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시내버스 종점 기행(여름) - 온정면 외선미 부달골

그 산골에 할매들이 살고 있네
기사입력 2024.10.10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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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선미2리 부달골 시내버스 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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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종점 마을 부달골 할머니들

 

울진 시내버스 노선은 남북으로 되어 있다. 북쪽 기점은 울진읍 군청 앞 정류장에서 출발하고, 남쪽 기점은 평해읍 터미널에서 시작한다. 울진은 남북 해안이 길어서 200여 리나 되고 내륙에는 산골이 많다. 그러니 종점도 여러 갈래다. 지난번 북쪽 종점인 북면 해안마을인 고포에 이어 두 번째 여름 기행이다. 이번에는 평해읍에서 온정 노선인 외선미2리 부달골까지 종점 기행이다. 필자도 온정면 소재지에는 여러 번 가 보았지만, 부달골에는 처음으로 간다. 일차 답사에는 승용차로, 이차로는 평해읍 출발, 온정 외선미 부달골 종점까지 가는 울진 시내버스를 타고 그 풍광을 취재했다. 


이제는 시골에서조차 승용차 시대가 되어 시내버스를 탄다는 게 별스러운 일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도 시내버스는 전국에서 주민들의 발이 되어 농산어촌 곳곳을 운행하고 있다.


지난 봄철 고포마을 기행에서는 처음으로 도경계를 넘어 강원도 삼척시 호산을 돌아 해안도로를 타고서 고포마을까지 갔다. 당시 종점인 고포마을 주민들은 미역 채취하느라 바쁜 하루였다. 수정보다 더 맑은 고포 바다에는 해녀들이 봄을 건져 올렸다. 건져 올린 미역 줄기마다 누런 황금빛이 햇빛에 반짝였다. 마을 주민들은 건져온 황금빛 미역을 채반에 한줄기씩 정성스레 곱게 깔았다. 그리고 며칠 지나면 자연의 손길인 햇빛이 검은색 미역을 선사해 줄 것이다. 고포 바다에는 아직 보물이 가득한 아름다운 바다이다. 고포 종점 시내버스는 오늘도 짭조름한 소금 바다 풍광과 미역 향기를 머금은 채 해안선을 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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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시외버스터미널(좌)와 백상열 기사(우) 

 

평해 정류장 대합실에 웬 그림들이 가득?

7번 국도변 평해 들녘은 초록으로 물들고, 여름날 아침 햇발은 지평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 고장 자랑거리인 관동팔경의 푸른 솔밭과 월송정을 지나 승용차로 평해읍 터미널에 들어선 게 꽤 오래된 느낌이다. 승용차를 버스 주차장에 대고 내렸다. 햇살이 따갑다. 벌써 시멘트 바닥에서 열기가 치받는 듯하다.

이번에 동행할 버스 기사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백상열 기사님이다. 그는 울진 시내버스 운행 경력만 35년의 최고참이다. 금강송면 소광리 출신으로 지금은 평해읍에 거주한단다.


울진 시내버스 온정 방면 노선은 평해읍 버스 여객 터미널에서 시작한다. 터미널은 한산했다. 주차장 시멘트 바닥에서 열기가 올라오는 느낌이다. 평해읍 터미널은 한산했다. 폭염경보가 내린 이 뜨거운 날에 바깥나들이 자제가 당연한 것이다. 울진과 포항 대구 방면으로 오가는 직행버스들이 울진 시내버스와 함께 정차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시내버스가 있는 곳으로 대여섯 분의 노인들이 왔다. 이들에게 어디 가시느냐고 했더니 기성 망양이나 후포 방면이었다. 온정 방면으로 가는 분은 없었다. 노인들은 터미널 그늘에 놓인 의자에 짐을 내려놓고 한담 중이다. 온정으로 출발시간이 30분쯤 남아 평해읍 버스터미널 대합실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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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황재종이 그린 인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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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합실이 서양화 전시장 같다. 벽면에는 인물화, 시골 장날 풍경과 2층 계단에는 알몸그림(누드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인물화는 백범 김구 선생, 김수환 추기경,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탤런트 최불암 등이다. 

 

시골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모습, 화가 사무실이 있는 2층 계단에는 알몸 그림과 춤추는 한국 무희의 모습들이 게시되어 있다. 30여 점은 될 것 같다. 

 

내 눈에는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그림과 인물화가 이채롭다. 울진 시골에서는 주로 정물이나 풍경을 그린 전시회가 많았다. 특정 인물이나 지역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시골 버스 대합실에 저렇게 멋진 그림들을 그려 전시한 주인공은 누구일까? 궁금해졌다. 마침 한쪽 벽면에 화가 소개가 있었다. 황재종? 낯선 이름이다. 다음은 소개 일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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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종 자화상

 

황재종(黃載鍾. Hwang, Jae-Jong)

경북 울진 평해(오곡1리)가 고향이다. 1991년 계명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인물화 표정 표현 연구>로 인물화의 이론과 묘법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파리의 <그량쇼미에 아카데미>에서 인물화를 수학하였으며, 인체의 근원적인 이해를 위하여 <연세대학교 해부학교실>에서 연구를 하였다.

 

고향 사람들의 5일 장날의 일상을 표현한 <귀로>라는 작품으로 <한국파스텔화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중원문화인물역사기록화 <천주교의 전래와 박해>를 제작하였다. <알몸 그리기> 공연 기획 등 2019년 현재 12회의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한국미술협회>,<한국파스텔화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이하 생략)


참으로 오랜만에 멋진 그림으로 눈 호강을 했다. 화가 소개에 연락처가 있어 통화가 되었다. 반가운 목소리로 시골 버스 대합실에 멋진 그림 전시장을 마련한 게 아마 대한민국에서 최초가 아닌가 싶다 했더니, 그래요? 하면서 오는 가을에 한 번 만나 그의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로 약속했다. 

 

시내버스에서 만난 그는? 

오늘은 평해 시외버스 정류장이 한산하다. 직행버스들이 들어왔다가는 곧바로 빠져나간다. 시내버스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백상열 기사를 보고 승객이 없네요 했더니 평일은 거의 없고 장날에는 좀 많단다. 평해 10시 출발 온정행 시내버스를 탔다. 승객이 딱 한사람이다. 50세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이다. 그와 마주이야기(대화)를 하기 위해 앞자리에 앉았다가 통로를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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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변에서 온정 고려호텔로 일하러 온 이홍철씨

 

『안녕하세요? 어디에 사시는데 아침 일찍 평해에 나오셨네요?』 

필자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온정 고려호텔에서 일하고 있는데 고혈압약을 사러 나왔단다. 울진 말투와 좀 달라서 온정에 사느냐고 물었다. 뜻밖에 그는 조선족(재중동포)이었다.

『아뇨, 중국 조선족이에요. 돈 벌러 나왔어요.』

나보고 어디에 가시느냐고 되물었다.

울진 시내버스 종점 기행 글을 쓰기 위해 버스를 탔다고 하자, 그가 반색하며 자기도 시인이란다. 그와 나눈 대화는 대강 이렇다.

 

그의 이름은 이홍철(53세, 010-5627-3415)로 중국 연변 출신이다. 아버지 고향은 함경북도란다. 이홍철씨는 연변대학교에서 조선 문학을 전공하고 졸업했다고 한다. 28세 되던 해인 1999년도에 시인으로 등단했다고 한다. 『연변작가협회』 이사를 역임했고, 지금은 『칭따오작가협회』 고문이란다. 

 

중국에는 현재 56개 민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조선족이 내는 문학지와 월간지로는 연변문학, 장백산, 도라지, 송화강, 민족문학 등이 있고, 일간신문으로는 요녕신문, 연변일보, 길림신문, 흑룡강 등이 발행된다고 한다.

 

2013년도 한국에 입국하여 10여 년째 생활하고 있으며, 가족은 중국 칭다오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온정 고려호텔에서 종업원으로 일한 지 3개월로 온정이 사람 살기에 너무 좋단다. 그런 그에게 울진뉴스 책자 한 권을 주었다. 그는 웃으며 월간 울진뉴스를 들고 사진 촬영에 응해주었다. 


그는 지금까지 산문(소설, 수필 등)과 시 600여 편을 발표했다고 하니 상당한 문단 활동 이력이다. 한국에 들어와서도 『월간문학』과 『모던포엠』에 시를 기고했다고 한다.

그와 이야기꽃을 피우며 오는 사이 버스가 백암온천 정류장에 닿았다. 그가 차에서 내리며 잘 가시라고 필자에게 인사를 했다. 나도 그에게 하는 일마다 행운이 있기를 빌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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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꽃길을 달리는 울진 시내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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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 온정 간 도로확장 공사(우) 

 

붉게 핀 배롱나무 꽃길

평해읍에서 백암온천까지 배롱나무 명품 꽃길은 17km, 40리에 이르는 국내 최장 배롱나무 명품 꽃길로 유명하다. 배롱나무는 경상북도의 도화(道花)이기도 하다. 지금 한창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다. 올여름같이 뜨거운 햇살과 가뭄에도 쉼 없이 꽃을 피워서 가지마다 꽃송이가 탐스럽다. 이 꽃길은 2001년 제2회 아름다운 거리 숲에 선정된 곳이다. 


배롱나무의 다른 이름에는 목백일홍, 양반나무, 간질나무, 간지럼나무 등이 있다. 꽃이 백일동안 핀다고 해서 목백일홍이라고 한다. 목백일홍(木百日紅)은 나무 백일홍이고, 한해살이 백일홍은 국화과에 속하는 풀꽃 백일홍이 있어 가끔 헛갈릴 수가 있다. 

 

『양반나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나무들은 봄이 되면 잎을 피우는데 양반 권위를 부리느라 『에헴』하고, 가장 늦게 잎이 돋아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줄기가 매끄럽고, 반들반들하기에 손톱으로 살살 긁으면 나무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간질나무, 간지럼 나무라고도 한다. 재미있는 나무 이름이다. 


배롱나무 꽃길 속을 시내버스가 달리지만 평해 삼달2리를 지나면서 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 왜냐하면, 평해↔온정(백암온천) 간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도로공사로 길은 좁아져 버스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천천히 안전운행하기도 한다. 중간중간에 굴이 뚫리고 있다. 굽은 도로를 넓히고 직선으로 바로 펴기 때문에 얼마쯤은 오고 가는 불편을 참아야 한다. 배롱나무도 캐내어 다시 심었다. 하지만 공사가 끝나면 탄탄대로의 길이 열려 목백일홍 꽃길을 다시 감상하는 즐거운 관광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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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읍 삼달2리 비리재 봉우리에 있는 신래태실. 현재 이 곳에는 태함만 남아 있다. 

 

표지판 뒤쪽으로 보이는 왼쪽은 기석, 오른쪽은 개석이다

 

왕조 권력의 상징, 신래태실

버스는 삼달2리를 지나 신래태실 봉우리가 있는 비리재를 넘어간다. 길가에 신래태실 표지판이 있다. 태실이란 왕실에서 자손이 태어나면 의식과 절차를 거쳐 태(胎)를 묻은 시설을 말한다. 즉, 태(胎)는 태어난 아기의 생명선이며 근원이라 하여 예로부터 소중하게 다루었는데, 특히 조선 시대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그 태를 전국의 길지(吉地)를 골라 태실을 만들고 묻었다.

 

평해읍 삼달2리 고갯길 왼쪽 산봉우리에는 신래태실이 있다. 평해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온정면 방향으로 국도 88호선을 따라 약 2.8㎞ 가면 삼달2리 마을의 <베릿재> 또는 <비리재>라는 고개가 있다. 베릿재의 좌측 하천 변에 삼달리 태실지가 있다. 삼달리 태실지 관련 항목 보기는 북서쪽의 주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의 끝자락에 돌출되어 삿갓처럼 솟아오른 봉우리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태지석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태실의 주인은 1486년(성종 17) 12월 6일 오후 9~11시 사이에 태어난 왕자 이견석으로, 장태는 다음 해인 1487년(성종 18) 4월 7일 오전 11~오후 1시 사이에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태실이 조성되는 태봉은 명당 조건에 따라 3등분으로 구분되는데, 1등급에는 왕의 태실, 2등급에는 대군과 공주의 태실, 3등급에는 왕자와 옹주의 태실로 나누었다고 한다. 

태실이 조성되면 주위에 금표(禁標)를 세워 채석·벌목·개간·방목 등 일체의 행위를 금지시킨다. 금표를 세우는 범위는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왕은 300보(540m), 대군은 200보(360m), 기타 왕자와 공주는 100보(180m)로 정하였다.

 

관할 구역의 관원은 춘추로 태실을 순행해 이상 유무를 확인한 뒤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태실을 고의로 훼손했거나 벌목·채석·개간 등의 행위는 국법에 따라 엄벌하도록 정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울진향토문화전자대전, 심현용 박사, 현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장)


왕조 권력의 상징, 태실! 금수저들의 태는 이렇게 묻어주고 지방 관원이 엄격하게 관리·보호해 주었다. 그리고 왕족 신분이라도 태실도 등급을 나누어 묻었다 하니 조선왕조의 신분과 지위, 계급 구별이 엄격했음을 알 수 있겠다.


신래태실이 있는 비리재를 넘어서면 온정 방향 왼쪽으로 냇가가 나온다. 그 냇가를 수정계라고도 한다. 물이 수정처럼 맑다는 뜻인 이 하천은 신래태실 봉우리를 끼고 평해 들을 지나 동해로 흘러드는 남대천이다. 수정계가 흐르는 냇가에는 검붉은색의 넓은 바위가 하나 있다. 팔선대라는 이름이 붙은 바위다. 팔선대 맞은편 도로에는 지금 도로 확장과 터널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 남대천 88번 평해-영양간 국도를 따라가면서 역사적으로 평해, 온정 지역과 관련이 있는 인물로는 조선 선조 대에 이곳 평해로 유배 온 이산해를 빼놓을 수 없다.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고려 말 유학자인 목은 이색의 7대손으로 조선 선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자 문장가였다. 그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입하도록 했다는 정철 등 서인의 탄핵을 받아 강원도 기성(평해의 옛 지명)으로 3여 년간 유배를 왔다. 그가 유배 생활 중 남긴 글이 鵝溪遺稿(아계유고, 일명 기성록箕城錄)이다. 아계유고에는 조선중기의 평해의 자연과 풍토, 사람살이의 모습과 사회상 등을 시와 산문 남겨 놓아 울진 지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는 평해, 기성 지역인 사동기, 망양정기, 해월헌기, 기성풍토기, 황보촌기, 월송정기, 유광흥사기, 서촌기 등 다수의 산문과 기성팔경을 읊은 온탕정, 월송정 등 483여 수의 시를 남겼다. 그는 일평생 남긴 840수 중 절반 이상의 시를 울진에서 남겼다. 그는 유배 3년 기간 중 달촌(현 평해읍 삼달리)에서 5개월간을, 서촌(현 온정면 주령 일대-온정과 선미)에서 2개월간, 황보(현기성면 황보리 노동마을)에서 2년 6개월 생활했다. 이때 이산해는 백암산과 주령 일대 풍광과 사찰들을 유람했다. 따라서 그가 남긴 아계유고는 유배 생활 중 창작된 유배문학이나 다름이 없다. [출처] 김진문/울진+산책, 유배자의 삶<1> 참조, 2021. 윌이엔씨)


위에 나오는 팔선대라는 바위 이름은 평해 유배 시절에 이산해가 자신의 모습을 자연과 함께 노니는 신선에 비유하여 쓴 팔선대기(八仙臺記)라는 산문에서다. 이산해는 팔선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곳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옛날 태수의 아들이 나그네와 이곳에 노닐었는데 함께 모인 사람이 여덟 명이었기에 이렇게 이름을 지어 팔선대라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쓴 팔선대기는 수정계 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심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배 생활 중이라 초라하게 보일 수 있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은 신선과 같이 평안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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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재 너머 남대천 강변의 팔선대 바위

 

하지만 지금의 팔선대는 안내 표지판도 없고, 그저 흘러가는 남대천에 놓인 둥글 널찍한 하나의 바위일 뿐이다. 이산해는 기성팔경 중 하나로 이 팔선대를 두고 시를 읊었다.


관로가에 불쑥 솟은 저 푸른 바위

천고의 신선 자취가 참으로 아득하여라

날 저물자 어부 초동 모두 가 버리고

푸른 봉우리 그림처럼 시내 정자를 둘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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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품2리 거주 임종관씨가 콤바인으로 울진에서 가장 일찍 벼수확을 하고 있다

 

팔선대 바로 옆 논에는 광품2리 거주 임종관(61)씨가 콤바인으로 벼수확에 한창이다. 승용차로 이동하다가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임종관씨에 따르면 울진에서는 가장 빠른 벼베기라고 한다. 4월에 모심기를 끝내고 현재 8월 22일에 수확하는 셈이다. 품종은 올벼인『진호』라고 한다. 나락은 전량 농협에서 수매한단다. 이제 농부의 구슬땀이 황금빛으로 물이 드는 가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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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자 아지매 팬션산골이야기(좌), 사과농장(우)

 

명품 사과, 복자아지매 농장

울진 시내버스는 백암온천으로 넘어가는 진고개를 향해 속력을 낸다. 진고개 못 미쳐서 김복자 아지매 집이 있다. 언젠가 어느 행사에서 만난 복자아지매가 한번 들리세요 했던 생각이 떠 올랐다. 그래서 버스 종점 기행 전날 승용차로 백암온천으로 향하다 들렀다. 집안엔 인기척이 없다. 모두 외출했나 보다. 그가 운영하는 『팬션산골이야기』농장은 바로 도롯가에 있다. 기와집과 팬션 건물이 나란히 하고 있다

 

팬션 지붕 너머로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하늘은 더욱 파랗다. 가을이 오고 있다. 대문에는 능소화가 피어나고, 기와 담장 너머 농장에는 사과들이 가지마다 붉게 익어가고 있다. 검은색 누렁 점박이 고양이 한 마리가 마당에 어슬렁거린다. 낯선 나그네를 보더니 사과밭 쪽으로 사라진다. 복자아지매 집은 붉은 사과밭과 푸른 하늘이 어우러져 한 폭 수채화다. 


복자아지매는 도시에서 살다가 십수 년 전에 남편 고향인 이곳 진고개에 정착, 농사를 지으며 성실하게 알콩달콩 살고 있다. 

 

그는 도시 생활에서 산전수전을 겪은바 세상일에도 관심이 많아 최근 울진군의회 의원 후보로 출마하여 낙선한 바도 있다. 그래도 그는 씩씩하게 적극적으로 사회단체 활동 등을 하고 있다.

 

복자아지매 농장 주생산물은 사과와 복숭아이다. 과일맛이 좋기로는 황금 사과 『시나골드』, 보석같은 『루비에스』가 유명세를 타서 해마다 수요가 많아 품절이 된다고 한다. 여름에는 복숭아 맛이 뛰어나 이웃 맛집이라고 소문이 났단다. 내년에는 『부사』라는 사과나무를 심어 첫 수확이 시작된다고 한다. 명품부사를 해마다 많이 생산해서 소비자들에게 변함없는 호평 받기를 기대한다. 

 

이처럼 복자아지매 농장의 사과 유명세는 백암산과 주령의 산수가 주는 신선한 기후와 부부의 정성이 더해 명품 과일이 생산되었으리라. 

 

이날 복자아지매를 만나 귀촌해서 산골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었으련만, 그렇지 못해 아쉬웠다. (연락처:054-788-6766, 010-9055-6638』

 

이제 진고개 하나만 넘으면 백암온천이다. 백암온천을 목전에 두고 놓치지 말고 가 보아야 할 곳이 있다. 『향암미술관』과 『백암산림치유센터』이다. 이 두 명소는 같은 언덕배기에 연이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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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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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산림치유센타

 

미술 작품도 감상하고, 스트레스도 풀고

<향암미술관: 경북 울진군 온정면 백암온천로 1388>

향암미술관(관장 주수일)은 울진군에서 유일한 문화관광부 등록 제1종 미술관으로, 1999년 8월 1일 동양화가 향암(鄕岩) 주수일이 한국 미술 발전을 위해 사재를 들여 설립하였다. 

 

백암온천관광특구 초입의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미술관은 백암온천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산 중턱 길가에 자리 잡고 있는데, 2개 건물에 3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고 마당은 조각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본관 1층의 제1전시실에는 주수일의 개인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에는 한국화 원로들의 작품, 2층의 제3전시실에는 젊은 한국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2층의 수석관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은 희귀한 수석 작품 300점이 전시되어 있고, 그밖에 세미나실, 휴게실 등 편의시설이 있다. (울진군 홈페이지에서)


<백암산림치유센타: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 산 33>

백암산림치유센터(관장 황효기)는 울진군이 2021년 4월 개관했다. 

이곳은 백암산과 후포 바다, 백암온천 등은 힐링과 치유 산업에 가장 좋은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또한, 시설 규모로는 방문자센터, 목공예체험장, 잔디광장, 분재전시관, 야외공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누구나 오면 휴식을 하고 자연과 친숙, 각종 체험활동으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 더구나 분재전시관에는 여러 수형을 가진 분재들이 전시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분재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앞으로 백암산림치유센타는 현대인들이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공간으로 활성화되고, 백암온천 등 관광객 유치에 큰 몫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산해가 금장산, 주령 일대를 둘러보고서 빼어난 경관을 보고 쓴 감상문이 있다. 바로 서촌기西村記이다. 서촌은 평해 서쪽인 지금의 온정, 선구리, 선미 일대이다. 그는 이 글에서『명산승경名山勝景은 세상 어디에나 있으나 사람이 세속의 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명리(名利)에 골몰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저 빼어난 산수를 적막한 곳에 버려둠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아마 이산해는 현 88번 국도가 아닌 선구리 쪽에서 옛길을 따라 평해, 영양간 경계 정상인 주령 고개에서 아스라이 펼쳐진 동해를 조망했을 것이다. 지금도 금장산 줄기가 뻗어내린 주령과 신선계곡의 경관은 수려하다.

 

이 주령과 신선계곡은 한말 신돌석 의병 부대가 울진 방면의 길곡, 갈면을 넘어 불영사를 통해 동해안 지역으로 진출하던 길목이기도 했다.


백암온천에 대한 필자의 추억이다. 노음초등학교 6학년 재학시절(1966년) 1박 2일로 수행 여행을 온 것이다. 수학여행비로 쌀 한 되씩 가지고 갔다. 노음에서 평해까지는 버스로 갔다. 평해에서 온정까지 50여 리를 걸었다. 해가 질 무렵에 백암온천에 닿았다. 


처음으로 간 온정은 완전 산골이었다. 지금처럼 호텔 건물이 없었고 온천장은 목조건물 2층 여관이 딱 하나 있었다. 여관 둘레엔 민가와 논이 있었고, 마을 가운데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야트막한 온정(溫井, 샘)이 있었다. 아침에 동네 사람들이 그 샘에 와서 물동이로 물을 퍼 가기도 했다. 우리는 고지 바가지에 따뜻한 물을 떠먹은 기억이 난다. 지금은 그 우물은 없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어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 

 

당시 촌놈인 나는 목욕탕이라는 시설에 들어가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과 함께 홀딱 벗고 욕탕에서 몸을 씻는다는 게 부끄럽기도 했다. 처음에 주저주저하다가도 나중에는 알몸뚱이로 서로 물을 끼얹는 등 장난만 치다 나온 것 같다. 

 

우리는 목욕 후 저녁을 먹은 다음 고단해 잠에 곯아떨어졌다. 이튿날, 아침에 다시 한번 목욕을 했다. 집으로 되돌아올 때는 출발할 때와는 달리 버스를 타고서 근남까지 왔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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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가을 백암온천으로 수학여행 간 사동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사진 왼쪽 안경 쓴 사람이 필자)

 

이산해와 성현도 즐긴 명소, 백암온천

백암온천은 신라 시대부터 알려진 유서 깊은 온천이다. 조선말까지 지역민들이 주로 이용했다. 백암온천이 본격 개발된 것은 1913년 일본인이 최초로 현대식 여관을 신축, 운영하면서이다. 이후 백암온천은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온천 관광지로 이름난 곳이 되었다. 『온천에 몸을 담가 병을 고쳤다』라는 유래가 처음 나온 곳이 백암온천이다. 

 

1979년도에는 관광특구로 지정되어 8~90년대에는 그야말로 전국에서 몰려든 버스와 관광객으로 여관과 호텔이 늘 붐비던 곳이었다. 당시 울진 관내 학교에서는 수학여행지가 백암온천일 경우엔 관광객 수요가 적은 날을 골라 일정을 잡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백암온천이 코로나 이후 관광객이 급감했다. 이 때문에 일부 호텔에서는 경영이 어려워지자 영업 중단을 결정했다. 그러자 지자체가 대책을 강구에 골몰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은 그간 백암온천 관광이 지역경제를 이끌어 왔는데 이제는 불경기로 걱정이 태산이란다. 앞으로 2024년 말 동해안 철도가 완전히 개통되어 평해역이 신설되어 서울, 부산 등지에서 접근성이 좋아지면 또 다른 온천 관광 시대가 열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백암온천 경기가 하루빨리 되살아나서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기를 바란다.


조선조에도 유명 문인들이 동해안을 유람하거나, 지방관리로 재직 중에 평해와 온정 풍광을 읊은 기성팔경이라는 시를 남겼다. 그 가운데 이산해와 성현이 읊은 백암온천에 관한 시 2수를 소개한다.


① 온탕정 溫湯井 / 이산해


백암산 아래 온천이 있어

한 표주박 물로도 온갖 병이 낫는다네

이제부터 자주 가서 몸을 씻어서

이 늙은이 시벽을 치료해 봐야지


② 탕목정 湯木井 / 성현


옥구멍의 음화가 불을 때는 것 같은데

아홉 용이 엄하게 지키며 신령한 수원을 열어 놓았네

뭉게뭉게 연기 안개가 바위굽이에 퍼지는데

한줄기 샘물 푸른 산아래에서 끓어 오르네

훈훈한 더운 기운 술에 취하는 것 같은데

가마솥에 섶으로 불 땔 일 필요없네

몸을 씻는데 기이한 공효가 있으니

탕반에서만 티끌 때만 벗는 것이 아니라네


이산해의 시 ① 온탕정의 주제는 온천을 이용한 시벽詩癖을 치료이다. 여기서 시벽이란 시 짓기에 지나치게 골몰하다 생긴 병을 말한다. 그는 달촌(현 평해읍 삼달리)에 기거하면서 시를 쓰거나, 백암산 아래 온탕에 드나들면서 그는 인생을 회고했을 것이다.


이산해(1539-1609)는 선조시대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그가 평생 남긴 시가 840수이다. 그 가운데 평해 유배 생활 중에 483수의 시를 썼다. 그는 평해 3년 유배 생활 중 이틀에 시 한 수를 썼을 것이다. 이쯤 되면 시 쓰기에 날마다 골몰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의 시작을 시벽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시인이 어찌 시벽이 없고서야 시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성현(成俔, 1439-1504)은 세조시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가 강원도 관찰로 재직 중에 백암온천을 다녀갔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 ② 탕목정은 당시 백암온천이 자연수로 끓어 오르는 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놓았다. 뜨거운 탕에서 몸의 때만 씻는 게 아니라 마음에 낀 티끌도 벗겨 내는 것이 온천의 기이한 효능임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내면적 성숙함이 중요함을 은근히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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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미리에서 좁은 농로를 지나가는 울진 시내버스(좌), 울진시내버스가 고려호텔 앞 주차장에서 정차하고 있다(우)

 

버스는 종점을 향해서

울진 시내버스가 온정면 소재지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 18분이다. 고려호텔 앞 도로 정류장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88번 국도를 따라 선미 방향으로 운행한다. 

 

버스에는 중국 조선족 이홍철씨가 내리고 필자만 남았다. 잠깐 내려 백암온천의 호텔과 주령의 산세를 둘러본다. 시내버스는 다시 출발하여 영양 방향으로 나아간다. 다시 틱재를 넘어간다. 틱재를 넘어오면서 왼쪽으로 신선계곡 입구 표지판이 보이고 선구리 마을이 나타난다. 

 

버스는 선구 보건진료소 앞을 지나 동쪽 들판으로 달려간다. 밖에서 보면 이 산골에 무슨 논이 있겠느냐 싶지만, 산골치고는 논이 꽤 넓게 펼쳐져 있다. 그 뜨거운 햇살에 벼들은 씨알을 머금고 여물어 가고 있다.

 

버스는 교행이 어려운 좁은 들판 길인 농로를 따라서 간다. 중간에 경운기나 승용차를 만나면 낭패를 당하기 쉽겠다. 


온정 선구리는 예로부터 교통 불편의 오지였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어 시내버스가 다니고 있다. 하지만 선구리에서 서북쪽인 매화면 길곡, 갈면리 간에는 임도가 있으나 험준하여 기상 악화시 차량 통행이 쉽지 않다. 

 

최근에 온정 ↔ 원남(매화) 간 도로 건설이 2025년에 착공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이 구간의 총길이는 11.7㎞이다. 이 도로가 개통되면 매화와 온정의 내륙 교통편의 개선과 지역발전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제 버스는 느긋하게 산골 들판 도로를 지나간다. 도시의 시내버스와는 달리 신호대기도 없다. 인파도 없다. 산과 들판에는 초록이 우거졌고, 하늘에는 구름이 한가롭다. 승객이 없는 정류장은 그저 지나치면 된다. 그러나 백상열 기사는 한눈팔지 않는다. 그는 앞을 주시하며 안전 운행을 하고 있다,

 

외선미2리인 원마를 들렀다가 버스를 돌려 안마를 지나온다. 외선미1리 안마 도로는 시내를 따라 좁은 시멘트 포장길로 꼬불꼬불 곡예 운전하듯이 마을로 들어섰다. 안마는 손병복 현 울진군수의 고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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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 선미감리교회(좌), 평해현령의 영세불망비(우)

 

안마를 돌아 나와 원마에서 문골을 지나다 보니 자그마한 교회가 도로 옆에 있다. 대한감리교 선미교회 (박현준 목사)이다. 산골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작은 교회를 본다는 게 번잡한 도회의 삐까번쩍한(?) 대형교회보다는 왠지 신선한 느낌이 든다. 

 

백상열 기사에게 부탁해 선미교회 앞에서 잠깐 버스를 세웠다. 버스에서 내리자 교회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나오셨다. 아마 목사 사모님 같았다. 교회 건물을 사진으로 찍겠다고 하니 순순히 그렇게 하라고 했다. 교회와 앞 도로에 있는 영세불망비를 찍었다. 

 

뒤에 알았지만, 선미 교회는 신도 수가 불과 열 손가락을 꼽을 정도란다. 부달골에 사는 박영상(85세) 할매는 이 교회의 권사다. 할매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 글 끝에 서술키로 한다.

부달골에는 울진 시내버스가 하루 3회 운행되고 평해 장날에는 4차례 들어온다. 버스는 선미교회를 지나 서북쪽으로 다리 하나를 건너 부달골을 향해 올라갔다. 마을로 들어서는 초입에 낡은 스레트집이 무너져 내리고 있어 오늘의 농촌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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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달골로 가는 중 만난 주민과 낡은 스레이트 농가

 

부달 산골에는 7-8호쯤 되는 집들이 있었다. 버스는 잠깐 마을 정류장에 섰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 전경을 찍었다. 아무도 없이 적막하다. 그 적막을 뒤로하고 버스는 다시 되돌아 온정으로 향했다. 

 

선구리 틱재를 넘어 온정 고려호텔 앞 정류장 도착 시각이 오전 10시 59분이었다. 이곳 정류장에서 평해로 가는 승객 15-6명이 탔다. 온정행보다 평해로 되돌아가는 버스가 다소 북적거린 셈이 되었다. 평해 도착 시각은 11시 19분이었다. 지금은 편도 온정-평해에서 20여 분이면 충분하다. 오전 10시 평해에서 출발, 부달골 종점에서 출발 기점인 평해 도착은 왕복 1시간 20여 분이 걸렸다. 버스가 없던 시절, 외선미에서 걸어서 평해장을 보자면 하루가 꼬박 걸렸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백암온천에 수학여행 온다고 쌀자루 둘러메고 평해에서 걸어 온정까지 왔다. 점심은 아마 금천 냇가에 와서 먹었던 것 같다. 당시 아이들 걸음으로 평해에서 50여 리를 걸었으니 오후 너댓시 쯤 온정에 도착했다. 지금 버스 운행 시간하고는 격세지감이다.

 

백상열 기사 말대로 이 골짝에 사람이 줄어들지만,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버스는 언제나 들어올 것 같다는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일부 지자체는 시골버스 승객 급감으로 적자 운영이 되자 그 대안으로 희망택시 등을 운영하는 등 다각적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 울진 시내버스도 그 대안으로 작은 마을버스를 운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시골버스 운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오늘도 울진 시내버스는 백일홍 50여 리 명품 꽃길과 수려한 주령 풍광과 함께 달리고 있다.


부달골 할매의 이야기보따리 

이 깊은 산골! 부달골이라 한다. 이곳에 울진 시내버스는 하루 세 차례 운행된다. 행정지명은 울진군 온정면 외선미2리다.

승용차로 가다가 고추 따는 마을 주민을 만났다. 부달골을 물었더니 아직 좀 더 가야 한단다.


마을이 보였다. 한 7-8호쯤 되는 마을이다. 승용차를 버스 종점 정류장에 세워두었다. 살아온 이야기를 듣자면 나이가 드신 할머니를 찾아야 했다. 마침 건너편에 할머니 한 분이 감나무 평상 아래에 계셨다. 시내 다리를 건너갔다. 박영상 할머니였다. 그래서 박영상 할머니(85세)와 93세의 배상분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두 분 다 정정하시다. 이야기는 주로 박영상 할머니께서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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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상 할머니 댁

 

박영상 할머니 댁은 버스 종점인 외선미 부달골에 사신다. 종점 정류장 바로 앞산 밑 남향으로 앞에는 시내가 흐르는 그야말로 예쁜 집이다. 할머니 댁으로 건너가는 시내에는 작은 철다리가 놓여있다. 마당에는 감나무가 있어 여름 한 철 시원한 그늘이 되어 주고 있다. 감나무가 할머니의 벗이라고 한다. 그곳 살평상에서 여름 낮을 대부분 보낸다고 한다.

필자가 집으로 들어서자 할머니는 반겨 맞으시며 어데서 오냐고 물었다. 방문한 까닭을 말씀드리자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가서 커피를 타내 오신다. 나는 커피잔을 받아 고맙게 마시면서 감나무 아래 살평상에서 할머니와 마주이야기를 시작했다. 할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보따리는 끝이 없었다. 그간 묵혀온 이야기를 두어 시간쯤 들었다. 주요한 대목만 쓰고자 한다.

 

박영상 할머니의 고향은 안동이었다. 안동시 남후면에서 태어나 남후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지금은 학교가 폐교되었단다. 할아버지는 안동 풍산 출신이다. 꽃다운 나이 19세 때 신랑 얼굴도 못 본 체 혼인을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주로 집안 어른끼리 혼사를 주고받아 결정했으니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렸다! 

 

박 할머니는 안동 풍산에 시집을 갔다. 할아버지 형제는 10남매였다. 시집은 농사를 지었다. 맏이 되는 시아주버니는 참 손도 까딱 않는 분이었다고 한다. 맏이라 시집 어른들이 곱게 키웠다고 한다. 박할머니는 12년간 한집에서 시숙들과 함께 살다가 분가했다니 그 얼마나 고생스러웠겠는가. 시집살이가 고초당초보다 맵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대목이다. 


박 할머니는 형제는 셋, 자매는 넷이다. 모두 일곱이다. 할머니는 딸로는 둘째였다. 할아버지는 벌써 40대 후반에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45세에 혼자 되셨다. 5남매를 혼자 키워 학교에 보냈단다. 

 

할머니가 여기 온정에 온 지는 35여 년이 되었다. 허리 아픈데 온천 요양이 좋다 하여 왔다가 여기에 살게 되었다. 그간 허리와 골반 수술 등 3번이나 큰 수술을 했다 한다. 

한때는 백천 모텔에서 일도 했다고 한다. 큰딸이 시집이 온정이고, 현재는 부달골에 거주하고 있어 돌봐 준다. 딸과 사위는 농사도 열심히 짓고 잘 산다고 한다. 5남매는 결혼도 하고 이제는 독립했다고 한다. 맏아들은 큰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박 할머니는 기독교인이었다. 선미교회에 나간다. 직분은 권사님이다. 다음은 필자가 박 할머니와 했던 마주 이야기 일부이다.

 

할머니 이제 80 넘고 90을 바라보면 인생 살아보니 어때요?  


살아간다는 게 참말로 이루 말할 수 없지만은 그래도 저는 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나갈 동안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넉넉히 지켜주시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항상 저희들을 보호하시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합니다.


느닷없는 기도 같은 말씀에 물었다. 할머니 기독교인이세요?


감리교에 나가, 저는 믿음은 크게 자라지는 않아도 기독교인이야


언제부터 교회 다녔어요, 처녀 때 댕겼어요?


내가요, 여기 와서 다녔구나. 젊을 때 좀 댕기다가 결혼을 시키는데 안 믿는 대로 가서 못 다녔지. (이하 중략)


고등학교 졸업하고 저기 내가 우리 아들한테 니도 대학 시험이라 쳐봐라. 큰집 시숙 딸도 대학을 시험 치는데 너도 대학 시험 쳐 봐라카니. 어먼요! 아버지도 저렇고 편찮으신데 동생들도 있는데 하면서 시험을 치지 않았어. 


아들이 효자다


대학 시험 안 치고 고등 졸업하고 군대 지원을 했는데 공수부대 갔거든. 직업 군인 하려고 갔는데 훈련하다가 그만 탈장 수술을 하니까 그 저거 낙하산 타고 못 내려.

그래서 제대했지. 그래 고등학교 졸업장으로 자격증을 따서 지금은 울산에 있는 큰 회사에 다녀. 삼성에도 오라 하는데 그 회사에서 안 보내줘. 손주도 있어. 좀 있으면 퇴직해.(이하 생략)


우리 손자가 내년 1월 달에 결혼한다. 


아이고야, 잘됐다. 아이고 할머니 복도 많다. (이하 생략)

이 밖에도 할머니가 겪은 6·25 한국전쟁 때 피난 갔던 이야기, 6학년 담임 김구현 선생님 이야기, 동생을 업고 학교에서 공부했던 이야기 등은 생략한다.

삶은 이야기다. 누구나 살아오는 동안 겪은 이야기는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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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달골에 거주하는 박영상 할머니(85세. 좌), 배상분 할머니(93세. 우)와 이야기를 나누는 필자(2024. 8. 22.) 

 

박 할머니 이야기는 끝이 없다. 이야기를 마주 앉아 듣다 보면 서로가 공감되고, 이야기를 통해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삶의 교훈을 얻게 된다. 

 

박 할머니는 젊을 때 혼자되어 거의 40여 년을 자녀 뒷바라지 등으로 산전수전을 겪으며 살아오셨다. 박 할머니의 그런 의지와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건 박 할머니의 신앙심이 아닌가 싶다.

 

다음의 기도문에 그 해법이 암시되어 있는 듯하다. 박 할머니는 늘 이렇게 마음속으로 기도하신단다

『하느님께서 이 땅에 항상 저희들을 보호해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한국이란 나라가 늘 행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할머니의 짧은 기도문에는 보호와 축복, 행복이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하고 거기엔 뭔가 간절함이 담겨 있다.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구의 은혜로 이토록 사랑과 보호받으며 여기까지 살아왔는가. 그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부모님일 수도 있고, 자기가 믿는 부처든 하느님이든 그 무엇인 초자연의 절대자일 수도 있다.

 

박 할머니는 한국이란 나라에 태어나 이렇게 잘 살았다면 그게 축복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한단다. 

 

박 할머니가 산전수전 겪은 이야기를 듣노라면, 우리는 할머니와 같은 지난 어머니, 아버지 세대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잘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박 할머니 삶의 마지막 날까지 행운이 함께 하기를 빌어 본다. 두 분 할머니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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