謙遜(겸손)보다 더 큰 德(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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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호 전)성균관 전인, 심리상담사 1급
德(덕)은 仁(인)의 마음으로 禮(례)로서 베푸는 것을 德(덕)이라 하고 德(덕)은 수많은 어려움을 克服(극복)하고 얻은 修養(수양)의 産物(산물)이고 努力(노력)의 結果物(결과물)이다.
子曰 德不孤 必有隣(자왈 덕불고 필유인)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하셨고,「德勝才(덕승재) 謂之君子(위지군자) 덕이 능력보다 높으면 君子(군자)이고 才勝德(재승덕) 謂之小人(위지소인) 능력이 덕보다 높으면 小人(소인)이다.」는 孔子(공자)님의 가르침이다.
우리 社會(사회)는 德(덕)보다 能力(능력)에만 신경을 쓰면서 社會(사회) 곳곳에 이렇듯 能力(능력) 있는 小人(소인)만 輩出(배출)해 온 게 事實(사실)이 아닌가?
人間(인간)은 天性的(천성적)으로 道德的(도덕적) 存在(존재)이고 道德(도덕)을 追求(추구)한다는 意味(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行爲(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이라는 道德的(도덕적) 判斷(판단)을 하는 存在(존재)이다.
심리학자 조나단 하이트는 人間(인간)은 의로운 마음(righteous mind)을 품은 存在(존재)다. 우리는 各自(각자)의 基準(기준)에 의거해 行爲(행위)의 옳고 그름을 判斷(판단)하는 存在(존재)다.
道德的(도덕적) 判斷(판단)의 基準(기준)은 普遍的(보편적)이면서 동시에 문화 特殊的(특수적)이며 개인마다 다르다.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심각한 非道德的(비도덕적)인 行爲(행위)가 다른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일 수 있다. 이것은 道德性(도덕성)의 水尊(수준)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道德的(도덕적) 判斷(판단)의 基礎(기초)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各自(각자)에게 높은 水尊(수준)의 道德性(도덕성)을 要求(요구)한다. 다만 우리는 道德(도덕)을 判斷(판단)하는 基準(기준)이 다를 뿐이다.
독일의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道德(도덕)은 善惡(선악)을 藝術(예술)은 美醜(미추)를 經濟(경제)는 損益(손익)을 政治는 敵(적)과 同志(동지)의 區別(구별)이라고 했다.
나는 여기서 道德(도덕)만 關心(관심)이 있어 道德(도덕)에 善惡(선악) 區別(구별)이 善(선)한 사람과 惡(악)한 사람으로 區別(구별)이 된다. 善(선)한 사람은 思無邪(사무사)인 君子(군자)이고 思無邪(사무사)는 한 치의 허물이 없는 생각이다. 善(선)한 사람은 德(덕)을 지닌 사람으로 아우라(香氣)가 풍기는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氣質(기질)이 있고 이 타고난 氣質(기질)에 德(덕)을 쌓으면 性品(성품)이 된다. 이 行動(행동)을 反復的(반복적)으로 한 結果(결과)가 現在(현재)의 性品(성품)이다.
따라서 行動(행동)은 말수를 적게 하고 남의 말을 冷情(냉정)히 傾聽(경청)하고 行動(행동) 전에 멈추어 생각하고 말을 하고 말이 많으면 그 사람의 人品(인품)을 깎아 내린다. 사람의 根本(근본)은 잘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용을 써봐야 볼 수 있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움직인다. 눈을 뜬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다. 보는 눈이 있어야 보는 것이다. 마음은 항상 깊은 마음을 써야 來生(내생)에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한다. 때가 되면 꽃도 가지를 떠나는 게 自然(자연)의 攝理(섭리)이고 죽음은 自然(자연)의 法則(법칙)이다. 이 自然(자연)의 法則(법칙)을 神(신)도 바꿀 수 없다. 사람은 추해지기 전에 좋을 때 떠나야 한다. 幸福(행복)을 채우려 하지 말고 채워진 欲望(욕망)을 비워야 한다. 마음을 비우는 게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人生(인생)에서 가장 確實(확실)한 것이 죽음이고 가장 不確實(불확실)한 것이 죽음의 때다. 眞實(진실)보다 더 所重(소중)하고 强力(강력)한 價値(가치)는 없다. 眞實(진실)에 대한 關心(관심)보다 虛僞(허위)일지라도 相對(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虛僞(허위)를 쫓는 風土(풍토)가 問題(문제)다.
아무리 거짓말이 亂舞(난무)해도 常識(상식)과 眞實(진실)이 勝利(승리)해야 한다. 世上(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 누군가 나를 싫어하면 싫어하든 말든 그냥 내버려두고 살면 그만이다. 싫어하는 것은 嚴格(엄격)히 말해 그 사람의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다.
느낌이 좋지 않는 사람과는 만나지 않는 게 좋다. 사랑은 條件(조건)이 아니라 感情(감정)이므로 率直(솔직)한 사람이 좋고 名譽(명에)나 富貴(부귀)보다 健康(건강)이 第一(제일)이다. 인간은 心身(심신)이 튼튼해야 한다. 體力(체력)이 强健(강건)하고 氣力(기력)이 充滿(충만)하고 精力(정력)이 旺盛(왕성)해야 한다.
筋肉(근육)과 骨格(골격)이 굳세고 힘이 있어야 하고 몸과 活氣(활기)가 넘치고 걸음걸이가 씩씩하고 動作(동작)이 敏捷(민첩)하고 목소리가 朗朗(낭랑)해야 한다. 健全(건전)한 身體(신체)에 健全(건전)한 精神(정신)이 깃든다.
健康(건강)은 人間(인간)의 基本(기본) 資本(자본)이요 첫째가는 보배이다.
스트레스는 不安(불안)과 不滿(불만)으로 오고 相對(상대)의 不道德(부도덕)한 驕慢(교만)을 보면 강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心臟(심장)이 약해지고 胃潰瘍(위궤양)에 걸리므로 그런 사람을 피하는 게 上策(상책)이고 한 번뿐인 人生(인생) 感情(감정)을 숨기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살고 모두 自然(자연)히 돌아가는 대로 맡겨야 한다.
成均館(성균관)은 孔孟(공맹) 學文(학문)을 바탕으로 하는 孔子(공자)를 비롯해 文廟(문묘)에 從祀(종사)된 先聖先賢(선성선현)의 가르침을 信奉(신봉)하고 實踐(실천)하는 敎化團體(교화단체)이다.
物質主義(물질주의)와 利己主義(이기주의)에 물든 現代文明(현대문명)을 人間 倫理(인간 윤리) 恢復(회복)을 통하여 平和(평화)를 建設(건설)하는 바탕이 道德(도덕)이고 道德(도덕)은 善惡(선악)으로 區別(구별)되고 人間(인간)의 本性(본성)은 根本的(근본적)으로 모두가 善(선)하다는 性善說(성선설)을 바탕으로 人間性(인간성) 恢復(회복)으로 厚德(후덕)하고 謙遜(겸손)한 老人(노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實踐(실천) 없는 學問(학문)은 學問(학문)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든가? 그 實踐(실천) 德目(덕목)이 老子(노자)의 上善若水(상선약수)이다. 最高(최고)의 善(선)은 물과 같다. 물은 萬物(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가장 아름다운 人生(인생)이란 물처럼 사는 삶이다. 逆境(역경)과 苦難(고난)도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며 이겨내는 삶이고 내 自身(자신)과 더불어 萬人(만인)을 이롭게 하는 삶이 上善若水(상선약수)가 指向(지향)하는 삶이다.
무덤덤하게 老後(노후) 내 삶을 自足(자족)하며 느긋하고 여유 서럽게 살고자 하나 世上(세상)의 環境(환경)과 制約(제약)들이 짜증 나게 하고 小人輩(소인배) 심보를 갖게 한다. 그래도 나와 내 家庭(가정)의 삶 속에서 사랑하고 配慮(배려)하며 보듬고 나의 經驗(경험)을 바탕으로 내 이웃과 社會(사회)에도 溫情(온정)을 보태며 사는 게 물처럼 謙遜(겸손)하게 사는 것이다.
맹사성 : 몸을 낮추어야 머리가 부딪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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