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2회) 공산(公山)에 빛난 충절(忠節)

평산 신씨(平山申氏) 시조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기사입력 2025.01.1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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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판도(900년경)

 

능산(能山)은 군사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둠 속에서 횃불에 비친 사람은 누가 봐도 고려왕 왕건(王建)이었다. 군사들 가운데 어둠 속에서 말 위에 오른 그가 고려왕 왕건이 아니라 능산이라고 아는 사람은 그를 따르는 장수 몇몇에 불과했다.

 

김락(金樂)이 말 위에 올라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위엄이 서렸다. 초승달은 이미 서산으로 넘어갔고 사방은 아직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말 몇 마리가 내쉬는 콧김이 새벽공기를 타고 분무기처럼 뿌려졌다.

 

“지금부터 우리가 미리 약속한 대로 작전을 수행하려 하오. 우리는 우선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하오. 여러 장수는 모두 나를 따르시오.”

 

김락의 명령과 함께 전이갑(全以甲), 전의갑(全義甲) 형제 등 수하 장수들이 모두 말에 올랐다. 골짜기 능선을 타고 아래로 이동하자, 두 편으로 대형을 편성하고 미리 연락받고 기다리고 있던 한 부장들이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공수의 예를 표했다. 

 

김락이 이들을 향해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지금 대왕 폐하를 모시고 이 골짜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각 부장은 모두 포위망을 뚫고 폐하를 안전하게 모셔야 한다. 알겠는가.”

 

모든 병사가 명령을 따르겠다는 신호로 장검을 두 번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 고려왕 복장을 하고 있던 능산은 장검을 들어 이들에게 화답했다. 고려군은 모두 그가 고려왕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김락이 인솔하는 고려군은 소리 없이 조용히 대오를 갖추어 골짜기 아래로 내려갔다. 어렴풋이 사방이 밝아오고 있었다. 고려군은 숨을 죽이고 골짜기 입구 평지에 이르렀을 때 후백제군 초병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골짜기 입구 부근의 평지에서 진을 치고 있던 후백제군은 고려군이 기습하자 깜짝 놀라 잠시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지만, 곧바로 응전태세를 갖추었다. 고려군이 포위망을 뚫기 위해 기습할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하였기 때문이었다. 

 

능산은 말 위에서 김락과 여러 장수를 보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폐하께서는 지금쯤 충분히 이 골짜기를 벗어나셨을 것이오. 이제 우리가 갈 때가 되었소. 모두 조심하시오. 자아. 우리 부디 살아서 다시 만납시다.”

“자. 공격하라. 포위망을 뚫어라.”

 

선봉에 선 김락의 호령과 함께 고려군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견훤(甄萱)의 군사에게 달려들었다. 

“와아…”

 

고려군은 일시에 후백제 진영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조용하던 골짜기가 일시에 소란스러워졌다. 능산과 김락, 전이갑, 전의갑 형제 등은 일시에 말을 몰아 후백제군에게 다가섰다. 기습에 놀랐던 후백제군은 잠시 전열이 흐트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을 시작했다. 역시 잘 준비된 정예군이었다.

 

“저기… 고려왕이 있다. 고려왕을 잡아라.”

후백제군 사이에서 누군가가 소리치자 일시에 능산이 타고 있는 말 쪽으로 군사들이 몰려들었다. 

 

한나절이 되도록 밀고 밀리던 싸움은 마침내 수적으로 우세를 점하고 있던 후백제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능산은 왕건의 갑옷으로 바꿔 입고 말을 탄 채 전투를 진두지휘하다가 김락 등 수하 장수들과 함께 피투성이가 된 채 장렬하게 전사했다. 후백제 군사들이 능산을 고려왕으로 알고 그의 머리를 베어 견훤에게 가져갔다.

 

고려왕 왕건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가지고 왔다는 보고를 받은 견훤은 뛸듯이 기뻤다, 이제 오랜 전쟁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러나 병사들이 가지고 온 왕건의 수급을 본 순간, 견훤은 비로소 왕건의 계략에 속았음을 알았다.

 

견훤은 크게 노하여 길길이 뛰며 소리를 질렀다. 

“이런… 이게 누구야? 속았다. 이건 고려왕이 아니야! 빨리 고려왕을 추적하라. 반드시 잡아야 한다.”

 

놀란 부장들과 군사들이 사방으로 뛰었다. 당장은 그의 눈에서 사라지는 일이 더 중요했다. 견훤의 분노는 쉽게 식지 않았다.


그 시각, 왕건은 후백제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반대 방향인 남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북쪽으로 달아나는 고려왕을 잡으려는 후백제군의 전략을 역으로 이용한 작전이었다. 복지겸(卜智謙), 박수문(朴守文), 박수경(朴守卿) 형제 등이 그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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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전투 상황도

 

날이 밝아올 무렵, 평지에 이른 왕건과 일행은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내달리다가 다시 산속으로 숨어들어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공산(公山)에서 꽤 멀리 떨어진 동쪽이었다.


왕건 일행은 산속에서 나무꾼을 만나 주먹밥을 건네받고 허기를 채웠다. 일행이 쉬지 않고 계속 북쪽으로 내달렸지만, 가는 곳마다 고려군 패잔병을 추적하는 후백제군을 따서 올리기에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백제군의 수색이 너무 엄중하므로 일행은 계속 산 능선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왕건 일행은 귀환을 위한 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왕건은 공산에서 탈출하여 성주-김천-상주-문경-충주 방향으로 이동하며,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였다.

 

당시 개경의 조정에서는 왕의 소식이 끊어지자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공산 동수에서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전투가 시작되고 나서 모든 연락이 끊긴 상황이었으므로 대책을 마련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구원군을 보내고 싶어도 상황을 알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김락, 김철, 전이갑, 전의갑 등 장군 8명이 전사하고 5천의 직속 기병 가운데 겨우 70명만이 살아남았다. 선발대와 보병까지 합치면 1만 명 이상의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고려군의 피해는 심각했다. 

 

전이갑, 의갑 형제의 사촌 동생인 전락(全樂), 개국공신 평장사(平章事) 호원보(扈元甫)와 대상(大相) 손행(孫幸)을 포함한 8명의 장수가 전사해서 그곳의 지명이 팔공산이 되었다는 설화가 생겨날 정도였다.

 

『삼국사기』와『고려사』에는 신숭겸, 김락, 김철 이외에 다른 장수는 언급되지 않는다. 나머지 장수들의 희생은 각자 가문의 족보에만 기록으로 전한다. 


927년 10월.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지금의 대구광역시 팔공산 일대에서 벌인 이 전투는 후백제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태조 왕건이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직접 전투에 나선 이 전투가 고려군의 일방적인 패배로 마무리되면서 왕건으로서는 일생 최대의 패배를 맛보았다. 

 

그동안 서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며 곳곳에 밀고 당기는 전투를 계속해오고 있었지만, 전력 면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었던 후백제는 이 전투 이후 완전히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투의 결과를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후백제의 위세가 최고조에 달했지만, 정치적인 관점에는 오히려 고려 왕건이 신라 왕실과 여러 호족의 지지를 얻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훗날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결정적인 전투이기도 했다. 

 

이 전투 결과, 그동안 유지되어 오던 두 세력 간의 평화가 깨어지고 무력 충돌이 격화되면서 통일전쟁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상당 기간 고려에 밀리고 있던 후백제였지만 이 전투 직후에 벌어진 고창(古昌, 안동)전투 이전까지 확실하게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경상도 지역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 역시 대부분 위축되었다. 후백제는 신라를 실질적인 속국으로 만든 동시에 영토 역시 신라 9주 가운데 6주를 장악했다 또, 오랫동안 눈엣가시였던 나주 점령에도 성공함으로써 건국 후 최대 판도에 이르렀다. 한편 신라는 서라벌과 양주(경남 동부) 일부만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었고, 고려는 한주(漢州, 경기도와 황해도), 삭주(朔州, 영서 지방), 명주(溟州, 영동 지방) 등 3주만을 점유하고 있었다. 

 

견훤은 이 전투의 승리로 아버지 아자개(阿慈介)의 세력인 상주와 고향인 문경 일대의 호족 세력까지 장악하는 등 경상도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했고, 신라 왕실을 지지하지 않은 지 오래된 옛 백제 지역에서의 지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왕건을 지원하던 호족들의 세력도 위축되었고, 특히 경애왕 당시까지 신라 왕실에 충성하던 서라벌 근처 호족들은 제아무리 신라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어도 당장은 살려면 견훤에게 협조할 수밖엔 없었다. 경순왕 역시 즉위 초반 몇 년 동안은 견훤에게 협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의 급박했던 정황은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다음과 같이 훨씬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고려왕이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몹시 급하게 왕을 포위하였는데, 신숭겸의 모습이 왕을 닮았으므로 대신 왕의 수레를 타고 김락과 더불어 힘을 다하여 싸우다 죽었다. 견훤의 군사는 그를 고려왕으로 알고 목을 베어 가지고 갔으며 고려왕은 겨우 몸만을 모면하였다. 견훤이 승리한 기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을 취하여 전야(田野)에 노적한 곡식을 모두 불살랐다.”

(『동사강목(東史綱目)』권(卷)5 하(下) 정해년(丁亥年) 겨울 11월조)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한 능산의 죽음은 왕건이 후삼국 통일전쟁에서 성공할 수 있게 만든 디딤돌이었고, 고려사회 내내 그를 충절의 상징으로 만든 일대 사건이었다.

 

능산(能山)은 죽은 후 머리가 잘려 시신만으로는 그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때 유금필(庾黔弼)이 “능산의 왼발 아래에 사마귀 무늬가 있는데, 북두칠성과 같았다.”라는 신체적 특징을 말했고, 그의 말을 근거로 시신을 수습하게 되었다. 

 

태조 왕건은 능산의 죽음이 너무 안타까웠다. 서로 의기가 투합하여 호형호제하면서 지내왔던 시간이 얼마였던가!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서로의 심중을 꿰뚫어 볼 정도로 형제처럼 지내왔던 심복 능산의 죽음으로 왕건은 거의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왕건은 목공(木工)을 시켜 머리가 없는 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만들어 얼굴을 새기도록 했다. 그리고 조복(朝服)을 입혀 극진히 장례를 치르도록 조치했다. 장례 기간 내내 왕건은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을 정도로 상심한 채 말을 잃었다. 능산의 시신은 그의 출신지인 춘천(광해주)으로 옮겨져 비방동(悲方洞)에 묘소를 정하여 안장되었다. 


신숭겸의 이름은 어려서부터 능산(能山) 또는 삼능산(三能山)으로 불렸다. 왕건은 그에게 ‘신(申)’을 성으로 하사하고 이름을 ‘숭겸(崇謙)’, ‘평산(平山)’을 본관으로 내렸다. 이로써 능산은 평산 신씨(平山 申氏)의 시조 신숭겸(申崇謙)이 되었다. 또, 그에게 장절공(壯節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장(甫藏)을 원윤(元尹)의 벼슬을 내렸으며, 공산전투 현장과 가까운 현 대구시 동구 지묘동 위치에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명복을 빌게 하였다. 

 

왕건은 팔관회 행사를 거행할 때마다 공산전투에서 전사한 신숭겸과 김락 두 장군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것을 너무 애석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짚으로 두 장군의 형상을 만들고 관복(冠服)을 입혀 연회석에 앉히고는 생전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술과 음식을 바치면서 두 장군의 충절을 기리도록 했다. 

 

그때부터 고려왕조에서는 팔관회 때마다 두 장군의 형상을 만들어 앉히고 추모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백 년이 지난 1120년(예종 15), 왕이 서경(西京, 평양)에 행차하여 팔관회를 열었을 때, 연회석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운 까닭을 신하들에게 물었다.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공산전투의 상황과 신숭겸을 비롯한 여러 장수의 죽음에 관해 설명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태조가 지시하여 시작된 행사라는 것을 말했다.

 

예종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두 장군을 애도하는 노래를 직접 지어 불렀다


主乙完乎白乎  님을 온전하게 하기 위한

心聞際天乙及昆  그 정성 하늘 끝까지 미치고

魂是去賜矣中  넋은 이미 가셨지만

三烏賜敎識麻又欲  님께 내려주신 벼슬 또한 대단하구나.

望彌阿里刺  바라보니 알겠구나.

及彼可二功臣良  그때의 두 공신이여

久乃直隱  이미 오랜 옛날의 일이나  

跡烏隱現乎賜丁  그 자취는 오늘에도 드러나는구나.


이 향가는 『도이장가(悼二將歌), ‘두 장수(二將)를 애도(悼)하는 노래(歌)’』라는 이름으로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 기록되어 전한다. 고려 중기에 불린 이 노래는 이두로 표기된 향가의 잔존형식으로 창작연대와 창작 동기가 밝혀져 있어 문학사적으로 매우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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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임금 경애왕릉


공산전투(927년) 12월에 견훤이 왕건에게 국서를 보냈다. 그 내용에는 『삼국사기』나 『고려사』 등 기존의 사료와는 내용이 다르거나 실리지 않은 것들이 다수 보이는 게 있다. 


신라의) 백관들에게 밝은 햇빛과 같은 맹서(盟誓)를 받고, 육부(六部)에 의로운 기풍을 유시(諭示)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간신은 숨거나 도망쳐버리고 임금이 죽는 변고가 생겼습니다. 결국 (내가) 경명왕(景明王)의 표제(表弟, 외사촌 동생)이자 헌강왕(憲康王)의 외손이 되는 분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였습니다. (『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寄高麗王書)』중)

 

정리해 보면, 견훤이 서라벌을 정벌한 것은 “신라의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이 왕건을 서라벌로 초청하려고 한 것을 알고 그것이 결코 의(義)로운 일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군대를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막상 서라벌을 점령하고 보니 간악한 신하들은 숨거나 도망쳐버렸고 뜻하지 않게 신라왕이 돌아가시는 변고가 생겼다.”라는 내용이다. 


즉, 서라벌 약탈을 왕건이나 신라에 책임을 돌리는 건 그렇다 쳐도 경애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나는 왕을 죽이거나 할 생각이 없었는데, 내가 오니까 이미 돌아가셨더라.”라고 해명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견훤은 “나는 존왕(尊王)의 의리가 두터운 사람이다.”라고 하며 자신은 신라 왕실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적극 피력하고, 서라벌에 쳐들어가서 새로운 왕을 세운 것은 “신라가 고려와 연결하여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국토를 폐허로 만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라고 자기 입장을 적극 밝히고 있다.

 

이는 기존의 사료에서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했다.”라고 한 기사와는 다른 내용으로 흥미롭다. 『삼국사기』나 『고려사』의 기록이 신라의 후예들에 의해 편찬된 기록이므로 어느 정도 윤색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이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공산전투에서 왕건의 참패는 그에게 손해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공산전투 자체는 견훤의 군사적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전투였으나, 왕건이 신라를 구원하려 했다는 점에서 백성들의 여론은 확실하게 고려 측으로 기울어졌다. 

 

게다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견훤이 신라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했다.”라는 부도덕한 풍문은 신라의 백성과 호족들이 견훤에게 큰 반감을 보이게 만든 메가톤급 효과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견훤에게 도덕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주는 저잣거리에서의 여론은 호족들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었다. 명주를 지배하고 있던 호족 김순식이 직접 개경으로 왕건을 찾아온 것도 그런 영향이었다. 그는 명주군왕이라 불릴 정도로 영동 지방의 강력한 호족이었고 궁예가 독립 세력을 형성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불편했는데 그런 그가 직접 왕건을 찾아온 것이다. 사실상 김순식이 왕건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었다. 김순식이 고려에 귀부하자 북부 3주 지역의 호족들이 다투어 왕건에게 귀부하기 시작했다. 

 

경순왕도 즉위 초기에 백제 눈치를 보다 결국은 고려에 귀부하였으며, 고창전투에서도 그 일대 신라 호족들이 왕건의 편을 든 것이 결정타가 되었음을 고려할 때, 공산전투 이후의 흐름으로 보면, 견훤은 군사적 능력에 비해 정치적 판단력이 매우 부족했음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왕건으로서는 공산전투를 통해 군사적으로는 완패함으로써 견훤에게 주도권을 빼앗겼지만,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신라 왕실과 신라 왕실에 충성하고 있던 경북 동부, 경남 일대 호족들의 지지를 얻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훗날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던 전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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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절공 신숭겸 동상


신숭겸의 출신과 죽음에 대하여 『고려사(高麗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신숭겸(申崇謙)의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니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있었다. 10년(927)에 태조가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과 싸우다가 불리하게 되어 견훤의 군대가 태조를 포위하였는데 형세가 심히 위급하였다. 

이때 신숭겸이 대장으로 있었는데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태조가 그의 전사를 매우 슬퍼하였으며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그의 동생 능길(能吉), 아들 보(甫), 김락(金樂)의 동생 철(鐵)을 모두 원윤(元尹)으로 등용하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崇謙初名能山光海州人 長大有武勇 十年 太祖與甄萱戰於公山桐藪不利萱兵圍太祖甚急 崇謙時爲大將與元甫金樂力戰死之 太祖甚哀之 謚壯節 以其弟能吉子甫樂弟鐵?爲元尹 創智妙寺 以資冥福)”  - 『고려사(高麗史)』권92 열전5 홍유(洪儒) 부(附) 신숭겸(申崇謙)조


이에 의하면, 신숭겸의 출신지는 광해주로, 현재의 춘천 지역이다. 그에 관한 최초의 공식기록인 『고려사』에서는 고려 건국 과정과 공산전투에서 그의 역할만 기록되어 있을 뿐, 원래 이름은 삼능산(三能山) 또는 능산(能山)이며, 시호는 장절(壯節), 광해주(光海州) 사람으로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있었다는 것 외에 가계, 성장 과정, 관직 생활 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런데 신숭겸의 출신지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1 「황해도(黃海道)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 인물조」에는 원래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사람인데 태조가 성(姓)을 주고 평산을 본관으로 하였다고 달리 기록되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9 「전라도(全羅道) 곡성현(谷城縣) 인물조」에도, 그가 곡성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숭겸은 무장(武將)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특히, 그의 활 솜씨는 매우 뛰어났던 것 같은데 그와 관련된 무용담도 전하고 있다. 즉, 그와 함께 황해도 평산으로 사냥을 나간 왕건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가리키며 “저 기러기 떼 중 앞에서 세 번째로 가는 기러기를 맞춰 보라.”라고 명하자 화살을 쏴서 그 기러기를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전하는 것이 바로 그런 예다. 이 설화는 곧 평산 신씨(平山申氏)의 본관이 평산(平山)이 되는 유래라고 전한다.

 

그는 본래 궁예 휘하의 장군이었다. 그러나 궁예가 자신을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며 방탕한 생활로 민심을 잃자 배현경, 홍유, 복지겸과 함께 그를 폐하고 왕건(王建)을 추대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태조 1년(918)에 1등 공신(功臣)에 올랐다. 그 후 그는 고려 태조 10년(927)에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 동화사) 전투에서 대장군으로 출전하여 견훤(甄萱)의 군대에 포위되자 왕건을 대신하여 순절(殉節)함으로써 왕건을 사경(死境)에서 구하여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성취케 한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였다.


신숭겸의 신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이 능산(能山) 또는 삼능산(三能山)이라는 것 때문에 그의 신분이 평면 층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나말여초(羅末麗初)에 활약했던 인물들 가운데 “능(能)” 자를 이름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이 대부분 호족 출신으로 후삼국 시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신숭겸도 호족 출신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실제로 신라 말기에는 신라 중앙의 왕족, 귀족층이 아니면 지방 명문가 출신들도 성씨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후백제 사람으로 신검(神劍) 형제들이 아버지 견훤을 유폐시키고 정변을 일으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찬(伊湌) 능환(能奐), 정2품 대광(大匡)이었던 만세(萬歲)나 매곡성주 공직(龔直) 등 고위층이나 유력가이면서도 성씨가 전해지지 않는 사례는 많다. 

 

심지어 호족 출신인 태조 왕건도 그의 선대(先代) 성에 대한 기록이 확실치 않다는 점도 당시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고려사』 태조 시기를 살펴보면 성씨가 없는 관료나 호족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데, 같은 시기에 성씨가 전해지는 박지윤(朴智胤), 유천궁(柳天弓) 같은 유력 호족들 역시 당대에 세보(世譜)를 만들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전하는 대부분 성씨의 시조가 바로 후삼국 시대 호족인 점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성씨는 일부 고위 귀족을 제외하면 고려시대 문종 9년(105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문종이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수 없다는 ‘봉미제도(封彌制度)’라는 법령을 내리자, 많은 관료와 귀족들이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다투어 성씨를 만들었다. 

 

그 이전에도 김씨나 박씨 같은 왕족, 백제 대성팔족(大姓八族), 가야계 김해 김씨, 신라삼최(新羅三崔)와 같이 중앙의 일부 귀족은 성씨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귀족 대부분이 본격적으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왕건이 각 지역의 토착 세력인 호족들에게 본관과 성씨를 지정해주는 ‘토성분정(土姓分定)’을 실시하면서부터였다. 

 

그래도 귀족들의 성씨 사용이 활성화되지 않자 이를 보완한 게 문종 9년 과거 응시자의 본관과 성씨를 응시 자격으로 한 것이 바로 ‘봉미제도’였다. 

 

따라서 신숭겸의 본명이 '능산(能山)'이고 그의 아우가 '능길(能吉)'인 것을 보면, 그의 가계가 성(姓)을 칭할 정도의 유력가가 아니더라도 호족이었던 점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청주의 호족이던 청주수(淸州帥) 진선(陳瑄), 선장(宣長) 형제의 예도 있다. 이와 관련해 중국으로부터 성씨의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이름에 같거나 비슷한 글자를 넣어 성씨의 기능을 대신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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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절공 신숭겸 묘소

 

장절공 신숭겸의 묘소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1리에 있다. 의암댐 다리를 건너 오른편 길로 접어들어 10여 분 달리면 ‘장절공 신숭겸 묘역’이라고 쓴 표지판이 나타난다. 멀리서 바라보면 신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선 뒤편 산등성이에 늙은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산기슭 오른쪽 묘지 입구에 높이 세운 홍살문이 있다. 

 

무덤은 봉분이 3개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 봉분 앞에 고려태사장절공신숭겸지묘(高麗太師壯節公申崇謙之墓)라 쓴 비석만 있을 뿐, 고관대작들의 묘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물 하나 없다. 그 이유로 머리를 대신한 황금 두상을 지키고자 이렇게 했다고 전한다.

 

신도비에는 장절공의 묘에 봉분이 세 개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산전투에서 신숭겸 장군이 전사하자 후백제군은 왕건의 시신으로 알고 목을 베어갔다. 태조 왕건은 순금으로 장군의 머리를 만들어 시신과 함께 매장하고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춘천과 구월산, 팔공산 세 곳에 똑같은 묘를 만들었으며, 춘천 묘역에는 시신 묻은 곳을 분간할 수 없도록 봉분을 세 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두 개의 봉분이 신숭겸 장군 부인들의 묘라는 설도 있으니 신도비에서도 무엇이 진실인지 그 여부를 알 수 없다.”


이 묘역은 뒤로 높은 산을 병풍 삼아 둘러치고 앞으로 뻗어 내린 한 줄기 작은 산봉우리 중턱에 자리 잡은 형국이다. 풍수지리가들은 이 묘역을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극찬한다. 실제로 석물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멀리 춘천 시내가 훤히 보이는 자리에 영락없는 왕릉의 형상을 하고 있다.


묘역에는 조선조 순조 때의 세도가였던 김조순이 짓고 명필가인 신위가 쓴 ‘장절공신도비’가 서 있다. 묘역은 평산 신씨(平山申氏) 문중에서 성역화 사업으로 사당, 영정각, 신도비각, 기념관, 재실, 연못 등을 잘 조성하였다. 현재 그의 묘역은 강원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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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 묘소에서 바라본 춘천시


태조 왕건은 신숭겸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묘사(智妙寺)라는 절을 지어 그의 명복을 빌게 했다고 하니 장군의 죽음을 얼마나 애통해했는지 알 수 있다. 그 뒤 성종 때 그를 태사(太師)로 추증하여 태조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필자가 그곳에 머물러 있는 짧은 시간에도 묘역을 참배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음은, 공산에 빛난 그의 충절이 천년을 지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 더욱 새롭게 느껴진다. 

 

무릇 그의 충절을 기리는 일들이 이러할진대,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신과 함께 매장했다는 황금 두상이 아니라 왕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친 장군의 충절이 아니겠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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