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시] 둘게삼

기사입력 2023.12.26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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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렸을 적 외할미는

안마루에 등잔불 지펴놓고 둘게삼을 삼으셨다.

동리 할매들이 일치감치 저녁밥을 해 드시고 삼 양푼이를 들고

해거름이면 모여드셨다.

더러 늦은 겨울밤 할매들은 김장김치와 노오란 조밥을 양푼이 가득담아

서걱서걱 살얼음 씹히는 짠지를 손으로 줄줄 째며 겨울밤을 나셨다.

크고 작은 동네 사건들이 행여 사랑방까지 번질까 사각사각

무르팍 비비는 소리만 문풍지를 흔들었다.

평생 치마폭쪽으로 여며 온 할매의 속살이 이맘때면

등잔불 아래 눈처럼 드러났다.

무릎을 세워 긴긴 동삼을 지나 온 할미의 무릎

눈부신 쪽빛이었다.

안마루를 쭉 둘러앉아 할매들의 둘게삼은 물속처럼 투명한 속살 빛으로

자식을 기르고 집안을 일으켰다.

누르면 꼭 터질 것 같은

홍시를 따면서 

늦가을 볕에 쟁하고 투명한 할미의 속살이

나뭇잎 없는 하늘을 떠 받치고 있다.

 

『남효선 시집 둘게삼, 전문』

 

 

둘게삼! 대마라는 식물체를 삶아 그 대궁이에서 벗긴 껍질이 삼이다. 옷감이 되는 삼베의 재료이다. 이 삼 껍질을 겨울 동안 여성들은 입으로 물어 껍질을 다듬어 무릎 팍에 놓아 손으로 비벼 실처럼 매끈하게 만들었다. 이 작업을 두고 삼을 삼는다고 한다. 삼베를 짜기 위한 여성들의 1차 노동행위이다. 

 

필자도 60, 70년대 겨울이면 우리 집에서 늘 보던 모습이다. 어머니와 이웃 아낙들은 모여서 겨울밤 내내 호롱불 밑에서 삼을 삼으셨다. 이 삼을 다시 양잿물에 삶아 말려서 가공하고, 풀로 매겨서 정갈한 실로 만들어 봄에 베를 짜셨다. 

 

어린 시절 아침에 눈을 떠보면 어머니는 벌써 딸깍딸깍 소리 내며 베틀에 앉아 베를 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둘게삼이란『모두 둘러앉아서 서로 사는 이야기를 하면서, 밤늦도록 삼을 삼는 노동의 고단함을 달랜다』하여 붙은 이름이 아니겠는가. 이제는 둘게삼이라는 말도, 삼을 삼는 모습도 다 사라진 먼 옛날 같은 이야기다. 이렇게 하여 생산된 옷감인 삼베를 시장에 내다 팔아 논밭도 사고, 아들딸 시집·장가를 보내고,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당시 농촌 여성들의 노동은 사계절과 밤낮이 따로 없는 눈물겨운 민중사였다. 이런 걸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남효선 시인의 시는 대체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것은 순정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런 삶을 주제로 한 이야기 시는 읽는 이들에게 과거를 회상케 하고, 때로는 진한 감동을 준다. 둘게삼이 그렇다.

 

1989년「문학사상」을 통해 문단에 나온 남효선 시인은 울진 부구 출신으로 언론에 종사하고 있다. 그의 시집으로는『둘게삼』,『꽈리를 불다』등이 있다.

(시인 김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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