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제3화(3회) 게너미 고개의 원혼(冤魂)

임진왜란 최초의 육상 승전, 해유령전투(蟹踰嶺戰鬪)
기사입력 2024.10.10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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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전투 현장

 

6월 25일(음력 5월 16일) 오후, 광탄 지역의 민가를 돌며 노략질을 마친 왜군 소부대가 약탈한 식량과 목재 등을 우마차에 싣고 양주 방향으로 넘어가기 위해 게너미 고개에 이르렀다. 

 

왜군은 따가운 오후 햇살을 피해 골짜기로 들어섰다. 왜군들은 무더위에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시시덕거리면서 게너미 고개 아래 계곡의 5부 능선 부근 야트막한 평지에서 행군을 멈추었다. 조용하던 골짜기에 인기척이 나자 놀란 산비둘기 떼가 하늘을 날아올랐다. 

 

앞장선 지휘자로 보이는 왜군 지휘자가 뭐라고 큰소리로 지시하자, 왜군은 각자 쉬는 곳을 찾아 무장을 해제한 다음 휴식에 들어갔다. 야트막한 골짜기 평지 옆 계곡을 따라 졸졸 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세수를 하는 자, 말고삐를 길게 늘어뜨려 나무에 묶고 드러누워 낮잠을 청하는 자에다 마을에서 약탈한 술동이를 놓고 여러 명이 둘러앉아 시끌벅적하게 떠들면서 물 마시듯 퍼먹는 자 등, 마치 야외에 나들이를 나와 계절을 즐기는 모습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왜군은 총소리 한방에 꽁무니를 내빼는 조선군을 익히 봐왔던 터이고, 마을을 돌며 약탈하는 동안에도 조선군의 모습을 아예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이곳 야트막한 고개 골짜기에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하고 방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햇살이 우산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계곡에는 매미 소리로 시끄러웠다.


“쏴라.”

숲속에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몸을 숨기고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던 조선군은 부원수 신각의 벼락같은 고함을 신호로 일시에 화살을 쏘았다. 넋을 놓고 쉬고 있던 왜군들의 머리 위로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뜻밖의 기습을 받은 왜군 무리는 혼비백산하여 무기를 집어 들고 숨을 곳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탕. 탕탕탕…….”

정신을 차린 왜군들이 총을 집어 들고 응사하기 시작하면서 총소리가 계곡을 뒤덮었다. 조금 전까지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 울음소리는 사라지고 계곡은 왜군과 조선군이 서로 소리치는 아우성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승부는 쉽게 갈렸다. 조선군이 쏘아대는 화살을 맞아 고꾸라지면서 비명을 질러대는 왜군이 늘어나면서 그들이 응사하는 총소리도 점점 줄어들었다. 왜군은 계곡에 포위된 채 제대로 대응도 해보지 못하고 조선군이 숨어서 쏘는 화살에 맞아 하나둘 고꾸라졌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신각은 바위 위에 올라 칼을 빼 들고 소리쳤다.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혼과 인천부사 이시언도 칼을 빼 들고 능선을 오가며 소리쳤다. 왜군은 완전히 포위된 채 제대로 대응해 보지도 못했다. 

왜군이 거의 쓰러지자 신각이 다시 호령했다. 

“돌격. 모두 참살하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조선군은 화살을 거두고 일제히 계곡을 향해 창을 겨누면서 내달렸다. 왜군 무리는 모두 화살을 맞고 뒹굴고 있었다. 몇몇 왜군이 조총을 들고 사격했으나 이내 골짜기는 조용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만세. 만세. 부원수 만세.”

조선군의 함성이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죽은 왜군의 수를 헤아리니 70여 명이나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전과를 올린 승리였다. 신각과 이혼, 이시언은 서로 손을 잡고 감격했다. 

 

그들 주위로 몰려든 조선군의 함성이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조선군은 화살을 맞고 신음하는 왜군을 일일이 확인 사살했다. 신각은 왜군 모두 목을 베라고 지시하고 전리품으로 조정에 보고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만세. 만세. 부원수 만세.”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왜군 70명을 전원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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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유령 전투 장면(드라마 징비록).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왜군 70명을 전원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골짜기는 조선군의 함성으로 덮였다. 이 얼마만의 승전보인가. 신각을 도와 함께 전투를 지휘한 이혼과 이시언도 감격해서 서로 손을 잡고 얼싸안았다. 왜군 70여 명을 베는 전과를 거둔 이 게너미 고개 전투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조선군이 육지에서 거둔 첫 승전보였다. 처음으로 승리를 맛본 부원수 신각과 지휘부는 군사를 이끌고 연천의 임진강 근처로 이동하여 진을 편성하고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다음의 군사작전을 논의하였다. 


뒤늦게 합류하여 예비대로 게너미 고개 정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유도대장 이양원이 달려왔다. 그는 신각과 이혼, 이시언을 차례로 포옹하면서 웃었다.

“이번 작전은 아주 대성공이었소. 무엇보다도 부원수 신각 장군의 탁월한 영도력이 돋보이는 전투였소이다.”

 

이혼과 이시은도 손뼉을 치면서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거들었다.

“아닙니다. 모두 우리가 함께 이루어낸 승리지요. 어찌 제게 그 공을 모두 돌리십니까?”

 

신각이 손사래를 치면서 말렸다. 이양원이 말을 이었다.

“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훌륭한 전공을 조정에 보고하지 않을 수 없소. 그래서 내 이미 이렇게 주상께 올릴 장계(狀啓)를 준비하라 일렀소이다. 자. 빨리 본대로 철수하여 상황을 점검합시다.”

 

이양원은 게너미 고개에 진을 치고 있던 군사들을 불러모아 원래의 진지로 다시 이동할 것을 지시하고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이양원의 수하 부장이 준비한 장계를 올리자 이양원은 그 내용을 신각과 장수들에게 보여주었다. 의정부 장수원 전투에서 왜군과 벌인 전투 상황과 이곳 게너미 고개에서 신각을 중심으로 자신과 이혼, 이시언이 왜군 70명을 참살한 전공을 간략하게 적은 내용이었다. 이양원은 부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주상께서 지금 평양성에 계신다고 한다. 지금 달리면 내일 아침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야. 빨리 전해야 한다. 알겠느냐? 지금 당장 파발을 보내라.”

 

이양원은 미리 준비한 대로 장계와는 별도로 소금에 절인 왜군 장수들의 목을 상자에 담아 마차에 실었다. 장계와 상자를 실은 마차에 오른 전령들은 읍을 하고 말에 올랐다. 

“자, 가자. 이랴.”

 

말에 오른 자가 휘두르는 채찍이 말의 엉덩이에 떨어졌다. 이들을 태운 말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북쪽을 향해 달렸다.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면서 저녁놀이 붉게 타올랐다. 

조정에 승전보를 실은 파발을 띄운 유도대장 이양원은 부원수 신각과 이혼, 이시언 등과 다시 부대를 재편성하고 전략을 수립하려고 모였다. 이들은 왜군이 임진강을 건너 개성을 거쳐 평양성으로 진격할 것이라는 첩보를 바탕으로 이들보다 먼저 평양성으로 이동하여 주상전하에게 자신들의 공적을 보고하고 어가를 호위하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승리를 거둔 신각과 이양원은 곧 군사를 이끌고 임진강 쪽으로 가서 대탄(大灘, 연천 부근)을 지키면서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기로 하고,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혼은 원래의 관할지역인 철령(鐵嶺)으로 이동해서 왜군이 함경도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로 하였다.

신각과 이양원은 먼 길을 이동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전 부대원에게 충분한 휴식과 함께 이동에 필요한 군량미를 확보할 것을 지시했다. 신각은 왜군과 관련된 첩보를 수집하기 위해 정탐병들을 사방으로 풀었다. 조선군은 처음 맛본 승전에 사기가 오르고 들뜬 분위기를 만끽하며 모처럼 휴식에 들어갔다. 


게너미 고개에서 소규모 전투로 승전을 맛본 지 이틀이 지난 6월 27일(음력 5월 18일) 오후. 조용하던 조선군 진영 막사에 말발굽 소리가 났다. 경계를 서고 있던 군사들이 놀란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멈춰 세웠다. 조정에서 보낸 선전관 일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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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명을 낭독하는 선전관


말에서 내린 지휘자가 손에 교지를 들고 막사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부원수 신각은 어명을 받아라.”

 

휴식을 취하고 있던 군사들이 선전관과 함께 온 군사들이 지르는 고함에 놀라 모여들었다. 그러나 군사들은 그들이 조정에서 어명을 받아 온 관리임을 알고 환호성을 질렀다. 마침내 이번에 세운 전공을 조정에서 알고 이렇게 신속하게 포상하려고 온 것으로 믿었다. 

전령이 재빨리 신각의 막사로 달려가 조정의 관리가 어명을 받고 당도했음을 알렸다. 군사들은 신이 나서 모여들었다. 

 

부원수 신각이 모습을 드러내자 군사들은 무기를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주상전하 만세. 신각 부원수 만세. 만세……”

 

선전관을 따라온 조정의 군사들이 황급히 이들을 제지하고 나섰다. 이들은 모두 굳은 얼굴로 긴장한 모습이었다. 일부 군사들이 그들의 모습에 짜증을 냈다. 그리고 뭔가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신각은 군사들을 향해 손을 들어 함성을 제지했다. 병사들은 더 우렁차게 함성을 질렀다.

“주상전하 만세. 신각 부원수님 만세. 신각 장군님 만세……”

선전관을 따라온 군사들이 조선군의 함성을 제지했다. 잠시 후 군사들이 조용해지자 선전관은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는 교지를 꺼내 펼쳤다. 조선군은 숨을 죽이고 일제히 선전관이 손에 든 교지를 보았다.


“종2품 자헌대부 신각은 주장의 명을 거역하고 적전(敵前)에서 도주하였다. 이는 군졸의 사기를 지하로 떨어뜨리고, 신성한 국방의무를 저버렸으며, 지엄한 어명을 거역한 행위이므로 관작을 삭탈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는 동시에 참형에 처할 것을 명하노라!”

  

선전관이 교지를 읽어 내려가자, 부원수 신각은 너무 놀라 고개를 들어 선전관을 쳐다보았다. 몰려든 군사들도 선전관이 낭랑하게 교지를 읽어 내려가는 순간 모두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어이가 없는 상황이 아닌가? 

 

“선전관 나리, 어찌 이럴 수 있사옵니까? 신각 장군은 난세에 불세출의 영웅입니다. 그를 죽이는 것은 진실로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아니 되옵니다.”

 

장수들이 나서서 선전관을 향해 소리쳤다. 조선군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신각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순간 멍하고 있었다. 선전관이 다시 소리쳤다.

“어명을 거역할 셈인가? 그대들 목도 온전하다는 것인가?”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혼, 인천부사 이시언이 앞으로 나섰다. 이양원이 큰소리로 외쳤다.

“선전관. 우리는 목숨이 두렵지 않소. 부원수 신각은 용감하게 싸우고, 왜적 70명의 수급을 베어 조금 전에 파발을 띄워 상감마마께 장계를 올렸소. 저기에 모아둔 왜놈들의 시신을 보시오. 저게 그 증거요”

 

이혼과 이시언이 거들고 나섰다. 군사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선전관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강 전투에서 도원수가 먼저 퇴각하여 숨었으므로 그 행방을 몰라 보고를 못했을 뿐이오. 신각 부원수는 잔병을 수습해 내가 끌고 온 함경남도 병마사 군대와 인천부사 군대를 규합해 이곳 게너미 고개에서 왜군을 맞아 무찔렀소. 우리가 올린 장계는 하루만 기다리면 주상이 계시는 곳에 도달할 것이고, 그러면 진상이 밝혀질 것이외다.”

 

선전관이 의관을 바로 하며 대답했다.

“나는 어명을 따르는 충직한 선전관으로 너희들이 나를 기망하고 사세를 뒤집으려고 하는데, 나를 그렇게 만만하게 보지 마시오. 적병 70명의 수급을 보냈다는데 그걸 누가 믿는단 말인가? 왕실에서도 믿지 못하는데 신하된 자가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선전관은 몸을 돌려 형장의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체할 것 없다. 당장 죄인의 목을 쳐라.”

 

유도대장 이양원이 황급히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두손으로 막아섰다.

“왜놈들의 수급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오. 그러나 지금 올라가고 있는 중이니 하루만 기다려 주시오. 그 결과를 보고 집행해도 늦지 않잖소.”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던 신각이 정신을 차렸다. 신각이 꿈틀거리며 요동을 치자, 선전관 군사들이 창으로 그를 제지했다. 신각은 그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선전관이 다시 호령했다.

“뭣들 하느냐. 빨리 형을 집행하라. 시간이 없다.”

 

군사들이 달려들어 신각을 묶어 옆에 형 집행을 준비하고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신각은 묶인 채로 끌려가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아니…. 선전관. 이게 무슨 일이오. 내가 죄를 짓다니….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되었소…. 이보시오. 선전관… 선전관… 대감… 유도대장 대감… 대감.”

 

맨발이 된 신각은 상투까지 풀어진 모습으로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는 도부수 2명이 칼춤을 추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면서 둘러선 조선 병사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모여든 군사들이 웅성거리면서 동요하기 시작하자 선전관은 마음이 급해졌다. 신각의 고함에 이런 상황을 알리려고 사방으로 뛰어가는 군사들을 본 선전관은 당황했다. 조금만 더 지체하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전시 상황이다. 

“도부수는 뭘 하느냐? 빨리 형을 집행하라. 빨리…”

 

선전관의 다그침에 사형 집행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칼춤을 추고 있던 도부수의 동작이 빨라졌다. 조선군들은 일제히 형 집행장으로 몰려들었다. 군사들은 모두 이게 무슨 영문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뭣들 하느냐. 시간이 없다니까. 시간이……”

 

군사들이 일제히 모여들기 시작하자 선전관이 다급하게 재촉했다. 부원수 신각은 혼비백산하여 다급한 목소리로 빨리 유도대장 이양원을 보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간절했지만 힘이 없었다. 신각은 체념한 듯 고개를 들고 선전관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선전관.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내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 것 같소, 내 죽기 전에 한마디만 하리다……”

 

선전관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신각을 내려다 보았다. 신각은 형틀에 묶인 채 숨을 한 차례 몰아쉬고 말을 이었다.

“이제 나 신각은 어명에 의해 죽지만, 억울한 사정이나 주상께 아뢰어주시오. 도원수는 한강에서 왜적을 만나서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파주 임진강으로 달아난 사람이요. 달아난 장수가 싸우자는 장수에게 무슨 군법을 어겼다고 죄를 뒤집어씌우는 거요? 나는 비록 억울하게 죽지만 진상은 곧 밝혀질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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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장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그림


신각이 숨을 몰아쉬며 절규하자 주위를 둘러싼 장수와 군사들은 눈물을 훔쳤다. 군사들의 흐느끼는 소라와 웅성대는 소리가 점점 커지자 주위를 살피던 선전관이 말했다. 

“신각 장군. 내 장군의 뜻을 알았으니 그대로 보고하겠소. 미안하오.”

 

잠시 뜸을 들인 선전관은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형을 집행하라.”

“예엣.”

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도부수의 칼춤이 다시 시작되었다. 마침내 도부수의 힘찬 고함과 함께 그의 칼이 신각의 목덜미에 떨어졌다. 

“야… 아… 앗.”

 

순간 사방에 시뻘건 피가 솟으며 신각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모여든 군사들 사이에서 놀라 지르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누가 미처 나서서 제지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선전관의 형 집행은 신속했다. 신각 부대의 군사들은 비명을 지르고,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상황이 벌어졌다. 

“빨리 수습하라. 돌아가야 한다.”

 

선전관은 계속 군사들을 재촉했다. 부원수 신각의 머리를 재빠르게 수습한 선전관 군사들은 말에 올랐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놀라 이리저리 웅성거리는 신각의 군사들을 뒤로하고 선전관과 그의 군사들은 게너미 고개를 향해 말을 달렸다. 

“이랴! 가자. 모두 비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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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보고 올린‘임진장초(국보 제76호)’사진=문화재청


선전관 군사들이 게너미 고개 방향을 내달리며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혼, 인천부사 이시언은 형장에 남은 가마니와 핏자국, 어지럽게 널려진 신각의 유품을 보며 올라서 넋을 잃고 말았다. 군사들의 통곡 소리가 들판을 가득 메웠다.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도망을 가면서 선조에게 장계를 올렸다. 장계의 내용은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고 퇴각에 대한 변명과 계획을 늘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그 내용 가운데, 자신의 결정을 따르지 않은 신각의 행위를 무단이탈로 보고했다. 신각이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고, 무단으로 이탈하면서 한강 방어전에 실패하게 되었다고 뒤집어씌운 것이다. 

 

사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조선의 장수들 가운데 전장에서 적과 대치하다가 두려움에 못 이겨 도망가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들을 엄벌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김명원으로부터 올라온 장계를 받은 선조는 불같이 화를 냈다. 신각을 잡아 처형함으로써 조선군의 기강을 세우는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명분을 세우면서, 신각을 잡아 현장에서 즉결 처형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게너미 고개의 전승을 알리는 유도대장 이양원의 장계는 선조의 어명으로 즉결 집행을 명 받은 선전관이 출발한 다음 날 오전에 비로소 선조에게 도착했다. 

 

선조는 장계를 받아 들고 읽어 내려가면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신각이 지휘하고 이양원 자신과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혼, 인천부사 이시언 등이 이끄는 조선군이 양주 게너미 고개에서 왜군 70여 명을 죽이고, 지금 군대는 임진강변에서 진을 치고 군사 훈련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선조는 비로소 자신이 너무 성급한 결정으로 큰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알았다. 

 

놀라서 흥분한 선조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 질렀다. 즉시 사람을 보내 신각의 처형을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그 시각 이미 양주 게너미 고개 현장에서는 신각 장군의 처형이 진행되고 있었다.


게너미 고개(해유령) 전투는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임진왜란이 벌어진 뒤에 계속해서 패하기만 하던 조선군이 최초로 육상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전투라는 의미가 있다.『선조수정실록』에는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한 뒤로 처음 이런 승전이 있었으므로 원근에서 이 소식을 듣고 의기가 솟구쳐 올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5월 1일 기사)

 

그러나 평양의 조정에서는 김명원이 올린 장계에 근거해서 부원수 신각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탄핵이 제기되고 있었다. 

 

선조의 어가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임진강으로 도망간 도원수 김명원이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부원수 신각이 적을 앞에 두고 도주했다고 보고하면서, 신각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근무지를 이탈해 이양원을 따른다는 핑계로 도망쳤다며 처벌할 것을 청하는 장계를 올렸다. 

 

특히, 김명원은 신각이 게너미 고개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 날인 6월 26일(음력 5월 17일), 임진강을 지키던 자신의 부대가 섣불리 강을 건너 공격에 나섰다가 왜군에 크게 패하면서 임진강 방어선이 돌파되고 개성이 점령되었는데, 그 패배의 책임도 신각에게 떠넘겼다. 

이튿날 6월 26일(음력 5월 17일), 비변사에서는 도원수 김명원이 올린 장계를 근거로 긴급회의가 열렸다. 그동안 왜군이 침략한 후 전국의 곳곳에서 대부분의 장수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적을 앞에 두고 도주한다는 장계가 많이 올라온 상황은 여러 면에서 신각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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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 회의


그동안 조정 대신들 사이에는 도망간 장수가 너무 많아서 다 죽일 수는 없지만,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일벌백계하여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다는 여론이 오래전부터 돌고 있었던 것도 부원수 신각으로서는 운(運)이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줄곧 온건한 처지에 있는 신하들은 점점 발언권을 잃고 계속되는 패주로 인해 일선 장수들에 대한 강경론이 제기된 시점에서, 부원수 신각의 사건은 운 나쁘게 제대로 걸려버린 형국이었다. 

 

갑론을박 끝에 비변사에서는 부원수 신각의 죄를 군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을 결정하고 선조에게 청했다. 보고받은 선조는 즉시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현장에서 즉결 처형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그렇게 선조의 어명을 받은 선전관 일행이 출발한 다음 날, 유도대장 이양원으로부터 양주 게너미 고개에서 부원수 신각의 지휘 아래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선발대와 싸워 승리했다는 장계와 함께 그 증거 물품인 왜군 선발대 70명의 수급이 올라왔다. 

 

장계를 받고 놀란 선조가 부원수 신각의 즉결 처형을 중지하라는 어명을 내리고 급히 다른 선전관을 급파했다. 그러나 뒤늦게 어명을 받고 출발한 선전관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부원수 신각은 이미 먼저 도착한 선전관에게 목이 베여 처형당한 후였다. 상황을 보고 받은 선조는 자신의 판단이 경솔했음을 후회하며 탄식했다. 김명원이 지키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왜군이 이미 임진강을 건넜다는 보고를 받은 선조는 다시 평양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김명원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평양으로 피난 가는 자리에서 선조는 게너미 고개 전투의 공로를 인정하여 유도대장 이양원에게 영의정을 제수한다는 어명을 내렸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비변사 회의를 거쳐 우의정 유홍(兪泓)이 선조에게 부원수 신각의 처형을 요청하자, 흥분한 선조가 즉시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현장에서 참수하게 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어명을 받은 선전관이 떠난 얼마 뒤에 유도대장 이양원으로부터 신각의 부대가 게너미 고개(해유령) 전투에서 승리하여 왜군 70명을 참살했다는 장계가 도착하자 놀란 선조가 다시 선전관을 보내 중지시키려 했으나 이미 처형이 이루어진 뒤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는 ‘신각이 비록 무인(武人)이기는 하나 나라에 몸 바쳐 일을 처리하면서 청렴하고 부지런하였는데, 죄없이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다.’라고 기록하였다.

 

부원수 신각이 처형되자 유도대장 이양원은 크게 분노했다. 자신이 영의정으로 제수되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그는 군사를 이끌고 함경도 철령(鐵嶺)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선조가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명나라에 내부(內附)하였다’라는 풍설이 전해졌다. 

 

선조가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로 망명한 것으로 오해한 이양원은 통분을 참지 못하여 식음을 전폐한 지 8일 만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첫 승리의 기뿜으로 선조가 영의정을 제수했지만, 영의정 자리에는 앉아보지도 못하고 향년 67세의 나이로 싸움터에서 죽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성품이 중후하고 박학했으며 흑백의 논쟁에 치우치지 않았고 시문에도 매우 능했다고 한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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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연안성 위치


신각은 연안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정암과 함께 연안 현충사에 배향되었다.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혼도 크게 실망하여 자기 군사를 이끌고 다시 함경도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역시도 함경도 전체가 왜적의 손에 떨어질 때, 국경인(鞠景仁) 등 반역자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다.

 

부원수 신각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그의 고향에 전해지자, 그의 부인 정씨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후 정조 때 열녀문을 세우고 원혼을 위로하였다. 부원수 신각은 연안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정암(李廷馣)과 함께 황해도 연안(延安)의 현충사(顯忠祠)에 배향되었다.

 

선조에게 올린 장계가 거짓으로 판명되었지만, 도원수 김명원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도리어 팔도도원수로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선을 지키는 총책임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 방어선은 왜군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본디 유순한 성격으로 도원수라는 직책에 충실했을 뿐, 전시 행정가로서도 성실한데다 유능했고 남을 모함하거나 해코지하는 일이 없었던 김명원은 비록 고의는 아니었지만 죄도 없는 부원수 신각을 죽게 만든 데 책임을 느꼈는지, 정유재란 때 선조가 작정하고 이순신을 쳐내려 했을 때는 이원익, 정탁과 함께 이순신의 처형에 대하여 끝까지 동조하지 않고 그의 구명과 재기용에 힘을 썼다.

 

이후에도 김명원은 호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를 거치며,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1년에는 좌의정에 오르는 등 요직을 맡으면서 승승장구했다. 


2년 뒤인 1594년, 성균관 생원 유숙(柳潚)이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중략)… 신각(申恪)은 사력을 다하여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격전하여 사졸(士卒)에 앞장서 일당백으로 곧장 적의 소굴을 짓밟아서 80명의 목을 베어 바쳤으나 주첩(奏捷)의 공은 받지 못하고 도리어 복검(伏劍)의 죽임을 당했으니, 사람들은 모두 원통해하기를 ‘군사 전체를 패몰 시킨 경우도 은사(恩赦)를 입지 않은 자가 없는데, 신각만은 무고하게 죽었다.’ 합니다. …(하략)…” (선조실록 58권, 선조 27년 12월 21일 갑자 2번째 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이로써 마침내 부원수 신각이 억울하게 처형되었음이 밝혀졌고 복권되었다. 이후 1787년(정조 11년), 조정에서는 부원수 신각의 아내가 정절을 지킨 것을 높이 사 정려문(旌閭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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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유령 전첩지 표지

 

부원수 신각(申恪, ?~1592년)은 아버지 신의충(申義忠)과 어머니 진주 하씨 하원로(河元老)의 딸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무과에 급제한 뒤에 중앙군과 지방군을 비롯한 무반직 요직을 대부분 역임했다. 

 

이 덕분에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정에서는 문반으로서 군 지휘에 약한 김명원을 도원수로 임명하면서 그를 보좌하여 실질적인 군사 지휘를 담당할 부원수에 신각을 임명하였다. 

 

신각은 강화도호부사(종3품), 상호군(정3품 당하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정3품 당상관), 영흥대도호부사(정3품), 경상도 방어사(종2품),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종2품), 팔도부원수(종2품)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신각은 1591년 연안부사(延安府使)로 재직하면서 조헌(趙憲)의 충고를 받아들이며 연안성(延安城)을 훌륭하게 개조해 놓았다. 그 덕택에 왜란이 터지고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이 황해도를 휩쓸고 지나갈 때, 이정암(李廷馣)이 이끄는 의병 부대가 연안성에서 물리칠 수 있었다. 연안성 전투의 승전은 구로다의 왜군이 황해도를 포기하게 만드는 결정타가 된다. 이 공로로 훗날 신각은 황해도 연안의 현충사(顯忠祠)에 이정암과 함께 배향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안도,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 구로다 나가마사는 황해도를 거점으로 주둔하는 것이 임무였는데 신각의 공로로 왜군이 황해도를 포기하고 철수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 셈이다. 이어서 고니시가 이순신이 보급을 끊어서 철수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신각은 임진왜란 초기에 전황을 반전시킨 중요한 활약을 했던 장수임에 틀림이 없다.

 

부원수 신각이 이런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봉되지 못한 이유는 선정이 조정 신료들 사이에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게다가 도원수 김명원의 휘하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자신의 상황을 적극적을 조정에 알리는 장계를 올리지 않은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왜냐하면 도원수 김명원은 신각이 다른 장수들처럼 도주했다고 생각하고 조정에 그렇게 보고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도망하는 장수가 많다 보니 신각을 엄히 다스림으로써 일벌백계의 본보기로 삼으려고 했던 점도 아쉬운 점이다. 결과적으로 신각은 지휘부와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이유로 억울하게 죽은 인물이었다.

 

게너미 고개(해유령) 전투는 임진왜란 개전 후 조선군이 거둔 성과로는 추풍역 전투 다음으로 큰 전과였다. 이 전투는 그동안 위축되었던 조선군의 사기를 올리고 왜군에 대한 적개심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큰 용기를 주었다. 

 

게너미 고개(해유령)는 오늘도 파주와 양주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부원수 신각 장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을 안고 있다.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1977년 백석면 연곡리에 화강암으로 된 높이 10.6m의 해유령 전첩비를 세웠다. 해유령 전첩비 밑에는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신각과 이양원, 이혼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충현사(忠顯祠)를 세우고 매년 5월 26일 추모 제향을 올리며 이들의 원혼(冤魂)을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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