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영해+울진동학혁명 이야기(17)

기사입력 2025.01.1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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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산 정상(일자봉). 영양동학모임 인시천·김철년 제공

 

일월산 교전 후 우련전에서 탈출한 동학군

교남공적에 따르면 영해동학혁명군 지도부인 최시형 선생과 강수 등은 3월 10일 밤 동이 트기 전 일찌감치 송천강을 건너 오촌리→삼계리를 지나 인아리(현인천리)→ 오현(웃재)방향으로 나아갔다. 창수면 인천리는 영해부관아(현 영해면 사무소)에서 80여 리 떨어져 있다. 인천리 서쪽으로 오현이 있다. 이 재를 넘어 동학군들은 일월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뒤따라오던 혁명군 대열은 3월 13일, 용화리 대치에서 합류했다. 표영삼 선생이 쓴『동학 1』에는 이필제 등 동학군이 일월산으로 철수하는 길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중략) 이필제·정치겸·박영관 등 약 50명은 인아리(仁雅里) 쪽으로 철수하여 해월이 기다리는 용화동 윗대치로 향하였다. (중략) 이필제와 정치겸은 교를 타고 무리들과 같이 인천까지 들어갔다. 여기서 일박하고 12일에는 보림동까지 들어갔다. 저녁때부터 비바림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더니 13일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신미아변시일기』에는 “13일에 종일 큰바람이 불어 모래를 일으키고 돌을 날릴 정도여서 길 가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필제 일행은 관군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13일 오후에 비바람을 무릅쓰고 옷재(烏嶺)을 넘었다.』(출전 : 표영삼, 『동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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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선생이 은거했던 윗대치골 마을 들머리 모습(자연치유생태마을대티골). 이곳 일대에서 관군과 동학혁명군이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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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씨버선길과 우련전·자생화 공원 등이 나타나 있는 이정표

 

당시 영해에서 일월산 용화동 대치마을로 가는 길은 <갈천동(葛川洞, 옛 저동→오촌리(梧村里)→삼계리(三溪里)→인아리(仁雅里, 현 인천리)→보림리>를 거쳐 오현을 넘는 것이 주도로였다.


이들 동학군은 3월 15일, 일월산에서 천제(장소 미상임)를 지냈다. 이 천제는 지도부가 건재함을 알리는 동시에 혁명군의 이탈을 막고, 단합을 강조하는 의식으로 보인다. 

하지만 3월 13일, 동학군 6~7명이 관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영양현을 탐문차 갔다가 동학군 장성진이 관군에게 붙잡혀 지도부가 소재가 드러나고 말았다. 장성진이 차고 있던 별무사 임명장 띠 끈이 밖으로 드러나는 바람에 들키고 말았다.


이에 동학군 소재를 파악한 영양 현감 서중보의 관군과 유림측에서 동원한 민보군이 3월 16일 사시(오전 10시) 일월산으로 밀려들었다. 양쪽은 군사들은 일월산 윗대치 일대에서 최후 일전을 벌였다. 하지만 무기나 동학군 인원수에서 열세였던 동혁혁명군은 대포 등으로 중무장한 관군을 상대로 이겨내기 어려웠다. 

 

마침내 동학혁명군이 궤멸된 상태에서 버티기 어려웠던 지도부는 우련전(울연전:필자주) 쪽으로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우련전 일대 지리를 잘 아는 이성중의 안내를 받아 탈출, 관군의 포위망을 가까스로 벗어났다.  


당시 전투 결과는 『적변문축』에 따르면 5-6시간 진행된 싸움에서 동학혁명군은 13명 사망, 동학혁명군은 10여 명이 생포되었다. 그 외 함께 피신했던 동학군 가족 등 남녀 어른과 아이들이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고 기록했다. 이후에도 관군은 동학혁명 관련자들을 수색하여 체포했다. 동학혁명군 남편을 따라나선 여인네와 아이들 그리고 아들을 따라나선 노인들이었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적변문축에는 여인들 명단이 수십 건 나온다.


영해면 석보면 양구리 최소사(崔召史): 신화구의 처, 자택에서 안동진 교졸에게 붙잡힘. 동학의 무리임. 등으로 기록했다. 당시는 여성들의 인권은 무시되는 시대라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최소사라는 여인은 남편 신화구의 부인이었다. 그는 자기 집에서 안동진의 관군에게 붙잡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조선의 역사에는 이같이 여인들의 한이 담겨 있다.


한편 겨우 살아남은 최시형과 수명의 지도부는 일월산 서북 우련전(울연전)*으로 탈출해서 목숨을 부지했다. 

* 당시 안동부 재산면 갈산리로 현재는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삼리이다. 이곳은 봉화와 영해의 접경지이다.

이후 이들은 우련전에서 일월산 월자봉 줄기를 타고 북쪽 영월로 갔다. 그곳 영월에서 다시 이필제의 친구인 집인 충청도 단양에 있는 정기현의 집으로 가 은둔하였다.* 이때 함께 피신한 인물은 최시형, 이필제, 강수, 김낙균, 전성문 등이다. 

영양 인시천 회장 이상국 선생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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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울진 사람으로 동학혁명 지도부였던 전인철, 남두병은 울연전으로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오다가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황억대는 혼자 울연전에서 탈출했다가 다시 윗대치로 되돌아가 박영관(박사헌), 강수(강사원, 강시헌) 등을 구출하려고 했으나 박영관 3형제는 이미 관군에게 붙잡혔고, 강수는 탈출한 뒤였다. 

황억대는 관군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붙잡혔다.* 황억대의 의리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후천개벽의 횃불, <울연전의 각오>부분을 참조함. 김기현,현우사, 2008. 

 

최근 봉화군에서 개설한 외씨버선 7길의 한 갈래가 우련전에서 역방향으로 내려오면 최시형 선생이 은둔했던 일월산 아래 현 영양군 일원면 용화리 윗대치마을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 『영양군』이 지원하고, 『영양동학모임人侍天(인시천, 회장 이상국)』이 주관하여 2024년 6월 6일에 건립한 『해월최시형선생은거지유허비』가 있다. 유허지 앞 도로는 금장산 쪽인 주령을 거처 백암온천으로 가는 길이다. 이 마을 들머리에는 영양군이 개설한 자생화공원이 있다. 이 공원 뒤쪽 산기슭에는 일제강점기 수탈 목적으로 운영되었던 계단식 건물인 폐선광장이 있다. 

 

참고로 우련전은 18세기 후반 가톨릭 집안이었던 김대건 신부의 일가친척 등이 조선왕조의 박해를 피해 신앙촌을 이루어 은둔하던 곳이라 한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다음 그림은 봉화 외씨버선길 안내도에 나타난 우련전이다. 동학군이 일월면 용화2리 윗대치마을에서 관군을 피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동학도 이성준의 안내로 우련전으로 탈출했다. 당시에는 윗대티골애서 우련전까지는 험난한 산길이다. 지금의 안내도에는 윗대치에서 우련전까지는 9km이다. 지금은 일반국도 31호인 영양터널이 뚫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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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화에서 우련전까지 외씨버선길 안내도>

1871년 영해동학혁명당시 최시형 등 동학지도부는 관군의 반격을 받고 일월산과 우련전을 탈출해 강원도 영월을 거처 충청도 단양 정기현 집으로 피신해 은둔했다. 지금은 울연전 일대가 외씨버선길로 개설되었다. 


영해동학혁명 지도부의 통치행위

영해동학혁명지도부가 3월 10일 밤 10시 30분경에 영해부 관아를 기습 점거하고 부사 이정을 처단한 후 어떤 활동을 했는가는 나암수록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이필제가 궤를 열고 140냥의 돈 꾸러미를 취하고, 날이 밝자 영해부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술  3동을 사다가 군사를 먹이고 훈유했다. 동민에게는 이번 거사는 탐학 무도한 부사의 죄를 성토하는 데 있는 것이지 절대 백성들을 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는 기록이다. 


이는 영해부 이방이 보관하고 있던 돈 궤짝에서 140냥 중 100냥을 인근 5개 동 두민(이장급)에 지시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동학 지도부는 나머지 돈으로 아침밥을 시켜 먹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들은 11일 날이 밝자 영해부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방(벽보)을 붙였다 한다. 이 벽보의 형식과 자세한 내용은 문헌으로 남겨지지 않았다. 


동학혁명 지도부가 수취한 돈 140냥을 오늘날 가치로 따져보자. 19세기 화폐가치*로는 대략 1푼은 1냥의 100분의 일 수준으로 200~500원이다. 그래서 1냥을 5만 원으로 치면 140냥은 현재 시세로 7백만 원이다. 수취한 돈 40냥은 아침 식사비용으로 지급하고, 나머지 100냥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앞서 기술했다. 

* [MBC 드라마 '상도'에 나오는 화폐의 가치와 당시 물가] 1냥(19세기 초 기준)은 현시가 약 40,000-50,000원이다. 당시 쌀 1석(10말) = 5냥, 콩 1석 = 2.5냥, 무명과 삼베 1필 = 각 2냥, 초가 7간 = 50냥, 초가 3간 = 15냥, 토담집 2간 = 2.5냥이었다. 

이것은 해석에 따라 의로운 행위였다고 할 수 있겠으나, 관변 입장에서는 보면 공금 탈취의 불법행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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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선생은거유허비는 2024년 6월 6일에 건립했다. 유허비 뒤쪽이 일월산자생화공원이다. 

사진에 보이는 산기슭 계단식 건물은 1937년 일제가 운영했던 광물 선광장이다. 지금은 폐광되었다.

 

영해동학혁명 죄인 문초 기록인『교남공적』에는 동학지도부에서 노하두민 유인택, 허문두민 신석훈, 노동두민 원기주, 노상두민 총각 임개이, 성내두민 마병균, 김성근 등 5개 동)에 각각 20량씩 주었다. 아침밥 35상을 해준 마군 최귀강이 돈 3량 5전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조선 정부가 동학혁명을 진압 후 처리 과정에서 두민에게서 돈을 받았거나 아침 식사를 동학도들에게 제공한 사람들은 옥살이 등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영해부민의 반응

1871영해동학혁명이 일어난 뒤 3년 지난 뒤 영해부의 총인구수는 8,627명(1874년, 고종 10년 기준)이다. 영해동학혁명 후 10년이 지난 뒤 1881년 영해부 관아가 있던 읍내면은 총 1,772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관아가 있던 소재지에는 영해부 전체 인구수 4분의 1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혁명군이 영해부 진입 시 읍성에 불이 나고, 함성과 총탄과 포를 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일반 부민들은 대부분 관망하거나 아니면 일부 부민은 안전한 곳에 피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기록은 1871년 3월 28일 자 교남공적에 보이는 기록이다. 

『(앞부분 생략) 문초 내용 중에 본 영해부 인천 거주(현 영덕군 창수면 인천리: 필자 주) 이해발(이제발:필자주) 잡아들이기 위해 교졸을 정하여 잘 살펴서 보았다. 인천은 불과 4-50호뿐인데 이들을 일일이 살폈다. 난이 난 후 각 영읍 교졸들이 쫓아다녀서 어지간하며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거주하는 백성이 대부분 겁을 먹고 놀란 물고기가 새를 본 듯 흩어져서 가히 열 집에 아홉 집은 빈집이다(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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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최시형선생은거유허비> 같은 곳에 있는 <일월산자생화공원> 오른쪽 도로에 <울진백암온천>으로 가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는 영해동학혁명이 나고 영해부에서 영덕현에 28일에 보고한 내용이다. 열에 아홉은 빈집이라는 것은 주민이 거의 마을 떠났다는 증거다. 그런데 동학혁명 사태가 나자 주민들이 바로 피신했는지 아니면 일부는 남아 있다가 관아의 교졸들이 동학혁명군 색출에 나서자 불안한 나머지 피신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천리 일대뿐만 아니라 영해부와 관아 소재지도 마찬가지 아니었겠나 추정될 뿐이다.

이후 영해부관아의 내부는 신미아변시일기에는 영해 향교 최고 책임자인 도유사인 남유진이  유림들과 처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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