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제4화(1회) 공산(公山)에 빛난 충절(忠節)

기사입력 2024.10.10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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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년경 후삼국 판도(출처 korisca 제작)

 

“그래. 이 상황을 어찌하면 좋은가?”

수하 장수들이 막사로 들어오자,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왕건(王建)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색하며 물었다. 막사 안으로 들어선 장수들이 왕건 앞에 빙 둘러섰다. 모두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애써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자… 자… 모두 앉으라.” 왕건이 여러 장수들을 향해 말했다. 장수들이 일제히 읍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폐하. 저희가 긴급회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했사온데……”

제일 앞에서 장수들을 이끌고 막사로 들어온 능산(能山)이 입을 열었다. 왕건의 얼굴에는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래. 능산 장군. 어찌하면 좋은가? 어서 말해보시게.”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지금 공산의 자락 골짜기 끝부분까지 몰린 상태입니다. 골짜기 아래에는 후백제군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어서 특단의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능산이 잠시 숨을 고르며 손을 입에 대고 헛기침을 했다. 왕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특단의 대책이라는 게 뭔가?”

 

“예. 폐하. 우선은 포위망을 뚫고 폐하를 안전한 곳으로 모시는 것이 먼저입니다. 폐하께서 이 상황을 벗어나셔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저희가 뜻을 모아…”

 

왕건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귀를 쫑긋 세웠다. 능산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마른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 몇 사람이 백제군 복장으로 변복해서 폐하를 모시고 안전한 곳으로 탈출시키기로 했습니다.”

“변복? 지금 변복이라 했는가? 변복이라니…… ”

 

왕건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어떻게 저들 몰래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우리가 저들 복장으로 변복을 한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야. 지금 산 아래에는 저들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하옵니다. 그래서 저희 몇몇이 군사를 나누어 이끌고 후백제군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능산이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마른침을 삼켰다. 왕건이 재촉했다.

“다만…? 다만이라니. 그래. 어서 말을 하시게. 어떻게 하려는 건가?”

후백제군의 막강한 공격으로 고려군은 팔공산 자락 6부 능선 골짜기까지 밀려난 상황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퇴로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시간이 문제였다. 조금만 더 이 골짜기에서 지체하다가는 후백제군이 대거 몰려드는 날이면 꼼짝없이 도륙당하고 만다는 절박감이 퍼져 있었다.

 

“어서 말을 하라니까 그러네. 어서.”

왕건이 답답해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폐하. 고정하소서.”

능산을 비롯한 장수들이 놀라 일제히 허리를 굽혀 몸을 낮추었다. 좁은 막사에서 장수들이 엎드리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왕건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목이 타는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폐하…… 그래서 저희들이 결정한 것이 바로……”

능산은 수하 장수들과 결정한 회의 결과를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겨울로 접어든 공산 골짜기를 휘감고 불어오는 밤공기는 제법 차가웠으나, 좁은 막사 안에서는 오히려 더운 열기로 가득했다. 막사 안에 들어선 장수들이 모두 긴장하면서 능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918년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했다. 건국 초기에는 먼저 건국한 후백제와 서로 사신을 왕래하는 등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롭게 지냈다. 견훤은 숙원이었던 신라 공략에 매진하기 위해 고려 쪽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이는 건국 초기 온갖 반란으로 혼란스럽던 고려 왕건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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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경 왕건 고려 개국 직후 판도(출처 korisca 제작)

 

궁예를 몰아내고 쿠데타에 비록 성공했으나 그동안 궁예의 지지 세력이었던 여러 지방의 호족들이 차례로 반기를 들었다. 환선길(桓宣吉)의 난, 명주의 대호족 김순식(金順式)의 반기, 웅주(熊州)의 이흔암(伊昕巖)의 난과 그 일대 호족들의 대거 이탈 등 고려는 수많은 장수가 죽거나 이탈하고, 영토는 거의 반토막이 난다.

 

하지만 왕건과 견훤 모두 삼한 통일의 야망을 품고 있었으므로 시간이 흐르면서 두 세력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특히, 신라를 적대시한 궁예와는 달리 그를 몰아낸 왕건은 신라에 대해 화친정책을 폈다. 이런 고려의 정책은 신라와 적대관계를 형성하면서 신라 공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견훤에게는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했다. 

 

왕건과 견훤의 첫 대결은 두 번에 걸친 조물성(曹物城, 경북 영주 죽령일대) 전투였다. 왕건이 즉위한 후 경북 내륙지역이 점차 고려에 복속되자 후백제는 경상북도 죽령 부근의 조물성을 공격해 분위기를 반전시키려고 했다. 이 전투는 2차례에 걸쳐 이뤄졌는데, 1차는 924년 후백제가 먼저 공격하였고 고려에 참패했다. 2차 전투는 견훤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공략에 나섰다.

 

당시 전체적으로는 후백제가 우위를 점하는 상황이었지만, 고려가 사력을 다해 성을 지켜내는 바람에 승패가 명확히 가려지지는 않은 것이다. 화의는 후백제에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왕건과 견훤은 인질을 교환하고 강화에 동의했다.

 

이 전투의 결과 경상북도 지역에서 후백제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후백제가 고려로 보낸 인질인 진호(眞虎)가 1년 만에 죽자, 견훤은 왕건이 진호를 주살한 것으로 생각하고 강화를 파기한다. 진호는 견훤의 조카였다. 후백제가 다시 공세에 나서자 왕건은 신라와 연합하여 견훤과 대항했다.

 

927년 1월, 신라군과 연합한 왕건은 군사를 일으켜 후백제의 용주(龍州, 지금의 예천군)를 점령했다. 그해 3월에는 운주(運州, 충남 홍성군)를 공격하고 3일 뒤에는 근품성(近品城,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4월에는 수군(水軍)을 동원하여 경상도 진주 일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왕건은 후백제의 배후를 공략하여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 것이다. 

 

마침내 7월에 고려군은 결정적인 배후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왕건이 김락(金樂)에게 군사를 주어 경상도 진주에 상륙하여 합천 대야성 공략에 성공함으로써, 전세를 반전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대야성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견훤이 그 중요성을 인식하여 여러 차례 공격한 끝에 간신히 점령한 성이었다. 김락은 진주에 상륙하여 곧바로 합천으로 진격하여 대야성을 탈환하고 성주 추허조를 사로잡는 성과를 올렸다. 후백제의 배후를 찌르는 왕건의 전략이 성공하면서 후백제는 완전히 수세에 몰리게 된다. 

 

추허조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추허조(鄒許祖)’로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사기』  「견훤열전」에서는 ‘추조(鄒造)’, 『삼국사기』의 기록을 인용한『삼국사절요』에는 ‘추조(趨祖)’로 기록되어 있다. 그와 관련된 기록은 다른 사서에서는 볼 수 없다. 다만, 927년 대야성에서 그가 이끌던 수하 장수 30여 명과 함께 고려 장수 김락에게 생포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견훤이 온갖 노고 끝에 점령한 대야성을 지키고 있었다는 점에서 견훤 휘하에서 상당한 위상을 가진 장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군이 후백제의 허를 찌르고 후방 주요 군사기지를 기습적으로 점령하게 되자, 견훤은 어느 방면으로 진격해도 고려군의 협공을 받게 되는 형세에 빠지게 되었다. 왕건은 내친김에 직접 진주까지 남하해서 점령지의 백성들을 위무하자 전세가 고려로 기울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이렇게 반전되자, 그동안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경상북도 문경 일대의 호족들은 고려에 투항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견훤은 전략적으로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전라도 나주 일대는 이미 수군이 아니면 공략할 수 없는 지역이라는 게 증명된 곳이고, 충청도 지역은 워낙 험준한 요새들이 많아서 고려와 후백제 모두 상대에 대한 공세를 지속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후백제군의 입장에서는 경상도 남쪽 합천-진주 방면은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이 고려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김천-대구 방면도 문경과 합천에 주둔한 고려군과 신라군의 합동 공세에 직면할 것이 확실했다. 상황 자체가 견훤으로 하여금 김천-대구 방면의 진출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상황의 예의 주시하고 있던 여러 지역의 성주와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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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기 서라벌 왕경 범위 추정도


927년 8월, 왕건이 후백제 포위망의 핵심이었던 문경의 배산성(盃山城)을 수리하고 강주(康州, 경남 진주지역)를 순시하자, 견훤의 휘하에 있던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 성주 흥달(興達)이 귀부하는 등 후백제의 성주 여러 명이 고려에 투항했다.

 

9월이 되자,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견훤이 드디어 군사를 일으켰다. 후백제군은 고려에 빼앗긴 근암성(近巖城, 경상북도 문경시)을 탈환하고, 이어 고울부(高鬱府, 경상북도 영천)를 공취한 뒤 서라벌로 진격을 시작했다. 

 

견훤의 후백제군이 서라벌로 진격한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신라 경애왕은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왕건은 시중(侍中) 공훤(公萱)에게 1만 명의 군사를 주어 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원군이 이르기도 전에 후백제군은 서라벌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견훤이 고려의 군사 배치의 공간이 지나치게 넓은 것을 파악하고 그 허점을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견훤은 서라벌로 이르는 길 가운데 문경과 김천 사이의 지역이 군사적으로 공백 상태라는 점을 파고든 것이다. 즉, 자신의 주력 부대만으로 신라를 굴복시키고 고려군을 각개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그는 오늘날로 말하면, 상주영천고속도로(301번 고속도로) 경로를 이용하여 상주-군위-영천-서라벌로 쳐들어가는 기습을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이런 점에서 군사 지휘관이자 전략가로서 견훤의 탁월한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손쉽게 서라벌을 점령한 견훤은 군사를 풀어 서라벌 일대를 약탈하고, 경애왕을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뒤 왕족 김부(金傅: 경순왕)를 세워 왕위에 올리니 그가 곧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다. 

 

이때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연회(일설에는 제사나 팔관회)를 베풀고 있었다. 이는 후백제군의 기동이 신라군이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신속했거나, 혹은 후백제군이 고려군의 지원 소식을 듣고 물러나는 척했다가 전광석화같이 서라벌로 들이닥쳤음을 의미한다. 견훤은 경순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 등을 포로로 하고 각종 보물과 기술자 등을 약탈하여 귀환길에 올랐다.

 

서라벌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왕건은 공훤에게 본인과 합류할 때까지 섣불리 서라벌로 진격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대야성에 있던 김락으로 하여금 고려와 신라군을 인솔하여 대구로 오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신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경애왕의 죽음을 조문했다. 

 

왕건은 고려군 정기(精騎) 5,000명을 거느리고 달구벌(達句伐, 대구) 동남쪽에 있는 공산 동수(桐藪, 동화사)에 진을 치고 서라벌에서 철수하는 후백제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공산의 동수, 즉 오늘날 동화사 일대에서 양군은 건곤일척의 맞대결이 벌어지게 되었다.

 

고려군은 왕건 직속 기병 5,000에 공훤의 선발대 1만, 김락의 군대, 그리고 인근지역의 일부 호족들이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후백제군의 병력 규모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서라벌을 정복한 직후인 만큼 최소한 몇만 단위는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견훤의 주력 부대는 고작 5천 명 정도에 불과했고 서라벌 점령을 위해 오랜 기동전으로 군사들이 지쳐있었다. 왕건의 고려군은 거의 2~3배에 달하는 규모라서 외관상 견훤에게 힘든 싸움으로 보였다.

 

여기에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군사력이었다. 견훤의 군대는 후백제의 정예군이었던 반면에 공훤의 군대는 여러 지방에서 차출하여 동원한 군사들이어서 사실상 손발 안 맞는 오합지졸이었다. 게다가 여기에 합류한 신라군의 경우 서라벌 점령과정에서 가족 대부분이 후백제에 인질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신뢰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마침내 서라벌 공략을 마치고 돌아가는 견훤의 후백제군과 왕건의 고려군은 공산 일대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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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公山) 전투 상황도


왕건은 발 빠른 기병대를 이끌고 후백제군보다 한발 앞서 공산을 배후에 두고 진을 편성하고 있었다. 고려군은 퇴각하는 후백제군이 접근하기를 기다렸다가 쉴 틈을 주지 않고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견훤은 정탐병을 미리 보내 고려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그들의 전략을 역으로 이용했다. 

 

견훤은 소규모로 편성된 선발대를 먼저 보내 고려군과 접전을 벌이면서 한편으로는 고려군의 형세를 파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본대가 도착하는 시간을 벌었다. 선발대는 군사를 급히 몰아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공산에 도착하여 먼저 도착하여 미리 선점하고 있던 고려군과 여러 곳에서 소규모 병력으로 접전을 시도하며 고려군을 시험했다.

 

고려군은 후백제군이 나타나 간헐적인 전투를 벌이다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후백제군이 압도적인 고려군을 보고 전의를 상실해 순식간에 흩어져 달아난다고 생각했다. 왕건이 국서에서 말한 “동수(桐藪, 동화사)에서는 (후백제군이 고려군의) 깃발만 보고도 무너져 달아났고……”라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잠시 후 선발대로부터 고려군의 정보를 보고받은 후백제군 본대가 들이닥치고, 후백제군이 접근해 오길 기다리고 있던 고려군 본대가 이에 응전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왕건 진영의 예측대로라면, 기병 위주의 기동전을 쉴 틈 없이 전개해 왔던 후백제군이 병력의 수나, 체력적으로나 당연히 불리했어야 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예 선발대를 먼저 보내 고려군의 동향을 살피고, 한편으로는 본대를 재정비할 시간을 번 후백제군은 이미 상당히 지쳤을 것으로 생각하던 왕건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후백제군은 고려군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신속한 기동전을 펼쳐 공산과 그 주변 일대에서 매복과 역매복, 산발적인 기습 등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차례 고려군의 허를 찌르며 전세를 장악해 나갔다. 

 

왕건은 정예병 5천을 이끌고 공훤의 군대 1만 명과 김락 등의 군대까지 합류한 고려군은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를 살리지 못한 채, 계속되는 교전 속에서 후백제군에게 연패하면서 순식간에 기세가 완전히 꺾였다.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서라벌에서의 약탈과 잔학행위를 벌이고도 공산에 신속하게 이르는 초월적인 기동력과 함께 압도적인 군사전략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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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동화사 전경(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 과정에서 왕건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먼저, 왕건은 공산에 이르는 도중에 각 지역의 호족과 성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는 점이다. 이는 곧 상대적으로 견훤의 후백제군에게 충분한 휴식 시간을 제공한 셈이었다. 두 번째는 공원의 군사 1만 명은 지방에서 거의 차출한 병력이라 전투 경험이 거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왕건의 5천 정예군과 비교하면 훨씬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세 번째는 견훤의 후백제군은 원래 거의 신라군 출신이기 때문에 공산 주변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신라군의 흐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왕건의 고려군은 공산 지역의 지리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왕건의 이런 약점은 군사 전략가로서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견훤에 비해 상대적으로 허술한 부분이기도 했다. 

 

고려군은 순식간에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퇴로가 차단되고 말았다. 고려군은 전열이 무너지면서 산속 계곡을 향해 뿔뿔이 흩어지며 달아났다. 왕건도 수하 장수들과 퇴로를 뚫지 못하고 황급히 공산 계곡으로 숨어들었다. 공산 일대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고려군은 퇴로를 개척하는 곳곳에서 후백제군의 매복 작전에 걸려들었다. 

 

이리저리 몰리는 동안 1만 5천 명이 훨씬 넘던 고려군은 왕건을 따라 골짜기 숨어든 군사는 불과 1천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왕건은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전세가 불리해지고 왕건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으로 내몰리자 수하 장수들은 골짜기 바위 아래 긴급하게 마련된 막사 속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능산(能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는 더 물러설 곳이 없소. 우선은 폐하를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 하오. 퇴로를 열어야 하오. 이곳 공산은 워낙 산세가 험준하고 골짜기가 많아서 적이 우리를 완벽하게 포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다행이오. 우리는 이 허점을 이용해야 하오.”

“그렇습니다. 폐하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것이 우선이오. 그렇게 하려면 저들의 시선을 분산시켜야 합니다.”

 

김락(金樂)이 장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모여든 장수들이 저마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서면서 서로 자원하고 나섰다. 능산이 이들을 제지하면서 말을 이었다. 

“고맙소. 우선은 사직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폐하를 모시고 퇴로를 개척하시오. 여러분은 한고조(漢高祖)와 기신(紀信)의 고사를 알 것이오. 나는 오늘 기꺼이 한고조의 기신이 될 생각이오.”

 

능산이 말한 기신(紀信)은 한고조 유방이 항우와의 홍문연 주연 때 유방을 탈출시키기 위해 그의 복장으로 항우의 군대를 유인한 후 장렬하게 죽은 고사를 말한다.

 

기신(紀信)은 홍문연(鴻門宴)에서 유방(劉邦)을 호위한 4명의 장수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기원전 205년, 유방은 팽성에서 항우의 3만 정예병에게 대패하고 형양성으로 도망가게 되었다. 수개월에 걸친 포위로 성내에 군량이 거의 떨어지자 진평의 계략에 의해 2,000명의 여군을 결성한 후 기신에게 유방의 차림을 하고 여군 지휘관으로 삼아 그 여군을 이끌고 동문으로 나와서 거짓으로 항복하여 유방이 도망갈 수 있는 활로를 열어주었다. 

 

기신이 붙잡히고 여군 2,000명이 항우군에 의해 강간당하는 동안 유방은 반대쪽인 서문으로 빠져나가 형양성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항우는 유방을 잡았으나 유방으로 변장한 기신이라는 것을 알자 “너의 주군은 어디 갔느냐?”라고 물었다. 

 

기신은 “그분은 도망가신 지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는데 나라고 알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 항우는 이 말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내며 기신을 불에 구워 죽였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전세는 역전되고 오히려 항우가 궁지에 몰리게 된다.

“나는 폐하의 복장을 하고 저들을 유인하겠소. 그 틈을 타서 폐하를 모시고 탈출하시오.” 능산이 말을 이었다.

“나도 가겠소이다.” 

 

능산이 말을 마치자 전이갑(全以甲)과 전의갑(全義甲) 형제가 앞으로 나서면 말했다. 그러자 여러 장수가 너도나도 앞으로 나섰다. 능산이 다시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 장군. 모두 고맙소. 그러나 모든 건 폐하를 탈출시키는 것이오. 여기 몇 사람은 나를 따르고 나머지 분들은 폐하를 모시고 탈출하는 것으로 하겠소. 적들은 분명히 우리가 북쪽으로 달아날 것을 예상하고 그 방향을 집중적으로 포위망을 구축했을 것이외다. 여러분은 반대편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평지 아래에 도착하면 거기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으시오.”

 

장수들이 작전을 마치고 능산이 앞장서서 왕건의 막사로 향했다. 막사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왕건은 장수들의 작전회의 결과를 보고받고 눈물을 흘렸다. 이번 전투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인 것이다. 능산이 보고하는 작전의 주요 내용은 이러했다.


“모든 대책의 중점은 폐하를 안전하게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후백제군의 포위망을 돌파해야 한다. 정탐병의 보고에 의하면, 후백제군의 포위망은 고려군의 퇴로로 예상하는 공산의 북쪽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나 공산의 면적이 너무 넓어 완전하게 포위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시간을 지체하여 서라벌에서 이동하고 있는 후백제 주력군이 가세하면 탈출이 어렵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작전을 수행한다.

 

첫째, 폐하를 모시고 탈출하는 군사는 이미 각 예하 장수가 선정한 30여 명 정도의 극소수 정예병으로 편성한다. 이들은 후백제군 복장으로 변복하여 탈출을 시도한다. 탈출 방향은 적이 예상하는 경로와는 반대로 공산 남쪽 계곡의 적진에서 활로를 찾아 동쪽으로 이동한 다음, 적진을 벗어났다고 판단될 때 탈출 방향을 북쪽으로 잡는다. 폐하를 모시는 책임은 마군장군(馬軍將軍) 사귀(沙貴)와 박수문(朴守文), 수경(守卿) 형제가 맡는다.

 

둘째, 폐하가 안전하게 탈출에 성공할 때까지 후백제군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 따라서 나머지 장군들은 결사대를 이끌고 후백제의 주력군과 접전을 벌이면서 그들을 유인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결사대는 능산(能山)과 김락(金樂), 전이갑(全以甲), 의갑(義甲) 형제 등이 맡는다.

 

마지막으로 능산은 고려왕의 복장으로 후백제군의 시선을 끌기로 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상황이 위급하니 부득이 고려왕을 상징하는 투구와 백마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기로 한다.”


능산이 회의 결과를 보고하는 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왕건이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벌떡 일어나 펄쩍 뛰면서 반대했다. 자신을 도피시키기 위한 결단과 충정을 이해하지만, 자신은 군사들과 끝까지 생사고락을 함께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능산을 비롯한 수하 장수들은 왕건을 설득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새벽녘이 가까워서야 마침내 왕건은 고집을 꺾었다. 자신이 살아남아야 고려의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는 명분론 앞에서는 할 수 없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능산은 준비한 대로 백제군 병사의 복장을 왕건에게 입히도록 했다. 수하 장수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왕건은 수하 장수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훗날을 기약하고 심복들을 따라 막사를 나섰다. 누가 봐도 후백제군 패잔병들의 모습이었다. 왕건은 눈물을 흘리며 능산과 김락, 전이갑, 의갑 형제와 일일이 포옹하며 꼭 살아서 다시 만나자고 당부했다. 막사 안에는 모두 말없이 흐느끼는 소리로 무거운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자. 이제 날이 밝아오고 있소. 마군장군. 폐하를 잘 모셔야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능산이 마군장군 사귀와 박수문, 수경 형제를 향해 두 손을 모아 읍을 하자, 여러 장수가 함께 읍을 했다. 사귀와 수문, 수경 형제는 눈물을 훔치며 능산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의 손을 잡았다. 

 

마군장군 사귀(沙貴)는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卜智謙)의 초명으로 사괴(砂瑰)라고도 한다. 그는 궁예 휘하에서 마군장군으로 있다가 918년 배현경 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개창하고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면서, 면천 복씨(沔川卜氏)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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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전경

 

박수문(朴守文)은 아우 수경과 함께 황해도 평주(平州, 평산)의 대호족으로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박지윤(朴遲胤)의 아들이다. 이들은 모두 왕건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곧 날이 밝아옵니다. 어둠이 가시기 전에 폐하를 모시고 이 골짜기를 벗어나야 합니다. 서두르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왕건은 울먹이며 능산을 비롯한 여러 장수의 손을 다시 잡으면서 떨어질 줄 몰랐다. 능산이 사귀를 향해 눈짓하자 수문, 수경 형제가 왕건을 잡아채듯 부축하고 막사를 나섰다. 능산을 비롯한 여러 장수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후백제군으로 변복한 왕건과 수하 장수들이 막사를 떠나 계곡 반대편 남쪽 기슭으로 사라졌다. 하늘에는 초승달이 구름에 가려있고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초겨울 찬바람이 주변을 쓸고 지나갔다.

 

왕건 일행이 사라진 골짜기를 향해 여러 장수는 일제히 나지막이 소리쳤다. 

“폐하. 부디 성심을 굳게 하시고 이 위기에서 벗어나 사직을 더욱 굳건히 하소서. 부디 강건하소서.”

 

왕건 일행이 어둠을 따라 골짜기 아래로 사라지자 능산은 왕건으로부터 넘겨받은 투구와 복장을 갖추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에 올라 여러 장수와 군사들을 바라보며 장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군사들은 조용히 소리 없이 창검을 들어 올려 화답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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