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 영해+울진 동학혁명 2일 천하 이야기

기사입력 2024.10.1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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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개벽> 중 영해부읍성을 점거한 동학군의 일부 장면

 

영해부를 점령한 동학군은 무엇을 했나?

영해부를 점령한 동학군이 했던 행위는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첫째 탐관오리 부사 이정을 처단했다. 둘째 영해 백성을 위무하는 방을 붙였다. 셋째 영해부 금고 돈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넷째 이들은 이후의 영해부 퇴각에 대해 논의했다. 

 

먼저 현대판 소설에서는 부사 이정 처단 장면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그 일부를 살펴보자. 

서철원이 쓴 장편소설 <해월*>에서는 이필제가 김진균이 부사 이정을 추궁하고 처단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서철원의 장편소설 <해월> 197쪽. 여주세종문화재단.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22. 

 

독자들은 소설은 허구가 들어가 있기에 소설로만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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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 선생 삶과 죽음을 다룬 영화 <개벽> 포스터. 1991년 임권택감독 작품. 위키백과사전

 

『이필제는 영해 부사 이정을 결박하고 꿇어앉혀 죄를 물었다. 

죄를 알거든 말해보아라.

“……”

 

이정은 무엇도 말하지 않았다. 부정과 수탈과 횡포를 제 스스로 말할 수는 없었다. 이정은 탐학한 관리였다. 백성의 재물을 수시로 탐했다. 재물이 없는 자에는 뼈가 부러지도록 장을 내렸다.

 

이필제의 목에서 물방울이 튀었다.

“백성의 고혈을 짜낸 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이냐.”

 

“나는 죄가 없소. 백성을 가르친 것이 죄라면 죄일 것이오. 다만 살려주시오.”

 

이정은 영해의 재산가와 빈민을 가리지 않고 빼앗고 수탈했다. 그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깨끗한 칼로 이정의 목을 내려치자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영해 봉기에서 이필제가 본 것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의 인정이었다. 최시형이 이필제로부터 본 것은 선악이 사라진 사람의 본성이었다. 동학군의 영해 봉기는 백성들의 편에 선 거대한 파도이기도 했다. 백성의 바다에서 일렁이는 파도는 높고 거칠기만 했다.』(서철원의 장편소설<해월> 197쪽.)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백성들이 왕조에 저항하여 난을 일으켜 지방 수령의 목을 친 사건은 『1871영해동학혁명』이 최초이다. 


한편 당시 1871영해동학혁명을 기록한 ① <신미아변시일기辛未衙變時日記* ② 고종실록*(고종 8년 3월 18일) ③ 시암선생문집(時庵先生文集, 南皐)에는 다음과 같이 부사 이정 처단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 신미아변시일기(辛未衙變時日記)<十一日.黎明始聞地主己遇害而賊黨尙據東軒無退意南有鎭招集村丁俾勿離散一邊私通文于各村一邊發文于鄕員以爲討賊之策>(이하생략), 40쪽, 영덕문화원, 권호기역, 문자향, 2022. 

* 앞의 책, 144쪽 

 

① 신미아변시일기辛未衙變時日記

『여명(黎明)에 비로소 지주가 이미 살해당했고 적당들은 여전히 동헌을 점거한 채 물러갈 의사가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남유진은 마을 장정을 불러 모아 흩어지지 말도록 하고서, 한편으로는 각 촌에 사통(私通)을 보내고, 한편으로는 향원(鄕員)에게 글을 보내 적을 토벌할 대책을 세웠다.』(이하생략)


② 고종실록(고종 8년 3월 18일)

『영해부에서 적당 수백 명이 한밤중에 돌입하여 관장을 멋대로 죽이고 강제로 인부를 빼앗으니 그들에 대한 토벌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해당 부사는 부사 이정은 의롭게 맞서며 질책하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잃었으니 지극히 비참한 일입니다.』(이하 생략)


③ 시암선생문집時庵先生文集, 南皐*  

적이 곧바로 아헌에 들어가서 공을 뜰 아래에 결박하고 위협하며 인부를 빼앗으려 하자 공은 그들을 꾸짖으며 인부를 품속에 감추었다. 그러자 적들이 칼로 난자하여 부사의 몸은 온전한 곳이 없었다. (이하생략)

* 앞의 책 154쪽, 남고(南皐:1807-1879)는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영해 원구리 출신으로 호는 시암(時庵) 당호는 노백당(老栢堂)이다.

 

위와 같이 두 기록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일설에는 부사 이정이 관사인 내아에서 뒷문으로 나와 담을 넘어 도망가다 동학군에게 잡혀 왔다고 했다. 위의 ①②③은 각각 유림과 관변 측 기록이다. 

 

이 기록에는 부사 이정이 동학군을 피해 달아나다 체포된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부사 이정이 여명 무렵에 살해되었다는 것, 여명은 말 그대로 새벽으로 동이 트기 전 아직 어두컴컴한 시각이다. 옛 시각으로는 인시(寅時. 밤 3-5시) 무렵이다. 또 하나는 부사 이정이 동학군들에게 인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항변했음을 알 수 있다. 


인부는 요즘의 관인으로 수령의 인부 결재 없는 문서 행위는 허위와 마찬가지다. 동학군은 인부를 수중에 넣은 뒤 당시 현장에서 동학군에게 임무를 부여하는 행정행위를 했다. 그리고 당시 부사 이정이 이필제 앞에서 한 고을의 수령으로서 굴욕적인 마음이었을 것이고 자기 나름의 항변은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어떠한 말로 항변했는지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없다. 또, 이 기록은 김진균이 부사 이정을 처단했는데도, 다른 동학군들이 부사 시신을 온전하게 두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 궁금한 것은 동학군들이 처단한 부사 이정의 시신을 동헌 마당에 그냥 두고, 아니면 다른 곳에다 두고 퇴각했는지 등의 그 사실 여부는 밝혀진 바 없다. 

 

『신미아변시일기』에는 동학군이 영해부성을 퇴각 시각이 3월 11일 오시(午時, 11시~13시)*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부사 이정 시신을 수습, 빈소를 형방소에 마련한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앞의 책 37쪽. 『사람들이 모이지않은 당일 오시쯤 휴도들이 무리를 거느리고 다시 오던 길을 따라 달아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아직 모이지 않은 당일 오시쯤 흉도들이 무리를 거느리고 다시 오던 길을 따라 달아났다. 오후에 남유진이 먼저 성내에 들어가서 관상(官喪)의 소재처를 탐문하니, 전 행수(行首), 윤석중, 당시 호장 신현거 및 형리 약간명이 노령(奴令)들과 함께 관상을 형방소(刑房所)로 받들어 모시고 있었다.』(이하생략)


여기에 등장하는 남유진은 당시 영해지역의 유림으로 향교의 최고책임자인 도유사였다. 1871년 음 3월 11일, 오후에 남유진이 영해부성에 들어가 부사 이정 살해 소식을 듣고 관상(빈소를 말함)을 찾았다. 이미 이정의 빈소를 영해부 관리인 윤석중, 신현거와 관에서 일하는 노비 등이 형방 집무실에다 마련하고 있었다는 기사이다. 『신미아변시일기』에 따르면 이후 남유진은 당시 행정 공백이 된 상태에서 부사 이정 사망 등 초기 사태 수습을 위해 힘쓴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후술토록 하겠다.


백성을 위무하는 방을 붙이고, 구휼활동을 하다.

3월 10일 밤, 동학군이 10시 30분경, 영해부를 기습 점거하였다. 이후 부사 이정을 처단하고 다음 날 11일 후 11시 오후 1시경에 퇴각했다고 신미아변시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동학군이 영해부성에 머무른 것은 13-14시간 정도로 추정된다. 이들은 11일 날이 밝자 영해부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방*(벽보)을 붙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방(榜)이란 오늘날 공고문(公告文)·공지문(公知文), 또는 포고문(布告文) 같은 옛 이름이다. 근래에 와서는 잘 쓰이지 않는 용어이다. 왕조시대 일찍이 백성들에게 정부의 정령(政令)과 포고 사항을 알려주는 데 이용되었다. 게시장소는 서울이나 주요 읍성의 경우 성문과 종루 등이었고, 군현 이하의 행정 지역에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다.

* 앞의 책, 30쪽 술시, 해시쯤에 흉도 5. 6백 명이 갑자기 성 서쪽과 남쪽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후천개벽의 횃불,민권통치, 239쪽, 현우사, 2008.

 

그런데 1871영해동학혁명시 동학지도부에서 방을 공고했다는 사실은 있으나 무슨 내용으로 어느 곳에 게시했다는 사실은 입증되지 않는다.

 

한편 혁명지도부는 영해부 이방이 보관하고 있던 돈 궤짝에서 140냥 중 100냥을 인근 5개 동 두민(이장급)에 지시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동학군은 나머지 돈으로 아침밥을 시켜 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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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앞면(좌)과 뒷면(우) 위키백과사전


우리는 여기서 조선 후기 화폐가치를 오늘날로 환산하여 셈해보자.

조선 시대의 상용 화폐로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유통되는 시기는 1678년(숙종 4년)부터 1894년(고종 31년)까지였다. 냥(兩)을 기준으로 하여 10냥은 1관(貫), 1냥은 10전(錢), 1전은 10푼(分)이라는 화폐 단위를 갖고 있었다. 이때 상평통보가 동전이었기 때문에 큰 금액을 거래할 때는 보관과 유통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상인들은 큰 단위의 돈은 수표나 어음*이 주 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 『조선시대에도 수표와 어음이 있었다』(우리문화신문, 2016. 8. 19.)

 

2001년도 문화방송(MBC) 월화드라마로 조선 후기 무역상인 임상옥(林尙沃, 1779년 ~ 1855?)을 다룬 《상도*》(商道)가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MBC 드라마 『상도』에서 당시 물가는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의 가치는 2024년 현재 가치로 추정 환산한 것이다. 쌀 1석=5냥(5만원), 콩 1석 = 2.5냥(2만5천원), 무명과 삼베 1필 = 각 2냥(2만원), 초가 7간 = 50냥(5십만원), 초가 3간 = 15냥(15만원)으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이때 통용된 상용 화폐는 상평통보였다.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유통되는 시기는 1678년(숙종 4년)부터 1894년(고종 31년)까지였다. 다음 글을 참조해보자.

* 상도》(商道)는 소설가 최인호가 쓴 작품으로 조선 후기 무역상 임상옥이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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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썼던 수표, 벼 29가마를 빌리는 대신 논 18마지기를 전당으로 잡힌다는 내용, 실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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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썼던 어음, 실학박물관

 

『조선 후기 18세기 서울에서 쌀값 평균 시세는 1섬에 5냥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농촌 지역은 그보다 쌌다고 합니다. 오늘날은 쌀 10되가 1말이고, 10말이 1섬[石]입니다. 조선 시대에도 10되가 1말이지만 10말을 1섬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1말 용량은 학자에 따라서 작게는 5,18리터, 크게는 5.976 리터로 봅니다. 오늘날의 1말은 18리터쯤 되므로, 조선시대의 1말의 3배가 조금 넘습니다. 현재 40kg(90리터) 1포대에 6만 원이라고 하면 1리터의 가치는 6천 7백원입니다. 따라서 조선시대 한 섬은 4만 원이 조금 넘습니다. 즉 5냥이 4만 원이라면 1냥(100푼)은 지금의 돈 8천 원 정도가 됩니다.(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청년사, 1996년)


위의 글에서 상평통보 5냥이 1996년 당시 4만 원이라면 1냥(100푼)은 지금의 돈 8천 원 정도가 된다. 2024년 현재는 그 가치가 1만원쯤 된다.

그렇다면 당시 영해부에서 혁명지도부가 이방이 관리하던 돈 궤짝에서 취한 140냥은 140만 원이다. 

 

당일 혁명지도부는 140냥 중 100냥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앞서 기술했다. 이런 행위는 혁명지도부의 백성 구휼은 백성들에게 환심을 사고 의로운 활동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교남공적에 따르면 돈을 받은 양인 유위택, 신석훈, 원기주, 총각 임개이, 김성근 등은 동네 이장격인 당시 두민이었다. 이들 두민은 혁명지도부에서 어려운 주민들에게 주라고 해서 각각 20냥씩 받았다고 한다. 아침밥 35상을 해준 마군 최귀강이 돈 3냥 5전을 받았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수사 과정에서 두민에게 돈을 받았거나 아침 식사를 동학도들에게 제공한 것을 이적 행위로 보았다. 따라서 당시 혁명지도부를 도왔다는 이유로 나중에 이들은 심문을 받고 옥살이 등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가난하고 선량했던 백성들의 수난 시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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