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 영해+울진 동학혁명 2일 천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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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1일 도올 김용옥 선생(왼쪽)이 옛 영해부관아(현 영해면사무소)를 둘러보고 있다.
1871년 3월 10일 밤, 일부 동학군 100여 명은 영해부 관아를 공격하던 날에 병풍바위 우정동으로 가지 않았다. 그들은 이날 영해부 관아 근처에 잠복했다가 집결하여 우정동에서 출발한 본 대열과 합류했다. 2차로 합류한 100여 명은 전국 각지에서 늦게 도착했거나 아니면 가까운 울진 쪽에서 합류한 동학군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울진 매일리의 남두병 선생이 다수의 사람을 이끌고 참여했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100명의 합류로 모두 600여 명이 영해부 관아를 에워싸고 공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영해부 관아를 공격한 동학군 수가 얼마인가를 두고 학계에서는 150여 명에서 600여 명까지 거론되고 있다.

KBS1 드라마 대하사극 <징비록>에 등장한 조선 화포 운반장면(2015년 방영). 나무위키백과사전
일백수십 명의 소수설에 따르면 영양현감이 조정에 보고한 관청문서(각사등록)에는 182명 중 31명은 물고, 114명은 체포, 37명은 도주라고 파악하고 있다. 이에 따라 많아야 200여 명 정도로 보고 있다.(영덕의 독립운동사, 22쪽, 2003. 영덕군)
하지만 500명 이상 다수설은 최근 발간된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신미아변시일기』에는 5~600명으로 나온다.
『지난밤 해시쯤에 흉도 5~6백 명이 성부에 난입하여 먼저 무기를 탈취하고, 곧바로 아헌으로 올라갔는데(이하 생략)』라고 흉도(동학군을 말함) 5~6백 명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최대 인원이 600여 명으로 알 수 있다.
필자는 600여 명의 다수설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동학군들은 전국 각지에서 참여했다. 이를 보아 동학초기이지만, 당시 민중들에게 인시천(人侍天)의 만민평등이 상당한 지지와 민심을 얻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기성 방율 동학도 전세규의 진술
전세규는 울진 기성 방율 사람이다. 그와 전종규와 전영규는 모두 집안 사촌간이다. 영해혁명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인 전영규가 종형이다.
그는 이날 영해 혁명대열에 참여하려다가 그만 단념하고 집으로 돌아와 있다가 관군에 체포되었다. 그는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 후 유배 간 그의 생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앞으로 당시 희생당한 동학군들의 생사와 그 후손 추적도 중요한 일이다.
그가 혁명대열에서 이탈한 주요인은 총포와 요란한 대포 소리에 놀라 기겁을 하고, 관아를 빠져나왔다고 진술하고 있다. 전세규가 관에 체포되어 진술한 내용을 보면 이렇다.
『요대에 돈을 5냥 넣고 먼저 영해부 성 밖에서 기다리는데 종규 형이 왔다, 해 질 무렵이었다. (중략) 영규 형도 앞에서 중요한 일을 맡은 것 같이 바빴다. 나는 그 광경을 보니 만족하기도 하고 전율할 때도 있었다. 성 밖에서 기다리다가 동학군 대열이 성안으로 들어가자 불빛이 충천하고 대포 소리가 요란하여 겁이 나서 황겁히 밤중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마 이날 전세규처럼 영해부 관아 공격에 동학군으로 합류했다가 겁을 먹고 물러간 사람들도 상당수 되었으리라 본다.
세상일이란 모든 게 완벽하게 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군중심리로 호기롭게 용기를 가지고 참여했지만, 변심하여 중도에 이탈자가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대포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다
당시 동학군들은 이미 사전 내통되어 열려있는 관아의 남문과 서문으로 밀려들어 왔다. 이때 느닷없이 천지를 진동하는 대포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동학군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쿵, 쿵, 쿵!
연이어 포탄 소리가 나자, 성안 이곳저곳을 탐색하고 뒤지던 동학군들은 놀라 몸을 숨겼다. 그리고 미처 관아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 일부 동학군들은 놀라서 물러나고 있었다.
이날 영해부 관아에는 경비병으로 스무 명의 교졸이 있었으나, 모두 집으로 퇴근하고 당번 두 명만이 숙직을 서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동학군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날 상황을 신미아변시일기(辛未衙變時日記, 권호기역, 영덕문화원, 2022)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 포수들이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오직 당번인 두 교졸만 청사에 있다가 깜짝 놀라 일어났으나 조치할 방도를 알지 못하였는데, 전 수교 윤석중이 작청 담장 아래에 이들을 매복시키고 두세 차례 발포하자 적들 가운데 포에 맞은 자가 넘어지면서 크게 소리쳤다.
포수가 여기 있는데 어째서 이들을 먼저 체포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이 교졸은 마침내 담장을 넘어 달아났다. 이에 적이 기계, 화약 등의 물자를 탈취하고 곧바로 아헌으로 달려가서 자물쇠를 부수었으니 저항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라고 했다.
남문과 서문으로 밀어닥친 동학군들을 대적하기에 감당못함을 느낀 윤석중이라는 전수교(여러 교졸 가운데 으뜸 장교, 현 경찰서의 과장급)는 다른 교졸 한 명과 함께 담장에 몸을 숨기며 대포를 쏜 것으로 나온다. 이 대포에 3-4명이 맞아 현장에서 동학군이 비명을 지르면서 사망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전쟁경험을 하지 못한 동학군들에게는 소리 없이 나르는 활이나 화승총보다 대포 소리가 더욱 공포의 대상이었으리라.
그날 포수 교졸이 윤석중을 비롯해 두세 명이 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윤석중은 나중에 현장에서 체포되어 동학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윤석중은 영해부관아를 기습 공격한 이들의 정체가 동학군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충청남도 서산 해미읍성에 전시된 천자총통 모형. 나무위키백과사전
천·지·현·황의 대포 4형제
여기서 우리는 조선 후기 지방 관아에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는 모두 대포라는 용어로 썼다. 먼저, 포, 화포, 대포라는 용어는 언제부터 등장했는지? 과연 이때 어떤 대포가 발사되었는지 문헌을 찾아보았다.
1871년 당시 영해부 관아에서 동학군들에게 쏜 포를 두고 현재 우리는 대포라고 말하지만, 신미시아변일기 원문에는 포(砲)라고 나와 있다. (前首校尹錫中因使伏於作廳墻下發砲數三次賊等之中砲者大叫)
대포는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해 포탄을 발사하는 무기의 총칭이다. 현재의 대포는 구경 20mm 이상의 화약식 발사하는 군사용 무기를 말한다. 그럼 화포는 무엇이냐!
옛날 무기로 화포가 있었다. 이 화포는 발사할 때에는 불이 붙은 불덩이(기름이 묻은 솜덩이)를 화포의 그릇에 올려놓은 뒤 긴 장대와 밧줄을 이용해 멀리 날려 목표물에다 맞히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불덩이가 아니라 돌멩이를 매달아 목표물을 향해 날려도 대포가 되는 셈이다.
화약이 발명된 이후에도 대형 총통 속에 화약을 넣고 돌덩이를 쏘는 포라는 뜻으로 바뀌어 화약을 이용하는 모든 포를 화포라 하였다.
그 원리는 불이 붙은 심지를 이용해 화약에 붙여 폭발시켜 그 압력을 이용해 총통 안의 포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 장치이다.
그래서 화포나 대포에 초창기에 장전하는 포탄도 둥글게 다듬은 돌멩이(사석포), 쇠구슬, 철편들로 만들어졌으며 현대에서는 화약이 든 원통형의 뾰족한 모양으로 변해 왔다.
우리가 한 번쯤 들어보았을 대하사극에서 등장하는 이른바 천자총통, 지지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이라 이름하는 천지현황의 대포 4형제이다. 이름은 그 크기 순서에서 천자문의 천·지·현·황 등의 이름을 붙였다. 임진왜란시 거북선에 배치되어 왜군을 무찌르는데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 대포 4형제는 조선 후기까지 불량기포와 함께 주요한 무기였다.

수원화성에 있는 홍이포 모형. 나무위키백과사전
동학군에게 쏜 대포는 홍이포? 불랑기포?
홍이포는 전쟁 무기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17세기에 이름을 떨친 대포이다. 서양에서 먼저 만들어졌다. 이후 중국 명나라에서 다시 청나라로 넘어갔다. 이 대포는 엄청난 폭음과 위력을 자랑한다.
임진왜란의 천자총통과 비교하면 30근짜리 화약으로 장전할 경우 사정거리가 약 1.4km였다.
그런데 이 천자총통보다 10배 이상의 긴 사정거리를 가진 홍이포였다. 최대사거리가 무려 9km이다.
현대 박격포 최대사거리가 3~6km인데 2배나 되는 셈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충격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조선 역사상 최대의 악평을 듣는 임금 중 한 사람이 인조이다. 그가 임금일 때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이 일어났다. 청군은 홍이포로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를 위협했다. 홍이포의 위력에 남한산성의 건물과 성벽은 무너졌고, 군신과 군사들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다. 조선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인조는 성에서 내려와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홍이포가 우리 역사에 유명한 삼전도의 굴욕을 만들었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당시 조선 정부가 명·청 교체기에 명나라로 기울어진 외교적 판단의 실책이다.
이후 조선에서는 인조가 청나라에 굴욕당한 경험으로 현종이 홍이포를 12문 제작하여 강화도에 배치하였다. 영조대에 최대 사정거리가 10여 리에 달하는 홍이포 2문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불랑기포(佛郞機砲) 또는 줄여서 불랑기(佛郞機)는 중국 명나라 시대에 도입한 서양식 대포이다.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에게서 전해져, 이후 일본과 조선에서도 이용되었다. 조선에서는 당시 귀화한 박연(벨테브레)이 서양식 포술을 지도했다고 한다.
이 불랑기포는 조선 후기 조선군의 주력화기였다. 이후, 신헌이 개발한 4바퀴 수레에 설치되어 이동이 쉬워졌다. 고종 8년 신미양요 때 미국이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의 초지진과 광성보진에 침입하였을 때 조선군은 이 대포로 응전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신식 대포 앞에 무력했다.
조선 후기 대원군이 신식 대포를 도입할 때까지 이 불량기(대포)가 조선군의 주요 무기 체계였다. 그렇다고 해서 천지현황의 대포가 전부 폐기되었다고 볼 수 없겠다. 그래서 구식무기인 천자현황(총통)도 갖추고 있었는데, 대원군 때 구식무기와 신식무기가 혼용되는 과도기인 셈이다.

수원화성에 있는 불량기포 모형. 나무위키백과사전
우리는 여기에서 당시 동학군들을 향해 쑨 대포가 홍이포? 천자현황총통? 불양기포? 여기에 대한 영해부 공격시 문헌자료는 아직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1871년의 연대로 보아 조선 후기에 해당함으로 윤석중 수석포교가 동학군들 향해 쏜 대포는 불량기포로 보인다. 이것도 추정일뿐이다.
이필제가 다시 소리쳤다!
대포의 위력은 막강했다. 서너 명이 대포에 맞아 죽었고, 지도부의 한사람인 강수마저 얼굴에 총상을 입었다. 이때 이필제는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소리쳤다.
여기서 물러서면 또 실패다. 그는 이미 진천, 진주 등지에서 혁명을 모의했으나 실행과정에서 밀고하는 바람에 2번이나 실패하고 말았다.
직업 혁명꾼이라할 만큼 그는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었다. 그는 외쳤다.
『이미 시작된 일이니 겁먹지 말자!』
고 독려했다. 이 외침에 뒤로 물러서려고 하던 동학군들은 주춤했다.
겁먹지 말자는 외침!
겁을 잔뜩 먹고 있던 차에 다시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다! 그들은 그 순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그만두면 죽도 밥도 안된다는 사실을 느꼈을 것이다.
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관아 점거는 아직 시작이었다. 끝이 나지 않았다. 그들은 멈추었던 행동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관아 밖에 있던 동학군들도 횃불을 들고 속속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성안은 어수선해지고 동학군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저쪽 담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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