 서기와 총무부장을 맡았고,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여 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러하기에 지금까지 발굴된 어떤 자료보다 더욱 생생하여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학계의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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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병상 선생의 선조가 두번째 이주한 설바우 마을(현 온정면 덕인2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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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병상 선생의 고향 온정 녹정동(온정면 소태1리)

 

회고록은 크게 3장으로 되어 있다. 각 장마다 사건을 체험 별로 나누어 구성하여 기술했다. 마지막 부록으로 신흥무관학교 원병상 수기 2편이 실려있다. 이 글에서는 자세히 언급은 하지 않고 주제별 제목만 소개하는 것으로 하겠다. 


제1장 고향의 장(1895∼1911)

제1장은 출생부터 만주 망명 직전까지를 기록했다. 고향인 원주의 유래, 선조의 유적, 고향의 위치와 전설, 어린 시절, 경술국치의 비분, 고향을 떠나게 된 동기 등 12가지 주제를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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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망명 경로

 

『고향의 장』에서는 집안 가계를 기술한바 여기에 언급한다. 

 

그의 본관은 원주원씨로서 대대로 원주에서 살다가 18대손 할아버지 원빈이 1771년 연잉군(영조)의 왕세제 책봉을 둘러싼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은둔하고자 처음 정착한 곳이 강원도 평해군 화구리였다. (현 울진군 평해읍 월송 1리 화구동) 그 후 또다시 현 온정면 덕인리 설바우(일명 한송동, 서리바위)골로 이전했다. 거기서 살다가 원병상 선생 증조부 대에서는 삼 형제분 중 둘째만 데리고 온정면 녹정동(소태1리) 이주한 것으로 되어있다. 설바우골은 덕인1리이다. 후포에서 서쪽으로 저수지 도로 따라 올라가면 골짝 동네인 설바우골이 나온다. 마을 들머리에 타원형 돌비석에 풍양조씨 세거지라는 표지석이 나온다. 이 마을 너머로 가면 덕인 2리, 백암온천, 금천, 조금 쪽으로 가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원세형 일가는 1911년 8월 18일 가족(13명)과 고모댁(5명) 등 18명이 망명길에 올랐다. 이들은 온정에서 주령을 넘어 영양·예안(안동댐 수몰됨)·안동·예천·점촌·김천까지 도보로 남부여대하여 길을 떠났다. 김천·대전·경성(서울)·평양·신의주까지는 기차로 이동했다. 신의주에서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 압록강을 배편으로 건너 안동(현 중국 단둥)에 도착했다.

 

안동·콴덴현·황도천·통화현 북구까지는 도보로 갔다. 그들은 이정수의 집을 빌려 임시로 거주했다. 1911년 10월 말경이었다. 여기 통화현 북구까지 오는데 2개월여가 걸린 것으로 추정된다.

 

원주 원씨가 평해에 정착해서 다시 만주로 이주할 때까지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시조(원주) → 은둔 낙향, 평해 화구(1771년) → 온정설바우(덕인1리) → 온정 녹정동(소태1리) → 민주 통화현 이주(1911년) → 원병상 일가 한국 서울(1946년)


<고국땅 슬픈 여정>이란 글에서 그는 다음과 기술하고 있다.

 

『이제는 북으로 북으로 향해 가야만 한다. 1보 1보, 1일 또 1일이 지나가는 사이 경북 김천역까지 도보로 도착하자 이곳에서 고향 방면으로부터 떠나오는 십여 호 가호를 서로 만나 일행이 되어 이 역에서 비로소 기차를 타고 이 나라 수도 서울을 지나올 때 병자호란 뒤 고국을 작별한 김상헌 시의 연상에는 그 애달픈 심정, 동정이 간다. (중략) 원통하게도 가기 싫은 길이건마는 달리는 기차는 서러운 사정 모르는 채 달리고 또 달려 벌써 조국의 변역인 신의주역에 도착이란 기적 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중략) 이 신의주는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압록강 푸른 물이 길게 흘러 이웃 나라의 경계선으로 그으진 이강을 건너려고 강 둔덕으로 나아가니 이때 압록강 철교는 아직 공사 중이라 내왕하는 풍선(風船, 돛단배) 한 척을 불러 타고 눈물의 금수강산을 돌아보며 쓸쓸하고도 캄캄한 이역 땅에 올라서니 곡 중국 영토인 남만주 초입 도시인 안둥현이었다.』서기 1911년 신해 고력 9월 초순  


제2장 황야의 장(1911. 9∼1946)

제2장은 주로 만주 이주 후 생활 체험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고향을 떠나 서간도로 가는 여정, 중국인의 착취와 이주 동포들의 고난과 애환, 신흥무관학교 입학과 졸업, 만보산 사건, 교관 활동, 가족의 비애, 왜적의 대참살만행(경신참변), 1922년 이후의 소학교에 종사했던 일, 만주농업의 전환기(만주동포의 벼농사 시작:필자 주), 만주 대도회의 동란과 가족 수난사, 해방경축대회의 경축사 중국공산당의 만주장악 등 53가지 주제를 기술하였다.


<정사년 액운과 이역 제3거지(第三居地) 태평구(太平溝)>란 글은 원병상 일가가 겪은 고난에 찬 눈물의 이야기다. 원병상 일가의 피눈물의 고난은 비단 개인의 고난이 아니라 만주에 망명한 조선 동포들의 고난이기도 했다.


1917년 부친이 원세형이 피눈물로 개간한 논을 지주에게 반환하고, 약간의 여비를 만들어 세 번째 이주를 하는 장면이다. 

당시 노환인 조모와 산달이 가까워진 어머니가 험산을 넘는 여정에서 어떤 중국인 집에 들러 사산하고 말았다. 집주인이 알면 트집이 잡힐까 봐 도중에 아이를 어느 산비탈에 묻어버리고 길을 떠나는 그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앞부분 생략) 창공에 밝은 초순 달은 수심 속에 헤매는 인생길을 유난히 비쳐주는 듯 밤은 점점 깊어 오는 적막한 산골짝 좁은 오솔길에 바삭거리는 잔설을 밟으며 우리 세 모자만이 황황히 걷고 있는 한 많은 그날 저녁 그 산길 피눈물로 적시면서 또 멀지 않은 곳에 만인 여관을 찾아들어 하룻밤을 지냈다. 그 익일 아침 또 앞길을 향할 때 그날 그때부터 산후 조양은 커녕 행역은 재하지도(在下之道)에 너무나 마음 졸이고 안타깝던 중에도 오도구 재를 넘을 무렵 하느님도 무심하게 갑자기 천기가 음산하여지면서 폭풍한설이 가는 앞길을 둘러쳐 지척불변(咫尺不辨)이었다. 이 모진 설풍 속에 무인지경 적막한 잿길에 어머님을 업어야 했고 모자가 서로 붙들고 흐느껴 울어야 했다.(이하 생략)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다. 해방을 맞이한 교민회는 경축대회를 열었다. 여기에 원병상 선생이 지명되어 연설을 하게 되었다. 해방이 되었으니 새나라 건설에 매진하자는 짧지만 힘차고 새 희망을 주는 연설로 모인 대중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다음은 <해방경축대회 경축사>이다.


『정의는 필승이다. 우리 앞에는 해방이 오고야 말았다. 오천 년 유구한 역사를 가진 배달민족이 왜족의 노예가 되어 왔다는 것은 천추의 치욕이며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적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 죄악의 결과였다. 이제는 해방이 되었으니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뭉치어 자손만대 새 나라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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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경로 

 

제3장 환국의 장(1946. 5∼1967)

제3장에서는 만주에서 서울로 오기까지의 고단한 여정, 해방 직후의 각계동향, 신흥대학을 신흥학우단도 부활, 해방 조국 창군에 참여, 사관후보생이 되어, 육사 8기생으로 임관, 전지 옹진에서, 6.25의 전야, 전투 중의 소감, 초연이 잠긴 춘천에서, 40년만 고향마을 찾아 등 24가지 주제를 기술하였다.


그가 36년간의 만주 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귀국한 것은 감격의 해방을 맞이한 다음 해였다. 

정세를 관망하던 그는 1946년 4월 5일 조선으로 들어갈 목적으로 첫째 아들과 함께 거주지인 만주 산성진을 떠나 피신하였다. 

이후 류하현, 유수하자를 거쳐 퉁화현에 도착, 화물 무개차를 타고 지안현으로 와서 압록강을 건넜다고 한다. 곧 뒤따라 피신해  온 아내와 아이들을 만났다. 평양·해주 피난 수용소를 거쳐 38선을 넘은 후 개성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했다. 그때가 1946년 8월이었다. 그가 귀환한 경로는 다음과 같다.


만주 하이롱현 산성진·류허헌·퉁화현(여기까지는 도보로, 이후는 철도로)·지안현·만포진·희천·순천·평양(평양수용소)·중화·황주·사리원·해주학현역(해주수용소, 해주에서 청단역까지는 도보로 이후는 철도로)·청단역·토성역·서울역을 거쳤다.

당시는 38선이 완전 봉쇄되기 전이라 자유롭게 교통과 민간인 등이 왕래하였다. 

원병상 선생은 6.25 한국 전쟁 중 육군 장교로 1951년 평해면 증명검사를 기하여 공무수행차 잠시 인접 면인 고향 온정에 들렀던 모양이다. 고향을 떠난 지 40만의 감개무량한 소감을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


『(앞부분 생략) 백암산 아래 한 개의 좁은 골짝, 내가 어릴 때 살던 집터도, 다니던 길도, 마시던 우물도, 이웃 남씨 댁에서 글 배우던 방도, 글 쓰던 자리도, 그늘 밑에서 글 짓고, 글 읽던 감나무도 다 옛 모양 그대로 남아 있다. 


자고로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하였지만, 40년이 지났지만 산천은 의구하다. 옛날 코 흘리며 동학하던 학우들도 어느 사이 반백이 된 늙은이가 되어 감개무량으로 대하여 준다. 종제 중상 군의 집을 찾아 잠깐 쉬어가지고 선조의 선영으로 올라가 묘전에서 옛날을 회고하며 삼가배알을 마쳤다. (중략) 

다시 촌락으로 돌아와 40년 전 이곳을 떠날 때 13명의 가족이 황혼을 헤치며 새벽 아침이 골목길을 나갔건만 오늘날은 모두 구천으로 불귀의 이역고혼이 되시고 나 한 몸만이 살아 돌아와 고향 마을을 찾아 밟게 되는 심정 비절통절한 감회 금할 길 업었다. (중략) 또다시 차를 돌려 금천리로 달려갔다. 이 금천리는 나의 외가가 살고 있는 곳이며 아직 외삼촌이 고령으로 앉아 계신다. 


어머님을 만나보는 심정으로 발걸음은 한층 더 빨랐다. 옛날 외조모님의 사랑하는 품 안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도망치던 논으실 모래밭 길도 외조모님의 손목 잡고 진티재 산비탈에서 패랭이꽃 꺾어달라고 조르던 기억도 의희하게(흐릿하게) 남아 있다. 반가이 외삼촌을 만나 뵈옵는 순간 서로 슬픈 눈물이 앞을 가리었다. 


뒷산으로 올라가 외조부모님 묘소를 찾아 긴 한숨으로 참배를 마치고 이모저모 옛 모습을 찾아보았다.

나의 태생 건물과 외조모님의 품 안에 안기어 자던 방이 아직도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감개무량이야 무엇에 비할 수 있으랴! (이하 생략)』

 

  1910년대 만주로 망명 간 울진 사람들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고, 무단통치가 시작된 1910년 이후 국내의 국권 회복 운동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애국계몽운동』으로 국권 회복을 꾀하던 중심 세력이『신민회』였다. 이들 중 일부 인사들은 장기적으로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게 바로 국외독립 기지건설이다.

여기에 적극 동참하고 솔선한 인물들은 안동의 혁신 유림 계열인 우당 이회영 여섯 형제 일가. 석주 이상룡 일가, 김동삼·김대락 일가 등이었다. 이들 일가를 따라 안동지역 등지에서 1,000명이나 만주로 이주했다고 한다. 


당시 울진 지역에서도 신민회의 중심에는 주진수와 황만영, 장식 등이 있었다. 주진수와 황만영은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만흥학교와 대흥학교를 세웠다. 이는 장기적으로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충정의 발로였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과 운영난으로 1년여 만에 학교는 폐교되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이후 매화의 3.1운동에도 투신했다. 또한 만흥학교 출신 중 일부는 주진수 선생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항일무장투쟁에 몸 바친 이도 있었다.


따라서 1910년대 울진에서 만주로 망명한 대표적 사례는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① 원세형 일가, ② 황만영 일가, ③ 주진수 일가, ④ 이희영 일가 ⑤ 만흥학교 졸업생 등이 있었다. 이들 백수십 명이 만주 서간도로 이주했다.


①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울진 남쪽의 온정면 녹정동(현 온정면 소태1리)의 원세형(원병상 아버지)의 친인척인 원세찬(元世燦)·원세우(元世遇)·원세명(元世明)·원세우(元世佑)의 집안 사촌 형제들은 후에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외 남충호(南忠鎬)와 윤성렬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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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병상회고록 육필 사본 일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당시 원세형 일가는 만주 이주를 가기 전 온정 백암산 일대인 녹정동에서 거주했다. 그런데 이들 일가가 왜 만주로 이주했을까? 이를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첫째 1900년 초는 전기의병인 신돌석 부대가 온정의 백암산, 울진의 불영사 등을 중심으로 동해안 일대에서 항일의병으로 활동하던 시기였다. 녹정동은 동쪽으로는 평해, 서쪽으로는 영양, 북쪽으로 백암산, 금장산 등지의 협곡 통로를 이용해서 금강송면 일대, 울진, 죽변, 삼척 등지의 동해안으로 북상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당시 수시로 출몰하는 신돌석 부대 의병을 지지, 지원하면서 그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 않았나 추정해 볼 수 있겠다.


둘째 원병상 회고록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원세형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망국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호를 치헌(恥軒)으로 바꾸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왜국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결의로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망명을 결심했다고 하는 점이다. 

 

셋째『동향인 주진수, 황만영 두 선생의 항일사상에 호응하여 당시 신민회에서 선정한 독립기지 서간도로 떠나실 것을 결심하고 비장한 결의로 항일투쟁 대열에 낙후되지 않을 것을 거듭 다짐하였다.』는 점이다. 이를 보아 원세형 선생이 주진수, 황만영과는 직접 교류는 확인되지 않으나, 직간접의 영향을 받았음에는 틀림이 없다. 따라서 원세형 일가의 만주 망명의 분명한 대의명분은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독립투쟁이었다.


② 기성 사동의 평해황씨 황만영 일가는 안동의 의성김씨인 김대락, 고성이씨인 이상룡 등의 집안과 학맥, 혼맥 등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해월종택의 현 후손 황의석 선생(86세, 현 기성 사동1리 거주)의 증언에 따르면『황만영 할아버지는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만주 서간도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종손 황의석 선생은 만주 서간도로 이주해간 황씨 일가의 명단을 다음과 같이 확인해 주었다.

황만영(황병일의 삼촌), 황병일(차종손, 안동 김대락의 사위), 황경팔, 황보영, 황도영, 황득영, 황무영, 황병로, 황병문, 황병우, 황병일, 황병탕, 황신걸, 황용기, 황응팔, 황의영, 황익영, 황호 등이다. 이들 이름은 원병상회고록에 나오는 신흥무관학교 졸업명단에도 언급되어 있다.


③ 울진 죽변 매정의 주진수 일가이다. 주진수가 세운 매화의 만흥학교 졸업생들이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그의 제자인 장식 선생이 대표적이다. 이후 장식은 국외 독립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황만영, 영양의 조훈석 등과 긴밀히 연결되어 울진에서 은밀히 독립군자금 모금 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가 울진 이상촌비사사건 이다.


④ 만흥학교 졸업생들 일부이다. 이는 주진수의 영향으로 보인다.『(중략) 주진수가 설립한 『만흥학교』의 졸업생 곽종욱, 주대근, 진규환,황의영, 황진환, 윤인보, 장식, 황병문, 전오규, 주병웅, 남재수, 윤병헌, 주병륜 등이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⑤ 평해 직산의 경주 이씨 이희영 일가이다. 이희영의 아들 이규동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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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병상회고록 육필 사본 일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한편 원병상회고록 <부록>에는 80노령의 기억을 더듬어 ‘신흥’<신흥무관학교>을 거쳐나간 동지<졸업자>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강원도 출신만 여기에 옮겨 본다.

 『황병우, 황병탕, 황병일, 정동수, 황병상, 주병순, 주대근, 원병상, 원세기, 원세걸, 황덕영, 이병탁, 이병세, 백종열, 황덕영, 이규동, 이규서, 황교석, 장세진』이상이다.

그런데 매화면 덕신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해 선생은 울진 출신인데 회고록에 나오는 최해(崔海)는 출신 지역이 경기로 되어있다. 동명이인이지? 아닌지 미상이다. 덕신 출신의 최해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그리고 황씨 성을 가진 인사명단은 황의석 선생이 앞서 확인해 준 바 있다. 그 밖의 명단은 어떤 분들이 울진 출신인가는 고증이 더 필요하다. 

이를 볼 때 당시 강원도 울진 출신의 인사들 다수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항일독립투쟁에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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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상(원병상) 훈장수여 증명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신흥무관학교 숨겨진 영웅, 원병상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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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령으로 예편하던 시기의 원병상(1956년 무렵).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원병상 선생은 36년간 만주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였음이 그가 쓴 회고록이 말해주고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 후에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육군 대령으로 전역했다. 1950년 그는 6.25 한국 전쟁에 참여해 그 무공으로『은성충무무공훈장』,『무성충무무공훈』을 비롯하여 각종 표창장을 받은 훌륭한 대한민국 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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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화현 시기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의 영농 광경.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독립군 양성의 요람, 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는 10여년간 3,50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거기에 교관 원병상이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숨겨진 영웅이었다. 그의 일가는 만주에서 피눈물 나는 고생을 겪었다. 원병상 선생은 초지일관 오직 조국광복을 염원,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여 교관으로 복무하면서 학교운영 난 등 온갖 고초를 겪은 산증인이었다. 그가 노령에 남긴 회고록은 지금까지 발굴된 사료 중에서 신흥학교 1차 사료로서 학계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한편, 그가 교육과 훈련을 시킨 무장독립군은 그 유명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만주 일본군을 상대해 빛나는 전과를 이루었다. 청산리전투에 독립군으로 참여한 울진 덕신 출신의 최해가 있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는 오늘날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여기에 있음을 만천하가 다 아는 바이다. 

하지만 그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 교관 활동 등 독립운동 공적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아직 인정받은 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마땅히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야 한다. 

원병상 선생은 1946년 환국 후에도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6.25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공적이 있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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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0월 신흥학우단 부활 기념사진. 첫줄 가운데에 성재 이시영 선생이 자리하고 있다. 원안의 인물이 저자이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원병상회고록은 단순히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식민의 시대에 한 만족이, 한 일가가, 한 인간이, 나라를 잃고 살아간 통한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망국이 가져오는 결과가 주는 인간의 자존과 자유의 박탈이 어떠하며, 그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역사이기도 하다.

또한, 자라나는 미래 세대들에게도 매국과 친일, 독립과 애국충정이 무엇인가를 가름하고 보여주는 엄정한 역사적 교훈이다.

 

<참고문헌>

안동사람들이 만주에서 펼친 항일투쟁, 김희곤, (주)지식산업사. 2011.

항일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 주동욱, (주)도서출판 삼인. 2013.

성공한 독립운동은 흔적이 없다, 장영태, (주)맨토르, 2023.

신흥무관학교교관, 원병상회고록, 원병상,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민연주식회사, 2023.


<원병상 선생 관련 자료 협조 등 도움을 주신 분>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님, 해월종택 황의석님(기성 사동리), 원용수님(기성 정명 출신, 현 대구 거주, 시인), 원용덕님(전 울진재향군인회사무국장, 현 온정 녹정동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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