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신미년 영해+울진 동학 거사 2일 천하 이야기

기사입력 2023.11.2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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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부 옛지도(신미아변시일기, 영덕문화원, 2022) 

 

1871년 3월 10일 밤 동학교도들이 집중공격한 곳이 영해읍성에 자리 잡은 영해부 관아였다. 당시 영해부 관아 터에는 현재 영해면사무소가 들어서 있다. 이곳 위치는 지형상 평지보다 솟아오른 언덕 진 곳에 관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에는 영해소재지를 어느 정도 전망할 수 있는 곳이다. 영덕지역에는 현재 영덕읍성과 영해 읍성이 축조된 흔적이 남아있다. 

영덕 읍성은 영덕읍성(盈德邑城)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읍성(邑城)이었다. 조선시대 이후 석성으로 존재하였으나, 1910년 일제의 읍성 철거령에 의해 대부분 고을의 읍성이 철거될 때 영덕읍성도 함께 철거되면서,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그 위치는 영덕읍 화개길 9-3[남석리 310]이다. 현재에도 민가 담벽 등지에 축조된 성벽의 터를 확인할 수 있다.


영해읍성은 조선시대 영해도호부의 읍성(邑城)이었다. 조선시대 이후 석성으로 존재하였으나, 1910년 일제의 읍성 철거령에 의해 대부분 고을의 읍성이 철거될 때 영해읍성도 함께 철거되면서 터만 남았다. 영해 읍성은 1906년 신돌석 장군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보아 그 기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위치는 영덕군 영해면 예주3길 7[성내리 671-5] 이다. 현재 영해면사무소를 둘러친 담장 밑돌이 영해 읍성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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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부 수령 영세불망비

 

또한, 영해면사무소 남쪽 뜰 안에는 수령들의 영세불망비가 여럿 세워져 있다. 옛날에 지방 수령이 좋은 정치를 베풀면 선정비(善政碑)를 세워서 기렸다. 공덕을 칭송한다는 의미로 송덕비(頌德碑)라 하기도 하고, 수령이 백성들에게 베푼 애민의 공적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영세불망비라 하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지방 수령들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을까? 물론 선정의 공적으로 지방민이 비석을 세워주기도 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한때 비석 수가 급증하여 조정에서 금하기도 했으나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영조실록> 1년(1725) 1월 23일의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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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읍성공해寧海邑城公廨. 1871년 3월 10일 동학교도들은 남문과 서문을 통해 영해부관아를 공격했다.


 『수령이 비를 세우고 살아있는 사람의 사당을 세웁니다. 숙종 때 조정의 금지령이 지극히 엄했는데도 명령이 행해지지 않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라고 했다. 


살아있는 자기 사당과 비석을 세우고, 때로는 그 비용은 백성이 감당하기도 했으니 참으로 가관이라고 할 수 있다. 비석의 내용도 칭송 일색으로 되어 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아첨과 거짓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


1871 영해동학혁명시 사망한 영해 부사 이정의 영세불망비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기 생신날 지역민을 초청하고는 그 밥값을 참석한 사람에게 각자 부담시켰다고 한다. 결국, 밥값을 받아 챙긴 것이다. 어찌 보면 밥값은 생신 축하금이라 할 수 있지만 가난한 백성들이 그런 생각까지 하고 참석했을까. 이는 의도적으로 행한 축재의 한 방법으로 보일 뿐이다. 부사로서 몰염치한 짓을 했다. 당시 영해 백성들 사이에 원성이 높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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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영해면사무소의 소나무와 은행나무

 

영해면사무소 앞뜰 동쪽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해송 등 큰 나무가 있다. 이 나무들은 150년 이상 되었다고 한다. 그날의 역사를 말없이 간직하고 오늘에 이르렀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영해부 옛 관아의 모습은 거의 없다, 그나마 동쪽의 책방관사는 부속 건물로 유일하게 복원되었다. 책방은 지방 아전인 이방 등이 행정사무를 보던 곳이다. 오늘날 기초 단체장의 비서실로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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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읍성 수호장면 옛지도

이 지도는 고종 8년(1871) 3월 동학군공격에 대비한 영덕 읍성 수호장면을 그린 것이다.

(신미동학시 영덕수호에 관한 시첩, 영덕문화원, 2020)

 

  옛지도에 나타난 영해읍성과 영덕읍성

여기서 조선 시대 지방 관아의 모습을 살펴보자. 관아라는 용어는 현재의 지방관청(군청이나 면사무소)의 건물로 관서·공해라고도 한다. 이 관아에는 대체로 동헌, 내아, 객사, 질청, 향청, 관노청, 군기청, 내아, 형옥 등이 있었다. 

동헌은 지방 장관인 감사, 병리, 수리, 수령들이 행정 업무 등을 보는 곳이다. 여기서 수령은(首令)은 지방의 주·부·군·현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을 총칭한다. 

내아(內衙)는 수령의 살림집이다. 향청은(鄕廳)은 지방 관아의 자문기관이다. 객사(客舍)는 왕명을 받들고 지방에 내려간 관리가 묵던 집이다. 객관이라고도 했다.

작청(질청)은 관아의 아전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기생과 노비들이 쓰던 관노청, 군사를 관장하던 군기청, 죄인을 가두는 형옥(감옥) 등의 건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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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부 관아부속 건물인 책방

 

현재 남아있는 1871년 영해동학혁명시 영덕읍성 수호장면을 그린 옛지도를 보면 영덕읍성 관아 건물배치도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옛 지도는 영해 읍성이 동학군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난 뒤 영덕 읍성이 그에 대비하여 수호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 지도에는 동문과 남문이 보이고 읍성 둘레에 깃발과 화살, 창, 칼을 빼곡히 그려 무장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는 동헌(東軒), 객사(客舍), 아사, 현사, 형리청, 이청, 관고사, 창고, 군기, 후락당 등의 건물 이름이 보인다. 


조선조에는 관직의 품계와 행정단위는 1,000호 이상인 고을에는 대도호부사(정3품) 또는 도호부사(종3품)를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도호부사는 지방장관직으로 목사와 군수의 중간에 해당하였다.

영해는 동해 북부 지역의 중심지로서 그 위상이 높아 수령이 부사였으며, 소안동을 자처했던 곳이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지금 남아있는 건물이 책방관사가 유일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지방 관아의 옛 건물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곳은 거의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미술사학자인 유홍준의 견해다. 


『그 원흉은 전통사회에서 근대 도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목조건물이 겪은 숙명이었고, 원흉은 일제가 모두 파괴해버린 것이다. 무려 조선의 327개 군현에 달하는 지방 도시에서 옛 관아라고는 몇몇 현청의 객사와 동헌 건물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중앙일보, 문화의 창, 유홍준, 2021. 2. 18.) 

이것은 일제가 지방뿐만 아니라 조선의 궁궐인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칭하여 동물원으로 만든 것과 마찬가지다. 한성은 물론 지역에서도 지방 관아 파괴는 조선의 민족정기를 없애고 그 흔적을 지우고자 한 일제의 간악한 식민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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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아변시일기 원문

 

  동학교도들 영해 읍성(관아)을 공격하다. 

1871년 3월 10일 밤, 화승총, 칼과 죽창 등으로 무장한 동학교도들은 이필제의 지휘 아래 영해부읍성 관아에 도착했다. 병풍바위(육조골)에서 현 창수면 가산리를 지나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을 따라 영해부 관아까지는 40리 쯤 된다. 영해 읍성에 도착한 시각은 술시·해시였다고 한다, 지금의 시각으로 10시 30분쯤 되겠다.


그날 낮에 영해 서쪽 산골짜기에 사는 어느 백성이 이미 영해 관아에 영양 수비 접경에 수상한 차림의 사람들의 왕래가 잦으니 무언가 심상찮다고 알려온 바 있었다. 또 다른 기록은 영해부성 근처에 사는 박기준이라는 사람이 영해부를 방문하여 평소 잘 아는 이방 신택순을 만나 서쪽 영양 접경에 행인들의 발걸음 심상치 않음을 거짓으로 알렸다는 것이다. 박기준과 신택순은 사돈 간이었다.

이에 따라 이방 신택순은 도사령 김일봉을 비롯해 장교와 나졸을 현지에 보내 사실을 정탐하게 하였다. 이들은 우정동 병풍바위에서 50리 떨어진 인천리까지 가서 정탐했으나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고 허탕을 쳤다. 그들이 간 곳은 병풍바위 우정동 방향이 아닌 인천리였다. 

박기준은 동학교도 집결지에서 반대 방향인 인천리 쪽을 지목하여 준 셈이다. 결국, 정탐 교졸은 박기준의 위계에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정탐하러 간 교졸도 해가 저물도록 감감무소식인데도, 누구 하나 사후 보고도 없었다. 근무 기강이 흐트러지고, 태평에 익숙해진 나머지 안일에 젖어 모두가 더는 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71년 3월 10일 밤, 동학교도들이 읍성 담 밑에까지 접근한 것조차 모르는 관헌들이었다. 

이필제와 동학지도부의 지휘로 영해 읍성 남문과 서문에 다다른 동학교도들은 모두 성벽에 몸을 붙이고 둘레를 살폈다. 읍성에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폭풍전야와 같이 고요한 밤이었다. 

이윽고 누군가 성문을 열고 나오더니 손짓을 하였다. 그는 이필제에게 다가와 뭔가를 보고하고 성안으로 사라졌다. 

동학교도들이 이후 체포되어 심문한 기록에 따르면 이방 신택순이 박기준과 사전 내통하였고, 영해 읍성에 들어갈 때 동학군을 문을 열어 영접했다는 진술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성문을 열고, 이필제에게 접근 한 사람이 누군지는 정확지 않다. 이후 동학교도들의 체포되어 심문 진술 과정에서 신택순과 박기준 이름이 등장한다. 박기준과 신택순은 잘아는 인척 사이였다. 이방 신택순은 심문 과정에서 이를 부인했지만, 그는 물고(고문치사)를 당했다. 당시 현직 관헌이 동학교도들을 도와준 것으로 왕조시대 내란공모인 역모죄로 처벌받았다. 동학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순교자이다.


  나를 따르라

『신미아변시일기』에는 1871년 3월 10일, 영해 관아의 내부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본부에는 예전에 포청이 없었으나 지난해 겨울에 조령(조정의 명령)에 따라 20명을 별도로 선발하고 급료를 주어 청사를 지키도록 하였다. 이때 포수들이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오직 당번인 두 교졸만 청사에 근무하다가 깜짝 놀라 일어났으나 조치할 방도를 알지 못했는데,』(이하 생략)


이 기록으로 보아 이미 조선 중앙정부의 지시로 영해부 관아의 경비태세 강화를 위해 일반 청장년을 별도로 병력 20명을 선발하여 배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날 공교롭게도 대부분이 집으로 가고 2명이 남아 읍성을 수비했던 셈이다. 따라서 당시 영해 읍성의 경비태세는 물론 관헌들의 근무 기강이 얼마나 느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동학교도들이 성안에 들이닥쳤을 때 관헌들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이후 기록도 나온다. 비상사태에 직면한 데도 관헌들의 공직기강이 엉망이었던 셈이다. 

영해 읍성은 고요하고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이때 성문을 열고 나온 누군가에게 보고를 받은 이필제가 소리쳤다.


『나를 따르라!』 


이필제의 명령에 강수,박영관,김진균,전인철,전영규 등이 앞장서서 달려나갔다. 중군 대장은 평해의 전영규였다. 평해 사람 전인철은 별무사였다. 연환(화승총 탄창)을 어깨에 두른 황억대도 앞장서 나갔다. 그는 평해 오곡리 사람으로 전영규와는 사돈 간이었다. 그의 직업은 보부상이었다. 그들 뒤를 조총, 죽창, 쇠창, 칼, 도끼, 몽둥이로 무장한 동학교도들도 소리치며 성문으로 진입했다. 


한편에서 쌀쌀한 밤공기를 가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우성치며 손에 무기를 들고 읍성을 공격하는 동학교도들을 말없이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제2대 동학 교조 최경상(최시형)이었다. 그는 이필제의 지금까지 행동과 그를 따르는 교도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스승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의『사람이 하늘이라는 깊은 뜻』을 생각하며 이건 아닌데 했을 것이다. 교조신원운동과 혁명의 참뜻이 어디까지인가를 말이다. 

이윽고 성안에서 총소리, 대포 소리, 사람들의 아우성이 밤하늘로 메아리치며 날아가고 있었다. 저 멀리 서쪽 형제봉 하늘가 별빛만 새파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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