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대담] 울진군농민회 창립을 회고하면서

울진 농민운동의 대부 초대 박기호 회장
기사입력 2025.03.17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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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면 소곡리 자택에서 박기호 회장

 

대담 : 박기호(82, 전 울진군농민회 초대회장), 이용운(70, 전 울진군농민회 사무국장)

일시 : 2024. 11. 3.(일)       장소 : 울진군 북면 소곡리 자택

울진군농민회 창립일 : 1988. 12. 31.

대담·기록 : 김진문(시인)

 

한국 시민운동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영향을 받아 1980년대의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교육운동, 문화운동 등으로 급격히 확산 · 성장하였다. 농민운동의 경우는 1985년 4월 『전남함평농우회』의 『자주적 농민운동조직』을 계기로 1987년 하반기에는 전국 30여 개 군에 군 단위 농민운동단체가 창립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1987년 2월에 『전국농민협회』가 결성되었다. 전국농민협회는 다시 1990년 4월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창립됨으로써 농민운동조직이 전국 수준에서 하나로 통일되었다. 이른바 약칭 『전농연』이다.


1980년대 농민운동 목표는 반독재, 반독점, 반외세, 민족통일이라는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띄었다. 농민들은 수입개방과 맞물려 반외세 투쟁을 가장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985년의 소값 피해보상과 외국농축산물 수입저지 운동이다. 

 

소값 폭락으로 생존 문제가 걸린 농민들은 예전에 없었던 소 떼를 몰고 항의시위를 하는 진풍경이 전국에서 벌어졌다. 이 소몰이 싸움은 1980년대 사회 운동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때 농민들은 『미국농축산물수입문제』와 직접 관련이 없는 핵무기, 미군 철수,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 평화협정체결, 국방비 삭감 등을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농민들에게는 정치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이같이 80년대 말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적 전환기에 울진군 농민회도 1988년 12월 31일 결성·창립되었다. 올해(2024년)로 창립 35주년을 지나고 있다. 하지만 현재는 울진군농민회가 그 이름조차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따라서 울진군농민회의 초창기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당시 창립주역인 초대 박기호(82세) 회장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울진군 역사상 처음으로 『울진군농민회』를 결성하여 농민권익 보호 등에 앞장섰던 농민운동가였다. 

 

필자가 올봄(2024)에 울진군농민회 창립 과정 등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자택 방문을 문의했으나 겸손하게 농민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면서 대담을 사양했다. 하지만 초창기 울진군농민회 결성과 창립, 활동에 관한 증언과 기록이 필요하다는 필자의 거듭된 요청에 이번 대담이 이루어졌다. 당시 박기호 회장과 활동한 사무국장 이용운씨도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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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호씨 자택 대담(오른쪽부터 박기호 전 울진군농민회초대회장, 김진문(필자), 이용운 전사무국장. 2024. 11. 3)

 

동학과 집안 내력 

김진문(이하 김): 귀한 시간을 내주어 고맙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박기호(이하 박): 보시다시피 주역을 때때로 읽고,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한강 작가의『소년이 온다』를 읽고 있습니다. 건강도 아직 괜찮습니다.


김: 노벨수상작 읽은 소감을 간단히 말해주시겠습니까?


박: 한마디로 1980년 5·18 광주 비극을 문학으로 전 세계에 알렸지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군사독재에 항거한 광주시민의 투쟁과 피로 희생한 결과입니다. 가슴에 새겨야지요. 그런데 최근 노벨수상작을 폄훼하는 일부 세력이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시위했다고 하는데 참 꼰대 같은 짓이죠. 우리나라 국격을 훼손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박 회장은 농사 외에도 가을철에는 송이를 따고 있다. 울진 송이는 품질이 좋아 시중에서 인기가 높아 농민들에게는 농가 외 소득으로 짭짤한 고소득이었다. 그래서 송이작황을 물어보았다.


김: 올해 송이 생산은 어떠십니까?


박: 기후변화와 지난번 산불로 송이가 거의 없습니다. 송이에 기대왔던 일부 농민들은 암담하지요. 제 개인적으로 앞으로 큰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김: 1989년부터 농민운동에 뛰어든 계기와 까닭이 있는지요?


박: 나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고, 더구나 우리 증조부님이 동학을 했다는 집안 구전이 있어요. 그 사실로는 증조할아버지가 당시 부패한 관료들을 응징한다는 상징으로 짚으로 만든 인형을 디딜방아에 넣고 찧었대요. 얼마나 당시 지방 관료들이 농민을 괴롭혔으면 그렇게 했겠어요. 그걸 동네에서 누군가가 관가에 고변을 했다고 합니다. 

동학은 아시다시피 조선말 경주 최제우 선생이 창도했는데 억눌린 백성, 특히 농민들에게는 큰 호응을 얻었지요. 동학이 가르치는 인내천(人乃天)은 사람을 하늘같이 똑같이 대접하라는 평등사상이죠. 그때에는 피지배자인 백성에게는 복음이었다고 봐야죠. 당시 동학을 한다는 것은 조선 왕조에서는 역적이었죠. 

그래서 증조부님이 고변을 당해 역적으로 몰리자 의성 쪽으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그 뒤로는 행방불명이 되었죠. 아마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어떻게 되었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죠.

증조할아버지가 행방불명되자 증조할머니는 아들 세 분을 데리고 소야에서 섭실로 옮겨 살았지요. 참 어렵게 가난하게 살았어요. 당시에는 역적으로 몰리면 관노비로 가야 하는데 다행히 관노비는 가지 않고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고 합니다. 

또 역적으로 몰리면 묘를 쓰지 못해요. 증조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가묘를 썼어요. 집 앞에 가묘를 그것도 평장을 해놨다가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난 다음에 여기서 12킬로미터나 되는 대흥리 아구산에 이장을 했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칠성판을 해서 짊어지고 가서 묘를 썼답니다. 그래서 증조할아버지 묘는 없고 증조할머니 묘만 있습니다.


김: 참 눈물겨운 집안 이야기네요. 증조 할아버지가 동학을 하셨다는 집안 구전이 농민운동을 한 간접 계기가 되었나 보네요.


박: 집안에서 구전으로 전하는 증조할아버지가 추구한 동학 정신이 나에게는 그 영향이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지요. 집안 구전을 통해서 우리 농민들이 과거 역사로나 예나 지금이나 그만큼 어렵게 살았던 것을 증명할 수 있었고요. 나 역시 우리 농촌이 이래 살아서는 안 되겠고, 농민의 삶도 개선하겠다는 생각으로 농민운동을 하게 되었던 거죠.


소값 파동과 농민들의 울분  

김: 돌이켜보면 1980년대 농민운동에서 가장 쟁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박: 80년대 전두환 정권 때 소값 파동이었죠. 당시 정부에 외국 산 호주 송아지를 농가에 입식을 장려했어요. 농민들은 정부를 믿고 그걸 한 3~4년 길러서 팔았는데 당시 평균 1백만 원까지 하던 암소가 25만 원밖에 못 받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전두환이 형 전경환이 축산조합을 통해서 외국 송아지를 적정 마리보다 더 많이 수입해서 대량으로 사육되어 시중에 나오는 소값이 갑자기 떨어졌지요. 그 바람에 전국 소 사육 농가들이 정부에 항의하고 소몰이 시위를 하는 등 난리가 났어요. 농민들이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전부 참여하고 뭘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모르니까 이것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농민회를 만들게 됐죠. 사실 소값 파동이 직접 계기가 되었지요.


김: 소값이 폭락하던 시기가 1985년도인가요? 쇠고기 한 근에 1,500원 주고 사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소값 폭락에 대한 당시 정부의 대책은 무엇이었나요?


박: 나도 소 사육을 하기 위해 3마리를 입식해서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인건비는커녕 당시 오르던 소값이 대량으로 사육된 소들이 한꺼번에 시장에 나와서 왕창 떨어졌죠. 농민들이 소몰이 시위 등으로 항의하자 전두환 정권은 농민 부채경감 대책으로 소 입식 자금을 3년 분할 상환케 하는 등 지원을 했지만 결국은 농민들은 빚만 지는 꼴이 되었지요. 


김: 그럼 이용운 사무국장이라던가 김태규, 주ㅇㅇ, 박ㅇㅇ씨 등의 젊은 농민들과는 어떻게 알게 되어 함께 하게 되었나요?


박: 사실 나이 차이도 나고, 당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죠. 지역에서 농민회를 창립한다니까 연결되어 알게 되었죠. 또 근남의 주ㅇㅇ, 평해의 박ㅇㅇ 선생이 당시 양돈협회장이었는데 어떻게 연결이 되어 알게 되었죠. 그래서 이런 분들을 만나서 간담회나 토론회 등을 거쳐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농민들이 입는 피해 보상 요구와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는 농민단체가 있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지요.


농민회 창립과 당국의 감시


김: 1980년대 말에는 사회 각 부문에서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제가 있던 교육계에서도 평교사들이 주도적으로『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약칭: 전교협, 1987년 9월 27일)가 창립되던 해였죠. 그 얘기 간략히 잠깐 말씀드릴게요. 벌써 37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교육계에도 당시 이익단체인『대한교육연합회』가 있었지요. 이 교직단체는 일제강점기 어용단체인 조선교육회가 전신이었어요. 1960년대 자주적 교원단체인『한국교원노동조합』을 교사들이 창립했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아 강제 해산되었지요. 

『대한교육연합회』는 1989년에 그 명칭을 한국교원단체총연합(약칭 한국교총)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한국교총은 현장 교사들에게 어용단체라는 지탄을 받았지요. 그래서 교육현장에서 여러 문제의식을 느끼던 울진의 몇몇 선생님이 주도하여 1987년 12월 9일, 50여 명이 울진성당에 모여 『민주교육추진울진교사협의회』(약칭 울진전교협)창립대회를 치렀어요. 경북 지역 군 단위에서 최초로 『울진전교협』이 창립되어 그 여파가 상당했습니다. 이 전교협은 1989년도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라는 자주적 교원단체로 창립이 되었죠. 오늘날 약칭 『전교조』입니다. 현재 교육 현장에는 여러 개의 교원단체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1987년 울진전교협 창립 당시 울진군청과 울진교육청에서 이거 큰일이다 싶었는지 울진군 이모 군수, 교육청 장학사 등이 울진성당에 감시 나왔다가 참여 교사들에게 쫓겨나가는 등 촌극이 벌어졌죠. 그때 울진성당에 프랑스 출신 도신부님이 계셨는데 전교협 창립을 위해 장소 등을 제공해 주어 큰 힘이 되었어요. 교사들이 무슨 단체를 만든다고 하니 장소제공을 해주지 않는 사회 분위기였죠. 참 고마운 신부님이었죠. 그리고 관청에서도 신부들의 권위를 함부로 어쩌지 못했지요. 

울진전교협 창립 이후 각 군에서 지역 전교협이 속속 창립이 되는 계기가 되었지요. 이야기가 옆길로 샜습니다만 당시 농민운동단체를 창립한다니까 울진 농민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박: 농민들 가운데는 적극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농민들이 일어나면 나라가 망한다는 보수적인 사람도 있었어요. 그러나 농민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 기회를 만들고, 농민들의 의사를 정치권에 전달하자는 게 대다수의 의견이었죠. 결국, 농민들의 정치 참여와 권익 보호가 목적이었죠. 창립 당시 울진군 농민회 강령이 <농시, 農示>라고 해서 『농본의식함양』,『복지농촌건설』, 『영농과학실천』이고 <농민회 표어>가『피땀 흘려 지은 농사 제값 받고 팔아보자.』『농산물 가격은 농민이 결정하자.』『천만 농민 똘똘 뭉쳐 쌀값 쟁취 고수하자.』『전량 수매 조기실시. 농민생계 보호하자.』『생산비 보장하는 수매가 보장하라!』였어요. 지금도 이런 내용은 유효하다고 봅니다.


김: 전교협 창립 당시에도 지역 경찰서에서 교사들 동태를 감시하는 담당 형사 등이 있었다고 해요. 교육청도 그랬고요. 아마 농민단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박: 그때 우리가 농민회를 창립하려고 그러니까 면사무소 군 전부 직원들이 우리 명단을 입수하여 개별적으로 전화를 해서 창립대회에 가지 말아라. 교육계와 똑같은 거지요. 회유하고 협박하고 또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은 내 뒤에 3명씩 따라다녔어요. 우리 집 앞에서부터 내가 나가면 한 사람 나가고, 울진 가면 세 사람이 내하고 만난 사람들을 전부 다 뒤에 다 불러 가지고,『저 사람 간첩이니까 위험하니 만나지 말아라.』라고 했대요.


김: 농민회장을 간첩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는 일이었죠. 교육계에서도 전교조 교사들을 빨갱이 교사로 낙인찍는 현상이 있었죠.『선생님들이 무슨 노동조합이여』하고 말입니다. 요즘 경찰들도 경찰서마다 직장협의회가 있어요. 당시 1980년대 교육현장의 교사협의회와 같은 거죠. 그 뒤에 전교협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으로 출범되었죠. 그렇게 치면 지금 전국 공공기관에 노동조합이 다 조직되어 있어요. 울진군청에도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을 빨갱이 공무원(?)이라고 누가 그러나요? 

이와 관련해 박 회장님이 당시 울진에서 유일하게 노태우정권 사찰대상(404호)자였던 걸로 기억되는데요? 한겨레 신문 등에도 전국사찰 대상자 명단이 공개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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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당시 현재 울진읍 새마실 2길 9번지. 건물에 있었던 전교조울진지회와 농민회 합동사무실(좌),  울진읍 새마실 2길 9번지 건물(2024년 11월 현재)

 

울진군 유일의 민간인 사찰 대상자 404호

박: 빨갱이라는『레드콜픔렉스』는 우리 역사에서 해방 이후 분단 상황을 독재정권에서 정치적으로 빨갱이 몰이를 하여 정적 제거에 이용했다고 봅니다. 이걸 경험한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빨갱이로 몰리면 죽는다는 피해 의식을 심어주게 되었지요. 그래서 역대 독재정권은 이러한 레드콤플렉스 심리를 부추겨서 정부 정책에 비판적이거나 민주화에 앞장서는 사람들을 격리 또는 서로 가까이하지 못하게 교묘하게 이용한 거지요. 하지만 역사 발전에서는 앞장서 투쟁한 사람들 덕분에 우리 사회는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로 발전해 나가는 거라고 봅니다. 

당시 보안대 소속 윤석양 이병이 군에서 민간인을 사찰한다고 폭로를 해서 큰 파장이 일어났어요. 제가 사찰번호 404번이었죠. 여기 울진에 보안사 요원들이 오면 제일 첫 번째 묻는 것이 사찰대상자 동태였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경찰이 독립운동을 감시하느라『요주의 인물 사찰대상자』가 지역마다 있었어요. 

한번은 관변단체인 한국반공총연맹(현재 한국자유총연맹) 울진 지부장이 나를 좀 만나자고 해요. 그때 지부장이 김모라는 울진 사람으로 경찰 출신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고 해서 만났지요. 뭔가 하면 박 회장과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어느 날 울진 군수실로 좀 와 달라는 거예요. 

군수실에 갔더니 군수, 교육장, 경찰서장, 농협울진군지부장, 반공연맹울진지부장이 있고 소개가 끝나고 웬 낯선 사람이 있었어요. 제가 저 사람은 누구냐 했더니 그냥 보안대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군수 보고 왜 불렀는지? 농사짓는 촌사람 왜 불렀냐? 모두 이렇게 바쁘신 분들인데. 할 얘기 있으면 당신이 우리 집을 찾아와라. 그게 맞지. 이 자리에서 말하기 싫다. 당신이 오세요 하고 박차고 나와 버렸어요.


김: 아마 박 회장님을 군수실로 부른 것은 농민회 창립 때문인 거 같은데요. 농민회 창립일이 언제죠? 중앙 단위에서 전국농민단체가 조직되지 않았나요?


이: 1988년 12월 31일입니다. 울진읍 월변예식장에서 울진군농민회가 창립되었죠. 우리가 자주적으로 창립했지요.


박: 당시는 전국 단위의 통일된 농민 조직이 아직 창립되지 않았고요. 울진도 독자적으로 창립했죠. 전국조직이 되고 나서, 대정부 농민투쟁이 단일대오를 갖추고 농민운동 사업이 활발하게 되었죠. 울진에서도 전국사업은 전국사업대로 하고, 지역사업으로 농약병, 비닐 수거, 토론회, 면 단위의 농민단체 조직하기, 정치의식 고양 사업 등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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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도 노무현 의원과 함께 (대구,『부녀아카데미』에서)

 

청문회 스타 노무현 의원 울진 강연회

김: 울진군 농민회 주최로 5공 청문회 스타였던 노무현 국회의원이 강연을 했어요. 교사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더랬어요. 노무현의원과는 어떤 인연이 있었던가요?

박: 노무현 의원은 당시 5공 청문회 스타라서 울진군 농민회에서 모셔다 강연회 한번 했으면 좋다 싶어 제가 직접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문해 면담 요청으로 이루어졌죠. 당시 보좌관이 이강철씨였어요. 그런 뒤에도 인연을 이어 갔죠. 

울진읍에서 노무현 강연회 때 농민들이 많이 와서 강연회장이 만원이었고, 바깥까지 찼어요. 이 강연회는 농민들의 정치의식 고양 사업으로 진행됐습니다. 과연 정치는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노무현 의원이 강연했어요. 강연회 요지는 이랬어요. 

『5공 청산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돈 있는 사람, 지식 있는 사람 등이 떵떵거린다. 해방 후 친일 청산을 못했기에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잘못은 청산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남을 위해 헌신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정당에 100억을 줘야 하는가,

핵에 관한 문제, 수입개방문제, 수출 없이 발전은 없다? 그렇다고 농업을 희생시켜 좋은가? 농민의 밥그릇을 마련하고 수입 개방하라, 수출만이 살길은 아니다. 분배를 통한 성장만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농민의 호주머니가 두둑해야 한다. 한국적인 농업 정책을 세워야 한다, 중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부터 다독거려 주어야 한다. 그런데 정치는 왜 거꾸로 돌아가는가. 독재에 저항하려면 단체를 만들어 투쟁하는 수밖에 없다.』 등이었는데요 요약하면 다음과 같아요.


『1. 남 싸우기 전에 내가 먼저 싸우자. 2. 책을 읽어라, 체계적으로 이론 무장하라, 3, 모여라, 그리고 단체를 만들어라! 4, 투쟁하라, 농민의 호주머니를 두껍게 하는 일에 모두가 투쟁해 나가자.』이었죠. 박수가 쏟아졌지요.


김: 당시 노무현 의원의 강연회를 듣고 싶네요. 녹화 테이프가 있습니까?


박: 요즘처럼 디지털 시대가 아니라 개인 사진기도 흔하지 않았고요. 그때 강연회 녹화테이프를 촬영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그 행방을 모르겠네요.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김: 울진군 각 면 농민회 지회 조직은 어떠했습니까?


박: 울진군농민회 산하에 면 단위 지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울진읍 등에서 각 면 단위로 조직이 되었습니다. 울진군 회원이 수백 명이 되었어요. 지역에서 자주적 시민운동 조직으로는 큰 단체였죠. 당시에도 전국 지역마다 농민회가 조직되어 농민운동에 앞장섰지요. 전라도의 경우 농민운동가 출신이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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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도 1월, 울진읍내 담벽에 붙인 농민회 표어(상)와 벽보(하)

 

농민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김: 또 하나는 울진의 경우 농민운동이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시들해졌어요.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 지금도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있고 각 도지부, 각 군지부가 있습니다. 울진은 2000년대 들어와서 거의 소멸 상태로 갔습니다. 그 원인은 제가 보기로는 정치변화입니다.

김영삼, 김대중으로 연결되는 민주 세력이 정권을 잡고부터 농민 지원을 확실하게 많이 해주니까 좀 흐지부지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노무현 때는 농업 직불제도 나오고 이러니까 이 정도면 되었다는 성과에 만족하지 않았냐고 봐요. 그리고 농민을 대변하는 농민 출신 국회의원도 등장하고 했으니까요. 어쨌든 이 모든 결과가 그래도 8~90년대 의식 있는 농민들의 투쟁과 전국농민회라는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지금도 농촌이 자꾸 고령화되고 농가 수도 100만 가구 미만이고, 농업인구도 220만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젊은이가 없는 농어촌은 암담합니다. 따라서 농민 계층의 숫자도 자꾸 줄어들어 농촌이 고사 직전입니다. 우리 농업과 농촌을 지키고 살리려면 어느 정권이든지 간에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박: 울진에는 리더십이 부재라고 봐야죠. 전체 틀에서 농민운동은 여러 가지로 분화되고 발전되었지만, 울진의 경우는 확장성에 대한 전망이 부재였죠. 2000년대 이후는 몇몇이 그냥 하는 수준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반성해야죠. 그러나 당시보다는 전체적으로 약화 되었지만, 경북과 전국농민회는 건재합니다. 지금도 농민을 대변하면서 목소리를 내고 있어요. 직불제라든가, 농민 수당 등이 채택되어 혜택을 받고 있어요. 농민회는 죽지 않는다고 봅니다.


김: 울진군 농민회가 출범함으로써 울진에서 그나마 90년대에 지역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었다고 봅니다. 초창기 농민회 결성 당시 있었던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울진 교사들도 전국노동조합 결성 후 불법시 서울 전국 집회, 도 단위 집회에 자주 갔어요, 울진에서는 영덕지회와 영덕에서 합류해서 버스로 가기도 하고, 영주 쪽으로 가서 열차로 올라가기도 했어요. 어떤 때는 삼척지회하고 합류해 대절 버스로 가기도 했는데. 형사가 동태를 파악하려고, 선생님 내일 집회에 몇 명이나 갑니까? 묻는대요. 그러면 많이 갑니다. 두루뭉술 이런 식으로 대답도 하고, 어디로 가나요? 그걸 왜 물어요? 하면서 영주 방향으로 가요 하고는 영덕 쪽으로 가기도 했어요. 어쨌든 그렇게 대답합니다. 운동 전술이지요. 저들은 우리를 감시하는데 그렇게라도 해야지요. 지금은 웃고픈 이야기입니다만.


이: 90년대 초반에 농민회원들과 안동 데모하러 갈 때 행곡 태규하고 안잘미 장00이가 운전해서 갔어요. 안동 성당 앞에서 집회를 했는데 경찰이 최루탄을 쏘고 해서 눈물, 콧물 다 흘려 보았네. 촌놈이 최루가스 처음으로 맛보았지. 언젠가 서울 집회 때는 경찰에 잡혀 영등포 경찰서에서 하룻밤 자고 나왔다니까요.


박: 서울 경희대 집회 때는 경찰이 손 조사를 하더라고. 농사짓는 사람 손은 꾸덕살이 베어 터실터실하거나 농민 비슷하면 들여보내지 않아요. 또 한번은 경북대 농민대회 집회 때 학교 정문을 경찰이 통제하더라고, 그때 내가 과감히 양복 차림을 하고서 들어가니까 경찰이 교수님 하면서 무사통과야. 그 바람에 교수 한번 되어 보았네(웃음)

김: 농민운동 하다 교수님으로 신분 상승하셨네요.


박: 그렇죠. 그때 내가 집회에서 외친 구호가 하나 있어요.『노태우를 점지한 삼신할매를 원망한다』였어요. 한편으로 경북대 학생들이 경찰이 학교 안에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정문 사수대를 만들어 지키곤 했지요. 그때 학생들이 대단했어요.


농민회와 시민단체 연대활동

김: 당시 농민회와 지역의 시민단체들과 연대 활동을 했는데요. 이 연대 활동은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지역에서 각부문의 시민 활동가들이 연대한다는 것과 지역 시민운동의 범위를 확장시켜 지역 문제를 공통분모로 인식하여 해결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라고 봅니다. 당시 참여한 단체로는 전교조울진지회, 울진사회정책연구소, 울진참여자치연대, 지역반핵단체, 지역노동조합 등이었습니다. 이 연대 활동을 보자면 핵폐기장건설반대운동, 작은학교살리기운동, 울진자연생태학교운영, 왕피천댐건설반대운동, 평화통일운동, 온정섹스박물관건립반대운동 등을 전개했습니다. 

그 가운데 울진군농민회와 전교조울진지회가 가장 연대활동을 많이 한 것 같은데요. 연대한 사업 중에 의미 있는 것은 『울진자연생태학교』를 여름방학 중에 10년 이상 운영해서 학부모들로부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어요. 그리고『울진핵발전소건설반대투쟁위원회』에 농민회가 적극적으로 참가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전 군민이 들고일어나 울진읍 한전 변전소가 불타는 등 약 1년간 격렬한 반대 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투쟁 활동이 끝나고 일각에서 집행부에서 군민 성금 결산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았다는 여론이 있었는데 그런가요?


박: 1990년대 핵발전소건설반대 투쟁시 경북에 있는 대학생들이 많이 지원하러 왔어요. 안동 학생 풍물패들이 풍물을 치며 길잡이 했더랬어요. 농민회에서는 현수막도 만들고 투쟁집행부 연설문, 선전지도 작성하고 했지요.


이: 시위 때 구호를 만들어 집행부에 넘겨주고 했어요. 우리 농민회가 그 당시 운동 주체가 됐더라면 상황이 좀 달라졌을 수도 있는데, 군민 성금 문제도 보수성향의 사람들로 집행부가 채워지는 바람에 투명하게 처리하지 못했다고 봐요.


박: 당시 현금이 상당히 들어온 걸로 알려졌어요. 구체적으로는 모르고요. 투쟁 집행부 해단식을 군민체육관에서 했는데요. 그때 제가 군민투쟁백서를 만들고 군민 성금도 투명하게 공개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만 흐지부지되고 말았지. 투쟁백서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남겨야 한다고 주장한 기억이 나네요.


이: 투쟁 당시 제가 집행부에 얘기를 했어요. 매일매일 일지를 쓰라고요. 성금도 얼마가 들어왔고 얼마가 나갔다 등 말이죠. 그리고 군의원 선거시 한번은 당시에 집행부와 관련이 있는 어떤 분의 인척이 나를 찾아왔어요. 혹 당시 성금문제에 대해 나쁜 소문을 낼까 걱정했는지 나를 좀 만나자고 해요. 그래서 제가 선거 끝나고 보자 했지요. 그러고 말았어요. 


박: 그 후 핵발전소건설반대투쟁이 끝나고 누구는 집 짓고, 누구는 빌딩건물 짓고 했다는 말이 돌았어요. 집행부도 고생을 많이 했지만, 당시 군민 성금 결산을 투명하게 공개했더라면 구설에 오르지 않을 텐데 그게 좀 아쉽네요.


김: 박 회장님께 질문을 하나 더 할게요, 1995년도 도의원 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었는데요? 출마 배경이랄까, 까닭을 좀 말씀해 주시죠?


박: 군민들과 특히 농어민들을 대변하고자 출마를 했고요. 울진은 보수적이라 좀 개혁적인 생각을 구현시키고자 울진군 제1선거구(울진읍, 북면, 서면) 민주당 후보로 나섰습니다. 결국, 낙선했지요. 당시 울진군 농민회장이자 전농경북연맹부의장을 했지요. 1995년도입니다. 낙선과 관계없이 농민운동을 계속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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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핵발전소건설 반대 군민시위. 1992년 1월 북면 부구 집회 당시 머리띠를 두르고 시위하는 박기호 농민회장(사진 왼쪽 앞, 1992. 1. 12) 

 

울진농민운동의 성과와 앞으로 대안은?

김: 아직 2000년대의 신자유주의 에프티에이, 우루과이 라운드 농업 협정 반대 투쟁, 농민 후계자 등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 지면 관계상 좀 아쉽지만 마무리하겠습니다. 올해로 울진군 농민회 창립 35주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두 분 다 7~80대인데요.

그간 농민운동을 하면서 지금 돌아봤을 때 얻은 성과라 할까 평가와 전망을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 아시다시피 울진은 보수 세력이 강한 지역이니까 우리가 농민운동으로 얻은 성과는 혼자보다는 단체를 조직해서 목소리를 내는 게 힘이 되었고, 조직 활동을 통해서 농민들의 민주주의 의식과 농업정책 등에 대한 비판의식이 길러졌다는 것이고, 우리『전국농민회총연맹』에서 주장했던 농업직불금, 농민수당 등이 제도화되어 지금 시행되고 있다는 것이 큰 성과 중의 하나이지요. 그리고 농민회를 관 주도가 아닌 농민들이 자주적 주체성을 가지고 창립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정치적으로 그만큼 농민들이 민주 의식으로 깨어가고 있다는 증거이지요.


박: 과거처럼 이제는 행정당국에서 농민들한테 직접으로 압력 행사도 못 할뿐더러, 그리고 농민들한테 권장 사업들이 실패로 돌아갔으니까, 소 파동 무슨 돼지 파동 이런 파동을 겪은 것들은 전부 다 행정당국에서 권장 사업이 전부 망했거든요. 그게 말은 권장 사업이지만 과거에는 정부에서 실질적으로 압력을 행사해서 시행한 거지. 그래서 지금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농업정책이 좌지우지되는 게 아니라 농민단체의 의견을 수렴해서 시행하는 민주적 절차를 거치는 것들이 많이 좋아졌다고 봅니다. 지금 권장 사업도 농민들이 희망하지 않으면 못 하는 제도가 되었고, 농민들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과 민주적 권리의식이 신장되었다는 것이 성과라면 성과이지요. 


앞으로 농민운동은 첫째 농촌에 사람이 없어요. 인구 감소에 따른 대책이 필요합니다. 정부에서도 노력합니다만 특히 젊은이들이 농촌에 정착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획기적 농업정책이 실행되어야 합니다. 

농촌에 젊은이들을 오게 하자면, 기본 생계를 지원해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 교육비를 대학교까지 지원해 줄 정책도 검토해야 농촌이 살아날까 말까 할 정도로 농촌은 위기 상황입니다. 사람이 없는데 무엇을 합니까? 

둘째 기후변화에 따른 농업 대책이라든가, 셋째 쌀 수입 대책이라든가, 획기적인 농가 부채 대책 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농민들도 오염 없는 농산물을 생산해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등의 노력도 해야지요. 농업이 대기업농으로 자꾸 정책이 돼 가는 것 같은데 작은 규모의 소농업도 보호해야 합니다. 자본에 의한 기업농으로 자꾸 되어 가면 앞으로 농민, 농촌, 농업이 말살되는 거지요. 유기농산물로 도·농간 직거래해야 합니다. 지금도 많이 활성화되었지만, 정부에서 더욱 지원 사업으로 해야 합니다.


이: 농촌이나 농민계층이 사라지면 우리나라 장래는 암담합니다. 자꾸 외국 농산물을 수입하다 보면 기후변화에 자칫하면 식량부족이 올 수도 있어요. 우리 먹을거리는 우리 땅에서 어느 정도 생산을 해야 합니다. 더욱이 식량은 자급자족해야 합니다. 

지금 인공지능 시대에 모든 게 다 해결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되고, 농업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손길이 가야 해요. 농민계층이 사라지면 개천에 용이 없어지듯이 기본 먹을거리 생산자가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라 암담해집니다. 그래서 농민운동은 생명 살리기 운동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기후변화와 재난 시대에 우리 농업보호 정책은 더욱 필요하다고 봐요.


김: 예, 부족하나마 울진군 농민회 창립에 관한 초기 활동 등에 관해 잘 들었습니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먹을거리는 생명과 직결이 되기 때문에 누군가 땅을 갈고 식량을 생산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람이 석유나 컴퓨터 칩을 먹고는 살 수 없잖아요. 그러니 농민들이 땀 흘리는 수고로움을 우리는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앞으로 울진군 농민운동이 다시 새로운 운동 차원에서 시대에 걸맞게 부활하기를 기원하면서 오늘 두 분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농업을 지키고, 농민을 대변했던 우보(愚甫) 박기호 농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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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곡리 자택에서 부인과 함께(2024. 11)

 

전국농민회총연맹 경북도연맹 전부의장이자 초대 울진군농민회장을 지낸 박기호씨는 경북 울진군 북면 소곡리에서 태어나 줄곧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아온 울진 토박이 농민이다. 그는 울진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울진군청 공직에 있었다. 적성에 맞지 않아 공직을 그만두고 이후 북면 소곡마을에서 줄곧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농사를 지어가면서 복합영농인 축산으로 소를 기르기도 했다.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송이를 채취로 울진 북면 산간지대에 드나들었다. 70대 중반에는 백두대간을 종주하였다. 

그는 올해 82세이다. 필자는 그가 암 투병으로 고생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지난 11월 3일, 취재요청 끝에 의연한 모습으로 대담에 응해주었다. 


울진군농민회는 1988년 12월 31일, 울진 월변 예식장에서 울진 근현대사상 최초로 창립되었다. 박기호 회장은 1980년대 말 전두환 군사정권에 이어 노태우 정권 말기에 전국 각 지역에서 민주화 열기가 뜨거울 때 울진군 농민들의 의식을 깨우쳐 울진군농민회를 창립한 인물로 평가가 되고 있다.

 

그가 농민운동을 시작하게 된 간접 계기는 집안 구전으로 내려온 증조할아버지가 동학도였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전국 소값 파동으로 농민들의 정치, 경제, 사회의 이익을 대변할 조직된 단체가 필요함을 느끼고 농민운동에 뛰어든 것이 직접 계기가 되었다.


그의 집안 구전은 이렇다. 19세기 말, 증조할아버지가 울진 관가 아전들이 농민을 못살게 굴고 압박하기에 항거하는 뜻으로,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몰래 디딜방아에 넣고 찧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안 동네 주민이 관가에 증조할아버지를 고변했다는 이야기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관가의 체포를 걱정해 경북 의성 쪽으로 피신했다는 것, 그 이후는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해 어찌 되었을 거라고 추정할 뿐이다. 


남편이 행방불명되자 울진에 남은 증조할머니는 자식들을 고생고생하여 키웠다 한다. 그리고 당시 동학 신봉자는 역적이었다. 역적으로 몰리면 관노비로 가고, 집안은 멸문 폐가가 되는데 다행히 관노비는 면했다. 또한, 역적 집안은 죽어서도 정상적으로 묘를 못 쓰기에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가묘를 했다고 한다. 

이후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가 신림 대흥리 아구산에 증조모님 묘를 이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면 박 회장님의 내면 의식에는 증조부님의 동학 정신인 사회 불의에 저항하는 의식이 알게 모르게 작용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또 하나는 1986년도의 전국 소값 파동이다. 당시 정부에서 권장한 수입 외국 송아지를 각 농가에 권장해 길렀는데 소값이 폭락한 것, 울진 지역 농가도 마찬가지였다. 소값 폭락으로 전국에서 농민들이 소몰이 시위 등으로 정부에 항의하는 데모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그는『이래서는 안되겠다. 농민들도 자기 의사를 정치권에 주장하고 권익을 보호하는 조직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 당시 이용운, 김태규 등의 여러 젊은 농민과 토론 등을 통하여 울진군농민회를 창립할 것을 결의』하고 울진군농민회를 창립, 지역 농민운동과 시민운동 등에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초대 울진군농민회장, 경북농민회총연맹부의장, 울진참여자치연대공동의장, 울진핵발전소건설반대투쟁위원회 등에서 지역 시민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였다. 그는 경북과 울진에서 농민운동의 대부로 통한다. 

그의 농민운동에 대한 의지는 한발 더 나아가 정치권에서 농어민들의 의사를 대변코자 1995년 경북도의원 울진군 제1선거구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에 따르면 도의원이 되고자 한 것도 농어민들의 의사 대변과 농어민 삶의 개선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는 아쉽게도 낙선했다. 그는 낙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농민운동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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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 참배, 2009년 5월

 

한편으로는 필자가 당시 울진군농민회가 벌인 사업이 있다면 하나 소개해달라고 하자, 그는 농민들의 정치의식 고양 사업을 소개했다. 

당시 5공 청문회 스타였던 고 노무현 국회의원(이후 16대 대통령) 초청강연회를 울진읍에서 개최한 것이다. 

노 의원 강연회에서 가장 기억 남는 말씀은『남 싸우기 전에 내가 먼저 싸우자. 책을 읽고 이론무장도 하고, 그리고 단체를 조직하라는 것』등이라고 했다. 이후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을 이어 갔다고 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역대 대통령은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그 가운데 가장 민주적인 사고방식으로 서민을 위한, 서민의 열린 대통령이었다고 평가했다.


박기호 회장은 농민회 창립 이후 10여 년간 울진군농민회를 이끌었다. 이후 제2대 황용래, 제3대 이용운 제4대 김태규 등으로 울진군농민회를 이끌어 왔으나 2000년대 이후 유명무실한 지역 운동단체가 되어 갔음에 그는 안타까워했다. 

그 원인을 사회의 민주화 진전에 따른 민주 정부가 들어서서 농민들의 정책 요구사항을 어느 정도 농정에 반영되었다는 것에 안주한 것과 울진에서 강력한 리더십의 농민지도자가 부재한다는 것이다. 사회운동은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지도력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그가 느끼는 농촌 위기 상황에 대해서는 앞으로 농촌과 농업, 농민 계층이 사라지면, 식량 부족 등에 봉착될 것으로 걱정했다. 하지만 전국농민회총연맹, 경북도연맹이 건재하고, 농어민들의 정책요구로 농업 직불제, 농민수당 등이 일부 관철되어 시행되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농민운동은 생명 운동으로서 식량 위기,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방향으로 진화 발전되어 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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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호 회장이 펴낸 문집<함께 걸어온 대간길>

 

끝으로 박기호 회장은 지난 35년 전 초창기 1980년대 말 울진군농민회 조직을 위해 함께 뛰고 투쟁했던 울진의 전체 농민회원님들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지면을 통해 전한다고 했다.

그는 최근에『함께 걸어온 대간길』(우보선생대간기를 중심으로)이라는 문집을 펴냈다. 이 문집은 박기호 회장이 남한의 백두대간을 종주했던 산행기록이다. 2015. 3. 8.~2016. 11. 23.(2년간)까지 구간별로 사진과 함께 꼼꼼히 기록했다. 문집 발간을 축하하면서 그의 건강 회복을 기원한다. (김진문/시인), 연락처/박기호 010-5376-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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